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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경제학자의 이야기
이 글에서는 세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글을 갖고 이야기를 풀어나가 볼까 한다.

우선 로널드 코스.

「사회비용의 문제」라는 논문에서 내가 추구한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접근이었다. 그 논문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정책에 관한 만족스런 관점들은 실제로 시장과 기업, 정부들이 정책에서 비롯되는 악영향을 어떤 식으로 해결하는지를 끈질기게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야 얻을 수 있다……. 경제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은 대체로 정부의 규제에서 나올 수 있는 이점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그러나 이 신념에는 정부의 규제를 줄여야 한다는 그 이상의 뜻은 담겨 있지 않다. 그것은 경계선을 어디다 그어야 하는지를 우리들에게 일러주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정부의 규제 정책은 그에 따르는 악영향을 실제로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하면서 얻은 결과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나와야 한다.” [1]


그리고 조지프 스티글리츠.

그린왈드-스티글리츠 정리 및 관련 정리들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방식이 있다. 첫째,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정리들은 몇몇 경우에 대해 잘 정의된 후생증진적(welfare-enhancing) 정부개입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이 정리들은 후생경제학의 기본정리가 제시하는 방법을 통한 효율적 분권화가 불가능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 셋째, 가장 중요한 점으로, 이 정리들은 시장이 자원을 배분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통념을 불식시킨다. 다시 말해 그러한 결론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일반적 정리란 없다는 것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린왈드-스티글리츠 정리가 정부개입이란 처방의 근거인 양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정리가 정부개입이란 처방의 근거가 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는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에 대한 더욱 세밀하고도 엄밀한 모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정부도 -아무리 자비롭고 합리적일지라도- 시장보다 나을 수 없다는 것이 경제학의 핵심적 정리라면 우리는 정부에 대한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그러나 그린왈드-스티글리츠 정리는 정부의 잠재적(potential) 역할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2]


재미있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코스도 자기 신념이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고, 스티글리츠도 비슷하다. 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면 세상은 훨씬 간단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완전히 빈털털이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나름의 카드가 있다. 단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의 승리를 보장하는 카드라기 보다 각각 자신의 반대 진영의 약점을 찔러 궁극적 승리를 거부하는 반증에 보다 가까운 것이어서 문제일 뿐이다.

다른 한 편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는 흡사한 구석이 많다. 이들은 모두 일반론에서 출발해 각론을 재단하는 방식을 거부한다. 시장/정부의 경우 디테일을 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똑같이 조잡한 자기 진영 논리와 일선을 긋고, 그들에게 악용당하지 않기 위해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이번 사례에서 코스의 경우 그것은 "경계선을 어디 그어야 할지 알 수 없다"이고, 스티글리츠의 경우는 내 정리는 "정부 개입이란 처방의 근거로 간주되어선 안 된다"이다.

신념 그 자체를 갖고 입씨름을 벌이는 것은 굳이 하자면 언제든지 가능은 하겠지만, 전적으로 시간낭비이다. 믿음이나 신념을 어쩌란 말인가? 그건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개종의 대상일 뿐이다. 규범경제학이라는 범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범 자체에 대한 논쟁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런 탓이 크다. 사실 그런 분류는 많은 경우 어떤 답 없는 논의가 나왔을 때 아 그건 규범이잖아 하면서 한 켠으로 치워두고 실증으로 돌아올 때 아주 유용하게 활용된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경제학자인 밀튼 프리드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가 친구로 지낸 오랜 기간 동안, 앨런 그린스펀과 나는 대부분의 통화정책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였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빼 놓는다면. 나는 오랫동안 통화량 증가를 통제하는데 엄격한 준칙을 적용하는 것을 선호해 왔다. 그린스펀은 내가 틀렸다며 재량권이 더 바람직하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그가 연방준비은행 의장으로 18년간 재직하고 물러난 지금에 와서 보면 그의 실적으로 볼 때 그가 옳았다는 것에 내가 설득되었다는 것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다. 그의 경우엔 말이다. [3]

정부 재량권에 맞서 평생 투쟁한 밀튼 프리드먼의 인정인 만큼 이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 만년에 그는 자신의 통화주의가 잘 동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몇 차례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통화주의를 주창하게 만든 한 가지 배경이 된 프리드먼의 신념이 바뀌었을까? …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것의 좋고 나쁨이 실증적으로 검토될 수 있고 경제학의 내부 논리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처럼 비판을 통해 물리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의 본체가 경제학 밖에 존재하고 종교나 신념과 같은 방식으로 옹호되는 것이라면 프리드먼의 신념처럼 그래도 끄떡없을 것이다.

