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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만과 꿀라끄 처리 논쟁에 비추어본 친일청산
넵만과 꿀라끄에 대한 이야길 간단히 써 보겠다고 했으니 정리해 보도록 하지요.

소련 초기는 경제정책의 대전환을 중심으로 보면 전시공산주의, 신경제정책(NEP), 5개년계획의 시작 이런 단계로 넘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NEP 말기에 NEP를 계속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갖고 소련 내부에서 아주 중요한 정책논쟁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제가 이번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참고가 된다고 보는 부분입니다.


전시공산주의(1918년 중반~1921년 중반)

이 시기는 기본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입니다. 독일에게 막대한 양보를 하고 간신히 휴전조약을 맺고 나자 대규모 내전이 터지고 서방 연합국들도 간섭에 나섬으로서 신생 볼셰비키 정권은 큰 위기에 빠집니다. 이들은 정권을 잡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기회가 오자 덥석 정권을 장악한 것이라 많은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혁명 직후에 볼셰비키들은 생디칼리즘적 성향을 많이 보입니다. 말하자면 군대나 직장에서 봉기를 일으켜 장교와 경영자들을 몰아낸 후, 병사 위원회나 노동자 위원회를 만들고 선거로 지휘부를 뽑아 운영하자는 것이지요. 이 방식은 일단 볼셰비키에 반하는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널리 선전됩니다.

그러나 레닌은 곧 이 방식으로는 일이 잘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게다가 평시면 또 모르겠는데 적백내전이 한창인 중에는 물자동원의 필요성이 절대적이었던 거지요. 결국 레닌은 규율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닥치고 위에서 임명한 책임자에게 절대복종하란 겁니다.

부하린, 라데크, 오볼렌스키 등 볼셰비키 좌파들은 이와 같은 레닌의 결정에 반발합니다. 그들은 레닌이 상명하복의 규율 뿐 아니라 물질적 동기나 성과급 지급, 부르즈와 전문가들을 후한 조건으로 고용하도록 할 것 등을 강조한데 대해서 분노하면서 레닌이 국가자본주의로 선회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얼굴 두꺼운 레닌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받아치는데, 이 때 등장한 말이 저 유명한 「좌익소아병」입니다. 현 상황이 어떤지 뭣도 모르면서 얼라들처럼 칭얼댄다는 거지요. 이에 열불난 레닌의 추종자들도 레닌이 과거에 했던 말들을 쓸어 모아 반격합니다. 『국가와 혁명』에서는 노동자보다 전문가가 봉급을 더 많이 받아서는 안 된다고 쓰지 않았나? 노동자통제를 찬양하지 않았나? 이걸로 노동자들을 이해시킬 수가 없다 등등. 그러나 역시 레닌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식량이 너무 부족해서 군대와 도시가 굶어죽을 지경이고, 농민들이 식량을 팔지 않으려 하자 ‘식량독재’라고 불린 최후의 수단이 등장합니다. 노동자부대와 경찰을 투입해 꿀라끄(부농)들이 숨겨놓은 식량을 몰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빈농들을 부추겨 부유한 이웃들을 터는데 동참하게 유도합니다. 그리하여 곡물몰수는 농촌에서의 계급전쟁과 병행해 진행됩니다. 물론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수많은 민란을 일으켜 맞섭니다.

또한 이 시기는 미친 듯이 화폐를 찍어낸 결과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나 곧 화폐경제가 마비됩니다. 노동자들은 현물로 급여를 받았고, 기업과 기업들도 대금결제를 생산물을 서로 주고받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볼셰비키 중 일부는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악을 상징하는 화폐를 폐지할 기회가 절로 찾아온 것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이 시기의 주요한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적 제조업을 금지하려는 시도. 거의 모든 공업의 국유화. 국가가 모든 생산물을 전쟁 목적으로 배정
(2) 효과는 없었으나 종종 실시된 사적 상거래 금지
(3) 농민이 보유한 잉여농산물 압수
(4) 국가가 부분적으로 화폐를 폐지. 배급할 것이 있으면 무료배급
(5) 이 모든 요소들을 테러와 몰수, 징발 등으로 굴러가게 만들려는 노력

이 시기에 엄청난 혼란 속에서 공업생산량은 전쟁 이전의 30% 수준에 턱걸이하고, 농업생산량도 추락합니다. 백군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되자 이번에는 사방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크론슈타트에서는 수병들이 봉기를 일으킵니다.

1921년 2월, 이에 레닌은 중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체제의 생존을 위해 노선전환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신경제정책(NEP)

1921년 3월, 제10차 당대회 회기 중에 강제적인 식량징발을 보다 온건한 식량세로 바꾸기로 합니다. 현물로 부과되는 식량세는 전년도의 징발목표의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로 크게 낮춰집니다. 이에 따라 세금만 내고 나면 농민들은 나머지 생산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며, 시장에 나가 팔수도 있게 됩니다.
일단 이런 식으로 사적 상거래가 허용되자 자유로운 물품교환의 욕구는 너무 필사적이라 눈덩이처럼 부풀어 거의 모든 분야로 확대됩니다. 사적 상인들이 출현하고 유통망도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당이 변화의 필요를 인정했을 때는, 후퇴의 정도가 징발을 상품교환으로 바꾸는 정도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시작했었지만 결코 거기서 끝나진 않았던 것이지요. 레닌은 1921년 10월의 연설에서 이 생각이 오류이며 환상이라고 솔직히 인정합니다. 유일한 길은 상거래이며, 국가와 당은 거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고. 당 내에서는 여전히 반발이 있었지만 레닌은 유창한 변설로 이를 제압합니다.

기업 측면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일단 국영화된 많은 중소기업들이 민간에게 현물 혹은 현금을 받고 임대됩니다.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수공업 생산을 수행할 수 있고 (10~20인 이하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소규모 공업체를 설립할 수 있다’란 인가도 떨어집니다. 이 조치에 따라 사적 기업이 급속히 늘어나는데, 수만 개의 영세기업은 제외하더라도, 1923년 10월이 되면 10인 이상을 고용하는 이런 임대기업이 5,700개에 이르고, 1925년에는 200~1000명을 고용하는 보다 큰 기업도 수십 개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신경제정책은 일반적으로 NEP라고 불렸으며, 이 정책 아래서 부유해진 ‘개인 영리자’는 ‘넵만(nepma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집니다.

넵만들은 서툰 공산당 관리자들보다 기민해서 더 후한 값을 치르고 원료를 확보한다든가 하는 융통성을 발휘해 시장을 리드해 나갑니다. 국영기업들도 이런 경쟁에 노출되면서 경영에 어느 정도 개선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상업 부문에서는 1923년이 되자 모든 소매거래의 75%를 개인이 장악합니다. 또 다른 통계를 볼 것 같으면 1922년 모스크바의 경우 넵만은 순도매거래의 14%, 도소매 혼합거래의 50%, 소매의 83%를 통제한 반면, 협동조합은 10%, 국가는 7%에 불과했습니다. 단 1년만의 결과로서는 엄청난 것이지요.

당연히 이런 생산과 상업거래를 지원할 수 있는 안정된 화폐의 도입도 요구되었고 자본주의의 사악한 색종이를 폐지하자는 구호는 쑥 들어갑니다.

심지어 레닌은 외국 자본가를 불러들여 특권을 주어 유전이나 삼림벌채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까지 세웁니다. 외국 자본가들은 신중해서 거친 볼셰비키가 언제 공장을 압수할지 모른다고 생각해 투자를 거의 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한편 1924~25년간의 수출은 21~22년의 9배에 이르고, 농업생산량은 처음으로 1차대전 이전의 수준에 근접합니다.

