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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대한 단상(2)
앞선 글인 재난에 대한 단상(1) 에서는 우선 여러 가지 원인들이 중첩되며 사고에 이르게 되는 경우를 살펴보았고, 또 그런 경우가 우리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흔히 있음직한 일이라는 것도 확인하였다.

그런데 원인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면 생각할 것이 많아진다. 예를 들어 원인 A,B가 있을 때 둘은 50%:50%의 비중인가. 아니면 30:70? 또는 원인 A,B,C가 있을 때 A가 주된 원인이고, B,C는 그에 비하면 덜 중요한 부차적 요인이라든가 하는 것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것들은 사후대책을 마련할 때나 관련자의 처벌 수위를 결정함에 있어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했던 페로의 책 "Normal Accidents"는 다양한 원인들이 얽히며 발생하는 사고들에 대해 폭넓은 사례들을 제시하지만, 사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정교하게 평가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저자는 개별 요소에 집중하게 되면 그가 주목하는 요소들의 관계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번 글에서는 이런 앞선 글에서 약간 부족했던 측면을 보완해 보기로 하자.


역사적 사건들을 논하는 학문 분야들은 많다. 그 중에서 우선 국제정치학자인 나이(Joseph Nye)가 자신의 교재에서 제1차세계대전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경우, 우리는 그 상황을 과대결정(over-determined)되었다고 한다. 만약 제1차세계대전이 과대결정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쟁이 필연적이었음을 뜻하는 것인가? 대답은 ‘아니오’다. 전쟁은 1914년에 실제 발생하기까지도 필연적이지는 않았다. 전쟁이 발발했다 하더라도 그 후 지속된 4년 동안의 대량학살은 필연적이지 않았다.

우리가 연구하는 어떤 사건의 원인을 시간의 근접성을 기준으로 해 세 가지로 나누어보자. 가장 멀리 있는 것은 깊숙한(deep) 원인이고, 그 다음에는 중간(intermediate) 원인이 있으며, 사건에 임박한 원인은 촉발(precipitating) 원인이다. 비유를 하자면, 당신의 방에 불이 어떻게 켜지는지를 생각해 보라. 촉발원인은 당신이 스위치를 켰기 때문이고, 중간원인은 누군가가 건물에 배선을 설치했기 때문이며, 깊숙한 원인은 토마스 에디슨이 전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비유로서 불에 타는 건물을 생각해보자. 나무가 깊숙한 원인이고, 불쏘시개와 종이는 중간원인이며, 실지 성냥을 당기는 것은 촉발원인이다.

제1차대전에서 깊숙한 원인은 세력균형의 구조와 국내정치체제의 변화였다. 그 중 특히 중요한 원인은 독일의 국력 증가, 양극 동맹체제의 발전, 민족주의의 출현, 그것에 의해 쇠락하던 두 제국의 멸망, 그리고 독일정치에 있었다. 또한 중간원인은 독일의 정책, 평화에 대한 자만의 증가, 그리고 지도자의 개인적 특성이었다. 마지막으로 촉발원인은 세르비아의 테러리스트가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를 암살한 사건이었다. (Nye:116-7)


이와 비슷한 논의를 역사학자인 마르크 블로크나 존 개디스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 블로크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한 사내를 예로 들었다. 블로크가 지적하기로는, 우선 이 결과를 낳기 위해서 많은 사건이 선행되어야 했다. 사내가 죽으려면 절벽에서 미끄러져야 하고, 그보다 먼저 그가 걷던 길이 절벽의 가장자리에 나 있어야 하고, 또 그 이전에 지질학적 과정을 통해 산이 솟아야 하고, 중력의 법칙이 성립해야 한다. 블로크가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무엇보다 빅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사고의 원인을 물어보면 누구나 ‘실족(失足)’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블로크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실족이라는 특정한 선행 사건이 다른 선행 사건들과 몇 가지 면에서 구분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나중에 일어난 사건이고…… 일상적인 사건 순서에서 가장 특이한 사건이며, 결국 이 최대의 특수성 때문에 가장 피하기 쉬웠음직한 선행 사건인 것처럼 보인다.”

