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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에서 배우자", 화궈펑, 개혁개방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배경에 대해 정리해둘 필요성을 느껴서 간단히.


1. '다자이(大寨)에서 배우자' 운동

1964년에 시작해 1978년까지 15년 동안이나 계속된 다자이 운동은 중국 농촌에서 전개된 대중동원운동 중 가장 오랫동안 계속된 것으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잠시 주춤해 있던 중국공산당 좌파의 신농촌 모델을 상징했다.

다자이(大寨) 부락은 산시(山西)성 타이항산(太行山) 서쪽 기슭에 위치한 총 83가구로 이루어진 작고 가난한 산촌 마을이었다. 하지만 1964년 2월 10일, 『인민일보』가 「혁명정신에 의거해 산간지역을 건설한 모범부락」이란 사설과 소개 기사, 그리고 다자이 생산대대의 당지부 서기였던 천융구이(陳永貴)의 논문 「다자이의 길大寨之路」를 실어 이 마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별볼일 없던 이 마을은 갑자기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인민일보』 사설에 따르면 다자이 대대는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에 입각해 1963년의 대재난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치산치수에 힘써 다자이 부락의 자연환경을 변화시킴으로서 낙후된 빈촌에서 선진모델로 변화할 수 있었다고 했다. 따라서 중국 농민들은 다자이 사람들의 혁명정신을 본받아 사회주의 신농촌을 건설하기 위한 대자연과의 투쟁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융구이는 '다자이의 길'이란 '집체 노동과 지혜에 의거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며 '농민의 혁명정신을 동원해 3대 혁명, 즉 계급투쟁, 생산투쟁, 그리고 과학실험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으로 농민의 두뇌를 무장'시켜야만 토지와 기술의 변화도 가능하다고 했다.

즉 다자이 경험이란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으로 각성된 농민의 정신력으로 자연환경을 개조하고 주어진 생산조건을 뛰어넘어 부유한 물질적 조건과 사회주의 공동체의 덕성을 겸비한 유토피아적 농촌사회를 건설함을 의미했다.

1964년 12월에 개최된 제3기 전인대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농업은 다자이에서 배우라!農業, 學大寨"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전달하며 전국의 농민들과 농촌간부들은 다자이의 경험과 정신을 학습함으로서 농촌경제의 발전과 사회주의 신농촌의 건설을 달성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따라서 이듬해인 1965년부터는 전국적으로 다자이 배우기 운동이 전개되었고 전국의 농촌 중 가장 모범적인 56개 단위의 업적을 소개하는 「전국 다자이식 농업전형 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인민일보』 는 이를 찬양하는 사설에서 "마오쩌둥 사상의 붉은 깃발을 높이 쳐들고 견결하게 당의 사회주의건설 총노선을 관철, 집행하였고, 집체역량에 의거해 자력갱생의 정신을 발휘함으로서 … 자연면모를 개변하고 농업생산의 발전을 가속시켰다"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대약진운동을 상징하는 옛 구호인 '삼면홍기(三面紅旗) -사회주의건설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운동-'와의 연속성이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잠시 주춤해 있던 중국공산당 좌파는 옛 꿈을 되살리기 위해 몇 개의 새로운 모델을 발굴, 보급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공업은 다칭(大慶) 유전을 배우고, 농업은 다자이 생산대대를 배우자'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추진된다. 류샤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 실용주의 세력들은 이러한 대약진운동의 재등장을 견제하려고 노력했지만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휩쓸려 모두 숙청되고 만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정신력을 강조하는 대중동원 운동과 마오쩌둥 숭배는 깊게 결합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신화통신사는 다음과 같은 뉴스를 전했다. 한 부락에서 대규모 저수지공사에 모든 부락민을 동원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사를 강행하였다. 그들은 "손이 부르트고 … 어께가 부을" 정도로 일을 하면서도 마오쩌둥의 저작을 학습함으로서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저수지공사로 아무런 이익을 기대할 수 없는 생산대의 사람들까지도 마오쩌둥 사상 학습의 결과로 흔쾌히 이 부락의 저수지공사에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이같은 대규모공사에 동원되어 고된 일을 하는 농민들은 "부르주아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난과 피로에 대해 불평"하겠지만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한" 농민들은 "착취계급과는 전혀 다른 고난과 행복에 대한 관점"을 가졌다면서, 농민들은 "투쟁할수록 더욱 행복해지고 강해진다"고 했다.

다자이 생산대대의 천융구이를 접견하는 마오쩌둥. 그는 다자이 운동 때문에 무려 부총리에 오르게 된다



2. 화궈펑(華國鋒)의 집권과 범시(凡是) 노선

10여 년 후, 마오쩌둥은 말년 들어 쇠약해지면서 후계자 선정에 고심한다.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당내 좌파인 '4인방' 중에는 중국 같은 거대한 나라를 맡을 인재가 없어 보였지만 문화대혁명에 반대하다 숙청당했던 노간부들인 '주자파'에게 권력을 넘기는 것도 마뜩치 않았다. 내 업적은 "중국 대륙을 통일한 것과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것 단 두 가지"라고 자부해온 마오쩌둥으로서는, 자신이 죽고 나면 문화대혁명을 송두리채 부정할 것이 뻔해 모이는 덩샤오핑 같은 우파를 기용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권력승계가 임박하자 4인방과 주자파의 갈등은 첨예해진다. 1976년 1월, 2인자이던 저우언라이 총리의 죽음이 다가오자, 4인방 측은 그 자리에 왕훙원(王洪文)을, 주자파 쪽은 덩샤오핑을 밀었다. 이때 마오쩌둥은 어느 한 쪽에게 권력을 넘기는 대신, 다소 의외의 선택을 내린다. [마오쩌둥의 고향인] 후난(湖南)성 제1서기와 공안부장을 지낸 후 국무원 부총리로 있던 화궈펑을 총리서리로 임명한 것이다. 화궈펑은 4인방과 주자파 양 파벌과 모두 거리가 있는 비교적 눈에 덜 띄는 인물이었고,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도 확고했다. 하지만 4인방과 주자파 양 파벌은 모두 불만이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추도식을 계기로 문화대혁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해 천안문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자 4인방은 그 배후에 덩샤오핑이 있다고 공격해, 덩을 실각시킨다. 저우언라이가 죽고 여덟 달이 지난 9월 9일, 드디어 마오쩌둥이 사망한다.

마오 사후의 권력장악을 겨냥해, 4인방은 자신들의 수족인 선전선동조직을 동원해 목청을 높였다. 한편 화궈펑은 이런 세몰이를 묵묵히 지켜보며 조용히 반격을 준비했다. 그는 마오쩌둥의 경호실장이던 왕둥싱(汪東興)의 협력을 얻어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4인방을 일망타진한다. 한 달 후인 10월 6일의 일이었다.

이렇게 덩샤오핑이 실각한 상태에서 4인방을 제거함으로서 화궈펑은 일단 당 내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 자리를 굳힌다. 화궈펑은 당 정치국에서 마오쩌둥의 유언을 강조하며, 당 주석 겸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된다.

