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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서 교과서의 역할
요즘은 경제학에 대해 무슨 이야기가 좀 나오면 "『맨큐의 경제학』이라도 한 번 읽어보고…"라는 표현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것 같군요. 이 책은 오늘날 아주 인기있는 경제학원론 교과서이죠. 그런데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 전에도 폴 사뮤엘슨의 교과서가 반세기 동안 베스트셀러였고, 그 전에는 마셜의 교과서가 표준적인 교과서였던 식으로 경제학 교과서의 역사는 깊습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가도 거시, 미시, 화폐금융, 재정 이런 식으로 분야별로 계속 교과서들이 있지요.

정리하자면 경제학도들은 교과서를 갖고 공부를 합니다. … 아니 그렇게 당연한 이야길 왜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중요한 이유는 교과서를 갖고 공부한다는 것은 비교적 새로운 방법론이며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학습방법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경제학도들은 기본적으로 '원전'을 읽는 방식으로 공부하지 않습니다. 폴라니, 하이에크, 베블런 이런 사람들은 주류경제학에 속하지 않으니 백 명에 한 명도 읽지 않거니와, 심지어는 주류경제학의 직계 선현들인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 케인스 같은 기라성같은 경제학자들의 책조차 읽는 사람이 드뭅니다.

반면 유학을 공부한다고 생각해 보지요.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를 했다 한들 공자나 맹자의 책을 직접 읽지 않은 사람은 명함도 내밀 수 없습니다. 이런 학문은 원전강독이 학문을 습득하는데(그리고 학계의 일원이 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심지어 이런 분야는 번역도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원래 쓰여진 언어로 읽어야 진짜 읽은 거라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교과서를 통해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 학문을 배우는 것과 아주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문제를 예민하게 인식한 사람이 토머스 쿤입니다.

이 에세이에서, ‘정상 과학’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과거의 과학적 업적들에, 즉 어떤 특정의 과학 사회가 그 사회의 향후 연구를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일정 기간 인정하는 업적들에 확고히 기반을 둔 연구를 말한다. 오늘날 그러한 업적들은 과학 교과서에서 상술된다. 이런 교과서들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유명한 많은 과학 고전들이 이와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 뉴턴의 『프린키피아』와 『광학』, 라부아지에의 『화학』과 다른 많은 저작들이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을 공유했다. 이들의 업적은 과학 활동의 경쟁적 양식을 멀리하는 집단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신선한 새로움이 있었다. 이와 동시에, 새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에게 모든 종류의 문제들을 허용할 만큼 충분히 개방되어 있었다.

이 두 가지 특징을 공유하는 업적들을, ‘정상 과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용어로서, 이제부터 ‘패러다임’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실제 과학 활동의(법칙, 이론, 응용, 기구를 포함하는) 몇 가지 사례들이 과학 연구의 일관된 전통을 창출하는 모델들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이런 실례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혹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혹은 뉴턴의) 역학’, ‘입자 광학’(혹은 파동 광학) 등과 같은 틀 아래에서 역사학자들이 기술하는 전통들이다.(10쪽)

패러다임에 대한 쿤의 이 첫 설명은 과학의 ‘문헌적’ 측면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왜냐하면 쿤은 [과학의] 고전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서 현재 교과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자연과학자들도 자신들의 분야를 정의하기 위해 고전을 읽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교과서들, 기록물들이 패러다임이 되는 과학적 업적이 무엇인지 그것이 또한 어떻게 이해되고 수용되어 사용되는지를 규정한다.

Sharrock, Wesley W., Read, Rupert J., Kuhn: Philosopher of Scientific Revolution, Cambridge:Polity, 2002
(김해진 역, 『과학혁명의 사상가 토마스 쿤』, 사이언스 북스, 2005, pp.53-54)

이렇게 고전이 교과서에 수용되어 사용되는 현상을 코페르니쿠스를 예로 들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합시다.

다들 잘 아시듯이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 분야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체제를 대신하는 지동설 체제를 제기한 인물이지요.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라는 표현이 혁명적 변화를 뜻하는 상용구로 쓰일 정도로 이 변화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을 기리며 그의 지동설(?)을 배우고 있지요.

원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제는 각종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주원(deferents), 주전원(epicycles), 대심원(erratics), 이심점(equants) 같은 복잡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었습니다. 실제 상황을 잘 반영하지 못하는 모델이었기 때문에 결과를 보정하기 위한 땜질식 요소를 많이 갖고 있었던 것이죠.

코페르니쿠스는 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체제를 보다 간단명료하게 고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지구가 움직일 수 있다"는 가정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주 주전원과 이심점을 제거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체제에도 주전원과 대심원은 그대로 있었으며, 30여 개에 달하는 보조적 원들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지동설과 크게 다릅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의 원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설명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배우는 게 아니라, 현대 천문학이 확립한 지동설, 즉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현대의 표준적 재해석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현대적 재해석이 볼 때 틀린 것, 필요없는 것 따위는 뭉텅이로 날아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경제학 교과서에서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 케인스에 대해 배울 때 우리는 주류경제학에 수용된 아담 스미스, 리카도, 케인스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과서를 통해 배운다는 것은 원전강독을 통해 배우는 것과는 달리 표준적인 해석, 즉 주류 학계의 해석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훨씬 강화합니다.

게다가 표준적인 교과서로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원전을 교과서 삼아' 공부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교과서라는 책의 특징 중 하나는 배운 것을 훈련시키는 연습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 과학 교육의 성격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미 분명해진 사실로서 과학자들은 결코 개념, 법칙, 이론을 추상적으로 그리고 그것들 자체로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지능적 수단들은 당초부터 과학자들에게 그 적용과 더불어 또는 적용을 거쳐서 드러나는 역사적·교육적 선행 단계에서 접하게 된다. 새로운 이론은 언제나 자연 현상의 어떤 구체적 영역에 적용시킴과 더불어 발표된다. 그런 적용들이 없었다면 수용할 만한 후보 이론조차 없었을 것이다. 일단 수용된 뒤에는 그런 똑같은 응용 또는 여타의 적용 예는 미래의 과학자들이 그것으로부터 자기 할 일을 배우게 될 교과서에 이론과 함께 실린다. 그것들은 단순히 장식이라든가 또는 심지어 증거 문서로서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의 이론을 깨우치는 과정은 응용 연구에 의존하며 여기에는 연필과 종이를 갖고 또는 실험실에서 기기에 의해 실제 문제를 푸는 것이 둘 다 포함된다. 이를테면 뉴턴의 역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힘’·‘질량’·‘공간’, 그리고 ‘시간’과 같은 용어의 의미를 깨우치는 경우, 대개 이들 개념을 문제-풀이(problem-solution)에 적용시켜 관찰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지, 교재에 실린 불완전하지만 때로는 도움이 되는 정의들로부터 터득하는 것은 훨씬 적다.

실제 계산이나 실습을 통해 배우는 그런 과정은 전문화의 전수 과정을 통틀어 지속된다. 학생이 대학 신입생 과정으로부터 박사 논문 과정까지 밟아 감에 따라 그에게 주어지는 문제들은 점점 복잡해지며 전례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것들이 생긴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그 뒤에 따르는 독자적인 과학자의 생애에서 정규적으로 다루게 되는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전에 이루어진 성취에 바탕하여 가깝게 계속 모델화된다.