[…] 블로크의 생각은 세련성과 일관성, 유용성에서 카의 수준을 능가했다. 내가 블로크를 제대로 읽었다면, 블로크는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다음의 세 가지 구분 방식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첫째, 가까운 원인(近因), 중간 원인, 먼 원인(遠因)을 구분했다.
둘째, 특이 원인과 일반 원인을 구분했다.
셋째, 사실적 사유와 반(反) 사실적 사유(counter-factual)를 구분했다. (Gaddis:145-6)


앞선 글의 예시 '어떤 하루'에서 '실족'에 해당하는 사건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것은 '열쇠를 안에 놓은 채 아파트 문을 잠궈버린 사건'이다. 이것은 나이의 용어로 하면 촉발원인에 속하는 '페르티난트 대공 암살사건' 쯤에 해당한다.

개디스의 논의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소개한 나이와 마찬가지로 블로크-개디스도 사건과의 근접성을 기준으로 한 삼분법을 제시한다.

가까운 원인, 중간원인, 먼 원인의 구분. 역사의 서술은 시간의 진행을 따르지만, 서술 작업을 준비할 때 역사가는 시간 진행의 역방향으로 움직인다. 거시적 현상이든, 미시적 현상이든, 어떤 특정 현상에서 시작해 선행 사건을 추적한다. 혹은 앞서 말한 내 표현대로라면, 구조에서 출발하여 구조를 만들어낸 과정을 도출하는 것이다. 블로크가 예시한 등산가의 실족이라는 원인을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묵인하면서 역사가는 도출된 과정 중 구조에 가장 근접한 과정을 무엇보다도 중시한다. 그렇다고 역사가의 작업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진주만 폭격을 설명할 때, 일본 전투기가 항공모함에서 이륙하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어떻게 일본의 항공모함이 하와이 영해에 진입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풀려면, 일본 정부가 미국과의 모험적 전쟁을 택한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의 대일(對日)석유금수조치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고, 석유금수조치는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접수한 데 따른 대응조치였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물론 일본의 인도차이나 접수는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패배한 덕분이었고, 아울러 자국의 중국 대륙 정복 좌절에 따른 대안이기도 했다. 나아가 이 모든 일을 설명하려면 1930년대에 일어난 권위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주목이 필요하다. 이 시기의 권위주의와 군국주의는 대공황과 관련이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가 불공평했다는 당시의 인식에도 기인한다. 계속해서 파고 들어갈 수도 있다. 수억 년 전에 소용돌이치는 연기구름에 휩싸인 채 일본열도의 최초의 섬이 막 태평양이 되려던 바다 위로 솟아오른 것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가는 그렇게까지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역사 속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는 데 어디서 멈춰야 한다는 딱 부러지는 규정은 없다. 그러나 적절성 체감의 원리(principle of diminishing relevance)라 부를 만한 것은 있다. 원인과 결과를 갈라놓는 시간 간격이 클수록 원인으로서의 적절성이 적어진다는 원리다. 이 말이 ‘부적절하다’는 뜻이 아님에 유의하라.

[…] 물론 일본열도가 바다 위로 솟지 않았다면, 일본 정부의 미국 공격 결정도 없었을 것이다. 산의 지질학적 융기가 없었다면, 블로크가 예시한 등산가의 암벽 추락이 있었을 리 만무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이런 원인들은 그 인과관계가 너무나 멀어서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는 두 눈이 얼굴 전면에 있어 인류가 입체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암지손가락이 물체를 잡기 쉽게 다른 손가락과 반대 방향으로 진화한 덕분에 일본 전투 조종사들이 승리했다고 설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사가에게 적절한 원인은 결과와 좀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원인은 대체로 무시해 버린다.
그렇다면 가까운 원인도 아니고 먼 원인도 아닌, 중간 원인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경우에도 적절성 체감의 원리가 성립하긴 하지만, ‘중간성’이 차지하는 영역이 충분히 커서 무시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이 경우에는, 낮은 수준의 적절성과 높은 수준의 적절성을 분간하기 위한 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진주만 폭격의 사례로 이야기하면, 신토(神道 : 일본의 전통 종교)의 출현이나 도쿠가와의 집권, 메이지유신 같은 경우는 낮은 수준의 적절성을 가진 원인이다. 반면 대공황이라든지, 군국주의의 발호, 중국 및 인도차이나 침략은 높은 수준의 적절성을 갖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런 종류의 판단을 할 때 고려해야 할 것들을 소개하겠다. (Gaddis:147-9)

