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고의 비밀병기(?) - 코발트 60 (crete)에 트랙백
위 글은 내 글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의 붕괴와 美-中-日 3각 협의체 문제에 대한 반론에 해당하는 글인데, 읽어본 결과 글의 상당부분은 내 글과 별 관련이 없고 한 가지 논점에 대해서만 답하면 될 것 같다. 그 논점이란 노무현 정부가 TCOG를 깨게 된 이유는
"부시 행정부의 무모하리만치 과격한 대북외교정책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논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무현 정부의 대외정책논쟁과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노무현 정부의 대외정책논쟁우선 인수위 시절~노무현 정부 초기의 대미-대북 외교의 큰 가락을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한 부속 조직으로 ‘북한 핵 문제 특별팀’이 설치됐다. 이 특별팀에는 윤영관, 이종석, 서주석, 서동만 외에 문정인 연세대 교수가 포함됐다. 팀장은 윤영관, 사무국장은 위성락이 맡았다. … 윤영관은 외교통상부, 이종석은 통일부, 서주석은 국방부, 서동만은 국가정보원을 맡았고,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선 북한 핵 문제 특별팀과 연계해 노무현 정권의 정책을 입안해 나갔다.
네 사람 모두 한국의 대미 정책이 시대에 뒤처져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대미 정책은 오랜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이 추진해 온 냉전 시대의 산물이다. 모든 외교 정책은 미국의 지시를 받아 만들어졌다. 이들은 대미 의존 외교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열린 첫 회의 주제는 북한 핵 문제였다. 노무현 당선자가 회의에 참석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북한 핵 문제는 평화적으로, 협상을 통해 해결한다. 이를 모든 통일외교안보 정책의 기초로 삼는다” 노무현의 관심은 오로지 북한 핵 문제 하나에 맞춰졌다. “어떻게 해야 북한의 핵 보유를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 미국의 군사 행동을 막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마련해야 한다. 노무현은 이와 관련해 세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1]
이 그룹은 한나라당과는 차별되는 새로운 외교정책을 구상하려고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상충되는 두 가지 구상이 존재했다.
그리고 노무현에게 있어
북한의 핵 보유를 막는 것과
미국의 군사행동을 막는 것은 대등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김영삼이나 김대중도 미국의 대북공격을 반대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미국의 행동을 막는 것에 대해 이렇게까지
최우선적인 중요성을 부여한 대통령은 전례가 없었다. 이것이 그의 임기 동안 한미관계에 매우 큰 부담을 주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옵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는 미국의 대응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맡겠다고 했다. 이종석이나 서주석은 “북한과 동북아시아의 환경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예측 가능한 환경으로 바꾼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물리적 방법으로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물리적 방법까지 동원하지 않는다는 능동적인 자세다. 인수위(통일외교안보 분과)의 네 명은 목표와 원칙 면에서 거의 의견 일치를 봤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논의 결과 대략 두 가지 견해로 압축됐다. 두 가지 견해는 윤영관과 이종석의 시각차다.
