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가 여성탓?" 도심서 노출의상 시위(연합뉴스)
위 기사에서 보도된 것처럼 최근 SlutWalk라는 시위가 있었다. 시위가 규모가 크다거나 대단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아니나, 나는 이 시위를 보면서 이건 미국의
총기관련 권리옹호운동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그것은 개인의 권리의 행사로서 옹호되고 있다. 이 시위 지지자들이 개인의 옷차림이 간섭받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것은 자기결정권 혹은 자기소유권 원칙(principles of the self-ownership) 같은 기본권 이론으로 설명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옷이야 그렇다치고 총기소유가 왜 기본권으로 보호받아야 하냐고 생각할 사람도 많겠지만 미국의 총기논쟁은 근본적으로 기본권에 대한 제한논쟁이다. 그들의 경우엔 수정헌법 2조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규율있는 민병은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받을 수 없다."(…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 이것이 헌법에 인민의 권리로 명기되어 있고, 이것을 바꾸려면 개헌(사실상 거의 불가능)이 필요하다보니, 언제나 기본권 논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총기소유권 옹호자들이 즐겨 쓰는 구호를 한 번 보자.
총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뿐이다.
guns don't kill people, people kill people
여기서 총을 옷 그리고 살인을 추행으로 바꾸어, "옷은 사람을 추행하게 만들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추행할 뿐이다" 정도로 만든다면 슬럿워크 운동이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몇 명의 슬럿워크 행진 지지자들에게 이야기해본 적 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직관적으로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총과 옷은 다르다"는 의견을 내 놓았다. 사실 나도 그들과는 다른 이유에서 출발하지만 총과 옷(에 대한 규제)은 달라야 힌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은 이해할만 했다. 문제는 그것이 왜 다르냐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직관적으로 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평소에 가진 가치관, 기성관념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개인의 어떤
권리에 대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총기소유권 옹호 운동과 슬럿워크 운동은 닮았다. 그럼 그 반대편에 있는 총기규제 운동이나 복장규제 지지자들은 어떤가? 그들도 서로 닮았다. 그들은 반대 진영과는 달리 권리에 초점을 맞춘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이 갖는 공통점은 모종의
대증요법 지향이라는 것이다.
이를 근래 국방기술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스텔스 기술을 들어 비유해 보겠다. 스텔스는 레이더에 잘 포착되지 않는 기묘한 외형을 한다든가, 레이더 전파를 흡수하는 도료를 칠하는 등의 방식을 조합해 적의 레이더에서 자신의 모습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든다. 보이지 않으면 당연히 공격을 할 수가 없는 법이다.
노출이 적은 복장이 여성을 보호하는데 유용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룹은 대략 이러한 논리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즉 눈에 덜 띄는 복장은 수동적인 보호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군복이 풀숲 색깔과 비슷한 카키색인데는 이유가 있다는 식이다.
조금 다른 논리로는 야한 복장은 성적으로 개방적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신호를 보내는 효과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그러한 신호는 당사자의 의도와는 다르고 오판을 유도하는 '잘못된 신호'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세세한 차이는 대증요법 지향에선 중요하지 않다. 대증요법 입장에서는 신호방출(emitting signal)을 가능한 줄임으로서 눈에 잘 띄지 않게(low observable)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캐나다에서 슬럿워크 시위를 촉발했다고 알려진 한 경찰관의 발언은 그 강연(안전교육)의 성격상 전형적인 대증요법 지향으로 볼 수 있다. 경찰은 범죄예방에 초점을 맞춰 활동하기 마련이지 추상적인 권리신장을 위해 뛰는 조직은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경찰과 인권위원회는 설립목적이 다른 조직이란 말이다.
여기서 유용성이란 절대적이거나 강한 주장은 아니다. 모두가 노출이 적은 복장을 하고 있더라도 추행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은 그들도 인정한다. 다만 그것이 어느 정도나마 위험을 줄여주긴 할 거라고 보는 것이다. 총기규제 옹호론 또한 이런 노선을 따른다. 그들도 총이 없어진다고 살인이나 강도 같은 범죄가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인정한다. 다만 그것이 그런 범죄들을 더 위험하고 더 쉽게 만들어줄 것이기에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권리주장은 원칙이나 당위를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이고, 대증요법 지향은 대응이나 결과를 중요하는 사고방식이다. 이 두 그룹은 어떤 쟁점을 놓고 맞서고 있지만, 사실 강조점이 달라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또한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강조점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기를 원하면서 치열한 샅바싸움을 벌이곤 한다.
보론.
좀 다른 이야기지만 관련글들을 보다 보면, 이번 시위를 대증요법 지향에 대한 반증을 보여준 것처럼 이해하는 이야기가 눈에 띈다. 하지만 이것을 실험처럼 제시하는 논법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슬럿워크 행진은
(위력)시위이긴 해도, 실험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실험이라면 갑자기 PC방 전원을 내렸더니 게임 플레이어들이 공격적으로 변하더라는 주장도 좋은 실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야수들이 초식동물을 사냥할 때는 가능하면 무리에서 낙오된 개체를 노린다. 그것이 쉽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잠재적인 강간범은 시내에서 집단행진하는 슬럿워크 그룹을 좋은 표적이라고 판단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식으로 설명해 보자. 슬럿워크 시위의 참여자들은 이 주제에 매우 민감하고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나설 강한 의지를 표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잠재적 성추행자 입장에서 그런 신호를 강하게 방출하고 있는 표적집단을 건드리는 것이 현명한 전략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 시위대를 상대로 추행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설득력있는 실험 결과라곤 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