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할 수 없는 노력 (루스) 에서 트랙백
요즘 바빠서 글을 쓸 틈이 잘 나지 않는군요. 다음은 예전에 쓰다가 시간이 없어서 내버려 둔 것인데, 끝없이 내버려두게 되는 것 같아서 대충 번역된 부분만 정리해서 올리는 것입니다. 저는 의학이나 군 의무체제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번역이 이상할 수 있습니다. 오류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언제든지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볼드체 강조는 번역자가 추가한 것입니다.아프가니스탄에 주둔했던 소련 제40군의 의무지원에 대한 개괄로 글란츠 대령의 논평으로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0년간 [아프간 파병] 소련군에 복무한 사람은 총 64만 2천여 명인데, 아프간 전쟁에서 소련군의 사망자와 실종자는 1만 5천여 명이다. 이들의 사인은 각 가정에 구체적으로 통보되지도 않았다. 또한 469,68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최종적으로 각자 고향으로 복귀한 전체 병력의 73%에 육박하는 것이다. 더욱 경악할 만한 것은 질병을 앓은 환자의 숫자(415,932)로서, 이중 장티푸스(Typhoid Fever) 환자가 31,080명, 간염(Hepatitis) 환자가 115,308명이었다. 이 숫자는 단순히 많고 적음을 떠나서 소련군의 위생과 그들 병영생활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숫자는 현대적인 군대와 현대적인 약이 있는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복귀한 병사와 소련 국민들 사회에 제기된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1)
이어서 소련군 자신의 평가입니다. 이 문건은 자체평가이기 때문에 상황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뒤의 (이 책을 번역했던) 미군의 논평은 이와 대조적으로 매우 신랄합니다.
의무지원: Yu. G. Avdeev 대령 (*2)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함에 따라, 소련파견군 장병들의 건강과 생명은 커다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전투에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험준한 지형, 극단적인 기후, 위생상태, 역학 상황에 노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발 1,500-1,800m 이상의 고도에 병사들이 오래 노출됨에 따라 그들은 고산병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름에 주간 기온은 그늘에서도 45-50℃에 이르렀다가 밤이 되면 떨어졌다. 겨울에는 사람들이 덥고 건조한 곳에서 춥고 얼어붙는 곳을 오가야 했다.
이에 더해 인력과 물자를 이러한 지형에서 이동시키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도로망이 발달되지 않아 수송과 처리 능력을 제한했다. 계곡과 협곡은 떨어져 있어 서로 만나지 않았으며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도 없어, 의무지원인력과 장비가 이동하는 것을 심각하게 제한했다. 산과 골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긴 비탈을 따라 좁은 길이 굽이쳐 나 있는데, 이는 차륜형 의무수송차량이 시속 10-15km 이상으로 이동할 수 없게 만들었다. 험준한 지형, 햇볕에 말라비틀어진 대지의 단조로운 풍경, 엄청난 흙먼지, 낮 시간 동안 끊임없이 불어대는 (‘아프간’이란 별명의) 바람과 모래폭풍에 따른 제한된 시야는 의료지원, 그리고 종종 부상자 수색의 효율을 떨어뜨렸다. 이러한 지리나 고도의 요소들은 응급처치나 의료 후송에 타격을 주었고, 병사들의 눈과 폐를 해쳤다.
또한 독사가 대량으로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부단한 경계가 필요했고, 대대 의무반까지 해독제 공급을 보장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는 전반적인 전구 환경이 묘사되는데, 그 중에 아프간이란 나라 특성상 앰뷸런스를 사용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지적됩니다. 뒤에서 이 문제는 계속 다루어집니다.
이 나라의 위생수준과 역학적 상황은 심각했으며, 주민 전반에 걸쳐 심각한 의학적 문제의 만연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는 심각한 장 질환들, 티푸스, 파라티푸스, 바이러스성 간염, 결핵, 나병, 말라리아, 수두 등이 포함된다. 이는 소련 장병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이 야전에서 생활하거나 신체 저항력이 약화되었을 때 특히 그랬다.
