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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도덕

우리는 우리의 도덕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이해관계에 전적으로 종속된다고 말한다. … 도덕은 낡은 착취 사회를 파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모든 노동 대중이 새로운 공산사회를 건설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 공산주의자에게 있어서 모든 도덕은 이 통일적 규율 안에, 그리고 착취자에 대항하는 의식적인 집단 투쟁 안에 놓여 있다. 우리는 영원한 도덕을 믿지 않으며, 도덕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이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폭로한다. - 레닌, 1920년 -



Lukes, Steven., Marxism and Morality, New York:Oxford Univ Press, 1985
(황경식,강대진 역, 『마르크스주의와 도덕』, 서광사, 1995)

이 책은 200쪽 남짓한 소책자이지만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주기 때문에 간단히 소개해 볼까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도덕에 대한 역설

이야기는 마르크스주의에는 도덕을 둘러싼 기묘한 모순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시작된다.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는 도덕은 이데올로기이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계급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도덕을 법이나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 뒤에 바로 그만큼의 부르주아적 이해관계를 감추고 있는 부르주아적 편견’으로 본다.[공산당선언] 마르크스주의는 어떠한 도덕적 교화도 반대하며, 모든 도덕적인 어휘를 낡은 것으로 배척한다. 자본주의와 정치 경제학 양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와 그 계승자들의 주된 논지는 인간 소외에 대한 비판, 노동자의 열악한 상태와 자본가의 착취에 대한 신랄한 공격 등 도덕적 판단으로 뒷받침되고 도덕감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주장으로 가득하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특징은 마르크스, 엥겔스, 카우츠키, 플레하노프, 레닌, 트로츠키 등 다양한 이론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만들어져 전세계에 보급된 정통 ML이론에서 가장 뚜렷하지만 '네오 마르크스주의'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형들에서도 빠짐없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E.P.톰슨의 말을 빌리자면 (도덕적 가치에 대한) "마르크스와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침묵은 너무나 요란스러워 귀가 먹을 지경"이며, 페리 앤더슨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윤리학을 남기지 않았으며 그 결과 생겨난 빈틈은 그들의 사후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도 보충되지 않았다"는데 동의한다.


역설의 해소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의 독특한 도덕관, 특히 인간의 권리에 관한 관념에서 이러한 역설을 해소할 방안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권리의 관념에 대한 개인들의 믿음"을 비웃으면서 "권리에 관한 한, 우리는 … 정치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인권과 같이 가장 일반적인 것이든 간에 공산주의는 권리[전반]에 대해 반대"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척 당혹스러운 주장일 것이기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독특한 점은 권리가 인간 삶에서 본질적이라는 점을 부인한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권리는 사람들 사이의 물질적인 관계와 여기에서 비롯된 사람들 상호간의 적대에서 생겼다’고 논한다. 이들은 권리(Recht)가 현재의 계급사회의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본다. 권리의 참된 기능은 기존 계급사회 질서를 보호하는 기능을 감추는 것이며 그 뒤에는 부르주아지의 이익이 숨어있다. 그러니 이를 폭로하고 비웃음으로서 그 가면을 벗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권리는 극복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

마르크스가 보는 권리는 사회적 갈등과 이해관계를 조절해 줌으로서 계급문제를 완화시키며 그렇기 때문에 보다 나은 혁명적 변화를 지연시키는 존재다. 이런 의미에서 권리는 '인민의 아편' 종교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를 폐지하는 것은 그들에게 참된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사태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환상을 필요로 하는 사태를 포기하라는 요구다.’ [헤겔법철학비판]

즉 인간을 진정으로 해방시키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면 그간 이용되어온 종교나 권리 같은 땜질식 해법은 설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주의가 콧방귀를 뀔 때의 도덕은 현재의 도덕이고, 도덕적 의미를 함축한 주장을 할 때의 도덕은 공산주의의 도래로 성취될 미래의 도덕이라는 식으로 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이상인 공산주의 사회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 미래의 도덕은 실체가 없이 매우 막연한 형태로 남게 된다. 공산주의 사회는 하나의 이상향이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선배 격인 오웬, 생 시몽 등을 몽상적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은 유토피아주의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유토피아)를 이리 저리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몽상적 접근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즉 미래를 멋대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역사의 전진운동을 관찰함으로서 이미 존재하는 미래의 씨앗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지배하는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이들은 '과학' 아닌 '몽상'을 강력히 거부하게 되고, 그 결과 마르크스 주의 내부에서 공산주의 사회에 도래할 해방의 도덕이 미래 사회에 대해 갖는 함의는 전연 검토되지 못하게 된다.

