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늘 안전보장을 요구하지만 정작 북한이 그걸 진정으로(최우선과제로) 원하는지에 대해선 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왜냐면 그걸 얻어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북한은 쌍무조약이나 다자간 보장 등의 형태로 제공되는 안전보장의 가치를 그다지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왔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왜 소리높여 안전보장을 거론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음 이야기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북한은 입으로는 안전보장을 말하지만 이를 핵 포기와 경제 개혁·개방이라는 2개의 전략적 결정과 어떻게 연관시킬 것인지도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 같다.
6자회담의 중국 측 참석자인 한 외교관은 북한의 안전보장이 얼마나 애매한 것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국에는 ‘차제발휘(借題發揮)’라는 표현이 있다.
다른 말을 핑계로 자기 의견을 발표하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인데, 북한의 안전보장 요구를 이에 비유할 수 있다” “그들은 어느 나라도 자기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북한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북한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도 미국이 안전보장을 약속한 직후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안전보장을 해 달라는 북한의 주장이 진심인지는 북한도 모르는 것 같다. 미국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船橋洋一, 『
ザ·ペニンシュラ·クエスチョン 朝鮮半島第二次核危機』, 朝日新聞社, 2006
(오영환 외 역, 『
김정일 최후의 도박』, 서울: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07, p.290)
6자회담 참가국들 중에 그나마 가장 북한에 호의적인 국가가 중국입니다만, 이처럼 중국 관리들조차도 북한의 요구가 진실성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판국입니다. 그렇다면 표면상의 요구 외에 북한이 안전보장을 끊임없이 내거는 이유가 뭐냐를 한 번 생각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결국 북한 지도부의 머릿속에 들어가보기 전엔 정답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지정학적 날씨가 바뀌고 그들을 유용하다고 인정하는 후견국을 찾아낼 때까지 살아남는 것"이라는 분석처럼, 북한이 6자 회담에서 얻어내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대가는 안전보장도 경제적 이익도 아닌
시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 지도부가 가장 원하는 것이 권력이라면, 30년보다는 50년 집권이, 50년 보다는 100년 집권이 그들에게 보다 매력적일 테니까요.
북한 입장에서는 (전술적인 이유에서 일시적으로 퇴장하거나 하는 대응을 보일 수도 있지만) 길게 보아 어떤 형태로든 협상을 계속 끌고 나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볼 근거가 여럿 있습니다. 우선 '완전한 핵 포기'라는 핵심 의제는 보류한 채, 교묘한 외교 협상을 통해 작은 밑밥들과 교환해 나름의 경제적 이익을 챙길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협상을 계속하는 것 자체가 상대방이 보다 위험한 대안들 -고강도 경제제재나 체제 전복 공작, 기습적 공습 같은- 을 선택할 가능성을 경감하는데 도움이 되는 잠정적 안전보장의 역할도 해준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협상에 응할 가능성을 내보이지 않으면 상대국 내부에서는 협상파의 입지가 축소되고 다른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강화될테니까요.
이처럼
협상을 위한 협상, 즉 시간을 벌기 위한 협상이 북한의 1차적 목표일 가능성은 일반인들이나 언론에서는 잘 거론되지 않지만, 그 가능성은 생각보다 훨씬 높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