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저는 "기본적으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확고한 구상이 없고 자주 오락가락했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1950년대의 대표적 산업 발달 과정을 통해 이 점을 좀 묘사해 볼까 합니다.
광복 직후의 미군정이나, 한국전쟁 직후의 상황을 둘러본 많은 미국 관계자들은 산업생산량이며 취업인구의 절대다수가 농업이고, 공업이나 수출은 전멸인 상황으로 볼 때,
농업국가로 가는 수밖에 없다든가
공업화는 어렵겠다 같은 의견을 종종 표출하곤 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한국의 공업화에 반대했는데, 한국이 싸워서 이를 쟁취했다' 같은 주장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건 미국의 확고한 의지라기보다는 피상적인 인상에 더 가까운 것이었고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가지도 않습니다.
우선 원조를 주는 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산을 심의하는 의회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의 대외전략목표에 따른 필요라고 해도 남의 나라에 생돈을 퍼주는 걸 좋아할 리가 없지요. 의회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미국 대외원조의 중요한 부분이 MSA402와 PL480이라고 불리는 잉여농산물로 처리됩니다. 즉 원조물자를 조달하는 과정에 미국 농민들을 돕는다는 명분을 끼워넣어 의회의 반대를 달랜 것이지요.
1950년대를 대표하는 공업이 소비재를 생산하는 소위
3白산업 -면직물, 밀가루, 설탕-입니다. 제일제당의 이병철(삼성)이나 금성방직의 김성곤(쌍용) 등 3白산업의 실력자들의 면면을 보면 이들의 중요성을 익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업들은 하나같이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 공업의 원료인 원면, 원맥, 원당이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로 공급되고 있던 것이죠.
이중 일제시대부터 대표적인 산업 중 하나였던 면방산업을 보겠습니다. 원조로 들어온 면화의 배정은 특혜적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장환율보다 훨씬 싼 공정환율에 배정되었기 때문에, 기업은 일단 한국정부의
배정만 받으면 당장 떼돈을 긁어들일 수 있었지요. 그럼 그 손해는 누가 본거냐. 한국 정부가 본 것이죠. 정부가 시장가격에 가깝게 경매를 했으면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을 기업에게 쥐어준 격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만 하면 모든 사람이 능력이 되든 안되든 원면 배정을 받으려고 달려들 게 너무 뻔한지라, 한국 정부는 실수요자 원칙을 표방하게 됩니다. 즉 면방공장을 가진 사람에게만, 그리고 그 생산시설규모에 따라 차등적으로 할당하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면방업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시설용량 확장에 나섭니다. 이 경쟁에서 밀리면
원조물자 배정에 따른 환율따먹기에서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죠. 이 결과 면방산업은 한국전쟁 중에 제일 큰 피해를 본 산업인데도 불구하고 1955년이 되면 벌써 전쟁 전 규모를 회복하는데 성공하고, 1957년이 되면 시설과잉에 빠져 수출을 모색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까지 내몰립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것은 정부가 산업보조금을 준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설령 한국 정부가 깊게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강력한 인센티브가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즉 이박사가 말로는
'중공업 당장 갖고 싶다!'고 골백번 노래를 불렀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뭉칫돈 지원을 타먹은 분야는 바로 이런 원조물자를 받은 소비재공업 분야란 겁니다. 그리고 이런 특혜가 계속되는데 상당한 뇌물과 정치헌금이 오갔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죠.