이리하여 현재의 도덕은 청산의 대상일 뿐이고 미래의 도덕은 감히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는 도덕 이론에 해당하는 부분이 통채로 텅 비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

혁명은 분명히 이 세상에서 가장 권위주의적인 것이다. … [혁명은] 사람들 중의 일부가 총, 칼, 대포라는 수단들 -있기만 하다면 가능한 모든 권위적인 수단들- 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승리한 당파가 헛되이 싸운 꼴이 되지 않으려면, 그 당파는 자신의 무기로 반동분자들에게 불어넣은 테러라는 수단을 통해 이 지배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권위론」-

10월 혁명으로 소련이 건국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야기되어 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은 실천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짊어지게 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는 자신들이 만들어 나갈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해왔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와 선배들이 남긴 유산으로부터 실질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것을 거의 물려받지 못했고 그들 자신도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부분적으로는 엄혹할 정도로 그들의 혁명에 적대적 환경에 직면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빠르게 테러에 의존하게 되고 그 테러의 범위와 강도는 동지들까지도 당혹하게 만들 정도가 된다. 여기서 저자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마르크스주의의 도덕 이론이 그들의 실천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와 미국 철학자 존 듀이 간에 이루어진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 대한 문답을 보자. 트로츠키는 "수단 자체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일 수 있지만… 어떤 수단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나 비난은 목적으로부터 비롯"된다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참으로 인류의 해방으로 이끄는 것은 허용될 수 있다고 대답한다. 이 목적은 단지 혁명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도덕은 필연적으로 혁명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 도덕은 종교적 독단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관념론적 물신 숭배나 지배 계급의 철학적 헌병과도 화해할 수 없게 대립한다. 그 도덕은 행위 규칙을 사회 발전의 법칙으로부터,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모든 법칙 중의 법칙인 계급 투쟁으로부터 이끌어낸다.

따라서 혁명의 적들에게는 테러의 철퇴를 휘둘러도 정당하지만, 우리 편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 트로츠키의 주장이다.

그런데 듀이는 트로츠키의 주장을 분석하면서 기묘한 점을 발견해 낸다. 트로츠키의 주장대로라면,
인류의 해방이라는 이상을 의도하고 있는 목적으로서 가지고 있다면, 이 목적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이는 모든 수단에 대해 그 수단이 무엇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하나하나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제시된 모든 수단은 그 수단이 낳을 수 있는 결과라는 분명한 기반 위에서 가늠되고 평가

되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계급투쟁이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리고 계급투쟁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견해는 수단과 결과를 상호 의존성 속에서 귀납적으로 관찰함으로써가 아니라 연역적으로 도출되었기 때문에, 그 수단 즉 계급투쟁은 그것의 실제적인 객관적 결과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없다.

어떤 역사법칙이 그 투쟁이 수행되는 특정한 방식을 규정한다는 믿음은 틀림없이 계급투쟁의 다른 방식은 배제하면서 그 투쟁을 수행하는 특정한 방식에만 광신적이고 신비적으로 헌신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듀이는 (트로츠키 같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이상이나 사회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들에 대한 합리적 평가에 대해서 헌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믿는 답, 즉 역사적 변화의 법칙으로서의 계급투쟁에 대해 헌신하고 있어서 모든 도덕적인 문제 즉 궁극적으로 획득될 목적에 대한 모든 문제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우울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정리

"1917년 이래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여러 가지 사회적 실험의 운명과 뗄 수 없게 연관되어 있다" "트로츠키 이래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실험들의 실패에 대해 이론을 구제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흔히 그 이론의 어휘들로 설명하려 시도해왔다. 물론 그 실험들이 실패였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는 현실사회주의가 완전한 실패로 결론나 관짝에 들어간 현재도 그대로 들어맞는 이야기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마르크스 본인이나 마르크스주의는 문제가 없으나 문제는 그것을 잘못 계승하고 집행한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포트 등 후대 집권자들의 잘못일 뿐이라는 '도마뱀 꼬리짜르기' 식의 옹호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건 정말 그런 것일까? 실은 레닌이나 스탈린의 테러도 마르크스로부터 면면히 이어내려오는 마르크스주의 본류에서 기인하는 면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 가능성은 얼마나 신중하게 검토된 후 기각된 것인가?

