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곡물을 주시오. 좀 많이…(1991년)북한은 원래 김일성의 지도에 따른 주체농법이 세계최고의 농사기술이라고 선전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회원국이 제출한 통계자료를 깊게 검사하지 않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같은 국제기구는 그러한 선전을 위한 좋은 무대였습니다.
79년에 북한은 쌀 면적당 수량에서 세계기록을 세웠다고 발표하였다. FAO는 북한이 79년부터 90년까지 진짜 세계 제일이라고 인정하여 세계의 주요 쌀 생산국인 일본, 한국이나 소규모이면서도 대단히 생산성이 높은 호주보다도 북한을 상위에 두었고, 태국보다 3배나 효율적이고 미국보다도 생산성이 훨씬 높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북한은 국민 1인당 칼로리 섭취량도 80년대를 통하여 한국을 상회한다고 주장하였다. 91년에 FAO는 숫자를 수정하여 한국을 북한보다 약간 우위에 두었다. 그 직후 북한은 참혹한 기근에 직면하였는데 그런 통계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내던져져 버렸다.[1]
또한 북한은 1990년 공식적으로 1,000만 톤의 곡물(조선중앙연감 기준)을 생산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사실 북한이 이렇게 많은 곡물을 생산했다면 남아돌아야 정상이겠지요. 하여간 이 또한 FAO에서 별 논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북한 농업의 현실에 별 관심이 없던 국제사회는 그런가보다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1991년, 북한은 갑자기 세계식량계획(WFP)에 식량지원을 요청합니다. 구체적으로 식량난이 터진 것은 아니지만 발전계획을 지원해달라(?)는 좀 애매한 명목이었죠. 오늘날 우리는 이 해부터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이유로 당시엔 그야말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요청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냐면 북한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죠.
곡물 1천만 톤을 지원해 달라
참고로 WFP는 2007년 전 세계를 상대로 총 330만 톤, 2008년에는 390만 톤의 식량을 지원[2]했습니다. 북한이 요구한 물량은 WFP의 3년치 사업분에 해당한다는 이야기지요. 게다가 WFP의 사업 대부분은 긴급구호(EMOP)와 장기구호 및 복구(PRRO)에 할당되기 마련이고, 개발지원(DO)는 많아야 10%, 보통은 5% 이내라고 봐야 합니다. 이렇게 계산하면 현실적으로 받을 수 있는 식량원조는 잘 해야 30만 톤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2,300만 북한 인구 전체를 2년 먹일 수 있는 양인 동시에 남한이 2000년대 제공했던 식량원조(40~50만톤) 20년치, 1995년 이후 10년 동안 WFP가 북한에 제공한 것(13억 달러, 400만 톤 상당)의 2.5배에 상당합니다.
말이 되든 말이 안 되든 간에 WFP는 요청을 받았으니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WFP의 업무처리절차를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지요. WFP는 지원요청이 들어오면 우선 FAO와 협력해 현지에 평가팀을 파견합니다. 이들은 현지를 시찰하고 식량원조가 얼마나 필요하고 수혜자는 몇 명이나 되는지, 어떻게 이들에게 식량을 분배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일단 계획이 수립되면 이 계획을 근거로 각 국 정부에 기부를 요청하고, 기부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앞의 계획에 맞춰 식량을 수송해 배급하게 됩니다.
WFP는 자체 예산을 갖고 있지 않으며 각 사안에 대해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부에 의존해 활동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절차는 필수적입니다. 즉 기부국들은 원조받을 나라의 요청이 적절한지를 WFP라는 전문적인 대리인을 통해 평가하는 셈입니다.
하여간 지원의 첫 단계로 북한 땅을 밟은 WFP 조사팀은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1991년 초 북한의 식량원조 요청에 따라, WFP는 4명의 기술관리와 FAO에서 파견된 3명의 보조관으로 구성된 팀을 북한에 즉각적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의 업무는 북한에서 필요로 하는 식량에 대한 평가조사이다. WFP에서 발간한 문서에 따르면, 조사단은 북한의 부족식량을 평가한 결과 특별하게 식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북한에서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평가단은 식량이 부족하지도 않은 북한이 도대체 왜 식량 원조를 요청해왔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굶는 사람도 없고 주민들이 영양결핍상태도 아닌데 북한당국은 1,000만톤이라는 엄청난 양을 요구하였다. 그 보고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 우리들은 식량 원조 시행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찾아낼 수 없었다. 우리가 식량원조를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식량원조를 해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들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3]
북한은 WFP 조사단에게 식량이 부족하다거나, 북한 농업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혹은 기근으로 고통받는 주민이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감추고 전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원조를 받을 수 있을 턱이 없지요.