근접성을 기준으로 한 원인들의 분류에서 한 가지 원칙이 떠오른다. 그것은 사건에서 멀어질수록 원인들의 가치가 감소하다가 너무 멀어지게 되면 무의미한 정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제 블로크-개디스는 원인들간의 관계를 기준으로 원인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 방법을 추가로 제시한다.

이런 경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블로크의 두 번째 인과 관계 구분 방식, 즉 특이 원인일반 원인의 구분이다. 그가 예시한 등산가의 암벽 추락 사고의 원인이 등산로가 절벽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것, 산의 융기, 중력 때문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암벽을 등반하는 모든 사람이 추락하지는 않는다. 이때 등산로의 위치, 산의 존재, 중력 등이 사고의 일반 원인에 해당한다. 일반 원인은 암벽 추락 사고 발생의 필요 조건이지만, 사고 발생을 설명할 수 있는 충분 조건은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등산가의 실족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인과관계 상의 필요 조건과 충분 조건의 구분과 사회과학자가 즐겨 쓰는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구분은 그 의미가 다르다. 인과관계상의 충분 조건은 필요 조건에 종속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등산로에서 발을 헛디디는 것이 풀밭 한가운데서 발을 헛디디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발을 헛디딘 장소의 규명 없이 실족 자체만 얘기하는 것은 일본 항공모함의 하와이 출정을 이야기할 때 그 배경을 규명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 되지 않는다. 원인이 되는 사건은 언제나 그 맥락이 있으며, 따라서 원인을 알려면 반드시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서론이 길었지만, 여기서 충분 조건이 필요 조건에 종속된 것을 것을 가리켜 ‘맥락(context)’이라고 정의하겠다. 블로크의 언어로 바꿔 말하면, 특이 원인이 일반 원인에 종속된 것을 이른다. 맥락은 결과가 되는 사건을 직접 일으키지는 않지만, 결과의 폭을 확실하게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실족에 대한 예에서 방금 언급했듯이, 풀밭에서 실족했을 때 가장 심한 경우인 발목이 부러지는 것과, 절벽에서 실족했을 때 가장 경미한 경우인 목이 부러지는 것의 차이를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맥락이다. (Gaddis:149-50)

다시 '어떤 하루' 사례로 돌아가 보면 특이원인은 '얼쇠를 두고 나온' 사건이었다. 이 특이원인은 그것만으로는 심각할 수도 있고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얼마나 심각한지를 결정지어준 것은 '이웃집 차의 고장' '버스파업/택시부족' 같은 일반원인들이 만들어낸 맥락인 셈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맥락이 사건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세팅되어 있었기에 문제가 더 커졌던 것이다.


이제 개디스는 '실족' 같은 특이원인을 찾아내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한다.

역사가 클레이튼 로버츠(Clayton Roberts) […] 의 글을 인용해보자면, “역사가가 궁극의 원인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때 본능적으로 추적을 멈추는 경계점이 있다. 이 경계점이란, 역사가가 설명하고자 하는 사태의 변동이 막 넘쳐나는 지점을 이른다.”