이 책에서 언급되는 로자 룩셈부르크, 카우츠키, 트로츠키, 루카치,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은 실천적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동의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대답은 특정한 공통의 핵심적 전제를 공유한다.

저자는 이렇게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공통된 도덕관에는 독특한 함정이 있어서 그런 문제를 야기하는데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처음부터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채택된 수단들에는 스스로가 도덕적 저항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그러한 접근법을 보여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이 "20세기에 압도적으로 지배적이었던 사회주의 전통의 몇몇 착각과 맹점으로부터 풀려나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으려면 이런 문제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도덕관에는 (1)결과주의(2)장기적 전망이 결합되었다는 특징이 있다고 정리한다.

(1) 결과주의: 앞서 언급했듯이 마르크스는 현재의 도덕은 계급사회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은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익이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칸트적 의무론이 배격되었다. 그런 의무론은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할지 몰라도 자본가와 노동자 같은, 사람들이 실제로 갖고 있는 차이를 추상화하여 감추는 기능으로 해석되었다. 즉 의무론은 기득권 보호 의도를 뒤에 감춘 채 어수룩한 사람을 속여먹기 위한 물타기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물타기가 실제로 시도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의무론이 기만적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급갈등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둔 마르크스주의에게 있어 그런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계급투쟁에 있어 적이 악용할 수 있는 수단은 철저히 거부해야 했다. 이런 관점을 밀어붙이다 보니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의 도덕적 직관에 반하는 비인간적인 결과를 낳기 쉬워졌다. 결국 주류 마르크스주의 전통에는 권리를 침해하고 부정의를 범하는 것이 비록 전반적인 선에 기여한다고 할지라도 도덕적으로 그릇된 일이라는 식의 관점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2) 장기적 전망: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 행위의 올바름이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통한 인간 해방이라는 장기적 목표에 대한 기여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면, 그런 판단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듀이가 지적한 것처럼 그런 판단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기껏해야 인간 해방이라는 ‘궁극적 목표’는 세계사 속에 내재해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사명’은 그 목표가 결실을 맺도록 하는 것이라는 교리에 대한 믿음에 기대는 식으로 회피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적 결과주의가 비합리적인 시도임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궁극적인 목적의 종국적인 실현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미래를 예견한다고 가정하면서도 그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일을 적절히 성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가상적인 목적지에 대해서는 검토하기를 거부하면서도 역사가 그 방향으로 간다는 점에 대해서는 환상적인 확신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선택한 수단에 대해 반성하기가 어렵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끝으로 공산주의 사회에 초점이 맞춰진 마르크스주의 도덕관의 초장기적 관점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면하는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내놓을 이야기가 없었다. 마르크스주의 도덕관은 먼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를 돕기 위한 도구적 관점을 제시할 뿐 오늘날의 도덕적 문제에 대한 해법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쨌든 자신들의 현실주의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습관적으로 현재를 미래라는 널찍한 궁전으로 들어가는 보잘것없는 현관으로 여긴다는 일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현관은 끝없이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전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궁전의 전부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D. 맥도널드-
by sonnet | 2009/09/18 08:29 | | 트랙백(1) | 덧글(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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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討滅된 좌빨 at 2009/11/02 02:04

제목 : 신형 좌빨 문화운동은 B급 주제를 물고 늘어지는 것..
* 그래서 신구좌파에게 권력은 뭘까http://blog.naver.com/non_organ/70072416836에서 이어짐. 1. 다시 칸트 선생의 생각에서 출발. 1.1. 칸트는 지성이나 이성 뿐만아니라감성조차도 능동적이라고 본다. 우리가뭔가를 대상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조차 감성의 능동적구성에 의한 것이라는게 칸트의 기본적 생각이다.근데 이 ...more

Commented by 행인1 at 2009/09/18 09:02
마지막 인용구는 왠지 일전에 다루신 적이 있는 '진보주의'주제랑 통하는 데가 있는듯 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16
네, 그렇죠 ;-)
Commented by 알츠마리 at 2009/09/18 09:07
마지막 구절이 인상깊네요.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같은 어느 만화의 대사도 떠오르고요.;D
Commented by RedPain at 2009/09/18 10:12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도착한 곳, 그곳에 있는 건, 역시 전장뿐이다. 여긴 나의 전장이다. 돌아가. 너의 전장으로"

베르세르크 16권에서 나오는 대사입니다. 가츠가 질에게 치는 대사죠.