윤영관은 미국과의 밀접한 정책 협의를 강조했다. 미국과 보다 깊은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영향력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미국의 대북 정책을 보다 현실적으로 유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멀리 돌아가는 것 같지만 이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종석은 윤영관의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미국의 속내는 북한의 체제 전환이다. 그런 미국과의 정책 협의는 사실상 어렵다. 지금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 보다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펴는 것이다. 이때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다만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군사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는 모두 생각이 같았다. 이들은 미국이 1994년처럼 북한에 대한 강경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2]
상충되는 두 가지 구상을 대표하는 인물은 윤영관과 이종석이었다. 윤영관은 미국과 더 깊게 얽혀들어감으로서 우리 생각을 미국에 반영시킬 기회를 늘리자고 주장했고, 이종석은 미국에 적극적으로 맞섬으로서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노무현 당선자가 문정인을 포함한 다섯 명을 점심 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도 윤영관, 문정인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이종석과 서동만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각각 주장했다. 윤영관과 문정인은 “미국과의 동맹 외에 다른 대안이 있느냐”고 물었고, 이종석과 서동만은 “미국과의 동맹은 언제까지 이런 상태여야 하나. 미국에 더 강한 태도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반박했다. 윤영관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 “미국이 군사적 행동을 하려 한다면 우리가 반대하든 말든 실행에 옮길 것이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과 함께 작업함으로써 그 계획의 세부 사안에라도 우리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마지막까지 군사 행동에 반대하고 미국이 군사 행동을 강행할 경우 동맹은 무너지고 한반도에는 군사 분쟁이 발생할 것이다.” “혹은 우리 반대 때문에 미국이 군사 행동을 포기한다면 미국은 한국과의 동맹을 포기할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이 경우 북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결국 최선의 방법은 외교다. 미국과 공동 작업을 하는 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
이종석과 서동만은 남북한의 민족적 접근성,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지역적 접근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처음부터 북한 핵 개발은 미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한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에 안전보장을 제공하고 북·미 관계를 정상화한다면 북한의 비핵화는 협상이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나 유엔에서 북한에 압력을 가하는 것은 북한을 더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다. 한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포용정책을 펼쳐야 한다.” 대신 한·중·일 3국의 협력 가능성에 더 중점을 둬야 하는 것 아닌가. 그가 강조하는 것은 중국의 역할이었다. 급성장하는 중국의 경제력과 영향력을 활용해 북한을 안정시키고, 비핵화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는 “미국과의 동맹에 얽매이지 말고 한국이 미국·일본·중국 등과 균형 잡힌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때 중국의 영향력을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의 돌출 행동을 자제시키고, 미국이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윤영관은 이런 이종석의 견해가 중국의 역할을 과대평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교적으로 중국에 기울면 미국이라는 호랑이의 꼬리를 밟을 수 있다. 그러지 말고 탄탄한 한·미 동맹을 유지함으로써 한·미·일 협력 관계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 보다 안정적인 안보 정책이라고 반박했다. 윤영관은 특히 TCOG에서 한·미·일 3국 정책 협조 체제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3]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정치외교학자들(윤영관, 문정인)과 북한학자들(이종석, 서동만) 사이에 단층선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치외교학자들은 초강대국인 미국의 힘을 강하게 의식한 반면, 북한학자들은 자주나 민족에 중점을 두면서 필요하면 미국과 맞설 수도 있다는 시각을 보였다.
이러한 갈등은 이종석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윤영관과 외교부가 끝없이 밀리는 형세를 보이다가 결국 2004년 1월에
외교부의 일대 숙청과 윤영관의 낙마로 끝이 난다. 그 이후 노무현 정부 내에서는 이종석이 확립한 정통적 견해에 더이상 도전하기 힘든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럼 이 논쟁에 있어 노무현의 입장은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는데, 노무현은 오래 전부터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은 하겠다는 입장이었던 만큼, 처음부터 이종석과 유사한 노선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유행하던 표현대로 윤영관은 노무현과 '코드'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종석이 보여준 필요하면 중국 등과 연대해서라도 미국의 앞을 가로막겠다는 생각은 혁명적인 데가 있었다. 이는 같은 당 출신이자 햇볕정책의 선구자인 김대중과 비교해 보아도 잘 드러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균형자론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는 4대 강국 속에 끼인 작은 나라로 한·미 동맹 관계를 굳건히 하고, 한·미·일 공조를 유지하고, 4대 강대국과 협력·보완해 나가는 세 가지 틀 속에서 외교 관계를 진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4]
김대중이 제시하는,
1순위: 한미동맹
2순위: 한미일 공조
3순위: 미일중러와의 협력
이란 전략적 틀의 서열은 명쾌한 데가 있다. 이런 시각은 북방정책으로 중러에 접근했던 노태우 이래 김대중까지 정권에 관계없이 다들 당연한 것으로 간주해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이 서열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어설프게 등장해 미국을 열받게 만들었던 2002년의 '중재자'니 2005년의 '동북아 균형자'등은 모두 김대중이
운명이라고까지 말하는 전략적 틀의 서열을 무시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프랑스를 공식방문 중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5일 오후(현지 시간) “북한의 체제 문제를 걸고 들어가는 한 붕괴를 원치 않는 중국, 한국과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체제 교체)를 해야 된다고 하는 나라들과의 사이에 손발이 안 맞게 돼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파리 인터콘티넨털 르그랑 호텔에서 현지 교민 350여 명과 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미국과 일부 서구 국가들에서 북한의 체제가 결국 무너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더 불안해 하고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어 “(관련국 간에 손발이 안 맞을 경우) 북한 핵 문제가 안 풀린다”고 덧붙였다.