Kuhn, Thomas S.,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2nd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김명자 역, 『과학혁명의 구조』, 두산동아, 1992, pp.79-80)

즉 수학 교과서는 눈으로 아무리 읽어도 아는 것이 아니요. 빡세게 문제를 풀어보고 시험에 임해 문제를 풀어 맞출 수 있아야 진짜로 아는 것입니다. 경제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경제학 교육과정에서 원전에 대한 추상적이고 독창적인 해석 따위를 묻는 문제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문제를 풀 줄 알게 훈련시키는 것이 바로 교과서를 학습하는 것입니다.

쿤은 이런 것을 표준예(examplar)라고 부르며, 이것이 공유된 예제로서의 패러다임(Paradigm as Shared Examples)의 역할을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요소에 대해서는 ‘패러다임’이란 술어가 언어학상으로나 자전적으로 꼭 들어맞을 것이다. 이것은 당초 내가 그 단어를 택하도록 이끌었던, 한 그룹의 공유된 공약의 성분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그 자체의 수명을 다한 것 같으므로, 여기서 나는 ‘표준예(examplar)’라는 말로 대치할 것이다. 이 용어의 사용에서 내가 의미하는 내용은, 실험실에서든 시험 문제에서든 또는 과학 교재의 장(章) 말미에서든 간에, 과학교육의 시작에서부터 학생들이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인 문제풀이들이다. 그러나 이들 공유된 실례에는 최소한도 정기 간행물에서 볼 수 있는 기술적 문제-풀이의 일부가 추가돼야 하는데, 그것들은 과학자들이 교육 과정을 밟은 뒤의 연구 생활에서 당면하는 것들이며, 또한 과학자들에게 그들의 연구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를 실례로서 보여주는 것들이다. 전문분야 행렬의 다른 어떠한 성분보다도, 여러 벌의 표준예 사이의 차이는 그 과학자 사회에 과학의 미세 구조(fine-structure)를 제공해 준다.
[…]
공유된 예제로서의 패러다임은 이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새롭고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 여기는 핵심 요소이다. 따라서 표준예는 전문분야 행렬의 어느 유형의 성분보다도 지대한 관심을 요구한다. 과학철학자들은 실험실이나 과학교재에서 학생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논의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으며, 그 까닭은 그런 것들은 학생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응용에서 실습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생이 우선 이론과 그것을 응용하는 몇몇 규칙을 익히지 않는 한, 학생은 문제를 전혀 풀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과학지식은 이론과 규칙 속에 내장되어 있다. 문제들은 그것의 적용에서 숙련되도록 제공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학의 인식적 함의를 그렇게 편재화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논지를 펴 왔다. 학생들이 문제를 많이 풀고 난 뒤에는, 더 많이 풀어내는 것에 의해 능란한 솜씨만을 키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 시작에서 그리고 그 뒤 얼마 동안, 문제를 푸는 것은 자연에 관한 일관성 있는 사항들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 표준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학생들이 이미 배운 법칙과 이론은 경험적인 내용을 거의 지니지 못할 것이다.
[…]
과학도와 과학사학도 양쪽에 모두 친숙한 현상이 여기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과학도는 으레 그들 교재의 한 장(章)을 독파했고 완전히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章)의 끝에 실린 문제들을 푸는 데 있어서는 여러 군데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한다. 통상적으로 그런 난점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해결된다. 학생은, 자기 교수의 도움을 받든 받지 않든 간에, 그의 문제를 이미 그가 부닥쳤던 문제처럼 다루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유사성을 파악하고 구별되는 두 가지 이상의 문제들 사이의 유비 관계를 파악하게 되므로, 학생은 기호를 서로 관계짓고 그 것들을 이전에 효과적이라고 증명된 방식으로 자연에 적용케 할 수 있다.
[…]
어느 정도의 문제-풀이를 완결하고 나면, 학생은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그에게 닥치는 상황을 그 전문가 그룹의 다른 구성원들과 같은 경험 형태로서 다루게 된다. 그 학생에게는 그런 상황들이 그의 수련이 시작되었을 때 당면했던 것과는 더 이상 동일하지가 않다. 그 기간 동안에 그는 사물을 보는 데 시간의 흐름과 그룹이 승인한 방식에 동화된 것이다.

Kuhn, 같은 책, pp.262-263

이처럼 잘 확립된 교과서와 연습문제에 의한 학습을 성공적으로 거친 학생은 주류 학계가 해당 분과 학문을 대하고 연구하는 방법론에 자연스럽게 동화됩니다. 많은 경제학원론 교과서들은 서두에 "외부인들은 경제학자들의 의견이 크게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많은 핵심적 부분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는 이야길 언급하곤 합니다. 경제학을 공부한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비중이 늘어나며, 그리고 특히 경제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더 그렇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어떤 주류 학계의 패러다임 내지는 컨센서스에 동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패러다임 이야기가 나왔으니 쿤이 컬쳐쇼크를 받고 패러다임 개념에 착안하게 된 계기를 본인의 입을 빌려 들어 보도록 하지요.

이 에세이의 최종 단계는 행동과학연구소(Center for Advanced Studies in the Behavioral Sciences)의 초청을 받아 1958~59년을 보낸 것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이제 말하고자 하는 문제들에만 온통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로 사회과학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생활을 함으로써, 그런 사회와 내가 쭉 훈련받아 온 자연과학자들의 사회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미처 예기치 않았던 문제들을 겪게 된 것이었다. 특히 정당한 과학적 문제와 방법의 본질에 대해 사회과학자들 사이의 공공연한 의견 대립이 대단한 것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과학의 역사와 그러한 인식은 둘 다 나로 하여금,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회과학 분야의 동료들보다 그런 질문에 대한 보다 확고하고 영속적인 답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천문학, 물리학, 화학 또는 생물학의 과학 활동은 오늘날의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게 보통이다. 이러한 차이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말미암아 나는 ‘패러다임(paradigm)’이 라 그 때부터 불러 온 것이 과학적 탐구에서 지니는 역할에 관해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들 패러다임은 어느 일정한 시기에 전문가 집단에게 모형 문제와 풀이를 제공하는 보편적으로 인식된 과학적 성취들이라고 간주한다. 내 수수께끼의 조각이 이렇게 잡히게 되자, 이 에세이의 줄거리는 대번에 뚜렷해졌다.

Kuhn, 같은 책, pp.12-13


그런데 과학자들은 어떻게 "정당한 과학적 문제와 방법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생략하고 그냥 연구를 할 수 있을까요?