그리피스가 샬롯트 공주에게 치는 대사인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 그런 삶은 전 견딜 수없습니다"도 명대사였죠.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23
네, 아주 특별한 소수(혁명가)를 제외하면 보통 사람에겐 지금을 사는 게 중요하니까요.
Commented by TSUNAMI at 2009/09/18 09:12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도 그람시가 마르크스주의의 경직된 기계론, 경제결정론, 진화론적 숙명론에 과감히 도전한 데에는 인간의 본질적이고 내면적인 의식문제에 관한 고찰이 결여되었다는 점-문화사상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8 09:36
네, 룩스도 그람시, 벤야민, 블로흐 등을 위의 전형에서 벗어난 예외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파파라치 at 2009/09/18 09:19
기독교도들이 현실은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짧은 여정에 불과하다고 믿는 것과 유사하네요.

사실 수천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형성된 기존의 사회 제도를 전면적으로 대체할 제도를 인간의 상상력만으로 묘사해 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결국 기존 제도의 부정에서 머물 수 밖에 없는 거지요, 맑시즘은.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22
사실 그런 면에서 레닌이 겪었을 어려움에 대해선 충분히 이해가 가는 면도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일이니까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9/18 09:42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19
하하. 최근 농장 이름도 도로 러시아로 고쳤잖습니까.
Commented by 게렉터 at 2009/09/18 09:48
요약하자면:

니가 저지른 불륜은 로맨스 같지만 지금 보니까 아무것도 아닌 오직 불륜일 뿐이고, 내가 하는 로맨스는 불륜인 것 같지만 결국에는 아름다운 로맨스일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오직 로맨스일 뿐이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23
하하,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피그말리온 at 2009/09/18 10:47
이래보니 뭔가 맑시즘은 다 때려부수겠어에만 몰두하는 외골수들의 모임 같네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9/18 11:43
맑읅흙스 영감님께서 자폭코드를 많이 심어 두셨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20
마르크스주의 도덕관은 보통 사람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도 전업 혁명가들을 위한 도덕이 아닐까 싶은 구석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먼 미래의 낙원을 위해 온 몸을 던져 거름이 되는 식의 도구적 도덕관도 일리가 있는데, 보통 사람에겐 무리죠.
Commented at 2009/09/18 10:5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21
전설의, 아니 아빠의 고향이니까;;
Commented by Allenait at 2009/09/18 11:07
결국 맑시즘은 '공산주의 사회만 가면 됨' 이걸 너무 강조했군요. 살짝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일전에 어디선가 본문에서 언급되었던 '도마뱀 꼬리자르기' 식의 주장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런가 했더니.. 결국 태생적인 한계도 한몫 한것 같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32
일종의 성배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바보이반 at 2009/09/18 12:49
닥치고 기본소득입니다. 모르면 말을 마세요.
-S당 10더쿠 위원회
M 영감님 때 부터 내려온 전통...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31
혹시 압니까. 저게 좀 유명해지면 비스마르크가 사회주의자들을 물먹이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로 치고나갔듯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얼핏 비슷한 제도로 선수칠지? ;-)
Commented by 구들장군 at 2009/09/18 13:30
누가 법대출신 아니랄까봐... 저기에서까지 권리를 가지고 씨름하는군요. -_-;;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33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출신성분을 짐작케 합니다 ^^;
Commented by 일화 at 2009/09/18 13:34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가지는 비합리적 맹목성이 태생적인 것이었군요. 워낙 관심이 없다보니 수상하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40
마르크스주의는 여러 학문분야에 걸친 거대이론인데, 하나 하나만 놓고 보면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아 보이는 역사관, 연구방법론, 현재의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각 이런 것들이 하나의 세트로 묶어놓고 보면 저런 결과를 낳게 되는 모양입니다.
Commented by 유월 at 2009/09/18 13:44
흥미로운 내용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35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我行行 at 2009/09/18 13:54
레닌의 말씀은 '해일앞에서 조개를 까지 말라'는 대한민국 어느 현자의 말씀과도 일맥이 상통하는 것같습니다.
Commented by 지나다 at 2009/09/18 23:12
아 그 민주주의 성인 유xx 말씀입니까?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40
?? 이해가 잘..
Commented by 我行行 at 2009/09/19 23:40
Commented by 삼천포 at 2009/09/18 13:56
1. 마르크스주의는 너무 합리성과 과학적에 얽매여서 '사람'이 해야할 어디까지의 선을 제대로 긋지 못했다는 느낌이네요

2. 마르크스주의는 박제되서 이제는 하나의 종교이고 우상처럼 되어버린것 같군요
반면 그보다 오래된 자본 자유주의는 필요하때마다 조금씩 리모델링해서 시대에 맞게 세련되게 느껴집니다.

