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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마디(Hubert Schleichert)
근래 근본주의란 말을 다룰 일이 자꾸 생겨서 예전에 봐 두었던 것 중에 인상깊었던 설명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근본주의란 실용적으로 부드러워진 정통이 겪는 양심의 가책이다.

- Hubert Schleiche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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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너무 자주 필요해서 유감이긴 하지만, ‘근본주의’라는 말은 사실 아주 적절한 용어다. 근본주의를, 본색은 양처럼 순하고 절대적으로 착한 어떤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변질되었거나 위조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근본주의자란 성직에 몸담고 있는 관료들의 것과 똑같은 교의를 좀 더 철저하고 일관되게 따르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데올로기의 기초로, 원래의 성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교조체계의 말로 하는 급진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근본주의가 무엇이 다른가. 마약이 병에 다시 들어간 것뿐이다. 더구나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더 솔직한 것이기도 하다. 음료의 내용물이 상표의 내용과 다시 일치되었으니 말이다(근본주의적인 철저함은 실제로는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원래 불관용적인 교조체계에서는 끊임없이 싸움과 공격과 전쟁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다. 교조체제라는 것이 워낙 불관용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데올로기가 설사 일시적으로 평화적인 태도를 취할지라도, 만약 이론의 저 깊은 한구석에 숨겨져 있는 불관용적이고 비인간적인 요소를 용인한다면, 결코 그 이데올로기를 믿어선 안 된다. 그것이 기독교 이데올로기건, 유대교 이데올로기건, 이슬람이나 마르크스주의, 무신론, 인종주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건, 그 밖의 다른 그 무엇이건 간에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는 언제라도 근본주의가 터져 나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근본주의는 실용적으로 부드러워진 정통이 겪는 양심의 가책이다. 어떤 불관용적인 이데올로기가 느슨하고 불철저한 적용을 통해 현실 속에서 견딜 만한 것이 될 수는 있지만, 때가 되면 근본주의에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성경에 그런 말이 나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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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호적인 실천이 ‘엄숙주의적인’ 실천보다 더 편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불관용적인 교조가 배후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한 결코 안전한 미래를 보장한다고 할 수는 없다. 계몽가들은 언제나 바로 이 점을 지적해야 하며, 가능한 한 적나라하게 그 교조를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 어떤 교회나 모두 그 구성원들로 하여금 결국에는 그 교조를 받아들이도록,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조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신자는 어느 세대에나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단을 화형시키는] 장작더미에 불이 피어오르느냐 마느냐가 교의 그 자체보다는 잘 짜여진 위계질서의 사려깊음에 달려 있는 이상, 계몽가는 결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권력관계가 달라지면, 굳이 교의를 바꾸지 않고도 언제든지 장작더미에 불을 지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관용 이론의 무기고는 전과 다름없이 건재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계몽가는 그럴 시간이 아직 있을 때, 불관용을 공격하고, 폭로하고, 무너뜨려야 한다. 그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해당 교의를 철저히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결코 콜라에서 실제로 코카를 뺐다는 데 현혹되지 않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너그럽지 않으면서 현실에서는 부드럽고 우호적인 교리를 따르는 사람을 위선자나 사기꾼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평화적인 태도는 코카콜라에서 코카가 빠진 사실을 모른 데서 비롯된다. 비판가는 이와 반대로 도그마의 콜라병에 적혀 있는 표시를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 일시적으로는 돈키호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음 근본주의가 얼마나 빨리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근본주의가 일단 도래하면, 어떤 논증도 더 이상 쓸모가 없다.

Schleichert, Hubert., Wie man mit Fundamentalisten diskutiert, ohne den Verstand zu verlieren: Anleitung zum subversiven Denken, München:C.H.Beck, 2001 (최훈 역,『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 뿌리와 이파리, 2003, pp.186-187, 184)
by sonnet | 2011/05/23 08:07 | 한마디 | 트랙백 | 핑백(2) | 덧글(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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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11/05/26 06:27

... 료들의 것과 똑같은 교의를 좀 더 철저하고 일관되게 따르는 사람들일 뿐이다. … 근본주의는 실용적으로 부드러워진 정통이 겪는 양심의 가책이다. - Hubert Schleichert - 사우디아라비아가 급진 이슬람 운동과 친화성이 있다는 것은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뭐니뭐니해도 사우디아라비아는 근대 들어 지 ... more

