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net님의 '2차 북핵위기를 돌아보며'에 대한 단상 (udis)에 트랙백
일단의 열기를 식힐 만큼은 시간이 지난 것 같으니 이제 이 견해를 한 번 검토해 보지요.
들어가기 전에 하나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제 글을 "sonnet님은 불카누스라는 그룹이 주로 북한에 대한 전쟁을 주장했고, 부시는 상대적으로 북한에 대해 온건한 입장이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이라고 받아들인 것은 심각한 오독이라는 점입니다. 이 점은
shaind씨께서 잘 정리해 주셨기 때문에 별도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위 글에서 거론되는 우드워드의 부시 인터뷰는 한 가지 사실을 보여줍니다. 부시가 개인적으로 북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겁니다. 이는 부시의 생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이긴 합니다만, 그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왜냐면 북한 정권에는 그런 비판을 받아 마땅할 만한 이유가 산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지요. 샤란스키 등에 공감하는 이상론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북한에게 그정도 불쾌감을 표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은 몇 차례에 걸쳐 북한과의 전쟁을 단단히 결심한 바 있다"(udis) 같은 주장처럼 부시가 북한을 공격하려 했다는 것을 뒷받침하지는 않습니다.
sprinter씨가 잘 지적했듯이, 미국의 국가지도자가
1)개인적으로 북한을 싫어한다는 것과 그 국가지도자가 그런 동기 때문에
2)북한과의 전쟁을 정책으로 추진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후자를 설득력있게 보여주려면 북한과의 전쟁을 선택하고 추진했음을 보여주는 다른 근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 추진과정에 대해 엄청난 양의 자료를 갖고 있고, 1994년 클린턴 행정부가 협상과 병행해 준비했던 영변폭격안에 대해서도 믿을 만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전쟁 추진 과정에 대해서는 그런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udis씨는 프리처드의 책 『실패한 외교』가 그에 대한 분명한 근거를 제공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책을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용도로 쓸 수는 없습니다. 프리처드의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그 책은 그런 이야기 대신 전혀 다른 이야길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우라늄 농축의 길로 들어서서 기본합의의 정신을 어긴 것은 북한이었다. 그러한 결정에 대한 책임은 북한이 져야 한다. 평양이 얼마나 부시 행정부를 싫어하고 불신했는지와 관계없이, 기본합의문의 파기 결정을 부시 대통령 책임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다른 한편 부시 행정부가 하는 일 없이 평양으로 하여금 향후 핵무기 프로그램의 진전 선언을 하도록 내버려두고, 예고된 조치들을 하나하나 행동으로 이어갈 때도 지켜만 보고 있었던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가 했던 것에 비해 확실하게 온건했다. 1993년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사용후 연료를 재처리해서 플루토늄을 추출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전쟁을 준비했었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사용후 연료를 재처리하고 플루토늄을 두 번 추출해 추가적으로 8기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양을 얻을 때에도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1]
여기서 "확실하게 온건"은 significantly softer를 옮긴 것인데, 이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당근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온건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클린턴 행정부와는 반대로] 채찍을 휘둘러야 할 순간에도 채찍을 휘두르지 않고
물렁하게 대했다는 의미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부시 행정부 1기의 대북정책은 실로 당근도 없고 채찍도 없는 상당히 이상한 정책이었던 것이지요.
이 책을 번역했던 역자들도 같은 방향으로 프리처드의 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양자대화 거부는 무시정책을 배경으로 한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의 재처리에 나서도 미국은 대응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를 비교할 때, 그 차이는 온건과 강경이 아니라 바로 ‘관심의 차이’였다는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북한이 재처리에 돌입하자 클린턴 행정부는 군사적 공격 가능성까지 모든 선택지를 고려했고, 결국 1994년 제네바 협상을 선택했다. 부시 행정부는 관심이 없었고 무시했으며, 북한의 핵 보유 과정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무시정책은 결국 무능으로 드러났다.[2]
그리고 이것은 제가 앞선 글에서 지적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부시 행정부 1기 대북정책에서 나타난 주요한 문제는 강경한 위협과 대결을 택한 데 있지 않았다. 진정한 문제는
미국이 북한을 진지하게 상대 -그것이 전쟁이던 협상이던 간에-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의 태도는 엉거주춤한 것이 문제였지, 단호해서 문제가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sonnet)
여기서 "매우 중요한 시기에 부시를 보좌한 인물"(
udis)이라고 묘사되는 저자 찰스 프리처드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가기로 하지요.
프리처드는 클린턴 행정부 당시에 백악관 NSC에서 아시아국 선임국장으로 일하다가, 부시 행정부 들어서는 곧 국무부로 옮겨가(2001년 4월) 대북협상특사를 맡아 약 2년간 더 일한 후 제1차 6자회담이 열린 2003년 8월에 사직합니다. 즉 그는 클린턴 말기~부시 1기 사이의 대북협상에 대해 폭넓게 논평할 수 있는 경험을 갖고 있는 주요 실무자입니다. 반면 그는 부시의 의도나 의사결정과정을 관찰하고 논평하기에는 백악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프리처드가 묘사하는 부시 행정부 1기의 대북정책은 어떤 것일까요?