역사 연구는 어떤 특정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어도 좋고, 로버츠가 제시한 것을 예로 들면 청교도혁명 당시의 잉글랜드내전(English Civil War)여도 좋다. 역사 연구는 이런 특정 사건을 기점으로 시간을 역추적해나가면서, 먼 원인보다는 가까운 원인에 더 큰 의미를 둔다. 물론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럴싸한 원인이 더 많이 찾아진다. 하지만 메이지유신이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면 - 두 눈이 얼굴 전면에 있어 인류가 입체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엄지손가락과 다른 손가락이 물건을 집을 수 있게 진화한 시점으로 돌아갈 의도가 아니라면- 특이 원인을 일반 원인과 구별해낼 시금석이 있어야 한다. 로버츠의 제안에 따르면 역사가에게 이런 시금석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point of no return)’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란, 과거의 평형 상태가 급격하고 불안정한 변동 때문에 더 이상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순간을 말한다.

로버츠의 주장에 따르면 잉글랜드내전의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은 1637년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새 성공회 기도서를 강요한 때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태평양전쟁의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1942년 8월 미국의 대일석유금수조치를 든다. 어쨌든 종교개혁가 그에 수반한 결과물들이 없었다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대한 성공회 기도서 강요도 없었을 것이고,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되지 않았던들 진주만 공격도 없었을 것이다. 변수의 상호종속성이 모든 경우에 적용되듯이, 특이 원인이 일반 원인에 종속되는 규칙도 이 모든 경우에 적용된다. 이것이 역사가의 첫 번째 인과관계 테스트인 적절성 체감의 원리며, 역사가가 어느 특정 원인을 다른 원인보다 강조할 수 있는 면허증을 부여해준다.

이렇듯 특정 구조 안으로 수렴되는 역사적 과정을 추적할 때 찾는 것은, 특이하고 비정상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경로를 취하는 시점이다. 즉, 역사가가 찾으려는 것은 상전이이며, 평형의 상태를 띤 구두점이며, 또한 일반 원인을 반영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예측 불가능한 특이 원인이다. (Gaddis:151-3)


그런데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인지는 어떻게 아는가? 나이의 말을 들어보자.

돌이켜보면 모든 일들은 항상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설사 암살사건이 없었더라도 다른 사건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촉진사건은 트롤리 전동차와 같다고 말한다. 그 전동차들은 10분마다 온다. 그렇게 보면 사라예보에서의 구체적 사건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문제일 뿐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주장은 가상사실 질문을 통해 검증할 수 있다. 그 시기의 역사를 상세하게 고찰하면서 ‘만약 …했더라면(what if)’과 ‘무엇이 어떠했을 지도 모른다(what might have been)’라는 질문들을 던져 보는 것이다. 만약 사라예보에서 암살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사회민주주의자들(Social Democrats)이 독일에서 정권을 잡았다면 어땠을까? (Nye:117-8)


블로크-개디스도 이와 비슷한 답을 한다. 가설적인 질문을 만들어 사고실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이, 인과관계의 세 번째 구분 방식에 해당하는 반사실적 사유이다. 블로크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가는 가장 피하기 쉬웠음직한 선행 사건을 찾아야 한다.” 그는 뒤이어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작업은 의식의 대담한 실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실행으로 역사가의 의식은 사건 전야로 이동하여 해당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저울질한다.” 블로크가 말하는 바, 연재 시점을 과거의 어느 순간에다 맞춰놓으면, 사건 발생 시점은 ‘지나간 시대에서 바라보는 미래’가 되는 것이다.

블로크는 이 말 속에서 물리학이 실험실에서 행하는 실험을 역사학에 대응시키고 있는 것 같다. 화학자나 물리학자가 시험관이나 원심분리기, 안개 상자 등으로 하는 것과 비슷한 절차를 역사가는 상상으로 밟아나간다. 역사가는 과거를 재음미하면서, 그리고 조건을 바꿔가면서 어떤 조건이 달라졌을 때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알려고 한다. 이런 절차가 반사실적 사유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Gaddis:154)


그러나 이러한 실험은 엄격한 규칙이 필요하다는데 다들 동의한다.

