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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문화정책과 그 이후(1)
원래는 한 편의 글로 쓰려고 했던 것인데, 어떤 사건이 있었다 정도가 아니라 디테일을 다루려다보니 끝없이 길어져서 몇 편으로 쪼개기로 했습니다. 지금 예상으로는 4~6회 정도 분량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나라를 세우면 응당 「문자의 옥」을 일으키는 법,
지식인을 산 채로 파묻어 제왕의 위엄을 보이노라

開国應興文字獄, 坑儒方顕帝王威

- 楊憲益(1915-2009) -



『무훈전』 비판(1951년)

마오쩌둥의 문예비판은 해방구 시절이던 1942년의 연안문화정풍운동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겠지만, 어쨌든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대륙을 석권하고 중공정권을 수립한 후의 첫 문화비판운동은 영화 『무훈전(武訓傳)』을 표적으로 하여 개시된다.

무훈(武訓, 1838-1896)은 청말 산동성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무칠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생활하였는데, 젊어 머슴 생활을 하다가 주인이 그가 글을 모르는 것을 이용해 속이고 굴욕을 주자 글을 배워야겠다는 깨달음을 얻고 평생 구걸과 폐품수집 등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30여년 후, 그간 모은 돈으로 학교(崇賢義學)를 열자, 그 뜻에 감복하여 많은 기부금이 답지하게 되고, 제2, 제3의 학교를 열게 된다.

무훈의 이런 인상적인 이야기는 청대 말기에서 중공정권 수립(1949) 사이에 아주 높게 평가되었고, 중국 교육의 모범으로 추앙되었다. 1930~40년대에는 무훈을 기리는 시, 산문, 전기 등이 잇따라 발표되었고, 무훈의 이름을 딴 학교들이 수십 곳 설립되었을 정도이다. 특히 미국에서 듀이에게 배우고 귀국해 중국 대중교육운동에 헌신했던 타오싱즈(陶行知, 1891-1946)는 무훈의 높은 뜻을 오늘에 되살려 중국 향촌 교육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신무훈정신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이런 배경 아래서 1951년 초, 당대의 명감독 쑨위(孫瑜)가 극본과 감독을, 유명 배우 자오단(趙丹)이 주연을 맡은 전기영화 『무훈전』이 개봉된다. 이 영화는 무훈에 대한 그간의 평가를 큰 무리 없이 따르고 있었으며, 완성도도 높아 전국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이를 관람한 궈모뤄(郭沫若) 같은 공산당계 지식인들은 "무훈이라는 민중교육의 영웅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저우언라이(周恩来), 주더(朱徳) 같은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들 또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다소 불안한 점도 있었다. 문예보에 실린 "교훈이 되기엔 부족한 무훈", "타오싱즈 선생이 표창한 무훈정신에는 적극적인 역할이 없음을 논함" 등의 비판이 무훈이라는 소재가 새로운 공산통치의 대의와 합치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기 때문이다.

5월 16일 『인민일보』에 중앙선전부 부부장 저우양(周揚)의 영화 '무훈전' 비판이, 이어 20일에는 "마땅히 영화 '무훈전' 비판에 주목해야 한다"라는 사설이 실린다. 이 사설은 무훈전이 부르주아 개량주의의 표본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걸식을 통해 학교를 세운 것은 봉건지배계층에 허리를 굽히는 투항주의이자 추악한 고행주의이며 따라서 무훈은 '봉건적 문화의 선전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민일보라는 매체의 위상과 그 단정적인 논조는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미 저우언라이나 주더 등이 호의적으로 평가한 영화에 대해 이처럼 혹독한 평가가 내려졌다는 것은 최고위층의 개입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예상대로 이 사설은 사전에 마오쩌둥이 직접 감수한 것이었다.

