От Ильича до Ильич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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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인의 자존심
간만이니까 가볍게 시작하죠.
시드니 루멧 감독의 회고록에 나오는 일화들인데, 업종을 불문하고 여러 유형의 전문가들이 팀을 이루어 작업하는 경우엔 충분히 있음직한 일들이라고 생각되고 또 그 자체로 재미있게 읽었던 지라 옮겨 봅니다.




작가의 고집

나오미는 훌륭하고 재주 많은 진짜배기 작가이다. 내가 볼 때는 장면에 집착하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단점이다. 리버 피닉스가 연기한 어린 소년은 낯선 집에 들어가 피아노 앞에 앉아 베토벤의 소나타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같은 또래의 어린 소녀가 바라보고 있는 걸 의식한다. 각본에는 계속해서 부기우기 피아노곡을 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나오미에게 좋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관객이 사기 같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봐라. 그애는 진짜 먹물이 아니다. 그 녀석은 우리처럼 재즈를 좋아한다. 오래 전 글로리아 진 영화에서 호세 이투르비가 상아로 간지럼을 피우는 장면이나 지넷 맥도널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도 그랬다. 나오미는 고집불통이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집어넣고 리허설에서 어떤지 보기로 하였다. 그 장면을 올리자 리버가 그 부분을 빼자고 말했다. 연기를 하는 데 허위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나오미는 창백해졌다. 이야기가 오고갔다. 리버가 나오미에게 자기 배역에 대해 어떻게 절충했는지 정말 단순하고 솔직하게 설명했다. (열일곱 살짜리가 자기보다 두 배나 나이 많은 작가와 논쟁하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결국 내가 그렇게 할 만한지 며칠 후에 다시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리허설이 끝날 즈음 나오미가 찾아왔다. 내가 그 장면을 수정해야만 한다면 괘념치 않겠지만 리버가 뒤집는 것은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장면이 아깝긴 하지만 ‘자르자’고 했다.

배우와 작가 간에는 쉽게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있다. 감독으로서 나는 이를 매우 조심한다. 작가들은 대부분 배우를 싫어한다. 그렇지만 스타는 스튜디오의 인정을 받는 관건이다. 감독이 큰 힘을 갖는 경우도 있지만 톱스타만큼의 힘은 없다. 스타가 요구하면 스튜디오는 30초 이내에 작가를 던져 버린다. 그 점은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런 위기가 생기지 않도록 사전에 충분히 준비를 해둔다. 배우와 만나기 전에 작가와 합의를 구해 두고, 보통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스타와 충분히 논의를 한다. (pp.53-54)



배우의 감독 테스트

나는 〈도망자〉(The Fugitive Kind)에서 말론 브랜도와 함께 작업했었다. 그는 의심이 많은 친구다. 나는 브랜도가 심술부리고 있는 것도 몰랐지만, 그는 촬영 하루 이틀 동안 감독을 시험한 모양이다. 감독에게 언뜻 같아 보이는 테이크 두 개를 안겨 주는 것이다. 하나는 진정으로 내면에서 연기한 것, 다른 하나는 그와 유사하게 감정 표현을 한 것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고는 감독이 어떤 것을 프린트하는지 살펴본다. 감독이 잘못된 것을 인화 지시하면 마음속으로 결정한다. 말론은 다른 연기를 설렁설렁하거나 감독을 시궁창 속으로 밀어버리거나 둘 다 할 수도 있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러는지는 이해한다.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내적 삶을 쏟아 붓고 싶지 않은 것이다. (p.82)



