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미국의 극동 정책 변화와 이승만 정부의 수출진흥 정책(Crete)에서 트랙백
들어가면서트랙백해온 글의 주된 논조 하나를 꼽는다면 "
일본 산업 부흥을 위해 한국이 일본 공산품의 판매 시장이 되기를 희망했고 따라서 한국의 공업화는 억제"하자는 것이 미국의 대한정책의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이야길 이런 바탕 위에서 풀어가고 있다. 내 입장은 다른데, 미국이 그런 생각을 좀 한 적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확고한 구상이 없고 자주 오락가락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미국은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 채 억지를 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이승만에게 종종 휘둘렸고, 또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미국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이승만을 개XX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승만 스타일브루스 커밍스는 논란이 많은 역사학자이고 나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편이지만, 가끔 탄복할만한 통찰력을 보여줄 때가 있어서 완전히 버리기엔 또 아쉬운 구석이 있다. 이승만에 대한 그의 인물평 또한 그런 것 중 하나이다.
이 이야기는 가슴아프기는 해도 1950년대의 남한이 창의적인 사업 -이 사업이 미국의 젖을 최대한 빨아먹는데 있음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에 적합한 장소였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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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정치경제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 마디로 그것은 “
일본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달라, 그것도 내일 당장 달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만개한 산업경제를 원했고, 신생산업들은 방어벽 -무엇보다도 일본으로부터의 방어벽- 안에서 보육되기를 원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결코 이승만 혼자만은 아니었다. 한 학술회의가 기억나는데, 누군가가 미시건 대학 출신의 훌륭한 학자인 린다 림(linda Lim)한테 말레이시아가 한국형 모델을 따를 것인가 하는 질문을 했다. 그녀는 천만에요 하고 극구 부인하면서 한국인들은 “맑스주의자들이에요. 모든 것을 다 원해요. 하지만 말레이시아는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수출공간을 찾고 있을 따름이에요”하고 외쳤다. 그 말은 이승만과 그의 후계자들은 스딸린과 같이 만개한 자립적 산업기지와 이를 운영할 강철·화학·공작기계·전력을 원했다는 뜻이었다. 1930년대의 일본의 투자와 1950년대의 스딸린의 투자가 결합되어 김일성에게도 똑같은 것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승만의 욕망은 완전히 중층결정되었다. 남한은 또 하나의 일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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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이런 일에 노련한 대가였고, 미국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무상원조를 받아내어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이런 돈이 한국의 총수입 가운데 6분의 5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것도 ‘합법적’이거나 기록된 총액만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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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행태가 자유주의와 자유시장을 미덕으로 여기는 미국인들한테 얼마나 모욕적이었을까! 이승만은 “동양의 흥정꾼” “회피의 명수”였다고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953~59년에 국무장관을 지낸 미국의 정치가 - 옮긴이)는 품평했으며,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협박”에 대해 불평했다. 리처드 닉슨은 그를 도박꾼 아니면 공산주의자이거나 혹은 양자를 겸한 사람이라고 부른 적이 있으며, 엄포와 극단 정책의 면에서 공화당원들한테 교훈을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의지할 데는 자기 밖에 없음을 알고는, 냉전으로 인해 주어진 대한민국의 엄청난 지정학적인
영향력과 판돈 모두를 싹쓸이하려는 강인한 포커꾼으로서의 타고난 기술을 이용하여 “전세계의 패자로부터 최대의 ‘자릿세’”를 뽑아냈다. 코미디언인 리처드 프라이어(Richard Pryor)처럼 이승만은 현세에서 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즉 자기 호주머니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우연하게 미국 납세자의 돈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조금도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이것이 비합리성이었을까 아니면 우정은의 말대로 “광기 속의 책략”이었을까? 그런 상상할 수도 없는 현금이 유입되는 마당에, 이승만이 아이젠하워한테 돈을 빼내는 여러 방법을 궁리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을 무엇 때문에 했겠는가?