농업 문제는 매우 복잡한데, 농민은 볼셰비키 체제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 그들은 지주의 땅을 빼앗아 나눠 가졌기 때문에 백군 같은 지주세력이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반면 현 볼셰비키 체제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한 전력을 갖고 있었지요. 더 큰 문제는 농민은 한 치라도 더 많은 땅을 가지길 원하고, 암소나 돼지도 가질 수 있기를 무척 바라고 있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부자가 되고 싶었던 거지요. 문제는 그렇게 되면 그는 저 무시무시한 계급의 적, 인민의 흡혈귀 꿀라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꿀라끄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만 일하면, 농업생산이 증가될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진짜 딜레마 중 하나였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공업화를 위해서는 도시를 먹여 살릴 잉여농산물이 필요한데, 빈농은 자기 한 가족 추스르기도 힘겨운 존재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잉여농산물은 중농 이상, 그리고 주로 부농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NEP기에는 농업생산을 되살리기 위해 꿀라끄들에게도 전례 없이 온건한 정책이 취해지게 됩니다.


대논쟁

1925년에 이르면 NEP가 성공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확실해졌지만, 그와 함께 중대한 문제가 같이 떠오릅니다. NEP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볼셰비키의 대의에서 벗어나는 길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볼셰비키들의 전형적인 생각을 살펴봅시다.

피르소프(1923)
“… 불가피하게 NEP, 곧 사회주의를 향한 우리의 움직임의 첫 단계가 나타났습니다. NEP는 우리에게 혐오스럽고 불쾌할지도 모르지만, 불가피한 것이죠. 그것은 양보이며 우리의 이상에서 한 발 후퇴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과거로부터 후퇴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이죠.”

라린(1925)
“그(부하린)는 우리에게 결코, 즉 15년 내지 20년 안에는 꿀라끄와 반(半) 지주들 및 상층 부르주아 계급을 몰수하거나 착취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약속을 할 수 없습니다. … 우리는 때가 되면 대규모 사적 기업들을 몰수하고 착취할 것입니다.”


이 당시 볼셰비키들 사이에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었습니다.

우선 볼셰비키 우파의 좌장 격으로 부하린이 있습니다. 그는 NEP는 최소 한 세대 이상 계속되어야 하며, 농민들에게 완력을 쓴다는 것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 정치적으로야 빈농을 지지하는 게 옳을지 몰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잉여농산물은 중농과 부농에게서 나오며 결코 이들을 적대시해선 안 된다. 농민이 부유해지고 성숙해지면 사회주의에 부합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내겁니다.
“모두 부자가 되자.”

다음엔 볼셰비키 좌파가 있는데 여기엔 트로츠키와 프레오브라줸스키 등이 있습니다. 프레오브라줸스키는 소련은 착취할 식민지도 없고 농민을 수탈할 수도 없지만, 공업화를 위해 필수적인 사회주의적 축적이 어디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제일 만만한 NEP의 핵심인 사적 거래 부문을 착취해서 이런 자본을 만들고 더 빠른 공업화를 진행하자고 주장합니다. 또한 우파가 꿀라끄들에게 너무 너그럽다면서 이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의 주류는 NEP의 전제에 머물러 있어서, 심정적으로는 좌파를 지지하지만 일단은 우파의 편을 드는 경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스탈린이 있는데, 스탈린은 일단 우파인 부하린과 손잡고 트로츠키와 좌파를 쓸어버린 다음, 좌파의 논리로 무장해서 부하린을 박살냅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반대자가 사라지자 최고의 강도로, 볼셰비키 좌익 반대파가 주장하던 것보다도 몇 배 더 무시무시하게 농촌을 전력으로 공격해서 약탈하고 집단화를 강행한 후, 그 결과물을 갖고 전쟁준비에 적합한 중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게 됩니다. 스탈린의 농업집단화와 중공업 올인 정책은 무시무시한 희생을 낳았지만,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함에 따라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내용을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 역사의 요약은 이 정도로 하고 앞선 토론과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가지요.

제가 앞선 논쟁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 점은 근래 친일을 아주 넓게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친일을 좁게 정의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글 말미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 “일제 하 기득권층에게 기득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지금까지도 외양을 달리하면서 계속 기득권층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하는 아주 큰 원인”
* “이승만 정권이 부농과 사업자로 이루어진 친일 세력의 지지로 성립”
* 좀 심하게 가면 “제국주의 일본에 협력했던 사람들, 그들과 유사한 사고체계, 즉 제국주의 일본의 정책 방향에 동조하고 협력하는 정권을 … 그 이후 지금까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제외하곤 모든 정권의 기본적인 방향성이 (인적구성의 다수와는 무관하게) 결국엔 일제국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 같은 주장도 나오게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너무 심한 과장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견해들은 “친일파의 후손들이 현재의 한국사회 기득권층을 차지하고 있다”라는 인식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가져오는 감정적 결과는 다음 논평이 아주 잘 보여줍니다.

문제는 결국 친일행각을 속죄했다기 보다는 삼대가 잘먹고 잘살아 오고 있는 꺼삐딴 리의 무리들에 대한 대중의 증오 아니겠습니까. 증오를 발산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 그토록이나 인색했는데도 이만큼 잘 버텨온 지배층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얀까마귀)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앞서 설명한 대논쟁이 친일청산에 대한 논쟁의 일반형태를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NEP를 계속할 것인가 말까를 놓고 1920년대 중반에 볼셰비키들이 벌인 대논쟁은 기본적으로 이념적 대의와 현실이익 사이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념적인 측면에서 볼 때 NEP같은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서 넵만(사적기업인)과 꿀라끄(부농)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낳은 것은 그들이 꿈꾸어 왔던 대의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주제로 바꾼다면 ‘舊친일파들을 활용해서 국가건설이나 경제성장에 이용한 결과 그들이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게 된다면 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이 되겠는가’ 쯤 되겠군요.

이들 볼셰비키들은 기본적으로 대의에 상당히 충실한 사람들입니다만, 그들이 NEP로 가게 된 이유는 앞서 본 것처럼 전적으로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였습니다. NEP기의 성적이 그처럼 좋아 보이는 것은 그 앞 시기가 워낙 나빴기 때문인 점도 있지요.

그러나 일단 NEP가 예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자 볼셰비키 내부의 의견은 둘로 갈라집니다. 전시공산주의 시절, 좌파였던 부하린이 방향을 뒤집어 우파의 좌장으로 등장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지요. 반면 다른 볼셰비키들은 부하린이 말하듯이 최소 한 세대 이상 NEP를 밀어주자는 주장은 ‘당이 NEP 부르즈와지의 부속물’로 변하게 되는 길이라고 느낍니다. 이 말은 일리가 있는데, 당의 대의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유형의 지도자인 덩샤오핑이 비슷한 노선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간 결과가 공산당이 지배하긴 해도 실제로는 천박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린 현재의 중국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볼셰비키들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는 것이겠지요.

부하린은 ‘정치적으로야 빈농을 지지하는 게 옳을지 몰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잉여농산물은 중농과 부농에게서 나오며 결코 이들을 적대시해선 안 된다’라고 지적했지요. 이 말은 지금 논의에 나오는 단어로 바꾸면 ‘정치적으로야 다 처벌하는 게 옳을지 몰라도 자본과 기술, 행정경험은 舊친일파에서 나오며 결코 이들을 적대시해선 안 된다’쯤 될 겁니다. 그러니 볼셰비키들에게 이 말이 얼마나 불쾌하게 들렸는지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최소 한 세대 이상 NEP를 밀어주자는 주장을 ‘당이 NEP 부르즈와지의 부속물’로 변하게 되는 길이라고 받아들인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것은 이승만이 친일청산을 포기한 결과 이후의 여러 정부들이 모두 기본적으로 舊친일파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정부다라는 관념과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전시공산주의 시기에 규율을 강화한다거나, NEP로 넘어간다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고 당의 방향이 “노선에서 이탈해 우경화”하는데 반대하는 당내 좌파들의 반발을 언제든지 찍어 누를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레닌의 역할도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이는 거물급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이 드높은 이승만이 왜 舊친일파를 상대적으로 쉽게 덮어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저의 설명이기도 합니다. 김성수나 송진우 같은 친일경력 시비에 휘말리기 쉬운 인물들은 아마 이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폭넓게 정의된 친일파™에서 친일파란 당대의 유산계급 전체에 가깝습니다. 앞선 글의 코멘트에서 뽑아 온 다음 문장들은 그런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 “일제 하 기득권층에게 기득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지금까지도 외양을 달리하면서 계속 기득권층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하는”
여기서 ‘일제 하 기득권층’은 친일파와, ‘외양을 달리 한…기득권층’은 친일파 후손과 별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일제 하 기득권층이라 해도 여기에는 적극적 친일파, 소극적 방조자들에서 국내파 민족지도자들까지 폭넓은 사람들이 들어 있겠지만 말입니다.

