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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문화정책과 그 이후(2)

“이 때, 아마도 감각이 예민한 문학가는 또한 현상에 불만족을 느끼고, 입을 열어 말을 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전에 문학가의 말을 정치혁명가는 찬동했습니다. 혁명이 성공하기에 이르자, 정치가는 이전에 반대했던 그런 사람들이 사용했던 낡은 방법을 다시금 채용하기 때문에, 문예가는 여전히 불만족을 면하기 어렵고, 또한 배제당하거나 알력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으며, 혹은 그 머리를 잘리게 됩니다.” - 루쉰(魯迅) -



숙반운동과 후펑 비판(1955~56년)

숨은 반혁명분자 박멸, 즉 숙반(肅反)운동은 1955~56년 사이에 당간부와 지식인 계층을 표적으로 진행된 대규모 숙청 사건이었다. 약 20만 명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그 중 2만 명 이상이 처벌받았다. 이 와중에 일련의 문화계 인사들이 반혁명집단으로 몰려 고초를 겪게 되는데 이게 바로 후펑 반혁명집단 사건이다.

문제의 인물 후펑(胡風)은 20세기 전반에 명성을 떨친 마르크스주의 문예평론가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중국좌익작가동맹의 주요 멤버로 오랫동안 활동하고, 일본유학 시절에 반일활동으로 추방되기도 하였다. 즉 그는 겉보기에 아주 훌륭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후펑이 좌익문학운동 안에서 1930년대 이래 공산당의 노선에 철저 복종하는 당권파 마르크스주의 문학가들과 논쟁을 벌여 온 가장 저명한 비 순종파 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당의 입장에서는 이런 거물이 당의 노선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 독자적인 문학관을 피력하는 것은 조무래기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 것보다 더욱 불편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1930년대부터 시작되는 후펑 반혁명(?) 집단과 공산당 산하의 당권파 문예이론가들 사이의 갈등을 살펴보기로 하자.


좌익작가연맹(左聯)의 창립과 소멸

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 중국 문예계는 커다란 정치적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된다. 좌우익으로 나눠 싸웠을 뿐 아니라, 창조사와 태양사 사이에는 '혁명문학' 논쟁이 벌어졌고 다시 이 두 세력은 루쉰을 매도하며 『아Q정전』의 사망을 선포하는 등 좌익 내부에서도 혼전이 전개되었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좌익문예계의 통일전선을 모색하게 된다.

당은 우선 구성원 대부분이 공산당원이었던 창조사와 태양사를 토대로 삼고 다른 한 편으로는 샤엔(夏衍)과 펑쉬에펑(馮雪峰)을 보내 좌익문학계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루쉰(魯迅)을 설득해 대표로 옹립함으로서, 1930년 3월 중국좌익작가연맹(左聯)을 출범시킨다.

양한성(陽翰笙)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1929년 가을, 아마 9월경에 리푸춘(李富春) 동지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 리푸춘 동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논쟁은 정확치 못하며 올바르지 못합니다. 당신들 중 일부의 루쉰에 대한 평가, 그의 활동의 적극적인 의의에 대한 평가는 부족합니다. 루쉰은 5.4 신문학운동으로부터 나온 노전사이고 강고한 전사이며 노선배이고 선진적인 사상가입니다. 그는 우리 당원 개인을 비판했을지는 몰라도 당에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노전사이며 선진적인 사상가에 대해 당의 입장에 서서 우리는 그와 단결하고 그를 쟁취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창조사, 태양사의 동지들이 그토록 엄청난 힘을 기울여 루쉰을 비판하는 건 정확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점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당신과 만나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여러분이 즉시 이 논쟁을 중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 계속하는 건 대단히 좋지 않습니다. 즉시 논쟁을 중지하고 루쉰과 단결하십시오. 세 번째로는 루쉰과 같은 노전사이며 선진적인 사상가가 당의 입장에 서고 좌익문화전선 위에 선다면 얼마나 거대한 영향과 역할을 하겠는가 생각해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중국좌익작가연맹 성립의 경과」

리푸춘은 당시 중국공산당의 강소성위 선전부장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첫째, 창조사 및 태양사의 모든 간행물에서는 루쉰에 대한 비판을 중지하고 설사 루쉰이 우리를 비판한다 하더라도 반박하지 않고 그를 존중한다. 둘째, 샤엔, 펑쉬에펑 등을 보내 당이 이 논쟁을 중지시켰음을 루쉰에게 알리고 우리의 부정확한 방법을 비판하기로 한다.'

루쉰과의 연락책을 맡았던 펑쉬에펑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1929년 10,11월경 나는 루쉰의 도움을 받아 월간 『맹아萌芽』의 간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판한넨(潘漢年)(그는 당시 중앙선전부 간사 겸 중앙문화공작위원회 서기였다. 중앙선전부장은 리리싼(李立三)이었다)는 나를 찾아와 창조사, 태양사 및 루쉰과 그 영향 하에 있는 사람들을 연합시키고 이 세 방면의 사람을 토대로 혁명문학단체를 성립하고자 한다는 당중앙의 뜻을 전해주었다. 판한넨은 나에게 루쉰을 찾아가 의논하라고 하면서 단체명을 ‘중국좌익작가연맹’으로 정하려고 하는데 루쉰이 의견이 어떤지, ‘좌익’이라는 두 글자의 사용여부는 루쉰에게 달려있으므로 루쉰이 만약 이 두글자를 사용하는데 반대한다면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 「펑쉬에펑 좌련을 말하다馮雪峰談左聯

이러한 사례들은 공산당이 루쉰을 포섭해 좌익문예계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하여간 이런 공산당의 전향적인 입장이 주효하여 좌련이 출범하게 되지만, 좌익문단의 갈등은 겉으로만 봉합이 되었을 뿐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공산당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술적인 양보를 한 데 불과했었고, 루쉰과 그 추종자들 또한 자신의 문예관을 꺾어가며 공산당의 노선을 이리저리 추종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갈등이 증폭된 끝에 1936년 초 좌련은 해산한다는 말 한 마디 없이 해체되어버리고 마는데, 이 좌련의 해체에는 '두 개의 구호' 논쟁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두 개의 구호' 논쟁

'두 개의 구호' 논쟁이란 좌련이 나아갈 길을 두고 공산당의 노선지도에 충실했던 저우양(周揚) 일파가 '국방문학' 노선을 들고 나온 데 대해 루쉰과 후펑을 중심으로 한 다른 일파는 '민족혁명전쟁의 대중문학' 노선으로 맞서 싸운 사건이다.

