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범주에 따라 항목들을 분류하는 과정은 대개 다음과 같이 그려진다.
여기서 구성요소들을 범주로 묶는 기준은 모종의 유사성이다. 예를 들어 A 범주에 속하는 A1과 A3은 서로를 구분할 수 있는 특징적인 차이가 있지만, B 범주에 속하는 B2와 비교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유사함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A 범주에 속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런 식으로 A라는 범주에 속하는 구성요소들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범주 특유의 내적 일관성(internal consistency)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내적 일관성을 토대로 어떤 범주에 포함되느냐 제외되느냐를 가름하는 수렴 기준(convergence criteria)이 존재한다. 물론 이 수렴 기준은 명시적인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암묵적이거나 관례에 따라서 정해진다.
그런데 다음의 C같은 범주가 주어졌다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그림이 C가 갖는 내적 일관성을 잘 포착하지 못하도록 그려져 있을 뿐,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C는 탄탄한 내적 일관성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면 C 범주의 내적 일관성이란 무엇인지를 명시적으로 보이고, 그 수렴 기준을 제시하는 작업을 통해 C 범주를 A나 B 범주처럼 고쳐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 그런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C라는 범주가 현실에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C의 내적 일관성을 드러내 보이기 어렵고, 그런 시도가 오히려 상이점(divergence)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곤 한다. 그런 경우 다른 방법으로 C 범주를 설명해야 한다.
이와 같이 내적 일관성이 강하고 응집력이 있는 범주들을 우선 떼어내고 남은 나머지를 C라고 적당히 묶을 경우, 견고한 내적 일관성 없이도 광범위한 구성요소를 포괄하는 막연한 범주가 생겨날 수 있다. 이런
여집합적인 범주는 생각보다 흔한 것이다.
예를 들어 '테러'라는 개념은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편리하다. 테러에 대한 광범위하게 합의된 정의는 없지만, 큰 무리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보자.
"기성정치질서에 도전할 목적으로 비정부주체(혁명가, 민족주의자, 종족집단 등)에 의해 수행되는 폭력행위" 이 정의는 무난하지만 실제로 이 정의를 잣대로 어떤 사건이 테러이고 어떤 사건은 테러가 아닌지를 가늠하려고 시도하면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 민간인들도 많이 이용하는 교량을 폭파했다면 그것은 테러인가? 비행기가 날아와 폭탄을 던져 맞추었다면 그건 그냥 군사작전 아닌가? 비행기가 날아와 폭탄을 던진 것과 그대로 들이받은 것에 무슨 차이가 있나? 구 일본군처럼 정규군도 가미가제 자폭 공격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럼 교각에 폭탄을 부착해 폭파했다면? 공병 작전에 흔히 있는 경우이지. 범인은 군인이 아니잖은가? 그들을 게릴라라고 부르면 그만인 일이야. 그럼 비정규전과 테러의 차이는 뭔가? ……
여기서 정의를 보다 정교하고 엄밀하게 다듬으려는 시도는 끊임 없는 예외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 쉽다.
실용적인 해법은 이렇다. 대충 저 정의를 따르되, 우선 어떤 이유로 전쟁행위로 분류하기에 적합한 것들은 전쟁으로 규정하고, 거기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를 테러라고 분류한다라고 접근하면 이 문제는 거짓말처럼 쉽게 정리된다. 그리고 이런 분류법은 사회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테러라는 단어의 용법을 아주 잘 설명해 준다.
이 이야기를 왜 꺼냈느냐 하면...나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인문학이라는 범주의 막연함, 그리고 그 분과학문들이 보여주는 크고 불규칙한 divergence들은 여집합적인 범주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근대 학문의 대분화가 일어날 때, 상대적으로 응집력이 있는 일군의 학문들을 묶어 통칭하면서 '자연과학' 혹은 '사회과학', '공학' 같은 비교적 새로운 범주들이 만들어지고, 또 의학 같은 다른 몇 가지는 다른 것들과 함께 묶이지 않고 단독으로(특히 대학 내에서) 남았는데, 오늘날 이 어느 쪽도 아닌 것들을 막연하게 하나의 범주로 지칭할 때 인문학이란 용어가 흔히 쓰이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는 반대로 생각해 보면 명료한데, 근대 학문체제의 범주가 형성될 때, 응집력이 제일 강한 인문학이 거기서 먼저 떨어져 나오고, 그 다음 나머지 중에서 자연과학, 그리고 다시 나머지에서 사회과학 이렇게 떨어져 나오면서 현행 범주가 형성되었을 것 같으냐 하면 전혀 그럴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