* “이승만 정권이 부농과 사업자로 이루어진 친일 세력의 지지로 성립”
부농과 사업자, 바로 꿀라끄와 넵만이죠. 이런 지칭은 부농과 사업자중에도 친일파가 있다기 보다는 이들이 전반적으로 친일 [기득권 유산] 계급을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친일파를 넓게 잡게 되면 일단 청산대상의 숫자가 굉장히 커질 뿐만 아니라 친일청산이 곧 계급투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폭넓은 친일청산은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 신생독립 후진국에게는 쓸만한 인재가 거의 남지 않게 된다는 문제를 남길 수밖에 없지요.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꽤 잘 살지 않는 이상 고등교육을 받거나 외국 유학이라도 다녀올 정도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총독부 산하의 하급관리나 하급교원 같은 것을 하고 있으면 더더욱 친일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볼셰비키에게 꿀라끄와 넵만을 일소한다는 것은 똑같은 문제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들은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아도 계층집단 중 소련에서 가장 생산성이 뛰어난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일까요?
부하린처럼 그냥 쓸모있으니까 활용할까요, 아니면 프레오브라줸스키처럼 쥐어짜서 악의 대가를 치르게 할까요. 이도 저도 아니면 그 중간의 어디 적당한 절충점을 찾을까요?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 소련의 역사를 보면 교묘한 정략으로 반대파를 일소한 스탈린은 그다운 우악스러운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우선 단 7주 만에 전 농민의 절반을 집단화합니다. 이때 꿀라끄와 뽀드(準)꿀라끄들은 집단화에 끼워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거 시베리아로 추방됩니다.

스탈린이 왜 이렇게 폭압적인 조치를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레빈의 설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단순히 꿀라끄들의 재산을 뺏아 중농과 빈농에게 분배할 경우, 조금 지나면 그중 제일 잘 사는 자가 꿀라끄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1등을 죽이면 2등이 1등이 되고, 다시 그를 죽이면 3등이 1등이 될거라는 거지요. 그러니 눈앞에서 꿀라끄들을 비참하게 다루어 군기를 잡은 후, 나머지는 한 방에 꼴호스(협동농장)에 몰아넣어 더이상 개인농이 될 수 없게 못을 박으면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점을 시사합니다. 일단 넓게 정의된 친일파™란 개념을 채용해 무찌르자 친일파를 추구하고 나면, 처음에 소수의 친일파만 처벌하더라도 곧 차상위 계층이 청산대상으로 부각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개념적으로는 그들도 친일파이긴 마찬가지기 때문에 일단 최상위가 제거되고 나면 그들이 다시 친일파의 수괴들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탈린의 경우에는 당과 정부, 군대가 모두 볼셰비키화 되어 있고, 꿀라끄나 넵만과 관계가 적었기 때문에 그나마 이런 행동을 집행할 물리적 수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군정에서 물려받은 정부는 경찰, 관료 모두 일제시대와 많은 연속성이 있었고 군대도 그다지 믿을만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럼 오직 한 가지 대안이 남을 뿐입니다.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가 있고, 명분이 좋으니 대중동원운동을 일으켜 기성관료조직을 밖에서 두들기는 것이지요. 바로 마오쩌둥이 난동을 부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造反有理)라는 구호를 앞세워 써먹은 방법입니다. “삼대가 잘먹고 잘살아 오고 있는 꺼삐딴 리의 무리들에 대한 대중의 증오” 같은 것을 해소하는데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만, 한번 발동을 걸면 통제가 지독하게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가면 좀 심한 비유가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넓게 정의된 친일파™란 개념을 진심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도달하게 될 논리적 귀결이기도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요즘 대중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넓게 정의된 친일파™란 개념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1) 규정 자체도 적절치 않고
2) 집행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며
3) 억지로 집행하려면 사회를 완전 뒤흔들어 놓아야 하는데
4) 그 결과 신생국가건설을 위해 필요한 희소한 자원을 왕창 잃어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념으로 친일파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한 마디로 큰 실수입니다. 하지만 실용적으로 친일파를 충분히 좁게 정의할 경우 “친일파의 후손들이 현재의 한국사회 기득권층을 차지하고 있다”는 인식은 성립하기 힘들어지게 됩니다. 잘 해 보아야 “현재의 한국사회 기득권층 일각에는 친일파의 후손들도 소수 끼어 있다”가 한계겠지요.

요즘 큰 사회문제로 지적되는 것 중 하나가 최근 들어 계층간 이동이 과거보다 훨씬 힘들어져서 계층분화가 고착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입니다. 이 말은 뒤집어보면 과거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는 계층간 이동이 지금보다 훨씬 쉬웠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또한 한국전쟁의 사회적 의의 중 하나로 널리 꼽히는 것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던 구체제 질서를 치명적으로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계층간 이동을 쉽게 한 중요한 요인입니다.
이렇게 보면 상대적으로 계층간 이동이 쉬운 시대를 지나 왔는데도 친일파의 후손이 의연히 기득권층을 장악하고 있다는 인식은 그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반민특위와 좁게 정의된 친일파

이제 끝으로 앞선 글의 토론 도중에 떠오른 좁게 정의된 친일파™라는 다른 부류에 대한 이야길 해보겠습니다. 이 논의는 앞서 언급한 넓게 정의된 친일파™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논의는 기본적으로 반민특위 문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즉 반민특위는 제한된 기간에 아주 악질적인 소수의 친일파들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 때 반민특위의 활동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오늘날 같은 친일논쟁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가설입니다.

또한 이 논의는 문제가 되는 친일파의 성격도 많이 달라집니다.
앞선 넓은 정의에서 친일파란 결국 ‘나쁜 놈들이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이 문제인지라 주 표적은 [물려받거나 여러 가지 기득권의 이점으로 쌓은] 재산이 됩니다. “친일파 후손 누가 몇 십 억짜리 땅을…” 뭐 이런 식이 많은 거지요. 반대로 친일파 후손 누가 망해서 가난하게 산다 그러면 아마 “거 봐라 꼴좋다”하고 넘어가겠지요.