마오쩌둥이 화궈펑에게 남겼다는 유언 "자네가 맡아준다면, 나는 안심이다"(你辦事,我放心)를 주제로 한 선전화. 벼락승진한 화궈펑으로서는 좋든 싫든 마오쩌둥의 권위를 계속 업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화궈펑은 중공 권부에 뿌리가 깊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마오쩌둥의 권위를 계속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문건을 잘 학습해 요점을 파악하자學好文件抓住綱」이라는 글을 『인민일보』, 『홍기』, 『해방군보』 등에 일제히 게재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마오 주석이 결정내린 모든 정책을 우리는 굳게 지키며, 마오 주석의 모든 지시를 우리는 끝까지 어김없이 따르자"(凡是毛主席作出的決策,我們都堅決維護. 凡是毛主席的指示,我們都始終不渝地遵循.)

화궈펑 노선을 상징하는 이 문장을 흔히 두 개의 범시(两个凡是)라고 부른다. 화궈펑은 이렇게 마오쩌둥 노선의 유일한 정통 후계자로 자처하는 동시에, 4인방 체포로 구심점을 잃어버린 문혁 수혜세력을 규합하여 자기 수하에 거두었다. 이들이 소위 '범시파'로, 여기에는 화궈펑, 왕둥싱, 우더(吳德), 천시렌(陳錫聯), 지덩쿠이(紀登奎), 천융구이(陳永貴), 니즈푸(倪志福), 장핑화(張平化), 궈위펑(郭玉峯) 등이 포함된다.

문혁 수혜세력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당정 간부 다수에게 지독한 박해를 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는 법, 문혁의 와중에도 반사이익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화려한 경력을 가진 고위 간부 상당수가 숙청당했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빠르게 승진한 젊은 중간간부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운이 좋아서, 혹은 줄을 잘 댈 수 있었던 탓에 능력 이상으로 승진한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일부 인사들은 너무 빨리 승진한 탓에 '헬리콥터' 승진이니 '로켓' 승진이니 하는 뒷말이 나돌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이 죽고 나자 그간 박해를 받았던 많은 옛 간부들이 복권을 기대했고, 또 실제로 당의 요직으로 복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간 문혁의 혜택을 보았던 신흥 간부들 입장에서는 위협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업적과 경력 대부분은 문혁에 충성하고 문혁에 공헌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혁이 폐기되고 잘못된 노선이었다는 평가가 새로 내려진다면 그들의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또한 홍(紅)과 전(專) 사이의 갈등도 있었다. 홍(紅)은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혁명적 지도자, 대중노선을 걷는 간부, 고도로 이념화된 인간형으로 선전과 대중동원의 특기를 갖고 대중들을 이끌어 이데올로기가 제시한 이상사회 건설을 추구하는 유토피아적 공산당원을 말한다. 반면 전(專)은 관리지향적 전문가, 직업 행정가, 고급기술을 소유한 기술자로 작업을 전문화하고 자원을 효과적으로 분배하고 효율적으로 조직하는 실용주의적 공산당원을 의미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이상적인 공산당원은 홍과 전을 겸비한 인재여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이란 어느 한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어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홍과 전의 갈등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은 홍이 전을 압도한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문혁 희생자들은 덩샤오핑이나 천윈(陳雲), 펑전(彭眞)처럼 전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던 반면, 문혁 수혜세력은 대부분 그동안 마오쩌둥이나 4인방에 동조해 홍을 따랐던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4인방'이 제거되었다고 해서 간단히 홍 노선을 버릴 수는 없는 처지였다. 같은 이유에서 이들 문혁 수혜세력을 거두어 자기 세력으로 삼은 화궈펑 또한 함부로 홍 노선을 버릴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결국 화궈펑이 이끄는 범시파의 노선은 홍의 이념추구 노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덩샤오핑으로 대표되는 개혁파의 노선은 전의 실용주의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었다. 범시파는 문혁희생자들의 부활을 저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신격화된 마오쩌둥의 권위에 의존하고자 했다. "마오 주석이 결정내린 모든 정책을 우리는 굳게 지키며, 마오 주석의 모든 지시를 우리는 끝까지 어김없이 따르자"는 범시파의 구호는 이를 잘 보여준다.

화궈펑은 "당과 군부, 그리고 인민 내부에 대혼란을 조성한" 4인방을 제거한 후 마오쩌둥 사상에 입각하여 "안정과 단결을 실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고히 하여 천하대치(天下大治)"를 실현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따라 화궈펑은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선언하고 대신 정치안정과 경제건설을 가져올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20여 년 전,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가졌던 연설 「10대관계론」을 편집, 출판하여 이론적 지침서로 삼았다. 이어서 야심적인 10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20세기 내에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4개 현대화'를 이루어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10개년 계획은 이념 주도, 정신적 요소의 강조, 대중동원 등 전통적인 마오쩌둥 방식을 상당부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 정책을 마오쩌둥 시기의 대약진운동과 유사하다 하여 신약진(新躍進) 혹은 서방과의 교류도 허용한다는 점에서 양약진(洋躍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7년 5월 9일 중국 공산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화궈펑은 “공업은 다칭(大慶)을 배우고. 농업은 다자이(大寨)를 배우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혁명을 계속 추진할 것을 외쳤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른 문제도 많았지만, 계속혁명론이나 10대관계론 같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옛 마오쩌둥 방식을 통해 4개 현대화를 실현하겠다는 생각 자체에 무리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오쩌둥의 심복인 '4인방'을 비판하면서도 '공업은 다칭 유전을 배우고, 농업은 다자이 마을을 본받자!' 같은 낡은 슬로건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오쩌둥 숭배를 끌고가려 했던 것이 화궈펑의 모순이었다



3. 덩샤오핑(鄧小平)의 복권과 실사구시(實事求是) 노선의 승리

일단 4인방이 제거되자, 문혁 시기에 억울하게 쫓겨난 인사들을 복권시켜주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 중에서도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주자파'의 최대 거물인 덩샤오핑이였다.

덩샤오핑의 복권은 단순한 엘리트들간의 파워게임이 아니었다. 이는 마오쩌둥 말기의 음울함과 문화대혁명의 광란에 질린 폭넓은 인민대중, 당 간부, 정부 관리들의 변화에 대한 소망을 등에 업고 있었다. 1977년 1월 저우언라이 서거 1주년을 맞아 천안문 광장에 1백만 군중이 운집했을 때 이런 희망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시대의 흐름을 읽은 예젠잉(葉劍英), 쉬스유(許世友), 웨이궈칭(韋國淸) 등 군부 실력자들도 덩의 복권을 지지했다.

덩샤오핑 본인도 복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추고 새카만 후배 화궈펑의 비위를 맞췄다. 마오쩌둥 사상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각서도 썼다.
화궈펑 동지는 마오 주석의 가장 적절한 후계자이십니다. 동지께서 이렇게 젊고 혈기왕성하시니 프롤레타리아 지배는 적어도 향후 15년에서 20년간 안정될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대대손손 정확하고 완전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우리의 전 당, 전 군, 전 인민을 지도함으로서 당과 사회주의의 위업 및 국제공산주의의 위업을 승리 속에서 밀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결국 1977년 7월에 개최된 중앙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라는 예전 직위를 완전히 회복한다. 군부 지도자 예젠잉 또한 전국인민대표대회 주석으로 임명된다. 화궈펑은 여전히 당과 정부의 최고지도자로 남았지만, 옛날 마오쩌둥 같은 중량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외부 관찰자들은 이 상황을 화궈펑, 덩샤오핑, 예젠잉의 불안한 3두 체제처럼 인식한다.