원래 좌련은 -창조사나 태양사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프로(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추구하는 집단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중등교육 문학 시간에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을 카프(KAPF) 등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실제로 좌련의 강령 작성 과정에서 이들은 일본의 NAPF 강령을 많이 참고하였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좌련의 「이론강령」에 그대로 묻어난다.
시인이 예언자이고 예술가가 인류의 인도자라면, 그들은 역사의 전선에 서서 인류사회의 진화를 위하여 우매하고 완고한 보수세력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해방투쟁의 사명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추상적으로 역사의 진행과 사회발전의 진상을 이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이미 인류진화의 질곡이 되고 있으며, ‘무덤을 파는 사람’인 무산계급만이 그 역사적 사명을 짊어지고 ‘필연의 왕국’ 가운데에서 인류 최후의 동포전쟁-계급투쟁을 통해 인류를 철저히 해방시킬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산계급의 해방투쟁의 전선에 서서 모든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요소를 쳐부수고 피압박적이고 진보적인 요소를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당연한 결론이다. 우리의 예술은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피나는 투쟁에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좌련의 기본노선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대중문예화였다.

그런데 국민당군에게 쫓겨 중국공산당이 피나는 장정의 길을 거듭하는 가운데, 화북사변으로 일본이 중국을 향한 침략의 손길을 노골적으로 뻗치게 되자,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은 새로운 국공합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35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7차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한 중국공산당 대표 왕밍(王明)은 8.1 선언(정식 명칭은 「항일구국을 위해 중국공산당이 전체 동포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한다. 이 소식이 상하이의 공산당 지하조직에 전해지자. 좌련 담당 공산당(黨團) 서기이던 저우양과 그 일파는 새로운 공산당 노선에 맞춰 '국방문학론'을 강하게 밀어붙인다.

1935년 12월 저우리보(周立波)는 『매주문학』에 「국방문학에 관하여」란 글을 통해 항일통일전선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파는 자를 제외하면 모두 국방문학 병영 안의 전우다'라고 주장한다. 이어 1936년 3월에는 『생활지식』제1권 11기 전체를 '국방문학론' 특집호로 꾸며 이 주장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인다.

저우양은 여기 실린 「국방문학 건립을 위한 문학의 몇 가지 전제조건」이란 글에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지금과 같은 민족적 위기를 맞아 문단이 반제반일 투쟁을 위해 단결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1)개인의 의견은 제거되어야 함, 2)우경기회주의 극복, 3)좌경 종파주의 관념을 청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우양은 "금후 문예계의 각종 복잡한 파벌은 모두 소멸되고 두 파만 남을 것이다. 하나는 국방문예이고 다른 하나는 매국노문예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곧 우리를 따르지 않으면 다 매국노라는 것이었다.

즉 저우양의 '국방문학'론은 일제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중국에서 문학을 무기로 삼아 민족해방투쟁에 복무하기 위해서는 좌우합작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 포기해야 할 '모든 것'에는 핍박받는 노농대중을 위한 '무산계급 혁명문예의 건립'이라는 좌련의 목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을 고집하는 것은 '좌경 종파주의'라는 것이다.

루쉰의 측근인 후펑은 『문학총보』 제3기에 「인민대중을 향한 문학의 요구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발표해 이에 맞선다. 여기서 후펑은 '모든 항적투쟁은 어디까지나 인민대중의 전쟁이며, 이런 시기의 문학은 당연히 전쟁을 수행하는 노농대중을 위한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다시 쉬마오융(徐懋庸)이 저우양 편에 서서 같은 제목의 글, 즉 「인민대중을 향한 문학의 요구란 무엇인가?」로 후펑을 맞받아친다. 후펑의 주장은 "두루뭉실하고 공허하며 … 고의적으로 남달리 기발한 주장을 내세워 대중의 눈과 귀를 혼란 … 전체 운동의 노선을 분화"시키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형적인 말싸움보다도, 수십 년 후에 그때 왜 그랬는가에 대한 술회가 훨씬 더 시사적이다.
나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으니, 노선이나 정책 문제에 관해서는 반드시 공산당원이 더 잘 아는데 루쉰은 당원이 아니었지만 저우양은 당원이었다. 이 때문에 내가 당을 따라가려면 기본적으로 저우양 등이 말한 것을 믿어야만 했다. - 『徐懋庸回憶錄』

저우양 파는 독자노선을 계속 밀어붙여 6월 7일 좌련과는 별도로 「중국문예가협회」를 결성하고 마오둔(茅盾), 궈모뤄(郭沫若) 등 이미 118명의 가입서명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이에 격노한 루쉰은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펑쉬에펑에게 구술하여 「현재 우리들의 문학운동을 논함」으로 국방문학파의 주장을 반박한다. 이 글에서 루쉰의 주장은 '민족혁명전쟁의 대중문학'이야말로 좌련의 전통인 '프롤레타리아 혁명문학'의 계승이며 '항일 반매국노 투쟁'의 총체라는 것이었다. 또한 루쉰과 그 추종자들은 저우양이 만든 「중국문예가협회」 참여를 거부하며 루쉰, 바진(巴金), 후펑 등 67명의 이름으로 독자적인 「중국문예공작자선언」을 발표한다. 이렇게 노선투쟁을 벌이며 두 개의 새 조직이 출범하게 되어 좌련은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소멸해 버린 것이다.

이는 같은 프로 문학의 일원이라 하더라도 독자적인 문학관을 고수한 루쉰파와 공산당 노선을 그대로 추종하는 당권파 사이에 깊은 골이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엇갈린 행보: 후펑과 저우양

1936년 루쉰이 죽고 나자, 루쉰 파의 중심이 된 인물이 후펑이다. 후펑은 루쉰 생전에도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고, 사후에는 루쉰의 문학과 정신을 충실히 계승하겠다는 의무감을 더 크게 느꼈다. 이에 따라 후펑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잡지 『칠월』 1945년에는 잡지 『희망』을 창간하여 많은 신인 작가들을 배출하고 그 자신도 많은 시와 평론, 문예이론을 발표하였다. 이들이 나중에 몽땅 후펑파로 묶이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국민당 통치지역(國統區) 내 좌파 문인의 제1인자로 떠오르게 된다.

한편 저우양은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어 상하이가 함락되자 '국방문학 논쟁'을 함께 치렀던 저우리보 등과 함께 중공중앙이 위치한 옌안으로 들어간다. 저우양은 상하이 문화계의 상황을 보고하며 당 중앙과 마오쩌둥에게 신임을 얻게 되고, 거기서 중공의 문예관료로서 마오쩌둥의 문예사상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1942년 옌안정풍운동 당시 마오쩌둥이 자신의 문예관을 피력한 「옌안문예강화在延安文藝座談會上講的話」를 내놓자, 저우양은 이 강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스스로 이를 깊이 학습하여 보급에 앞장선다. 또한 그는 옌안대학총장과 옌안대학 루쉰예술학원 원장을 겸직하면서 문예방면에서 일할 간부들을 양성하였다. 여기서 양성된 학생들이 후에 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문화예술 분야 행정의 중견간부가 되어 중국의 문화정책을 이끌어나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저우양은 옌안에서 위로는 당의 핵심권력, 아래로는 다수의 하급간부로 구성되는 탄탄한 인맥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이론 면에서나 조직 면에서나 명실상부한 마오쩌둥 문예사상의 실천자이자 집행자로 자리잡는다.


