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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산문

강아지 바오띠(小狗包弟)

바진(巴金)


한 달 전, 베이징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나는 사람들이 한 예술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예술가와 강아지에 관한 것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예술가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웃집에서 기르던 강아지와 매우 잘 지내서, 자주 먹을 것을 푸짐하게 주었다고 한다. 문혁 기간 중 그 도시에 무력 싸움이 발생하자, 예술가는 두려워져 다른 곳으로 가서 한동안 숨어 지냈다. 얼마 후 그가 돌아왔는데, 아마도 붙잡혀 돌아온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외국과 내통한’ 반혁명 분자라고 그를 비판했는데, 그가 인정하지 않자 바로 호되게 두들겨 패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 방망이로 내리쳤다. 그의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렀을 뿐만 아니라, 다리 하나도 부러졌다. 비판대회가 끝났을 때 그는 걸을 수조차 없었다. 독재정치 대오는 그를 끌고 거리를 돌면서 조리돌림을 시켰는데, 옷은 찢어져 구멍이 나고 온몸은 피와 진흙 투성이였으며,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알던 사람도 반죽음이 된 그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강아지 한 마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달려 나와, 아주 기쁜 듯이 그를 향해 나아갔다. 강아지는 다정하게 짖으며 그의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냄새를 맡고 혀로 핥고 발톱으로 그의 몸을 어루만졌다. 다른 사람이 강아지를 내쫓으려고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강아지는 끝까지 그의 곁에 남으려 했다. 독재정치 대오가 큰 방망이로 강아지의 뒷다리를 때려 부러뜨리자, 강아지는 몇 차례 슬프게 짖으며 다친 몸을 이끌고 고통스럽게 떠나갔다. 땅 위엔 핏자국이, 예술가의 낡은 옷에는 강아지 발톱 자국이 남았다. 예술가는 몇 년 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그 뒤에 그가 한 첫 번째 일이 바로 고기 몇 근을 사서 그 강아지를 보러가는 일이었다. 그의 이웃 사람은 그에게, 강아지는 그날 구타를 당해 다친 뒤 집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먹지 않고 3일을 슬프게 짖다가 죽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내가 길렀던 강아지가 생각났다. 그렇다. 나 역시 강아지를 기른 일이 있다. 1959년의 일이다. 당시 한 지인이 베이징으로 전근되어 온 가족이 이사 가게 되면서 자신이 기르던 강아지를 내게 선물로 주었다. 우리 집에는 잔디가 있어서 개를 기르기 알맞은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허락했고, 내 아들 역시 대단히 기뻐했다. 강아지가 왔다. 누런 털을 가진 일본 품종의 강아지였는데, 아주 깨끗하고 재주도 있었다. 무슨 요구가 있으면 곧 폼을 세우고 두 앞발을 나란히 한 채 쉬지 않고 절을 해댔다. 이 재주는 내 친구가 훈련시킨 게 아니었다. 그 강아지는 내 친구 말고도 스웨덴인 옛 주인이 있었다. 그에 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상하이를 떠나 귀국할 때, 강아지를 집 임대권을 지닌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고, 그래서 강아지는 내 친구 것이 되었다. 강아지가 그 친구에게 올 때, 외국어 이름이 있었는데, 그것의 음역은 ‘스바오띠斯包弟’였다. 우리는 이 이름을 줄여 ‘바오띠包弟’라고 불렀다.

바오띠는 우리 집에서 7년을 지내는 동안 우리 식구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바오띠는 절대 사람을 물지 않았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대문 앞에서 한동안 짖다가 우리가 한 번 부르면 곧 그 자리를 떠났다. 밤이면 울타리 밖 인도로 자주 사람이 지나갔는데, 강아지는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울타리를 향해 달려가며 짖었다. 짖는 소리가 귀에 좀 거슬렸지만 오래 짖는 법은 없었다. 바오띠는 뜰에서 놀길 좋아했지만 때로는 거실에서 손님을 접대하거나 옛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 집 안으로 들어와 절을 하고 사탕이나 과자를 달라고 하면서 손님들의 웃음을 자아낼 줄 알았다. 일본 친구는 그에게 큰 흥미를 느꼈고, 한번은(아마도 1963년이거나 그 이후의 여름이었을 것이다) 한 일본 통신사가 우리 집에 와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찍을 때 바오띠를 촬영한 적도 있었다. 또 한번은 일본 작가 유키 여사가 상하이 방문 중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는데, 일본 품종인 바오띠를 보자 대단히 좋아했다. 그녀도 도쿄 집에서 개를 기른다고 말했다. 2년 뒤 그녀는 다시 베이징에 와서 아시아·아프리카 작가 긴급회의에 참석했는데, 나를 보자 “당신의 강아지는 어떤가요?”라고 물었다. 잘 지낸다고 말해주자, 그녀는 웃었다.