이날 발언이 북한의 체제 문제를 놓고 한국, 중국과 미국이 대립하는 것처럼 비치자 김종민(金鍾民) 청와대 대변인은 간담회 후 “노 대통령이 말한 ‘미국과 일부 서구 국가들’, ‘레짐 체인지를 해야 된다고 하는 나라들’이라는 표현은 그 나라의 정부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 국가 내부의 일부 사람들, 일부 목소리가 있다는 취지”라고 해명했다. 이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미국내 네오콘(신보수주의) 세력을 겨냥한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5]
이 연설은
한국과 중국이 한 편이 되어 미국에 반대한다는 구도를 대한민국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언급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든 희석해 보려고 청와대 대변인은 그것을 일부세력(네오콘)을 겨냥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문제는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같은 기사에 등장하는 분석을 보자.
익명을 요구한 한 한미관계 전문가는 “노 대통령은 미국 내 네오콘과 미국 정부를 분리해 대응하려고 하지만 2기 부시 행정부에서는 네오콘이 미국 주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며 “네오콘의 시각과 주장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제3의 논리와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6]
이 말마따나 부시 재선 직후 시점에 한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네오콘과 미국정부를 분리해 네오콘만 때린다는 생각은 변명으로는 궁색하고, 제정신으로는 너무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는가?
미국이 '우리 편'으로서의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된 사건은 그 외에도 적지 않았다.
그는 지난 13일 새벽(이하 한국시각) 로스앤젤레스 국제문제협의회(WAC) 주최 오찬 연설에서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많은 경우 북한의 말은 믿기 어렵지만 이 문제에 관한 북한의 주장은 상당히 합리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잠시 머뭇거린 뒤 “지금 고쳐진 원고를 보고 처음했던 표현을 다시 찾으려 노력중인데 합리적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며 “내가 처음 준비했던 표현은 ‘이 문제에 관한 북의 주장은 여러 상황에 비추어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 였던 것 같다”고 수정했다.[7]
이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 핵무장의 정당성을 일부 인정했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는 노무현 정부가 품고 있던 (미국과 북한 사이의) '중재자'라는 인식이 잘 드러난다. 즉 한국이 미국에게는 북한의 입장을 설명하고, 북한에게는 미국의 입장을 설명해 합의를 끌어내겠다는 식이다. 하지만 (유사시에 북한을 상대로 함께 싸운다는 개념의) 동맹국과 중재자는 공존하기 힘든 개념이었다. 미국 측 입장에서는 평소에도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는 나라가 전시에는 자신을 지켜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 어이없게 들릴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
이처럼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군사행동을 막아야 한다는 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거기 최우선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전례없이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앞서 문제가 된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의 붕괴는 그 와중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2.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의 유용성하지만 TCOG는 미국과 일본이 한 패가 되어 한국을 압박하기만 하는 조직은 아니었다.
2002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한·미·일 3국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미국에 HEU 문제를 함께 질문하는 모양새가 나타났다.
켈리는 “북한은 장래 결코 경수로를 갖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고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 미국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일본 대표인 다나카 히토시와 한국 대표인 이태식이 그것을 비판했다. 특히 다나카는 격렬했다.