분명한 것은 반 사실적 사유를 하는 데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화학실험에서 중요한 화합물을 알아내려 할 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냄비에다 도롱뇽 눈, 개구리 발가락 등 손에 잡히는 것을 모두 집어넣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관찰하지는 않는다. 대신 다른 조건은 똑같이 유지하면서 단계적으로 한 가지 변수만 바꾸어 그 효과를 관찰한다. 역사학의 반사실적 사유도 이와 아주 비슷하다.

다시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돌아가보자. 일본이 프랑스령이던 인도차이나를 접수한 후에도 미국이 대일석유금수조치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적절한 질문이다. 그러나 다음의 질문은 적절치 않다. 루즈벨트 행정부가 다른 전략과 정책 결정을 연계시켜 자유프랑스군을 인도차이나에 진주시키고, 필리핀에 미군을 집중 배치하며, 소련과 독일의 전쟁을 중재하여 스탈린으로 하여금 병력을 동쪽으로 빼돌려 일본에 위협을 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 말이다. 다시 말해, 그 당시 미국이 미리 취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동원해보는 것은,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동시에 어떤 특정한 결과를 얻는 것은 불가능한 마녀의 마법의 약 조제와 같은 역사학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한 가지 변수를 바꿀 때, 시대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가정을 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예를 들어, 1941년에 원자폭탄이나 첩보위성이 있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숙고하는 것은 유용한 작업이 되지 못한다. 당시 그런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갑자기 모두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든지, 루즈벨트 행정부의 수뇌부가 갑자기 가라오케를 좋아하게 되었다든지 하는 가정도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다.

[…] 어쨌든 이런 종류의 가정은 실현 가능성이 없으므로 역사학이 될 수 없다. 당시의 정책결정자들이 선택 가능한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반사실적 사유는 매우 엄격한 훈련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반사실적 가정을 한꺼번에 냄비 속에 넣으면 안 된다. 그래봤자 어느 한 가지 효과도 낼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또한 단일변수를 잡을 때 시대에 상응하는 기술과 문화의 영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런 단서 조항만 제대로 지킨다면, 반사실적 사유는 인과의 순서를 만드는 데 유용하다. (Gaddis:155-7)



그러나 나이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도 사실 개연적인(probable)것이지 필연적인(inevitable)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확률의 문제도 있다. 깊숙한 원인과 중간 원인이 이미 주어진 상황에서는 전쟁의 가능성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필연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불의 비유를 다시 사용하면, 나무와 불쏘시개를 오랫동안 함께 놓아둔다고 하더라도 불이 붙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성냥을 가져오기 전에 비가 왔다고 가정해보면, 사라예보 사건과 같은 일이 있었더라도 전쟁의 불이 붙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Nye:118)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으로 그런 사건이 결국 일어났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과 반대되는 조건을 설정해봄으로써 특정한 원인이 중요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조사할 수 있지만, 그와 같은 ‘조건부의 역사(iffy history)’ 속에는 위험이 숨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가상사실을 잘못 다루면 가상사실은 오히려 역사의 의미를 파괴하고 잘못된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도 있다. 한번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사실과 다른 결말을 동등하게 취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시간은 결정적 차원이다. 역사적 사건은 ‘경로종속적(path dependent)’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여러 사건들이 한 번 어떤 특정한 경로로 시작되면 미래의 모든 가능성들은 결코 동등할 수 없다. 어떤 사건들은 다른 것보다 그 가능성이 더 높다. (Nye:83)


이런 미묘함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깔때기(Funnel of Choices)라는 도식을 제시한다. 사건이 일어난 그 순간을 향해 다가갈수록 선택의 폭이 점점 줄어들다가 사건이 터진 그 순간에 선택의 폭이 0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깔때기는 왜 멀리 위치한 원인일수록 가치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론적인 이야기를 길게 했는데, 관심을 환기할 겸 해서 위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 실제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세월호 침몰 사건에서 정부가 공식적으로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무리한 변침'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는 다른 원인들도 지적된 바 있다. 예를 들면 '선박의 노후' '부적절한 구조변경', '과적', '화물결박 소홀' 등이다.