2-1. 이 배는 분명 육지에 도착할이다.하지만 우리는 과학적으로 몽상은 하지 않기때문에 그 땅이 어디 있는지 어떤땅인지 감히 상상해선 안된다. 단지 배를 저어가기위한 수단을 생각하자 그럼 배는 육지에 도달한다. 라는 느낌이네요

3. 인상깊은 인용구네요 사실 궁전은 현관만으로 되어있고 뒤에는 훼이크 이미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1:05
1. 처음부터 전업 혁명가를 위한 윤리관 같은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2. 대표격인 역사적유물론이나 가치이론 등을 버리고, 마르크스주의에서 재활용 가능한 부분을 모아보려는 그런 시도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런 기획이 성공한다면 마르크스주의도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1. 네, 그게 마르크스주의 역사이론 및 실천론과 맞물려서 반론을 막아버리는 그런 얼개로 되어 있습니다.
3. 저도 그렇게 보는 쪽입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우린 모두 죽으니까 지금 서 있는 자리(현관)가 중요하다고 설파한 케인스 같은 사람을 높게 평가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꽤 되구요.
Commented by 삼천포 at 2009/09/19 21:08
전업혁명가 윤리관![폭소]
Commented by reske at 2009/09/18 15:24
어릴때 읽은 '토인비와의 대화'에서 토인비 주니어가 (운동권 시절 자기 주위의)공산주의자들이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데 환멸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있었죠. 흠 그거랑 일맥상통하는군요.

그런데 앞서도 지적하였듯, 요즘에는 광적인 모럴리스트들이 마르크시즘을 신봉하더군요. 사실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이 현실적인 성향을 더 띠고요.. 뭐 유물론을 주장한 마르크시즘을 유심론에 열광하는 인문학도들이 신봉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랄까.. 마르크스는 부정하고 싶었겠지만 결국엔 마르크스주의도 인간의 도덕감정에 강하게 호소하는 듯하네요.

뭐 그러고보니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을 과학이라고 부르는건, 허경영이 축지법으로 삼각산을 오른다는 것만큼이나 헛소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느낀바가 있어 트랙백합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올겨울에 시간나면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53
제 생각엔 마르크시즘은 예나 지금이나 현 상황에 대한 윤리적 분노에서 동력을 얻는 면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혁명을 꿈꾼다면 더더욱 극단적인 걸 원한다는 반증일 테구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09/09/18 18:49
맑스 영감이 '츤데레'스럽다 싶은 구석이 보이던 게 저런 데에 기인한 탓이었군요.
'비과학'을 혐오하는 '연금술사'랄까, 그런 느낌...;;;;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1:11
하하. 사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키배도 무수히 뜨고... ;-)
Commented by 유리 at 2009/09/18 20:32
이젠 한국에서도 이런 도서를 읽는것이 자유스러워졌군요~~ 한국 떠나오기 전에는 금서처럼 여겨졌던 시절도 있었는데.. 좋은 글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08
하하, 한국을 떠나신지 꽤 오래 되셨나 봅니다. 제 기억으로는 1990년대 중반쯤이면 이미 대단한 눈치 보지 않고 책을 봤던 것 같은데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9/19 20:52
YS시절에 책은 죄다 풀어줬죠. 아직도 그걸 자랑으로 여기는지는 본인에게 좀 물어봐야 할 일이겠지만.
Commented by candycat at 2009/09/19 01:39
맑스는 정말 사상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우리나라의 빨간색 알레르기 때문에 평가절하되어 있던게 너무 아쉽죠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20:15
거물이긴 한데, 존경할만한지는 의견이 많이 갈릴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별마 at 2009/09/19 18:53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커녕 공산당선언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런저런 비평들을 여기저기서 주워듣다보니
내가 어떻게 이해하는 게 아니라 남이 이해한 걸 듣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원전을 읽기 전에는 비평글을 읽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만...
이건 읽어봐야겠네요.