이어 당은 신속히 무훈의 고향에 인민일보와 중앙문화부의 합동조사팀 '무훈역사조사단'을 투입하여 약 한 달 간의 현지조사를 진행한 후 1951년 7월 23~28일 간에 걸쳐 인민일보 지면에 장장 4만 5천자 길이의 『무훈역사조사기』를 연재한다. 이 보고는 무훈을 대지주, 고리대금업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무훈이 운영한 학교 학생 대부분은 지주, 부농, 상인 계급 출신이고 빈농 출신은 하나도 없었으며 이는 무훈과 무훈학교의 계급적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이 조사는 처음부터 무훈에게 뒤집어씌울 죄목을 찾아내기 위한 짜고 치는 게임일 뿐이었다.

이렇게 인민일보가 공격의 깃발을 높이 흔들자, 중앙에서 전국 각급 기관에 이르기까지 무훈전 비판의 대대적인 행렬이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제일 요란했던 것은 교육계로 당시 교육부장이던 마쉬룬(馬敍倫) 이하 23명의 교육관계자들이 '과거 무훈을 무비판적으로 찬미했던' 과오에 대한 자아비판을 발표하고, 51년 5월부터 그해 말까지 전국의 200만 초중학교 교사들을 동원해 무훈전 비판을 통해 교육과 혁명의 관계를 논하는 토론 학습회를 진행한다. 앞서 무훈전에 찬사를 보냈던 궈모뤄나 티엔한(田漢) 같은 저명 지식인들 또한 인민일보 지상에 자아비판을 게재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무훈연구자료대전』(1993)의 관련자료 정리: 1951년의 비판 열풍을 잘 보여준다.

무훈전 비판은 사회주의적 인간형 확립을 위한 사상개조를 목표로, 이후 계속될 중국의 사회주의 문화운동의 틀을 제시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기존에 널리 인정되어 왔던 교육관에 별 생각없이 동조하는 행동에 철퇴를 가한 후, 대대적인 캠페인을 따라 당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지식인들과 인민대중이 따라오게 강제함으로서 중국공산당의 사상지도를 통한 사회주의 노선 추구를 확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위핑보와 『홍루몽연구』 사건(1954년)

위핑보(兪平伯, 1900-1990)은 청대의 유명한 고증학자인 유월(兪樾)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중국 고전의 깊은 소양을 쌓았으며 1919년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곧 동 대학 교수로 취임한 직후부터 소장학자로 활발한 학술활동을 펼쳤다. 그는 또한 시인이자 산문작가로서 중국 현대문학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연구자로서 그가 손댄 분야는 매우 넓어 『讀詩經禮記』, 『唐宋詞選釋』 등 詩詞曲 분야에도 다양한 저술을 남긴 바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중국 고전문학작품은 홍루몽이었다.

위핑보가 학계에 뛰어든 1920년대 초는 홍루몽 연구에 커다란 변화가 일던 시기였다. 1921년 문호 후스(胡適)가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를 발표하고, 뒤이어 위핑보가 1923년 『홍루몽변紅樓夢辨』을 내놓으면서, 이들이 선보인 새로운 홍루몽 연구는 청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홍루몽 연구(舊紅學)와는 일선을 긋는 새로운 학파라는 뜻으로 신홍학(新紅學)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후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게 되자(1949년) 후스는 미국으로 망명하고, 위핑보는 대륙에 남아 인민공화국에 합류하는 길을 선택한다. 따라서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륙 제일의 홍루몽 연구자라고 할 수 있었다.