문예이론의 충돌

그런데 국민당 통치지역에 있던 후펑은 옌안의 사정을 잘 몰랐지만, 막연하게 마오쩌둥의 문예관이 자신과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후펑은 마오쩌둥이 옌안에서 행한 루쉰에 대한 강연을 자신의 잡지 『칠월』을 통해 국민당 통치지역에 소개하면서 마오쩌둥이 루쉰을 자신과 비슷하게 이해한다고 받아들였다. 또한 마오쩌둥이 『신민주주의론』에서 5.4 신문학 운동을 긍정하고, 루쉰의 방향이 신문화운동의 방향이라고 천명한 것도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펑이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많은 논점에 있어 후펑과는 반대되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일례로 '민족형식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있다. 1938년 10월 마오쩌둥은 중공 제6기 6중전회의 보고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서 구체화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국제주의적 내용과 민족형식을 결합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필요를 반영한 것이었다. 즉 항일전쟁 시기에 문학을 무기로 민중의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활발한 대중선전을 하려고 보니까, 정작 민중은 마르크스주의 인텔리 작가들과는 달리 5.4 운동 이후 서구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신문학에 익숙치 않고 중국의 전통적인(즉 다른 말로 하면 봉건시대의 잔재인) 민속문학 형식을 즐긴다는 벽에 부딪쳤던 것이다.

마오쩌둥이 원한 것은 작가가 농민 대중 속으로 들어가서 "농민에게 배워"(사상개조) 그들의 입맛에 맞는 낡은 형식과 통속적인 작품으로 선전활동을 잘 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논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시앙린빙(向林氷) 등이 '민간문예형식은 민족형식의 중심원천'이란 주장을 폈다.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 … 민간형식은 그것이 봉건내용과 결합하거나, … 제국주의 사상과 결합하는 … 경우에만 반동적이다. 만일 혁명적 사상과 결합하게 되면 곧 유력한 혁명무기인 것이다.

이에 후펑은 루쉰의 후계자 답게 5.4신문학 운동은 외래진보문화형식을 흡수한 것이 분명하니 그건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5.4운동은 진보 지식인의 계몽주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5.4 문학혁명운동은 곧 … 세계 진보문예 전통의 한 새로운 지류다. 그것은 애매모호한 ‘서구문예’가 아니라 … 각종 경향의 현실주의(및 낭만주의) 문예요, … 약소민족의 문예며, … 임금노예의 운명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연 성장적인 신흥문예다.

또한 「문예강화」가 발표된 후 옌안에서 '교조주의'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후펑 등은 평소 자신들의 관점을 바탕으로 사상이나 정치를 예술보다 중시하거나 생활을 왜곡시키는 경향을 '문예상의 교조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교조주의를 공격한 이유는 왕밍 등 소련유학파들을 겨냥한 것이어서 그 방향이 전혀 달랐다. 후펑이 공격한 '문예상의 교조주의', 즉 사상이나 정치를 예술보다 중시하거나 생활을 왜곡시키는 경향은 마오쩌둥이 발표하고 당이 강령으로 승인한 「문예강화」 그 자체였다.
모든 문화와 문학예술은 반드시 어떤 계급과 정치노선에 속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 초계급의 예술, 정치와 병행하거나 상호 독립된 예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문학예술은 정치에 예속되어야 하고 정치에 복종되도록 통일되어야 한다. - 마오쩌둥「문예강화」


계속되는 문예이론의 충돌: '주관전투정신' 비판

1945년에는 후펑이 발행하는 잡지 『희망』 창간호에서 쉬우(舒蕪)가 「주관을 논함論主觀」이란 논문을 발표하고, 후펑이 여기에 「편집자 주」를 붙여 이를 밀어줌으로서 '민족형식' 문제보다도 더 큰 충돌이 벌어진다. 이 글은 2만 7천자나 되는 장문으로 『칠월』『희망』동인(즉 후펑파)의 문예사상을 집대성한 것인데 그들은 여기서 '주관정신'과 '개성해방'을 강조했다. 이들이 말하는 '주관전투정신'은 작가가 현실과 몸으로 부딪치며 삶의 근저를 발견하고, 피와 살을 갖춘 인간상을 창조하여 삶의 진실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창작과정에서 그의 인물과 함께 고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투쟁하는데, 당연히 작가는 그의 정신활동을 최고의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작업으로까지 긴장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과 이러한 ‘자유’는 오히려 ‘객관’의 기초와 ‘객관’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가 바로 ‘객관’을 구성하는 성분의 하나이고 ‘객관’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주체이다. 이러한 ‘주관’이 강할수록, 이러한 ‘자유’가 강할수록,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높아진다. … 동시에, 이러한 ‘주관’이 파악해 낸 ‘객관’은, 당연히 생활을 추동하는 위력이 있으니, 그것은 객관주의자의 ‘객관’이 상상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 후펑

그러나 이 역시 '현실주의 객관론', 보다 구체적으로는 마오쩌둥의 「문예강화」 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문예강화」는 "장기적 무조건적으로 전심전력을 다해 농공군중에게로 그리고 가열찬 투쟁 속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인민과 결합하고 세계관을 개조하라"고 요구했다. 즉 이는 작가 스스로 사상개조를 통해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으로서의 기존 자아를 버리고 쁘띠부르주아에서 프롤레타리아로서의 계급적 전이를 이루라는 것이었다. 이는 작가로서 기존 자아를 확대해 현실과 부딪치며 리얼리즘을 실현하겠다는 후펑과는 정반대의 입장이었다.

물론 보다 구체적인 면에서도 많은 충돌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문예비평에는 두 가지 표준이 있다. 하나는 정치표준이고 또 하나는 예술표준이다. 정치표준이 첫째이고 예술표준은 다음이어야 한다. 무산계급문학에서는 ‘인성론’이나 ‘문예의 기본은 인류애’라고 하는 따위의 이론은 없다. 그것은 자산계급문예에나 있는 것이다. 과거의 문예작품은 ‘광명’과 ‘암흑’의 묘사가 반반이었으나 무산계급문예에는 오직 ‘광명’의 묘사만이 있다. - 마오쩌둥 「문예강화」
광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긍정적인 인물은 어디에 있는가? 광명은 겹겹이 둘러싼 어둠 아래에서 스며 나오며, 긍정적인 인물은 부정적인 인물의 포위 공격 속에 있고, 부정적인 인물의 학살 하에 있고, 부정적인 인물과의 투쟁 속에 있다! - 후펑

이 글 발표 후 마오둔, 후앙야오미앤(黃藥眠), 허치팡(何其芳) 등이 반론을 펼쳤으나 일본의 패전과 뒤이은 국공내전 때문에 본격적인 논쟁은 몇 년 뒤로 미루어졌다가, 1948년 홍콩의 『대중문예총간』을 통해 논쟁의 제2라운드가 시작된다.