덩샤오핑은 처음부터 화궈펑 밑에서 붙어 있을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덩은 복권이 되자마자 인사, 경제, 그리고 이데올로기라는 세 방향에서 허약한 화궈펑 체제에 교묘하게 구멍을 뚫기 시작한다.

우선 인사의 핵심은 문혁피해자들의 복권이었는데, 문혁피해자들이 더 많이 복권될수록 문화대혁명의 노선 견지를 주장하는 범시파들에게 불리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범시파가 문혁피해자들을 복권시켜주지 않는다면 그만큼 범시파에 대한 불만이 더 쌓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 식으로 무자비하게 상대를 찍어누를 힘이 없는 범시파는 계속해서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했다. 이 약점을 간파한 덩사오핑은 심복인 후야오방(胡耀邦)을 당중앙 조직부장에 심어놓고 은근히 작업을 추진하며 인심을 등에 업는다.

다른 한편으로 덩은 화궈펑도 동의하는 '4개 현대화 노선'의 실행과 관련하여 파산상태인 옛 마오쩌둥식 군중동원 경제개발 노선을 은근히 흠집내면서 전(專)의 노선, 즉 실용주의파의 우월성을 부각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마오쩌둥의 모든 결정과 지시를 맹종하자는 '양개범시'의 논리적 취약성을 걸고 넘어진다.

이때 덩샤오핑 또한 마오쩌둥의 어록을 끌어다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즉 "맑스와 엥겔스는 '뭐든(凡是) 옳다'란 말을 한 적이 없고, 레닌 스탈린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마오쩌둥 자신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마오쩌둥은 "누구나 일을 하노라면 착오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양개범시'를 말한단 말인가라는 주장이었다.

일리있는 말이었지만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마오쩌둥 어록을 감히 정면에서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자연히 '양개범시'에 대한 공격도 그다지 탄력을 받지 못했다.

이때 난징 대학 철학과 교수 후푸밍(胡福明)이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란 논문을 집필한다. 이를 읽어본 후야오방은 이를 개혁파의 중요한 이론적 무기로 삼기로 하고 범시파의 실력자 왕둥싱의 검열을 피해 『광명일보』에 게재케 한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인민일보』, 『해방일보』에도 이를 전재케 하고, 10여 개의 지방지에도 실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일개 철학 논문이 당기관지를 비롯한 관영언론들에 우르르 중복게재되는 일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은 오직 한 가지 이유, 즉 권력의 개입으로만 설명할 수 있었다. 과거 문화대혁명이 일개 연극평론에서 시작되었던 것처럼, 당 중앙에서 대대적인 대중운동이나 권력투쟁이 시작되려 한다는 징조였다.

뒤에 '진리표준논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이 글은 마오쩌둥의 어록 그 자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은 피하면서, (마오의 어록을 포함한) 모든 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뒷받침하는 간명한 논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개혁파가 이 논쟁에서 승리하면 간접적인 방법으로 마오쩌둥 어록의 절대성을 깨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범시파는 이 글을 게재한 『인민일보』 관계자를 경질하는 등 반격에 부심했지만, 개혁파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없었다. 범시는 처음부터 죽은 이의 권위에만 의존하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이었기 때문에, 상대의 입을 틀어막는데 실패하자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된다.

약 1년 반에 걸친 치열한 논쟁 끝에 1978년 12월, 덩샤오핑 파는 화궈펑 파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거둔다. 중앙공작회의에서 화궈펑과 왕둥싱은 양개범시에 대한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이를 대신해 덩샤오핑의 연설인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를 추구하며, 일치 단결하여 앞을 내다 보자解放思想、实事求是、团结一致向前看」가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의 주제보고로 채택된다.

이 회의에서 정치국 확대로 천윈, 후야오방, 덩잉차오(鄧穎超), 왕전(王震) 이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고, 화궈펑파의 주력인 왕둥싱은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밀려난다. 이후 수 년 간에 걸쳐 덩샤오핑은 화궈펑 세력의 팔다리를 자르며 단계적으로 몰아내지만, 승부는 이 때 이미 결정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후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11기 4중전회(1979.09): 문혁 희생자 펑전(彭眞)이 정치국에 복귀, 자오쯔양(趙紫陽)이 정치국원이 됨.
11기 5중전회(1980.02): 문화대혁명 초기에 박해를 받고 죽은 류샤오치를 복권시키고, 덩샤오핑파의 후야오방, 자오쯔양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 반면 화궈펑파인 왕둥싱, 우더, 천시렌, 지덩쿠이가 정치국에서 밀려남. 문혁 이전의 중앙서기처를 부활시킴. 이곳 서기들은 문혁 피해자들로 채워짐.
전인대 5기 3차회의(1980. 9): 자오쯔양이 화궈펑의 국무원 총리 자리를 빼앗음.
정치국 확대회의(1980.11~12): 아홉 차례의 회의를 통해 화궈펑을 공격함. 화궈펑의 중앙위원회 주석 직위는 후야오방이, 중앙군사위 주석 직은 덩샤오핑이 빼앗음.
11기 6중전회(1981.6): 화궈펑의 당과 중앙군사위 주석 직 사임을 당이 재확인.
중공 12차 당대회(1982.9): 화궈펑 정치국에서 사임. 문혁피해그룹인 완리(萬里), 후챠오무(胡喬木), 야오이린(姚依林), 양상쿤(楊尙昆) 등 정치국 진입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의 주제보고가 된 덩샤오핑의 연설 「사상해방 실사구시…」는 계급투쟁과 계속혁명에 초점을 맞춘 마오쩌둥 노선을 대신해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를 당과 국가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과제로 설정했다는 의미에서 개혁개방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전환점으로서 11기 3중전회의 중요성은 그 전후에 해당하는 78년 2월과 79년 6월의 '정부사업(工作)보고'를 비교해보면 바로 드러난다. 이 보고는 덩샤오핑이 아니라 화궈펑이 내놓은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자.

전자에서 화궈펑은 (1)문화대혁명은 "무산계급독재 상의 위대한 창거"라고 옹호, (2)"무산계급독재 하의 계속혁명"을 거듭 강조, (3)자본주의 부활 위험 경고, (4)류샤오치, 린뱌오, 4인방을 묶어 '주자파'로 규정, (5)4인방을 '극우파'로 규정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1)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함구, (2)'무산계급독재 하의 계속혁명' 구호 사라짐, (3)자본주의 부활 위협 경고는 4인방의 주장이었음, (4)류샤오치 비난 사라짐, (5)4인방은 '극좌파'라고 말을 바꾼다. 또한 그간 끊임없이 강조해 왔던 '계급투쟁'에 대해서도 말을 바꾸어 "금후 대규모의 폭풍과도 같은 대중적 계급투쟁은 이미 필요하지 않으며 또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마오쩌둥 계승 노선은 완패한 것이다.