그래도 주의 깊게 세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 세 사람 사이를 묶어주는 공통적인 측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경제학의 논리이고, 코스가 역설했던 '문제에 대한 접근법'이다.



[1] Breit, William., Hirsch, Barry T.(Eds), Lives of the Laureates: Eighteen Nobel Economists (4th Ed.), MIT Press, 2004 (김민주 역, 『노벨 경제학 강의』, 미래의 창, 2008년, p.331)
[2] Stiglitz, Joseph E., Whither Socialism?, MIT Press, 1994 (강신욱 역, 『시장으로 가는 길』, 한울 아카데미, 2003, pp.68-69) (굵은 글씨 강조는 원저자)
[3] Friedman, Milton., "He Has Set a Standard", Wall Street Journal, 2006년 1월 31일
by sonnet | 2009/05/07 08:33 | 경제 | 트랙백 | 덧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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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일화 at 2009/05/07 09:48
사회과학이 아무리 과학을 추구한다고 해도 극복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할까요. 통계학의 발전으로 '다른 모든 변수가 같다면'이라는 가정을 현실화시킬 수 있다고 해도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노벨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도 경제학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사이비 주장이 정책으로 실행되는 것을 막는 것이지 경제를 발전시키거나 안정시키는 일은 아직 무리라는 말을 한 기억이 나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7 16:45
그렇죠. 어쨌든 저는 저런 신념의 부분이 '있어도' 실증적 학문 활동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그럭저럭 굴러 가는 거라고 보는 편입니다.
Commented by Ciel at 2009/05/07 10:40
사회과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을 추구한다..는 느낌인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7 16:38
아니, 그런 것을 함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생활을 개선할 방법을 찾고 싶어서 개발경제학을 공부한다"와 같이 어떤 개인적 동기부여가 있을 순 있지만, 그게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양립 안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안모군 at 2009/05/07 10:49
원래 경제학 자체는 이론의 영역입지요. 실제 규제나 거버넌스, 행정 문제로 들어오게 되면 정말 백양백태를 보이게 되죠. 어떤 시장에서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아예 시장 자체가 존립하지 못하는 그런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어떤 시장은 정부 개입이 곧 시장의 종말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죠. 여기서 다시 사회정의적인 측면으로 돌아가면, 시장이 정말로 정의에 부합하느냐가 결부되는 경우도 존재하죠(역도 존재하고요).

제가 겪어본 동네들이 공교롭게 양쪽에 걸리는 것들이다 보니, 사실 전 개입주의자에 좀 치우친 면이 있기는 합니다만... 뭐 사실 제조업이나, 결과가 명확한 용역업이라면 모를까, 그 이외의 경우, 예를 들어 네트워크성 산업이라던가, 좀 모호한 영역의 용역업이라면 결국 정부 규제가 없으면 시장이 사회정의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거나, 더 나아가 시장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게 되는 그런 환경이 되지 않나 싶긴 합니다. 결국, 모든 경우는 하나의 섹터를 놓고 Case by Case로 보지 않으면 안되는 거겠죠.