샤오추안린(邵荃鱗) 차오관화(喬冠華) 후성(胡繩), 린모한(林默涵) 등이 후펑의 '주관전투정신'을 겨냥해 '유심주의' '소자산계급의 주관주의'같은 표현을 써가며 거친 비판을 쏟아냈다. 이는 국공내전 승리를 앞두고 공산당이 문예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공세였다.

이들은 쉬우의 글 「주관을 논함」에서 '작가와 인민대중의 관계는 작가의 주관에 따라 결정된다'는 논리를 개인 차원의 반항정신을 가지고 계급투쟁의 본질인 집체정신을 대체하려는 것이라고 집중공격했다. 그들은 작가의 주체의지를 강조하는 것은 '인민을 향한 학습'의 전제조건인 사상개조를 피하기 위한 잔꾀일 뿐이라고 보았다.

후펑은 이에 대해 대응을 자제했지만, 그를 추종하는 문학청년들은 이에 맞서 『진창泥土』 『호흡呼吸』 『가창歌唱』 등의 잡지를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 결국 후펑은 이런 혼란에 책임을 느껴 1948년 9월 『현실주의의 길을 논함論現實主義的路』을 발간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여기서 그는 "창작실천의 성장을 방해한 것은 주관공식주의와 객관주의라는 두 개의 완고한 경향"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역시 「문예강화」를 부정하는 것으로, 비판자들은 후펑에게 당의 강령에 맞춰 입장을 뒤집을 것을 요구했으나 그의 입장이 확고함만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공산통치 하에서 계속되는 압박과 회유

국공내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9년 1월, 후펑은 공산당의 연락을 받고 홍콩을 거쳐 공산당이 통치하고 있던 동북해방구로 들어간다. 그리고 7월의 전국문학예술공작자 제1차 대표대회에서 궈모뤄 마오둔, 저우양, 딩링(丁玲) 등과 함께 전국위원으로, 전국정치협상회의에서 위원으로 피선된다. 이때까지는 혁명작가이자 좌익 문단의 지도급 인사로 대접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판은 계속되었다. 후펑이 전국위원으로 선출된 바로 그 제1차 전국문학예술공작자대표대회에서 마오둔이 「반동파의 압박 하에서 투쟁하고 발전하는 혁명 문예」라는 제목의 보고를 했는데, 그 중 세 번째로 후펑의 문예사상을 거론해 비판했다. 문단 지도부가 후펑을 손봐줄 목록 앞쪽에 올렸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아울러 공산당은 그에게 입장을 바꾸라고 설득했다. 후펑의 일기에는 "후차오무(胡喬木)가 왔다.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다 ①세계, 역사에 대한 나의 관점은 공산당과 같지 않다. ②모든 공산당과 친구가 되라고 한다"(49년 11월 27일), "후차오무가 왔다. 이번에는 개인주의 문제를 제기했다"(50년 1월 29일)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마오쩌둥의 비서이자 중앙선전부 부부장을 지내던 후차오무가 직접 후펑을 찾아와 전향을 종용했던 것이다.


문예정풍, 사상개조운동 그리고 후펑파 비판

1951년 11월 『무훈전』 비판(지난 글 1절 참조)을 계기로 마오쩌둥은 "자산계급의 반동사상이 공산당에 침투"했다고 선언하면서 "사상개조, 특히 지식인의 사상개조는 우리나라 각 방면에서 철저히 민주개혁을 실현하고 이어 공업화를 이룩하는 중요 조건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이에 중앙선전부는 중공중앙에 「문예간부 정풍학습에 관한 보고」를 제출하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적지 않은 자산계급과 소자산계급의 문예가들이 임의로 마오 주석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강화를 곡해하고, 사상개조를 거절하며, 정치복무로서 문예활동을 하는 것을 거절하고, 보다 많이 소자산계급의 생활과 취미를 표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지하게 사상개조의 임무를 제출한다"고 하였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 혐의에 가장 잘 들어맞는 집단이 바로 후펑파였다. 문예정풍과 사상개조 운동이 시작되면서 이제 후펑을 향한 올가미가 죄어들기 시작한다.

1952년 5월 우한의 『장강일보』에는 쉬우의 「연안문예강화에서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함」이라는 글이 실렸다. 후펑의 수제자 중 하나인 쉬우가 변절한 것이다. 그는 후펑을 따랐던 과오를 자아비판하고 스승인 후펑과 막역지우이던 루링(路翎)을 향해 "군중의 뜨거운 투쟁 속에서 고난의 사상개조를 거쳐 진정하게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 굳건히 서"라고 경고한다. 이어 『문예보』에 「루링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띄우고 공산당 중앙선전부가 이곳 저곳에서 주최한 후펑 사상 비판토론회를 따라다니며 후펑 사상의 이적성을 증언하는 역할을 맡는다.

한편 쉬우의 자아비판은 『인민일보』에 전재되고 '편집자 논평'이 붙는다. 논평에 따르면 후펑의 문예사상은 "자산계급, 소자산계급의 문예사상"에 속하며, "후펑을 우두머리로 한 문예상의 소집단"이 조직적으로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이 편집자 논평은 마오쩌둥이 쓴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미 이 시점에서 후펑을 과녁으로 삼은 것이다.

1952년 7월에는 중앙선전부 부부장 겸 중국문학예술계연합회 부주석이던 저우양이 후펑 비판의 필요성을 정식으로 제기해 저우언라이 총리의 승인을 받는다. 이에 따라 중앙선전부는 4차례의 '후펑 문예사상 검토회'를 열어 후펑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후펑은 개별문제에 대해서 자아비판을 하고 자신의 이론이 '소자산계급'적인 면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기본으로 한 무산계급 문예사상"이며 근본적인 착오는 없다고 버텼다.

1952년 11월에는 후펑파 비판을 위한 학습동원대회가 열렸고, 1953년 1월에는 『인민일보』에 후차오무의 「문예공작자는 왜 사상을 개조해야 하는가」, 『문예보』에는 린모한의 「후펑의 반마르크스주의적 문예사상」과 허치팡의 「사실주의 노선인가 반 사실주의 노선인가」가 실렸다. 이 무렵이 되면 후펑과 그 동조자들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판을 거의 일상적으로 감수해야 했으며 그 강도 또한 갈수록 심해졌다. 후펑과 가까운 사람들은 작품을 발표할 곳도 없어져 버렸다.