반대로 좁은 정의는 주 표적이 독립운동을 탄압한 경찰에 걸립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덕술 같은 사람입니다. 이승만은 정권안보를 위해 경찰을 잡아들이는 문제에는 매우 민감하게 대응해 반민특위와 충돌하게 되는데, 이런 것이 문제라는 거지요. 이들은 경찰, 군인, 관리이긴 해도 자산가는 아닌지라 앞서 말한 재산문제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후손이 재산이 있다고 쳐도 그게 일제시대에 치부한 것의 결과가 아니라면 뺏을 명분이 마땅치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선 글에 달린 코멘트에 답하면서 몇 차례 언급한 것처럼, 반민특위가 악질적인 소수의 친일파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임무를 완료할 수 있다면 그렇게 했어야[이승만이 방해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세 가지 정도 덧붙이기로 하지요.
우선 저는 반민특위가 성공적이었어도 친일청산 문제는 여전히 계속 나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제한적인 결과를 낸 조사활동이 끝나면 늘 불만을 갖고 재조사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즉 반민특위가 성공적이었다면 그것이 친일청산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되었을지 아니면 더 본격적인 조사를 촉구하는 도화선이 되었을지 그런 것은 알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1949년은 이승만 정부의 반공경찰과 남로당이 서로의 뒤통수를 치기위해 기를 쓰고 있던 전반적으로 치안이 불안한 시기입니다. 그 전해 10월에는 여순반란이, 그 다음 해에는 한국전쟁이 터지지요. 즉 이승만 정부의 정권안보가 무너졌을 경우, 다음 대한민국 정부가 생겨날 수나 있을지 예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즉 이승만이 정권안보를 위해 친일경찰을 재활용했다고 하면 그냥 권력욕의 결과이고 단순한 비난의 대상이지만, 이승만 정권이 주저앉고 나서 곧 대한민국이 소멸해 버릴 가능성이 적지 않게 있다면 이건 그렇게 간단히 말할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반민특위는 부적절했다든가 이런 것은 아니고, 짧게 한 번은 했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승만 측도 무작정 사보타주만 하는 대신 법안 제정 과정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해 경찰 문제는 뒤로 미루는 정치적 타협을 하고 나머지 부분을 먼저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정치력을 발휘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이 그런 훌륭한 의회주의적 리더십의 소유자인지는 의문이지만 말입니다.
by sonnet | 2008/08/18 22:37 | flame! | 트랙백(1) | 핑백(2) | 덧글(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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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60년대 경제 성장의 원인들 (2)
60년대 경제 성장의 원인들 (2) 농지개혁의 효과 1. 서론 오늘의 글은 60년대 경제 성장의 외적 요인을 다룬 ‘60년대 경제 성장의 원인들(1) 베트남전쟁 참전의 효과 ☜’ 에 이은 ‘60년대 경제 성장의 원인들’ 시리즈의 2번 째 글입니다. 이승만 정부 시절 실시된 농지개혁이 60년대 경제 성장에 미친 영향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50년대 추......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08/08/20 10:40

... 할 경험있는 인력이 광복 후 건설한 우리나라의 생존에 일조하지 못했다고 볼 이유가 있는지 잘 생각해 볼 일입니다. 반민특위 문제를 어떻게 풀었으면 좋았을지에 대한 제 의견은 앞선 글의 말미에 적어 두었으니 궁금하신 분은 그 쪽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부기 " "친일파가 '속죄의 의미로 한국 정부에서 일한'것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하시면 곤란하지요. ... more

Linked at 파파라치님의 이글루 : Nob.. at 2009/01/25 22:29

... 선호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 더욱 요구되는 태도라고 생각되는데, 아직까지 들은 대답은 기껏해야 "한국의 엘리트는 친일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 정도인 것 같다. 그리고sonnet님의 글에서도 나와있듯, 한국의 엘리트가 뿌리를 두고 있다는 "친일파"에 대한 모호한 개념정의를 볼 때 이는 사실 명제라기보다는 가치 명제에 가깝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more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08/18 22:55
정리해주신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하고는 싶지만 원죄가 있는지라 추천은 못 하겠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8 23:01
아니, 지나간 건 됐고, 이번 글은 그냥 조용히 가지요. 주중에 오백플 대전 이런 건 좀 피곤해서요.
Commented at 2008/08/18 22:5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3:57
아 별건 아니고.
Commented by Luthien at 2008/08/18 22:55
고생 많으십낟. T-T
저번 통화때 나온 E.A 4 (...) 씨 이야기 포스팅에 사용해도 될까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8 23:01
그건 쓰고 있는 글이 있어서 좀 양보해 주시압.
Commented by maxi at 2008/08/18 23:49
흥 쟈기는 나랑 같이 전선에 뛰어들길 거부했으면서 (...)
Commented by 키치너 at 2008/08/18 22:59
이승만에게 역사적 책임을 물을 건 있지만, 그가 아닌 누구라도 불가능했을 일을 그가 실현해내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건 확실히 아니죠.
- 사실, 막장™ 식민지 청산의 사례는 아프리카에서 많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3:57
네에. 아프리카와 비교를 하면 다들 버럭하는지라 ^^
Commented by Ha-1 at 2008/08/18 23:01
능력과 청렴함(?)이 별개의 요건이며 때로는 서로를 배척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참 이해시키기가 힘들죠.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니. 결국 '얼라 이론'이 킹왕장인듯 oTL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3:58
얼라 이론으로 남을 밟으려면 우선 본인의 체급이 ;;;
Commented by 행인1 at 2008/08/18 23:07
고생 많으십니다. 그나저나 레닌 수령께서도 상당히 유연한 지도자셨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8 23:21
레닌은 원래 한 입으로 여러 말 하는 거로 유명합니다. 근데 현실정치가이고 워낙 전례가 없는 일을 벌이다 보니 어쩔 수 없어요.
Commented by impetuous at 2008/08/18 23:10
몰려오는 잡병들을 한방에 청소하시는 스딸린의 오르간 한방. 잘 읽었습니다.

이승만 박사에 관한 Gaddis씨의 흥미로운 서술이 생각나서 불초 트랙백 드렸습니다.
Commented by H-Modeler at 2008/08/19 01:11
카츄사 정도가 아니라......
.....이런걸 보고 전술핵 투발이라 하죠 아마?[...]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4:00
보내주신 트랙백 잘 보았습니다.
Commented by theadadv at 2008/08/18 23:21
그렇다면 이승만 박사가 레닌정도의 강한 지지와 권력이 있었다면, 반특이나 경찰같은 쪽의 어느정도의 조치가 가능했을까요?
Commented by 아이군 at 2008/08/18 23:31
사견입니다만, 여러가지 조건이 있어야 가능할 듯 하네요.

이를테면 이승만 박사에게 여러 패가 있었다면(이를테면 군대라든가)
경찰같은 패 중 하나를 희생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아마 안했겠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는 이승만 전대통령을 욕할 처지가 됩니다.)

하지만 그 당시 관료조직은 거의 유일한 패였고, 이승만 전대통령이 신적인(?) 지혜를 발휘해서 반민특위와 관료조직간의 협상을 성공시키길 바라는건 부질없는 노릇이죠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4:06
그런 건 가정이 여러 개 필요해서 추측해 본다고 해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paro1923 at 2008/08/18 23:24
택사마께서 쓰신 방법은 정말 대중에 영합하는 방법이었죠. 자멸적인 책략이긴 해도...
대중이 생각하는 '범위'와 실제 적용되어야 할 '잣대'의 간극이 왜 중요한지를 알았습니다.
이렇게 '차갑게'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도 재능인데, 내심 부럽습니다.
(덤으로, 이오지마에서도 꿋꿋이 버텨내고 소견을 피력하는 '담력'도... ^^;;;)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4:11
사실 이승만이 조반유리 같은 계책을 썼다면, 그건 정말 등골서늘한 겁니다. 이승만이 설마 친일파만 잡자는 순수한 마음에 그 운동을 벌일 것 같습니까? 더 큰 정치적 계산이 다 있다고 봐야죠.
Commented by 하얀까마귀 at 2008/08/18 23:34
저도 기본적으로 소넷님과 비슷한 생각입니다. 대중의 증오를 풀 건수가 있었다면... 이라는 것도 그 뜻이죠.

예컨대, 통계적으로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적나라한, 병역의무의 불공정함이라는 문제도 수시로 연예인 떡밥이나 운동선수 떡밥, 대통령 후보 떡밥 등등으로 무마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개인으로썬 희생양이 되었더라도 예술가들이나 조무라기 대일 협력자들은 인민재판에 붙였다면, 후대의 우파에 도덕적인 부담감이 훨씬 덜어졌겠지요.

쓰고나니 어쩐지 "대서양장벽을 만든 넘들은 냅두고, 대서양장벽을 잘 만들었다고 말한 넘들은 족쳤다"는 식의 프랑스 사례와 비슷해 지는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4:23
제가 볼 때는 경찰-공안 라인만 빼면 이승만은 타협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대에는 친일경찰이나 헌병에게 당한 기억이 생생해서 그런 타협이 어려웠던 게 아닌가 합니다.
Commented by Alias at 2008/08/18 23:44
리박사건 박통이건 해당인물이 빠지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았을 경우 "대한민국이 지금보다 더 잘먹고 잘살면서 동시에 역사적으로도 떳떳하고 계층간이동도 자유롭고" 하는 식의 사회가 도래했을지는 아무리 봐도 의문인데 그게 가능하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꽤" 많지요.