4. 마오쩌둥 격하운동과 역사재평가

덩샤오핑 집권 후에 마오쩌둥 격하운동이 벌어진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이지만 정작 당사자는 펄쩍 뛰며 부인한다. 일례로 1983년 9월 9일자 『북경주보』를 보자. “최근 서방측의 일부 ‘중국문제전문가’들은 마오쩌둥 동지가 서거한 후의 중국에 ‘마오쩌둥 탈피(非毛化)’에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고 떠들썩하게 선전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일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非毛化’를 덩샤오핑 동지와 결부시키는 언사는 말도 안 되는 허언”이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이 글이 설명하는 마오쩌둥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좀 더 들어보자.

마오쩌둥 사상은 마오쩌둥 동지 개인의 모든 언행의 집합체가 아니라, 일련의 기본원리에 의하여 구성된 사상체계이며 맑스·레닌주의의 중국에 있어서의 적용과 발전이며, 마오쩌둥 동지를 탁월한 대표자로 하는 중국공산당원의 집단적 지혜의 결정이다. 마오쩌둥 동지가 특정한 시점, 장소, 조건하에서 말한 것을 모든 일에 들어맞추고 잘못 말한 것도 그대로 행하는 것은 맑스주의의 태도가 아니다.

이와 같은 '공식 해석'을 통해 덩샤오핑은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을 죽은 마오쩌둥 개인으로부터 빼앗아 당의 것으로 만들었다. 마오쩌둥의 행적 중에 잘 된 것은 '당의 집단적 지혜의 결정'이고, 잘못된 것은 마오쩌둥 '개인의 착오'인 셈이다. 마오쩌둥 만년의 과오는 바로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에서 이탈한 것이며, 내용을 따져보지도 않고 마오쩌둥의 아무 말이나 맹종하는 화궈펑 같은 범시파들은 "맑스주의의 태도가 아니"다. 이는 마오쩌둥을 신격화된 존재에서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으로 끌어내림으로서, 과거 마오쩌둥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공식 해석'은 1981년 6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발표된 공식 과거사 평가인 「건국이래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關於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이하 '역사결의')를 통해 천명된 것이다. 이 '역사결의'는 오늘날까지도 국가공인의 역사해석으로 부동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은 공과가 모두 있었으나 공적이 70%라면 과오는 30%라고 하였다. 이러한 조심스러운 평가는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보다는 훨씬 관대한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이자 40년 이상 중국공산당을 통치한 최고지도자로서, 소련에 있어 레닌과 스탈린을 합쳐놓은 것 같은 위상을 갖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다음 레닌의 '올바른 노선'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을 전면적으로 비판할 경우, 돌아갈 '올바른 노선'이랄 것이 남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왜 중국공산당이 중국을 통치해야 한단 말인가. 마오쩌둥의 지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류투성이라면서? 중국공산당은 이런 해석을 취할 입장이 못 되었다.

덩샤오핑 자신도 이 점을 솔직하게 지적하였다.
마오쩌둥 동지가 범한 착오를 포함한 모든 오류에 대해서는 조금도 애매함이 없이 비판해야 한다 … [하지만] 마오쩌둥 동지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서거하는 날까지 줄곧 우리 당의 영수였다. 마오쩌둥 동지의 착오에 대해서 지나치게 써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쓰면 마오쩌둥 동지에게 먹칠을 하게 되며 또한 우리 당과 우리나라에다도 먹칠을 하게 된다.

결국 덩샤오핑 체제는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것에 의해 지금까지 지도되어온 당과 국가의 정통성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정치적 고려를 해서 다소 억지스러운 이론적 곡예를 펼친 셈이다. 그렇다면 총괄해서 공적이 70%, 과오가 30%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공적이고, 무엇이 과오라고 규정했을까?

그 기준이 되는 해는 1956년이다. 즉 대장정 중에 마오쩌둥이 당의 지도권을 확보한 후 항일전쟁을 거쳐 국민당을 쳐부수고 대륙을 통일해 인민공화국을 세우고, 기본적인 사회주의화를 마칠 때까지는 마오쩌둥이 옳았으나, 그 이후 대약진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극좌적 오류에 빠져들기 시작해 문화대혁명으로 정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5. 화궈펑에 의한 대안적 개혁의 가능성과 한계

이제 실제로는 본격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던 화궈펑 노선에 대해 좀 생각해 보자.

공정히 말해서 화궈펑은 아무런 개혁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나름의 야심찬 청사진을 제시했다. '10개년 계획'을 통해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4개 현대화'를 이루어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4개 현대화'는 개혁개방을 추진한 덩샤오핑의 목표이자 구호였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사실 '4개 현대화'는 좀 더 깊은 역사가 있다. 이는 1973년 당시 전(專)을 대표하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천명한 노선이고, 그 실무책임자는 덩샤오핑이었다. 그리고 화궈펑의 '10개년 계획'은 1975년 덩샤오핑이 감수했던 옛 '10개년 계획'을 다소 수정한 것이었다. 이 계획을 화궈펑이 들고나왔을 때 덩샤오핑이 신랄하게 공격했던 것은 다소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었다.

또한 '범시'론이 내세운 명분과는 달리, 화궈펑은 마오쩌둥 말년의 정책을 100% 그대로 따라간 것도 아니었다. 문화대혁명을 종결짓고 '4인방'을 제거한 것은 물론이고, 대약진운동 이전의 오래된 마오쩌둥의 연설인「10대관계론」을 재조명하면서 은근슬쩍 그 이후 계속되었던 마오쩌둥의 극좌적 노선을 대신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유산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선별적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40여 년 동안 중국공산당을 지배해 왔다. 그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기 때문에, 잘 뒤져 보면 그의 어록에는 오른쪽 왼쪽 앞쪽 뒷쪽 할 것 없이 다양한 방향을 가리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물론 대세는 왼쪽이었지만 말이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 적절한 주장을 선택하고 해석할 여지는 상당했다. 이는 수천 년 전 예수나 석가, 무함마드의 어록이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해석되고 설교될 수 있음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범시'의 진정한 목적은 단지 마오쩌둥이 죽은 뒤까지도 마오쩌둥의 말씀에 신성한 권위를 계속 부여한 다음, 화궈펑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지배집단만이 그 권위를 독점하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범시가 필요했던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덩샤오핑 같은 개혁파의 도전을 물리치고 화궈펑 파가 계속 집권하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접근법은 극소수의 최고지도부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의 능력과 지혜를 활용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는 점이었다.


6. 중국의 농업개혁: 다자이 운동의 몰락과 집단농업의 해체

중국 개혁개방 노선의 제 1단계는 보통 덩샤오핑이 화궈펑을 꺾은 1978년의 11기 3중전회부터 84년 10월의 제12기 3중전회까지의 6년 간으로 잡는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경제적 변화는 인민공사 같은 집단농업체제를 해체하고 농업을 사실상 자영농 방식으로 되돌린 데 있었다.

