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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미군정 3년간의 중경임시정부에 대한 당대인의 관점
이 글은 (단독으로 완성을 목적으로 한 글이 아니고) 간단한 의견과 그렇게 생각한 근거를 기재한 메모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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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정국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순수하게 도의적인 계승은 사실 심각하게 논의되지 않았고 독립적인 주제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중경임시정부와 그 구성원들이 멀쩡히 살아 있었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세력이었기에, 이들이 향후 건설될 민족국가에서 어떤 지위와 권력을 차지하느냐가 첨예한 현실정치문제였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도통(?)은 현실정치에서 중경임정세력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놓고 동원되는 도구(명분) 중의 하나였다.

중경임시정부를 떠받들어 새 나라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임정봉대론이라고 불리는데, 초기에는 한민당+중경임정계의 논리였고, 국내정치 분화가 진행되고 나서는 이승만과 한민당이 떨어져나가 한독당의 주장이었다가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좌파 계열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했다.

한민당이 중경임시정부 추대운동을 벌인 데 대해서는 일제시기의 행위 때문에 민족한테 내세울 것이 없어 정치적 상징조작으로 중경임시정부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이 통설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 하나만으로 한민당이 중경임시정부 추대운동을 벌인 것은 아닌 것 같다. 보수적 정치세력인 한민당이 받들어 내세울 수 있는 우익 독립운동세력은 한독당이 주류인 중경임시정부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점 못지 않게 앞서 살펴본 대로 송진우측이 8·15 이전부터 중경임시정부를 추대하려고 했던 데에는 중경임시정부에 대해 과대하게 기대를 하여,[88] “해외 임시정부가 들어와 정권을 집행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상당히 작용을 하였다. 송진우측은 실제로 중경임시정부가 연합국한테 승인을 받았고, 수만의 독립군을 거느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가능성도 초기에는 어느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한민당의 중경임시정부 추대의 이유는 9월 8일 나온 한민당 발기인 성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오호라 사도여. 군등은 현 대한임시정부의 요인이 기미독립운동 당시의 임시정부의 요인이었으며, 그 후 상해사변, 지나사변, 대동아전쟁 발발 후 중국 국민정부와 미국정부의 지지를 받아 중경, 워싱턴, 싸이판, 오키나와 등지를 전전하여 지금에 이른 사실을 모르느냐. 동 정부가 카이로회담의 3거두로부터 승인되고, 상항 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군등은 왜 일부러 은폐하려는가.

즉 중경임시정부는 기미운동 당시의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받았고 연합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았으며, 중국, 미국, 싸이판, 오키나와 등지에서 독립을 위해 혁혁하게 싸웠기 때문에 중경임시정부를 추대하여야 한다고 중경임정 추대의 이유를 밝혔다. 연합국이 중경임시정부를 승인하였다는 것은 이 이후에도 계속 주장되었는데, 그것은 이승만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이승만은 귀국한 이틀 후인 10월 18일 한민당 선전부장 함상운에게 “중경임시정부는 이미 중·불 등 연합국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미국도 미구에 승인할 것을 언명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여, 한민당은 즉시 이를 삐라로 만들어 살포하였다. 한민당 등 우익측은 후에 반탁투쟁에서도 그러하였던 것처럼, 중경임정을 환영하는 자는 애국자로, 반대하는 자는 ‘비국민’처럼 선전하였고, 중경임정 추대를 반대한다고 하여 여운형과 건준을 몹시 비난하였다.[92]

[88] (…) 중경임시정부는 스스로를 과대선전하였는데, 그것은 귀국 후에도 나타나, 귀국한 다음날의 기자단 회견에서 엄항섭은 광복군의 실세는 400~600명 밖에 안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총세가 1만이 된다고 말하였다.
[92] 이만규, 앞책, 227쪽. 이만규는 허언과 중상모략으로 중경임정 추대운동을 벌여 우익이 민중을 속였다고 주장하였는데, 당시처럼 정보가 차단된 사회에서는 중경임정에 대한 과대선전은 민중한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서중석,1991:269-270]