이처럼 궁지에 몰리게 되자 후펑은 1954년 봄에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몇 가지 이론적 문제에 관한 설명자료關于幾個理論性問題的說明材料」「참고로서의 건의作爲參考的建議」를 작성했다. 그리고는 이 두 글을 합쳐 「해방 이래의 문예실천 상황에 대한 보고關于幾年來文藝實踐情況的報告」라는 제목으로 중앙문교위원회 부주임 시중쉰(習仲勛)에게 직접 전하면서 중공중앙의 마오쩌둥,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등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것이 속칭 「30만자 서한三十萬言書」이다.

그는 여기서 중공의 문예방침이 작가나 독자들에게 참된 문학을 저해하는 다섯 가지 이론적 독소가 되었다고 하는 "다섯 자루 이론의 칼"이란 주장을 제기하였다. 다섯 가지란 공산주의 세계관, 공농병생활, 사상개조, 민족형식, 제재를 말한다. 이 주장은 중국공산당의 문예방침에 대한 또 한 번의 정면 도전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저우양은 '두 개의 구호 논쟁' 당시 맞서 싸웠던 후펑의 숙적이었다. 그래서 후펑은 이 당시 자신을 괴롭히는 상대가 현재 문예관료기구를 지배하고 있는 저우양 일파(당권파 문인세력)일 뿐이며 마오쩌둥과 당 중앙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당 중앙에게 꼭 전해줄 것을 부탁한 「30만자 서한」은 마오쩌둥 황제주석에게 올리는 상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민일보 '편집자 논평'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엔 진작부터 마오쩌둥이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판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이단적인) 문예계 소집단'에서 '반당집단'으로, 다시 '반혁명집단'으로

1954년 10월 마오쩌둥이 직접 『홍루몽 연구』와 『문예보』에 대한 비판을 독려하고 나서자 문예계에는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지난 글 2절 참조). 이에 따라 10월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중국 중국문학예술계연합회(文聯)와 중국작가협회(作協) 주석단의 연석회의가 8차례 개최된다. 참석자들은 모두 위핑보의 『홍루몽 연구』와 이를 옹호한 『문예보』를 향한 비판을 쏟아냈다.

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후펑에게 발언을 권하자, 후펑은 그간 『문예보』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아왔기 때문에 좋은 반격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후펑은 『문예보』가 후펑파 작가들 아룽(阿壟), 루링, 루리(魯藜) 등을 비판한 것은 자산계급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한 것이고, 신생역량을 억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이 『홍루몽 연구』를 비판할 때 쓴 논리를 빌려 그대로 자신의 정적들에게 쏘아댄 것이다. 이에 더해 후펑이 저우양 등 문예계의 현 지도자들의 실명까지 거명하며 그간 쌓인 불만을 쏟아내자, 현장에서 위안쉬파이(袁水拍), 궈모뤄, 마오둔 등이 들고 일어나 후펑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그 결과 8차 회의는 『홍루몽 연구』의 저자 위핑보를 공격하는 데서 벗어나 후스(胡適)와 후펑을 공격하는 자리로 변질되었다.

이날 회의에서 발표된 저우양의 「우리는 마땅히 싸워야만 한다我們必須戰鬪」가 이틀 후 『인민일보』에 게재되면서 후펑비판은 전국적인 당면과제로 격상되었다. 저우양은 이 글에서 "후펑선생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은 갈라섰다"고 선언하여 후펑을 우리(공산당)과 확실히 다른 부류로 못을 박았다.

마침내 1955년 1월 12일 중국작가협회는 중공중앙의 동의를 얻어 후펑의 '30만자 서한'을 공개하기로 결정하였다. 후펑은 14일 밤 저우양을 찾아가 이를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말아줄 것을 희망하며, 만약 공개해야만 한다면 자신의 해명인 「나의 자아비판我的自我批判」을 함께 실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저우양이 당에 지침을 요청하자, 이를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후펑과 같은 부르주아 유심론과 반인민적, 반당적 사상이 '소자산계급의 관점'이라는 은폐물 속으로 도망쳐 숨도록 해서는 안 되며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며 자아비판의 동시게재를 불허하였다.

이에 따라 1월 20일 중앙선전부는 중공중앙에 후펑사상 비판을 위한 계획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는 "후펑의 문예사상은 철저히 자산계급 유심론적이고, 반당 반인민적 문예사상이다. 그의 활동은 종파주의 소집단 활동이고, 그 목적은 그의 자산계급 문예사상이 영도지위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당의 문예사상과 당이 문예활동을 영도하는 것을 반대하고 저지하기 위한 것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회와 우리 국가를 개조하려고 하고, 사회주의건설과 사회주의개조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일개 작가의 창작론 때문에 후펑이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에 대항하는 것이라 비판받는다는 말이었다.

이에 각급 당부서는 중앙의 지시에 따라 후펑 비판을 담당할 조직을 신설하고 지역별로 작가, 문예공작자, 대학교 관련 교수들의 좌담회와 토론회를 열어 비판을 퍼부었다. 1955년 3월 후펑은 자아비판을 행했고, 대대적인 군중운동이 조직되어 반혁명분자를 숙청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4개월 후인 1955년 5월 13일. 『인민일보』는 앞서 마오쩌둥 본인의 지시로 게재가 불허되었던 후펑의 「나의 자아비판」을 게재한다. 당은 후펑에게 뒤늦게나마 반성의 기회를 준 것이었을까?

「나의 자아비판」에서 후펑은 작년에 당에 제출했던 「30만자 서한」에서 피력한 자신의 입장을 부정했다. 자신이 소자산계급의 혁명성과 입장을 노동계급의 혁명성과 입장으로 간주해 혼란을 일으켰으며 '민족형식' '현실주의' '주관정신'에 관한 입장은 착오였고, 국민당 통치지역에서 지내다보니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인식이 부정확했으며, 당의 영도를 따라 자신의 사상적 착오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일보』는 이 글을 곱게 실어준 것이 아니었다. 그 옆에는 후펑의 측근이었다가 변절한 쉬우가 스승을 고발하는 내용이 「후펑 반당집단에 관한 첫 번째 자료關于胡風反黨集團的一些材料」란 제목으로 첨부되어 있었다. 여기서 쉬우는 1940년대 후반 충칭에 거주할 무렵 후펑의 언행 및 후펑과 주고 받은 편지를 까발려 가면서 후펑의 자아비판에 속아서는 안된다고 고발한다. 또한 여기에는 '편집자 논평'이 붙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는 오늘에서야 그것[후펑의 자아비판]과 쉬우의 글을 함께 발표한다. … 쉬우의 글에서 폭로된 자료를 통해 독자들이 인식할 수 있듯이, 후펑과 그가 이끄는 반공 반인민 반혁명 문예집단은 일찍부터 중국공산당과 당원이 아닌 진보작가들을 적대시하고 원수시했으며 증오해 왔다. … 무슨 '소자산계급혁명성과 입장', '무슨 혁명적 인도주의', 무슨 '반제반봉건적 인민해방 혁명사상' … 이러한 말들을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또한 마오쩌둥이 작성한 것이었다. 계속해서 마오쩌둥은 이렇게 요구한다.
가짜는 가짜다. 위장은 반드시 벗겨내야 한다. 후펑 반당집단 중에 쉬우처럼 속았지만 후펑을 따라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마땅히 당에 더 많은 후펑에 대한 재료를 폭로하여야 한다. 숨기는 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모두 하루아침에 폭로될 수 있다. 진공(進攻)에서 퇴각(즉 검토)으로 바꾸는 책략도 사람들을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 후펑이 해야 하는 것은 가면을 벗는 것이지 사람을 속이는 검토가 아니다. 가면을 벗기고, 진상을 폭로하고, 당을 도와 철저히 후펑 및 그 반당집단의 모든 정황을 밝히는 것은 후펑 및 후펑파 각 개인의 유일한 출로이다.

