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ime change(체제 교체)라는 말이 사용될 때는 거의 언제나
비정통적인 방법을 지칭합니다. 즉 정규전을 통해 목표국을 점령한 후 새 정부를 세우는 그런 것은 제외하고, 내부정변, 쿠데타, 시민봉기, 게릴라, 반군 같은 방법을 통해 정권교체를 달성한다는 것이지요. 부시행정부 들어 북한을 겨냥해 레짐체인지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국내 언론에도 이 단어에 주목하게 됩니다.
제 기억에, 2004년 후반부터 부시 행정부 말에 이르기까지, 이종석을 포함한 당시 안보정책 결정자들의 뇌리를 장악했던 걱정은 북폭보다는 레짐체인지에 관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밖에서는 이 둘을 잘 구분않고 사용했던 것에 비해, 안에서는 꽤 날카롭게 갈랐던 것 같고, 특히 펜타곤이 북폭파라면 체니 부통령실이 레짐체인지에 꽂혀있다는 식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
ytekai)
저는 사실 북한의 레짐체인지 가능성은 거의 무시해도 좋은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만, 이종석이 이걸 그렇게 걱정했다고 말씀하시니까 한 번 정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시 행정부 멤버들이 북한을 겨냥해 레짐체인지를 언급했다고 한다면, 우리가 제일 먼저 돌이켜봐야 할 것은 이라크입니다. 왜냐면 그들이 90년대에 야당 인사로 지내면서
이라크 레짐체인지 운동에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열심인 정도는 북한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첫 번째 이라크 레짐체인지는
클린턴 행정부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점입니다.
1993년 11월, 사담 후세인을 전복시키는 데 골몰하던 저항집단인 이라크 국민회의(Iraqi National Congress; INC)의 아흐마드 찰라비(Ahmad Chalabi) 의장은 ‘엔드 게임(End Game)’이라 명명한 네 단계 전쟁계획을 클린턴 행정부에 제시했다. 여기에는 그 전쟁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자금까지 다급하게 촉구하면서 찰라비는 “지금 당장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바야흐로 이라크에서 자생적 내분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그 도화선만을 당겨준다면 내분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사담 체제는 전복되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 10년 동안 찰라비가 설득력 있게 거듭해서 주장한 것도 바로 이런 메시지였다.
…
어쨌든 찰라비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겨도 좋다는 허락을 클린턴 행정부에게서 받아냈고 자금 지원까지 받았다. 그리고 1994년 10월쯤에는 쿠르드족이 관할하는 이라크 북부의 한 지역에 CIA 파견대가 소규모로 설립되었다. 찰라비의 본부도 그 근처에 있었다. 찰라비의 계획은 이라크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로 불만을 억누르고 있던 시아파 교도(사담과 그 추종자들은 대부분 수니파)가 압도적으로 많은 바스라와 북부의 쿠르디시, 키르쿠크, 모술에서 동시에 폭동이 일어나길 바랐다. 그럼 이라크 군대에서 대규모 탈영사태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이곳을 담당하던 CIA요원 밥 바에르(Bob Baer)는 “우리는 이 작전을 찰라비의 쿠데타라고 불렀다”라고 말했다.