대북정책과 관련해 「부시팀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누구인가」란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3장을 보도록 하지요. 여기서 그는 한국에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부시 대통령이 2001년 1월 20일에 취임했을 때, 이 [정권인수]팀에 참석했던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행정부에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이 로버트 조지프(Robert Joseph)로, 그는 반확산 선임국장이 되었다. 국가안보보좌관인 라이스와 부보좌관이었던 해들리와 친했고, 정권 인수기와 행정부 초기에 그가 추진한 업무 때문에 그는 NSC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였다. 조지프는 아시아 업무에 별로 경험이 없었지만, 북한을 자신의 전문 영역으로 삼았다.
과거 행정부에서 NSC의 반확산(이전에는 비확산) 부서와 아시아 부서는 부서 간에 공감할 수 있는 대북 정책이 실행되도록 보장했다. 지역 부서로 NSC 아시아국은 기능적 부처인 반확산 담당 부서에 비해 정책 발전을 주도해 왔다. 동맹국들과 지역 내 나라들과의 더 폭넓은 관계를 고려해서 NSC 아시아국이 인도주의적 관심사, 위조지폐, 안보 등의 현안을 주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 1기에서는 조지프의 영향력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없었다. 조지프의 영향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지프가 반확산 담당 선임국장이었던 부시 1기 내내 NSC 아시아국 선임국장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조지프는 북한에 대한 경험이 없었지만, 자신이 명명한 대북 정책 조정회의의 공동의장이 될 수 있었다. 사실상 이는 그가 대북 정책의 방향키를 움켜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국가안보 대통령 명령 1호에 따르면, 동아시아 정책조정회의는 의장을 국무장관이 결정하고, 차석급 회의와 각료급 회의에서 검토하는 북한 관련 의제에 대해 ‘정책 분석’을 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나 실제는 전혀 달랐다. 국무부가 아니라 조지프가 이끄는 NSC 반확산 부서가 정책 문서의 작성을 담당했고, NSC 아시아국이 그중 극단적인 견해나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합리적 조정을 시도했다.
…
NSC의 봅 조지프, 국방부 정책 담당 부장관[sic, 차관] 더글라스 페이스, 국무부 군비통제 및 국제안보 담당 차관보[sic, 차관] 존 볼턴, 부통령실의 에릭 애들먼, 국제안보정책 담당 차관보 크라우치를 포함한 비공식 네트워크가 공식적으로 또는 막후에서 부시 행정부 1기의 대북 정책을 만들었다. 볼턴을 제외하고 이들은 국가적 견해나, 그들의 상관인 부통령·대통령(국가안보 보좌관과 부보좌관을 통해)·국방장관의 심정을 대변했다. … 내가 참석했던 몇몇 혼란스러운 회의에는 조지프, 애들먼, 볼턴과 페이스의 부하 직원들이 참석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상관의 견해를 대변했지만 합의할 수 있는 권한(아마도 능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이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활용했던 돌아버릴 논리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도덕적 순수성’(Moral Clarity)인데, 이 말은 조지프의 부하 직원인 존 루드가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었다. 특정 논리 -혹은 예상되는 결과- 에 직면했을 때에 루드는 왜 그것이 정책이 되어야 하는지, 바로 ‘도덕적 순수성’을 근거로 내밀었다. 나도 도덕성이나 순수성에 대해 박수를 치지만, ‘도덕적 순수성’은 특정한 요소가 왜, 그리고 어떻게 특정한 정책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부적절한 개념이었다. 정책의 변경을 위해 고위급 논의인 차석급 혹은 각료급 회의를 활용하기보다 이 부하 직원들은 ‘도덕적 순수성’을 일상적인 발언 자료나 연설에서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는 이유로 자주 사용했다. 이것은 하위 직원들이 미국 정부의 정책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하다.[3]
이 견해를 또 다른 자료와 맞춰 보기로 하지요.
부시 정권의 대북 정책 혼란은 파월·아미티지와 체니·럼즈펠드의 대립 때문에 일어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일 매일의 정책 결정 과정은 “국무부 대 국방부의 대립이라기보다 지역 전문가와 비확산 전문가 간의 싸움이었다”고 정부 고위 관리는 지적했다.
지역 담당 그룹과 비확산 그룹은 켈리 방북 여부, 방북 전략, 기본합의의 평가, 대북 중유 공급 지속 문제, 나아가 2003년 봄이후 3자회담과 6자회담의 전 과정에서 모든 쟁점을 놓고 대립했다. 양쪽의 투쟁은 백악관의 NSC에서 가장 격렬한 긴장과 대립을 일으켰다.