효율적 연구는 과학자 사회(scientific community)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기 이전에는 개시되는 일이 거의 없다 :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적 실체(entity)들은 무엇인가? 이들 실체들은 서로 간에 어떻게 작용하며 인간의 지각과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러한 실체에 대해서 합법적으로 어떤 질문이 제기되며 풀이를 찾는 데 있어 어떤 기술이 적용되어야 하는가? 적어도 성숙 단계의 과학에서는 이들 질문에 대한 해답[또는 해답의 바람직한 대리 격(格)]이 전문적 활동을 위해 학생들을 준비시키고 자격을 갖추게 하는 교육적인 전수(傳受)에 확고하게 내재해 있다. 그런 교육은 철저하고도 확실하기 때문에, 이 해답들은 과학 정신(scientific mind)에 심각한 위력을 나타내게 된다. 그것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상과학 연구 활동의 특유한 효율성에 대해서 그리고 어느 주어진 시기에 그것이 진행되는 방향에 대해서 양쪽 다 잘 설명해 준다. III절과 IV절 그리고 V절에서 정상과학(normal science)을 검토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그러한 연구를 가리켜, 자연을 전문 교육에 의해 제공된 개념의 상자들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격렬하고도 헌신적인 시도라고 묘사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들의 역사적 기원에서 그리고 그 뒤에 따르는 발전에서의 임의성의 요소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런 상자들 없이 연구가 과연 진행될 수 있는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의심하게 될 것이다.

[…] 정상과학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필연적으로 그들의 시간을 거의 모두 바치는 활동인데 이것은 세계가 무엇인가를 과학자 사회가 알고 있다는 가정에 입각한 것이다. 과학 활동에 있어서 성공의 대부분은, 필요하다면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 사회가 그 가정을 기꺼이 옹호하려는 의지로부터 나온다.

Kuhn, 같은 책, pp.23-25

쿤이 제시하는 답은 교과서와 연습문제 풀이로 집약되는 빡센 도제교육 과정을 통해 차세대를 주류 학계의 패러다임에 동화시킴으로서 그런 문제를 갖고 처음부터 다시 왈가왈부할 필요를 없앤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추상적이고 아무리 토론해도 결정적인 답이 잘 나오지 않는 종류의 질문이기 때문에, 이것을 방치하면 맨날 원론적인 논쟁을 하느라 학문 연구가 크게 방해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에 대해 학계의 주류설을 확고히 한 다음에 모든 멤버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디테일한 심화연구들을 추진하는 거대한 분업을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공통된 기반에 입각한 딴 사람들의 연구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연구효율이 비약적으로 향상됩니다. 쿤은 이것이야말로 성숙한 과학의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쿤이 ‘정상’ 과학이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하는 일이라고 말했을 때(10쪽), 그것은 ‘기반들에 대한 동의’가 이미 이루어진 환경 안에서의 작업과, 그러한 기반들에 대해 동의하는 일이 성숙한 과학의 특질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패러다임’과 ‘정상 과학’의 개념은 ‘정상’ 과학을 ‘비정상(extraordinary)’ 과학(예를 들어 혁명적 과학)과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이런 기반들에 대한 동의가 있는 과학과 그렇지 못한 과학 간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명심해야 할 첫 번째 차이는,

(a) 상당히 많은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연구 영역, 자연, 주요 과제, 과업에 대한 지배적인 방법론에 대한 일종의 광범한 합의가 존재하는 영역과
(b) 문제에 대한 해법이 있다고 해도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과업 간의 차이다.

지난 300년 동안의 물리학과 사회학 간의 대조적 차이는 쿤이 마음에 두고 있는 좋은 사례다. 물리학에는 ‘혁명적인’ 대격변이 있어 왔지만 이런 혁명들 사이에는 절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을 아우르는 안정되고 폭넓게 공유된 거점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사회학의 경우는 달랐다. 200년 전 혹은 그 이전에도 사회학은 통일된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패러다임’의 개념은 우선 17세기 이후 물리학과 같은 과학과, 사회학 같은 자칭 과학 간의 대조를 보여 주는 데 사용하려고 의도된 것이다.(『구조』, 15쪽)

쿤이 과학 실제(practice)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과학과 다른 학문과 가장 큰 차이가 날 때는,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의 정당성이나 합리성을 주장할 필요에 관심을 돌리지 않고 경험적인 연구에 모든 시간을 쏟을 수 있도록 과학의 전제와 실제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가 있을 때 뿐이다.

Sharrock & Read, 같은 책, pp.47-48

그럼 주류설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반문이 들어올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쿤은 기존 주류설에 모순이 너무 많이 쌓이게 되면 가끔 한 번씩 뻥 터트려 주고 주류설을 업데이트하는 게 보통이다라고 답합니다. 이것이 쿤이 말하는 소위 '과학혁명'입니다. 즉 맨날 원론적인 논란을 벌이면 소모적이니까 몰아서 가끔씩만 한다는 이야기이지요.


이제 한 가지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쿤의 논의는 성숙한 자연과학, 즉 '정상과학'(normal science)에 해당되는 것인데 사회과학에 속하는 경제학에 적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쿤 본인도 자연과학만 하다가 사회과학과 부딪혀 보고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으니까요.

경제학이 정상과학에 도달했느냐 하는 평가는 꽤 까다로운 질문이고 논란의 소지가 많은데, 짧게 말하면 저는 그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아직 도달하진 못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정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과학은 자연과학보다는 패러다임(내지는 패러다임까지는 못 갔더라도 학계 내부의 컨센서스)이 약할지 몰라도, 전반적으로 철학 같은 다른 학문분야보다는 훨씬 잘 조직된 컨센서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학은 정치학이나 사회학 같은 사회과학의 다른 분과학문에 비해서도 이러한 조직이나 내적 일관성이 발달된 편입니다. 즉 경제학 산하의 세부 분과학문들 간에 방법론 상의 공통점은 정치학이나 사회학보다 훨씬 큽니다.

둘째로 경제학은 앞서 길게 살펴본 교과서와 연습문제 풀이에 입각한 학습법이 사회과학 중에서 제일 깊게 진행된 편에 속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뒤집어서 정치학이나 사회학이 경제학보다 원전강독을 보다 많이 할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 교과서-연습문제 풀이 학습법이야말로 패러다임을 공고화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학파의 역할에 대해서도 잠깐 짚어 보겠습니다.

이들 성격 가운데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과학 분야의 발달에서 패러다임-이전 시대로부터 패러다임-이후 시대로의 이행이라고 내가 앞에서 지칭했듯이 그러한 이행은 II절에서 간략히 설명했던 바로 그런 변환이다. 천이가 일어나기 전에, 여러 갈래의 학파들은 주어진 분야의 지배를 놓고 겨루게 된다. 이후 몇몇 주목할 만한 과학적인 성취의 자취를 따라서 다수의 학파는 대폭 줄어들어 보통 하나로 수렴되며, 보다 효율적인 양식의 과학 활동이 시작된다. 효과적 방식의 과학 활동이란 일반적으로 비전(秘傳)의 성격을 띠며 수수께끼-풀이(puzzle-solving)를 지향하는데, 이는 그 구성원들이 그 분야의 기초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때에만 가능하게 되는 한 그룹의 연구를 뜻한다.

Kuhn, 같은 책, p.252

즉 패러다임이 정립되면 학파가 하나로 수렴되거나 적어도, 공통의 가정들을 공유하는 주류학파 속의 소분파처럼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약

결국 ‘확립된 교과서에 의한 비역사적 교육과 연습문제 풀이’는 학계가 신입을 어떤 특정 방향으로 집중적으로 훈련시켜 학계의 역량을 한 방향에 결집시켜 심화연구능력을 확보하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서로 상충되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주제의식, 방법론도 제각각)를 하는 고전을 다양하게 읽고, 학생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학파에 소속될 수 있어서는 이런 식의 광범위한 동의라는 것은 형성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동의를 전제로 좁고 깊은 연구를 집중적으로 해나가는 것도 불가능하겠지요.

