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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 하우스 규칙
사이다하우스 규칙
  1. 술을 마셨다면 분쇄기나 압착기는 운전하지 마십시오.
  2.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양초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3. 술을 마셨다면 지붕에 올라가지 마십시오. 특히 밤에 조심하십시오.
  4. 지붕에 올라갈 때 술병을 가져가지 마십시오.


“프로젝트와 무관한 사람들이 만든 규칙을 프로젝트 팀원들이 무시하거나 우회한다.”

존 어빙의 소설, 『사이다 하우스The Cider House Rules』에서는 사이다를 만들 사과를 따려고 시즌마다 과수원에 모여드는 사과따기 일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과를 따는 몇 주 동안 일꾼들은 낡은 사이다 건물에서 생활한다. 주인인 올리브는 ‘사이다 하우스 규칙’을 종이에 타자기로 쳐서 집 안에 붙여놓는다. 신참 일꾼 중 하나가 일꾼들이 규칙을 공공연히 무시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베테랑 일꾼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신경 안 쓴다네. 매년 올리브는 규칙을 걸어놓고 매년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지.”

사이다 하우스 규칙은 사이다 하우스에 살지 않는 (그리고 살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 사이다 하우스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해준 규칙이다. 대저택에 사는 올리브는 열대야에 시원하게 휴식을 취할 곳이 지붕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지붕에서 한 잔 하는 즐거움이 일꾼들의 일상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부적절한 규칙을 내걸었으므로 무시를 당해도 할 말이 없다. 멀찍이서 남들에게 규칙을 정해주었으니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소리나 매한가지다.

이와 비슷하게 사이다 하우스 규칙을 정하는 조직이 간혹 있다. 프로젝트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프로젝트 팀원들에게 규칙을 정해준다. 흔히 프로세스 개선 그룹, 표준 제정 그룹, 품질 부서 등이 업무 프로세스나 수행 방식을 명시한다. 그 외에도 팀원들이 사용할 도구를 정하거나 결과물이 따라야 할 표준을 만든다. 대개 그들은 업무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업무 방식을 정해주는 외부인에 불과하다.

프로세스, 방법론, 도구를 선택하는 업무만 맡은 사람이 있다면 이 패턴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 사람은 프로젝트 업무에 손대지 않는다. 단지 어떻게 하라고 말만 한다.

외부인이 업무 방식을 결정할 적임자인 경우는 드물다. 특히 업무를 잘 모른다면 무의미한 잡무를 필요한 규칙인 양 내놓기 십상이다. 당연히 외부인은 (자신의 안전을 포함하여) 모든 가능성에 철저하게 대비하려 애쓴다. 뭔가 잘못되어도 남들이 자신과 자신이 만든 규칙을 비난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게다가 규칙이 어떤 면에서도 부족하다는 평가를 피하고 싶어한다.

당연한 소리지만,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질서가 있다. 규칙도 있고 프로세스도 있다. 하지만 규칙을 만드는 사람이 그리는 세상과 규칙을 따를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한다. 프로세스 전문가나 품질 전문가가 프로젝트 정식 팀원이거나 적어도 프로젝트 업무에서 실질적으로 관여하는 사람이면 가장 좋다. 이 조건에 맞는 전문가라면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여 팀에 적합한 프로세스를 정의할 적임자다. 모든 규칙이 프로젝트에 맞는 규칙인지 검토할 책임은 규칙을 만드는 전문가에게 있다.

규칙이 적합하다면 프로젝트 팀은 그 규칙을 따른다. 유용하고 합당하고 합리적인 규칙이라야 팀이 따른다. 하지만 현실과 규칙이 다르다면 현실이 이긴다. 이때 사이다 하우스 규칙이 탄생한다.

Demarco, Tom et al. 2008. Adrenaline Junkies and Template Zombies: Understanding Patterns of Project Behavior. 1st ed New York, NY: Dorset House. (박재호, 이해영 역, 2009. 『프로젝트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 프로젝트 군상의 86가지 행동 패턴』. 서울: 인사이트. pp.160-163)

by sonnet | 2020/01/07 13:07 | 과학기술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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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타누키 at 2020/01/07 13:16
처음엔 당연한걸 왜 안지키나 했네요. ㄷㄷ
Commented by 파파라치 at 2020/01/07 13:59

요즘엔 본인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저런 규칙을 잘 만들더군요.

문제는 (아주 가끔은) 그런 사람들이 맞기도 한다는거.
Commented by 일화 at 2020/01/07 22:58
지금 하는 일이 저런 규칙을 지키라고 말하는 입장이라 공감이 되네요.
Commented by dd at 2020/01/07 23:44
몇년에 걸쳐서 일하면서 만들어놓은 나름의 (지저분한) 체계를 더럽다고 깔끔하게 만들라고 하는 요구때문에 거~의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저로서 굉장히 와닿네요. 아니 포스트잇을 필요하니까 붙여놨지 보기 더러우라고 일부러 붙여놨겠어? ㅋㅋㅋㅋ 갑자기 빡치네요
Commented by at 2020/01/08 13:06
현장과 괴리된 규율의 문제점을 보여주는군요
Commented by vict at 2020/02/10 13:56
저런 규칙들이 나중에 맘에안드는 인물이나 집단을 공격하거나 쳐낼때에 명분으로 쓰이죠. 감사 나와서도 저런거 트집잡고요.
Commented by sonnet at 2020/02/10 15:07
네. 맞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국식 규정집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1) 규정집을 외부 전문가들이 한 편의 논문 쓰듯이 완성하고,
2) 실무는 규정집을 한 번 본 후 창고에 쳐박고 자기들 하던 대로 하고
3) 사고가 나면 감사가 떠서 켸켸묵은 규정집을 꺼내 실무자들의 목을 친다.
4) 실무는 빈자리를 채운 후 투덜거리면서 2로 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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