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KGB vs. CIA, 비밀경찰 대 씽크탱크소련의 정보기구로는
KGB(국가안보위원회)와 GRU(소련군 정보총국)가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정원과 국군 정보사령부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KGB라고 하면 전세계를 무대로 미국의 CIA와 힘을 겨룬
정보기관처럼 인식되어 있지만, 사실 KGB와 CIA는 매우 이질적인 면이 있었다. 중요한 차이는 정보를 다루는 방법과 관련이 있고, 각각의 조직의 기원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KGB는 10월 혁명 이후 레닌이 만든
CHEKA(반혁명 및 사보타쥬 진압 전 러시아 비상위원회)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이 기관은 신생 볼셰비키 정권의 정권안보를 수호하기 위한 조직으로 출발했으며, 지켜야할 보호대상은 다를지언정 제정러시아부터 존재하던 짜르의 비밀경찰과 흡사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KGB는 결국 국경경비부터 국내사찰, 대외정보수집, 비밀공작 등 오만가지 임무를 다 떠맡는 엄청나게 큰 기관으로 성장하지만 끝까지 비밀경찰로부터 진화한 본질을 지울 수는 없었다.
반면 CIA는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에 대응해 만들어진
OSS(전략정보국)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이 기관의 설립목적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모든
첩보와 자료를 수집 분석하고 연계"시켜 국가지도부가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었다. 게다가 CIA는 기본적으로 KGB와는 반대로 국내정보업무(FBI가 담당)를 하지 않는 대외정보기관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OSS의 후신으로 CIA가 설립되면서, 미국 정보기관들은 Sherman Kent라는 걸출한 정보분석가의 지도 하에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미국식 정보분석기법을 확립하게 된다. 켄트는 학자 출신인지라 정보분석을 일종의 사회과학적 연구로 간주했다.
연구(research)는 진실 또는 진실에 보다 근접한 것을 말해줄 수 있는 것으로 자유주의적 전통을 중시하는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유일한 과정이다. … 우리는 진실이 체계적인 방법에 의해 수행되는 연구를 통해 획득되지는 않더라도 그러한 방법을 통해 접근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고 수 세대 동안 주장해 왔다.
이러한 지식 중 일부는 비밀스러운 수단들을 통해서 습득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지식은 현실적인 공명정대한 관찰과 연구를 통해서 습득되어야만 한다.
Kent, Sherman., Strategic Intelligence for American World Policy, p.151, pp.3-4
(Shulsky & Schmitt, 『국가정보의 이해』, pp.325-327에서 재인용)
그리고 사회과학적 정보분석이 갖는 객관성을 지키기 위해서 정보분석가와 정책결정자의 업무를 엄격히 분리해 서로 영향을 줄 수 없도록 하였다. 즉 정보분석가는 분석만 하고 정책제안은 하지 못하며, 정책결정자는 분석이 끝난 정보를 갖고 정책결정만 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책결정자가 내심 선호하는 정책 혹은 이미 추진 중인 정책에 불리한 정보를 무시하거나 입맛에 맞게 고치도록 압력을 넣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행태의 가장 잘 알려진 유형 중 하나가 나쁜 소식을 가져온 애꿎은 전령을 벌주는
"전령죽이기" 현상이다.
이 결과 CIA는 비밀첩보를 분석하는 거대한
씽크탱크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 경향이 강했다.
즉 KGB와 CIA는 모두 정보기관의 고유업무 전반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KGB가 촉수가 여러개 돋아난 비밀경찰처럼 굴었다면, CIA는 촉수가 여러개 돋아난 씽크탱크처럼 구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니키타 흐루쇼프와 쿠바 미사일 위기이와 같은 두 기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태가 미소간 핵대결을 불러일으킬뻔 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당시 핵무기 투사능력에서 열세하던 소련은 미국의 인접국인 쿠바에 몰래 중거리 핵탄도미사일을 배치한 후 이를 기정사실화해 열세를 만회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기도는 중간에 미국의 첨단정찰능력에 탐지되어,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한 일촉즉발의 대결 끝에 굴욕적으로 핵무기를 철수해야 했고, 그 결과 소련의 국제적 위신은 추락하게 되었다.