북한은 그 뒤로도 수 년 동안 식량난이 있다는 것을 숨긴 채 식량생산량 9백만~1천만 톤을 계속 주장하면서 허세를 부리다가, 기근이 심화된 1995년 들어서야 국제사회에게 다시 손을 벌리게 됩니다. 1991년에 솔직한 자세로 자국의 문제를 공개하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북한 기근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2. 북한 기근은 진짜인가? (1997년)이제 6년 후인 1997년으로 넘어가 봅시다. 북한은 이미 1995년에 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다며 WFP에게 지원을 요청해 긴급구호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북한 상황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한 감을 잡기 위해, 당시 대형 국제구호 NGO인 월드비전에서 일했던 앤드류 나치오스의 회고를 같이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지요. 그는 미국 정부의 원조기구인 국제개발처(USAID)에서 이런 문제를 여러 해 동안 다룬 바 있으며 부시 행정부 들어서(2001~2005) USAID 책임자로서 다시 한 번 북한 원조 문제를 직접 다루게 됩니다.
북한에 정말 기아가 발생했는지에 대한 의혹들이 증폭되기 시작하자 나는 북한을 방문하여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북한에 비자를 신청할 때마다 매번 거절당했다. 북한에서 보내온 ‘나중에’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지금은 적당한 시기가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북한에 들어갈 수 있을 지가 염려되었다. 마침내 1997년 5월, 그 당시 내가 근무하고 있던 월드비전의 다른 직원들과 함께 북한으로부터 비자를 받았다.[4]
오늘날 우리는 북한 기근이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995년에는 북한 정부가 전세계를 상대로 공개적인 식량지원을 요청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려 2년 후까지도 북한에 기근이 발생했는지가 여전히 꺼지지 않은 논쟁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답은 심각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적시에 인식하고 대처하지 못한 국제사회의 실수란 것입니다. 분명히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좀 더 복잡했습니다.
1997년 가을, UN은 NGO 기관들에게 어린이집에 더 이상 약품과 식량을 보내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이미 1년 전부터 약품과 식량을 공급하였으나 어린이들의 상황이 호전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구호품들을 어린이집에 공급하면서 동시에 영양결핍의 심각성에 따라 차별화되는 치료법도 직원들에게 교육되었다. 그러나 교육과 설비는 물론 구호품조차도 어린이들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북한 당국은 중립국 보건담당 직원의 어린이집 상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 구호에 지친 NGO 요원들은 서구사회로부터 구호품을 계속 얻어내기 위해 북한당국이 영양결핍 상태의 어린이를 이용하고 있다고 분개하였다. 그리고 지원된 구호품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쓰이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표출하였다. 비관적인 실례지만, 마르크시스트 경제체제에서 노동자들은 종종 보잘것없는 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직장에서 시설물을 빼내, 자신의 모자라는 임금을 충당한다.[5]
구호물자가 적절히 사용되는지에 대한 모니터링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조를 계속 주어도 상태는 전혀 호전되지 않았고, 열의를 품고 제일 먼저 들어갔던 NGO 요원들은 환멸을 느끼고, UN이 원조 중단을 권고할 정도로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오스는 북한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오랜 노력 끝에 어렵게 북한 국내를 시찰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북한에서 본 것은 매우 혼란스러운 메시지였습니다.