비확산 그룹의 대표 격은 로버트 조셉과 존 볼턴이었다. … 조셉은 또 북·미 기본합의와 6자회담은 본질적으로 핵 문제를 다루는 것이므로 자신이 그 문제를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동아시아 담당의 토컬 패터슨, 제임스 모리아티, 마이클 그린 등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입지 강화와 북한의 핵 포기 두 가지를 동시에 목표로 삼고 있는 대통령의 대북 정책 재검토를 방패로 저항했다. …
“네오콘은 담당 업무가 아닌 일도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의견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언론에 흘리거나 막후에서 공작을 했다. 그 덕분에 일이 헛돌고 18개월이나 허비했다. 18개월이나”라고 국무부 고위 관리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2003년 여름 무렵의 일이었다. 18개월은 부시 정권 출범에서부터 켈리 방북까지의 약 1년 반을 가리키는 것이다.
미국의 6자회담 대표단 구성은 관여파와 비관여파(또는 지역 그룹과 비확산 그룹)가 같은 택시에 합승한 것과 같았다. 비관여파는 볼턴 사무실, 백악관 NSC 비확산 부서, 체니 사무실, 국방부 등에서 나온 중견 간부들이었다.
“과거 소련이 서방에 보낸 무역 대표단 같았다. 대표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고, 그를 감시하는 사람이 또 있고…”라고 아미티지가 쓴웃음을 지어 가며 말한 적이 있다.[4]
후나바시가 취재한 관련 인사들의 견해도 프리처드가 말한 것과 잘 맞아들어갑니다.
그런데 여기엔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습니다. NSC에는 정책 결정을 위한 수석 회의(장관급)와 차석 회의(부장관급)가 있고, 그 밑에 각 부처의 실무진들이 모여 갖는 정책조정회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프리처드나 후나바시가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대북정책을 둘러싼 노선 투쟁과 상호 견제는 주로 이 실무진 회의를 축으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건 그만큼
고위층들은 [뭔가의 이유로] 북한 문제에 충분한 관심을 쏟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최고위층에 의한 지속적인 관심과 정치적 결정이 충분히 주어졌더라면, 실무진들 사이에서 그렇게 18개월씩 교착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대북정책에 대한 파월 국무장관의 역할을 묘사하면서 프리처드도 이런 관점을 따릅니다.
나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대북 정책의 발전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특히 강경파들이 그토록 심하게 그의 구상을 음해하기 위해 뛰어다닐 때 그가 왜 그들을 제어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곤 했다. 나는 파월이 우리의 주요 동맹국인 한국의 지지를 지속시키고 유도할 미국의 정책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했다고 믿는다. 파월이 하지 않은 것. 그것은 바로 대북 정책의 조정자 역할이었다. 국무장관으로서 그의 책임감은 대단했다. 나는 파월을 막대기 위에서 돌고 있는 여러 접시의 평행을 유지하려는 ‘접시 돌리는 사람’으로 비유한다. 접시 하나의 속도가 떨어지고 비틀거리면 달려가 균형을 잡고, 다시 그 다음 흔들거리는 접시로 달려갔다. 대북 정책은 파월의 많은 접시 중 하나일 뿐이었다. 파월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관심을 돌리면, 강경파들은 부시 행정부의 고위층에게 그가 북한이라는 접시를 잘못된 방향으로 돌리고 있음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했다.[5]
결론적으로 말해 부시 대통령이 군사력으로 북한 정권을 작살내겠다는 결의가 분명했으면 이런 결과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그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북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자연스럽게 NSC 수석회의(장관급)이 정책논쟁을 주도해 나갔을 것입니다.
이는 앞선 글에서 제가 소개했던
"불카누스들은 북한문제만 만나면 미봉책으로 대처"했다는 설명과 잘 부합합니다. 이 그룹(체니 부통령, 럼스펠드 국방장관, 월포위츠 국방 부장관, 파월 국무장관, 아미티지 국무 부장관,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은 부통령, 장관 세 명와 부장관 두 명으로 이루어진
부시의 안보 내각 그 자체입니다. 대통령의 정책추진이 이들과 따로 놀 수 있겠습니까?
[1] Pritchard, Charles L.,
Failed Diplomacy: The Tragic Story of How North Korea Got the Bomb, Brookings Institution Press, 2007
(김연철, 서보혁 역, 『
실패한 외교: 부시, 네오콘 그리고 북핵위기』, 사계절, 2008, p.84)
[2]
같은 책, p.13 (역자 서문)
[3]
같은 책, pp.89-92
[4] 船橋洋一, 『
ザ·ペニンシュラ·クエスチョン 朝鮮半島第二次核危機』, 朝日新聞社, 2006
(오영환 외 역, 『
김정일 최후의 도박』, 서울: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07, pp.222-225)
[5] Pritchard,
같은 책, pp.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