음악과 음향, 하나는 버려져야 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에서 음향 편집 기사는 열차 음향에 관한 한 ‘세계 최고 권위자’를 고용했다. 그는 나에게 오리엔트 특급부터 ‘플라잉 스코트맨’, ‘20세기 철도회사’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열차의 진짜 소리를 모두 들려주었다. 그는 기차 소리만 갖고 6주일 동안 일을 했다. 그의 진가는 영화가 시작되면서 기차가 이스탄불을 떠나는 순간 나타났다. 증기와 벨, 바퀴, 심지어 기차의 전조등이 켜질 때의 희미한 딸깍 소리까지 집어넣었다. 그는 맹세코 모든 음향이 진짜라고 했다. 믹스(사운드 트랙을 모두 합치는 과정)에 들어가자 그는 기대에 충만해 있었다. 그가 만든 소리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리처드 로드니 베넷이 같은 장면에 넣으려고 만든 음악 역시 멋졌다. 누군가 양보를 해야 했다. 양자가 같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사이먼을 돌아보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내가 말을 꺼냈다. “사이먼, 정말 대단해요. 그렇지만 결국 듣게 되는 건 역을 떠나는 기차 소리이잖소. 4분의 3박자로 떠나는 기차 소리를 가려듣기는 힘들죠.” 사이먼은 걸어 나갔다. 그 후 다시 그를 만나지 못했다. 나는 음향과 음악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 주는 사례로 이 이야기를 하곤 한다. (pp.21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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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모두

Lumet, Sidney. Making Movies. 1st ed. Knopf, 1995.
(부수영 역, 『영화 만들기』 1판. 서울: 이론과실천, 1998.)
by sonnet | 2013/01/21 01:56 | 문화 | 트랙백 | 덧글(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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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기사 at 2013/01/21 02:11
잘 보고 갑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2 12:05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skyland2 at 2013/01/21 02:27
오랜반에 뵙게 되네요. 잘 지내시길 빕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2 12:04
안녕하세요.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파파라치 at 2013/01/21 02:36
오랜만입니다. 영화 제작 이야기라니, 새롭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2 12:05
오랫만에 뵙습니다. 사실 "영화" 제작 이야기라기 보다도 영화 "제작"이야기인데서 저의 취향이 드러난다고밖에 ;;
Commented by 제노테시어 at 2013/01/21 02:39
역시 각 분야에 날고긴다는 전문가를 그저 모아만 놓는다고 걸작이 알아서 탄생하는 건 아닌가봅니다. 그 전문가들이 서로 교감이나 통제없이 그저 폭주하면 결과물은... 묵념.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2 12:06
네. 당연하겠지요. 일반적으로 실력자일수록 자기 주장도 강하고 확신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데 더욱 부리기 어렵죠.
Commented by 서산돼지 at 2013/01/21 08:36
고위직으로 갈수록 사람들을 엮어서 쓰는 것이 본업이 되는 것 같더군요. 오랫만에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2 12:11
오랫만에 뵙습니다. 이제 원래 조직으로 복귀하시는 것인지요?
Commented by 서산돼지 at 2013/01/22 15:27
돌아갈 곳이 개편되어서 갈 만한 자리가 없네요. 고민중입니다.
Commented by 파리13구 at 2013/01/21 10:49
혹시 안보셨다면,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아메리카의 밤을 추천합니다.
영화제작 과정에 관한 영화로, 감독이 직면하게 되는 여러 문제들을 재미있게 그린 작품입니다. ^^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2 11:47
추천 감사합니다. 다만 예전에 "400번의 구타"를 본 기억으로는 트뤼포의 영화는 저한테 잘 맞는 건 아니었던 것 같은 불안감이...
Commented by 파리13구 at 2013/01/22 11:49
매우 유쾌하고, 경쾌한 영화입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2 12:11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
Commented by cadpel at 2013/01/21 10:52
아아...이 얼마만에 읽는 소넷님의 글입니까 ㅡㅜ 건강하시고,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2 11:47
오랫만입니다. 글을 안쓰니 아예 안 들어오게 되어서, 습관을 바꿔보려고 생각중입니다.
Commented by 그람 at 2013/01/21 12:48
혼자두면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요지만 모아놓으면 자기 취향이 최고라는 싸움이 나는건 거장의 분야라도 다르지는 않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2 11:51
모든 사람은 일에 관해 (각자의) 의견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늘 분란이 있고, 또 그걸 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합니다. 사실 사회생활 해보면 분야를 막론하고 모두가 느끼고 있는 문제 아닐지.
Commented by 일화 at 2013/01/21 14:58
오랜만에 뵙습니다. ^^
그런데 아무리 거장이 되어도 맡은 분야가 마이너면 소용이 없다는 식으로도 읽히는 이야기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2 11:52
마지막 일화 말씀이시군요. 꼭 공정하단 느낌이 드는 건 아니지만, 세상이 좀 그렇긴... 하죠.
Commented by mithrandir at 2013/01/21 16:10
말론 브란도의 저 일화는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공동작업에서의 힘겨루기가 과연 에너지가 될 것인지 걸림돌이 될 것인지...
(당연히 둘 다이겠지만...)