한 지역에 병력을 집중시키게 되자 전염병이 크게 창궐했다. 1986년 가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준비를 하던 첫 번째 소련군 6개 연대가 이 나라 각지에서 철수해 임시로 한 곳에 집결하였다. 그러자 바이러스성 간염이 창궐해 6개 연대 전체를 휩쓸었다. 환자의 수가 폭증했고, 결과적으로 전염병 격리병동으로 쓰이던 의료시설에 평소의 서너 배의 부하가 걸렸다. 심지어는 전문 야전병원(신경과, 안과, 이비인후과)들도 전염병 담당으로 변경되었다. 오직 외과, 마취과, 집중치료병동만이 이런 업무변경을 피할 수 있었다.
글란츠 대령이 지적한 것처럼 전염병 문제가 지독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런 데서 미군과 소련군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할까요. 아프간에 가서 미군도 꽤나 고생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런 꼴은 보이고 있지 않지요.
의무지원은 아프가니스탄의 열악한 의료체제로 인해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의료 인력의 심각한 부족, 낮은 전문 훈련 수준, 불충분한 의약품과 의료시설이 의무지원을 방해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카불의 아프간 중앙병원에서 2~3개월 간 소련군 위생병과 동등한 수준의 훈련을 받은 아프간인은 장교로 임관해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 이 나라의 개업의들에는 수의사로 훈련받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파라 주에 있는 신단드 병원의 원장은 수의사로 훈련받은 고참 대위였다. 따라서 소련 의무병과, 특히 독립 의무대대와 야전병원의 전문가들은 현지 의료 시설에 의약품, 소련제 물자, 도구를 제공하는 한편, 실습 서비스, 기술적 지원, 심전도, X레이 검사 등을 제공하고 현지 주민들에게 자문과 도움을 주어야 했다.
아프간 최고사령부의 간청에 따라 아프간 군 인력과 그 가족들은 군 야전병원과 제40군의 독립 의무대대들에서 검사와 치료를 받았다. 할 일의 범위와 양은 늘어만 가는 상황에서, 이는 소련파견군의 의무병과에 추가적인 부담을 지웠다. 이 또한 진료의 질을 떨어뜨렸다.
현지 의료수준이 지독히도 나빴기 때문에, 소련군은 현지 의료시설을 활용할 수 있기는 커녕, 자신들의 부족한 자원을 현지 동맹군들에게 나눠 줘야 할 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소련이 서유럽을 쳐들어갈 경우 기대하던 것과는 천양지차였지요.
사단 의무대대와 다목적 군 야전병원이 병자와 부상자들에게 수준 높은 군 의학을 제공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이들은 주요 병력 집결지에 배치되는 한편, 전문치료시설들은 카불에 집중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도합 일곱 군데의 주요 의료시설이 있었다. 우선 카불에는 400침상 규모의 군 병원과 500침상 규모의 전염병 군 병원이 있었다. 이는 둘 다 중앙병원이라고 불리었으며 전문적인 치료를 제공하도록 지정되어 있었다. 이들 시설은 인공 신장을 갖춘 혈액 투석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 심각하게 아픈 환자들은 An-26M "Savior" 고정익 프로펠러 경항공기와 Mi-8MB "Bisector" 의료 후송 헬리콥터를 이용해 아프가니스탄 각지로부터 이들 중앙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또한 카불에는 군 병원 한 곳과 군 구강학(stomatology) 병원 한 곳이 있었으며, 수혈센터(이들은 또한 신단드의 군 다목적 야전병원에 분소를 가지고 있었음), 병리학/해부학 실험실, 법의학 실험실도 있었다. 카불은 소련군 전사자들을 장례지내기 위해 고국으로 후송하는 (“검은 튤립”이라는 별칭을 가진) An-12 항공기가 출발하는 장소기도 했다. 카불에는 위생과 전염병 통제를 실시하고 의료 정찰을 수행하는 위생-전염병 통제 분견대도 있었다. 그리고 약품과 의료 보급품을 담당하는 의무보급창과 병원과 치료시설들을 지원하는 중앙 약제국이 있었다.