바에르는 당시 상황을 그의 회고록 『See No Evil』에서, “CIA는 이라크에 단 한 명의 정보원도 심어놓지 못한 실정이었다. … 이라크 내에 단 한 명의 정보원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이란, 요르단,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 인근 국가에도 이라크에 대한 정보를 전해줄 정보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다른 정부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정보를 수집하는 기구라는 CIA조차 이라크에 관한 한 눈먼 장님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1995년 3월, 찰라비의 폭동이 닻을 올렸지만 참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바에르는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계획보다 사흘이나 늦게 독자적으로 행동한 쿠르드족의 한 지도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내게 말했다. 이라크 군부 내에서 첩자를 심어두려 했지만 찰라비는 대령이나 장성은 고사하고 위관급 장교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바에르는 “찰라비는 사담을 시험한 것이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바에르는 “찰라비는 허세를 부리며 엄포를 놓은 것이었다. 그는 허세를 부리면서 승리를 쟁취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아무런 수단도 없지 않았는가!”라며 “찰라비는 심리전이라고 생각했다. 클린턴이 ‘제군들, 이제 공격할 때가 되었어!’라고 말하면서 전폭적으로 지원하면 사담을 전복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 1996년 말, 이라크군은 북부지역에서 찰라비 추종세력을 거의 몰아냈다. 이때 130명의 이라크 국민회의 회원이 처형당했다.[1]
찰라비의 계획은 사담 후사인 정권이 사실 매우 취약해서 한 번 깃발만 들면 이탈자가 속출해 그대로 무너질 거라는 식의 비현실적인 희망에 입각하고 있었습니다만, 한마디로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면서 그들이 이라크 국내에 거의 지지자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런 어이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찰라비는 클린턴 행정부 대신 공화당에 밀착해 재기합니다.
찰라비는 실패의 쓴 맛을 멋들어지게 이겨냈다. 이라크 북부에서 그를 버렸던 클린턴 행정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언론과 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 곧 INC는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의 재집결지로 부상했고, 첫 부시 대통령을 위해 걸프전에 관여했던 많은 전직 고위관리들도 INC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98년 2월, 캐스퍼 와인버거, 프랭크 칼루치, 도널드 럼스펠드 등 국방장관을 역임한 유명 정치인들을 비롯해 40명의 저명인사가 서명한 공개편지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사담 후세인이 생화학무기를 대량으로 비축하고 있어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경고하는 편지였다. 그들은 미국 정부에 이라크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민중봉기를 다시 한 번 계획하라고 촉구했다. 찰라비의 1993년 전쟁계획을 그대로 되풀이한 듯한 이 공개편지에서 … 그들은 INC를 이라크 임시정부로 인정하고, INC가 이라크 북부에 거점을 다시 마련할 수 있도록 지원하라고 권고했다. 또한 클린턴 행정부에 걸프전 당시에 동결시킨 이라크 자산(약 15억 달러)을 해금시켜 임시정부를 지원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8개월 후, 클린턴 대통령은 의회의 압력에 견디다 못해, 이라크 저항세력을 군사적으로 훈련시키고 군 장비를 지원하는 데 9천7백만 달러를 할당하기로 한 ‘이라크 해방법’에 서명했다.[2]
그리고 공개서한에 동참한 이들 중 다수가 다음 부시 행정부에서 주요 고위직에 취임합니다.
2000년 대통령 유세기간 동안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는 사담에 저항하는 반군세력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약속했다. 부시는 “사담을 축출하겠다”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사담이 대량살상무기를 계속 개발하는 경우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말이다. 선거가 끝난 후,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은 사견을 전제로 이라크가 새 정부의 우선적 해결 대상국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 하지만 부시 행정부 내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담 후세인과 그의 체제를 제거하는 것이 첫 걸프전 이후로 주된 관심사였다. 클린턴에게 이라크 반군 세력의 지원을 촉구한 1998년의 공개편지에 서명한 사람들 중 서넛이 부시 행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예컨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폴 울포위츠 국방차관, 더글러스 페이스 정책담당 국방차관이 그런 인물들이다.
1998년의 공개편지를 기초한 사람 중 하나는 리처드 펄이었다. 펄은 로널드 레이건 시절에 국방차관보를 지냈고 … 부시 행정부에서 펄은 국방정책위원장에 임명되어, 펜타곤에 전략적 문제들을 조언했다. 찰라비는 부시 행정부 내의 다른 인물들, 예컨대 럼스펠드와 페이스, 그리고 딕 체니 부통령의 수석참모인 루이스 리비에게도 연줄이 닿았다. 오랫동안 찰라비는 미국기업연구소[네오콘계 싱크탱크]의 저명한 회원들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의 지원을 꾸준히 받고 있었다. 물론 CIA 국장을 역임한 제임스 울시처럼 민주당에도 그를 지원하는 유명인사들이 있었다.[3]
다들 잘 알려진 부시 행정부의 매파들이지요. 이 외에도 후에 부시 행정부 고위관리가 될 인사로는 엘리엇 에이브럼스, 리처드 아미티지, 존 볼턴, 폴라 도브리안스키, 잘메이 칼릴자드, 피터 로드먼, 로버트 졸릭이 여기 서명하고, 윌리엄 크리스톨, 로버트 케이건,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네오콘 논객들도 동참합니다.[4]
여기서 찰라비 세력을 이용한 작전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지요.