오리엔트 특급의 일화야 작업하다보면 항상 있는 일이지만
6주나 작업시켜놓고 "여기 그냥 음악만 깔게요"라고 하면 누구라도 빡치겠죠. ^^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2 11:59
1. 저런게 사업 초반에 서로를 파악하는 과정에서만 잠깐 있고 해소가 되면 참을만하겠지만, 그걸 질질 끌면서 뒤끝을 남기면 최악일 거 같습니다.
이건 여담인데 조심스럽게 말을 하긴 하지만 저자는 브란도는 같이 일하기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식으로 써놨더군요. 반면 겸손하고 인간성 좋은 건 역시 헨리 폰다라고.

2. 동감입니다. 그래도 프로젝트 작업이었으니 박차고 나갔지, 샐러리맨이었으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분루를 삼키며 붙여있었을지도요.
Commented by 에이브군 at 2013/01/22 10:12
결국 지휘자는 지휘라기보다는 협의와 중재자로 느껴집니다..

PS/ 오랜만에 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잠수하시는 동안 걱정했었습니다 여하튼 건강하시고 새해에도 좋은 활동하시길바랍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2 11:41
그런 측면이 중요하죠. 상사라 해도 모든 걸 명령만 갖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예전에 R. Neustadt의 "대통령의 권력"을 발췌 소개한 적이 있는데, 거기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죽장화를 신고 말 위에 높이 걸터앉아 모든 결정을 주도하는 대통령(President-in-Boots)이라는 이미지는 겉보기만 그럴 뿐이다. 실상에서 대통령은 고무신을 신고 고삐를 말아 쥔 채 마부석에 앉아 각 채 각 부처의 장관이며, 하원의원이나 상원의원과 같은 정치인들에게 마차에 오를 것을 권하는 마부에 가깝다(President-in-Sneakers)." http://sonnet.egloos.com/3241455
Commented by 에이브군 at 2013/01/22 13:18
다만 나름 이쪽길을 전공으로 한뒤에 조금 눈이 뜨고나니 심각성을 느낍니다. 실상 우리나라는 그런식의 자리라기보다는 대통령의 제왕적인 권력은 있는데 협의자리에 앉게되고 대통령이 모든것에 주체가 되버리니까 말입니다... 사실 저는 행정부의 엘리트들을 조율하는 선에서 대통령의 업무나 대다수 의 지휘자의 권력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조금 엇나간 이야기지만 이런 글을 볼때마다 이런쪽으로 생각이 많이 들수밖에 없네요.
Commented by 한국 짱 at 2013/01/23 15:35
아이고 트위터만 하지 말고 이글루에도 많이 들려 주세요 ㅠㅠ
Commented by sonnet at 2013/01/25 11:17
네. 대문의 업데이트된 공지 4항에도 써놨지만 자주 오는 습관을 붙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트위터는 뭐랄까... 사실 저는 가능한 적게 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긴 하는데... 하여간 여기가 본진인 건 변함없습니다.
Commented by 삼천포 at 2013/01/28 20:32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건 이런거겟죠

트위터를 하신다니 처음듣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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