쿤은 이런 심화연구능력을 만들어내는 도구로 교과서의 역할에 주목하는데, 교과서와 연습문제 풀이가 그러한 통일된 패러다임을 전수하는 매개체로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은 이런 방법론을 깊숙히 받아들인 학문입니다.




보론 1.

자 이제 leopord 씨가 의문을 제기했던 '왜 그렇게 주류경제학을 강조하는가'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럼 이제 주류경제학에 대한 오스트리아 학파, 특히 하이에크의 스스로 자초한 고립에 대해 좀 보충을 해 보겠습니다.

20세기 전반의 중요한 경제학 논쟁 중 하나였던 사회주의 계산 논쟁 시절에 하이에크는 신고전파의 완전정보모형이 현실을 잘 모사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내놓습니다. 이는 오늘날 주류경제학 내부에서 각광받는 분과 중 하나인 정보경제학의 표준적인 사고방식과 흡사한 것입니다.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계승이 되었다면 말이지만...

그런데 오스트리아 학파는 이 생각을 발전시킨 경제적 모형을 만들어 연구하자는 제안을 거부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시장경제는 유기적 과정이라 단순한 수식으로는 묘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것을 끝까지 이빨추상적인 묘사로만 다루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모델의 정교화도 실증연구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다보니 오스트리아 학파의 생각은 모델이 없으니 생각이 정교화될 수도 없고, 검증될 수도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류경제학의 교과서-연습문제 풀이 교육과정에 들어갈 방법이 없어져 버립니다. 한편 주류경제학계은 후에 이와 비슷한 생각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모델도 있고 보다 정교화된, 그리고 압도적인 쪽수를 바탕으로 방대한 실증연구를 덧붙인 오늘날의 정보경제학으로 키워 냅니다.

오스트리아 학파가 적어도 주류 학계와 연구결과를 호환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일을 했더라면 그들의 위상은 지금과는 크게 달랐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측면에서 세상이 그들을 왕따시켰다기 보다는 그들이 세상을 왕따시킨 거라고 봅니다.


보론 2.

주류경제학 일부의 그런 태도는 정치철학 분야에서 '조잡한 공리주의'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성공'의 기준 자체가 해석자의 가치관에 따라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롤스 정도는 아실테니 묻지요. 어떤 것을 '정책의 성공'이라고 봐야 하는지요? 효용 극대화? 파레토 개선? 최소극대화? 효용은 뭘로 측정합니까? 순전히 경제적 소득? 평등의 정도에 따른 주관적인 행복도? '시장주의'라는 일반론을 주제로 삼으면서 이런 쟁점에 침묵하고 자의적으로 선택된 가치관을 전제하는 것은 자기 성찰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산마로)

제가 위에서 설명한 대로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잘 벌어지지 않는 것"은 주류경제학계에서 훈련받은 전문가들끼리 논쟁하는 경우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학계의 컨센서스를 깨고 각 개념의 정의부터 새로 논쟁하자 식으로 나오면 논쟁이 산으로 가서 디테일한 분석은 시작도 못하고 끝나게 되니까요.

앞서 예시를 들었던 은행부실자산의 처리방법 논쟁 같은 것을 실제로 관찰해 보시면 그렇게 정의부터 새로 정하고 출발하자는 식의 접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제가 말한 것 같은 실용적인 이유에 대한 논란이 대부분임을 쉽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건 주류경제학 일부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견해는 틀린 겁니다.
by sonnet | 2009/05/02 12:36 | 경제 | 트랙백 | 핑백(1) | 덧글(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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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붙을 수 있는 관심거리는 로마사 정도인 것 같다. 경제학은 솔직히 두번째. 무엇보다 고전학습과 주류경제학 학습이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게 명백해진 상태에서(꼭 <경제학에서 교과서의 역할>이 아니더라도, 경제학과 수업 반년만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좀 애매한 기분이 든다. 재밌는 건 그럼에도 교수님들은 학생들이 A.스미스의 <국부론> ... more

Commented by 김우측 at 2009/05/02 12:44
보론과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저는 어떤 학문이던지, "교과서"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단 경제학 뿐만이 아니라. 신학이나, 심리학이나, 공학이나.. 뭐든지 교과서로 일단 개념을 잡고, 필요하면 원전을 읽는 쪽이 (대부분의 경우, 크게 필요하진 않지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9/05/02 13:20
그런데 그 분야의 전반적인 내용을 담은 쓸만한 교과서 한 권으로 공부를 시작하는 게 자연과학이나 일반적이지 사회과학만 해도 경제학이 예외적인 경우더군요. "사회학원론"이 나올려면 앞으로 이백년은 기다려야 할 듯 같던데요 -_-;
Commented by 김우측 at 2009/05/02 13:23
음. 그러한 "원론"이 없다 하더라도, 뭐랄까. 전혀 생소한 학문 하나를 들여다볼 때, 시작점으로 가장 좋은 것은, 제 생각에는

1. 해당 학문이 가장 좋다는 대학교/대학원 과정을 알아본다.
2. 해당 학교의 학문 인트로 코스를 살펴본다.
3. 해당 과목의 교과서를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쪽이 가장 빠르고 주류학문에서 벗어나지 않는 시작점 같습니다. 반드시 꼭 모든이들에게 인정받는 쓸만한 교과서 한 권이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10:18
제 생각에도 훌륭한 방법론인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행인1 at 2009/05/02 13:03
쿤의 생각이 신선하군요. 매일 논란이 벌어지면 피곤하니 필요가 쌓이면 한 방에 몰아서 화끈하게라....
Commented by Ya펭귄 at 2009/05/02 13:41
매일 논란이 벌어지면 피곤해지니까 한번에 모아서 처리하는게 유리할 것이라는 인적 동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자연과학의 결과물들은 실제 자연에 적용할 경우 대부분 쓸만한 답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인간의 취향이 개입될 필요가 없이)객관적인 검증이 이뤄지는 빈도도 높고, 검증이 안되는 빈도가 다른 분야에 비해서 낮기 때문에 논란이 쌓이는 속도 자체도 늦지요...

Commented by 漁夫 at 2009/05/03 00:16
non-Euclidean Geometry가 확립된 19세기 초나, 양자론이나 상대론이 확립된 20세기 초의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필요가 쌓이면 한 방에'는 '결과론적인 언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당 분야 학계 대다수가 기존 사고방식으로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닫게 될 정도가 돼야 누군가가 해결책을 내놓게 되죠. 내놓을 때에도 저항이 거센 경우가 많습니다. 오죽하면 "새로운 이론은 기존 이론에 익숙한 사람이 차차 세상을 뜨고 새로운 세대가 거기 익숙해져야 수용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14
Ya펭귄/ 대신 원리는 몰라도 경험칙으로 봐서 되면 된다 식으로 보정계수로 계속 때우고 가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해소를 해줄 필요가 있죠. 그게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는 거니까.