다나카는 미국의 HEU 정보의 타당성에 의문을 던졌다. 미국 측 참석자의 한 사람이 “한국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사태 해결을 위해 마이너스다. 너무 지나쳤다”고 느꼈을 정도다.[8]
6자회담 한국측 대표였던 이수혁도 이런 측면에서 TCOG란 틀이 미국을 설득하는 데 유익하다고 지적한다.
한·미·일 3자 공조는 계속되어야 한다. TCOG를 통한 공조 체제 유지가 필요한 것은 일본의 역할 때문이다. 나는 2004년 2월 해외 공관장 회의에서 일본을 등에 업고 가야 미국을 설득할 수 있다고 했다. 6자회담 과정에서 우리가 미국과 이견을 보이는 문제에 대해 일본이 우리의 주장에 동조할 경우 미국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사례들을 많이 경험했다.[9]
다만 공조라는 결과물을 내놓기 위한 이런 틀을 통해 미국을 설득하는 데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것은 우리 입장과 반대되는 흐름이 대세일 때는 틀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 쪽도 어느 정도 따라가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흐름은 시간이 가면 바뀐다. 예를 들어 일본이 강경책을 계속 주장하는 중에 미국이 대북협상에 적극적으로 돌아서자 오히려 일본이 고립되는 모습도 관찰되기도 했다. 북한을 침공한다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은 실제로 채택될 가능성이 매우 낮으며, 시간이 흐르면 3국의 입장은 조금씩 바뀌기 마련이다. 기회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판을 깨는 것은 그야말로 단견이 아닐 수 없다.
3.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그렇다면 이러한 노무현 정부의 튀는 행동이 "부시 행정부의
무모하리만치 과격한 대북외교정책" 때문에 정당화 될 수 있었던 것일까? 한 번 돌이켜 보기로 하자.
북한정책에 관한 한 새 부시 행정부에서 아무리 온건한 인사라도 민주당 행정부에 비하면 훨씬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가 출범할 당시, 이들을 포함한 어느 불카누스도 북한과 맺은 협약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월포위츠는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1994년 제네바 합의의 폐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단 한마디로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그는 새 행정부가 북한을 상대로 대결정책을 추구하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감세, 미사일 방어, 중동 평화 문제 등 새 행정부가 추진할 다른 목표들이 있다며, “우리는 (북한보다) 더 중요한 일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불카누스들의 새 독트린이 이라크와 달리 북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북한은 교전이 시작되자마자 남한을 공격해 서울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선제공격이 가능한 국가가 아니었다. 북한은 또한 민주주의 확산을 위한 시범 프로젝트의 대상 국가가 될 수도 없었다. 일부 불카누스들은 사담 후세인을 제거해 이라크를 아랍의 정치문화와 중동 전체의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민주주의 모델로 탈바꿈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의 경우, 이미 일부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있는 상태였고, 나머지들도 북한의 뒤를 따르지는 않을 국가들이었다. 이라크는 정세가 불안정한 지역의 중심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그것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나라였지만, 북한은 급성장하는 지역의 한가운데 놓여 있지만 고립돼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불카누스들은 북한문제만 만나면 미봉책으로 대처해왔다. 이들은 세계 다른 지역의 현안들에 대해서는 대담한 접근법과 신속하고 항구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면서도, 북한문제에 대해서는 심지어 위험한 핵무기 프로그램이 더욱 진전될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기다리는 길을 선택했다. 이들은 여전히 중국과 러시아가 결국 북한 지도자 김정일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압력을 넣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이들은 또 북한의 절망적인 경제문제가 북한을 더욱 타협적으로 나오게 만들 날이 오기를 갈망했다. 일부 불카누스들은 나아가 북한의 붕괴와 정권교체를 희망했다.