당시에도 소련은 미국의 정찰능력이 만만치 않음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소련의 막강한 KGB는 이 문제가 가진 위험성에 대한
조기경보나 전략적 경고를 제공하지 못했던 것일까?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KGB의 대외정보임무는 제1총국에서 수행되었으며, 여기서 수집된 정보는 KGB의장이었던 세미차스트니(Vladimir Semichastny)를 통해 흐루시초프나 주요 정책결정자들에게 보고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KGB는 정보판단을 작성하지 않았으며, 정보요원들은 자신의 정보기관을 주로 정보수집기관으로서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KGB가 소련공산당 정치국이 내리는 결정에 대해 도전할지도 모르는 어떠한 견해를 제공하려 하지 않은 태도에서 기인되었다.
이석호, 이지훈, 「쿠바 미사일위기와 소련 정보」, 『국방연구』 제45권 2호, 2002년 12월, p.92
최고지도자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이런 소련 정보당국의 행태는 많은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소련침공에 대한 경고를 적절히 제기하지 못한 이래 줄곧 이어져 왔다.
NKVD(KGB의 전신) 출신의 전향자 Alexander Orlov도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남기고 있다.
소련에서의 분석 또는 평가는 "훔친 문서에 담긴 첩보의 중요성을 평가하는 것보다는 그러한 문서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것과 관련되어 이루어진다. 첩보가 갖는 정치적인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정부와 당 정치국에서 정책 형성을 담당하는 사람들에 의해 평가된다."
Orlov, A., Handbook of Intelligence and Guerilla Warfare, Univ. of Michigan Press, 1965, p.187
(Shulsky & Schmitt, 『국가정보의 이해』, p.328에서 재인용)
결국 KGB는 정보를 수집해서 가짜가 아닌지만 걸러낸 후, 분석은 하지 않은 채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최고의사결정자들에게 그대로 넘긴 것이다. 그 결과 흐루쇼프는 스스로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위한 정보분석관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럼 KGB와 GRU 같은 소련 정보기관은 그때 무슨 일을 했는가?
흐루쇼프는 우선 쿠바주재 KGB를 통해 카스트로에게 미국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거짓 정보를 제공함으로서, 카스트로가 흐루쇼프의 계획에 동참하도록 유도하였다. 한편 GRU의 워싱턴 지부장 볼샤코프 대령을 통해서 미국에는 소련이 쿠바에 제공하는 군사지원은 방어용(재래식) 군사력에 한정된다는 거짓 메시지를 거듭 전달했다. 기만작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볼샤코프에게 쿠바의 핵미사일 배치계획을 아예 알려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쿠바 미사일 배치에 따라 예상되는 미국의 반응을 판단하라는 중대한 정보요구는 하달하지 않은 반면, 기만작전에 정보기관을 활용했다는 사실은 소련지도자의 정보기관에 대한 인식, 즉 정보분석보다는 비밀공작, 비밀경찰 임무가 정보기관의 주임무라는 인식에서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정보분석, 판단은 정책결정자 자신이 내리는 것이며, 정보기관은 비밀정보를 수집하거나 비밀경찰임무를 수행하고, 이미 결정된 정책을 실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보조기관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이다.
이석호, 이지훈, 같은 글, p.97
소련 최고지도부는 KGB뿐 아니라 군부도
비슷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쿠바에 파견된 소련군 사령관이었던 그리브코프(Anatoli Gribkov) 장군의 말을 들어보자.
[최고간부회의 멤버인] 샤라프 라시도프(Sharaf Rashidov)는 국방위원회에 쿠바의
삼림이 미사일을 가려줄 것이라고 보고했다. 기술적인 면에 전적으로 무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미사일 발사대는 그렇게 쉽사리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사일 발사대는 가늘고 긴 로켓트 몇 개가 하늘을 향하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사일 발사대를 지지하고 있는 커다란 콘크리트 받침대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다수의 지휘대와 지지구조물, 줄지어 늘어선 연료 트럭과 탱크, 그리고 수백 미터에 달하는 굵은 케이블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거대한 장비가 일단 들어서면 땅위에 선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면 그것은 치켜든 엄지손가락처럼 한눈에 들어온다.게다가 쿠바의 기후 때문에 숲은 병사나 무기를 숨기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쿠바에 울창한 숲이란 드물었다. 기껏해야 야자수 몇 그루가 서있는 정도였다. 아니면 얕은 키의 풀이 우거져 그 아래는 바람도 잘 통하지 않을뿐더러 덥고 습해서 견디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그래서
더운 낮에 숲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한다는 것은 한심한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습기를 머금은 스펀지처럼 사람을 지치게 하고 장비를 녹슬게 했다. 게다가 섬 동부의 숲은 독이 있는 고무나무가 많았다. 그냥 스치기만 해도 피부에 물집이 생겼다.