漁夫/ 네,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과학혁명을 언급만 하고 건너뛰려다 보니까 과격한 요약을 한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Cuchulainn at 2009/05/03 08:34
쿤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Anomaly가 "임계치" 이상을 넘어가는 순간에 혁명이 빵 터지는겁니다.

P.S. 1: Anomaly -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
P.S. 2: 임계치는 바뀔 수 있는데, 어부님 말씀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너무 빈번해져서 "이거 안되겠군"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질 때. 이런 점 때문에 "오늘 이후로 우리는 이 분야의 패러다임 이전을 실시합니다" 같은 명확한 분기를 잡을 순 없을겁니다.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9/05/02 13:22
이 바닥이 어찌 돌아가는지 잘 모르니 계속 챗바퀴만 돌리는 거군요. 일단 맨큐 선생을 영접하시고...(퍽)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14
수학의 정석님을 영접할 때는 유제만 풀면 이단입니다;;;
Commented by Lucid at 2009/05/02 13:39
"교과서적인" 사회과학은 비단 경제학뿐만 아니라 미국식의 실증주의 사회과학이 득세하면서 모든 분야로 확대되었다고 해도 옳습니다.

제가 전공하는 국제정치학의 경우에도

1) 널리 알려진 훌륭한 국제관계사 책 3~4권
2) 이론적인 논쟁을 정리한 학자들의 역사적 논문 몇 개
3) 주요 강대국 외교정책과 현안이 담겨 있는 책 몇 권

정도면 최소한 한국 신문기사 정도는 저~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비판할 수 있거든요.


사회학이나 인류학의 경우는 방법론상의 논쟁이 아직도 많기는 합니다만, 적어도 주류 학자들(실증주의, 정량주의) 사이의 컨센서스는 바깥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공고한 것이 사실입니다.
Commented by soe at 2009/05/03 04:17
초면에 죄송합니다만 위 1) 2) 3)에 부합하는 책들좀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국제정치에 관심은 많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감이 안잡혀서..
Commented by 카린트세이 at 2009/05/02 13:48
굳이 경제학 뿐만이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체계가 잡혀 "학"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학문들은 정규적인 학습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주류 학계와 비슷한 견해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은듯 하더군요....

저는 저걸 가장 크게 느꼈을때가 아동용의 학습 만화나 과학 만화를 볼 때였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10:49
흐.
Commented by _tmp at 2009/05/02 13:50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쳇바퀴에서는 벗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Commented by Ya펭귄 at 2009/05/02 13:55
한줄요약...

"전문가들이 대부분 동의한 사안은 대체로 들어맞는다..."

한줄요약에 대한 머피의 군사학법칙적 응용...

"두 장군이 동의에 도달하는 소리가 회의실에서 흘러나올 경우,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10:49
풉.
Commented by 아이군 at 2009/05/02 14:08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얘기네요.

최근에는 라캉씨랑 프로이트 씨가 모 이글루에서 한판 싸움을...

프로이트씨가 주류 과학계에 편입되기 위해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는 걸 생각하면,
라캉빠들은 프로이트가 주류니깐 우리도 인정해 달라능~~ 같은 소리는 못할 겁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배꼽이 있었을까? 를 보니깐 또 어디 깔데가 있다고 또 까더군요. 안습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10:59
아 그런 게 있었습니까.
Commented by 저련 at 2009/05/02 14:51
철학조차도 영미 분석철학은 분명한 교과서가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논리학을 제외하면) 교과서 역시 학문의 특성상 논증과 반박의 연속이고, 그것을 고무하는 것이 물론 매우 당연한 관습입니다만, 거대 체계를 그리는 대저가 아니라 세세한 문제를 놓고 싸우는 논문들로 더 많은 부분이 이뤄지는 학문으로 이행한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심지어 철학도 이런데, 다른 학문은 말 할 것도 없겠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10:46
말씀 감사합니다.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거대 체계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저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Commented by e-motion at 2009/05/02 15:18
음.. 교과서는 학문 목적 뿐 아니라, 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장 영향력있고, 설득력있는 연구들의 체계적이고 논리정연하며, 읽기 쉬운 주류 학계의 정수 같은 것이죠. 말장난 같지만 '反교과서'나 '脫교과서'적인 견해, 연구결과는 지금도 수없이 생산되고 있지만, '非교과서'적인 것으로 인해 원론서, 개론서의 내용이 완전히 바뀌게 된 사건은 학문의 역사를 통틀어도 몇 번 없지 않나요. 심지어 그런 중대 이벤트가 발생할 경우에도 교과서는 그런 도전들을 완전히 적대시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포용하고 흡수해서 결국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왔었구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10:58
네. 대부분의 교과서는 상당한 업적을 쌓은 교수들이 자기 분과학문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집대성한 성격이 강하지요. 본문에는 다루지 않았지만 A교수의 교과서와 B교수의 교과서가 내용이나 구성이 판이하고 각각을 배운 학생들이 소통이 어려울 정도로 시각차를 보인다면 그건 상당한 문제를 낳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문제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컨센서스의 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愛天 at 2009/05/02 16:06
교과서라는 개념이 나타난 것도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저렇게 공부하는게 낫다는 개념논란을 통해서보기보다는 경험적으로 더 낫다는 것 때문에 나타난 걸까요.. 요즘 과학사 강의를 듣는데 이 부분까지는 나가지 않아서 아쉽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10:48
흥미로운 문제제기군요. 아무래도 경험적으로 수렴된 게 아닐까 싶은데 실제로 어떤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leopord at 2009/05/02 16:54
잘 읽다가 보론에서 제 이름이 나와 깜짝 놀랐습니다.ㅎㅎ;

쿤을 인용해 주류경제학으로의 편입이 학문분과에 미치는 영향을 패러다임 개념으로 설명하신 부분 흥미로웠습니다. Lucid 님과 저련 님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건 미국식 실증주의와 구조-기능주의의 영향과 관련이 강하다는 인상입니다.

주류경제학의 역사가 쿤이 설명한 '문제-풀이'를 통해 학습자를 이론체계에 편입해 온 역사라는 건 말씀하신대로 A.마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동시에 19세기 과학주의의 영향(periskop 님의 <물리학과 경제학의 분수령을 찾아서>에 더 잘 나타나있습니다만.)과 함께 바라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sonnet 님의 풍부한 인용과 통찰이 재밌으면서도, 학문과 외부와의 관계를 배제하고 학문 안의 담론체계로만 설명하시는 듯 해서 드렸던 말씀이었습니다(이런 실증적인 방법론의 유효성은 인정하지만 말입니다.).

이 포스팅의 문제의식은 '통섭'과 직결된다고 봐야겠지요. 미국에서 생물학과 사회학이 전제와 공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 등... 하지만 미국 학문은 규범분석은 여전히 '주어진 값'으로 존재하는 경향이 있어 기술적인 혹은 기능적인 분석이 의존하고 있는 규범이 흔들릴 경우(현재의 경제위기도 한 예가 되겠지요.), 그 규범을 넘어서 사고하는 데에 난점이 있지 않은가 거칠게 생각해 봅니다. 통섭이 다소 기술주의적으로 흘러갈 위험이 여기서 나오지 않는가 싶기도 하고요.