그럼 이제 이런 과정의 어두운 측면을 보겠습니다. 1955년경이 되면 면방업계는 원료의 97%를 외국산 원면에 의존하게 되고 국산원면은 시장에서 완전히 구축됩니다. 앞서 보았듯이 받기만 해도 커다란 이익일 정도로 헐값에 배정되고 있었기 때문에 경쟁이 될래야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분업의 원료인 소맥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집니다. 결과적으로 1950년대에 국내의 원료농업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양곡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시기에 한국 정부는 필요량보다 많은 양곡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공급초과를 통해 식량가격을 낮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1951~58년간 식량의 수입의존도는 평균 15%이고 높았던 해(1953)는 30%를 초과한 적도 있습니다. 이는 결국 사회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한 결과
원조가 없었더라면 존재했을 높은 농산물가격과 그로 인한 농민의 돈벌이 기회를 뺏은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원조 농산물은 농촌에 타격을 입히고 반대로 도시와 공업, 유통과 상업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말이 나왔으니 상업의 성장에 대해서도 다루어 보지요. GNP중 1차산업의 비중은 1952년의 50.8%에서 1955년에는 35.0%로 격감합니다. 반면 3차산업의 비중은 같은 기간 중 38.5%에서 51.9%로 늘어나 그 빈자리를 메웁니다. 3차산업이 성장하는 주된 원인은
원조물자의 유통과 소비에 따른 것입니다. 이 시기에는 원조물자 때문에 국내에는 한국 자신의 실력으로 가능한 것 보다 훨씬 많은 물자가 유통되면서 그에 관련된 부문이 급성장한 것입니다.
이제 원조가 없었을 경우의 상황을 몇 가지 가정해 보기로 합시다.
1) 원조가 전혀 없었더라고 가정한다면, 일차적으로 전국민이 다같이 고통스러웠을 것이지만,
국내적으로는 농업이 제일 큰 이익을 보았을 것입니다. 수출 능력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는 제 돈내고는 수입도 거의 못했을 거고, 국내 농산물들을 사먹는데 거의 모든 소득을 지출하는 방향으로 갔겠지요.
2) 그리고 이 상황에서 원조 없이 자력갱생식 공업화를 시도했다면,
공산권에서 많이 보던 방식으로 그나마 좀 생산이 되는
1차 산업들을 다시 쥐어짰을 것이 뻔합니다. 국민은 굶어죽는데도 출혈적인 가격으로 식량을 수출하고 있다든가, 식량은 농촌에서 생산되는데도 불구하고 먹고살만큼도 남겨주지 않고 몽땅 수탈해 가서 아사자는 주로 농촌에서 나온다든가 하는 식이지요. 공업발전을 위해서는 도시 노동자부터 먼저 먹여야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막대한 원조가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고, 앞서 살펴본 것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조란 것은 정상적인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결과 또한 비정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국내적 노력이 산업화를 이끈 것이 아니라, 일단
주어진 원조가 압도적인 인센티브를 만들고 국내적인 노력이 거기에 반응하는 식으로 산업화가 진행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원조는 남한 전체로 보면 확실한 이익이었습니다. 없는 것 보다야 있는 게 확실히 좋은 거죠. 하지만 국내적으로 보면 그 혜택을 골고루 받은 것이 아니라 큰 이익을 본 부문(도시)과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 부문(농촌)이 분명히 갈리게 됩니다. 즉 1차산업의 의존도를 줄이고, 2,3차산업이 발달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농촌이 타격을 받았다 한들, 자력갱생 공업화 때 발생할 무시무시한 결과에 비하면 새발에 피에 분명합니다. 그런 면에서 공업화로 가는 험난한 길을 완화시켜준 것이 원조의 역할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서두에 말했던 미국의 목표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미국은 한국을 농업국가로 몰고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본 대로 실제로는 농업에 타격을 주었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 농업을 작살내고 대신 우선 3白산업부터 키워주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운 후 원조 물자를 원면, 원맥, 원당으로 채운 것도 아닙니다. 미국 정부는 한국에 대해 면밀한 대책을 세우기 보다는 주로 그때그때의 자국 농업생산 사정, 그리고 그런 지역구의 입장을 대변하는 호랑이같은 상원의원들의 질타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적당히 남는 품목을 골라서 넘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반공의 방파제로서의 후진국 사회안정이라든가, 잉여농산물 처리 같은 그때그때의 단기적인 필요성에 반응해 행동하다 보니까, 미국은 결과적으로 처음에 피상적으로 세운 구상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한국이 나아가게 만듭니다.
즉 미국이 원조라는 거대한 원동력을 제공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눈먼 원동력에 가까웠습니다.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주로 원조와 프리미엄 따먹기에 열을 올리고 있던 한국 정재계의 이기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엮어나간 예기치 않았던 결과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