Allison, Graham T., Zelikow, Philip D.,
Essence of Decision: Explaining the Cuban Missile Crisis (2nd Ed.), New York:Longman, 1999
(김태현 역,
『결정의 엣센스』, 모음북스, 2005, pp.268-269)
이 결과 쿠바의 소련 미사일을 처음 발견한 미국 지도부는 소련군이 미사일을 전혀 위장하지 않은데 놀라, 소련이 미국에게
미사일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토론해야 할 지경이었다. 물론 소련 지도부에게 그런 의도가 있을 턱이 없었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흐루쇼프와 KGB 간에 존재한
비정상적인 업무분담은 쿠바 미사일 위기시에 소련에 참담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흐루쇼프 본인의 몰락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3. 지금 평양청와대에서는…(이 절의 제목은 옛 드라마의 제목에서 차용해 온 것으로 그 이상의 깊은 의미는 없음을 밝혀둔다.)일전에도
비슷한 언급을 한 적이 있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문제점 중 하나는 이명박 행정부의 내적 논리는 아주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마치
냉전시대 소련이나 중공 지도부를 관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하에서는 몇 가지 단편적인 뉴스를 갖고 그 내면을 추측해 보는 시도를 해보기로 한다.
여권 관계자는 "쇠고기 협상 직후 관계장관 회의에서 '광우병에 대한 선전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청와대 정무라인과 해당 정부 부처 모두 흘려 넘겨 버렸다"고 했다. 민정수석실은 쇠고기 대책회의에서 "어제 촛불집회가 열렸고 1만 명이 참석했다"고 보고했다가 혼쭐이 났다. 이 대통령은
"신문만 봐도 나오는 걸 왜 보고하느냐.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배성규,
"촛불집회 몇 명 참석" 하나마나한 보고, 조선일보, 2008년 5월 31일
이 기사는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진영을 대표하는 신문에 게재된 것이기도 하거니와, 대통령의 잘못을 겨냥한 것도 아니다. 기사의 초점은 청와대 비서진이 대통령을 잘 보필하지 못했다는데 맞춰져 있기에, 대통령에게 날아들 비난을 분산시키는 면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발언을 일종의
색깔론이라고 받아들이고 크게 화를 냈다. 그들이 이 문제를 그렇게 받아들인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분노는 이 기사가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대통령이
벌써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즉 이명박 대통령은 이 회의가 열리던 시점에 이미
1)배후주도세력이 있으며, 2)1만 명 분의 촛불도 누군가 돈을 대어 산 것이라는 판단을 내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민정수석이 그러한 보고를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민정수석이 이전에 주도세력과 자금출처에 대한 정보판단을 완료해 보고한 적이 있다면 저렇게까지 화를 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배후세력이 있다는 것은 이명박의 마음 속에서는 이미 확실한 사실인데, 그런 간단한 것도 제대로 캐내어 보고하질 못하니 열불이 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배후세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설로는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대규모 시위 관련 문제이므로 경찰이나 국정원 등을 통한 정보보고도 좋고, 국내정치문제로 보아 청와대 민정수석실이나 여당 등을 통해 입수되는 민심동향이나 정세분석도 좋다. 거대한 대한민국 정부에게 가용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 취합한 다음, 그를 보좌하는 장관들과 청와대 비서진들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공정한 추론을 통해 가설이 사실이 아닌지 분석하고 판단해 나간 결과가 "배후세력이 있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설령 틀리더라도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고는 인정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는
NSC의 행정위원회(ExComm)에 행정부와 백악관의 최고의 두뇌들, 심지어는 전직 노관료들까지 불러들여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며 다각도로 머리를 짜낸 끝에 이 난제를 성공적으로 풀어냈다. 이 과정은 세부적으로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오늘날도 위기시 정부 의사결정과정의 모범사례로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가 위 조선일보 기사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명박이 케네디가 아니라 흐루쇼프의 길을 걷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즉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흐루쇼프가 스스로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위한 정보분석관 행세를 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자신의 산하에 있는 엄청난 조직과 인력을 한 켠으로 밀쳐놓은 채
이명박도 대한민국 대통령을 위한 나홀로 아마추어 정보분석관 노릇을 시작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명박이 민정수석에게 날린 호통은 '촛불시위에는 배후세력이 있고, 자금도 공급되고 있다'는 판단은 이미 내가 내렸으니까,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 판단을 보강하는 세부사항을 찾아오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부하들로부터
머리를 빌리기보다는 손발만 빌리려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점은 흐루쇼프가 KGB에게 정보판단을 맡기지 않고 첩보수집과 기만공작같은 보조업무만 맡겼던 것과 아주 흡사한 행동방식이라고 하겠다.