한편, 유학의 경우 원전독해의 맥락은 단순히 전근대-근대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동아시아-유럽 사이의 차이도 있는 것 아닐까요. 물론 포스팅 맥락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만, 천자문-명심보감-논어-맹자-...로 이어지는 학습수순에 대한 분석은 좀 다른 접근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쿤의 '과학혁명' 개념을 스리슬쩍 넘어가시는 부분에선 점진적·보수적 변화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좀 마뜩치 않아하시는 듯한 기분도 들었습니다만, 제가 예민한 탓이겠지요.ㅎㅎ; 이번 포스팅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50
19세기에서 어떤 계기를 찾는다면 '학문의 대분화'(http://sonnet.egloos.com/3449835#takotsubo )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화는 문제를 잘게 분해해서 하나씩 해결한다는 divide&conquer 전략이 배후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한번 이렇게 방향을 잡으면 자연히 작은 문제를 해결한 것을 쌓아올려서 bottom-up하게 이론을 확장해 나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나 하이에크가 주류에 영원히 합류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전체를 끝까지 전체로 다루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건 top-down 접근법이죠. 이들은 나무를 관찰하러 숲에 들어가자고 하면, 숲에 들어가면 숲이 안보이니까 싫다고 하는 식입니다. 대신 더욱 막강한 고해상도 망원경을 개발해서 숲도 놓치지 않으면서 나무도 포착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거지요.

'과학혁명'을 과감하게 넘어간 것은 사실 그게 워낙 논쟁거리가 많고 방대한 주제라서 그걸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제가 다룬 패러다임의 교과서-표준예-연습문제 풀이 측면은 상대적으로 논란이 적은 쪽이고 이것만 떼어서 다루고 싶었던 거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쿤이 드는 과학혁명의 사례들은 '점진적·보수적 변화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예들입니다. 쿤에게는 단행본으로 낸 사례연구가 두 건 - 『코페르니쿠스 혁명』『흑체이론과 양자 불연속성, 1894~1912』있는데, 둘 다 그렇습니다. 제가 볼 때, 쿤은 혁명은 실제로는 어감만큼 혁명적이지 않다는 이야길 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일화 at 2009/05/02 18:54
역시 소넷님 다운 명쾌한 설명이로군요. 모형과 수식 없이 이빨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학에도 대부분의 종사자들이 동의하는 기본 개념과 논리체계가 자리잡고 있어서 관련논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더 납득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10:34
네. 그런 게 잘 갖추어져 있어야 일상적인 현안들에 대해 답을 줄 수가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Commented at 2009/05/02 19:1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10:31
하하, '테크트리'입니까 ^^;
Commented by Ciel at 2009/05/02 20:03
사실 법학도 경제학과 비슷한 반열에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09
법학이나 의학은 게다가 특유의 도제제도도 있으니까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09/05/02 21:11
글이 길다보니 얼어버렸습니다만, 그래도 남는 것도 많은 글들이었습니다.
하긴, 세상엔 공짜는 없죠. 인정받으려면 그만큼의 '댓가'는 치러야 하는 법.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09
네, 깊게 팔 수 있는 대신에 시야가 좁아지게 되지요.
Commented by 보존협회 at 2009/05/02 21:54
저 역시 이공계로서 사회학의 수많은 이론 계보를 만나며 컬쳐 쇼크를 받았었죠. 전 나름 독창적인 (야메)결론을 내렸습니다. 불확정성의 이론이었던가요?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한없이 가까우면 위치는 확률의 함수로 존재한다 였나? 사회학이나 경제학은 인간이 인간을 관찰하는 거다보니 이론이 확률적으로 많은 거죠 ^^b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09
하하, 사회과학은 소위 '주제의 난점' 즉 다루는 주제 자체가 딱부러지지 않고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관련학문도 비슷한 문제를 겪게 된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Commented by 질럿 at 2009/05/02 23:46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저는 과학(물리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인문학/사회학 쪽에서는 논문을 쓸때마다 왜 용어를 새로 정의하고 드는지 조금은 의아했거든요. 저 같은 경우에는 몇몇 영어단어들은 물리학을 통해서 배운지라 (유학중인) 대학원에서 학부생 시험을 채점할 때 단어의 뜻을 "너무 엄격하게"들이대는 경우가 있지요.

언제나 그렇듯 무언가 특별히 고민해 본 것은 아니지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주제에대해서 "문제제기"와 "해결(?)"을 동시에 해주신 느낌입니다.

뱀다리를 덧붙이자면 양자역학의 경우에는 처음 양자역학을 "개발"하던 대가들이 쓴 책보다는 2000년경에 출판된 그리피스(Griffth)의 양자물리책이 훨씬 더 개념 정리가 잘 되어있더군요. 개념을 개발하는 것과 이를 잘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겠지요. 개발자가 개발한 당시에는 가장 잘 이해했겠지만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08
아무래도 학계의 컨센서스가 약할수록 이하에서 다룰 용어를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커지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어떤 모노그래프에서 "기술발전이 경제성장을 견인한다"라고 했을 때 '기술'이 뭐냐는 저 문장만 보곤 확신하기 힘든 상황이라서요;;; 그 범위의 크기에 따라 적어도 주요한 세 가지 정의가 있는 상황이고, 변형된 정의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요.
Commented by 이런저런 at 2009/05/02 23:55
이런 문제들은 추상적이고 아무리 토론해도 결정적인 답이 잘 나오지 않는 종류의 질문이기 때문에, 이것을 방치하면 맨날 원론적인 논쟁을 하느라 학문 연구가 크게 방해를 받게 됩니다.
-------------------------------------
여기에 좀 보충하자면요. 아무리 토론해도 결정적인 답이 잘 나오지 않는 질문은 과학에서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서로 다른 주장 혹은 가설이 맞서고 있을 때는 실험으로 검증하면 되어서 그렇지요. 그래서 그런 논쟁은 과학에 있어서 학문 연구에 방해가 되는 일은 별로 없게 됩니다. 물론 근대 이전에 과학적인 방법론이 확립하기 전이면 달랐겠지만요.

Commented by Lucid at 2009/05/03 00:15
사회과학은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 하더라도, 자연과학에서도 "아무리 토론해도 결정적인 답이 잘 나오지 않는 질문"은 존재하지 않습니까? 정량적인 분석이 가능하다 보니 그 모호함을 "확률"로 대체하긴 해도요. :D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07
사실 그 이야기는 과학혁명 이야길 깊게 다루고 싶지 않아서(논쟁의 소지가 많이 있고, 이야기가 옆으로 샐 우려가 있어서), 제가 난폭할 정도로 짧게 요약한 탓이 큽니다;;
쿤의 분류를 따르자면 단순히 실험으로 검증하면 되는 문제들은 정상과학의 영역이고, 어떤 실험이나 대립되는 가설을 넘어서 그 가설들을 뒷받침하는 암묵적인 틀이 바뀌어야 해서 사람들이 문제 해결에 혼란을 겪는 상황이 과학혁명이 필요해지는 시기라는 식입니다. 참고로 현대 과학에 있어 쿤이 드는 예는 1900년을 전후한 막스 플랑크와 양자 이론입니다.(이 문제를 다룬 사례연구 단행본이 있습니다)
Commented by 이런저런 at 2009/05/03 16:24
네. 그런 혼란을 겪는 상황이 패러다임이 바뀔 때죠.
자연과학자들은 그런 혼란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각자의 역할대로 분업이 잘 이루어집니다. 한 편으로는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검증하고 그런 식으로요. 그리고 과학자들은 그런 논쟁을 오히려 생산적으로 보는 경향이 클 겁니다. 그 논쟁 과정에서 의외의 소득(새로운 실험방법론, 새로운 세부 학문 등등)을 얻을 수도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오면 자연을 보다 더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죠.