첫 홍루몽 연구서인 『홍루몽변』을 발표한지 30년이 지난 1952년, 위핑보는 그간의 연구를 종합한 『홍루몽연구』를 내놓는다. 당의 공식 문예지인 『문예보』가 이 책에 내린 평가를 보면 당시 문예계 주류의 시각을 읽을 수 있다.
과거의 모든 홍학자들은 전부 색안경을 끼고 감추어진 것을 찾는데 주력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견강부회요 바람잡고 구름잡는 격이다. 『홍루몽연구』에서는 세밀한 고증과 교감으로 옛 ‘홍학’의 일체의 잠꼬대를 일소하였으니 이는 대단한 공적이다.
고전문학에 대한 관심이 강조되던 시대 상황과 맞물려, 그는 1954년 잡지 『신건설』에 『홍루몽간론紅樓夢簡論』을 발표할 때까지 3년 사이에 다수의 홍루몽 관련 논문을 내놓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사건은 산둥대학 중문과를 갓 졸업한 두 젊은이 리시판(李希凡)과 란링(藍翎)이 바로 이 『홍루몽간론』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이 글에서 그들은 『홍루몽간론』이 명확한 계급관점이 없이 추상적인 예술관에 의거하고 있어 『홍루몽』이 갖는 반(反) 봉건의 현실적 의의를 과소평가했다고 비판하고,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관점 특히 엥겔스의 발자크론에 비추어 볼 때, 『홍루몽』은 저자 조설근의 리얼리즘적 창작방법이 그의 낙후된 세계관을 극복하고 승리한 위대한 현실주의 작품이라고 단정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문예보』에 투고했으나 게재되지 못하자, 모교 학술지인 『문사철文史哲』를 통해 이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글은 곧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의 주목을 받게 된다. 장칭의 추천으로 이를 읽어 본 마오쩌둥은 이 글을 『인민일보』에 전재하라고 지시한다. 장칭은 인민일보에 이 지시를 전하였으나 신문출판총서 책임자 후차오무(胡喬木)와 인민일보 편집장 덩퉈(鄧拓) 등은 협의 끝에 인민일보 대신 『문예보』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예보』 편집장이던 펑쉬에펑(馮雪峰)은 이들의 평론 「《홍루몽간론》및 기타에 관하여關於《紅樓夢簡論》及其他」를 게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붙인다.
이 글은 원래 산동대학에서 출판된 월간 『문사철』의 올해 제9기에 발표되었다. ㉠이 글의 작자는 중국고전문학을 갓 연구하기 시작한 두 젊은이들로, ㉡이들은 과학적 관점[맑시즘; 역주]에서 『홍루몽간론』이라는 위핑보 선생의 글의 논점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고자 시도하였는바, 우리는 여러분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작자의 동의를 얻어 그 글을 여기에 전재하니, 여러분들의 토론을 불러일으켜 위대한 걸작 ㉢『홍루몽』에 대해 더욱 깊고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전재할 때 작자가 약간의 오자를 바로잡고 편자가 한 두 자구를 바꾸기는 하였지만, 작자의 원래의 의견을 완전하게 보존하였다. ㉣작자의 의견은 그다지 면밀하지 못하고 전면적이지 못한 점이 분명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홍루몽』을 인식하였음은 기본적으로 정확하다. ㉤여러분 모두가 계속해서 깊이 있게 연구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이해는 더욱 심오해지고 면밀해지며 인식 역시 더욱 전반적이 될 것인 바, 『홍루몽』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나라의 모든 우수한 고전문학작품에 관해서도 그러할 것이다.

이 편집자 해설을 보면 당시 『문예보』 편집진이 자신들의 기존 입장(및 학계의 통설)과 상부의 지시를 어떻게든 절충하려고 고심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즉 이 글은 "과학적 관점[맑시즘]에서 … 비판 … 기본적으로 정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중국고전문학을 갓 연구하기 시작한 두 젊은이들 … 작자의 의견은 그다지 면밀하지 못하고 전면적이지 못"하다며 견제한 후, "계속해서 깊이 있게 연구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이해는 더욱 심오해지고 면밀해지며 인식 역시 더욱 전반적이 될 것"이라는 말로 앞으로 잘 해보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식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는 것이다.

후차오무와 덩퉈 등 언론 관계 당 간부들이 이 글을 『인민일보』 대신 학술지인 『문예보』로 옮겨 실은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에 따르는 듯 하면서도 은근히 이 문제를 축소해 덜 눈에 뜨이는 곳으로 옮김으로서 조용히 다루려고 했던 것이다.
《중국, 당-정부의 문화기구》