11기 3중전회에서는 농업에 관한 「중공중앙의 농업발전에 관한 약간의 문제에 관한 결정」「농촌인민공사공작조례」라는 두 가지 결의가 내려졌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치유하기 위해 '주자파'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추진했던 정책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1)사상투쟁을 다그쳐 농업생산을 방해하지 말 것, (2)농촌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함부로 노동력을 동원하지 말 것, (3)농가부업이나 텃밭 경작 등 허용된 활동은 모두 사회주의 경제이므로, 자본주의 딱지를 붙여 괴롭히지 말 것, (4)분배는 노력과 능력에 맞추어 하며 획일적으로 공평해선 안 됨 등을 강조하였다. 이는 그간 계속되어온 좌경 농업정책에 제동이 걸렸음을 뜻했다.

이런 역전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서두에 언급했었던 '다자이(大寨)에서 배우자'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964년에 마오쩌둥의 지시로 전국에 보급되었고, 1975년부터는 화궈펑의 주도 하에 이룩된 농업의 대대적인 발전 성과로 선전되어 왔었다. 이제 화궈펑이 몰락함에 따라 다자이 운동의 추진력도 사라진다.

앞에서 다자이 운동을 소개하면서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으로 각성된 농민의 정신력으로 자연환경을 개조하고 주어진 생산조건을 뛰어넘어 부유한 물질적 조건과 사회주의 공동체의 덕성을 겸비한 유토피아적 농촌사회를 건설"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었다. 그런데 '농민의 정신력으로 자연환경을 개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말은 보통 인민공사 같은 대단위 조직이 하부의 여러 생산대에 소속된 농민을 동원해 인력으로 대단위 치수공사 같은 것을 해치우는 것을 뜻했다. 이런 동원은 '혁명정신에 충만한'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게 자발적일 리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럼 "정신력으로 … 주어진 생산력을 뛰어넘어"가 어떤 의미인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덩샤오핑이 주도한 11기 3중전회의 새 농업정책은 농민이 자기 농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상부조직이 농민들을 이런 부역에 동원하는 것을 규제하고, 사상투쟁을 앞세워 농민들을 다그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새 농업정책이 발표된지 두 달 후, 다자이 운동의 본거지인 산시성 당위원회는 운동을 획일적으로 보급하려 했던 행태와 당의 올바른(이번에 새로 정해진) 농업노선을 무시했던 과오를 자아비판하고, 다자이 마을이 속한 시양(昔陽)현에서는 1973년 이후 5년 동안 식량생산량을 허위보고했음을 고백하는 등, 이제 다자이 운동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인민일보』나 『홍기』 등 관영매체가 주장한 다자이 운동의 결함은 (1)사업성과가 과장됨, (2)실적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보조금을 통해 조작됨 (3)이들이 자랑한 치수사업(西水東調)는 불합리한 공사임, (4)지역 특성을 타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보급이 어려우며 억지로 모방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킴 등이었다.

결국 화궈펑이 국무원 총리 직을 사임한 후인 1981년 2월, 『인민일보』는 다자이 마을과 시양현이 「무산계급 독재하의 계속혁명」을 주장하는 「극좌파노선」을 표방해온 결과, 다자이 운동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는 중앙의 최종 판결을 전한다.

이렇게 마오쩌둥과 화궈펑의 농업정책을 상징하는 다자이 운동이 몰락하는 한편, 덩샤오핑의 새로운 농업정책인 농업생산책임제가 떠오른다. 인민공사나 다자이 운동이 대단위 조직과 집단농업, 대규모 농민동원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농업생산책임제는 개인의 경제적 동기를 활용하기 위해 더 소규모 단위에게 책임을 주려고 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상반된 전략이었다.

농업생산책임제는 작업조를 단위로 생산을 책임지는 포산도조(包産到組). , 개별 농가에게 책임을 맡기는 포산도호(包産到戶) 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처음에는 작업조에게 생산을 맡기고 초과생산에 따른 인센티브를 받는 포산도조만을 허용했지만, 지방에서는 곧 상부의 지시를 융통성 있게 해석해 포산도호로 넘어가는 경향이 빠르게 증가했다.

안후이(安徽)성 성위 서기 완리는 포산도조를 시범 실시하고, 이듬해에는 안휘성 전 지역에서 포산도호를 실시했다. 자오쯔양도 쓰촨성에서 포산도조를 실시해 큰 성과를 낸다. 이에 "식량을 갖고 싶으면 자오쯔양을, 쌀을 먹고 싶으면 완리를 찾아라要吃粮 找紫阳 要吃米 找万里"는 말이 만들어진다.

이에 좌파 측에서는 아예 경작지를 농가에 나누어주고 경작하는 분전단간(分田單幹) 현상이 일어난다며 격렬히 반발했다. 다자이 마을 당서기 출신으로 농업담당 부총리에까지 오른 천융구이 같은 이는 "이는 곧 우경(右傾)이다. 공유제를 파괴하고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천융구이는 곧 해임된다.

덩샤오핑은 이런 흐름을 추인하면서 농업개혁을 계속해 나간다. 1982년 연초에 발표된 「전국농촌공작회의기요」는 농업생산 책임제는 이미 90% 이상의 농촌에서 실시되고 있으며 그 형태는 다양하다고 했다. 그리고 포산도호도 “사회주의경제의 구성부분”이라고 선언하였다.

종합적으로 보아 덩샤오핑의 농업개혁은 대성공이었다. 1978년 이전 26년간 농업 총생산량의 평균 성장률은 2.6%에 불과했는데, 1978년 이후 1988년까지 10년간의 평균 증가율은 6.5%였고, 특히 1978년부터 1984년 사이에 괄목할 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농가소득도 1978년에서 1984년 사이에 평균 2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7. 끝으로

이렇게 하여 1980년대 초까지 중국에서 덩샤오핑이 일으킨 개혁개방 노선 수립과정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흔히 공산당 1당통치를 계속 유지하면서 경제 분야의 개혁과 대외개방에 치중한 것처럼 요약된다. 그 설명이 요점을 잘 짚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개혁개방이 그저 특구나 몇 개 만든 것은 아니다. 개혁개방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국에서는 지도부 교체를 포함한 인적청산, 광범위한 사면복권, 과거사 재평가,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좌경 이데올로기와의 결별, (이전 시대와 비교해서지만) 언론과 창작 사상의 자유 대폭 확대 등이 이루어졌다. 경제적 측면만 보아도 집단농업으로부터의 탈피라는 근원적인 농업개혁과 비약적인 농업 생산성 향상이 개혁의 정당성을 강화해주었다.