[황해북도 사리원의] 어린이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주최 측 사람이 조용히 방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 나는 뒤로 물러서서 문 가까운 쪽에서 그의 동작을 살펴보았다. 또한 그가 어린이들을 방 뒤쪽에서 앞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1살에서 3살에 이르는 어린이들로 갑자기 둘러싸이게 되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심한 영양결핍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모여 있는 아이들 절반 정도는 더욱 심각하였다. 어린이들은 울거나 웃지도 못할 정도로 동작이 둔감하고 멍한 상태였다. 소수의 어린이들은 부종으로 부어 있었으며, 또 다른 일부는 머리털이 탈색되고 빠져 있었다. 어린이들은 비타민과 단백질 부족으로 나타나는 영양실조로 인해, 여윈 팔과 다리에는 부스럼이 심한 피부장애를 나타내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행을 빠져나와, 우리에게 공개되지 않은 다른 건물 쪽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재빠르게 문이 닫혀져 있는 3개의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순간적으로 들여다본 것이기 때문에 방 안의 어린이 영양상태를 정확히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으나, 우리의 접근이 제한된 3개의 방 중 어느 방에도 영양결핍상태 어린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각 방에는 약 10명의 어린이가 있었는데, 주최 측은 건강이 양호한 어린이들은 건물 뒤쪽에 남겨놓고 우리가 방문하고 있는 방에는 상태가 심각한 어린이만을 이동시켜 놓았던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사실들에 대한 진실 여부에 대해, 그리고 북한의 의도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해봐야 할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이집 방문에 이어 우리 일행은 공식적인 스케줄에 따라 같은 지역 내에 위치한 고등학교를 방문하였다. 마르크시스트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학교 운동장에 군대식으로 정렬되어 있는 학생들은 양호한 건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학생들의 신체적 건강상태와 복장상태도 그 도시의 다른 어떤 계층 사람들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학생들은 짧은 팔의 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치마를 입고 있었으며, 모두 함께 모여 있어 학생의 영양상태를 한 눈에 파악하기가 용이했다. 어림잡아 약 1,400명의 학생이 모여 있었는데 2~3명 정도만 영양부족 상태를 보였을 뿐이었다. 방금 어린이집에서 목격한 광경과는 너무 대조적이어서 우리 일행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고등학교에서 3블럭 정도 떨어져 있는 어린이집에서 우리는 수단이나 소말리아보다 더 측은하고 건강상태가 안 좋은 어린이들을 만나 보았고, 여기서는 오히려 남한과 일본의 학생들과 비교될 정도의 양호한 건강 상태의 학생들을 만난 것이었다. … 만약 이 고등학교 학생들의 건강상태가 북한 기아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원조계획은 즉시 중단되고, 모든 구호요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일행이 목격한 어린이집이 바로 북한의 포템킨 마을인 것이다.[6]
정부 가이드가 끌고 다니면서 보여준 것인 만큼, 이는 기본적으로 북한이 보여주려고 했던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집과 고등학교에서 본 광경은 둘 다 작위적으로 연출된 것이면서도 전적으로 상충된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어 그는 북한 관리들과 가진 회의에서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북한 농업성 관리들과의 회의에서] 북한 관리들은 질병률과 사망률, 그리고 농작물 작황에 대해 다소 과장된 통계를 인용하였다. - 어린이 사망률은 미국과 유럽보다 다소 낮았다. 만약 북한이 제시한 수치가 정확하다면, 북한은 더 이상 위기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국제원조사회에서 파견된 구호요원들은 다음 비행기로 북한을 떠나야 할 것이고, 인도주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기아원조도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고 나는 반박하였다. 북한 관리들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정치가 통계 수치에 영향을 주었으며, 제시된 수치들은 다소 오래된 것이어서 현재 북한의 기아 상황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말하였다. 농업성 차관에게 식량증산을 위해 필요한 변화와 조치에 대해 논평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식량증산에 필요한 어떠한 변화와 정책도 지금 상태로는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고 관리는 분명히 대답하였다. 그리고 관리는 최근 기아상태는 미국의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와 자연재해 때문이라는 말을 거듭 반복하였다.[7]
