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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활동은 바꾸어 말하면 호신술"
신화의 붕괴

2001년 8월 우정은 계속해서 체포되는 자가 나오는 이상 사태에 빠졌다. 그 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는 수상에 취임한 뒤 우정 사업의 비대화와 이권 문제에 메스를 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정 측은 선거에서 단결력을 보임으로써 실력을 과시하려 했다. 그로 인해 7월 말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는 공무원 신분인 우정 직원이 금지된 선거 활동에 매진하기도 했다.

8월 1일 추교우편국(교토 시)의 총무과장과 신오사카우편국(신오사카 시)의 부국장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특정우편국장의 체포가 이어졌고 8월 13일까지 우편국 간부 일곱 명이 공직선거법 위반 용의로 붙잡혔다.

“참의원 선거는 우리에게 있어 참패였다.” 선거 직후 전국특정우편국장회의(전특) 간부는 그렇게 패전의 감상을 말했다. 전특이란 전국 1만 8,800여 개에 달하는 ‘동네 우편국’의 국장이 모이는 임의 단체였다. 그들은 자민당의 최대 지지 단체로 지역에 깊은 인맥을 가지고 있는 탓에 100만 표를 모을 수 있다고 평가되던 단체였다.

어떻게 100만 표나 되는 것일까? 1980년 전특 고문인 나가타 유지長田裕二가 참의원 선거에서 획득한 103만 표가 신화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뒤 참의원은 비례대표제가 되었고 각 정당명으로 투표하게 되면서 특정 지지 단체의 실력도 발휘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2001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비구속명의식이 되어 20년 만에 후보자의 득표수를 공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100만 표가 모이지 않는다면 “전특 신화는 허상이었다.”라고 말을 들을 수도 있었다.

우정 간부 OB인 고소 겐지高祖憲治를 지원, 실제로 47만 표를 획득함으로써 당선시켰다. 자민당 후보자 중에서는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지만 목표였던 100만 표보다는 훨씬 모자랐고 ‘전특 100만 표 신화’는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수의 체포자가 나오는 사태까지 초래하고 말았다. 결국 고소는 책임을 지고 사직원을 참의원장에게 제출하게 된다.

거대 이권

선거 전반전 특정우편국장에게는 ‘한 사람당 60표’라는 집표 목표가 부여되었다고 한다. 이 숫자를 모두가 달성하면 고소의 득표는 가볍게 100만을 넘을 것이었다. 그러나 선거전이 시작되자 도시부에서 집표에 고전했고 목표는 ‘한 사람당 80표’로 상향 조정되었다.

고소의 출신지 오카야마 현에는 ‘한 사람 당 100표를 모으자’라고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오카야마 현 출신의 자민당 의원으로는 ‘고이즈미 개혁의 저항 세력’이라 불리는 하시모토파의 영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 우정 사업을 관할하는 총무대신 가타야마 도라노스케片山虎之助 등의 인물이 포진하고 있었다. ‘우정족의 보스’라고 불리는 우정사업간담회 회장 노나카 히로무野中広務의 세력권인 교토 부에서도 대량 득표를 목표로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다. 우정 관료들도 표 모으기에 분주했다. “지방 우정국의 총무가 지령을 내려 휘하의 보통우정국에서 표를 모았다.”라고 한 보통국의 간부는 밝혔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왜 우정은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행동한 것일까? 그 원인에는 거대한 이권 구조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정국장은 국가공무원인 동시에 사실상 세습제로 이어지고 있었다. 특정국 제도가 유지되면 대대로 가업으로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형태상으로는 채용 시험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외부자가 시험을 치르기는 어려웠다. 간토의 우정 관계자에 따르면 세습할 예정인 아이들이 모인 ‘후계자 육성회’가 전국 각지에 있다고 한다. 국장 취임 몇 년 전부터 참가하여 1년에 2, 3회 공부하는 모임에 참가하는 것이다. 사실은 이 모임에 참가해야만 특정국장 시험의 ‘지원표’를 교부하는 시기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지원표 교부 시기가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정보인 만큼 그 모임에 참가하지 않으면 사실상 시험을 치를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수험표를 받으러 지방 우정국으로 가면 전특의 말단 조직인 ‘도회’의 책임자가 동행한다. 그리고 우정국 담당자 앞에서 도회장이 “잘 모시겠다.”라고 선언한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배타적 수험 제도에 따라 국장이 된 뒤에도 조직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수험까지 도달하면 합격할 확률은 높았다. 1999년도 긴키우정국 관내에서 실시된 특정국장 선고 상황에 관련된 자료에 따르면 수험자 114명 중 합격자는 109명, 합격률은 96%에 달했다.

이러한 임용 형태는 선거 활동에도 유효했다. 폭넓게 공모하여 실력 위주로 등용하면 지역과 인연이 없는 인재가 국장이 되는 케이스도 증가한다. 또한 정치적 사상도 다변화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전특이 자랑하는 조직적인 지역 밀착형 선거 활동이 기능하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이다.