나의 아내 샤오산 역시 바오띠를 좋아했다. 3년 간의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매번 문화 클럽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그녀는 늘 종업원에게 뼈다귀를 얻어와 바오띠에게 주었다. 1962년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광저우로 가서 설을 보냈는데 여동생이 말하길, 우리들이 광저우에 있는 동안 침실문 앞에서 바오띠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아침 우리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바오띠는 우리가 돌아온 것을 보고, 특히 샤오산을 보고는 쉬지 않고 머리와 꼬리를 흔들었다. 그처럼 기뻐하며 다정하게 우리를 맞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아주 감동적이다. 나는 마치 유키 여사의 물음을 듣는 것 같았다. “당신의 바오띠는 어떤가요?”

만일 내가 다시 그 일본 여성 작가를 만날 수 있다면, 그녀는 반드시 같은 말로 내게 물을 것이다. 그녀의 관심은 줄어들 리 없었다. 그렇지만 나에겐 이제 강아지가 없다.

1966년 8월 하순, 홍위병이 거리로 나와 ‘네 가지 낡은 죄악’을 몰수할 때 바오띠는 우리 집의 무거운 짐이 되었다. 밤이면 부근의 어린아이들이 자주 문을 때리고 큰 소리로 떠들면서 강아지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바오띠가 날카롭게 짖어대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깜짝 놀라 벌벌 떨었다. 이 울음 소리가 사구를 몰수하는 홍위병을 우리 집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근신 중이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우리는 뜰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나에게 바오띠를 다른 곳에 보내라고 권했다. 나는 첫째 여동생에게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 시절, 누가 이런 선물을 받길 원했을까? 사람들은 병원에 증정해서 과학자들이 실험용으로 쓰도록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원치 않았다. 예전엔 바오띠가 절하는 것을 보면 곧 웃음이 나왔지만, 그 당시 기관에서 학습하고 돌아와 바오띠가 내게 절을 하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나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사태는 날이 갈수록 긴박해졌다. 우리 이웃에는 나이든 상공업자 한 명이 살고 있었는데, 본래 어느 공장의 사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집에 살았으며, 내 뜰과는 단지 울타리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집에 ‘네 가지 낡은 죄악’을 몰수하러 갔다. 이웃집의 조그만 동정도 우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고, 울타리 틈으로 상황들을 살펴볼 수도 있었다. 그날 밤은 부근의 어린애가 몇 차례 방문하여 바오띠와 놀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밖으로 나와 제멋대로 짖지 않았고, 붙잡혀 가지도 않았다. 나는 60여 년 이래 처음으로 가산을 차압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물건을 들고 들락날락했으며, 몇 사람은 큰 소리로 호통치고, 어떤 사람은 항아리와 단지를 내던져 깨뜨렸다. 이 광경은 정말로 두려웠다. 10여 일 간 잠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한 끝에 나와 샤오산은 바오띠를 병원에 보내기로 최종 결정했다.

바오띠를 보내버린 뒤,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개 짖는 소리를 들을 수도, 바오띠가 나를 향해 절을 하고 나를 따라 집으로 들어서는 모습도 볼 수 없었지만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가 수면제의 힘으로도 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나도 모르게 바오띠가 떠올랐다.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는 동안 내가 짐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무거운 것을 젊어졌음을 느꼈다. 나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머리와 꼬리를 흔들고 연이어 절을 하던 강아지가 아니라, 해부대 위에 굽혀져 뱃가죽이 열린 바오띠였다. 강아지 바오띠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해부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한 마리 강아지를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는 수치를 느꼈다. 스스로를 보전하기 위해 나는 바오띠를 해부대 위로 보냈다. 나는 스스로를 경멸했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이처럼 부끄럽게 10년 대재난 가운데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참고 견디어내는 고난의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한편으론 스스로를 책망하고, 다른 한편으론 스스로를 보전하려 했으며, 일가족이 자신과 함께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애썼다. 나 자신도 마침내 바오띠가 돼버렸다. 그래도 내가 해부대 위에서 죽지 않은 것은, 행운이 따라준 덕분이었다.

꼬박 13년 5개월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이 건물에 살고 있으며, 매일 이른 아침이면 메마른 풀이 깔린 뜰을 산책한다. 예전의 대나무 울타리는 틈이 없는 벽돌 담장으로 바뀌었다. 이웃집에는 주인이 몇 가구 늘었으며, 높은 담 벽에 창문 두 개를 만들어 때로는 쓰레기를 내버리기도 했다. 애초에 세워놓은 포도나무 지렛대는 벌레에 좀이 슬어 이미 오래 전에 무너져버렸고, 포도나무 넝쿨도 뽑혀버렸다. 오른편 모퉁이에는 커다란 정화조 하나가 늘었는데, 바로 옆에 있는 5층 건물로부터 옮겨온 것이다. 꽃나무 여러 그루가 없어졌고, 꽃을 피우지 못하는 나무가 늘어났다.