두 번째로 큰 의료시설 집결지는 파라 주의 신단드에 있었는데, 이곳은 시멘트 활주로를 갖춘 잘 만들어진 비행장에 붙어 있었다. 덕분에 전력의 재보급을 방해받지 않았으며, 병자와 부상병들을 카불이나 소련의 병원으로 후송할 수 있었다. 신단드에는 350침상 규모의 군 다목적 병원이 있었다. 독립 의무대대 하나와 위생-전염병 분견대(SEO), 약국, 이동 구강학 수술팀이 신단드에 주재하고 있었다.
칸다하르에는 의무 중대 하나가 소련군 여단을 지원하기 위해 175침상 규모의 군 종합병원을 운영하였다.
쿤두즈 주의 의무지원은 180침상 규모의 전염병 군 야전병원에 기반하고 있었다. 독립 의무대대 하나가 주둔지의 환자들을 위한 치료를 제공했다. 또한 쿤두즈에는 이동 구강학 수술팀, 이동 X선 반, 위생-전염병 분견대가 각각 하나씩 있었다.
풀이쿰리에는 200침상 규모의 군 종합 야전병원과 의약품 저장소가 있었다.
바그람에는 400침상 규모의 군 전염병 야전병원과 독립 의무대대가 있었다. 이곳에는 또한 전염병이 유행할 경우 1,000침상을 수용할 수 있는 회복 센터도 있었다. 이곳은 카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의료시설이었다.
잘랄라바드에는 200침상 규모의 군 전염병 야전병원이 있었는데, 독립 차량화소총여단의 의무중대에 의해 운영되었다.
약 10만명 정도의 주둔군 규모에 비춰 볼 때 이 규모가 적정한지 저는 전문지식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실제 운용실태를 모른다면, 단순히 병상수만으로 야전병원을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요. 게다가 양적 기준 달성에 특히 예민한 소련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어쨌든 전반적으로 전염병 관련 시설의 비중이 높다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의무부대들은 군급 제대의 정규 편제보다 상당히 많은데 실전 투입에 따라, 상당수가 추가로 배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조국전쟁 때와 비교하면 병사를 후송하는데 걸린 시간은 짧아졌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2차대전 중에는 61.7%의 부상병이 부상당한 후 6시간 이내에 사단 진료소(DMP)나 이동야전외과병원(KhPPG)까지 후송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90%의 부상병이 그 시간 이내에 후송되었다. 부상당한 후 후송되는데 24시간이 넘게 걸린 부상병은 단 2%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보통 전투 상황의 어려움에 따른 것이었다.
동무들은 대조국전쟁때보다 훨씬 좋은 서비스를 받고 있소!
의무병들은 부상자를 운반하고 모으기 위해 표준 의무 들것을 사용하였다. 환자와 부상자들은 BTR, BMP 또는 LUAZ-967 차륜형 야전 앰뷸런스를 이용해 전장으로부터 후송되었다.
환자나 부상자의 장거리 수송을 위해서는 UAZ-452A 혹은 AS-66 앰뷸런스가 이용되었다. 아울러 격오지의 중상자는 의무대에 있는 8기의 특별 장비된 Mi-8 "Bi-Sector" 의무후송 헬리콥터 중 하나를 사용해 긴급 후송 비행으로 이동시킬 수도 있었다.
그리고 비행 중 기내에서 외과수술과 집중치료를 제공하면서 환자와 부상병을 수송할 수 있는 An-26M "Savior" 고정익 의무 후송 항공기도 있다. “구세주”의 승무원에는 의사, 마취과 의사, 간호원, 마취과 간호사가 포함되어 있다.