찰라비의 한 보좌관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9·11테러 이전의 INC의 전쟁계획은 저항세력을 군사적으로 훈련시키고 사담 체제 내에서 변절자를 찾아내며, 미국이 이라크 남부의 비행금지구역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요컨대 2백 명의 교관을 선발해서 5천 명 가량의 저항세력군을 훈련시키고, 십중팔구 미군 특수부대 출신으로 짜여질 용병부대를 구성해서 군사력을 강화시키자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또한 반군(叛軍)을 이라크 탱크의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강력한 공습으로 어떤 수송수단도 다닐 수 없는 지역을 확보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다.[5]
이들의 작전은 기본적으로 망명 이라크인들을 훈련시켜 소수(~수천 명)의 경보병 부대를 만들어 싸움을 맡기고, 필요하다면 이들을 미 공군을 이용해 지원한다는 식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망명자들을 훈련시켜 어떻게 해볼 수 없을까라는 것은 아주 오래된 레퍼토리 중 하나이긴 하지만 성공률은 낮은 편입니다.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쿠바 피그스만 침공이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전을 계속 기획하게 되는 것은
정규 육군 사단을 동원한 본격적인 전쟁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기는 어렵다는 9.11 이전의 국내정치적 한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미군 장성들은 이런 작전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중부군 사령관을 지낸 진니 장군은 찰라비 세력을 이렇게 평합니다.
요즘 이라크 해방법에 따라 자금을 지원하고, 실크 양복을 입고 롤렉스시계를 차고 런던에서 소일하는 INC를 앞세우고 싶어 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 우리는 1천 명의 그런 전사들을 9천 7백만 달러에 상당하는 AK-47로 무장시켜 이라크에 침투시켜야 할 것이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얻겠는가? 기껏해야 ‘염소만’(피그스만의 패러디)일 것이다. [6]
여담입니다만 찰라비는 훗날 미군의 침공으로 사담 정권이 무너진 후 귀국하지만 부시행정부 고위층의 각별한 비호를 등에 업고서도 국내 지지세력을 규합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맙니다. 결국 모로 가도 안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죠.
이런 문제점 때문에 부시 행정부는 결국 이라크 전면침공으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9.11이 없었더라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길이었지요.
그런데 레짐체인지라는 것은 꼭 망명자 단체를 앞세울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CIA가 비밀공작으로 쿠데타를 일으킨다든가 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지요. 그것 또한 이라크가 아주 좋은 참고가 됩니다.
[CIA 이라크 공작 책임자] 사울은 숙련된 비밀공작원들과 첩보국(DI) 출신 정보분석요원들을 불러모아 과거의 작전을 재검토시켰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12년 내지 15년간 이라크 문제를 다뤄 경험이 풍부했고, 나머지는 발칸반도에서 비밀프로그램을 수행해온 요원들이었다. 핵심문제는 '이라크에서의 비밀공작을 어떻게 보는가?'
영화와 현대적 신화에서 묘사되는 CIA는 무엇이든할 수 있는 광신적 전사들로 채워진 곳이다. 그들은 불가능한 임무와 위험성을 갈구하는 사람들이다. 사울이 내린 결론은 판에 박힌 고정관념과는 정반대였다. 그가 요약한 사실은 "비밀공작으로는 사담 후세인을 축출할 수 없다."
CIA는 1979년부터 권력을 잡은 후세인이 자신을 보호하고 쿠데타를 막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경호체계를 완성했다는 현실을 직시했어야 한다. 이라크 특수보안기구가 그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고, 대통령경호실은 24시간 수행하고 있으며, 공화국특수수비대는 대통령궁과 수도에 있는 정부기관들을 방어하고 있다. 4개의 첩보기관들이 그들의 업무를 지원하였으며, 10여개의 육군 사단을 쿠데타를 분쇄하는데 동원할 수 있었다.