그리고 Lucid님이 말씀하신 것 중 "그 모호함을 확률도 대체한다"는 거는 양자론을 생각하신 건가요? 양자론의 핵심 중의 하나가 확률이라는 게 자연의 본성이랄까 그렇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그걸 부정하려고 애썼지만요.
Commented at 2009/05/03 00:0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07
하하. 일본 학계는 공대도 연공서열이 엄청 강하더군요. 한국보다도 한 술 더 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Commented by Alias at 2009/05/03 00:04
사실 오늘날은 교과서로 과학을 배우다 보니, 말씀하신 지동설 이야기 외에도 많은 부분을 오해하는 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오리지널 뉴턴역학은 미적분도 없이 기하학적 도형으로 이론을 증명했고, 위치에너지니 운동에너지니 하는 개념조차 안 나와 있는데 이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죠.

쿤의 과학혁명 주장은 맞는 부분도 있지만 무리하게 과학 전체로 영역을 확대해서 해석하려면 곤란하죠. 예를 들어, 식물분류체계 같은 건 과학혁명 논지로 설명하기 상당히 곤란한, "지식축적이 주가 되는" 종류이고...
Commented by 愛天 at 2009/05/03 05:16
에른스트 마이어 같은 경우는 생물학에 패러다임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면서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내기도 했지요. 위에서 말한 연습문제라는 개념도 일부 과목에서는 잘 안 다루기도 하니까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06
1. 예. 현 과학의 교육과정은 과학의 역사를 심도있게 이해하기엔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는 건 충분한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2. 그건 쿤이 물리학 전공자인 것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학의 경우는… 경제학이 물리학을 의식적으로 모방했다는 의견(http://blog.periskop.info/145 )도 있을 정도여서, 경제학은 쿤의 설명을 원용했을 때 무리가 적은 편인 듯 합니다. 다만 저 의견과는 좀 다른 관점이지만 경제학이 수학을 많이 쓰는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변한 것은 1930~50년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동시대에 공부를 했던 사람들의 증언("그 때는 응용수학 공부가 선택이었는데 해두길 정말 잘했다" 류)들이 대개 비슷합니다.
Commented by xavier at 2009/05/03 06:16
좋은글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추신: 회사컴퓨터에다가 한글 폰드를 깔던가 해야지....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06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효우도 at 2009/05/03 06:34
이 글을 읽다보니 제가 고등학생 시절 심리학 배울때가 생각나네요.

심리학은 여러가지 이론이 있고 각각의 이론의 허점이라던가 이런 것을 배우지만 수학이나 과학은 현재 통용돼는 최신이론이 나오기 전의 허점이 많은 옛날 이론이라던가 옛날 이론이 현재의 방식으로 어떻게 도달했는지 하는 것은 배우지 않는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06
예. 역사적 흐름을 따라서 과거 이론을 먼저 익히고, 그 다음 이론을 익히고, 맨 마지막에 가장 최신 이론을 익히고 이런 식과는 거리가 멀죠. 딱 가르쳐야 할 요즘 이론이 있고, 나머지들은 그걸 가르치는데 필요한 만큼만 언급하고 넘어간다는 느낌입니다.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 하나하나 배우는 방식은 각 이론이 장단점이 있어서 현재도 다 배워야 하든가, 아니면 나중 이론이 앞선 이론의 주석이나 보충, 반론 형태로 되어 있어서 순서대로 배워야만 이해가 잘 된다든가 하는 이유가 있는 경우에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알바트로스K at 2009/05/03 07:27
처음 보는 사람에겐 맨큐보다는 이준구/정창영 등등의 수식해석이 있는쪽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당...-_-);;;;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08:05
하하, "어짜피 전공할 거라면" 처음부터 제대로 된 게 낫다는 입장이시군요. 그 말씀도 납득이 갑니다.
Commented by sprinter at 2009/05/03 09:50
음, 너무 경제학의 표준성을 강조하신것 아닌지요^^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경제학은 여전히 1600년대까지 내려가는 원전을 찾아서 읽는 분야들도 많은 것으로 알며, 마르크스 인용하는 내용들도 넘치고, 슘페터는 기본이었죠. 적어도 제가 있는 Innovation 분야는 그래요. 물론 Innovation과 개발 경제학은 경제학의 '주류'라고 보기에는 살짝 무리가 있습니다만. ㄲㄲㄲ.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3 10:18
하하. 네이선 로젠버그나 도널드 맥킨지 이런 사람들이겠죠? 두 사람 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저자들입니다. 로젠버그는 inside/exploring the blackbox, 맥킨지는 inventing accuracy. 어떤 면에서 이 사람들은 사례연구를 많이 하다보니까 역사성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주류에서 기술진보나 혁신을 다루는 방법은 그야말로 개떡같죠(웃음). 솔로우 잔차 같은게 기술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대표적 예 아닙니까. 쓰레기통에 넣고 뚜껑을 닫는다... 개발도 헤로드-도마니 솔로우 이런 모형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저는 면면히 흐르는 주류의 혈통을 느낍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제 생각엔 그런 구석진 관심분야를 가질수록 주류의 discipline이 강하게 느껴져야 할 것 같은데요. 안그러십니까, 전 그런데 ;-)
Commented by sprinter at 2009/05/03 13:23
로젠버그는 들어본적이 있는데 맥킨지는^^;;;

주류에서 기술진보나 혁신을 다루는 방법이 그야말로 개떡같다는데 격하게 동의합니다. 아직 기술진보나 혁신을 '정의'할 수 있는 경우도 많지 않을걸요?^^ 솔로우 잔차만 생각해도 ㄲㄲㄲ.

당연히 주류의 어떤 흐름이 강하게 느껴지죠. Innovation 연구하는 사람들을 경제학에 데려가면 '경제학이 미래를 말하는데 재능이 없다보니 개나 소나 다 한다' 소리도 한번씩 듣고, Innovation 연구의 대가들이 경제학과 교수들에게 난도질 당하는 것도 - 도대체 니가 하는게 뭐냐 - 부지기 수. ㄲㄲㄲ.

discipline이 어떤 의미로 쓰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로 주류만큼의 교육이 가능이나 했으면 좋겠다능;;;
Commented by categoriae at 2009/05/03 12:20
꼭 아카데믹한 영역뿐 아니라, 소넷님이 언젠가 언급하셨던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언제나 잠복되어 있는 비주류의 생각과 세계관'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로 교체되는 현상 역시 비슷한 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4 07:28
성숙한 과학에서 패러다임 쉬프트는 주류 내부에서 대두된다고 하지요. 실질적으로 비주류들이 소멸하고 주류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데... 이런 것은 쿤이 분석했던 과학자 사회처럼 전문주제에 특화된 동질성이 강한 특수공동체에만 가능한 것 같습니다. 다원적인 사회는 아무래도 패러다임 이전 사회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Commented by categoriae at 2009/05/03 12:37
'연습문제를 주고 숙제로 내게 한다' 야 말로, 19세기와 진정 단절을 일으킨 20세기의 강의실 혁명이었음에 틀림없겠군요!