[…]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의견은 항공기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환자와 부상자를 후송하는데 더 효율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특별 장비된 Mi-8 "Bi-Sector" 헬리콥터 외에도, 화력지원과 수색 구조 헬리콥터도 의무후송을 수행했다. 그리고 응급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모든 비행에 연대 의사 한 명을 동승시키는 것을 규정으로 하였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로 앰뷸런스의 가치가 낮았고, 제40군이 보유한 의무헬기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프간의 소련군은 가능한 모든 헬기를 이 임무에 활용하게 됩니다.
의무지원은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의 삶과 작전적, 전술적 성취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의 노력의 목표는 군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동시에 분쟁 전 기간에 걸쳐 여러 문제들은 결코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주로 여러 가지 질병을 예방하는 것과 병사들에게 빠르고 수준 높은 응급처치를 제공하는 것과 관련된 일들이었다.
이와 같이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의 메인터넌스와 후방지원은 엄격하고 광범위한 시험을 통과하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은 최고 수준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성공과 아울러 결점도 있었다. 이러한 결점들은 군의 일상생활과 전투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결점의 대부분은 메인터넌스와 후방 지역 지원 업무의 물질적-기술적 기반이 취약했고 인력 훈련의 수준이 불충분함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향후 진지한 조사와 대책이 요구된다.
이 글의 결론인데, 뭔가 좀 두리뭉실한 내용(우리는 열심히 했다. 그러나 문제도 있었다)이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미군 측의 강평으로 보충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논평: 중병은 이 장에서 묘사된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전 소련 병사 중 67.09%가 중병으로 입원하였다. 바이러스성 간염, 콜레라, 이질, 아메바증, 티푸스, 파라티푸스, 기타 수인성 질병들이 제40군 장병들을 휩쓸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병사 중 2.33%가 전사했고, 8.67%가 부상을 당한 적이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제40군에게 있어 질병은 전투보다도 훨씬 더 큰 문제임이 분명했다.
전쟁 초기 몇 년 동안 대부분의 부상은 총탄에 의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자헤딘은 박격포와 지뢰를 손에 넣게 되었고, 파편상을 입는 소련 부상병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소련의 의료지원 절차가 개선됨에 따라, 목숨을 건지는 소련군 중상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주요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헬리콥터 후송과 특별수술팀을 준비시키고 이들을 최대한 전방으로 진출시키는 것이 중상으로 인한 사망자를 줄이는데 특히 효과적이었다.
소련군의 의무지원은 아프간 전 지역에 걸쳐 잘 분포되어 있어서, 소련 병사들은 필요할 때, 의사의 도움을 가까이서 받을 수 있었다. 소련 부상병들은 연대 의무실까지 앰뷸런스로 후송되도록 되어 있었다. 특별히 준비된 소수의 의료 후송 헬리콥터가 치명상을 입은 환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게릴라전의 본질상 앰뷸런스를 타고 간다는 것은 기습공격을 당하고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별 후송 헬리콥터건 더 흔한 돌아가는 수송 혹은 보급 헬리콥터에 실어서건 간에, 점점 더 많은 부상병들이 헬리콥터로 후송되게 되었다. 의료진은 이런 일반 헬리콥터에 자주 동승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헬리콥터가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날아가는 동안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출처1. Glantz, David M., "Introduction," in Grau, Lester W.(ed,),
The Bear Went Over the Mountain: Soviet Combat Tactics in Afganistan, Washington:National Defense Univ. Press, 1996, xiv.
(허남성, 임석훈 역, 『산맥을 넘은 불곰: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 전투전술』,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2003, xv-xvi)
2. Grau, Lester W. and Gress, Michael A.(eds,),
The Soviet Afghan War: How a Superpower Fought and Lost,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2, pp.295-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