부시 행정부는 긴급 상황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시간을 끌었다. 국무장관 파월은 북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상투어가 돼버린 “
위기가 아니다”는 말을 되뇌었다. 북한이 핵 원자로를 재가동했을 때도 관리들은 “위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북한이 국제사찰단을 추방했을 때도, 핵무기 개발을 위해 다시 한 번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도 위기가 아니었다.
하나의 그룹으로서 불카누스들은 자신들의 경력 내내 군사력에 집착해 왔다.
그러나 북한은 이라크 문제와는 달리 군사적 해법이 유용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였다. 부시 행정부는 결코 찾을 수 없는 해결책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럼스펠드는 “북한은 위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종류의 위협이다. 적어도 지금은 외교를 통해서, 다른 방법을 통해서 처리할 수 있는 위협이다.”라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 대한 행동을 준비하고, 평양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진해 나갈 무렵인 2002년 말과 2003년 초,
미국의 불확실하고 임시방편적인 북한 정책은 럼스펠드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는 말로 요약됐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 문제를 외교관들의 손에 맡겨 놓고 있었다.[10]
이처럼 미국은 북한보다
더 우선순위가 높은 나라들을 많이 갖고 있어서 북한은 일단 전쟁 이외의 방법으로 상대하겠다는 의도를 여러 모로 드러내고 있었다.
미국 측의 분위기는 두 번의 정상회담과 관련해서도 잘 드러난다.
2002년에 있었던 김대중-부시 정상회담을 보자.
김대중이 레이건 대통령의 이야기를 한 대목에서 부시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북한을 침략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 부시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이 미국의 역사를 상기시켜 주었다”며 레이건에 대해 언급한 사실을 소개했다. 그리고 “우리는 북한을 공격할 생각이 없다”고 명확하게 말했다. “우리의 태세는 순수하게 방어적이다. 그 이유는 위협에 취약한 DMZ의 존재에 있다”고 덧붙였다. …
다음날 아침 한국의 언론은 일제히 “북한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부시의 발언을 톱뉴스로 다뤘다. 그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부시는 “그런 게 뉴스가 되나”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11]
2003년의 노무현-부시 정상회담에서도 미국측의 반응은 비슷했다.
한국 측은 공동 성명에 군사 옵션을 넣지 않은 것이 외교적 승리라고 선전했으나 미국 측은 이런 반응에 의아해 했다. 미국 행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당시 부시 행정부에서 대북 군사 옵션을 심각하게 고려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청와대는 노무현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미국은 대북 군사 공격을 하려 한다’고 심각하게 믿고 있었다. 청와대 직원들이 노무현을 그렇게 세뇌시켰을 것”이라고 말했다.[12]
물론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북한 공격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한 것은 분명하다. 원한다면 그 의도까지는 순수했다고 평가[13]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건 사실 워싱턴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따른 설레발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설레발 때문에 한미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는 부시나 네오콘, 공화당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당 측에서도 동맹의 미래를 우려하는 견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북폭에 대해서는 김영삼이나 김대중도 반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미국을 우선시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서 미국을 안심시키며 일했다. 적어도 해외에 가서 미국은 중국과 한국의 반대에 부딪치게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한다든가 하는 식은 아니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노무현은
윤영관을 내치고 이종석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과거의 한국 정부들과는 전혀 다른 한미관계를 선택했던 것이다.
4. 제네바 협약 붕괴의 책임한편 반론에서 제시되는 부시 행정부의 무모하리만치 과격한 대북외교정책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
크린턴 행정부 시절 분명히 북미간에는 상당할 정도의 외교적 접근이 있었고 제네바 합의를 통해 미국이 더 이상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과 위협을 금지할 것을 공식적으로 확약했다.
그런데 부시행정부가 들어서자마자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선언해 버린다. 더불어 2002년 1월 국방부를 통해 핵태세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를 발표했는데 유사시 핵무기 사용 국가에 기존의 러시아, 중국에서 이라크, 이란, 리비아, 시리아, 북한을 추가했다.