북한은 2년 전부터 국제사회에게 대규모 원조를 제공해 줄 것을 호소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을 불러놓고는 북한은 미국이나 유럽보다도 사망률이 낮다는 체제선전용 엉터리 통계자료를 제시하면서, 북한 체제는 기본적으로 훌륭하고 아무런 잘못이 없으므로 그 어떤 개혁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버팁니다. 그런 한편으로 원조는 달라는 것이지요. 그것도 많이.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내 눈으로 확인되지 않은 기아상황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려야 할지에 대해, 상반된 감정 사이에서 나는 많은 혼란을 느꼈다. 북한 당국이 조심스럽게 연출한 광경, 조작된 통계수치, 그리고 의도적으로 계획된 관리들과의 대화는 내 자신이 목격한 사실에 대해 회의적인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거의 모든 측면에서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이면에 분명 숨겨진 진실들이 있었다. 그러한 진실을 밝혀내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북한 당국은 기아구호를 지지해온 국제구호요원들에게 진정 북한에 긴급 상황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했으며, 결국에는 이들을 기아구호에 반대하는 집단으로 바꾸어놓는 데 성공하였다. 실제로 모든 중립국 인도주의 지원국들은 북한에 현재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서로의 논리를 전개하고 교환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8]
북한 당국에 의해 의도된 프로그램과 계획된 접근만이 허용되었던 모든 중립국 구호요원과 외국대표단들, 그리고 기술고문단을 괴롭힌 중심의제는 다음과 같다. 작금의 북한상황이 기아상황이라면, 기아가 실제로 북한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확실한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북한에 식량위기가 실제로 발생했다면 도처에 산재한 북한의 “만성적 구조결함”에서 기인된 식량부족사태는 아닌지 분명하지 않았다.[9]
나치오스는 북한 기근을 부정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워싱턴 포스트 지면[10] 등을 통해 북한 기근의 심각성을 경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의 눈에도 북한이 보여주는 장면들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는 점은 특기할만합니다.
앞서 1절에서 소개했던 1991년의 '곡물 1천만 톤 원조 요청' 건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나치오스의 경험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1991년 당시 WFP 조사팀이 북한에서 식량난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북한 농업의 실패, 더 나아가 북한 체제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북한의 방해 때문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1991년 당시에 긴급구호 등을 피해 굳이 개발지원(DO) 명목을 원했던 것도, 1995년에 문제를 홍수 탓으로 돌리면서 원조를 요청한 것(WFP의 평가로는 홍수 피해는 문제의 15% 정도에 불과)도 모두 북한 농업 전반의 실패, 즉 집단농장체제와 주체농법의 실패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북한의 책임회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1998년 UNDP가 주최한 북한 농업 복구에 관한 회의(AREP)에서 한 참석자가 '개혁'을 언급하자 북한 대표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것[11]은 이를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식량 원조를 제공하려는 기관들은 기부자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사건(기근)이 벌어지고 있으며, 기부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설득력있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할 수 없으면 기부를 계속 받을 수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세금으로 뒷받침되는 정부 원조의 경우에도 유권자들 사이에서 그런 원조를 뒷받침하는 여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워낙 평판이 좋지 않은 나라고, 그간의 행동으로 볼 때 그들의 속임수를 우려할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런 나라를 상대로 기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자신 있게 근거를 보여줄 수 없다면, 원조를 끌어내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WFP와 여러 NGO들은 북한 기근을 입증할 증거들을 입수하기 위해 기를 쓰게 됩니다. 특히 생생한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자료들이 중요하게 됩니다. 반면 북한은 원조를 받았으면 하는 생각은 간절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깎아내릴 가능성이 있는 그런 증거를 노출시키는 일은 절대 피하려고 혈안이 됩니다. 북한이 주장한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말을 믿고 눈 감고 도와 달라'는 것인데, 서방 세계에서는 그런 조건을 내걸고는 지원을 모집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물론 북한은 그들 나름의 고충이 있었습니다.