Linked at Adagio ma non ta.. at 2011/07/18 23:37

... 권 그 자체밖에 없다.) 그러나 이 조항이 헌법 안에 살아숨쉬는 한, 북한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고 남북관계가 어떤 평화국면에 도달하건 간에 "실용적으로 부드러워진 정통이 겪는 양심의 가책"은 언제든지 튀어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 more

Commented by 파파라치 at 2011/05/23 09:00
예전에 "이슬람 근본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슬람교도는 모두가 예외없이 근본주의자이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반대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는 기독교권내에 흔하지만, 코란의 문자적 해석을 반대하는 "자유주의 이맘"은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이슬람 교의에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코란에 명시된 율법을 두고 "오늘날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 같은 소리를 하는 경우는 상상할 수가 없지요.
Commented by jeltz at 2011/05/24 21:30
있는데요....

인도의 아스가르 알리(Asghar Ali Engineer), 탄자니아 출신의 버지니아 대학교 교수 압둘아지즈 사쉐디나(Abdulaziz Sachedina), 미국의 이라크인인 마지드 캇두리(Majid Khadduri), x튀니지의 진보적 이슬람운동(Progressive Islamists)과 같이 비록 '소수'이긴 하나 [코란에 명시된 율법을 오늘날에 현실에 맞지 않기에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무슬림과 그 사상 흐름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비록 튀니지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서구에서 활동하는 무슬림 지식인이긴 하지만, [상상할 수 없는] 경우는 아니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1/05/31 07:18
사실 어느 시대에나 이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주류에 수용되느냐, 아니면 적어도 주류와 충돌없이 공존할 수 있느냐 하는데 있지 않나 합니다. 이슬람은 카톨릭과 같은 중앙집중적인 권위가 있는 종교가 아니라, 이설 자체는 그보다 쉽게 출현할 수 있는 형태이긴 합니다.
Commented by 특이성 at 2011/05/31 14:51
현대 기독교는 중세와는 달리 이설을 주장한다고 잡아 넣거나 태워 죽이지는 않습니다.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는 중세 기독교처럼 이설을 탄압한다는 말이 들립니다.
Commented by 스카이호크 at 2011/05/23 09:33
'그럴 시간이 아직 있을 때, 불관용을 공격하고, 폭로하고, 무너뜨려야 한다.'
'근본주의가 일단 도래하면, 어떤 논증도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이걸 보니 왠지 치료도 안되고 소독도 힘들고 꾸준히 축적되는 프리온이나 중금속류의 유해물질이 자꾸 떠오르네요. 쿨럭

