От Ильича до Ильича
by sonnet 2006 이글루스 TOP 100 2007 이글루스 TOP 100 2008 이글루스 TOP 100 2009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 100 2011 이글루스 TOP 100
rss

skin by 이글루스
초대에서 데이트로
잘 모르던 이야기라서 재미있게 읽었음, 1910년에는 없던 풍속이 1924년엔 완전히 대세가 되었으니 전환에 단 15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움. 초대/방문(calling) 쪽은 오히려 19세기 문학작품에서 보던 것이라 익숙한 느낌

20세기 초, 새로운 스타일

1920년대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젊은 남자가 도시에 사는 여자한테 집에 찾아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 남자와 여자에 관한 다른 정보는 없고, 다만 여자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관점으로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1910년 이전에 태어난 미국인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들었을 것이다. 여자가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은 20세기 초 미국인들에게 많은 함의를 전달한다. 모자를 썼다는 것은 여자가 집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는 말이다. 여자 집을 방문한 남자는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어머니를 만나 다과를 같이하고, 여자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기대했을 것이다. 반면에 여자는 같이 바깥으로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이트를 기대했을 것이다. 결국, 남자는 여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느라 한 달 동안 저금한 돈을 몽땅 써버려야 했다.

20세기 초, ‘데이트’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연애가 생겨나서 옛날 방식의 연애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도시 생활의 한계와 각종 기회로부터 처음 생겨난 데이트는, 1920년대 중반이 되자 방문 중심의 과거 연애 시스템을 완전히 대체했다. 이는 미국의 연애 시스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데이트는 연애를 공적 세계로 이동시켰다. 연애의 공간은 가정집 거실과 공동체 모임에서 레스토랑, 극장, 댄스홀로 재배치되었다. 이 데이트 시스템의 등장으로, 이제 남녀 연인들은 사적 영역의 암시적 검열과 가족 및 지역사회의 눈초리에서 벗어나 공적 영역의 익명성을 얻게 되었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연애를 하게 되면서 연인들은 전에 없던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도시의 공적 세계에 진입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오락을 구매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데에도 돈이 들었다. 데이트 시스템의 근간은 돈, 다시 말해 남자의 돈이었다. 연애가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돈을 중심으로 연애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데이트 시스템은 연애의 남녀 권력 균형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방문에서 데이트로의 이행은 근본적이고 완벽했다. 미국의 연애를 연구하는 1950,60년대 사회과학자들은 데이트가 “전통적인 혹은 보편적인 관습이 아니라, 최근 들어 미국에서 처음으로 형성된 문화적 현상”이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납득시켜야 했다. 데이트가 남녀 사이에서 일어난 가장 좋은 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데이트가 미국의 청년문화와 결혼제도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데이트가 과거의 연애 방식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달콤하고 순수하고 우아한 제도라는 점에는 별 이견이 없었다. 고리타분한 일부 사회과학자들은 젊은 남자가 교회에서 집으로 마차를 태워 주겠다는 말이 프로포즈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남자가 저녁에 여자 집을 방문하여 가정의 따뜻한 품안에서 안전하게 연애가 이루어지던 “마차 끌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감상에 빠지곤 했다. “19세기 미국 사회에 기반을 둔 연애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분명하고, 모든 사람이 어떤 음악이 들려올지 어떤 스텝을 밟을지 다 아는 우아한 의례의 모습으로 각인되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이상화된 방식은 아니어도 이와 같은 연애 모델이 분명 있기는 했다. 그러나 데이트가 바꾼 것은 이 모델이 아니었다. 1910년경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미국인은 전체 인구의 45퍼센트에 불과했지만,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대격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미국인은 많지 않았다. 소박한 농촌 생활에 대한 환상을 가진 미국인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당시 연애 풍속을 주도한 것은 농촌지역의 자영농이 아니라, 상류층의 풍속을 모방하려 한 중산계급이었다.


상류층을 모방한 중산층 문화

19세기 후반, 비교적 균질한 새로운 중산층이 출현하여 미국의 국민문화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경제·운송·통신 분야에서 전국적 시스템이 확립되면서 등장한 중산층은, 국민문화 체제를 활발하게 형성하고 통제하고 소비하고 있었다.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 전국 규모 잡지는 백인 식자층에게 중산층 문화를 전파했다. 특히 여성잡지들이 문화 전도사 역할을 담당했다.

이 잡지들을 분명한 교훈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다양한 쟁점과 사건을 조명하는 종합지 성격을 띤 남성지와 달리, 영적·일상적 문제들에 대한 조언을 주로 담은 여성지는 규범적인 측면이 매우 강했다. 그런데 영적 문제에 대한 조언은 다소 모호한 수사에 그친 반면, 옷차림과 매너 문제에서는 명쾌한 어조를 띠었다.

이와 같은 잡지들 그리고 대중적인 에티켓 관련 책들에 소개되는 연애 풍속은 중산층 매너 코드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전 시대의 연애 풍속은 방문(calling, 물론 이 용어는 방문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다양한 행위들을 함께 지칭하는 말이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웃 마을 농장의 젊은이가 찾아와 집 앞마당에서 그 집 딸과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방문이고, 어떤 여성의 집에 찾아간 ‘사교계’ 젊은이가 그 여성이 “집에 있다”(또는 없다)는 대답을 듣고 연애의 성패를 가늠하는 것도 방문이었다. 그러나 중산층 문화를 주도한 사람들이 주로 모방하고 참조한 것은 사교계의 방문 예법이었다. 1900년경 발행부수가 1백만 부에 달했던 《레이디스 홈 저널》과 같은 잡지에 잘 드러나듯, 당시 사교계 예법을 가미한 방문 풍속은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모범으로 자리 잡았다.