중립국 구호요원들이 도시와 지방에 구호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방문할 때, 지방당국은 기아로 보여지는 모든 증거들을 길거리에서 완전히 치워버린다. 거지들, 쇠약해진 사람들, 부랑아들, 쓰레기와 찌꺼기들, 그리고 죽어 나뒹구는 시체들까지도 길에서 완전히 제거된다. 한편, 입고 나갈 깨끗한 옷이 없는 주민은 집에 그냥 머물러 있도록 지시받는다. 한국어를 아는 한 구호요원은 NGO대표단들이 도착하기 바로 전, 거리에서 주민들에게 모두 집으로 들어가라는 방송을 하면서 마을을 지나는 트럭 한 대를 보았다고 한다. NGO기관에서 파견된 식량모니터 요원이 그 도시에 머무르는 동안, 당 간부들만이 유일하게 식량배급을 받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이 허락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북한 당국은 하나의 거대한 포템킨 마을을 창조하고 있었다. 주민들의 어둡고 참혹한 현실은 외면한 채 방문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위장된 그런 마을이었다. 중립국 요원들에게 기아를 위장한 지역의 방문을 획책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북한당국으로 하여금 시간을 소모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왜 북한 당국이 소수의 NGO관계자들에게만 비자를 허용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1998년 5월 북한에 사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한 조선족은 고향을 방문하고 나서 목격했던 것을 이렇게 알려왔다.
길거리가 이상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예전에 이 거리에는 많은 집 없는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거리에 나와 있는 북한 관리는 호루라기를 불면서 건물 뒤로 숨으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리고 안전보위부는 강제로 주민들을 길에서 몰아내기에 분주하였다. 그들은 계속 “머리를 숙여라”고 외쳐댔다. 왜 거리가 이처럼 깨끗하고, 사람이 없고 한산한지를 궁금해 하고 있을 때, 적십자 표지를 단 중국과 남한정부의 자동차들이 내가 서 있는 길 앞을 바로 지나가고 있었다. 거리가 조용하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차량들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의 옷차림으로 내가 북한주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안전보위부 요원은 나에게 길에서 비키라고 하지 않았다.[12]
과거 소련과 중공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어쩌다 한 번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고 가는 외국 대표단들을 수없이 속여 넘겨 온 전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 사람들도 인정하는 이 분야의 세계 정상급 플레이어지요.
북한이 구호기관들의 시찰 요청을 피곤해 한 것은 분명합니다. 북한은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모든 장면이 기획된 대로 연출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한 번 보자고 할 때마다 매번 이런 쇼를 펼치는 것이 그들의 방식입니다. 반면 시찰요원들이야 이런 북한의 연출 틈새로 살짝살짝 드러나는 진실의 조각들을 모아 조각맞추기를 시도하다 보니 더 많은 방문을 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서로 피곤해질 수밖에 없지요.
3. 북한의 역습 (2005년)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북한의 완고한 저항은 여전했지만, WFP는 모니터링이 없으면 원조도 없다는 것을 무기로 북한으로부터 다소의 양보를 얻어냈습니다. 이 이야기도 하면 길지만
전에 다룬 적도 있고 하니 여기선 넘어가기로 하지요.
또한 어린이 영양상태 조사나, 농업생산량 예측을 위한 조사 등 북한 기근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기초조사들을 한 것도 중요한 소득입니다. 이런 것은 정상적이라면 북한이 마땅히 제공해야 되는 것이지만, 이미 보셨다시피 북한이 제공하는 자료는 전혀 믿을 수 없기 때문(기근이 진행중인 북한의 어린이 사망률은 미국/유럽보다 낮다!)에 모든 것을 다시 해야 했습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경과를 한 번 살펴보지요. 다음 표[13]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UN을 경유한 국제사회의 대북지원 실적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 표를 그래프로 옮겨 그리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국제원조실적(만 $)
이제 분명히 구분되는 세 시기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1) 북한의 홍수 구호 요청으로 시작해 상황파악에 어려움을 겪으며 소량의 원조가 제공(1995~96)
(2) 구호가 본격화되어 대량의 원조가 제공(1997~2004)
(3) 유엔합동호소(CAP) 프로세스가 종료되고 국제사회의 원조가 급락(2005~현재)
최초에 왜 원조가 지연되었는지는 앞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1997년부터 2004년까지의 원조가 많았던 시기는 북한 기근을 중단시키는데 중요한 성과를 올렸던 상대적으로 좋은 시기입니다. 문제는 2005년 이후입니다. 북한은 2004년 가을부터 유엔의 대북 인도적 통합지원을 거부하고 WFP를 비롯한 국제원조 조직에게 북한 사무소를 폐쇄하고 떠나라고 요구합니다.