그러자 마오쩌둥이 직접 칼을 뽑아들었다. 1954년 10월 16일, 그는 《'홍루몽연구' 문제에 관한 서신》이란 문건을 중공중앙정치국과 기타 관련자들 앞으로 보내 비판운동을 독려한다.
위핑보를 반박하는 글 두 편을 첨부하였으니 읽어들 보기 바란다. 이것은 30년대 이래의 이른바 홍루몽연구에 권위 있다는 작가의 그릇된 관점에 대한 첫 번째 진지한 공격의 시작이다. 저자는 두 명의 공산청년단원이다. 그들은 먼저 《문예보》에 편지를 보내 위핑보를 비판하여도 좋은지를 물었으나 본척만척 무시당했다. 그들은 부득이 그들의 모교인 산동대학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지지를 얻었고, 또한 그 학교 간행물인 《문사철》에 《홍루몽간론》을 반박하는 그들의 글을 실었다. 문제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누군가가 《인민일보》에 이 글을 게재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기화로 논쟁이 일어나 비판이 전개되었으나, 일부 사람들의 여러 가지 이유(주로 “하찮은 신인(小人物)의 글”이라는 이유와 “당보(黨報)는 자유논쟁의 장소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해 반대를 받아 실현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타협이 이루어져 《문예보》에 이 글의 전재가 허락되었다. 이후 《광명일보》의 《문학유산》란에 위핑보의 《홍루몽연구》라는 책을 반박하는 이 두 청년의 글이 발표되었다. 보아하니 이 고전문학영역에서 30여 년간 청년에게 해독을 끼쳐왔던 후스(胡適)파 자산계급 유심론에 반대 투쟁을 전개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일은 두 명의 “소인물”이 시작했으나 “대인물”들은 왕왕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더러 자주 저지했으며, 그러한 대인물들은 자산계급 작가들과 유심론 측면에서 통일전선을 이야기하고 기꺼이 자산계급의 포로가 되었다. 이는 영화 《청조비사》와 《무훈전》이 상영될 때의 상황과 거의 비슷하다. 애국주의 영화라 칭해졌으나 실제로는 매국주의 영화인 《청조비사》는 전국에 상영된 후 오늘까지 비판되지 않았다. 《무훈전》은 비판되었지만 지금껏 교훈이 나오지 않았고, 이러던 차에 다시 위핑보의 유심론을 용인하고 “소인물”의 생기 넘치는 비판문장을 가로막는 기괴한 일이 발생했다는 데 주의해야만 한다. 위핑보 등과 같은 자산계급 지식인에 대해서는 당연히 단결의 태도를 취해야 하기는 하나, 청년에게 해독을 끼치는 그들의 착오사상은 비판해야 하며 그들에게 투항해서는 안 된다. (강조는 필자)

마오쩌둥은 『문예보』의 편집자 해설이 크게 불쾌했던 것이 분명하다. 과학적 관점[맑시즘]에 맞춰 쓴 글을 하찮은 신인(小人物)이라고 폄하하고 "이른바 권위있다는" 대인물들을 감싸고 돌면서 자산계급(부르주아) 유심론의 포로가 되었으니, 이에 맞서 투쟁하라는 지시였다.

이처럼 마오쩌둥은 중국의 최고권력기관인 중공중앙정치국을 향해 위핑보의 『홍루몽연구』 비판을 도화선으로 삼아 당시 문화·사상계에 널리 자리잡은 기성 관념 (소위) "후스(胡適)파 부르주아 유심론에 반대 투쟁을 전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도 『무훈전』의 선례를 거론하면서 말이다.