국내에 중경임정의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아 과장되어 있었고, 거기 편승해야 하는 한민당 같은 국내우익의 사정도 있었던 것이다. 한 편 좌파의 반대논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 추대에 대한 좌익의 반발 또는 반대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공산당은 해방 직후에는,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철쇄하에서 악전고투하며 구사일생해온 것은 노농대중이고, 이 노농대중이 금일 국가적 독립과 민족적 해방의 주체자가 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국내 혁명세력을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두고, 인민공화국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여운형은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중경임정 추대 운동을 반박하였다. 그는 임시정부는 30년 간 해외에서 지리멸렬하게 유야무야 중에 있던 조직이니 국내의 기초가 없어 군림이 불가하다는 점, 연합국한테 승인되지도 될 수도 없다는 점, 미주, 연안 시베리아, 만주 등지의 혁명단체 중에는 임시정부보다 몇 배가 크고 실력 있고 맹활동한 혁명단체가 있으며 그네들 안중에는 임시정부가 없다는 점, 국내에서 투옥되었던 혁명지사가 다수인데, 안전지대에 있었고 객지고생만 한 해외 혁명가 정권만을 환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 중경임정을 환영하는 자들은 혁명 공적이 없는 자들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는 것이고 건준의 정권수립권을 방해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 중경임정만 환영하는 것은 해내해외의 혁명단체의 합동을 방해하고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라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중경임시정부 추대를 반대하였다. [94]

[94] 자세한 것은 이만규, 앞책 225~227쪽 참조. 해방 직후 여운형은 장덕수에게 “설산, 나도 상해에 있어 보았지만, 임정에 도대체 인물이 있다고 할 수 있겠소. 누구누구하고 지도자를 꼽지만, 모두 노인들뿐이고 밤낮 앉아서 파벌싸움이나 하는 無能無爲한 사람들뿐이요. 임정요인 중 몇 사람은 새 정당이 수립하는 정부에 개별적으로 추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임정의 법통을 인정할 수 없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82.6.11. “비화 미군정 3년”).

[서중석,1991:270-273]


일본이 패전하자 독립국가 건설이 매우 빨리 그리고 쉽게 될 거라는 막연하고 희망적인 기대가 해방 직후 조선인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후대의 우리가 보면 당연히 무리한 이야기지만, 정서적으로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은 든다.

김구, 김규식, 이시영 등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이 1차로 11월 23일 귀국하고, 2차로 12월 2일에 홍진, 조성환, 조소앙, 김원봉 등이 귀국하였을 때 한국인들의 중경임시정부 요인에 대한 기대는 컸다. 해방 직후 바로 독립이 될 줄 알았는데, 독립의 실현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고, 38선의 장벽은 투터워져갔으며, 점차 좌우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민족의 장래에 불안이 커가고 있었다. 그래서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였을 때 기대를 많이 가졌지만,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민족적 단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이제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기대를 걸게 되었다. 민족 대단결의 임무가 중경임정 요인들에게 지워진 것이다.

[서중석,1991:275-276]


즉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고, 또 한 달 후에는 김구에게 기대를 건 것인데 그것도 한 달 정도 지나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12월은 해방된 해의 마지막 달이었기에, 그리고 해방 이후 불길한 상황이 계속 나타났기 때문에, 민중은 불안 속에서 해가 가기 전에 어떤 돌파구 – 희망이 보이기를 원했다. 이 시기에 정치적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력은 말할 것도 없이 중경임시정부측이었다. 그런데 중경임시정부측은 인민공화국이 ‘양보’치 않았기 때문이라지만, 12월 하순 모스크바3상회의 결의와 관련되어 신탁통치문제가 보도될 때까지 뚜렷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고, 대체로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중경임시정부 요인 귀국 후의 어두운 정치상황을 안재홍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126]

임시정부 귀국 1주일이 지나 벌써 민중은 불안을 품었고, 1개월이 되어서는 초조하였었다. …… 임시정부 내 좌방세력이 포섭되어 있으니만치 좌우협상이 상당히 되려니 하였으나, ‘인공’은 스스로 양보치 않고, 임정은 민족주의진영 총지지의 기세도 있어 법통으로 굳게 지키어 스스로 걸어내려와 타협할 수 없으매, 인공측이 주장하는 양자 동시 해체, 평지 재건식의 논법과는 조합(調合) 될 수 없었다.
[서중석,1991:280-281]


시간이 흐르고...