즉 명백한 제네바 합의 위반 사항이다.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 위협을 금지한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 (crete)
그런데 이건 어디서 많이 보던 이야기인 것 같다. 한 번 비교를 해 보자.
클린턴 행정부 기간 동안, 핵문제를 풀기 위한 조미 협상의 결과로, 미국의 조선 정책은 적대 그 자체에서 부분적 포용으로 옮겨가는 듯 보였다. 얼마 동안 핵 문제의 궁극적 해결의 가능성도 희미하게나마 존재했다. 흑연감속로와 사용후 연료봉의 동결, 그리고 중유와 경수로의 제공으로 말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양자 간 정치 대화를 중단하고, 우리를 ‘악의 축’이라고 선언하고, 선제 핵공격 대상으로 규정하면서, 핵 문제는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14]
이것은 북한 외무성 미국 국장인 리근의 보고서 중 일부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즉 위 주장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저기에는 북한의 위반사항은 쏙 빠져 있다.
제네바 합의가 깨진 데 기여한 원인들을 다채롭게 거론하자면 잡다한 것들을 많이 들 수 있겠지만, 합의를 침몰시키고 제2차 북핵위기를 일으킨 단일 사건을 꼽는다면 그건 누가 뭐래도 2002년의 10월의 켈리 차관보 방북시에
미국이 고농축 우라늄(HEU) 비밀핵개발 의혹을 추궁하자 북한의 강석주가 이를 인정한 것 이외에는 없다.
그리고 북한의 그 비밀핵개발은 부시가 당선되기 전부터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은 칸 박사가 1990년대 초부터 북한에 원심분리기 본체와 부품 설계도를 제공했다고 인정[15]했으며, 1999년 3월 일본은 북한의 대성섬유 무역상사가 발주한 주파수 전환기 2기의 수출을 금지[16]했다.
파키스탄과 북한의 접근은 1993년 12월 베나지르 부토 총리가 북한을 방문한 뒤 이뤄졌다. 부토는 당시 방북 때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입수할 수 있었다”고 아사히 신문(2004년 7월 18일자)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북한 측도 그에 상응하는 기술을 입수했다. 우라늄 농축 기술이었다. 부토는 당시 방북에 칸을 동행시켰다. … 미국 정부 고위 관리는 파키스탄과 북한의 핵 커넥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98~1999년에 파키스탄으로부터 북한에 P1과 P2, 두 가지 크기의 원심분리기가 20개 정도 도착했다. 두 가지 모두 시범용(견본)이었다. 클린턴 정권도 한참 지난 뒤 이 사실을 알게 됐다.”[17]
앞서 소개했듯이 부시는 2002년 2월 방한해 김대중의 요청에 따라 북한을 침공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준 바 있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 등 다른 선순위 사항이 많았고, 그 정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에게 상충되는 신호를 보냈다는 점은 다소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북한 또한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북한이 중유 지원을 받는 대가로 핵동결을 계속 유지했던 것에서 잘 드러난다. 요약하자면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HEU개발 시인->KEDO의 중유지원 중단->북한의 핵시설 재가동이라는 과정을 거쳐 깨졌다. 그 책임은 기본적으로 북한 쪽에 있는 것이다.
사실 북한 측이 '그래 나 HEU 있다 어쩔래'라고 적반하장 식으로 나오자 미국은 당황했다. 미국은 처음에 이 사실을 비밀로 하려고 했으나 언론에 정보가 새어나감에 따라 공개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워싱턴에 돌아간 켈리는 국무부의 상층부에 방북 결과를 보고했다. 아미티지의 첫 반응은 “정말 그렇게 말했어?”였다. 파월도 “정말 갖고 있다고 말했단 말야?”라고 말끝을 급격하게 높였다. 파월은 그것을 부시에게 보고했다. 부시는 “에, 뭐라고? 인정했다고!”라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놀랍고 예상 밖이란 반응은 공통적이었다.