보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훈전』비판이라면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이제 중공 권력기구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맹렬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10월 23일: 『인민일보』에 鍾洛의 「마땅히 『홍루몽연구』 안에 있는 그릇된 관점의 비판을 중시해야 한다」는 논평 게재
10월 24일: 중국작가협회 고전문학부에서 『홍루몽연구』 문제에 관한 좌담회 소집
10월 28일: 인민일보 부주필 위안쉬파이(袁水拍)가 「『문예보』 편집자에게 묻는다」로 공격
10월 30일: 『인민일보』에 저우루창(周汝昌)이 「내가 위핑보의 홍루몽 연구에 대한 그릇된 관점을 보는 법」 발표
10월 31일: 중국문학예술계연합회와 중국작가협회 주석단의 연석회의 개최(12월 8일까지 총 8회)
11월 4일: 『인민일보』에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이자 『문예보』 주필인 펑쉬에펑의 「『문예보』에서 내가 저지른 착오를 자아비판함」 발표
11월 6일: 북경대학에서 홍루몽연구좌담회 개최
11월 8일: 중국과학원 원장 궈모뤄가 『광명일보』에 「문예학술계는 자산계급사상과의 투쟁을 전개하자」 기자회견문 발표
11월 10일: 『인민일보』에 黎之가 「『문예보』 편집자의 자산계급 작풍은 마땅히 철저한 조사를 받아야 한다」 발표
12월 2일: 중앙선전부 부부장 저우양이 마오쩌둥에게 후스문제 비판의 조직계획에 대한 보고서 제출
12월 8일: 전국문학예술계연합회 주석단과 작가협회 주석단의 확대연석회의(최종) 개최. 이 회의에서 저우양, 마오둔(茅盾) 등이 비판연설하고 궈모뤄가 "3개 항 결의문" 제출

이렇게 하여 위핑보의 고전문학평론에 대한 비판은 어느 새 위핑보 개인을 벗어나 『문예보』 등에 웅거한 낡은 관념 비판으로, 다시 후스를 대표로 한 부르주아 사상 비판으로 확대되어 갔다.

궈모뤄의 「문예학술계는 자산계급사상과의 투쟁을 전개하자」를 보면, 『홍루몽연구』 비판을 고전문학 부문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문화학술계 전반으로 확대해야 하며, 역사, 철학, 경제, 건축예술, 언어, 교육, 자연과학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가열찬 사상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적지 않은 일부 고등지식분자 가운데 아직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학술계의 공자로 추앙되는 후스에 대하 전면적인 투쟁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중앙선전부 부부장 저우양이 제출한 후스 문제 비판 조직계획에 따르면 후스의 철학사상(pragmatism), 정치사상, 역사관점, 중국철학사, 문학사상, 중국문학사, 역사학과 고전문학연구에 있어 고증의 역할, 『홍루몽』의 인민성과 예술적 성취 문제, 각종 『홍루몽』연구 저작 등에 관해 등을 다루도록 되어 있어 이미 홍루몽은 뒷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1955년 2월, 위핑보가 『문예보』 지상에 「반동적 후스 사상과는 깨끗히 결별하겠다는 것을 굳게 다짐함」이란 전면적 자아비판을 발표하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나게 되는데, 그에 대한 완전 복권과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먼 훗날, 마오쩌둥이 죽고도 다시 10년이 흐른 1986년의 일이었다.

이렇게 보면 마오쩌둥이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홍루몽』이라는 고전문학연구라기보다는 그것을 지렛대로 삼은 사상개조운동이었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 또한 이 사건은 이후 마오쩌둥이 벌이는 다양한 문화 '관련' 사건들의 원형이 이미 이 시기(혹은 그 이전)에 완성되어 있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다음 편은 후펑 비판과 쌍백운동으로 이어집니다.
by sonnet | 2009/12/04 15:59 | 정치 | 트랙백(1) | 핑백(2) | 덧글(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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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討滅된 좌빨 at 2009/12/23 15:10

제목 : 신구좌파 권력관 논쟁과 규범적 논쟁점
* 권력과 그 실천 방식: 신구좌파의 권력관에 대한 블로그상 논쟁을 정리하며 ( http://cafe.naver.com/abcde1/727 ) 의 트랙백용 세줄 요약판+ 약간의 가벼운 평가.얼마 없는 관련 링크는 727번 글에 다 모여 있으니 그걸 보시면 되고, 여기선 세 줄 요약을.* 권력에 대한 내 주장질.1. 권력의 의미는 배경 이론 속에서 고정된다....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09/12/14 12:47

... 지난 글 1절</a> 참조)을 계기로 마오쩌둥은 "자산계급의 반동사상이 공산당에 침투"했다고 선언하면서 "사상개조, 특히 지식인의 사상개조는 우리나라 각 방면에서 철저히 민주개혁을 실현하고 이어 공업화를 이룩하는 중요 조건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이에 중앙선전부는 중공중앙에 「문예간부 정풍학습에 관한 보고」를 제출하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적지 않은 자산계급과 소자산계급의 문예가들이 임의로 마오 주석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강화를 곡해하고, 사상개조를 ... 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10/04/24 12:16