사실 이렇기 때문에 정부의 업무분장이나, 통계의 분류가 성립하는 거긴 하죠.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7 16:43
말씀하신대로 섹터 단위로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게다가 요즘은 같은 섹터라 하더라도 시대나 기술의 변화에 따라 추세가 생각보다 많이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연구가 점점 더 많이 확보되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monsa at 2009/05/07 11:41
중요한것은 각각 문제를 푸는것이지요. 도그마 가지고 싸워봐야 영양가도 없고, 결판도 안나고, 개종시키기도 불가능한것 아니겠습니까?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7 16:32
네. 십자가에 매달아 태워죽이기도 하고, 굴라끄에 쳐박기도 하고, 참 수많은 대책(?)이 등장한 것도 그게 불가능해서 아니겠습니까. 머리가 굳지 않은 다음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세대교체와 함께 해결되는 게 그나마 좀 상식선의 대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Commented by 삼천포 at 2009/05/07 12:28
개종.. 이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7 16:36
네, 저건 사실 경제학 내부에서 생긴 게 아니기 때문에 논외로 보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paro1923 at 2009/05/07 13:04
제 경우는 밀튼의 말에서 빨간 줄보다 그 앞의 '그의 실적으로 볼 때' 란 말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개종'이라면 절대 저런 결론이 나오지 않았겠죠.
'토론'과 '개종'이라... 과연 그렇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7 16:35
네, 가능하면 예외적인 상황처럼 묘사하고 싶었겠지요. "내 친구가 아주 유능해서 일어난 예외적인 일이야"와 같은 느낌으로요.
Commented by 유치찬란 at 2009/05/07 13:48
경제학은 사회분야중 가장 과학적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케이스임에도 불구하고 '신념'이나 '믿음'이라는 것에 의해 경제학자들 자신조차도 많이 좌우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사실 이론적 근거나 통계란 무의미하지요. 어차피 논증은 적용 이후 보여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거니까요...

경제학조차 그런데 다른 인문사회분야야 뭐.....;;;;;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7 16:35
가설의 선택 같은 데서 그런게 많이 드러나는 듯 합니다. 어쨌든 상대의 신념을 개종시키긴 힘들어도 각론에서 실증적으로 상대의 입장을 무너뜨리는 것은 가능하니까, 학문이 점점 더 그쪽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뿌리는 못 베더라도 가지치기는 된다고나 할까요.
Commented by 새벽안개 at 2009/05/07 16:44
왠지 경제학은 토론이 가능한 학문이라기 보다는 계열이론으로 '개종' 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7 16:47
그게 순수히 신념과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필립스 곡선의 붕괴 같은 실증적인 부분을 계기로 삼아서 전향자들이 출현하니까 또 토론이 가능한 것 아닐까요 ;-)
Commented by 새벽안개 at 2009/05/07 17:10
경제학 학파의 교주들은 이론에 맹점이 많다는걸 알지만, 신자들은 맹목적이라서..... ㅋㅋ
Commented by sprinter at 2009/05/07 16:58
이렇게 보면 마치 사회과학만 신념으로 움직이는것 같지만... ^^;;;

실제로는 자연과학도 신념으로 움직이는 거라서, 말년까지 본인이 시작한 양자론을 수용하지 않은 맑스 플랑크라든지...

하다못해 상온행융합을 믿다가 교수자리에서 쫓겨난 사람도 부지기 수인데.-_-;;;
Commented by 유치찬란 at 2009/05/07 18:03
좀 논의의 여지는 있을 것 같습니다. 순수과학도 물리학은 검증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은 학문이니까요.ㄷㄷㄷ 수학도 맨날 바뀌는데 뭐;;
뭐 쿤형님 논점으로 본다면야 이런저런 학문들은 전부 그런 면을 가지는 거겠지요ㅋㅋㅋㅋㅋㅋㅋㅋ
Commented by monsa at 2009/05/07 18:18
그런 신념을 유지했다가는 자연과학은 crank가 됩니디만, 밀튼 프리드먼이 신념을 유지한다고 해서 그렇게 될리는 없지요. 플랑크나 아인슈타인도 그런 신념을 유지한채로 오래 살았으면 현재 브라이언 조셉슨 취급을 받았을겁니다.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9/05/08 14:20
신념을 열심히 떠들어 봤자 "(개콘 박영진 톤)그건 니 생각이고"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상온핵융합은 미해군연구소에서 꾸준히 연구하는 모양이더군요.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23429
http://www.dongascience.com/Ds/contents.asp?mode=view&article_no=2009043013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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