“부정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시인했으니 지금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 곤혹스러웠다.”(미 정부 고위 관리)[18]
이는 미국이 북한에게 HEU를 추궁할 때, 제네바 합의를 적극적으로 깰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부시 행정부 1기 대북정책에서 나타난 주요한 문제는 강경한 위협과 대결을 택한 데 있지 않았다. 진정한 문제는
미국이 북한을 진지하게 상대 -그것이 전쟁이던 협상이던 간에-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의 태도는 엉거주춤한 것이 문제였지, 단호해서 문제가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5. 정리: "모든 선택이 테이블 위에 있다"길게 이야길 했으니 정리를 해보자.
2차 북핵위기 이후 대북협상에서 문제가 되었던 (군사력 옵션도 포함한) "모든 선택이 테이블 위에 있다"는 표현을 둘러싼 논쟁은 북한을 칠까 말까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6자회담 대표를 지냈던 이수혁은 이 문제를 이성적으로 잘 요약하였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기 위해서 최종 수단으로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수 있다는 카드는 유효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도 이에 동조하는 강경 입장을 취하면 협상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말했을 때 한국 국민이나 외국의 투자자들이 곧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심리적 동요이다. 북한은 더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은 무력 사용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협상 전략에 부담이 되더라도 북한에 대해서 공격하면 안 된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말하여 그 가능성을 부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의 입장은 실제로는 북한을 공격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특정한 선택(옵션, option)을 배제한다고까지는 언급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논쟁은 어느 면에서는 논쟁을 위한 논쟁이었다. 국민들의 성숙한 판단력이 문제였다. 미국이 군사적 선택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하여 군사력을 한반도에서 한국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는 행사하지 않을 것이며, 군사적 선택을 배제한다고 말했다고 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군사력은 사용되지 않는다고 믿을 수도 없다.
국제정치는 현실적이다. 군사적 행동은 국익과 안보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행사되는 것이다.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작은 희생을 각오하는 판단력, 즉 합리성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심리적 요소가 문제라면, 군사력 불사용 천명이 북한과 협상에 미치는 영향과 군사력 사용 가능 천명이 한국의 정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하면 된다. 한국은 후자의 경우에 무게를 더 두었다.[19]
이는 전쟁이냐 아니냐라는 극단적인 성격이 아니라
협상술 선택에 따른 장단점 계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이 이런 강경 협상술의 가치를 이해하고 현명하게 동요하지 않는다면 한국도 더 자유롭게 강압적인 협상술을 이용해 성과를 거둘 여지가 있다는 말도 된다.
또한 한국측이 집요하게 요구할 경우 미국 측은 내키지 않지만 이 점에 대해 양보하기도 하였다. 이라크 침공의 경우처럼
미국이 단단히 결심한 경우엔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이것은 앞서 내가 지적했던 것처럼 미국의 강경정책이라는 것이 대단한 실체가 없는 것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2002년의 '맞춤형 봉쇄'나 2004년의 '관리된 압박' 또한 돌이켜보면 별다른 실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2002년 12월 29일 미국 「뉴욕 타임스」는 미국 정부는 북한이 만약 핵무기 제조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북한에 대해 경제적·정치적 압박 수위를 높이기 위한 포괄적인 새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고 미 행정부 고위 관리들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행정부 관리들은 소위 ‘맞춤형 봉쇄(tailored containment)’라고 불리는 북한에 대한 고립 정책이 북한의 핵 개발 야망을 꺾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맞춤형 봉쇄’라는 용어는 북한 문제가 이라크나 이란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으로 주로 정치·경제적 압력과 다국 간의 최대한의 협력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관리들은 설명했다. 새로운 정책에 따라 북한의 주변국들은 북한과의 경제교류 축소가 권고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경제제재로 압박을 가하며 미국은 북한의 돈줄을 끊기 위해 북한 미사일 선적 선박의 이동을 차단할 가능성이 있다.”