그러니 "북은 이미 80년대 초 중국 수준의 개방에 돌입"했다느니, "김정일이 등소평이 될 수가 있다"느니 하는 소리는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선 개혁개방 수준에 대해서 말하자면 중국의 경우 84년쯤까지는 첫 단계 경제개혁의 핵심인 집단농업 해체가 끝난 상태였고 그 전에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광범위한 개혁과 변화가 이미 일어났었다. 중국식 개혁개방(과 그에 따른 경제발전)에서 개혁과 개방은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개혁이 모든 것의 토대에 위치하고 있어 개혁 없는 단순한 개방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개혁과 변화가 없이 특구 모델만 덜렁 가져와서 심는다고 중국식 개혁개방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김정일과 덩샤오핑의 비교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 위에서 설명한 것을 읽어본 분들은 다들 느끼시겠지만, 김정일의 입장이나 그간 행적은 덩샤오핑보다는 화궈펑과 닮은 구석이 훨씬 많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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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net | 2010/01/21 13:02 | 정치 | 트랙백 | 핑백(5) | 덧글(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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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10/01/23 07:06

... "다자이에서 배우자", 화궈펑, 개혁개방의 말미에서 간단히 언급했었던 중국과 북한의 비교에 관한 보론. 앞선 글이 중국의 사례를 설명하는 글이었다면, 이번 글에서는 북한을 중심 ... 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10/05/10 23:29

... 좌파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이라는 광풍을 만나 그대로 침몰하고 말았다. 이는 성공적인 경제개혁을 위해서는, 그 경제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적절한 정치개혁이 동반되어야 함을 강력히 시사한다. 4. 주민들 밥 먹이고 입히는 데 쓴다고? 누누히 지적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북의 개혁 개방이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 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10/07/17 16:29

... 덕택이라고 지적합니다. 중국에서 경제특별구역이 성공한 비결도 내부 경제개혁이 진전을 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동감이다. 특구만 흉내낸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부 개혁이 선행해야 한다는 게 그간 내가 Garry씨에게 제기해온 반론의 골자다. 중국의 무역상들과 투자자들이 북-중 국경지역, 특히 북한 쪽 국경으로 넘어가서 교 ... 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11/07/06 05:47

... 정책변경에 얼마든지 반대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가 이채롭다. 저건 죽은 마오쩌둥이 남긴 권위에 의존하려했던 화궈펑의 두 개의 범시(两个凡是)와 똑같지 않은가. 출처는 경향, 중앙 등. ... 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11/10/18 06:51

... 체제전환의 과정을 겪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국가이다. (북한이 개혁개방 분야에서 중국과 얼마나 대조적인지는 이 블로그에 공개된 두 편의 글, "다자이에서 배우자", 화궈펑, 개혁개방과 김정일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뒤따를 수 있을 것인가?을 참조) 북한을 이렇게 보는 분석가들은 많다. 예를 들어 척 다운스의 『북한의 협 ... more

Commented by 겔먹 at 2010/01/21 13:14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배경에 대해 정리해둘 필요성을 느껴서 간단히."

간단히.. 라는 말에 무릎 꿇었습니다. 아아..
뭔가 한 시대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한 저는, 소넷님의 '간단히' 정리한 것을 겨우 이해했을 뿐..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0:32
하하, 각각의 사건들이 이야기하자면 긴데, 그냥 과감하게 요약했다고나 할까요.
Commented at 2010/01/21 13:3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0:38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국이 현실사회주의 국가 중 점진적 개혁의 대표기는 하지만, 점진적으로 했다고 해서 전체적인 개혁의 폭이나 깊이가 빈약한 건 전혀 아니거든요. 중국과 비교한다면 북한은 지난 20년 동안 중국이 첫 2년간 진행한 단계에도 오지 못했다는게 공정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10/01/21 13:53
잘 읽고 갑니다. 특히 다자이 운동을 중심으로 당시 중국의 정치-사회적 정황까지 요연하게 정리해주시니 보기가 편했습니다.

말씀하신 사례를 다소 위험하지만 북한 사례에 대입시키자면, 북한은 오히려 대외개방을 할 시기에 다자이 운동과 같은 성격의 '천리마 운동'을 해버림으로서 중국과는 '다른 길'을 택한게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사족같은 질문입니다만, 저런 다자이 운동 외에도 안강헌법(鞍鋼憲法)이라고 불릴 정도였던 '안산에서 배우자'슬로건이나, 중국판 스타하노프라고 할만한 '레이펑(雷鋒)'운동은 당시의 정치-사회와 어떻게 얽혔는지 궁금하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1:20
실제로 북한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 둘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후발주자로서 군중노선을 수입해 왔다는 거죠. 저는 김일성 뿐 아니라 김정일도 의연히 그런 방식을 계속 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들어 나온 뉴스만 봐도 그런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더군요.

레이펑은 마오쩌둥 우상화와 안강은 삼결합과 관계가... 이것도 각각 쓰자면 한 편 정도의 이야긴 나올 것 같네요.
Commented by 행인1 at 2010/01/21 14:14
마오도 사후에는 '격하운동'의 대상이었군요. 그나저나 얼마나 승진이 빨랐기에 '로켓'비유까지 나오는 겁니까...;;;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0:41
스탈린 횽도 당했는데 주석님이라고 무사할 수가;; 고속승진은 여러 사례가 있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다자이 운동 지도자 천융구이를 들 수 있겠군요. 반 문맹의 마을 이장님에서 다자이 운동 덕에 농업담당 부총리가 되었으니까요.
Commented by Ya펭귄 at 2010/01/21 20:52
(80년대)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모택동격하운동'
Commented by 행인1 at 2010/01/21 21:03
국민학교에 들어간게 89년인지라...
Commented by IK at 2010/01/21 14:52
http://article.nationalreview.com/?q=MzY4NWU2ZjY3YWYxMDllNWQ5MjQ3ZGJmMzg3MmQyNjQ=

Soon after the Soviet-led invasion of Prague, Ceausescu switched over from Stalinism to Maoism, and in June 1971 he visited Red China.

There he learned that the KGB had organized a plot to kill Mao Zedong with the help of Lin Biao, the head of the Chinese army, who had been educated in Moscow. The plot failed, and Lin Biao unsuccessfully tried to fly out of China in a military plane.

His execution was announced only in 1972.

During the same year I learned details about that Soviet plot from Hua Guofeng, the minister of public security — who in 1977 would become China's supreme leader.


소넷님의 글과 큰 상관이 없지만, 화궈펑의 이름이 나와서 덧글 남깁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1:34
네, 인용해주신 대로 화궈펑이 중앙에 올라와서 공안부장을 했었죠.
Commented by Matthias at 2010/01/21 15:10
아니, 이런 글은 게선생님의 관심을 끌 수가...(퍽)