Cumings, Bruce,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 W. Norton, 1997
(김동노 이교선 이진준 한기욱 역, 『
브루스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1, pp.426-430)
자 이제 논란이 된 사안들 별로 이승만 스타일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정부 수립 초기인 1949년 4월 15일 한국 정부는 ‘5개년 물동 계획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킵니다. 이는 농업, 광업, 금속기계기구, 섬유, 화학 등 전 분야에 걸쳐 생산 및 수급 계획 그리고 수출입 계획 등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기계, 제철, 제강, 화학, 조선, 시멘트, 비료 등 중공업 육성도 동시에 추진한다는 내용이죠. 관련 자금은 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 Mission on Korea) 원조 금액과 대외무역으로 조달할 계획이었고요. (Crete)
이는 커밍스가 말하는 이승만 스타일
“일본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달라, 그것도 내일 당장 달라”를 아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아무리 한국의 개발에 대해 호의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저 많은 일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들이댄다면 누가 납득을 하겠는가?
자금조달 또한 마찬가지이다. 1949년 시점에서 수출규모는 아주 작았기 때문에 대규모 개발에 필요한 거액의 외환을 이것으로 조달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럼 ECA원조가 남는데 한국전쟁 이전까지 미국은 남한에 깊게 빠져들거나, 커다란 재정적 부담을 질 생각이 없었다. ECA가 처음에 미국 의회에 요구한 원조금액은 3년 간 3억5천만불(실제로는 한국전쟁 때문에 1년치인 1억 1천만불만 집행이 됨)이었다. 미 의회에 제출된 ECA원조안이 원안대로 통과되었다 하더라도 이정도를 가지고 저런 오만가지 사업을 동시에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ECA는 당시 미국에서 한국의 발전에 가장 낙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그룹이었지만 석탄, 화력발전, 비료 3가지 부문에서 제한적인 성과만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설령 이 시기에 어떤 호의적인 개발원조가 이루어졌다 가정 하더라도 한국전쟁으로 무위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전쟁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번에는 실제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규모의 원조를 받았을 가능성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이승만은 임기 말까지 모든 분야를 동시에 발전시키겠다는 균형성장론을 버리지 못하는데, 이 점은 그의 임기 중 기획된 경제개발계획의 현실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게 하는 한 가지 근거가 된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가 간절히 바라던 자본재 70%, 소비재 30%의 원조 내용은 미국의 반대에 묻히고 결국 자본재 30%, 소비재 70%로 미국의 주장이 관철되죠. 전주가 우기는데 별 도리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Crete)
이 역시 전형적인 이승만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렇게 적어놓으면 뭔가 미국이 한국의 정당한 요구를 꺾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 때는
한국전쟁 직후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소련이나 중국의 공업화 과정을 보면
지도자의 야심 때문에 농촌을 쥐어짜서 자본을 염출하느라 국민들이 굶어죽고 있는데도 곡물을 수출한다거나 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참혹한 전쟁 직후의 한국인들에게 소비재의 공급이란 없으면 좀 참고 살아도 되는 일상적인 수준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생존의 문제였을까? 이승만이 원하는 대로 주었으면 산업은 좀 더 빨리 발전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몇 배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미국이 한국전쟁 기간 동안 제공한 원조 중에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CRIK원조이다. 이것은 주로 한국민의 「생존유지」에 초점을 맞춘, 당장 먹고 입을 것을 대주는 유형의 원조였는데, 전쟁 다음 해인 1954년에도 전쟁중인 51년과 거의 맞먹는 양을 주어야 했고, 그 다음 해인 1955년에야 종료될 수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거는 1950년대 한국의 수입대체공업화 결과이다. 한국의 수입대체공업이 생산량을 늘리면, 그만큼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수입은 거의 그대로이고 소비가 늘어나 생산분을 먹어치우는 경향이 관찰된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공급이 부족해 실현되지 못한 잠재수요가 늘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문제는 저 판매용 소비재란 것을 국내시장에 매각하면 그게 대충자금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 세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바로 그 자금 말이다. 한국정부는 실제로 이것을 받은 다음에도 세출이 세입을 50%정도 초과하고 있었다. 다들 먹고살기에도 허덕거리는 당시 한국 국내 사정상 (앞서 본 것처럼 이승만이 꿈꾸던) 중공업 설비 같은 생산재를 충분히 매입해 줄 민간자본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정부가 국영기업을 차려 운영해볼 수도 있겠지만, 가장 잘 풀릴 경우에도 수 년 간은 원금회수가 힘들다고 봐야 한다. 그럼 결국 죽던 살던 방치할 게 아니라면 한국 정부의 운영자금은 미국이 또 따로 대주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게 그들이 일본만 배려한 탓일까 이승만이 욕심을 부린 탓일까?