이 배는 취역 후 침몰까지 15개월 동안 주 4회 인천-제주 항로를 왕복 운항했었다. 여기서 다른 요소들, 즉 '선박 노후' '부적절한 구조변경' 등은 원래부터 있었던 요소이고 '과적', '화물결박 소홀' 등도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던 일이라서, 왜 하필 4월 16일에 침몰하게 되었느냐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 날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만든 '특이 원인'을 찾는다면 '그 날의 변침'이 유력해지는 것이다.

그럼 이제 나머지 요인들이 사고의 내용이 정해지는데 기여한 일반 원인들이 될 터인데, 앞서 소개한 것과 같은 조심스러운 반사실적 질문들을 통해서 각각의 역할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다른 조건이 동일한데 '과적'만 없었더라면 '무리한 변침'에 배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같은 것은 기술적인 시뮬레이션을 해봄직한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과적이 없었어도 큰 차이 없이 비슷한 시각에 침몰하게 되었다면 사실 과적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명나는 것이고, 반대로 침몰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왔다면, 매우 중요한 맥락으로 밝혀지는 것이니까.

반대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모든 요소들의 제목을 쫙 나열해 적은 다음에 이게 다 문제였으니 다 고쳐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매우 조잡하고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힘든 접근법이라고 하겠다.


다음 글에서는 이 마지막 논의를 조금 연장해서 최근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세월호 특별법' 문제에 대한 의견을 좀 적어볼까 한다.




참고
Gaddis, John Lewis, The Landscape of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강규형 역, 『역사의 풍경』, 서울:에코리브르, 2004)
Nye, Joseph S., Understanding International Conflicts: An Introduction to Theory and History, 3rd Ed., Longman, 2000 (양준희 역, 『국제분쟁의 이해: 이론과 역사』, 서울:한울 아카데미, 2001)
※인용한 번역문의 일부를 읽기 편하도록 약간 손보았으나 내용에 변화는 없습니다.
(근인/원인 -> 가까운 원인/먼 원인 같은 식으로)
by sonnet | 2014/09/10 21:30 | 정치 | 트랙백 | 덧글(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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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14/09/10 22:0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4/09/10 22:42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Masan_Gull at 2014/09/10 22:24
다음편은 flame 카테고리에 넣으셔야 할지도요(...)

여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4/09/10 22:43
사실 요즘 오는 사람이 줄어서 그렇게 될지 잘 모르겠는데, 뭐 시끄러워지거든 옮기기로 하죠 ^^
Commented by Caesar at 2014/09/10 23:31
어디까지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정리해서 포스팅을 해볼까 하던 차였는데......조용히 키보드 앞에서 묵념 중입니다.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긴 합니다만, 역시 현실 문제로 돌아가 마지막 포스팅을 일단 기다려보고 최종적으로 여쭤볼까 합니다 ^^
Commented by sonnet at 2014/09/11 00:11
책임에 대해서는 먼저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쪽 이야길 많이 할 생각이 없어서요.
Commented by 채널 2nd™ at 2014/09/10 23:13
언급하기조차 무서운 세월호 이야기를 ... 초대형 폭탄이 터질려나요..?? ;;;
Commented by sonnet at 2014/09/11 00:10
쿨타임을 4개월도 넘게 가졌는데도 문제가 되려나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14/09/13 10:13
요즘은 진영논리가 일정 수위를 넘어섰다고 생각되는 시기니까요.
Commented by 대공 at 2014/09/10 23:46
역사를 가정하면서 이해할때 중요한 과정들이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4/09/11 00:11
네.
Commented by Ya펭귄 at 2014/09/11 00:31
관리가 매우 부실한 탄약고가 언제 폭발하겠는가를 예측하는 문제와 어느정도 개연성이 있겠지요...

