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평화의 시장가격: 민항기 북한 상공 우회를 보며 (Crete)에 트랙백
위 글은 저의 글
파워의 비교에 트랙백 걸린 것으로 거기서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북한은 정치적 지렛대로 쓰기 위해서라면 경제적 이익을 쉽게 희생시킬 수 있는 체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과 중요한 경제적 협력관계를 가질 경우 우리가 북한에게 쓸 수 있는 레버리지보다는 북한이 우리에게 쓸 수 있는 레버리지가 더 커지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기 쉽지요.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이런 관계가 늘어날수록 우리에 대한 북한의 권력이 커진다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은 우리가 북한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지렛대를 늘리는 것 뿐만 아니라 북한이 우리에게 쓸 수 있는 지렛대를 하나 하나씩 줄여 나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지렛대를 하나 갖는다 해도 저쪽이 동시에 세 개를 가지게 되면 그건 손해이니까요. (
sonnet)
sonnet님... 물론 지금 현재 북한의 모습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제적 희생을 쉽게 감수하는 체제로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응을 북한과의 관계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나가기 보다는 오히려 북한이 쉽사리 경제적 희생을 감수하기 힘든 체제로 전화되는 걸 도와주는 노력이 더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한마디로 돈맛을 충분히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북한은 돈맛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저런 일을 쉽게 벌이는 거죠. (
Crete)
이 의견을 읽으며 떠올린 저의 의문은
"아직 … 돈맛을 제대로 보지 못"한 북한을
"쉽사리 경제적 희생을 감수하기 힘든 체제로 전화"시키기 위해
"한마디로 돈맛을 충분히 보여주"려면
도대체 우리가 북한에게 얼마나 더 양보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기본적인 수치를 잠깐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북한에 대한 통계는 늘 신뢰성 문제가 존재합니다만, 이 글에서는 대략적인 감만 잡는데 쓸 것이므로 큰 상관은 없습니다.
남북한의 경제력 (CIA world fact book, 2008년[1]
이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남한의 1/16입니다. 간단한 복리 계산을 해 보지요. 남한은 연평균 4%, 북한은 10% 성장한다고 가정했을 때, 남북한의 소득이 같아지려면 몇 년이 걸릴까요? 답은
50년입니다. 물론 이 계산은 주먹구구이며 사실 50년씩 되는 장기성장 예측은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먹구구식 계산으로도 명백히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경제적 희생을 회피하려는 정도가 국민소득에 비례한다면, 우리는 예측가능한 미래 내에는 북한이 경제적 희생을 우리만큼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림 1. 경제성장으로 인해 북한이 경제적 희생에 보다 예민해진다 하여도 남한과의 격차는 여전할 것
이번에는 가정을 좀 바꾸어서 경제적 희생을 감수하려는 정도가 국민소득에 정의 상관관계는 있지만, 정비례하지는 않게 그려 보지요. 경제성장의 초기에는 손해회피도가 빠르게 늘어나다가 후반이 되면 그 증가가 체감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고쳐 그리면 분명히 격차는 보다 빨리 줄어들 것입니다만, 남북한 간의 희생에 대한 민감성이 역전되지는 않습니다.
그림 2. 희생에 대한 민감성 증가가 체감하는 경우. 격차는 더 빠르게 좁혀지겠지만 역전은 일어나지 않음
이제 그래프를 조작해 역전 현상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북한의 경우에만 y축에 임의의 상수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수를 합리화하는 가정은 무엇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같은 소득수준일 때는 북한이 남한보다 더 위험회피적일 것'(?)이라는 가정이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림 3. 역전 현상을 만들기 위해 북한 측 곡선의 y축에 임의의 상수를 더함
지금까지 살펴본 것 중에서 손해회피도의 증가가 비례(그림 1), 증가율이 체감(그림 2)한다거나 y축에 일정한 상수를 더한(그림 3) 것은 가정을 바꾼 데 따른
임의의 조작일 뿐입니다. 이 가정이 적절하냐는 설득력 있는 경험적 증거들로 뒷받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제 역사적 사례를 하나 살펴 보겠습니다. 북한이 현 체제 하에서 개혁 개방의 길을 걷는다고 할 때 가장 일반적이고 성공적일 거라고 간주되는 모델은 중국입니다. 그러니 중국의 사례를 한번 살펴 보도록 하지요.
중국은 1980년대 초부터 개혁개방 노선을 취한 이래 약 25년간 빠르게 성장해 왔으며, 그간 중국 사회는 크게 자본주의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국민소득은 여전히 개도국 수준이며 따라서 한국 사회가 평균적으로 더 잘 삽니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어떤 이유로 인해 한국과 중국이 각각 외부로부터 비슷한 비중(예를 들면 GDP의 -1%)의 경제보복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지요. 그럼 한국과 중국 중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워 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쪽이 더 오래 버틸 수 있겠습니까?
국민 혹은 국가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 부정적 여론이나 경제적 손실에 관계없이 정치지도부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국가자율성 등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은 여전히 우리보다 더 큰 경제적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 국가입니다.[2] 이렇게 생각해보면 한
사반세기 정도 북한이 빠른 경제성장을 거듭한다 하더라도, 남한보다 경제적 희생을 감내하는 데 여전히 더 나은 능력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Crete씨의 주장은 "돈 맛을 본다"와 같이 독자들의 일상적인 체험, 예를 들면 소비수준을 갑자기 낮추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경험에 빗대어 호소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주장은
직관적이긴 해도 실제로는 매우 취약한 가정들[3]에 의존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특히 어떤 가정을 쓰던 간에 남한에 비교한 상대적 경제적 손실회피도가 커지기를 기대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주장에는 다른 중요한 약점도 있습니다. 돈 맛을
먼저 보여주고 상대가
나중에 바뀌길 바라는 '선불' 전략은 상대가 이 기회를 악용해 미끼만 따먹는 식으로 대응하는 속칭 '먹튀' 전략을 구사할 경우 지극히 취약합니다. 같은 선불 전략이라도 일단 한 번 선의를 베푼 후 상대가 호응하지 않으면 바로 보복하는 tit-for-tat 같은 전략이라면 선불의 약점을 많이 상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먹튀로 나왔을 때, "아직 북한은 돈 맛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라고 판단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 적당히 기회를 봐서 돈을 더 먹여줘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마련인데, 호구로 전락하기 딱 좋은 상황이 되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만약 남북한의 경제수준이 충분히 수렴하게 된다면
체제 경쟁에서 우리가 압도적이다(즉 이미 게임은 끝났다)라는 일각에서 당연시되어 왔던 가정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게 됩니다. 이 때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지요.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주[1] CIA World Fact Book, (1)
명목GDP, (2)
북한, (3)
남한 항목 참조.
[2] 천안문 사태 당시 서방의 연합 경제제재 조치에 대한 중국의 대응, 또는 보다 후에 프랑스와의 외교분쟁에서 보여준 공격적 보복조치에 대해서는 錢其琛, 『外交十記』, 2003 (유상철 역,
『열가지 외교 이야기』, 랜덤하우스 중앙, 2004)를 참조. 또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반대 시위에서 선별된 의제에 대중을 동원하는 정부의 능력, 철저한 언론통제와 대정부 비판 봉쇄 능력 등은 중국의 국가자율성이 여전히 높음을 잘 보여준다.
[3] 국민소득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률(기울기)에 비례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좀 다른 기준을 상정할 수도 있는데, 이런 가정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검토해 보면 역시 취약점이 나타나기는 마찬가지이다.
※ 그림들은 손으로 적당히 그린 것이라 비례가 정확하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