정책과 현안을 토론해서 결정해 나가는 정상적인
정책검토과정(policy process)이 붕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문제이다.
다른 수석비서관들도 디테일을 중시하는 이 대통령의 취향에 맞추느라 큰 그림보다는 구체적 내용과 수치를 챙기는 데 치중하면서 '과장급 수석'이라는 호칭이 생겼다. 청와대 핵심인사는 "현안 논의 때 대통령과 류 실장 외에 입을 여는 수석이 별로 없다. '노(No)'라고 직언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청와대 내부의 소통부재도 심각하다. 핵심 관계자는 "정작 중요한 얘기는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하지 않고, 따로 나가서 한다"고 했다. 청와대가 대통령 중심의 방사형 체제로 운영하다 보니, 정보공유보다는 단독플레이를 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쇠고기 협상이 타결될 때 외교안보·경제 수석실 외에는 그 내용을 몰랐다고 한다.
배성규, 같은 기사
우리는 사태의 성격과 전후사정을 이해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일을 근사하게 해치우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즉
판단력을 경시하고 실천력에만 초점을 맞추는 유형의 대통령이 불러일으키는 문제들을 익히 보아온 바 있는데, 이 문제는 이제 남 이야기가 아니라 발등의 불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러니 우리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 그의 정부 운영 스타일을 조금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하지만 2003년 여름 무렵,
백악관 내부에서 정책이 검토되거나 혹은 검토되지 않는 방식은 곧 조지 W. 부시의 지도 스타일의 연장임이 분명해졌다. … 각 사안들은 부장관이나 장관 선에서 대개는 아주 시끄럽게 논의되곤 했지만
그 과정 전체가 대통령에게까지 올라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였고, 혹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부시는 스스로 자신의 ‘본능’이나 ‘육감’이라고 들먹이는 것에 근거해
이미 결심을 굳힌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중에 아미티지와 파월이 집무실을 나온 후, 아미티지가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그것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콘디든 누구든 망가뜨리고 자시고 할 정책 과정 같은 건 전혀 없었네.
애초부터 정책 과정 같은 건 없었다니까. 무슨 이유에서건 부시는 그런 걸 원치 않는 거야. 정책 과정이 시작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대통령이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든 다양한 이유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지 부시가 자신의 확신에 찬 믿음에서, 특히 9·11 테러를 겪고 난 후 그를 힘들게 하는 복잡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그러한 확신에 대한 의지를 보호해야 할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동시에, 이것은 어떤 면에서 부시에게 엄청나게 유리한 방식이기도 했다. …
상세한 심리를 사전에 차단하거나 무시해버리고 즉각 실행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신속한 결정이 가능해짐으로써 집행 속도를 보다 빠르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실행의 ‘이유’보다는 실행의 ‘방법’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
하지만 보다 전통적이고 보다 투명한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즉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재하는 정책 과정에 대한 욕구의 표명은 불충의 비난을 자초하는 것이 되었다. 각료급 관리 밑에 있는 각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제공하는 도움이 대통령에게서 그리 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2003년 이후로 계속해서 정부를 떠나기 시작했다.
Suskind, Ron.,
The One Percent Doctrine: Deep Inside America's Pursuit of Its Enemies Since 9/11, Simon & Schuster, 2006
(박범수 역, 『
1퍼센트 독트린』, 알마, 2007, pp.371-374)
상당히 통하는 데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4. 분석 패러다임, 또는 합리적 행위자의사결정 이론 분야에서 예나 제나 지배적인 권위를 가진 이론이 있는데, 이것을 흔히 합리적 행위자 모델(Rational Actor Model)이라고 부른다. 다만 “합리적”이라는 단어 때문에 해결난망한 논쟁에 빠지기 쉬운 관계로, 이 글에서는 이것을 이 이론의 다른 이름 중 하나인
「분석 패러다임」(analytic paradigm)이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분석 패러다임은 사람들이 널리 품고 있는, 전형적인 의사결정자의 모습, 즉
의사결정자란 선택 가능한 보기들 가운데 의도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궁리해 선택하는 주도면밀한 평가자라는 생각을 이론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사례로는 수익을 극대화하려고 늘 노력하고 있는 사업가라든가, 권력의 유지 강화에 혈안이 된 냉혹한 독재자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복잡한 현실세계가 주는 제약 하에서 대부분의 의사결정이 추구하는 목표는 서로 상충된다. 의사결정자가 이러한 여러 목표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절충해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분석 패러다임의 정수이다.