이번에는 묘한 퍼센티지 그래프를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국제적 환경 변화와 미국의 한국공업화 억제 정책의 약화에 더해 이런 이승만 정부의 수출 진흥 노력 덕분에 이승만 정부 말기 3년간의 수출 실적은 상당히 인상적인 변화를 보입니다.
1958년 1400만 달러
1959년 2000만 달러
1960년 3200만 달러
59년도와 60년도의 전년도 대비 수출 증가율은 42.9%와 60.0%의 놀라운 신장을 보입니다.
위의 자료는 WTO 홈페이지에 가서 통계를 다운로드 받아서 직접 작성한 것입니다. 위의 도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미 이승만 정부 시절인 59년과 60년에 전년 대비 수출 증가율은 박정희 정부의 60년대 수출 증가율에 비해 결코 떨어지는 수치가 아닙니다. (Crete)
음,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저 그래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승만 임기의 마지막 2년만 들어 있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승만 임기 대부분이 들어가도록 표를 고쳐서 그려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그림은 아래 표와 동일하게 KDI에서 발간된 홍원탁의 자료를 갖고 그린 것임)
문제는 이렇다. 성장률(%)만 표시한 그래프는 착시의 소지가 크다.
(1) 수출규모가 매우 작을 때는 약간의 수출변동으로도 수십 퍼센트의 성장률이 관측될 수 있다.
(2) 전년도의 수출 실적이 매우 좋지 않았을 경우, 평균으로의 회복조차도 성장률로 잡힐 수 있다.
위 1959,60 양 연도의 통계는 그런 문제가 모두 해당된다. 바로 전 해인 1958년이 10년래 최저였던 것이다. 게다가 성적이 그저 그런 다른 해들을 몽땅 빼버린 관계로 착시가능성을 더 높게 만들었다.
저 그래프는 이렇게 해석해야 옳지 않을까?
이승만 집권 기간 동안의 수출은 일단 절대 규모가 매우 작았고, 상대적으로도 수입 대비 약 20% 정도에 불과했다. 수출 성장은 미미했으며 약 10년 동안 한국전쟁 마지막 해인 1953년을 고점으로, 1958년을 저점으로 한 박스권에서 움직였다.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이 고점이라는 것도 무척 기묘한 이야기이다. 보통 자국 영토 내에서 전쟁을 하고 있으면 파괴와 생산활동 혼란으로 생산능력이 위축되기 마련이므로 수출에도 그만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 표의 수출품 품목을 살펴보면 1953년의 수출은 거의 전적으로(전체의 3/4) 광산물, 특히 중석 수출에 의지한 것임이 드러난다. 뒤이은 54-55년에는 광산물 수출이 1/3까지 줄어들면서 수출총액이 폭락하게 되는데, 이는 전반적인 수출진흥책의 문제가 아니라 중석에만 관련되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같은 기간 동안 농산물과 직물 수출은 대략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에는 어떤 나라든 상당히 무리한 정책을 펼 수 있기 마련이어서 이 시기의 결과들을 갖고 이승만 집권기의 정책을 대표하는 듯이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1953년의 주요수출품인 광산물의 경우, 1947~49년간 광산물 수출은 10% 미만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저정도 하락은 정상상황으로 돌아간다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이승만의 수출진흥책이 대단한 효과가 없었다는 것은 사실 미국 측의 시각이 아니라 한국 측 연구자들부터가 인정하는 것이다.
민간의 관심은 여하히 달러를 배정받아 수입을 할 수 있느냐에 집중되었지 수출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한국 수입소요량은 외원에 이해 자금이 조달되었으므로 이 기간중에 수출을 증가시키려는 노력은 많지 않았다. … 비록 정부는 수출진흥책을 통해서 수출장애요소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수출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 한국의 생산능력은 아직도 대단히 적었고 기업부문에서는 미국원조불 배정과정에서 보다 나은 영리적 기회를 추구하게 되었다. … 이 기간 전체를 통해서 대외무역정책상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국원조불과 국제연합사령부에서 나오는 외환수입을 어떻게 배정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 이 기간[1953~60] 중에 수출은 신장되지 못했지만 약간의 수출진흥책은 있었다. 그러나 이 수출진흥책은 적극적으로 수출을 진흥하기 보다는 수출에 대한 불리한 요소를 방지하는데 그 중요성이 있었다. (김광석&Westpal, 『한국의 외환,무역연구』, p.52, 59)
이 표는 1인당 GNP가 한국 정도인 나라는 대략 어떤 경제통계를 보여주는가에 대한 것이다. 맨 오른쪽이 비교대상이 되는 평균적인 국가 모델이고 왼쪽과 가운데는 1955년과 1960년의 한국의 실제인데, 다른 것은 대충 비슷한데 반해
수출의 비율만큼은 놀랄만큼 작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 이 표는 수입품을 그 성격에 따라 나눈 것인데, 공작기계 같은 생산재를 자력으로 생산할 능력이 없는 후진경제인 한국 치고는
1950년대 내내 투자재 수입 비중이 굉장히 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이 표의 중간재/원료재는 주로 연료와 비료로 국내 가공이 되는 품목들은 아닌데 주의하자.