이라크 정부는 후세인의 생명을 지키고 권력을 유지하는 단 하나의 목표 아래 기능했다. 권력 내부에 대한 첩보활동·계획된 의혹·역할과 권한의 중첩·책임의 분산은 후세인을 이라크 국가 내 모든 것의 중심에 위치하도록 만들었다. … 성공할 수 있는 길은 CIA가 군의 이라크 전면침공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것만이 성공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CIA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선두에 나섰지만, 이라크에서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임무는 너무 어렵고 목표물은 너무 크다. 후세인을 둘러싸고 있는 벽을 뚫는 것은 군사작전과 침공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7]
2002년 1월 3일 사울은 테닛과 근동과 부과장 그리고 이라크 프로그램을 수행해온 두 명의 공작요원과 부통령에게 보고하러 갔다.
사울은 어조를 부드럽게 조절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비밀작전으로는 후세인을 제거할 수 없다'고 체니에게 말했다.
'CIA는 해법이 아닙니다. 독재정권이 조직을 움직이는 단 하나의 목표는 쿠데타를 막는 것입니다. 후세인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입니다. 그 '새끼'는 쿠데타를 억눌러 왔고, 쿠데타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부통령이 이라크 군대를 맡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쿠데타를 일으킬 탄환은 가지고 있지만 탱크를 움직일 기름은 없습니다. 부통령이 기름을 가지고 있다면 탄환을 주지 않습니다. 쿠데타를 준비하기에 충분한 기간 만큼 한 자리에 오래 앉아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시도한다면 권부 깊숙히 침투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후세인은 쿠데타를 기도할만한 사람들은 일찍이 격리시킵니다. 가능한 팔다리까지 따로 떼어놓으려고 할 사람이니까요. CIA가 측면지원하는 군사작전과 정면침공을 통해서만 후세인을 제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CIA는 과거 이라크 비밀 공작에서 교훈을 얻기 위한 검토를 진행해봤습니다만, 솔직히 CIA는 때가 많이 탔습니다. 우리는 이라크에서 심각한 신뢰도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쿠르드족과 시아파, 이라크의 예비역 장교들을 포함하여 CIA와 조율해본 사람들은 거의 다 자신들이 필요할 때면 "꼬리 자르고 도망간" CIA의 역사를 훤히 꿰고 있었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잠재적인 반 후세인 세력에게 전에 없이 결단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카드란 카드는 이미 다 써먹어서 이제 대규모 군사적 침공준비 이외에는 그러한 신호로 간주될 만한 것이 없었다. 사울은 UN에 가서는 협상과 봉쇄를 천명하면서 사우디와 요르단에게는 미국이 후세인 정권을 극비리에 축출할 것이라고 귓속말을 하는데서 파생되는 문제점도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 또 다른 교훈은 CIA가 장기간 비밀공작 프로그램을 지속할 수 없다는점입니다. 후세인 정권은 우리가 새로 기용할 만한 정보원들을 색출하여 한직으로 전출시켜 버리기 때문에 재빨리 손을 쑬 수밖에 없습니다."
…
[CIA 국장] 테닛과 사울 일행은 그 뒤 대통령에게도 동일한 브리핑을 했다. 부시가 물었다.
"우리는 은밀한 방법으로 그것을 할 수 있소?"
"없습니다."
부시는 그때 "젠장(darn)!"이란 말이 얼핏 떠오르더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
CIA는 '이라크 내에서 새로운 정보원을 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진지하게 임해야 되고 군대를 사용할 것이라는 언질을 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8]
이라크 내 CIA 비밀정보원은 정확히 네 명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외무부나 석유부 등 정부의 일반 부처에 있었던 관계로, 권력 핵심부를 뚫고 들어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따라서 CIA가 공화국수비대 또는 특수보안기구 같은 군 내부로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 이라크 내부에 심어 놓은 정보원은 비밀통신망을 이용했다. 바그다드에는 미 대사관이 없기 때문에 통신위성을 통해 컴퓨터로 단파 송신을 CIA 본부로 바로 날려 보내는 방식을 흔히 썼는데, 이 방식은 항시 머리끝이 쭈뼛해질 만큼 노출의 위험이 뒤따랐다. 사울은 테닛 앞에서 지난 번 내린 결론을 반복했다.
