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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과 준수 가능성
아래는 신입이 들어왔을 때, 교육자료로 쓰는 텍스트 중 하나.

사전에 다음 두 가지의 의미에 대해 찾아보고, 발표자료를 준비해 오라고 한 다음,

아래 텍스트를 현장에서 "소리내어" 읽게 한 다음, 준비해 온 자료를 발표하도록 한다.

미래를 예견하고 조정하기 위해 사태를 올바르게 파악하려면 이런저런 특정한 결과를 좌절시키는 요소에 대해서도 파악해야 한다. 카드 게임에서 산더미 같은 돈을 딴 뒤에도, 계약이나 협약에 서명을 하고 악수를 한 뒤에도 실제로 그 일이 이행될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어기지 못할 서약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아무리 진지하게 체결된 거래와 약속일지라도 와해될 이유는 수없이 많다. 경제학자들은 계약을 강요할 때 생기는 문제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식별표를 고안해 냈다. 즉 어떤 계약이 “재협상의 가능성이 금지된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2] 미국에서는 이 질문이 소송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예전에 나는 전력 회사 두 곳이 관련된 소송에 관여한 적이 있다. A전기회사는 생산된 전력의 잉여분을 다른 주에 있는 B전기회사에 팔았다. 그런데 계약이 체결된 뒤에 전력의 가격이 치솟았다. 계약서에 의하면 원래의 낮은 가격으로 송전되어야 했다. 전기 판매자인 A는 약속된 전기를 구매자 B에게 보내지 않고 값을 더 올려달라고 했다. 구매자는 계약서에 시장 여건의 변화에 따른 가격 변화가 인정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당연히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 점은 구매자와 판매자가 계약을 체결할 때 받아들이기로 동의한 위험요소였다. 판매자는 고발당했지만 열심히 방어했으므로 양쪽 모두 소송비용이 한없이 늘어났다. 통렬한 고소고발이 오가는 동안 판매자는 구매자에게 새로 협상하자고 계속 제안했다. 그 협상안에는 시장 가격의 극단적인 변화를 적정하게 수용하도록 계약을 재조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구매자는 이를 거부하고 계약서대로 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정당한 요구였지만 구매자 역시 절실히 전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구매자는 다른 곳에서 판매자, 즉 내게 도움을 청한 A전기회사가 제시한 것보다 더 나은 가격으로 전기를 사올 수도 없었다. 내 의뢰인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결국 필요한 전기를 자기 고객들에게 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비용 부담이 너무 커졌기 때문에 구매자는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인간 본성은 심통 사납고 탐욕스럽다. 게임이론가들이 생각하는 인간 본성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열심히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계약서가 있고 그 계약서의 조항도 충분히 명백하지만 그 이행을 요구하는 싸움의 비용이 너무 커진 것이다. 구매자가 아무리 이 사건을 법정에 들고 가서 싸울 용의가 있다고 선언하더라도 판매자는 그것이 허세임을 알고 있었다. 또 계약상 재협상 가능성이 아예 막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 계약은 취소되었고 새 계약이 체결되었다. 원래 계약은 시장 가격이 계약서에 설정된 가격과 크게 달라지더라도 구체적으로 명시된 기간 동안은 설정된 그 가격에 전기를 팔겠다는 (혹은 사겠다는) 확고부동한 판매 공약이 아니었다. 미국의 사법체계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이지만 정의는 원고와 피고 중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더 큰 쪽에 굴복한 것이다.

de Mesquita, Bruce Bueno. 2009. The Predictioneer’s Game: Using the Logic of Brazen Self-Interest to See and Shape the Future. New York: Random House. (김병화 역, 『프리딕셔니어 미래를 계산하다 』, 1판,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0. p.84)
by sonnet | 2020/04/02 16:12 | 정치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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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파리13구 at 2020/04/02 23:59
국제법 사상에서도, 신의성실의 원칙 (pacta sunt servanda)은 사정변경의 원칙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Commented by sonnet at 2020/04/23 14:13
저는 신입에게 모든 계약은 본질적으로 modus vivendi라는 것을 체화하도록 가르치는 쪽입니다.
Commented by 파리13구 at 2020/04/23 16:21
1946년 조지 캐넌은 소련은 미국과는 영구적 모두스 비벤디가 있을 수 없다는 믿음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세력이라 했다고 합니다. ^^

모두스 비벤디라는 것의 성격 자체가 영구적일 수 없다고 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20/04/24 19:41
그런 냉전의 전사 같은 자들을 육성해 내려는 겁니다 ^^
Commented by 파리13구 at 2020/04/24 20:33
휘하에
조지 캐넌, 폴 니츠, 헨리 키신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같은 전사를 두시기 바랍니다.

미국 대통령 부럽지 않습니다. ^^
Commented by 얼음칼 at 2020/04/03 16:40
국내 계약의 대부분은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계약 불이행시의 손해배상액을 예정해서 계약서의 항목으로 넣어두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소송비용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는 않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20/04/23 14:10
제가 현업에서 본 한국 계약서들은 보통 세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1) 계약서가 발생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커버하지 않음 (계약의 불완전성)
2) 계약상 위약벌은 대개 짜잘한 이유로 위반을 감행하지 못하게 상징적으로 좀 큰 금액을 적는 경우가 많아서, 작은 문제는 커버되나 진정 큰 문제들은 판을 엎을 충분한 동기가 됨
3) 법이 특수 상황에서 가치의 변동, 또는 시간의 중요성을 잘 방어해주지 않음
Commented by 6호선더비 at 2020/04/06 15:59
보통은 저럴 때를 대비해서 계약이행보증증권 등을 수령해 놓지요..

그리고 저런 일을 벌이면 향후 영업에 애로사항이 심할 텐데

크게 한탕 해먹고 장사 접겠다는 건가 봐요
Commented by sonnet at 2020/04/23 14:03
러시아가 매년 1월1일에 가스관을 놓고 "잠궈라밸브" 한번씩 해주는 그런 느낌 아니겠습니까. 거기도 다 장기공급계약으로 묶여있는 것이지만요.
Commented by 파파라치 at 2020/04/28 09:52
그나마 미국 같은 나라는 소송 비용(그리고 기간)이 문제이지, 소송 결과 자체는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나오리라고 기대할 수나 있지요... 개발도상국에서는 그조차 안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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