북한의 공식적인 주장은 이렇습니다.
북한은 대북지원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유엔기구에 대해 2005년 말까지 현재의 사업을 종료하라는 뜻을 공식적으로 전달하였다. 북한의 최수헌 외무성 부상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금년 작황은 매우 좋다고 밝히면서 이제 북한 당국은 모든 주민에게 식량을 제대로 공급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은 필요치 않다고 하였다.[14]
그러나 북한의 작황이 한 해 좀 좋아졌다고 외부의 지원이 필요 없을 만큼의 곡물생산이 가능한 것도 아니며, 정말로 인도적 지원이 필요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게 정말이라면 우리가 여기서 북한에 대한 식량원조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놓고 떠들 필요는 전혀 없겠지요.
여러 관찰자들은 북한이 중국이나 남한처럼 조건 없는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들의 지원을 믿고 모니터링 같은 껄끄러운 조건을 요구하는
WFP를 몰아내거나, 위협을 통해 WFP의 굴복을 강요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15] 실제로 북한이 UN기구들과 국제 NGO들에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며 나가달라고 하던 시기에, 북한은 남북 농업협력위원회를 통해서
남한에게는 비료와 쌀 지원을 늘려달라고 요구[16]해 옵니다. 또한 북한은 이제 인도적 원조를 중단하고 개발원조로 전환하자는 명분을 달고 있지만, 개발원조 성격의 지원을 제공하는 국제 NGO에 대해서도 나가달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개발원조는 어디까지나 명분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아일랜드 NGO Concern에게 다 걷어치우고 나가든지, 외국인 직원을 모두 빼고 북한인 직원들로만 업무를 진행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북한 같은 나라에서 북한인 직원은
북한 정부의 꼭두각시일 수밖에 없습니다.
농촌경제연구원의 북한 농업 연구자 권태진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북 지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에 대한 지원과 협력이 왜 필요한지 국민의 동의를 구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특히 정부의 대북 지원을 둘러싸고 국민 사이에 많은 갈등을 겪고 있는 점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 만일 우리나라의 대북 지원액이 급속히 증가함으로서 북한이 다른 국제사회의 지원을 중단코자 한다면 우리는 대북 지원 방식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와 공조하지 않고서 우리의 힘만으로 북한을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의 식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원방향을 모색하고 효과적인 방안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17]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WFP 채널로 북한을 지원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모니터링 등 요구조건에 있어서는 공동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원조가 WFP를 대체하고 몰아내는데 쓰인다면, 그건 북한 대중은 돕지도 못하면서 우리 부담만 늘리는 꼴이니까요.
참고문헌[1] (マコーマック, 2004:95-96) 정광민, 『북한기근의 정치경제학』, 시대정신, 2005, p.149에서 재인용
[2]
WFP Annual Report 2009, p.8
[3] Natsios, Andrew S. The Great North Korean Famine: Famine, Politics, and Foreign Policy. Institute of Peace Press, 2002. (황재옥 역, 『북한의 기아』, 다할미디어, 2003, p.226)
[4]
같은 책, p.50
[5]
같은 책, pp.60-61
[6]
같은 책, pp.63-64
[7]
같은 책, p.65
[8]
같은 책, pp.65-66
[9]
같은 책, p.229
[10] 워싱턴포스트 1997년 2월 17일
[11] Haggard, Stephan, and Marcus Noland. Famine in North Korea: Markets, Aid, and Reform. 1st ed.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7. (이형욱 역,『북한의 선택』, 매일경제신문사, 2007, p.66
[12] Natsios, 『북한의 기아』, pp.79-80
[13] "국제사회의 대북지원 및 교류협력 동향," 『KREI 북한농업동향』 11권 2호, 농촌경제연구원, 2009년 7월, p.95
[14] 권태진. “대북 농업지원사업의 과제와 개선방향.” 『농촌경제』. 28.3 (2005), pp.18-19 (각주 4)
[15] Haggard, Stephan and Marcus Noland,
Hungry for Human Rights, 워싱턴포스트, 2005년 9월 28일; 권태진,
앞의 글[16] 권태진,
앞의 글, p.19
[17] 권태진,
앞의 글, p.3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