여러 분들께서 "역사에 가정은 없다"라는 말을 좀 더 깊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저 경구를 "그런 식의 가정을 절대로 하지 말라" 는 식의 글자 그대로의 해석보다는, "그런 식의 가정을 해서 나온 결과물을 쉽게 신뢰하지 말라" 는 해석을 더 좋아합니다. 뇌내망상이 아니란 법이 없으니까..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4:30
가상역사에 대한 사고실험은 의미는 있다고 봅니다. 그걸 전혀 안 할 경우 어떤 변인의 중요성에 대한 평가가 거의 불가능해지거든요. 물론 말씀하신 대로 늘 충분한 회의감을 갖고 접근해야겠지만요.

전 개인적으로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변수를 주의깊게 통제하고 한 번에 여러개 바꾸지 말라는 주의를 주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아이군 at 2008/08/18 23:46
.......친일파를 청산할려면 스탈린 수준이 필요한거 군요.. Oh my god

그나저나

스탈린의 장교 대숙청을 비판하는 만화를 그린 굽시니스트 님이
이것을 못깨달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인듯?

http://homa.egloos.com/3446540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4:31
아니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분이 지난번 글에 주신 지적은 매우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수백 개 중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을 만큼요.
Commented by maxi at 2008/08/18 23:50
이승만이나 스탈린이나 지 동상 졸라 크고 아름답게 만들었다가 처절하게 부숴지는걸로 끝난 놈이라 (....) 물론 이승만이 더 비참했지만요;;
Commented by Alias at 2008/08/18 23:53
사담 후세인은 동상이 부서지는 걸로 끝나지 않고 아예 본인의 목이 매달리는 걸로...ㅡㅡ;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4:31
그렇게 끝만 보면 안되죠. 임기 중에 한 일이 적지가 않은데.
Commented by 그람 at 2008/08/19 00:51
원래 공산주의가 다 같이 잘먹고 잘살자였는데 어느 순간에다 같이 가난해지게 만드는 물건이 되어버렸으니...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3:49
공산주의가 단순히 잘먹고 잘살자였으면 다들 부하린에게 찬성했겠죠. 즉 그 이상의 여러 요소가 있다는 것.
Commented by H-Modeler at 2008/08/19 01:12
정말 한국 근현대사는 말로만 자유진영이지, 속을 뜯어보면 제3세계 내지는 동구권에 비슷한 예로 들게 더 많다는 느낌입니다.-_-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3:47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후진국이니까 유형상으로는 제3세계와 비슷한게 당연하죠.
Commented by 구데리안 at 2008/08/19 01:27
그런면에서는 맑스의 말처럼 단계별 진화론이 통할듯.
Commented at 2008/08/19 02:0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3:48
사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데, 믿는 분은 적지가 않습니다.

스딸린 대원수야 뭐, 더 말이 필요없는...
Commented by 三天포 at 2008/08/19 02:32
사실 일제시대에 태어나 정상적인-일제의 매뉴얼적인-교육을 받은이가
과연 강점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지가 의문이지요
집에서 유학보내줘서 갔다와서 말단공무원으로 일하고있는데 어느날 친일파.
곤란하네요.
Commented by Ya펭귄 at 2008/08/19 02:39
강점에 대한 인식자체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있을 수 밖에 없지요... 조센징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차별해댔으니....

심지어 의학을 공부하는, 어찌보면 조선인들 중에서는 대우를 받는 계층조차도 내지인과 반도인을 차별하는 차별대우에 절치부심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희극적인 것은 그런 상황에서 일본놈들의 위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하여 출세가도를 밟은 경우조차도(즉, 일제체제라는 틀을 깨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그 틀 안에서 조선인의 신분상승을 도모하는 행위조차도) 후대인들이 부일모리배로 몰아버리는 경우가 발생하는....
Commented by 三天포 at 2008/08/19 03:14
흐음. 그렇군요.
그래도 다소 불만은 있어도. 이건 정말 말도 안돼! 라며 집도 절도 다 팔고 싸우러 나갈정도의
열혈 인식이 당시 강점기당시의 기득권에서 생기긴 어렵지않았으려나요?
물론 기득권자제가 중간에 붉은혁명에 감명을 받았을경우를 빼면 말이죠
Commented by 미고자라드 at 2008/08/19 02:36
일단은 친일파에 대한 공동적인 정의부터 필요하겠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3:44
그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긴 합니다.
Commented by Mr. Crazya at 2008/08/19 03:32
안녕하세요. 이전 글에 엄청난 논쟁이 달린 것을 보고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달아주신 댓글과 이어진 글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제가 댓글을 달면서 생각했던 것을 짚어주셔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당시 친일 기득권층이 현재 기득권층으로 확장/유지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어서 "외양을 바꿔가며"라는 말을 달았었는데, 빈약한 논리를 가리려는 의도만 드러나는 꼴이 되어서 대단히 부끄럽네요.

다음으로 "그렇다면 현재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궁금증입니다. 아래 세 질문은 저 역시 뚜렷한 답이 없어 여쭙는 것입니다.

1. 저는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중심에 "가치 상실"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느 역사적 지점 또는 과정에서 구성원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가치를 상실했다고 봅니다. 경제적 정의, 사회적 정의, 정치적 정의의 근거가 되는 가치가 "힘(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힘은 자본이므로 자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이 되었고, 이러한 (다수가 동의하는)가치 상실이 수십년간 고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기에 동의하신다면, 가치 상실이 어떤 역사적 지점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본문 내용과 관련하여 이승만 정권이 친일 인사를 기용한 것이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시는지(시대적 상황이 그것을 필연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궁금합니다.

2. 현재 대한민국의 문제는 어디에서 해결 지점을 찾아야 할까요? 저는 지금 우리 안에 있는 거대 담론을 하나하나 거부하면서 해체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기준으로 새로운 담론을 생성해 나가면서 문제 해결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너무 제 얘기로 끌어들이는 게 아닌가 하네요;; 현재 대한민국의 문제를 어느 지점에서 해결할 수 있을까요?

3. 대한민국 사회의 가치재정립은 과거 청산과 단절되어야 할까요? 또는 필수적 과거 청산에 한정해야 할까요? 이것은 대단히 개인적인 궁금증인데요, 과거 청산에 본질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치를 재정립하는 일 역시 본질적 한계를 맞닥뜨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이승만 정권이 친일 인사를 기용한 것을 시대적 요구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로 인정한다면, 이후 군사 독재 정권이나 재벌들, 권력의 비호 아래 민중 탄압에 나섰던 사람들도 "나름 할 말이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문제와 과거 청산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지 여쭙고 싶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3:45
너무 어려운 질문이어서 제가 답하기 쉽지 않군요 ;-)

"가치 상실"에서 가치가 꼭 정의여야 하나요? 그렇지 않다면
http://sonnet.egloos.com/3449835
정도가 참고가 되실 지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이준님 at 2008/08/19 07:40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일부분들이 친일파 척결의 대안으로 제시할 방법을 쓴게 "빨갱이 사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빨갱이 사냥"도 차상위 계급의 공격까지 가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하지요., -_-;;;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4:38
대개 그런 류의 숙청은 어느 정도 통하는 게 다 있기 마련인 듯 합니다.
Commented by 애독자 at 2008/08/19 08:51
음....오랜만에 와서 보니 여기가 난중토론장이 됐군요.
하여튼... 아래 글과 이번글(과 제 마음에 드는 댓글만)읽은 뒤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1. 승만이(독재자에게 갖춰줄 예의라고는 저에겐 없습니다.) 정부가 반일정책을 펼쳤다.
2. 승만이는 "(친일 청산이 그 당시에 꼭 필요했다는걸 알고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
지만) 자기(승만이) 정권유지에 도움 안되면 친일청산 할 마음조차 없었다."