... 결과 8억 인민이 즐길 수 있는 문예라고는 겨우 8편의 혁명모범극이 남았을 뿐이다. 이런 꼴을 보고서도 우리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단 말인가? - 영화배우 자오단(趙丹)의 병상 유언, 「너무 구체적으로 지도하려 들면, 문예는 희망이 없다管得太具體, 文藝沒希望」, 『인민일보』 1980년 10월 8일 - 이처럼 ... more

Commented by Ha-1 at 2009/12/04 16:07
북한에서 드디어 탈출하셨군요 만세~ (?!)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4 16:16
하하, 네.
Commented by ghistory at 2009/12/04 16:12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몇 가지 질문드릴까 합니다-


고행주의: 어떤 사상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지요?

전제하라고→'전재하라고' 아닌지요?

문헌자료들이나 도판자료들 목록은 나중에 소개하시려는지요?

후스가 다시 타이완의 장제스에게 중앙연구원 원장으로 봉사하는 계가가 대륙에서의 비판 열풍이었다고 이해해도 무방하겠는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4 16:21
1. 고행주의는 중국 측 표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인데, 저는 깊은 내용이 있다기 보다도 탁발고행이나 편타고행 같은 그런 것을 그냥 씹는 이야기라고 이해했습니다.

2. 수정했습니다.

3. 이 글이 원래 하나의 글을 쓰다가 앞부분만 잘라 온 것이라서 참고문헌 목록이 각 편마다 있지 않고 뒤섞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연재가 끝난 후 모아서 공개하겠습니다.

4.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 사건 이전에도 후스가 대륙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ghistory at 2009/12/04 16:22
설명들 감사드립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6 22:18
참고문헌 목록(미완성이지만)은 별도로 포스팅했으니 그 쪽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http://sonnet.egloos.com/4291871
Commented by 갈매나무 at 2009/12/04 16:14
정말 광기의 시대였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4 16:15
이 때까지는 뒤에 나올 시대에 비하면 정말 양반(?)입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때 만나게 되는 사건들의 기본패턴이 이 시대(1950년대)에 이미 다 발견되는 건 사실입니다.
Commented by 카구츠치 at 2009/12/04 16:14
그 양반은 여기에도 나타나실 듯한데...
Commented by ㄷㄷ at 2009/12/04 16:31
중국애들 아직도 마오쩌둥의 영도력이 어쩌고 하던데
저런 나라가 세계지도국이 되려면 최소 100년은 걸릴겁니다 ㅎ
Commented by 지나가다 at 2009/12/04 19:01
아직도 오매불망 각하의 령도력을 잊지 못하는 우리나라가 할말은 아닌듯 합니다.
Commented by asdf at 2009/12/05 08:06
그나마 반도애들이 각하의 영도력이 그리워 뽑은 애가 고작 이명박, 박근혜죠. 그에 비해서 진짜 하드코어 마오주의 대인배가 집권하면..
Commented by rumic71 at 2009/12/05 15:14
마오주의자가 집권하면 샤워는 3분 안에 끝내야 하는거죠.
Commented by 행인1 at 2009/12/04 16:36
문혁이 하루아침에 나온게 아니었군요.
Commented by DaCapo at 2009/12/04 16:59
면벽(?)수도를 하시던 차에 새로운 연재라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이제 1954년이니 海瑞罷官 에피소드까지는 몇 회를 더 기다려야 하는군요.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2/04 17:13
간만에 올리신 글 잘 읽고 갑니다. ^^