대개 가정생활의 주도권은 여성의 몫이었으므로, 이와 같은 종류의 방문은 여성의 독자적 영역이라 칭할 수 있다. 여성들은 하루 또는 며칠을 방문 기간으로 정한 다음 집에서 방문하는 남자들을 맞이했다. 이 기간이 지난 후에는 답례 방문을 가기도 했다. 가정부가 문을 열어 주면 찾아간 남성은 초대 카드를 제시하는데,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오늘은 어렵겠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거절의 횟수가 잦아지면, 방문자는 곧 자신의 사회적 신분의 한계를 인지했다. 그럼으로써 집에 있는 여성은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의 계급 변동과 확장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압력과 계급적 혼란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통상 남편의 지위가 한 집안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었지만, 사회적 관습과 관련된 의례에 한해서는 부인이 남편을 대신하고 남편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미혼 남성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여성 주도적 체제를 따라야 했다.

방문 중심의 구애 시스템은 지역마다 다르고 그 지위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비슷했다. 미혼 여성은 적령기에 도달하거나 가족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첫 번째 ‘방문 시즌’을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남성 방문자를 받을 자격을 얻었다. 처음에는 어머니 또는 보호자가 젊은 남성을 초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시즌을 몇 번 거치고 미혼 여성이 나름의 자율성을 확보하게 되면, 댄스나 저녁 식사 또는 가벼운 여흥 모임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안면을 튼 미혼 남성에게 방문 초대를 할 수 있었다. 여흥 모임에 초대받은 미혼 남성은 누구든 감사의 표시로 초대한 어머니와 딸의 집에 방문할 자격을 획득했다. 그런 영광을 누리지 못한 젊은이들은 여성 측의 사전 허락을 받았다는 전제 하에 친구 또는 여성 쪽 친척들과 함께 방문할 수 있었다. 반면, 여자 쪽이 원치 않거나 수준이 안 맞는다고 생각되는 방문객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돌려보냈다.

방문은 그 자체로 매우 복잡한 이벤트였다. 수없이 많은 규칙들이 알게 모르게 작동했다. 초대와 방문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며칠이 좋은지(대략 2주 이내가 좋다), 다과를 준비해야 하는지(상류층 사교계 또는 준사교계에 속한다면 안 해도 된다. 그러나 뉴욕이나 보스턴 같은 도시의 ‘엘리트’ 집단에 속하지 않는 여성들은 작은 케이크와 얼음 음료 또는 커피 아니면 뜨거운 초콜릿과 샌드위치를 준비할 수도 있다), 보호인을 동반해야 하는지(첫 방문에는 어머니와 딸이 모두 나와 손님을 맞이하지만, 지나친 보호는 남자에게 환영 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언제 집을 나와야 하는지(해당 여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방문객을 따라 문 앞까지 가지 않아야 하고, 남자가 코트를 입고 있을 때에는 말을 걸지 말아야 한다”) 등등 지켜야 할 규칙이 제법 많았다.

지난날을 그리워한 어느 20세기 중반 작가가 말한 대로, 이 모든 ‘적절한’ 절차들은 그 사람의 올바른 예법, 가정교육, 사회적 배경을 알아보는 단계였다. 조언 칼럼과 예절 교육서들에 따르면, 가정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의 매너는 바로 그러한 절차들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는지로 평가받았다. 그에 어긋나는 행동은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음을 뜻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뀔 즈음, 가정교육이 부족한 사람들도 어떻게 해서든 예절 교육을 받고 싶어 했다. 여성잡지의 조언 칼럼들은 미묘한 방문 에티켓의 문제들을 물어보는 시골 소녀와 무식쟁이의 편지를 정기적으로 게재했다. 젊은 남성들도 같은 조언자에게 방문에 대한 질문을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여성들의 기대가 남성들에게 적지 않은 압박으로 느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령 1907년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는 방문과 관련된 세세한 항목들을 설명한 ‘남자들을 위한 에티켓’이라는 기사를 비중 있게 다룬다. 20세기 첫 10년간까지도 방문이라는 엄격한 규칙 시스템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계층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회적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던 관습이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데이트 시스템이 부상하고 있었다. 1910년 중반에 중산층 대중이 ‘데이트’란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4년, 점잖은 중산층 관습의 보루라고 할 수 있던 《레이디스 홈 저널》마저 이 용어를 (그 뜻은 설명하지 않고 인용 부호만 붙인 채로) 여러 차례 언급했다. 데이트는 당시 이국적 존재였던(실상은 중산층 출신인) 여대생 사교클럽 회원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였다.

[…]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불쌍한 남자가 도시에 사는 여자 집에 방문했다가 데이트 비용을 덤터기 쓰는 1924년 무렵이 되면, 데이트는 확실히 방문 시스템을 대신하는 중산층 문화의 일부로 자리를 잡게 된다. 독자들은 ‘방문’이라는 단어만 보고도 그게 무슨 말인지 다 안다는 듯 미소를 지었을 테지만, 그 남자의 불쌍한 처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공감하지 않았을 것이다. 1924년이라면 당연히 방문 관습을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다.

Bailey, Beth L. 1989. From Front Porch to Back Seat: Courtship in Twentieth-Century America. Illustrated edition.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백준걸 역. 2015. 『데이트의 탄생 : 자본주의적 연애제도』. 엘피 pp.43-50)
by sonnet | 2020/08/23 21:15 | 문화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sonnet.egloos.com/tb/7498247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at 2020/08/24 11:1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paro1923 at 2020/09/09 17:36
영국 젠트리들이 19세기에 메이드나 급사들을 대거 고용하던 것이나, 조선 후기에 부자들이 뼈대있는 집 제삿상 따라하던 일 등이 생각나는군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