결론은.... 승만이 정부를 "친일 정부냐, 반일 정부냐? " 하는 기준에 끼워 넣고 싶지 않
다는 겁니다. 걍 저는 "승만이 정부"라 부르고 말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4:42
2번에 대해서는 한국전쟁 전후사 관련 연구로 유명한 박명림 교수는 이승만도 친일청산하면 인기가 높아진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실리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평가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야긴 "친일청산 할 마음조차 없었다"는 좀 과한 평가란 이야기지요.
Commented by wizmusa at 2008/08/19 09:13
사실 문제는 '바로 지금'에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친일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에 민감해지는 게 아닐까 합니다. 고작 친일인명사전 정도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한나라당 몇몇 의원들과 뉴라이트(?)의 준동이 없었다면 굳이 댓글로 힘을 뺄 의욕이 났겠습니까.

그리고 친일파를 '한통'으로 모는 실수가 연달아 나오는 건 조선일보 같은 데서 벌인 지속적인 노력이 성과를 봤기 때문인 듯도 합니다. 가끔 어른들 말씀 듣다 보면 창씨개명했으면 다 친일파라는 식으로 몰아가려는 듯한 인상을 좀 받았거든요. 그게 작년 얘기니까 참 징글징글하게 오래 가는 대화 주제였네요. 그게 일제시대에 살지 않았을 오십 대 아저씨에게 바톤 터치되는 걸 보니 마음이 참 복잡해지더라고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5:07
저도 문제가 현재(의 정치)에 맞물려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본문에도 잠깐 다루었지만, 비난의 초점이 '재산'으로 바뀐 이유는 그래야 친일파 본인이 아니고 그의 후손을 표적으로 삼기 쉽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야 이제 대부분 죽었겠죠.
Commented by 애독자 at 2008/08/19 09:15
앗 차. 위의 답글에서 '1. 승만이.....' 요 문장에서 "반일정책" 을 "당시의 일본에 반하는
정책" 이라고 해야 제 생각이 더 잘 전달될 수 있겠습니다.
Commented by 헤르시온 at 2008/08/19 09:22
황희정승은 사실 부패와 비리가 많은 인물이었다고 하죠. 권력으로 남의 땅도 빼앗고 관금을 횡령하고 아들래미는 왕자의 잔과 금관을 훔치고... 결국 아들들은 처벌 받았습니다만. 아무튼 이 황희가 두문동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점에서, 논리적인 다수의 비약을 통하면 황희는 아래 포스팅에서 비난하는 친일파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도 있군요. 그런데 황희가 청백리로 칠해지고 둔갑하는게 조선 500년의 역사이니..
조선은 생각보다 실용적인 나라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4:36
황희에 대해선 아는 바가 별로 없어서 뭐라고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Commented by monsa at 2008/08/19 09:22
프랑스처럼 점령기간이 짧았던 것도 아니고, 국가가 무력으로 넘어간 것도 아니고, 경제의 주체가 부역을 안할 수 없었기도 했고, 법적 공소시효는 이미 지나갔고, 사실 역사관을 바로 정립하는 선에서 끝내야 할 일인데.. 그 이상을 원하는 것은 아무래도 법보다는 인민재판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5:11
예. 그런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wizmusa at 2008/08/20 11:36
친일인명사전같이 역사관을 바로 정립하려는 시도조차 힘겨운 게 현실이니까요. 여전히 친일은 현존하는 행위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20 12:28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의 "왜 친일파가 문제인가" 같은 글을 읽어보면 정치색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명단작성을 하고 있으면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일리가 있다 싶을 정도로요. 저는 사실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으면 아주 반갑게 그 명단 작성을 기다렸을 것 같은데, 지금은 관망 정도의 입장입니다.
Commented by netics at 2008/08/19 09:41
글 너무 잘 쓰신것 같습니다.
그런데 넓은 의미의 친일파가 부각되는 것은 그것을 이용해 현재의 기득권층을 공격해보려는 층에서 노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친일파 딱지를 방어하려는 측에서 물타기를 위해서 그 범위를 늘려나가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5:14
그런 건 제가 사태의 역사를 철저히 추적해 본 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 문제를 추적해서 범인을 잡은들 반대편에선 정치적 진영논리라고 할 가능성이 클 것 같아서, 저는 그냥 친일파의 범위가 "그렇게" 넓은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만 보여주고 끝내는게 제일 명료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Crete at 2008/08/19 09:54
한 동안 바쁜 일이 있다가 몇 일 전부터 정신을 차리고 반론을 준비해서 올렸습니다만.. sonnet님의 지난번 글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군요... 한동안은 재반론을 받기는 힘들 것 같군요.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

그래도 시간 되실 때, 차분히 논쟁이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 제 반론은 아래 링크로 올립니다.

60년대 경제성장의 원인들 (1)
http://crete.pe.kr/2968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5:14
네,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구들장군 at 2008/08/19 10:54
글 잘 읽고 갑니다. 이번 글은 500플이 안가겠군요.

1친일파 중 근대화에 하등의 도움이 안되는 자도 무사했다는 것, 근대화의 주축이 될 친일파라해도 네가 이런 잘못이 있었으니 장공속죄하란 과정이 없었다는 것을 소넷님도 좋게보진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물타기 쩌네요'로 대꾸해버리겠지만.

2지난시절 대한민국에 계층간 이동이 많았다는 것은, 대표적 기득권층인 법조계를 보면 명확합니다. 이회창같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노통-상고나와서 판사 잠깐하다가 국회의원/대통령까지 왔습니다.
김종빈 전 검찰총장- 중학교 갈 돈 없어서 부모가 고아원에 넣었다죠.
홍준표의원-대학시절 비오는 날은 커피가 어쩌구 하는 프랑스유학파 교수에게, '교수님 비오는 날 굶어보셨습니까'했다죠. 고향에서 부쳐주는 돈 찾을때 마주치던 우체국 여직원과 결혼했답니다.
검찰은 개천에서 용된 사람들 투성이라는 평가도 있더군요.

일본이외에 세계에 유래가 없다는 '사법고시'덕에, 하층에서 법조계로 이동한 경우가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5:40
예, 역시 맨날 그렇게 시끄러운 건 좀 그렇죠.

사실 선대들이 좀 깨끗하게 했으면 우리 시대가 더 편했을 수도 있는 일이긴 합니다만, 어쩔 수 없지요. 지나간 일이니까요. 역사를 보면서 "이거 하나만 고치면"이란 부분은 정말...
Commented by 어부 at 2008/08/19 11:19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1949년은 이승만 정부의 반공경찰과 남로당이 서로의 뒤통수를 치기위해 기를 쓰고 있던 전반적으로 치안이 불안한 시기입니다. 그 전해 10월에는 여순반란이, 그 다음 해에는 한국전쟁이 터지지요. 즉 이승만 정부의 정권안보가 무너졌을 경우, 다음 대한민국 정부가 생겨날 수나 있을지 예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즉 이승만이 정권안보를 위해 친일경찰을 재활용했다고 하면 그냥 권력욕의 결과이고 단순한 비난의 대상이지만, 이승만 정권이 주저앉고 나서 곧 대한민국이 소멸해 버릴 가능성이 적지 않게 있다면 이건 그렇게 간단히 말할 일은 아닙니다.