말씀하신 홍학 논쟁은 어찌보면 지금도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현대 중국에서 나오는 문예평론집이나 중문학 관련 서적을 보면 아직도 "홍루몽은 봉건 예교에 압살된 한 개인의 형태를 리얼리즘적으로 보여주는.."운운은 계속 나오고 있으니 말이죠 ㄷㄷ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6 15:19
하하. 가보옥은 "반봉건주의의 영웅이며 선봉장"입니까. 한 시대의 유산이 흩어지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가 봅니다.
Commented by 미친과학자 at 2009/12/04 17:45
오오 이거 흥미가.....
Commented by joyce at 2009/12/04 17:47
자산 계급의 해독적 사상은 천년 동안 씻어 내도 모자라죠.
아이고...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Allenait at 2009/12/04 18:30
문화대혁명의 시초는 저때부터 있었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6 15:16
넵.
Commented by Ya펭귄 at 2009/12/04 18:34
모대인과 그 동네 분들 께서는 어지간히들 투쟁을 좋아하는군요...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2/04 18:36
투쟁하다 힘빠지면 작대기가 하나 떨어져서 투정이 됩니다. (도주)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6 15:16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 중 하나가 영구투쟁론 아니겠습니까.
Commented by 네비아찌 at 2009/12/04 18:41
곽말약 선생도 모대인 앞에서는 설설 기었군요. 그러려니 하면서도 실망입니다.
Commented by 삼천포 at 2009/12/04 19:08
중국은 대대로 문화에 대한 압제가 강력하네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09/12/04 19:35
거야, 물론 유사시엔 지식인층이 '반란주도층 예비군'이 되기 쉽상이긴 하지만,
'갱유'가 무려 '위엄'이라니... 맑시즘 찬양한다면서 실은 봉건황제 진시황 찬양인 꼴...;;;;

지식인들로선 가장 질색할 수 밖에 없는 유형... '배 째라면 진짜로 쨀' 힘이 있으니...;;;;
Commented by 이네스 at 2009/12/04 20:42
엄훠나 스러웠던 문혁이군요. 기대하며 열심히 보겠습니다!
Commented by ghistory at 2009/12/04 21:48
조금만 더 부탁드리자면 현대인물들인 鍾洛 · 黎之의 한국어 표기들이 빠졌는데 알 수 있게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엘미타 at 2009/12/04 21:54
항상 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BigTrain at 2009/12/04 22:20
와.... 진짜 별게 다 정치화돼던 시절이군요. 글읽던 사람들이 정치하던 명청시대도 아닌데 영화 비평, 문학 비평이 정치의 도구가 되다니...

정말 무서웠던 시절이었네요.
Commented by oldman at 2009/12/04 22:23
이것만 해도 대략 정신이 멍해질 정도인데 앞으로는 더 심하다고 생각하니 이 시절 이야기는 다시한번 들어봐도 후덜덜하네요.
Commented by M-5 at 2009/12/04 22:43
문혁 시대에 <해서비판> 걸고 넘어지는 식의 딴지걸기가 벌써 저 때부터 유행했군요... ㅎㄷㄷ
Commented by 瑞菜 at 2009/12/04 23:11
나라를 세우면 응당 「문자의 옥」을 일으키는 법,
지식인을 산 채로 파묻어 제왕의 위엄을 보이노라.

......분서갱유는 당연한 수순이었군요. 아니 오히려 진시황이 시대를 앞서갔던거구나.
Commented by rumic71 at 2009/12/05 15:15
진시황 좌빨인증.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9/12/05 15:52
좌빨 진시황이 법치주의를 외치며 만리장성 대공사의 삽을 뜨는데...
민둥산에 유학자를 심으니 얼굴이 파래지더라. 이것이 녹색성장 (어?)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9/12/04 23:39
지식인을 목만 내 놓고 파묻는 깍두기 머리들이...(어?)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6 15:11
옆에 톱을 비치하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번씩 썰게 하는 겁니까.
Commented by umberto at 2009/12/05 02:31
아니 뭐 사실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멀게는 진시황에서 비교적 가깝게는 홍무제, 영락제, 옹정제, 건륭제까지 나올 수 있죠. 과거제, 중앙집권제를 공유했다고 하지만 고려-조선과 송을 제외한 중국의 왕조들-특히 명, 청은 게임의 법칙이 정말 달랐던 것 같습니다. 땅은 크고 사람은 많으니 가끔 저런 피바람을 일으켜 줘야 통제가 되는 것인지 원.....