'비밀공작으로는 후세인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전면적인 군사적 침공만이, CIA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후세인을 제거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라크 내부의 정보원들을 확실하게 포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미국이 전면전을 벌여 후세인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한다는 진정한 결의를 분명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부시가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라고 할 때마다 첩보활동은 위축됐다. 전쟁은 그들의 첫 번째 선택이어야 했다. 대이라크 비밀공작이 점점 더 깊이 진행됨에 따라 심지어 어떤 요원들에게는 전쟁만이 유일한 선택이 돼 있었다.
사울은 국장과 차장 등 핵심간부들이 일하는 7층에 정기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의 한계는 2월 말까지입니다. 2월 말이 되면 사담 정권이 모든 걸 눈치 챌 것입니다. 만일 그보다 훨씬 늦춰진다면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그들이 엄청나게 방대한 비밀을 통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후세인의 경호부대와 첩보원들이 도처에 깔려있었고, 배신자에 대한 응징은 처참하기로 악명 높았다. 정보 제공자들과 스파이들은 곧 임무를 중단해야 할 것 같았다. … 이라크에 있던 사울의 2개 준군사팀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는 일어나는지, 일어난다면 그것은 언제인지, 기본적인 사항조차 종잡을 수 없는 가운데 막다른 상황에 몰려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가장 절망적인 경험이었다.[9]
즉 요약하면 이라크 같은 척박한 환경에서 상대를 포섭하려면 일단 대외적으로도
최후통첩 수준의 압박은 해 줘야 배신자를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밖에서 설렁설렁 반 년에 한 번씩 6자회담이나 하고 있어서는 쉽지가 않겠죠. 그리고 그렇게 포섭한 배신자도 오래 끌면 잡히게 되므로 단기간에 최대한 포섭한 후 바로 써먹어 끝장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미 대사관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데 이것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CIA가 비밀공작으로 정권을 전복시키는데 성공한 적이 몇 번 있지만, 대부분 대사관을 거점으로 상당한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경우였습니다. 대사관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가 공작의 성사 여부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가를 보여준 좋은 사례가 1953년의 이란 쿠데타[10]입니다.
사실 미국이 북한 수준의 통제 사회[11]에서 쿠데타나 봉기를 조직하는데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위의 이라크 사례에서 보듯이 몇 명의 정보원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 판국에 무리한 이야기지요.
그것이 반군이건 쿠데타건 혹은 다른 방법이건 간에 미국이 북한 같은 사회를 침투하려고 생각한다면 우선 탈북자 공동체를 발판으로 삼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외부의 공작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는 나라들은 방어 목적에서 그런 공동체에 다수의 끄나풀들을 심어놓기 마련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재미를 본 나라로는 쿠바를 꼽을 수 있습니다. 미국이 쿠바를 겨냥해 미국의 쿠바계 망명자 공동체를 발판으로 조직한 정보망이나 반군은 번번히 쿠바 정보부에게 침투되곤 했습니다. 특히 반군처럼 많은 숫자의 지원자를 모집해야 하는 경우 침투를 방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작전 거점도 문제입니다. 성공적인 작전이었던 80년대의 아프간 게릴라전 지원 공작의 경우 길고 통제되지 않은 국경을 접한 파키스탄에 거점을 두고 있었으며 주재국 정보기관과 협조 하에 일했습니다. 그런 것 없이 바다를 건너 침투시킨 쿠바 피그스만 침공의 경우엔 반격을 받자 그대로 전멸됩니다. 중국도 강력한 정보기관을 가진 나라로, 중북 국경 건너편에 레짐체인지 기지를 설치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2005년 초에 발표된 니콜라스 에버스타트의 컬럼[12]은 이들의 좌절감을 잘 보여줍니다. 에버스타트는 네오콘 씽크탱크이자 부시 행정부의 인재 풀로 유명한 AEI의 북한 연구자로 대표적인 미국의 대북 강경론자이지요. 놀랍게도 그는 어떠한 본격적인 개혁에도 북한이 저항할 것이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한 대안으로 보이는 선군정치를 버리고 (그들도 잘 아는)