언젠가는 사고날 것까지는 알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는 그런 상황...
Commented by sonnet at 2014/09/11 00:47
사실 운만 좋으면 안 터지고 끝까지 갈 수도.
Commented by Ya펭귄 at 2014/09/13 11:08
운이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좋아야지요.

....

뭐 그래도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를 무시하기도 힘드니....
Commented by jklin at 2014/09/11 06:29
좋은 포스팅 잘 읽고 갑니다. 세월호 사건 진상 조사가 수사권 기소권의 정치영역으로 변질된 이후 참 답답했는데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네요. 사건 분석 및 대책 마련에 좋은 기준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역사적 사건 이해에도 많은 도움이 되겠네요.

Commented by 일화 at 2014/09/11 06:38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형법총칙 시간에 인과관계론 배우던 것이 생각나네요.
Commented by gorgeous at 2014/09/11 10:33
논의를 한다면 당연히 이런 시각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야채 at 2014/09/11 23:49
세월호 사건에서 핵심적인 사항은 아무래도 '세월호 침몰'보다는 '대규모 희생자 발생'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대규모 희생자 발생'의 핵심적인 원인 중 하나는 세월호의 침몰이겠지만, 보다 직접적이라고 볼 여지가 많은 다른 사건들(선원들의 황당한 대응, 구조 과정에서의 혼란 등)이 있는 만큼 세월호 침몰 자체보다는 다른 측면들을 더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다른 쟁점은 문제 그 자체도 입장에 따라 다르게 분석되고 다르게 대처된다는 점입니다. 지난 글에서 제시하신 면접 예시에서 "당신이 면접을 미뤄야 했다. 이 사고의 원인은?" 이라고 묻는다면 저는 지난번에 언급했던 대로 "열쇠를 두고 나온 것"에 방점을 찍겠을 것입니다. 파업이나 옆집 자동차에 대해 대응했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그런 이유로 면접을 망친 사람이 많았다" 라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이 경우에는 반대로 '열쇠를 두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고 오히려 '파업'이나 '쉽게 고장나는 자동차(만약 그렇다면)' 측면에서 해결책을 찾는 편이 더 현실적이 됩니다. 따라서 개별 사건 자체의 원인 분석과 그에 대처하는 정책 내지 법률은 관점이 서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야채 at 2014/09/11 23:57
제일 중요한 말을 빠뜨렸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4/09/12 12:25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말씀을 보고 있으니까 약간 앞서간다고나 할까, "나중에는 결국 대책을 요구받을 테니까" "대책을 세우는 데 적합한 요인을 원인으로 지목한다"는 식의 역순의 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책과 독립적으로 사건의 실체라는 것이 존재하고 원인은 거기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Commented by 야채 at 2014/09/12 23:09
지적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다만 예컨대 본문에서 말씀하신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을 본다고 하면, '그 사고 자체'에 대해 분석할 때는 '실족'이 주 원인이 되겠지만, 관리자로서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때는 '그 사고 자체'보다는 '그와 같은 사고'의 원인을 찾게 될 테니 원인 분석과 그 대책(울타리 설치 등...)에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합니다.
Commented by 아리 at 2014/09/12 10:56
소넷 님 모든 글이 그러하지만, 이번 글은 몇 번 곰씹어볼 글이네요.
틈틈히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독자 1인.
Commented by 건빵맨 at 2014/09/12 22:05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개디스나 나이의 저서를 읽어봐야겠네요.
Commented by 행인1 at 2014/09/12 22:29
왠지 "일반원인은 원인이 아니냐!"며 '징후적 독해'를 시전하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Commented by paro1923 at 2014/09/13 10:09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서 깊이 참고해야 할 포스팅이군요.
Commented by baicalin at 2014/09/16 15:43
훌룡하십니다
Commented by 행인 at 2015/05/08 22:42
지나가다 좋은 글 읽었습니다. 역사를 배우다보니 더 와닿는 이야기인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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