한국사람들은 대체로 현세기복적 마인드가 강해서 근본주의자가 나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도무지 취향들을 존중해 주질 않아요!
Commented by ttttt at 2011/05/23 21:02
80년대 전봇대마다 붙어있던 "대부흥회" 2도 인쇄물을 안 보셔서 한국사람을 만만하게 보신 게 아닌가 합니다. (반 농담입니다)
Commented by Esperos at 2011/05/26 07:31
현세기복적 마인드도 강하지만 또한 정통주의도 강하단 평이 중론입니다. 한국 천주교는 '로마보다 더 로마 같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고, 성리학의 경우야 말할 필요도 없죠. 정통주의와 근본주의는 가까운 사이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1/05/31 08:03
저는 한국 사람들은 좀 끼가 있다는 쪽에 걸겠습니다. 다만 무슨 체첸인들처럼 '전투종족'같은 부류는 아니니까...
Commented by 삼천포 at 2011/05/23 11:16
언제나 글들이 두루뭉실하고 애매한걸 문자화해서 그형체를 잡아주는글 잘읽었습니다
아실련지모르겠지만 소설 망량의 상자에 나오는 교고쿠도 앞에 세키구치가된기분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1/05/31 08:00
하하. 교고쿠도가 잘난척 해봐야 세키구치가 있으니까 메기고 받는 장단이 형성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경극당 시리즈를 아주 좋아해서 90년대 후반에 주위에 여러 사람에게 권하고 다녔었지요.
Commented by 萬古獨龍 at 2011/05/23 11:59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1/05/31 07:54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학상 at 2011/05/23 14:12
소넷님의 글을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한가지 의문이 드는게, 그렇다면, '폭력적인 양태로 발화할 수 있는' 모든 정통(혹은 전통)은 식자들에게는 배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결국 우리가 보기에 비 근본주의자들, 세속화된, 상당히 말랑말랑해진 친구들이 대세라고 해도 그 내부에 폭발적으로 발화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춘 '정통적'친구들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밟아서 미리 끄거나 최소한 항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이 기준대로라면 진짜로 종교부터 이데올로기 정치사상까지 남아나는게 없을것 같아서 드리는 질문입니다.(난독증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쿨럭)
Commented by 정우철 at 2011/05/23 15:35
이데올로기 자체가 죽거나 망하지 않은 채 존속상태이며 그걸 구동시키는 밈이 쉬지않고 작동중이니, 역사와 사회에 대해 배운 사람들은 마땅히 긴장의 끈을 풀지 않은 채 항상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맥락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읽고 밑줄칠 부분은 "항상" 대목이겠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1/05/31 07:50
저자는 한 가지 전략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교조를 문자 그대로 지키는 모습을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게 그림으로서, 그것이 왜 우스꽝스러운지 사람들이 스스로 느끼고 흥미를 잃게 만들라고 합니다. 유머와 풍자의 힘이 위험한 근본주의의 '힘을 빼는데' 유효하다는 거죠.
Commented by 특이성 at 2011/05/31 14:52
미국에서도 성서 근본주의자는 웃음거리로 만들어 물리친다고 합니다.
Commented by 특이성 at 2011/05/23 15:38
덩샤오핑이 수십년 동안의 마오쩌둥 어록(앞,뒤,왼쪽,오른쪽 다 있음)을 편한대로 골라 뽑아서 써먹었다는 글을 쓰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찾으려니 안 보입니다만.) 기독교 등의 경전은 수백년동안 쓰인 거라서, 자기 입맛에 맞는 구절 찾기가 더 쉬울 겁니다. (한국 개신교의 십일조 등) 이런 예가 생각납니다. 종교적 색채가 강한 미국 시골에서 살인사건이 나고 재판이 열렸습니다. 검사,변호사는 서로 성서를 근거로 사형에 찬성,반대해 달라고 배심원들을 설득합니다. 마찬가지로 근본주의도,현실주의도 각자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을 뽑아서 강조하면 교리상으로 정당화가 될 겁니다. (기독교 계열은 아예 종파에 따라 어떤 기록을 빼고 넣고까지 하니.)
Commented by sonnet at 2011/05/31 07:00
본문에 있는 인용문 중에 등장하는 "근본주의적인 철저함은 실제로는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나타나는데"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응헗 at 2011/05/24 14:23
이슬람이 초창기에 지지층의 결집을 공고히 하려다보니 설정을 너무 디테일하게 해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시간이 지난 지금 오히려 그게 짐이 되고 있고...
Commented by sonnet at 2011/05/31 07:53
예언자 무함마드 본인이 꼭 의도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의 사후 이슬람이 정립되는 과정에 하디스와 순나의 위치가 너무 지고하게 정해진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은 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비신자이니까 하는 것이고, 신자들에겐 그게 그렇지 않겠지만요.
Commented by Manglobe at 2011/05/25 13:32
근본주의가 무섭다는걸 저희 어머니를 보면서 느꼈습니다. 만 13이었던 저를 부모님 사이에 불화를 일으켰다며 사탄이라고 부르시는 그 모습이라니...
Commented by sonnet at 2011/05/31 06:56
이런..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는 수밖에.
Commented by 쿠쿠 at 2011/05/25 22:36
근본주의는 종교만이 아니라 어느 분야든 "말"로 이루어진 영역에서는 발생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극좌나 극우로 부르는 정치분야 역시 정치적 근본주의로 볼 수 있는 것 같고, 민주주의 역시 근본주의적으로 접근하면 민중의 직접통치로 가게 될 것임을 생각하면 개념을 중심으로 가치관을 세우고서 그 가치관을 비타협적으로 밀어붙이는 모든 경우가 본문의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의 일종인 것 같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1/05/31 07:43
음... 원리주의에 반대편 끝에 뭐가 있나를 생각해보면 재미있지 않나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 반대편 끝은 기회주의니 편의주의 쯤으로 불리는 것 같더군요.
Commented by Kola at 2019/05/07 14:58
해당 문장의 원문을 몇번 찾아봤는데, 독일어라 찾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라도 원문을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적어봅니다.

"Der Fundamentalismus ist das schlechte Gewissen der pragmatisch milde gewordenen Orthodox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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