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이전 글
로버트 포겔의 철도 논쟁, 그리고.에 붙은
코멘트인데, 짧게 답하기가 어려워서 별도의 포스팅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제 의견은
업적과 (Fogel이 말하는)
필수불가결성은 다른 것(필수불가결성이 있을 경우 업적에 포함됨)이고, 업적 중에 필수불가결한 부분은 상당히 작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필수불가결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그 크기가 상당히 작더라도 큰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어떤 기준을 갖고 판단했을 때 그 지도자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1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뉴턴의 예를 들어주셨으니 뉴턴으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뉴턴의 업적 중 하나로 미적분법의 발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그리고 독립적으로 라이프니츠도 같은 것을 발견해냈죠. 결국 이 둘이 업적을 놓고 다투는 통에 한때 엄청난 논란이 되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두 사람의 업적을 모두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동시발견이기 때문에 필수불가결성은 아주 작거나 없음이 확인됩니다.
열역학 제1법칙(마이어/헬름홀츠/줄), 진화론(다윈/월러스) 등 과학의 역사에서 이런 사례는 상당히 많습니다. 미국의 선구적 과학사학자인
Robert K. Merton은 이렇게 과학상의 어떤 발견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동시발견사례를 수집한 바 있습니다. 그가 수집한 동시 발견 사례는 264건인데 그 중 172가지는 두 사람, 51가지는 세 사람, 17가지는 네 사람, 6가지는 다섯 사람, 8가지가 여섯 사람, 1가지가 일곱 사람, 그리고 2가지가 무려 아홉 사람에 의한 동시 발견이라고 합니다. 또한 기술이나 발명 분야에서도 이런 것이 수두룩한데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전화 발명을 놓고 경쟁하다가 알렉산더 그라함 벨에게 단 몇 시간의 차이로 고배를 마신 엘리샤 그레이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은
필수불가결성이 입증되지 않아도 업적은 업적으로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써온 개념적 정의를 사용해도 그렇고, 사전적 정의를 따라도 마찬가지인데, 개념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해낸 성과 전체가 업적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평균이하의 실적을 올린 일을 "업적"이라고
평가해줄까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남들이 못해낸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거나 스스로 생각할 때
어떤 기준과 대조해 평균 이상의 결과를 내었다고 판단될 때 그제서야 그것을 업적으로 평가해주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영업사원들의 평균 매출이 5천만원인데, A씨는 매출이 1억원이면, 그의 성과는 1억원이지 (평균을 빼고 남은) 5천만원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하는 건 평균매출인 5천만원을 넘어선 이후부터겠지요.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금 다루는 주제, 즉 측정과 비교가 까다로운 국가지도자란 유형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가지도자의 업적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가상적인 대안지도자들의 성취에 관련해
내심 이미 '각자의 주관적인 평균치'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게 신뢰성이 높은 기준인지 아닌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만.
이번에는 누군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증기기관을 개발중이던 제임스 와트를 암살해 버렸다고 가정해 보지요.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증기기관 역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발명품으로 인식되었다. … 일반적인 설명에 따르면, 젊은 제임스 와트는 차주전자에서 솟는 증기를 보고 영감을 얻어 증기기관을 발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환상적인 전설은 와트가 끓는 주전자에서 솟아나는 증기를 관찰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바로 그 시기에 영국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뉴커먼 기관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의해서 신빙성을 잃는다. 토마스 뉴커먼의 작동하는 대기압 증기기관이 출현한 1712년과 완벽한 실제 증기기관이 와트에 의해서 제작된 1775년 사이에는 약 60년이라는 틈이 있다. 더구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와트의 증기기관이
수리를 의뢰받았던 소형 뉴커먼 기관 모델에 대해서 그가 느꼈던 불만족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
1763년 겨울, 와트가 뉴커먼 기관 모델의 수리와 연구를 시작했을 때, 그보다 큰 뉴커먼 대기압기관은 이미 세계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에서 동력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광범위한 사용에도 불구하고 뉴커먼 기관의 일부 특성이 와트에게 불만족스러웠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는 뉴커먼 기관을 능가하는 새로운 장치를 제작해 현대적인 증기기관의 탄생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
증기기관은 기술 분야에서 진화적 변화의 소산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식으로도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이 없었다.
Basalla, George.,
The Evolution of Techn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김동광 역, 『
기술의 진화』, 까치, 1996, pp.62-66, 99
이런 상황에서라면 좀 늦어지긴 하더라도 뉴커먼 기관을 이용하던 기술자 중 누군가가 증기기관을 대신 발명할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좀 늦어지는 정도가 필수불가결성의 크기인 셈입니다.
그런데 와트의 경우엔 다른 사람들도 증기기관을 발명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일 먼저 발명을 한 셈이니만큼 그가 1등(
=필수불가결성이 존재함)인 것은 분명하고 다만 발명이 얼마나 늦어지는지만 추론하면 됩니다. 반면 우리가 다루는 국가지도자의 경우에는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대안적 선택들은 업적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니까, 실제로는 그가
1등이 아니어서 필수불가결성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포겔 같은 경우 역사적으로 높은 (업적)평가를 인정받는 철도라고는 해도 그 업적 전체가 필수불가결일 리가 없을 것 같은데 별 근거도 없이
그 업적 대부분이 필수불가결한 것처럼 널리 간주되었다는데 불만을 표출합니다. 이런 근거가 약한 간주가 철도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게 된다는 것이죠.
필수불가결성은 아주 작게만 인정해도 그가 모든 후보중에 1등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필수불가결성의 크기가 커지면 그가 다른 대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수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 업적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인 업적 평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지금 논란이 된 박정희 같은 경우 필수불가결성을 놓고 격돌하는 논쟁은
이미 있습니다. 아주 소모적이기 짝이 없죠. 그래서 저는 필수불가결성의 존재든 부존재든, 존재라면 그 크기에 대해 어떤 그럴듯한 설명을 갖고 나올 수 있는지, 부존재라면 효과적인 대안에 대한 근거를 어떻게 제시할 수 있는지를 양 측 모두에게 요구해서 패를 까보는 것이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