해방 후 3년 동안 김구가 주축이 된 임정봉대세력은 여러 가지 시도를 했지만 결국 현실정치에서 실패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 부분은 필요하다면 내용을 좀 보강할 수도 있으나,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임시정부 세력이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앞선 안재홍의 말에서 드러났던 본국 국민들의 꿈과 희망과는 달리, 임정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실력자이자 끝판왕이 아니었던 것이다. 임정귀국세력은 그냥 좀 큰 하나의 우파집단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경 임시정부의 정치적 유산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현실정치세력이 재야에 버티고 있는 것은 새 집권세력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러한 정치노선에 대한 당시 남북 양 정부의 평가는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남한의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암살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정보장교였던 김창룡 등이 작업한 안두희의 위작 『시역의 고민』에는 암살의 진정한 이유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1948년 10월의 여순반란 사건, 1949년 5월의 표무원·강태무 대령 월북 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 등 중요한 사건에 모두 김구와 한독당을 연결시켰다. 특히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노선을 격렬하게 공격하였고, 여전히 김구가 북한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한국독립당은 ‘공산당보다 더 미운 당’이요, 김구는 ‘용서할 수 없는 이적행위자’였다.
여기 공공연히 국가를 중상하고 국시를 훼방하며 국책을 반대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이적행위자가 있다! 그는 바로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이시요, 국부이시요, 애국자이신 김구 선생이시다. 이 이가 김구 선생이시기 때문에 정부 아니 우리의 엄연한 법도 손을 못 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김구가 암살된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백범관을 묵인하는 묘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김구씨를 살해한 동기에 관하여서도 공표하고 싶은데, 그것은 발표할 때가 되면 반드시 공표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때 모든 사실을 일반인 앞에 공개해 놓는다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그 생애를 조국독립에 바친 한국의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진순,1997:343-344]



참고자료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by sonnet | 2018/05/13 19:31 | 정치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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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함부르거 at 2018/05/13 20:52
상해, 중경 임정의 법통은 말씀하신 이유로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87년 헌법에서 전문에 기재됨으로서 불멸의 생명을 얻게 되었죠. 임정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세력이 모두 사라진 후에 되살아 났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못하겠군요.
Commented by 아이군 at 2018/05/14 14:31
배트맨에서 훌륭한 답을 해 줬죠.

죽으면 영웅, 살아남으면 악당..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력 일때에는 배척하다가 아니게 되면 다들 떠받드는 거죠.

그런 면에서 87년 이후에나 인정까지는 아니고, 김구가 죽고 나자 거기서 부터 공공연하게 임정 법통 따졌다고 보면 될 겁니다.
Commented by TYTY at 2018/05/13 21:31
수년전 티브이 다큐멘터리에서 이승만이 미군정에 얘기해서 임정요인들을 임정의 이름으로 단체로 들어오지 말고 구성원 개별적으로 들어오게 했다는 걸 본 적이 있네요.
Commented by 無碍子 at 2018/05/14 11:00
이승만은 하지장군에게 임정을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었습니다.
Commented by at 2018/05/14 09:00
임정의 법통은 그래서 87년 헌법 이후에 부활한 것이군요.
포스팅을 보면서 든 생각인데 건준의 법통은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하군요.
분명 해방정국에서 의미가 있을텐데 임정의 법통과 충돌되어 인정받을 수 없는지 아니면 둘다 인정가능한지 궁금하군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18/05/19 02:31
여운형의 시각에 감탄하면, 너무 치우친 해석일까요...
Commented by 구들장군 at 2018/05/19 14:13
몰랐던 사실이 몇가지 있군요. 잘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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