============

제 이글루에 적은 것처럼 이승만이 '방치'했다는 생각에서 조금 찜찜한 점이 이 문제였는데, 역시 정확하게 끄집어내 주시는군요. 저도 이 문제를 언급 안 하면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3:39
사실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갔다 기사회생 한거니까요. 후방교란이나 내부의 동조자 때문에 국군이 조금 더 빨리 붕괴했으면 1950년에 끝장이 났겠죠.
Commented by tranGster at 2008/08/19 12:08
냉전 헤게모니의 개입또한 과거, 일본조직하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이승만 정부가 기용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쨌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소비에트 초기의 혼란상을 살짝 엿 볼 수 있어서 좋았군요.
이러한 친일 청산에 관해서는 나치스 청산과 연결하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이 될 것 같군요^^ 기회가 되신다면 이것에 대한 포스팅도 부탁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5:44
냉전 헤게모니라는 표현보다는 단순하게 남북대결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런 대결은 결국 한국전쟁으로 피할 수 없었다는 게 입증되구요.
Commented by 함부르거 at 2008/08/19 12:48
어쨌든 일제시대는 우리 역사에 있어서 가장 굴욕적인 시기였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이런 감정적 상처가 정확히 평가되고 청산되었어야 하는데 건국시기의 혼란을 틈타서 어물쩍 넘어가 버린 게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사실 독립투사들도 친일파 청산에 있어 회개와 반성만 있다면 처벌까지는 바라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지요. 김일성조차 비슷한 요지의 발언을 한 걸로 알구요. 국민 다수가 만족할 만한 반성과 용서의 절차가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5:45
분단이 없었더라면 많이 다르지 않나 싶은데,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이지요. 변수가 너무 많으니까요.
Commented by 주코프 at 2008/08/19 13:03
36년을 사실상 자신을 일본인으로 알고 살아왔던(리영희나 임종국의 말을 빌리자면) 이른바 '해방공간'의 '민중'이란 존재들이 얼마나 현재와 같은 친일-반일구도로 현실을 인식했는지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59년도 북송사업때 일본인 첩의 자식들을 반납치 비슷하게 데리고 떠나버린 아버지를 모델로 한 재일 작가 '양석일'의 '피와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미군은 조선에서 나가라!!, 매국노 이승만 일파에게 죽음을!!, 백두산 호랑이 김일성 장군 만세!!'

..일본어와 어눌한 조선어가 뒤섞인 이 선전구호가 거리를 울리자, 거리에서 구경하던 자들 중에 심심풀이 비슷하게 데모에 참가하는 이도 있었다. 김준평은 자전거를 멈추고 처음 보는 데모대를 신기한듯 구경하고 있었다..

조선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이 발발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원인으로 분단, 전쟁이 일어났는지는 몰랐다. 김준평에게 있어서 애당초 국가나 조국이란 개념 따위는 없었다. 고향인 제주도에 대한 추억은 있지만, 고향과 국가-조국이란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조선이라하면, 옛날 부산을 비롯해 서울, 대전, 대구 각지를 떠돌며 멸시받고 차별당하며, 직업도 구하기 불가능해 고생했던 기억만 있었다. 제주방언을 말하면 비웃음받고 어떤 자는 "똥돼지 울음소리"를 내보라고 했다....

물론 그때마다 김준평은 물러서지 않고 치고받는 싸움을 반복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준평의 완력을 강인하게 단련시켜준 것은 바로 그 '조국'의 '그놈들'이었는지도 모른다.."

----> 과연 이 소설 속의 주인공 김준평이 예외적인 케이스일까요? 상당수의 재일1세, 2세, 그리고 우리나라의 시골에 거주하시는 어르신들의 8.15회고를 직접 들은 경험으로는 대개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당신 일반 민중의 한계이자 현실아니었는가 여겨집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5:48
반민특위 관련한 당대 신문들을 조금 본 적 있는데 친일청산 문제 자체는 확고한 여론의 지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식자층 위주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요.
Commented by 주코프 at 2008/08/19 13:22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에 대한 댓가로 주어졌던 '지권수표'가 한국전쟁 및 그 전란 와중의 통화개혁으로 휴지조각 비슷하게 가치가 떨어졌을 때 지주기반의 '친일세력'은 이미 경제적으로 몰락한 것입니다....

그 이후 실권을 잡는 모리배들은 핵심친일행위자도 있지만 그외 핵심 친일행위와 그다지 관련없는 '밑바닥에서 일어난' 처세술에 능한 자도 많았습니다..이것을 뭉뚱그려 다 친일에 묶어버리고 연좌까지 동원하는 특정 정치세력 지향단체들의 움직임은 분명히 문제를 안고있다고 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19 15:50
제가 본문에도 다루었지만, 당대에 충돌의 원인이 된것은 주로 공안계통을 둘러싼 것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게 자산가 쪽으로 초점이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대신 적산 문제에서 혜택을 본 집단이 있어서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흥망성쇠가 많이 갈리죠.
Commented by 그람 at 2008/08/19 17:51
박정희 대통령의 만주군 계급은 반민특위 때도 친일에 안 들어갔는데 최근에는 계급을 넣었다는 말을 듣고나니 친일의 확대라는 부분은 정치적 노림수로도 이용되는 것 같더군요.
Commented by Mr술탄-샤™ at 2008/08/20 00:44
80년대 이후 나오는 친일청산이란 건 사회주의 계급투쟁+독재와 권력조직에 대한 반감+민족주의 의식이 합쳐진 산물이며 사회주의 계급투쟁적 요소가 제일 강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후 정권에서의 친일청산이라는건 계급투쟁 기본요소를 중심으로 지난 정권의 수뇌부에 대한 반감에 친일이라는 굴레를 덧씌운 것으로써 여러 요소를 감안할 때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의 민족을 위한 특별법령"에 지나지 않는 수준입니다. 특히 그 기준의 고무줄성을 감안하면 말이죠.
Commented by 스링 at 2008/08/19 17:59
왠지 다시 이오쟁패의 불꽃이 지펴오르는 듯한 느낌이군요
Commented by Eraser at 2008/08/19 19:27
그 난폭(?)하다는 볼셰비키 집단도 현실의 위기 앞에서는 수정공산주의를 암묵적으로나마 동의할 수 밖에 없었군요 :)
Commented by akrur at 2008/08/19 20:00
조금 답답한 맘이 드는군요 ^^;;
글쓰는 방법이신지... 이승만 정권의 친일과는 상황이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글 안에 다시 지난 이야기를 포함시키는 것이...

여튼 지난 답글은 과장으로 쓴 글이 아니라, 실제로 그와 같이 측면이 있다고 생각되어 쓴 글입니다. ^^;
이승만 정권이 광복후 첫 정권으로서, 친일청산이라는 역할을 제대로 못 했으며, 결국 전혀 반일정권이 아니라는 것이죠.
제국주의 일본이 아닌, 지금의 일본에 대한 친/반은 고려할게 아니구요.

위에 쓰신 글은 이를 이해해 줄 만한 요소가 있지 않느냐는 글일 수는 있겠지요.
Commented by 아이군 at 2008/08/19 20:38
이해해 줄 만한 요소라...

내적으로는 친일적인 관료조직이 이승만이 가진 유일한 권력이었고
외적으로는 미국의 원조 빼고는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 상황에서

외적으로라도 미국에 몇번 고함친
상황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닐까요?

이승만 개인의 상황(미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명한 독립인사)와 한국의 상황(공산주의 남진을 막기위해서 땀 좀 흘려야 했던)과 미국의 오판(이승만에 올인해서 다른 카드가 없었던)이 아니었으면 그나마도 택도 없었을것 같은데요..
Commented by ellouin at 2008/08/19 21:04
간단한 의문이 생겨서 트랙백 달았습니다.

초반에 힘이 없어서 반민특위를 깔 수 밖에 없었다면,
권력이 강해진 후 여러차례 정치적 굴곡 속에서 친일파 청산이라는 놀랍고도 달콤한 카드를 왜 사용하지 않았던 걸까요?

적어도 이승만이 인도주의자여서 그랬던거 같지는 않은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20 11:51
여전히 유용했나 보죠. 부하린처럼 한 세대 정도는 쓸 수 있다고 보았든지. 쓰고 버리기야 선택일 수는 있지만 필수는 아니니까요.