… 돌이켜 보면 언론의 입장에서는 ‘맞춤형(tailored)’이라는 용어를 잘 선택했다. 한국어 번역 ‘맞춤형’도 위기 인식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단어 선택이었다. 한국민에게 ‘맞춤형’이라는 단어는 양복감 위에 분필로 모형이 그려져 있고 재단사는 분필로 그려진 선을 따라 양복감을 막 베려고 뾰쪽한 가위 끝을 대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자. 봉쇄를 위해 분필로 그리기는커녕 분필도 준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위기감을 고조시키기에 안성맞춤의 우리말번역이었다.
…
2004년 12월 6일 미 백악관 해들리 안보보좌관 내정자는 한국 국회 방미단에게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위해 일종의 ‘관리된 압박(managed pressure)’이 필요하며, 6자회담 참여 5개국이 북한에 대해 더 이상 시간이 없으니 대화 테이블로 나오라고 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그 일환이라고 말했다. …
그러던 차에 2004년 12월 방미하여 미 국무부 켈리 차관보에게 ‘관리된 압박’에 관한 미 행정부의 논의 동향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켈리는 이 용어를 처음 들어본다는 반응이었다. 담당 고위 관리가 들어보지 못했다는 말을 가지고 한국은 흥분했던 것이다. 어느 한 관리의 말이 꼭 정부의 통일된, 또는 정부 내에서 깊이 논의된 이야기가 아닌 경우를 많이 본다. … 미국의 관리는 ‘관리된 압박’을 이야기했을 때 압박 자체에 무게를 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카드로 말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 북한 핵 문제로 북한에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면 [뭐든] 관리되고 절제되고 통제된 압력일 것이다. tailored나 managed의 수식어가 별난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것은 일부 관리들의 말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한 결과였다.[20]
부시 행정부의 강경정책이라는 인상을 준 것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다. 오히려 문제는 북한을 겨냥한 것이라면 이런 솜방망이에도 과민한 반응을 보였던 한국 측의 섬약한 신경에 있다. 협상력을 키우려면 대북 강경책에 관한 한 한국인의 신경은 좀 더 굵어질 필요가 있다.
주[1] 船橋洋一, 『
ザ·ペニンシュラ·クエスチョン 朝鮮半島第二次核危機』, 朝日新聞社, 2006
(오영환 외 역, 『
김정일 최후의 도박』, 서울: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07, pp.306-307)
[2] 같은 책, pp.308-309
[3] 같은 책, pp.310-312
[4] 같은 책, p.372
[5] 김정훈 부형권,
盧, 파리 교민 간담회: 부시-네오콘 분리대응…실효성 의문, 동아일보, 2004년 12월 6일
[6] 같은 기사
[7] 백기철,
노대통령 LA연설 '대북강경책 NO' 단호한 메세지, 한겨레, 2004년 11월 14일
[8] 船橋洋一, pp.197-198
[9], 이수혁,
전환적 사건: 북핵 문제 정밀 분석, 중앙북스, 2008, p.341
[10] Mann, James,
Rise of the Vulcans, Penguin, 2004
(정인석 권택기 역,
『불칸집단의 패권형성사』, 박영률출판사, 2005, p.357-358, 446-447)
[11] 船橋洋一, p.174,176
[12] 같은 책, p.338
[13] 사실 이 문제를 어떤 경우에도 북한을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대북 저자세의 결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14] Pritchard, Charles L.,
Failed Diplomacy: The Tragic Story of How North Korea Got the Bomb, Brookings Institution Press, 2007
(김연철, 서보혁 역, 『
실패한 외교: 부시, 네오콘 그리고 북핵위기』, 사계절, 2008, pp.31)
[15] Sanger, David E.,
Pakistan Leader Confirms Nuclear Exports, New York Times, 2005년 9월 13일
[16] 船橋洋一, p.127
[17] 같은 책, p.182
[18] 같은 책, p.161
[19] 이수혁, pp.77-78
[20] 같은 책, pp.213-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