대제께는 '간단히'지만 저에게는 '아둥바둥 겨우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OTL
그래도, 이런 글 덕분에 대제님 이글루에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ㅋ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1:33
하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あさぎり at 2010/01/21 15:15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은 동네였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1:22
국민을 가만 두지 않고 끊임없이 달달 볶죠.
Commented by 일화 at 2010/01/21 15:25
저도 잠시 중국농업사에 관심을 가졌던 때가 있어 관련서적(제목은 기억이 안난다는...)을 읽어 보았었는데, 그 책에서는 중국의 치수사업은 거국적인 노력과 현대적인 과학기술이 필요한 대규모 사업외에는 명/청대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평가하더군요. 그외에도 화학비료나 전기모터의 사용 정도외에는 특별히 개선할 점이 많지 않았다고 하고요.
그럼에도 중국공산당 집권초기에는 자신들이 보기에 문제가 많은 토지소유제도를 개혁하면 농업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낙관론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게 각종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하더군요.
소넷님의 글을 읽다보니 다자이운동이 이데올로기적인 낙관론의 전형적인 예가 아닌가 생각되서 덧글을 남겨 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1:25
네, 맞습니다. 중공 좌파의 생각은 중국 농민은 엄청난 잠재력이 있는데, 단지 봉건적 굴레에 눌려 잠재력을 발휘할 수가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농민을 짓누르는 상부구조를 치워 주고 바른 사상(모택동사상)으로 고양되면 그 잠재력이 현실화되어 대단한 생산력으로 분출할 것이다... 대충 이런 식의 논리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동쪽나무 at 2010/01/21 15:43
G선생께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0:31
저도 궁금합니다.
Commented by Luthien at 2010/01/21 18:01
ゲゲゲの鬼太郎...(?!)
그런데 이미지가 액박 같은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0:24
수정했습니다.
Commented by dunkbear at 2010/01/21 18:04
북한은 결국 개방의 시기를 놓친데다 극심한 혼란 없이 개혁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김정일의 후계자인 김정운 체제 다지기도 너무 늦게 시작했고 그
가 후계구도를 이으려면 화궈펑과 범시노선처럼 김일성-김정일의 후광에 기대야 할
텐데 그랬다가는 개혁으로 가는 정책 수립과 실행이 여의치 않을테니...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0:31
저도 김정일에겐 별 기대를 갖고 있지 않지만 차기 지도자가 김정일을 완전 매장하는 건 한 가지 유용한 전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보면, 김일성 때까지는 어려워도 살만했는데 김정일 때는 끝장이었다느니, 김일성은 존경을 받았지만 김정일은 두려움의 대상이긴 해도 존경은 아니었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니 마오쩌둥 통치를 2시기로 나누어 앞은 좋고 뒤는 나빴다 이런 식으로 하듯이, 김일성의 뜻은 좋았는데 김정일이 잘못해서 망했다 모든게 김정일 탓이다 이런 식으로 몰고 가는 거죠. 그런데 이걸 잘 하려면 김정일의 혈육으로는 어렵겠죠.
Commented by 음Q at 2010/01/21 18:20
음. 그림이 전부 엑박이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0:24
수정했습니다.
Commented by Ya펭귄 at 2010/01/21 19:28
뭐... 모택동의 공과비율이 설령 실제로는 3:7이었다고 가정해도 당 수준에서는 7:3이하의 평가를 내리기가 힘든 것이 결국 중공의 한계인.....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1 20:26
'역사결의'가 나오기 전 당 내부토론용 문서들은 보다 험악한 것도 많았다고 합니다. 뭐 그리 중요한 이야긴 아니지만.
Commented by 계원필경 at 2010/01/21 21:33
죽은 사람의 유언으로 통치하는 건 정말 할짓이 못되는 군요...(그걸 잘 간파한 덩샤오핑은 대인배... but, 지금도 죽은 사람의 망령이 통치하는 어느 나라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2 09:22
네, 화궈펑은 자기 정치적 입지가 취약하고 경쟁자가 막강해서 그런 면도 있는데, 김정일은 사실상 그의 자리를 위협할만한 실력자가 없으면서도 그 방향을 굳건히 고수하고 있는 셈이지요.
Commented by newroman at 2010/01/21 21:43
북한은 남한이라는 물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활용하면 현재 북한이 겪고 있는 경제난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성공단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300~400억 정도라는데 이걸 확대하고 이 수입을 식량난 해결에 집중하는 정도로도 배급체계를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럼 이걸 업적으로 내세워 "이밥에 고깃국 유훈을 받들었다"고 선전할 수 있을겁니다.

인민들이 가지는 경제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편이라, 사실 정치쪽에서 조금만 노선을 수정하면 북한 경제는 금방 답이 나올 것이고 그럼 그 지도자는 인민의 영웅으로 떠오를텐데 참 아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덩샤오핑 같은 지도자를 가지지 못한 것이 인민의 가장 큰 불행이군요.
Commented by at 2010/01/21 23:56
지꼴리면 총질하고, 서해안에다가 불안조성하고, 핵실험하는데...


남측 호구들이 북측 의도대로 움직여 줄까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2 09:33
북한이 90년대 대기근을 겪었고 2000년 이후로도 거의 매년 기근설이 떠돌고 있는데, 정작 농업개혁은 하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특구나 개성공단에서의 수입이 제2경제(수령경제)가 아니라 인민경제로 투입되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식량수입에 주로 사용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흐름을 의심할만한 근거가 적지 않습니다. (과거 일련의 포스팅에서 이 이야기를 다루었으니 여기서는 생략)
Commented by Skyjet at 2010/01/22 03:43
범시파에 전개했던 정책은 꼭 북한의 유훈 정치를 보는 듯 하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2 09:17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joyce at 2010/01/22 13:32
저런 노선 변화가 정치 세력의 교체 없이 이루어졌다고(&질 수 있다고) 믿는 게 불가사의한 일일 텐데 말이죠.
오늘도 좋은 말씀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3 13:47
맞는 말씀입니다.
Commented by 바보이반 at 2010/01/22 14:16
"자네가 맡아준다면, 나는 안심이다."

어째 야라나이카 성립 분위기....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3 13:48
하하, 사실 저 글도 어떤 맥락에서 써 준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실은 그런 것입니카!
Commented by 아이군 at 2010/01/22 17:03
쩝.. 혈통으로 이어진 북한 지도층은 결국 질질 끌 수 밖에 없다는 거군요.

북한의 개혁 개방이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과는 다르게 북한은 비빌 언덕이 꽤 있으니깐요(뭐 우리도 그 중 하나지만)

문제는 그 반대로 북한 지도부 쪽에서 개혁 개방은 더 늦게 하더라도 괜찮으니깐 상황이 안좋아지더라도 일단은 '우리식'으로 밀고 나가 보자 라고 생각하는게 문제 인듯 합니다.

뭐 이렇게 생각 해 줄 사람이 남아 있는 가 하는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3 13:56
그럴 것 같습니다. 마오쩌둥이 열심히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한, 자기의 유산을 철저하게 지키고 가꾸어 나갈 그런 후계자를 김일성은 찾아낸 거지요;;;

그리고 개혁개방을 언제 하는지는 정해진 게 없죠. 늦었다고 생각될 때라도 그때부터 시작하면 되는 문제이니까요. 잃어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그건 어차피 지나간 문제이구요. 문제는 역시 내부의 결단.
Commented by 별마 at 2010/01/22 19:40
저는 다른 그 무엇보다
'오른쪽 왼쪽 앞쪽 뒷쪽 할 것 없이 다양한 방향을 가리키는' 마오의 어록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인상 깊게 읽었던 거 같습니다.
화꿔펑이나 덩샤오핑이 가는 방향이 반대였어도
겉으로는 마오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고
오히려 마오가 한 말에서 어떻게든 뭔가를 끄집어내려는 모습이 인상깊었달까요.