5.16의 모의가 이승만 말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 군은 여전히 경찰처럼 믿을만한 조직은 아니었을 겁니다. 4.19 이후 공안기관의 약화와 그 역할에 대한 새 정부의 부정적 인식(주로 이승만 때 야당을 하면서 형성한 인식이지요)이 쿠데타를 막는데 방해가 되었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8/08/19 21:30
이런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시다니. 과연 용자이십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20 11:51
글쎄 말입니다. (쓴웃음)
제가 상황을 과소평가했나 봅니다.
Commented by deokbusin at 2008/08/19 21:42
잘 하면 이번 글도 일백플은 넘어갈 지도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20 11:52
;;;
Commented by 겔라예프 at 2008/08/19 23:19
뭐, 소넷님도 본좌소리를 듣는 사람인지라 매사를 다각도로 보시는 거겠지만..

1. 이승만은 친일파를 등용하였다.

2. 이는 이승만의 권력욕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3.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그런 인력폴이라도 활용하지 않았으면 상당히 깝깝했을 것이다.


뭐 대충 이렇게 판단이 됩니다. 소넷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은요.


하지만 이승만이 반일정권이라고 해도 친일파의 등용이 그들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느니 하는 투의 언질은 여전히 부적절하다고 봐지네요. 그들이 정말 일본의 가치관에 대한 신념을 갖고 부역을 했나요? 당시 시대 상황에서 힘있는 자에게 붙는 것이 속성이었기에 그들을 '부역'이라고 부르지요.


해방 이후에 친일 부역자들은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미군정의 정책에 협조합니다. 그들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 '반일 정권에 참여 = 부역의 과거에 대한 속죄'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심한 말이지요.
Commented by .... at 2008/08/20 07:02
1. 일본의 가치관에 대한 신념을 품었는지 안 품었는지는 며느리도 모릅니다.

2. 힘있는 자에게 붙는 것이 그들의 속성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미군정에 대해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라고 하시는 건 ? 그들의 속성대로라면 그들은 단지 힘있는 자에게 붙었을 뿐이겠죠.

3. 반일정권에 참여하는 것을 빼고 다른 '속죄'의 길은 뭐가 있을까요?
님과 같은 얘기를 하는 분은 '친일파는 척결돼어야 한다'라는 한가지 믿음만 신봉하니까
계속 억지를 피우시는 것이겠지만.
Commented by 바닷돌 at 2008/08/20 09:00
저도 리플에서 쓴 적이 있지만 그 '속죄'의 의미는 아마 대한민국 수립에 참여해서 일을 했으니 그걸로 속죄라고 해 주면 좋지 않은가..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sonnet님이 속죄의 의미를 통상적인 '죄를 뉘우친다'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죄값을 어느정도 갚았다'의 의미로 쓰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일반적인 의미로 쓰신게 아니라 오해가 생길 여지가 컸던 걸로 생각됩니다;;
Commented by MrCrazyani at 2008/08/20 02:52
안녕하세요. 저번에는 아이디를 좀 잘못 적었네요.(...)

가치가 곧 정의라고 보는 것은 아니고, 가치가 정의를 구성한다고 봅니다.

'힘'(즉 자본)이 점차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가치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환경', '공존', '박애', '사랑(행동 양식으로서의 연애에 가까운 것이 아닌)' 등과 같은 가치가, 한 사회에서 다양하게 존재해야 할 담론적 질서로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적 가치는 자본적 정의를 구성하고(Ex : 자본 편중에 따른 권력 형성과 사회적 계급 분리, 자본이 편중되어 있지 않은 자들에 대한 소외), 환경적 가치는 환경적 정의를 구성합니다(Ex : 환경이 파괴되면 결국 인간도 사라지므로 이산화탄소 배출 수준을 줄이고 좀 더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발전을 도모하자는 노력).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가치는 서로 다른 정의를 구성합니다.

각 정의들은 담론적 질서를 구성하고 이 질서에 따라 사람들은 행동합니다. (Ex :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나는 이러이러한 것들을 실천한다, 다른 이의 문제가 내 문제로 연결되므로 연대한다) 이것은 미시적 담론일 수도 있고 거시적 담론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담론적 질서에 따른 행동 결과 '환경', '박애', '공존' 등의 가치가 구성한 담론이 타당성을 잃습니다. 자본적 담론에 따른 행동이 부와 안락한 삶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이것을 단적으로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자본 외적 담론의 근간에 있는 가치들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고, 그것이 가치 상실이라는 현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참고로 보여주신 글을 아직 안 읽은 상태에서 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읽고 나서 다시 오겠습니다. :)
Commented by MrCrazyani at 2008/08/20 03:30
참고로 보여주신 글을 읽고 다시 왔습니다. 교양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전까지 교양에 대한 문제는 전혀 제 관심 주제가 아니었는데, 새로운 주제를 접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그런데 가치와 정의의 문제와 교양의 문제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네,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한참을 생각했는데, 어떤 관련성을 발견하시고 글을 보여주셨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니면 제가 가지고 있는 가치 개념이, 대학생들이 가질 수 있는 인문 교양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신 건가요? 그도 아니면, 제가 하이 컬처적 교양에 사로잡혀 가치가 있는 내용과 가치가 없는 내용을 애써 구분하고 있는 걸까요?

무엇을 발견하시고 글을 보여주셨는지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__)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20 07:22
읽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교양이란 게 사회의 교육받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특정한 종류의 "한 덩어리의 공통의 지식"(common knowledge set)인데, 실제로는 상스럽지 않아야 한다든가 과학기술적 지식은 포함되지 않는다든가 하는 보다 세세하고 암묵적인 규칙이 더 많이 붙어있는 특수한 공통의 지식이지요.

앞서 말씀하실 때 "구성원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가치"란 말씀을 하셨는데 "구성원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이란 속성은 "공통의 지식"인 교양 같은 개념의 성립과 통하는 데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이게 정의니까 다들 따라와'하고 주입해서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면 구성원들 사이에서 "구성원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것이 형성되어 떠오르려면 어떠해야 할까요?

가치의 "상실"이 문제라면 교양도 비슷한 교양의 붕괴 문제를 겪고 있다는 뜻에서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해서 꺼내 본 이야기입니다.
Commented by MrCrazyani at 2008/08/20 15:49
교양이 축적된 지식에 (상류 계층의?) 차별화 기제가 합쳐져 발생했다면, 가치는 다만 근본적인 삶의 태도를 규정한다고 봅니다. 교양 붕괴 문제를 저는 "껍데기만 남게 되는" 과정으로 이해했는데, 가치 상실은 그런 과정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들중 자본적 가치가 가장 큰 타당성을 갖고 가장 큰 담론적 질서로 주류 질서가 됨에 따라 나머지 가치들이 타당성을 잃어 질서를 구성하지 못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어를 좀 바꾸겠습니다.(엄격한 개념을 사용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구성원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이 아니라, "어떤 구성원은 동의할 수 없는" 으로 바꾸겠습니다.

대한민국 사회 구성원 다수는 이미 자본적 가치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자본적 가치로 인해 이익을 보든 보지 않든, 이미 형성되어 있는 자본적 담론 질서를 내면화함으로써 자본적 가치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한 진지한 고려 없이 자본적 가치를 중심 가치로 삼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본적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가지고는 안락하게 살 수 없는 사회 구조가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언론과 방송사가 (역사적으로) 자본적 담론을 선전하여서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으며,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실현(자본이 편중되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결과가 어떻게 다른가)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제 첫 번째 질문은 어느 지점 또는 과정에서 자본적 가치가 유일한 가치로 떠올랐는가로 바뀝니다.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좌절당하는 과정"에서 자본적 가치가 유일한 가치로 떠오르지 않았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봅니다.

문제는, "어떤 구성원은 동의할 수 없는" 자본적 가치가 나머지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본적 가치를 중심 가치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소외시킨다는 것입니다. 자본적 가치는 오로지 자본이 편중되어 있는 사람들만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머지 가치들과 그에 따른 담론적 질서들이, 자본적 가치 및 질서와 동등한 수준의 힘(이 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힘이 아니라 각 가치 및 질서가 갖는 존재적 위치입니다.)을 가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 가치 및 질서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알릴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치 및 질서들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도 그것을 인정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가치 상실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양의 성립과 붕괴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제대로 된 생각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둘을 제대로 비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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