마오쩌둥은 또한 인민일보 편집장 덩퉈(鄧拓)에게 지시를 내려 「경계심을 제고하고 후펑을 폭로한다提高警惕, 暴露胡風」란 난을 신설케 했다. 후펑집단을 비판하는 글만 전문적으로 싣는 난이었다. 5월 18일 이 난이 정식으로 만들어지자, 마오쩌둥은 논평을 붙여 "만약 우리가 경계를 제고하지 않고, 그들의 문제를 확실히 밝히지 않으며, 그들의 활동을 제지하지 않으면 … 그들은 날로 발전 확대되어, 우리의 혁명사업에 엄중한 손해를 끼칠 것"이라고 하였다.

5월 16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는 그의 인민대표 자격을 박탈하고 '후펑 반당집단' 체포를 비준하였다. 후펑 일행은 그날로 체포된다. 작가협회 이사, 「인민문학」 편집위원, 문련 전국위원회위원 등 일체의 공직이 박탈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의 특별지시에 따라 '후펑사건 전담조'가 편성되어, '후펑 집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5월 24일, 『인민일보』에 「후펑 반당집단에 관한 두 번째 자료關于胡風反黨集團的二些材料」가 공개되었다. 마오쩌둥은 여기 붙인 '편집자 논평'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 그들의 기본대오 혹은 제국주의 국민당의 특무, 혹은 트로츠키분자, 혹은 반동군관, 혹은 공산당의 반도, 이런 사람들을 골간으로 혁명진영에 잠복한 반혁명파벌을 조성하여 하나의 지하 독립왕국을 만들려고 하였다. 이 반혁명파벌과 지하왕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전복하고 제국주의 국민당의 통치를 회복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다.

6월 10일 『인민일보』에는 「후펑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必須從胡風事件吸取敎訓」는 사설과 함께 「후펑 반혁명집단에 관한 세 번째 자료關于胡風反黨集團的二些材料」가 공개된다. 이제 후펑 일파는 '반당집단'에서 '반혁명집단'으로 승격된 것이다. 여기 붙은 논평에서 마오쩌둥은 이들이 "국민당 특무(간첩)와 일찍부터 연계되어 있고" "제국주의와 장개석 국민당의 충실한 주구이며", 그들은 "혁명을 위장하고, 진보인민의 내부에 잠복해 있으며, "반혁명적 책략과 계획을 제정하고 당과 인민에게 난폭하게 진공할 것"이라며, "우리가 교만하여 경계심을 늦추어 소홀히 하고, 혹은 업무에 바빠 정치를 잊어버려, 많은 반혁명분자가 우리의 간장 깊숙이 들어왔다. 이는 결코 후펑분자만이 아니고, 보다 많은 특무분자 혹은 파괴분자들이 침입하여 들어왔다"고 대대적인 반혁명분자 색출운동을 요구했다.

6월 15일 『인민일보』 편집부는 이상의 세 '재료'를 묶어 『후펑 반혁명집단 자료집關于胡風反革命集團的材料』을 간행했는데 그 발행부수는 무려 7,629,000부에 달했다. 당시 지식인의 수는 기껏해야 200만 정도로 추산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의도가 지식인에게 경고를 주는 정도의 목적이 아니라 '숨은 반혁명분자'를 거론하면서 전국민을 닦아세우기 위한 데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대중선동 캠페인의 광풍 아래서 전국적으로 후펑을 비판하는 글이 수천 편 발표되었는데 저명 지식인중 상당수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의무적으로 비판에 참가해야 했다. 李濟琛, 沈鈞儒, 黃炎培, 馬叙倫, 許德珩, 胡耀邦, 賴若愚, 謝覺哉, 老舍, 張天翼, 沙汀, 田間, 陳望道, 侯外廬, 丁玲, 冰心, 王統照, 巴金, 馬烽, 曹禺, 陳垣, 翦伯贊, 馮友蘭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1956년 말까지 중공중앙은 '후펑 반혁명집단'을 78명으로 규정하고, 그 가운데 23명을 핵심분자로 분류하였다. 후펑은 최초 14년 형을 1969년에는 다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끝에 24년의 투옥생활을 거쳐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대혁명도 끝난 후인 1978년에야 풀려난다. 다른 사람들도 가혹한 처분을 받기는 마찬가지여서, 자즈팡(賈植芳)과 아룽은 각각 12년 형을, 루링과 뤼웬(綠原), 지팡(翼汸) 등은 장기 수감생활을 하였으며, 아룽, 팡란(方然), 창충샤오(張中曉), 잉뤼(呂熒) 등은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피폐함을 잘 전해주는 사례로는 소설가 루링을 들 수 있다. 루링은 사면복권 후에도 새벽마다 일어나 거리와 화장실을 청소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알아서 사상보고를 낼 정도였다고 한다.

1980년 7월에 발표된 '후펑사건' 재조사 보고에 의하면 2,100명이 조사를 받았고, 92명이 체포되었으며, 62명이 격리되고, 73명이 정직처분을 받고 반성을 강요당했다. 1980년대에 3차례에 걸쳐 '후펑 집단'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지지만 뒤늦은 명예회복일 뿐이었다.

후펑 반혁명집단의 숙청을 선동하는 선전물들



사건의 평가

일각에서는 후펑 사건의 원인을 저우양과 후펑의 갈등(또는 좀더 일반화해 해방구 문인과 국민당 통치구 문인들 간의 갈등)으로 보거나 당의 방침에 순응하지 않은 후펑의 완고함에서 찾기도 한다. 물론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런 배경이 있었고, 사건의 한 가지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저우양 정도의 영향력으로 상대를 '반당/반혁명 집단'으로 규정해 이처럼 대대적인 숙청과 공포정치로까지 전개해나가는 것은 무리라고밖에 볼 수 없다.

후펑이 체포되기 적어도 3년 전부터 마오쩌둥이 사건의 전개에 개입했으며, 후펑의 자아비판문을 게재할지 여부 등도 저우양이 결정할 수 없고 일일이 마오쩌둥에게 상신해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 등은 이 사건에 있어 마오쩌둥의 주도적인 역할을 잘 보여준다.