마오가 <자치통감>을 그렇게 열심히 읽었다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마오는 정말 너무나 황제스러웠지요;;;;;;;;; 사마광이 '자치통감'-나라를 다스릴 때 참고하고 비춰볼 수 있는 책'이란 뜻으로 제목을 짓고 저술했을 때는 저런 거 본받으라고 쓴거는 아닐텐데 말이죠.
Commented by asianote at 2009/12/05 02:47
좋은 것은 배우기는 어렵고 나쁜 것을 배우면 이익인지라...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6 15:15
로스 테릴이라든가 마오가 과거 황제들과의 상당한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그리는 사람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비슷한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동쪽나무 at 2009/12/05 10:18
피바다의 서막이로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6 15:11
그렇습니다.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9/12/05 14:27
1975년의 수호전 사건까지 다루시는 건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6 15:09
가짜 변설고지와 관련된 그 사건 말씀이시군요. 네.
그리고 '그 이후'에 해당하는 '하상'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려고 합니다. 하상을 둘러싼 보수파와 자오쯔양의 힘겨루기는 홍루몽 비판이나 해서파관 사건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Commented by 아이리스 at 2009/12/06 00:22
문혁에 대한 글을 읽고 싶었는데 마침....잘 읽고 갑니다 :)
외국인 학습자용 중국어 책이나 중국 공식 문서에는 여전히 저 문혁 때와 같은 '공산당 어투'가 있는데, 그거 번역하기 정말 힘들더군요ㅠㅠ;;
중국 참....그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무색하리만치 근현대가 처참한 꼴이 된 나라라고 생각해요...이런 식으로 남의 나라를 재단해서는 안되겠지만 그냥 제3자 입장에서는 중국인들이 안쓰럽다는...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6 15:11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거기까지 가려면 한참 가야 하지만, 확실히 문혁이 비극의 클라이막스지요.
Commented by xavier at 2009/12/06 02:03
역시 전통과 역사는 하루아침에 세워지는게 아니하옵니다 OTL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6 15:09
그렇습니다;;;
Commented by 에이브람스 at 2009/12/06 19:12
저런 성향의 마오를 적당한 시기와 때를 노려 축출했다해도 역사의 용서를 받았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따라준 팽덕휘, 주은래 등은 그야말로 대인배로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7 22:09
펑더화이는 실제로 몇 번이나 도전을 했는데 실패한 경우지요.
Commented by nishi at 2009/12/07 10:57
중국은 공산혁명을 위한 약진 이전에(이쪽도 별로긴 하지만) 그 황제통치개념부터
극복해야 했던 거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07 22:12
어쨌든 이 글은 서두에 불과하니까 차차 설명해 보든가 하겠습니다.
Commented by 야채 at 2009/12/08 00:54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오가 과거 황제들과 비슷한 면을 보면

중국을 통치하다 보면 자연히 그런 쪽으로 수렴하는 것인지
중국인들이 저런 사람을 지도자로서 선호하고 잘 따르는 것인지
그냥 원래 중국인들의 생각이 대체로 다 그런 것인지

의아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꼭 셋 중에서 하나만 골라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요.
아니면 전적으로 우연일 수도 있을까요? 사실 '지식인 탄압' 자체는 중국이 아니더라도 워낙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는 한데요.
Commented by 개인적생각 at 2009/12/08 06:56
정치의 난이도가 낮아지지요. 중국같은 큰 국가를 문제 없이 통치할 지도자가 잘 나오는것도 아닐수밖에요. 결국 지식인들을 압박하면 능력이 부족한 지도자도 편하게 통치 가능하지요. 국민들은 다 굶어죽더라도...
Commented by 개인적생각 at 2009/12/08 07:03
지도자의 능력이나 한계가 분명해서 물러나야 하는데도 물러나기 싫으니,지도자의 역량만큼 국가를 때려맞춰버리는 경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국가는 후퇴할수밖에요.
Commented by Sign up fo at 2010/04/22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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