나는 지난날 함께 산책하던 사람을 그리워한다. 푸른 풀이 요처럼 깔려 있을 때 그녀는 허리를 굽히거나 땅 위에 앉아 잡초를 뽑곤 했으며, 점심 전후로는 바오띠와 함께 놀았다. 나는 마치 한바탕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온 동산의 상처는 나의 마음을 기름 솥에 넣고 졸이는 것 같았다. 내 자신이 과거 10년 동안의 고통스런 생활을 끝맺음하여 마음의 빚을 갚지 않는 한, 이와 같은 마음 졸임에 결말이 있을 리 없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앞날도 잘 보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10년도 견디며 살았다.

설령 거짓말이 만연한 시기였을지라도,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더군다나 오늘 나는 사람들의 조소가 두렵지 않기 때문에 “바오띠를 그리워하며, 그에게 사죄하고 싶다.”고 말하려 한다. (1980년 1월 4일)
by sonnet | 2010/03/24 19:38 | 문화 | 트랙백(1) | 핑백(1) | 덧글(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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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seoulrain's .. at 2010/04/14 10:24

제목 : 서울비의 알림
(정치산문) 강아지 바오띠(小狗包弟) by 바진(巴金) — via sonnet...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10/03/25 12:17

...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굳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이 찔리다 못해 편지를 보내어 그만 하면 어떠냐고 제안해 올 정도이니까. '강아지 바오띠'는 이런 전략의 전형적인 예다. 잘 보면 이 이야기에서 홍위병들은 바진네 개를 죽이라고 한 적이 없다. 흉흉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어떻게든 재앙을 피하 ... more

Commented by Alias at 2010/03/24 19:51
좋은 수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알츠마리 at 2010/03/24 20:22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삼천포 at 2010/03/24 20:31
코끝이 찡하군요.
뭐라 감상을 적기가 힘드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4/06 09:56
참 안타까운 이야기지요.
Commented by 지나다가 at 2010/03/24 21:02
Baodi는 바오디로 하시든지, 빠오띠로 하시든지... 바오띠는 일관성이 없어서 너무 중도반단함미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4/06 09:56
이게 제가 번역한 게 아니라서 굳이 손대지 않았습니다.
Commented by paro1923 at 2010/03/24 21:17
'미친 세월'을 거친 지식인의 피어린 증언 그 자체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4/06 10:02
그렇습니다. 그래도 바진 같은 경우는 직설적으로 내가 이거이거 당했다라고 고발하기보다는 약간 에둘러 가면서 독자들이 알아서 생각하도록 여운을 주는 그런 글쓰기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BigTrain at 2010/03/24 21:33
'대재난'을 겪은 생존자의 잔잔하면서도 치열한 증언이네요. 보면 볼수록 문혁이란...

소개 감사드립니다.
Commented by windxellos at 2010/03/24 21:48
'오늘 나는 사람들의 조소가 두렵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단서를 다는 문구가 은근히 눈에 박힙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4/06 09:57
네, 은근히 말에 숨은 가시가 있지요.
Commented by 꼬맹이 삼촌 at 2010/03/25 01:40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조이 at 2010/03/25 03:09
정말 문화대혁명이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를 작은 강아지를 통해 보여주는 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주인에게 절을 하며 재롱부리던 강아지가 홍위병들 등쌀에 해부대 위로 보내지는 부분이 참 서글프네요.
Commented by xavier at 2010/03/25 03:29
저런 시대에 안태어난것만으로도 큰 행복이지요. 저항자체를 할 수가 없던 미친시대였으니....
Commented by MK at 2010/03/25 03:39
코끝이 찡한 글이군요. 소개에 감사드립니다.
Commented by 보리차 at 2010/03/25 03:53
강아지라는 소재가 커다란 호소력을 발하는군요. 왜 제목을 정치산문이라고 지으셨는지 알 듯합니다. 대중에게는 무언가가 옳으니 그르니 논리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보다 이런 화법이 전달 효율면에서 좋은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4/06 10:01
http://sonnet.egloos.com/3234746 같은 사례를 봐도 그렇지만, 개는 인간의 제일 충직한 친구이자 정서적 동반자라는 건 세계 공통인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deokbusin at 2010/03/25 08:38
저로 하여금 이모저모 반성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정말 좋은 글입니다.

그런데, 저만한 글을 쓸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노력해야 할런지 게으른 사람으로서는 그저 장탄식만 할 뿐입니다.
Commented by cryingkid at 2010/04/05 06:21
그렇다면 나의 앞날도 잘 보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10년도 견디며 살았다.
> 이 두 문장 가운데 검은 강이 흐르는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4/06 10:11
네, 바진은 장르의 특성을 잘 이용하고 있는데, 그건 꽤 고민해서 결정한 선택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어 고발이 목적이라면 특사-르뽀문학 같은 유형도 있는데, 왜 수필일까를 생각해 보면, 이견 역시 의도적인 데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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