자민당이 사실상의 세습을 묵인하고 있었던 것도 선거에서의 집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공금으로 불꽃 세트

또한 특정국에는 거액의 자금이 흘러들어 갔다.

‘도절渡切 경비’라 불리는 것으로 특정국에 ‘금일봉’처럼 지급되었으며 기본적으로 국장의 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었다. 이 제도는 같은 시기 문제가 된 외무성의 ‘외교기밀비’와 비슷한 구조였다. 하지만 2000년도 예산에서 외교기밀비가 55억 엔이었던 것에 비해 특정국의 ‘도절 경비’는 무려 1,000억 엔에 이르렀다.

연간 지급액은 100만 엔 정도인 국이 많았지만 간부직에 취임한 국장이 있는 특정직에는 별도로 경비를 지급하기 때문에 총액 1,000만 엔이 넘는 돈이 지불된 경우도 있었다.

이런 돈의 사용처는 무엇이었을까? 센다이 시민 옴부즈맨이 시내 여섯 곳의 특정국을 대상으로 2000년도분 도절 경부에 대한 정보 공개를 청구한 적이 있었다. 종이 박스 하나분이나 되는 막대한 영수증의 복사본을 살펴보니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것이 계속 나왔다.

술집과 초밥집, 라면집 등 음식비로도 사용되었고 불꽃놀이 세트라든지 영양제, 커피 등의 구입에도 사용되었으며 휴대전화의 통신 요금까지 지불되었다.
“요즘 세상에 공금으로 음식을 사먹는 공무원은 특정국장 뿐 아닌가?” (센다이 시민 옴부즈맨 이사장 구라야마 쓰네스케庫山恆輔)

게다가 영수증 등, 서류의 보관 기간은 불과 1년이었다. 센다이 시민 옴부즈맨이 요구한 1999년의 자료는 “이미 처분되었음”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우정감찰국의 종합 감사는 2~3년에 한 번밖에 없기 때문에 “문서가 없는데 어떻게 체크했는지 모르겠다.”(구라야마)라는 의문이 생긴다. 게다가 이러한 식대 및 물품 구입이 어떤 목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명확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도절 경비가 선거 활동에 사용된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에 간토 지방의 한 특정국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외부인과의 식사는 업무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 선거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이 발언은 특정국장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특정국장으로서 지역에 밀착하면 그만큼 더 집표력이 높아지는 것이다. 다양한 권익이 얽혀 있는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국장은 정치 활동은 우정 3사업에 비유해 ‘제4사업’이라고 부르며 필사적으로 표모으기에 나섰던 것이다.
“선거 활동은 바꾸어 말하면 호신술이다. 법적으로 문제가 있을지 모르지만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전특의 전직 간부는 그렇게 표현했다.

내부 분열

그러나 현장에서는 비대화한 우정국의 제도에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과거 특정국장의 대부분은 지역의 명사로 마을의 중심이 되는 자신의 토지에 우정국을 세웠다. 그렇지만 특정국장이 우정국의 담당 지역 내에 사는 비율은 40% 정도로 내려간 상태였다. 과반수는 직장인처럼 ‘통근 국장’인 것이다.

세습이 감소되는 일도 전특을 흔드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요즘 똑똑한 아이들은 특정국장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교토 고마 우편국장인 아시다 마사노리芦田昌徳는 그렇게 말했다. 자산가의 자제라면 더욱 더 ‘명예직’이 아니게 된 특정국장을 경원한다. 그로 인해 특정국장과 지역과의 관계는 점차 연대가 약해지게 되었고 바로 집표력의 저하로 이어졌다.

결속력이 약한 전특에서는 내부에서 추악한 권력 투쟁도 일어났다. 적대 세력을 내쫓기 위해 몰래 감찰국에 조사를 의뢰하기도 하고 익명의 투서를 보낸다.

또 한 가지 전특이라는 조직을 흔든 문제가 있었다. 정치가뿐 아니라 관료들도 거대한 조직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관료의 출세를 위해 특정국이 이용되고 있다. 매년 매출을 올리라는 것은 요즘 시대로서는 불가능하다.” (긴키 지방의 특정국장)
“당신네는 우표 판매가 부진하니까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간토의 특정국장은 거리로 나가 기념우표를 판매해야만 했다. 그러나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

“원래 우표라는 것은 국에서 가지고 있으면서 파는 것이다. 고객을 따라다니며 사달라고 한들 필요가 없으면 아무도 사주지 않는다.”

1999년부터 2000년에 걸쳐 「20세기 디자인 우표」 시리즈가 17회에 걸쳐 발표되었고 많은 특정국이 판매 할당량 달성 때문에 고통받았다. 우편국장과 국원이 사비를 들여 사는 사태도 있었다.