모리스 마이스너는 "'후펑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은 후펑이 역사무대에서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는 운동의 진정한 목적이 지식인 전반에 대한 당의 철저한 사상적 통제를 실시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패턴은 흥미롭게도 앞으로 다루게 될 마오의 다른 정책들, 예를 들어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 등에서도 발견된다. 비림비공 또한 수천 년 전의 공자나 이미 죽은 린뱌오에 대한 운동이 아니었다.

한편 조너선 스펜스는 지식인에 대한 통제권 장악 외에도 좀 더 넓은 표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후펑비판] 집회들은 농촌개혁운동이 1955년과 1956년에 초급 합작사에서 고급 합작사로의 발전을 가속화시키고 있을 때 계획적으로 열렸다. 그러므로 전국에 걸친 ‘후펑주의’ 색출작업은 개인의 창의력을 희생시킨 대가로 토지개혁을 가속화하려는 당의 입장에 대해서 감히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사람을 색출하는 수단이 되었다.

어느 쪽이든 사회 전반에 대한 당의 절대적 지배권 장악을 위한 행동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어떤 작은 꼬투리를 잡아 사건을 엄청나게 크게 부풀려서 뭔지는 몰라도 거국적인 '죄인 두들기기' 열풍으로 몰아간 다음, 처음 출발했던 것과는 동떨어진 다른 진짜 표적을 강타하는 이런 식의 행태는 마오의 통치기간중 끊임없이 반복된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당을 바라보는 지식인들의 태도도 크게 바뀌게 된다.

『무훈전』 비판이나 『홍루몽연구』 비판/후스 비판까지는 낡은 사상을 버리지 못한 구세력 -부르주아 계급 혹은 그 대변자- 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어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공산당 내지는 친 공산당 세력이 이들을 공격해 숙청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후펑 사건을 겪고 나서 지식인들은 좌익, 혁명작가, 친 공산당, 맑스주의자라고 해서 안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중국 문화예술계는 물론 지식인 사회 전체가 입을 꽉 다물고 깊은 침묵으로 빠져들어갔다.

이러한 반응에 직면한 중공중앙은 '백가쟁명 백화제방'(百家爭鳴 百花齊放)을 선언하며 앞으로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또 한번의 폭풍우를 가져오게 된다.



시간이 시작되었다

毛澤東
그는 주석대의 정 중앙에 서 있다
그는 지구 위에
중국 땅의 정면에 서있다

그는
하나의 조각처럼 우뚝 서있다…

박수소리와 환호소리가 잦아들었다

이 엄숙한 찰나를 뛰어넘어
시간! 시간!
너는 비약하듯이 일어섰구나!
毛澤東, 그는 세계를 향해 외친다

毛澤東, 그는 시간을 향해 명령을 내린다
“진군”!!!

삼만 개의 전투적 생명
하나하나의 마음마다 자기에게 말한다
毛주석, 毛주석, 그가 여기에 있다!
毛주석, 毛주석, 그가 우리와 함께 있다!

毛澤東! 毛澤東!
중국 제일의 영광스런 볼세비키
그들의 역량이
응집되어 당신의 몸에서 움직인다

그들의 의지를
당신의 가슴 속에 모아 움직인다
당신은 이 한 편의 역사를 치켜들었다


후펑의 장편 서정시 『시간은 시작되었다時間開始了: 제1부 환락송歡樂頌』 중 발췌,
5부 3천행 짜리 찬양시를 써 바쳤으나 …
by sonnet | 2009/12/14 12:47 | 정치 | 트랙백 | 핑백(2) | 덧글(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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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두 개의 구호' 논쟁을 다시 보는 것 같군. 통일전선 논쟁은 늘 비슷하게 전개되는 듯. ... 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10/04/24 12:16

... 문학을 구해내어 혁명적 작가로 하여금 문예 작품 속의 사상이나 의식 형태란 싼 값에 자기 마음대로 빌려 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 후펑(胡風), 「고리끼 단편M.高爾基斷片」『밀운기의 풍습 소기密雲期風習小紀』- 이 중 루쉰은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하기 전에 죽었고, 후펑이나 펑쉬에펑 처럼 대륙에 ... more

Commented by 행인1 at 2009/12/14 12:54
루쉰의 글은 지금봐도 예언(?) 같습니다. 그나저나 후펑은 참....;;;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4 14:04
이게 그냥 칭송을 안 해줘서 삐지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보니까요;;
Commented by 네비아찌 at 2009/12/14 13:29
루쉰이 오래 살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네요. 오래 살았다면 루쉰 본인도 못볼 꼴을 당했을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4 14:04
http://koreancc.com/xxy.asp?idx=1010 같은 의견도 있는데, 저도 동감합니다. 저우양 같은 충견도 문화대혁명 때 작살나는데, 루쉰이 무슨 재주로 빠져나가겠습니까?
Commented by deokbusin at 2009/12/15 20:50
의외로 모택동에게 못볼 꼴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노신이 대륙에 남을 지, 홍콩으로 튈 지, 호적이랑 같이 대만으로 갈 지 누가 알겠습니까?

일단 대만이나 홍콩으로 튀면 모택동에게 욕설 좀 듣겠지만 몸은 편하고 생활도 호적이 백방으로 운동해서 좀 챙겨줄 것이니 편안하게 죽겠군요. 대륙에 붙어 있으면 당할 가능성도 높지만, 의외로 누구하나 안건드리고 넘어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노신은 호풍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워낙 상징성이 큰데다(못해도 거의 송경령 급이고, 송경령은 문혁때도 직접적인 압력을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노신은 1951년에 70살이 됩니다.

그냥 놔둬도 글을 쓸 체력이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사람을, "노신도 박살내겠다"는 모택동과 교관화 등의 발언이 확인된다지만 잘못나가면 모택동의 권위까지 의심받게될 위험성을 무릅쓰고 노신 때려잡기에 나설지, 아무리 모택동이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이라지만 노신 때려잡기 건은 모택동도 고민 꽤나 해야 할걸요.^^