1) 연습문제를 풀다보면 교과서 이외의 방식의 해결 틀이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게 된다.
2) 연습문제에는 정답이 있다. 학습자가 '틀리'면 그것은 학습자의 무능력의 증명, 학습자에 대한 처벌이 된다. 그러면 학생은 자괴감과 도덕적 반성의 경로를 거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3) 연습문제는 교과서 맨 뒤에 (혹은 별매 자매품으로) 해답이 있다. 풀다가 잘 모르겠으면 해답을 보면서 혼자서 잘 생각해 보고 '자기 것으로 만들' 것.

-그렇다면 여기서 20세기의 결론:
학생이라면 닥치고 예습복습을 철저히 할 것.

그런데, 어느 학문이라도 우리는 '장기 20세기'에 살고 있는 것이겠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4 07:28
하하. 예습복습을 철저히!!
Commented by 少雪緣 at 2009/05/04 02:35
메이지:디 어센션 식으로 말하면

테크노크라시: 패러다임 쉬프트따위 일어나지 않도록 빡세게 빽빽이를 시키겠어!

대개 평범한 일반인들은 연습문제를 한페이지 정도만 풀어도 KO됩니다. 암요(후룩)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4 07:29
사실 서두에 언급했었던 멘큐의 경제학에는 아예 '경제학자처럼 생각하기: 경제학적 사고'라는 독립된 장이 있습니다. 이 장이 경제학자로서의 훈련을 시작하는 신입들에게 '미래의 너희 모습'을 제시해주는 것 같아서 묘한 느낌을 주더군요.
Commented by 프뢰 at 2009/05/04 17:22
전 그냥 경제학에 관심있는 일반인(...) 인지라, [경제독해] 나 [나쁜 사마리아인] 정도를 읽어봤을 따름인데요, [맨큐의 경제학]은 결국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미국의 사례를 중점으로 풀어낸 책이기 때문에 요새 세상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라는 주장을 들어본 것 같은데요. 이런 사회의 변화에 따른 책의 가치도 변하지 않나요?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9/05/04 19:34
새케인즈학파의 거두 맨큐 선생께 신자유주의 딱지를 붙이면 섭섭한 일이죠. 시중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경제학원론은 뉴케인지언이 고전학파와 케인즈학파의 얘기를 균형있게 풀어놓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윤석범/김학은 "자유주의 경제학 입문" 정도겠는데, 이 책 내용도 상상하시는 것과 전혀 딴판일 겁니다.
"맨큐의 경제학"을 잘 보시면 요즘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저한테는 그렇습니다. 외제가 싫으시다면 국산인 이준구/이창용 선생의 "경제학원론"도 훌륭하죠.
Commented by 산마로 at 2009/05/05 13:28
1. '시장주의 비판'은 주류경제학 패러다임 안에서 수행될 일이 아닙니다. '주의'라는 명칭이 붙은 한 그것은 이미 규범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일이지요. 코스의 정리를 다룬 최초의 글에 대한 제 댓글에서 지적했듯이 그 글의 경제학적인 논의는 나무랄 데가 없었어요. 조잡한 시장주의라는 실체없는 일반론을 두루뭉술하게 비판한 것이 문제였지요.

2.코스의 정리는 주류 경제학 교과서 안에 거의 대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윗분이 '자유주의 경제학 입문'을 언급하셨는데 이념적 접근을 상당히 시도하는 이 책에서도 코스의 정리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다루는 패러다임이 된 내용도 잘 모르는 '조잡한 시장주의자'가 많거나 주류인 것처럼 서술한 이전의 글과 쿤과 패러다임을 다룬 이 글은 모순이 되는 것이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9 17:50
1. 귀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이 잘 이해하고 있듯이 귀하의 주장은 제 글의 scope를 벗어난 것입니다.

저는 그 글에서 '조잡한 시장원리주의'를 충분히 명확하게 규정(*1)했고, 후에 귀하가 헤메는 것 같길래 부연설명(*2)도 해 주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들을 지칭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이 귀하를 제외하고 누가 있습니까? 그리고 제가 지칭한 사람들은 모두 주류경제학의 범위 내에서 비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2. 둘째로 코스의 기업이론은 이제 주류에 편입되어 있지만 주류의 한 복판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누차 설명해 드렸지만, 그 이론은 주류에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시장에 대한 모델 혹은 가정과 약간 불편한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코스의 기업이론에 대해 배운 적이 있는 잘 훈련받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간략화한 모델을 사용해 추론을 진행해 나갈 때는 충분히 간과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귀하가 '코스의 정리'라는 표현을 쓰면서 『기업의 본질』과 『사회비용의 문제』를 뒤섞는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교과서에서 보다 호의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사회비용의 문제』쪽일 텐데요. 이 둘이 주류에서 받아들여진 차이는 본문에 코스가 잘 언급해 주고 있으니 그쪽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이들의 생각은 … 시장을 통하지 않고 조정되는 분야가 있다면 그것을 찾아내어 시장을 사용하도록 바꿈으로서 사회적 효율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 (http://sonnet.egloos.com/4127013)
(*2) "시장원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대개 주류경제학의 전통적인 모델을 과신해서 서툰 결론을 내놓는 사람들에게 가해진다.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세계화와 그 불만』, 사카키바라 에이스케의 「시장원리주의의 종말」등이 그렇고, 워싱턴 컨센서스니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많은 논평들도 대개 비슷한 표적을 겨냥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http://sonnet.egloos.com/4128775)
Commented by 산마로 at 2009/05/05 13:35
보론에 대한 덧글:
여전히 규범적인 차원과 실증적인 차원을 구별을 못하는군요. 누가 주류경제학의 개념을 새로 정의하자고 하던가요? 주류경제학의 도구만 갖고 규범적 차원의 논의, 정치철학적인 논의를 수행하는 님의 글이 기본적으로 오해와 독선에 기반한 것임을 지적했을 뿐이지요. 규범적인 논의를 하다가 반론을 받으면 다시 실용적(이것도 그렇게 자명하지 않습니다)인 차원의 이야기라고 말을 바꾸는 것으로는 님이 최초에 쓴 글이 일반적, 규범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05/09 17:54
"규범적인 차원과 실증적인 차원을 구별을 못하는군요" 이 말은 그대로 돌려드리지요. 어떻게든 (끝이 나지 않는) 규범논의로 끌고가려는 시도는 눈물겹긴 하군요.
Commented by 카나리아 at 2009/05/21 04:48
근데 리플들을 보니 주류경제학이 기술진보나 혁신을 다루는 방법이 아직 별로인가 보네요...

뭐랄까 비전공자로서 그런 '기분' 을 느끼긴 했지만 구체적이지 않고 디테일한 설명도 불가능하므로 그냥 그런가하고 넘어갔는데 실제로 그런가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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