이런 관료 지배가 가능한 것도 국원의 인사권을 쥐고 있고 또 불투명한 자금의 분배권도 쥐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거액의 도절 경비의 효력이 큰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는 것은 고령의 임원직들이 중심이 된다.

임원직이 연공서열로 결정되는 전특에서는 연령층에 따라 의식에 커다란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고 도시와 지방에도 커다란 균열이 생긴 상태다. 그런 모습은 자민당의 상황과도 닮아 있다.

시대에 뒤쳐지는 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자민당이 그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이었다. 전특은 그 ‘은혜’를 표로 갚아왔다. 그것은 서로의 팽창을 도와주는 구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거대한 조직과 이권을 지켜준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참의원 선거에서의 선거법 위반 사건은 전특이 내부에서 붕괴되기 시작하는 흐름을 만들고 말았다. 긴키 지방 경찰의 특정우편국장 조사 과정에서 어느 전특 간부는 “고소 겐지에 대한 지지 활동을 지시한 적 없다.”라고 관련을 부정하는 발언을 계속했다. 이렇게 책임을 회피하는 자세에 많은 젊은 우편국장들이 반발했다.
“이제 전특은 망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회비와 선거비로 거액의 돈을 지불할 필요도 사라진다.”

이렇게 되자 우정민영화라는 흐름은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자민당 내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가타야마 총무상은 민영화론으로 기울었다.”

우정간담회의 멤버 중 한 사람은 선거 뒤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2001년 8월 총무성은 우정사업연구회의 구성원을 결정했다. 거기에는 민영화 찬성론자라 불리던 재계인과 학자의 이름이 있었다. 총무성은 당초 구성원을 민영화 반대론자로 구성하려고 했으나 그 안을 가타야마가 거부한 것이었다.

2005년 고이즈미는 우정민영화 법안을 제출했고, 자민당의 우정족과 대립하게 되었다. 참의원에서 자민당 의원 22명이 반대해 법안이 부결되자 의회는 해산되었다. 고이즈미는 반대표를 넣은 의원을 공인하지 않고 선거구에 ‘자객’이 되는 후보를 내보냈다. 그렇게 ‘우정민영화를 묻는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때 우정민영화는 사실상 결정되었고 거대한 이권을 흡수해온 특정국장 제도는 사라지게 되었다.

金田信一郎. 2017. 『失敗の研究 巨大組織が崩れるとき』. 東京: 日本経済新聞出版.
(김준균 역. 2018. 『실패의 연구 : 거대 조직이 무너질 때』. 1판 서울: AK STORY. p.239-47)


by sonnet | 2020/06/17 19:57 | 정치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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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paro1923 at 2020/06/17 20:24
개혁을 저지하는 가장 노골적인 방법이 "실력 행사"인데, 결과적으로 그것에 실패하면서 허상 아래 숨겨져 있던 병폐들마저 드러나게 되었군요.
Commented by 레이븐가드 at 2020/06/17 20:36
우체국 맞나...? 무슨 이권이 있길래 저렇게 강했죠
Commented by paro1923 at 2020/06/17 23:28
"돈"이죠. 우리나라 우체국과 마찬가지로 예금도 취급했는데, 민영화 전엔 그 규모가 일본 전체 가계 저축의 20% 정도나 되어 "세계 최대 수신고 보유 은행"이었다고 하는군요. 즉, 그만큼 돈이 있는 상태에서 정부 관료의 입김이 직접 미친다면 뭘 해먹어도 단단히 해먹을 수 있는 상태죠.
Commented by BigTrain at 2020/06/18 11:15
고이즈미가 정권 명운 걸고 개혁을 추진할 만 하네요.
Commented by 서산돼지 at 2020/06/18 11:55
많은 일본 노인들이 연금을 우체국에서 받는데, 통장을 아예 우체국에 맡겨놓고 집배원들이 돈을 인출해서 편지배달할때 가져다 주었다고 합니다. 집배원들이 이번 선거에 누구 아들 아무개가 나오는데 똑똑하던데요 하는 식으로 선거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Commented by 구들장군 at 2020/06/20 10:49
국가공무원이 세습이 가능하다니.... 정말 충격적입니다.
Commented by 함부르거 at 2020/07/17 15:59
특정우편국이란 게 우리로 치면 우편취급소 같은 거였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각 지역에 정식 우체국을 설립하기엔 국가예산이 부족하니 지역 유지들한테 땅이나 건물을 기부받고선 '특정우편국장'이란 직함을 하나씩 달아 준 거죠. 이게 전체 우체국의 3/4 정도나 됐다고 하네요.

시작을 이렇게 해 놓으니 어느 정도 기득권을 인정해 줄 수 밖에 없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저렇게 파국이 나게 된 거죠.
Commented by sonnet at 2020/07/17 22:33
함부르거 / 말씀하신 요소는, 한국으로 치면 사립학교가 이런 느낌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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