설령 노신이 36년에 투병에 성공해서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해도 과연 중일전쟁의 가혹한 생활환경과 국공내전기 동안 일어나는 암살 등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솔직히 말해서 그게 더 의심스럽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7 10:33
사실 어디까지나 살아있었다면 어떨까 수준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제 생각엔 1930년대 좌우익 문학계의 관계로 볼 때 루쉰이 타이완으로 가진 않을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루쉰이 계속 살아있었다면 처음부터 마오쩌둥이 그렇게 띄워 주지도 않았겠지요. 마오가 루쉰을 띄워준 것은 죽은 사람을 신격화하면서 제멋대로 이용하기 위해서일 테니까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09/12/14 13:35
그래도 당장 잡아 넣은 게 아니라 여러 단계를 밟았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4 14:01
후펑 하나 잡아넣는 게 목표가 아니라, 후펑을 핑계삼아서 국민을 닥달하는 대중운동 캠페인을 벌이는 게 더 중요한 목적이니까요.
Commented by 바보이반 at 2009/12/14 14:07
발췌하신 찬양시의 구절은 완전히 용자물 아니메 주제가 아닙니까.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4 22:58
하하. 저도 처음 보고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9/12/15 12:38
오오. 혁명정신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용자왕 마오.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5 16:06
마오가이가입니까;;
Commented by paro1923 at 2009/12/16 10:27
'용자시리즈' 신작입니까... [용자주석 마오] (......)
Commented by dunkbear at 2009/12/14 14:20
중공중앙은 (중략) 앞으로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였다...라... 후펑과
그 추종자들이 당한 꼴을 보고도 그걸 믿은 사람이 있다면 바보였을 겁니다. ㅡ.ㅡ;;;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4 23:07
문협 부주석이자 당조서기던 邵荃鱗의 경우를 봐도 쌍백방침을 꽤 믿었던 눈치입니다. 지금 와서 전후사정을 다 아니까 그렇지, 당대에는 속은 사람이 적지가 않습니다.
Commented by 내모선장 at 2009/12/14 14:27
백가쟁명이라니... 후펑 정도의 인물을 저렇게까지 끌어내려놓고 저 말을 하면 대체 누가 믿어주려고...

그런데 그 백가쟁명 백화제방 부분의 한자 순서가 틀린 것 같습니다. 아니면 한글의 순서가 틀렸던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4 23:01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그런데 또 백가쟁명에 낚여서 피본 사람이 적지가 않습니다. 왜 그런지는 다음 회를 일단 쓰고 나서 ;-)
Commented by maxi at 2009/12/14 14:32
...24년동안 배운 역사중에서 백가쟁명이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낚시질로 생각되더군요. ㅎㄷㄷ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4 23:03
이게 낚시가 아니라 기획자 본인도 낚인 거라는 주장도 의외로 존재합니다. 주로 마오의 이데올로기적 동기에 초점을 맞추는 설명인데, 이 주장은 전후관계를 꽤 넓게 봐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9/12/14 14:45
평생 중국에 이주해서 살려던-그러나 가던중 영국에서 사망한- 아그네스 스메들리가 저 시대까지 살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해요. 하기야 한국전 포로 출신이 그리스계 미국인은 저 시대 잘먹고 잘살고 영웅이 되었지만,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성격상 문혁때 비참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5 16:14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이용가치가 별로 없어서 그다지 좋게 끝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문혁까지 가면 과거 대단한 충성을 바쳐왔던 인물들까지 쓸어버리는 상황이라 거기서 살아남는 게 오히려 예외지요.
Commented by 삼천포 at 2009/12/14 23:27
문화가 정치에 예속되는걸 보면 좀 아니다 싶기도 하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5 16:06
네, 뒤끝이 아주 좋지 않죠.
Commented by 섭동 at 2009/12/15 03:25
이러한 반응에 직면한 중공중앙은 '백가쟁명 백화제방'(百家爭鳴 百花齊放)을 선언하며 앞으로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또 한번의 폭풍우를 가져오게 된다. //

중국에서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기업들도 하는 일입니다.

어떤 베스트셀러 이야기
http://sonnet.egloos.com/3221269#none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5 16:09
그렇습니다. 저런 통치술이 중국의 전유물은 아니죠.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9/12/15 11:55
찬양시가 겨우 3천행 이라서 毛자랐던 모양이죠.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5 16:08
田間처럼 1만8천행 짜리 시를 써서 바쳐야겠습니카;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2/15 17:44
잘 읽고 갑니다. ^^ 인용하신 조너선 스펜스의 말처럼 후펑 반대 운동은 인민공사운동의 진행과 함께 반대하는 흐름에 대한 숙청과 제거의 이유로도 종종 이용되었죠.

그런 의미가 있어서인지, 예전에 운동하는 선배들과 '제3세계학(중국 포함) 스터디'를 만들었을때, 후펑이 우파적 성향을 실제로 가진 인물이었으며 후스의 친척(!)이라는 괴설을 일삼으며, 후펑 본인이 설령 죄가 없을지라도 역사적 발전을 위한 '단계'로서의 배척운동이 의미가 있다는...그런 괴언(?)을 핏대를 올리며 외치던 한 선배가 생각나는군요. ^^;

다만 그런식으로야만 '발전'해야할게 역사라면 전 거절하고 싶습니다. ㄷㄷ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7 10:43
말씀하신대로 마오는 늘 대중운동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프로젝트를 밀어붙이곤 했지요. 제 생각에는 그게 마오 통치의 가장 독특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과거에 리영희 같은 사람들의 중국 관련 저술을 보면 모택동사상이나 문혁에 대한 환상적인 미화를 발견할 수 있긴 합니다. 그 선배라는 분은 그런 흐름을 이을 정도로 나이가 지긋한 분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70년대라면 조금은 이해가 가지만 그게 아니라 90년대라든가 하면 그건 ㄷㄷㄷ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2/17 10:50
90년대의 학번으로 30대의 삶을 살고 있는 분이니 더욱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_-;;

참고로 그 그룹이 읽던 사상신서 일부를 인용하자면, '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수주의와 언어학'이라는 책인데, 저자는 무려 '요시프 스탈린'이라죠...ㄷㄷ
Commented by deokbusin at 2009/12/15 21:09
그러고보니 시진핑이 한중관계는 백화제방 운운했다던데, 어째 "한국놈들 좀 있다가 호되게 혼내주마"로 읽히는 군요.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2/15 21:11
오옷 덕부신님은 센스쟁이....ㄷㄷ;;
Commented by 섭동 at 2009/12/16 17:40
미국은 "이라크에 WMD 있다." 면서 때려잡았습니다. 중국도 한국에 트집 잡아서 덤빌까봐 겁납니다.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9/12/16 19:13
그런 일이 벌어지면 진짜 WMD를 퍼부어 주면 됩니다. 가령 지금 국내 핵발전소에 보관중인 고준위폐기물로 핵폭탄은 못 만들어도 "더러운 폭탄"은 수없이 만들 수 있죠.
Commented by 섭동 at 2009/12/16 22:08
중공에 더러운 폭탄을 퍼부으면, 황사와 함께 편서풍을 타고 한국으로.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7 10:29
하하. 거 참 오싹한 이야기군요 ^^
다만 덩샤오핑 시대 들어 백가쟁명백화제방이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경향이 정착된 거 같으니 그런 흐름으로 사용되었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그러고보면 후펑이 '30만자 서한'을 제출한 상대인 시중쉰이 바로 시진핑의 아버지 아니겠습니까.
Commented by wlskrkau at 2017/12/17 13:03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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