북한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어떨지 궁금합니다.
북녘의 김위원장도 자기 아버지 수령 동무한테서 뭔가 찾으려면 찾을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수령 동무가 마오보다 여러모로 딸려서 써먹을 거 자체가 없었을까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3 14:00
이건 what if니까 큰 의미는 없겠지만, 저는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해석을 폭넓게 하는 전형적인 수법은 각론은 묻어둔 채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문구를 끄집어내어 내 맘대로 살을 붙여 적당히 써먹는다든가 하는 건데, 그정도 할 건덕지는 있지 않았을까요.
Commented by 아르니엘 at 2010/01/23 15:04
과연, 즉 북한이 어떻게든 개혁을 해보려면 우선 김씨 왕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군요. 최소한 후계자를 자기 자식으로 임명하지 않는 중국과 비교하기엔 북한은 좀 너무 부족한 느낌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4 10:13
네, 동감입니다. 과거의 유산들이 대부분 악성부채니까요.
Commented by 李相勳 at 2010/01/23 17:12
소련의 수정된 사회주의가 잘못됬다고 그렇게 난리치고 소련과의 관계로 나빠졌지만
중국도 결국... 개방의 시대로~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4 09:54
그렇죠. 결국은 지나가면 다 입씨름이었을 뿐...
Commented by 하리 at 2010/01/23 19:12
이거 소넷님의 글을 볼때마다 감탄을 금치못하겠습니다. 중문과라 중국역사를 배우기는 했지만 고대역사뿐이었지 마오부터 후진타오에 이르는 근대사는 수박겉핥기로 넘어갔거든요.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실록화한다면 삼국지를 뛰어넘는 재미를 보장할수 있으련만 그건 불가능한 일... 혹시 도서를 어떤것을 보면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자세히 알수있는지 추천좀 해주실수 있을까요? 중국어 독해 가능하니 원서를 가르쳐주셔도 문제없습니다.

그나저나 아이폰으로 글쓰기는 넘 불편하다능...^^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4 10:11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글을 쓰면서 참고한 책은 본문 마지막 부분에 정리해 놓았습니다마는, 음...

전체 시대를 한번 쭉 훑는 용도로는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Maurice Meisner)

문화대혁명에 관해서는 대륙과 해외의 시각이 좀 다르기 때문에, 대륙의 시각으로는 『 문화대혁명사 文化大革命簡史』 (席宣, 金春明); 서구의 것으로는 Mao's Last Revolution (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흥미로운 정쟁의 에피소드 중심으로 편집된 책으로는 『모택동 비록』 (산케이신문 취재팀)
이 책은 근래 중화권에서 나온 다양한 책들의 내용을 적당히 모은 것인데, 중국어에 능통하시다니까 읽어보시고 관심이 동하는 에피소드에 관련된 책을 다시 구해 보시는 식으로 접근하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기 류는 다양하지만 『저우언라이 평전』(Barbara Barnouin)을 재미있게 본 기억입니다.
Commented by 에로거북이 at 2010/01/23 19:32
멋진 글 감사합니다.
역시 무슨 일이든 성공하려면 10년-20년 대계를 세워야만 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4 09:53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FELIX at 2010/01/23 19:39
이 당시를 다룬 책중에서는 역시 벤자민 양의 책이 최고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4 09:53
덩샤오핑 전기 말씀이신가요? 잘 읽히고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가오강 사건에 대한 평가는 오래된 책들의 문제를 잘 짚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삼천포 at 2010/01/25 02:56
정확히 흐름을 잘 못잡아내고 있었는데 마지막 보고 이해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Commented by vicious at 2010/01/25 16:45
아.. 좋은 정보를 이렇게 읽기 좋게..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런 글로 G 님의 관심을 얻기에는.. (퍽!)
Commented by sonnet at 2010/01/26 10:06
엄한 탈북자 사이트에 가서 학습이 모자라네 저학력이네 하면서 시비를 걸고 있었데, 거기가 만만해 보이나 봅니다.
Commented by 사처포 at 2010/02/10 01:10
중국의 공업화(등소평 이후의 놀라운 발전) 성공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궁금점이....
1.지역과 인구의 광대함에 따른 순발력문제 : 운동중의 물체는 관성이 있으므로 방향변경시 상당한 시간과 거리가 필요(그 많은 인구와 넓은 국토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짧은 시간에 놀라운 공업화 성과)

2."일당독재는 부패와 독선으로 자멸할 가능성이 높다." : 중국은 지금까지는 이 일반론에 해당돼지 않는 듯.

3.명분과 실제의 괴리 : 등소평이 무슨 재주를 부리든(흑묘백묘론) 중국의 공식이념은 사회주의인데 아무런 마찰없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사이좋게 공존한다.
중국인들처럼 명분을 중요시하는 나라에서...

정말 불가사의한 중국인들이라고나 할까요 ?
Commented by sonnet at 2010/02/10 09:43
1. 그게 균형발전을 포기하고 해안지방만 선별적으로 먼저 발전시켜서 그런 것이고, 내륙은 아직 훨씬 낙후된곳이 많습니다. 서부대개발 프로젝트도 그런 상황 때문에 나오는 것이구요.

2. 덩샤오핑의 중요한 정치개혁 중 하나가 노땅들을 대거 퇴진시켜 지도층의 나이를 10~20살 젊게 만들고 임기제를 정착시킨 것입니다. 소련은 망할 때까지 일곱 서기장이 있었지만 끝까지 임기제를 정착시키지 못했고 마오쩌둥도 혼자서 죽을 때까지 해먹은 것과는 크게 대조되는 점이죠. 저 개인적으로는 집단지도체제와 임기제의 정착이 조직에 계속 새로운 피를 공급하기 때문에 일당독재의 약점을 상당부분 희석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3. 제 생각엔 중국인들보다는 한국인이 명분을 중요시하는 것 같은데... 하여간 이론적으로는 왜 지금 중국이 사회주의여야 하나를 뒷받침하는 곡예가 계속 관방으로부터 산출되고는 있습니다.
Commented by 시진핑개새끼해봐 at 2017/09/28 15:02
2. 위대하신 인민의 영도자 시진핑 주석께서 덩샤오핑의 업적인 임기제와 집단지도제를 갈아 버리고 있지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17/10/08 03:02
3. 시진핑은, 기왕 가면을 벗고 일당독재할 바에는 사회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곡예'조차도 때려치고 대놓고 독재로 치닫고 있는데... 당장은 몰라도 중국이 안에서 곪아들어가는 게 빤하네요. 자신은 역사의 선례가 보여준 '결과물'에서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하는지.
Commented by 섭동 at 2010/05/10 22:50
한국 보수(?)들이 러시아와 중국을 비교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은 덩이 마오를 까지 않고 받들고 이어받아서 성공했다. 러시아는 고르비가 구체제를 까고 뒤집어서 망했다. 그러니 한국도 박정희를 까지 말고 존경하고 이어받아야한다.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5/10 23:01
그럼 敬而遠之라는 네 글자 방침을 전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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