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는 의문 (foog)에서 트랙백.
Joseph Stiglitz가 쓴 경제학 원론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4) 누가 어떤 절차에 의해 경제적 의사 결정을 내리는가? 소련과 같은
중앙계획경제에서 정부는 경제활동의 거의 모든 측면에 대해 책임을 진다. 앞의 세 가지 질문에 답하는 주체는 정부다.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생산할 것이며, 누가 소비할 것인가는 관료제를 통해서 중앙경제계획 담당 부서가 결정한다. 경제체제 스펙트럼의 다른 한쪽 끝에는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생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자유로운 상호교환에 주로 의존하는 경제가 있다. 후자에 가까이 있는
미국은 혼합경제이다. 즉 공적(정부의) 의사 결정과 사적 의사 결정 사이의 혼합경제다. 그 사이에서 생산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고, 자신에게 적절한 생산방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생산물은 소득에 따라 소비자들에게 분배된다.
Stiglitz, Joseph E.,
Economics 2nd. Ed., W.W. Norton, 1997
(김균 안현효 역, 『
거시경제학』, 한울아카데미, 2002, pp.45-46)
고전적 케인스주의가 절정을 구가하던 5,60년대는 이런 입장이 서방 주류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수정자본주의니 혼합경제니 하는 말들이 미국이나 서유럽 경제를 가리키는데 널리 사용되었다. 이 시기는 대공황 때
죽도록 고생해본 세대들로 꽉 차 있던 시절이라 지금처럼 시장의 무결성을 목청높여 외치긴 매우 힘든 분위기이기도 했고 말이다.
폴 크루그먼은 왼쪽으로부터는 오른쪽이라고, 오른쪽으로부터는 왼쪽이라고 공격당하지만, 실은 오른쪽에 훨씬 더 가까운 케인스주의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는데, 이것은 혼합경제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인 듯하다.
다른 주요 지적 공헌들처럼 케인스의 사상도 심하게 비판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뿌리 깊은 원인이 있기에 대규모의 경제 침체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경제 침체는 본질적으로 신호 혼선의 문제에 불과하며 이는 돈을 약간 더 많이 찍어냄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는 케인스의 주장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집권 초기에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대공황 극복을 위해 통화 증발 계획을 제안한 메모를 받았다고 한다. 이 때 그는 “너무 쉽군”이란 말 한 마디로 기각했다고 한다).
좌파들 역시 오랫동안 케인스와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마르크스 이래로 그들은 경기 순환을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성과 궁극적인 붕괴의 증거로 간주해 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기 순환이 제도상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도 해결될 수 있는 기술적인 문제라는 견해에 적이 실망하였다.
그러나 케인스에 대해 가장 큰 적개심을 보인 쪽은 언제나 우파였다. … 더욱 심각한 것은,
케인스가 정부 역할의 확대를 정당화한 것 같았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이 케인스를 싫어하였다는 점이다. 케인스의 경기후퇴이론은 경기 후퇴를 민간 시장이 일종의 교통 혼란에 빠져 버린 상황, 즉 정부의 조치만이 풀 수 있는 그러한 상황으로 본다. 케인스 자신은 결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고, 그의 친구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자본주의가 더욱 잘 돌아가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았지 자본주의를 대체해야 할 근거로 보았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항상 케인스의 경제학을 정부의 대대적인 시장 개입을 노린 미끼로 간주하여, 다른 대안을 모색하면서 케인스 주의를 거부해 온 것이다.
Krugman, Paul.,
Peddling Prosperity: Economic Sense and Nonsense in an Age of Diminished Expectations, W. W. Norton, 1994
(김이수, 오승훈 역, 『
경제학의 향연』, 부키, 1997, pp.5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