흥미로운 책을 좋은 글로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19 19:57
네, 나온지 오래 되어서 지금 보면 책값도 상당히 싸다고 느껴집니다. ;-)
Commented by 동글기자 at 2009/09/20 11:00
흥미로운글 잘 읽고 갑니다.글을 읽고 보니,,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들을 읽다보면 무심코 순간순간 들던 생각이었던 듯도 싶은데,,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곧바로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여러 생각하게 하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야용 at 2009/09/20 11:33
개인적으론 케인즈의 마르크스와 자본론에 대한 견해에 매우 동감하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저련 at 2009/09/20 21:53
맑스주의적 도덕관을 '자연주의적 오류' 비슷한 것으로 정리했군요. 강력한 논변이라고 봅니다. 요새 제가 고민하는 주제로 좀 더 살을 붙여보자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개념적 혼동, 즉 주관성과 그것을 규제하는 규제 원리로서의 개념체계가 가지는 객관성 사이의 '끈끈한(더 좋은 표현을 못찾겠군요)' 관계를 무시하고 양자를 명백히 구분할 수 있다고 믿은 혼동이 그런 자연주의의 오류와 깊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하필 트로츠키의 논변 상대가 듀이로군요. 제 시각에서라면 가장 극명한 전선이 딱 실용주의와의 사이에 그어져 있을텐데, 흥미롭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9/20 22:47
네, 역시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신념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워낙 근본적인 부분에 해당해서 그런 문제가 고쳐지질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대한 마르크스 진영의 평가가 궁금해서 책 나온 시기를 전후해서 new left review 같은 데 실린 서평이나 반론을 몇 개 찾아보았는데, 이 책의 주 논지를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하는 분위기더군요.
저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는데 듀이가 트로츠키 문제를 다루는 무슨 국제위원회에서 활동을 해서 장시간 인터뷰를 한 적도 있고 그렇다고 합니다.
Commented by 措大 at 2009/09/21 07:55
러시아, 맥시코, 스페인, 이탈리아, 중국...독자적으로 맑시즘이 (물론 아나키즘도 병행되었지요) 들어와서 혁명에 불을 붙이고, 선도적으로 타올랐던 나라들이 애초에는 대단히 종교적인 (반대로 종교적 신념에 대한 인문학적인 냉소와 비판정신이 모자란) 나라였다는 점은 우연의 일치겠지만...가끔은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고보니 강철의 혁명원수도 원래는 신학교 학생 (...) 민족의 위대한 수령동지도 기독교 집안 (...)
Commented by -_- at 2009/09/22 08:11
카톨릭-동방정교와 맑스주의는 친구이군요. ㅋ
미래에 대한 전망 부족과 내세성을 맑스와 기독교의
공통점이라고 부른것은 광장의 주인공인 철학생 이명준 ㅋ

그나마 이데올로기 비판은 남을만합니다. 서구 자본주의 파쑈사회가 부분적으로
맑스사상을 비판하는데 이데올로기비판론을 사용해오긴했지만요
이제 그런 부르조아 도덕책은 휴지에 잘 싸서 버려야죠
Commented by 부정변증법 at 2010/07/16 23:57
1년이나 지나서 다는 덧글입니다. 계급투쟁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는 현재 신좌파 진영에서는 거의 해소되거나 심지어 조롱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계급(프롤레타리아)의 존재조차 의심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마르크스의 연장선상에 두고 있는 사상가들이 제법 있습니다. open Marxism이라고 불리는 조류가 하나일테고, autonomia계열이 또 하나일 것입니다. 특히 안토니오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재해석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서 부재했던 윤리학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끈질기게 진행했습니다. 그 외에도 아렌트를 수혈한 비르노, 듀이와 프롬을 수혈한 프레이리 등도 마르크스의 흐름에서 윤리문제를 수립하려는 끈질긴 노력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를 옹호하는 쪽이나, 비판하는 쪽이나 가장 부족한 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문헌학적인 지식입니다. 대체로 소비에트의 ML주의 저작, 혹은 엥겔스의 저작 등을 마르크스와 등치시켜서 분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동안 소비에트의 마르크스 해석을 무로 돌린다면 마르크스의 문헌학적 해석 작업은 이제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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