물론 현실세계에서 의사결정자들은 어떠한 선택이 가져올 잠재적인 결과에 상당한 불확실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예측했던 결과가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조차 예측하는 데 어려움을 겪곤 한다. 하지만 분석 패러다임은 의사결정자가 이 사실도 이미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다고 가정한다. 의사결정자는 일련의 사건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며, 일어난 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흐르지도 않을 것임을 안다.
무엇보다도 분석패러다임을 구사하는 의사결정자는 새로운 정보가 입수될 때마다 기존의 검토결과들을 제때 갱신하려고 노력함으로서, 과거 자신이 내렸던 결정이 낡고 틀린 것이 되지 않도록 부단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존재로 가정된다.
정리해보자면 분석 패러다임은 주어진 객관적 상황 하에서, 개인 혹은 조직은 주어진 목표달성을 극대화하는 의사결정을 내린다고 가정한다.
어떤 의사결정문제가 있을 경우 분석 패러다임은 일련의 대안을 상정해 각각이 가져올 잠재적 결과들을 고려한 후, 의사결정의 본질적 과정의 일부로 관련된 목표들을 통합하게 된다. 이러한 통합 과정 중에 판단의 근거가 될 정보들을 수집해 평가에 반영하는 과정이 포함되며, 끝내는 의사결정자의 여러 목표들에 대한 종합적 관점에서 볼 때 이해득실을 따져 가장 큰 이익을 줄 것처럼 생각되는 대안을 선택하게 된다.
5. 분석 패러다임의 응용과 제언위와 같이 정리해 놓으면 다음과 같은 점이 분명해진다. 일반적인 정책결정자, 즉 분석 패러다임을 구사하는 정책결정자가 의사결정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음 네 과정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1) 판단의 근거가 될 정보의 수집과 평가
(2) 일련의 합당한 대안의 상정
(3) 잠재적 결과의 객관적 평가
(4) 목표의 적절한 절충
오만가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통령이 이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해 의사결정을 마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앞서 말한
정책검토과정(policy process)이다. 정책검토과정이 마비되어 있다는 것은 대통령이 일개 범부나 다름없이 일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내용으로 보건대, 이러한 정책검토과정의 마비는 정책검토는 주로 혼자서 하고 오직 집행을 시키기 위한 도구로 청와대의 비서진과 내각의 장관들을 봄에 따라
대통령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개별 정책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에 비판하기로 하면 끝이 없다. 사실 다른 대통령에게도 그만큼의 비판을 퍼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만 좀 고쳐주었으면 하는 게 있다면
결심을 좀 늦추라는 것이다.
최종적인 정책결정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고 아무도 뺏을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결심부터 하고 임하지는 않아야 정상적인 정책검토과정이 굴러갈 수 있다. 선입견을 되도록 품지 않은 상태에서 널리 의견을 듣고 부하들을 토론시킨 후, 회의가 끝날 때쯤 결심을 내려도 결코 늦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이명박이 이런 식으로 물었어야 한다.
"
어디 그 이야길 좀 더 해 봐. 난 잘 모르겠는데 촛불시위라는게 끊이지 않는다는데 왜 그러는 것 같아?"
이런 질문은 대통령이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았으며, 아랫 사람의 폭넓은 의견을 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정수석의 보고가 끝나면 외의 다른 참석자들에게도 각자가 보는 자초지종에 대한 의견을 폭넓게 묻고 토론시킴으로서, 선입견을 되도록 걸러내고 전후관계를 포함한 큰 흐름을 놓치지 않으며, 분석의 틀과 근거를 더욱 탄탄히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이명박 자신의
상황인식을 개선해주기 위해 필수적인 조치이다. 대통령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이 대통령 자신에게 꼭 필요한 대답은 아니지 않겠는가.
또한 이명박은 개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매우 좁은 인재풀에서만 사람을 쓰는 경향이 있다는 평이 많은데, 이런 인적 구성 하에서는
다같이 한 방향을 향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분위기나 사회적 압력이 쉽게 형성되며, 자연히 비판이나 반론이 침묵하게 된다. 거기에 토론보다는 일사분란한 정책집행에 더 관심이 많은 보스를 두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이에 대한 최선의 대안은 장기적으로 인적 구성을 다변화하고 자연스럽게 토론을 활성화하는 것이겠지만, 제도적인 해법으로는 「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이 추천할만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시위대이건 야당이건 반대파의 시각을 회의석상에 내놓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토론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