평범한 스탈린주의("ordinary" Stalinism)로 복귀하도록 설득해 보자고 주장합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미국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기획하는'[13] 레짐체인지라는 것이 전망이 밝지 않은 대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좋은 대안이 있을 때 곧 레짐체인지를 버리고 그 길을 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레짐체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표명한다는 것은 다른 더 좋은 대안(특히 직접무력사용)이 없다고 느낀다는 뜻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 레짐체인지 시도가 적극적으로 진행되는지를 알고 싶다면, 워싱턴이 탈북자들에게 얼마나 적극적으로 접근하는지, 또 반대로 미국을 끼고 도는 탈북자들의 비정상적으로 활발한 활동이 있는지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정도는 한국 정부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너무 늦기 전에 적절한 경고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확실하게 아는 방법은 국정원도 독자적인 대북정보능력이 있으니 그 지분을 갖고 레짐체인지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겠구요.
요약1. 미국은 클린턴, 부시 할 것 없이 90년대부터 꾸준히 이라크의 레짐체인지를 기획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허황된 계획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가 없었다.
2. 9.11 이후 바뀐 국내 정세로 인해 정규전 침공이 가능해지자, 부시 행정부는 곧 레짐체인지 계획을 버리고 정규전으로 말을 갈아탔다. 이는 그만큼 레짐체인지 계획이 불만족스러웠음을 반증한다.
3. 북한 같은 수준의 통제사회를 비밀공작으로 전복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4. 미국의 과거 레짐체인지 시도는 몇 가지 패턴에 국한되어 왔으며, 아마 미래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5. 레짐체인지로의 관심의 전환은 역설적으로 다른 더 좋은 대안이 없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주[1] Hersh, Seymour M.,
Chain of Command: The Road from 9/11 to Abu Ghraib, New York: HarperCollins, 2004,
(강주헌 역,
『지휘계통: 9.11테러에서 아부그라이브까지』, 세종연구원, 2004, pp.234-236)
[2] 같은 책, pp.237-238
[3] 같은 책. pp.238-240
[4]
Open Letter to President Bill Clinton[5] Hersh, p.238
[6] 같은 책, p.248
[7] Woodward, Bob.,
Plan of Attack, Simon & Schuster, 2004
(김창영 역, 『
공격 시나리오』, 따뜻한손, 2004, pp.106-108)
[8] 같은 책, pp.108-111
[9] 같은 책, pp.153-155
[10] 1953년의 이란 쿠데타에 대한 개괄로는 Kinzer, Stephen.,
All the Shah's Men : An American Coup and the Roots of Middle East Terror, Wiley, 2003 을, CIA 대외공작사의 난맥을 개괄하는 책으로는 Weiner, Tim.,
Legacy of ashes : the history of the CIA, Doubleday, 2007 (이경식 역, 『
잿더미의 유산』,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을 참조.
[11] 북한에 대한 기밀정보를 검토한 미 대통령 자문위원회조차도 북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극단적으로 어렵다(extreme case)는 것은 한 수 접어주는 분위기이다. Jehl Douglas., Schmitt, Eric.,
Data Lacking on Iran's Arms, U.S. Panel Says, New York Times, 2005년 3월 9일 참조.
[12] Eberstadt, Nicholas.,
Pyongyang's Option: "Ordinary" Stalinism, Far Eastern Economic Review, 2005년 3월 21일
[13] 미국이 조직 혹은 개입하지 않았는데도 북한 내부 사정으로 정변 등이 일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미국이 바라는 방향이 될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제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