투자재 비율이 이처럼 낮다는 사실은 앞서 비판받았던
"자본재 30%, 소비재 70%로 미국의 주장이 관철"이란 논점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는 미국이 공적원조에 자본재 30% 약속을 지켰다고 간주한다면,
한국(정부+민간기업) 자신의 자본재 수입 비율은 그것보다도 훨씬 낮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엔 달러만 배정받아 소비재를 수입하면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시대로 유명하고 그에 관련된 수많은 비리사건을 당시 신문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 민간부문의 자본재 수입 비율은 극히 낮았을 것이라고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도 자기 돈으론 안 하는 것을 미국이 원조로 대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긴 어렵지 않을까?
sonnet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경제개발5개년 계획 같은 계획 경제안이 장면 정부에서 비롯해서 박정희 정부에서 꽃 피운 정책으로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Crete)
이 지적은 내가 앞선 글에서 묘사한 상황을 조금 잘못 이해하고 있다. 앞선 글에서는
이승만 정부 말기인 1958년에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가 설립되면서 시작된다고 밝혀둔 바 있다. 이 위원회 위원 중 상당수는 제2공화국에도 유임된다. 이들은 조직과 인력, 결과물 면에서 최종적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직접적인 연결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만 연속성이 있는 이 위원회에서도 정권이 바뀌자 앞서
이승만 스타일이라고 묘사한 특유의 억지스러움이 계획에서 제거되어, 후대에 실제로 실시된 계획에 가까운 형태로 변모하게 되었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승만 정권의 어떤 정체성이 이 계획의 병목이었을 가능성을 추측케 한다.
결론어느 나라에도 경제성장을 반대하는 대통령은 없다. 특히 다른 대가 없이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 그렇다. 문제는
정책목표들이 상충될 때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이승만에게서 인정해줄 점은 경제성장을 준비한 대통령이라는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웠던 시기에 미국을 후려쳐 원조를 최대한 짜내 국민들과 나눠먹으면서 위기를 넘겼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때 원조밀가루 나눠먹은 사람들의 후손이 바로 우리인 만큼 그런 점은 인정해줄 수 있다. 반면 1950년대의 원조는 받으면 받을수록 후대의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수출을 구축하는 측면이 있었다.
원조와 수출이라는 목표가 충돌할 때 이승만 정부는 언제나 원조를 선택했다. 이 점을 부인할 수 있는가?
부기. 논평자의 의견에 대한 간단한 논평앞서 내 글이 극도로 편파적이라는 평가를 보고 사실 좀 놀랐다. (사실 누가 자기 글을 편파적이라고 생각하겠냐마는...)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런 평가가 내려진 진짜 이유는 아래와 같은 구절에 있는 것 같다.
a) 박정희 전 대통령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영웅으로 평가하는 요소로 삼는 것은 합리적인 해석은 아니라고 봅니다.
b) 즉 자신이 선호하는 지도자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전임자의 노력을 폄하하거나 희화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Crete)
필자는 박정희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영웅으로 평가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밝혀 둔다. 아울러
자신이 선호하는 지도자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다는 해석은 더더욱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해 두겠다.
사실 앞선 글에서 1964년에서 이야기를 끊은 것은 그 뒤로 가면 박정희 시대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를 해야 해서 일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글은 박정희를 영웅으로 평가한 것이 아니고,
일부러 다루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한국현대경제사에서 1964년을 경계로 해서 시대를 나누는 연구는 산처럼 있다. 그걸 내가 어떤 의도를 갖고 택했다는 생각은 버려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