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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
사실관계 확인의 중요성(foog)에서 트랙백

저는 처음에 저 글이 트랙백으로 왔을 때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길잃은어린양)을 소개하는 정도로 충분한 답변이 된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이야길 보니까 좀 더 설명이 필요한 모양이군요. 제가 느끼기엔 북한 측에 대한 평가도 문제이지만 그 대조군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경제성장과정에 대한 평가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1) "결과론적인 비판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자랑한 경이적인 성장은 사실 그 자체가 무상원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깨비였던 셈입니다." 이 표현을 sonnet님이 쓰신 방법으로 남한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

2) 특히 박정희 시대에 들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누가 봐도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의 그것을 노골적으로 베낀 것이었다. (foog)

이상 두 가지 논점에 대해 반론해 두기로 합니다.

1)항에 대한 제 의견은 남한의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은 무상원조를 받아서라기 보다도 무상원조를 끊어나간 데 요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2)항에 대해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제목만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북한이나 사회주의 국가를 베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1. 광복 후 한국전쟁 발발까지

미국의 대한원조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이어 미 제24군단이 점령군으로 한반도 남부에 진주하여 군정을 펼치면서 시작됩니다.

이 시기의 미국원조는 GARIOA(Government Appropriations for Relief in Occupied Areas)라고 불리는데 이름 그대로 (통치의 안정을 위해) 점령지에 구호물자를 뿌린다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원조의 기본목표인, (1) 기아와 역병의 방지, (2) 농업생산의 증가, (3) 기본적 소비재의 공급도 그렇거니와, "초기원조물자의 90% 이상은 가공하지 않고도 즉시로 분배할 수 있는 완제품형태의 품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당시 원조의 주요 품목은 식량, 석탄, 유류, 기타 소비재 등이었으며, 유일한 생산재라고 할 수 있는 비료 또한 산업적 고려에서가 아니라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미국 원조계획을 담당했던 E.A.G. Johnston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시도해 볼 수 있었던 경제개발계획이 만족할 만큼 광범위한 것이 못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미의회가 승인한 위임사항에 따르면 미육군의 임무는 영양부족과 역병과 불안의 방지를 주목적으로 하는 단기적 대한원조를 공여하는데 국한되었고 우리들은 그러한 지침을 크게 넘어선 일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끊임없이 받았다."

그리하여 1948년 일단 남한 정부가 수립되자 미국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은 급한 불을 끄는 긴급원조 성격 외에 약간의 개발성 원조를 추진합니다. 여기에는 석탄자원 개발과 비료생산 증대가 주요 사업이었습니다. 비료는 당연히 식량난 해결을 위한 것이고, 석탄은 북한으로부터의 전력송전이 끊겼기 때문에 화력발전으로 이를 대체해야할 필요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1950-53)이 발발해 모든 계획은 작살이 납니다. 광범위한 파괴와 엄청난 수의 피난민이 발생하면서 모든 노력이 중단되거나 긴급구호 성격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종전 후에도 수 년 동안은 구호와 복구에 치중하느라 개발에는 손을 대지 못합니다.



2. 1950년대의 무역과 환율 정책

이제 해방 후의 무역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광복 이전 식민지 조선의 교역은 일본에 거의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늘 7~80% 이상이 일본과의 교역이었죠.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군정 시대로 넘어가면서 한국의 무역은 전멸합니다.

자료가 근사치나마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민간 및 정부자금에 의한 무역은 [해방 후부터] 1948년까지 전면 중단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추단할 수 있다. … 1947년도에 공식경로를 통한 실질무역량이 1939년도 무역량의 1%에나마 해당되었다고 보아지지 않는다.
… 한국 근대화과정에서 무역과 외원을 고찰하는 마당에서 긴요한 점은 2차대전 종결에서 한국동란에 이르는 기간 중에는 통상적인 상업적 국제무역이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극소규모였다는 사실이다.

Krueger, Anne, 『무역외원과 경제발전』, pp.28-29

이어 1950년부터는 한국전쟁이 발발해 3년이나 끌었으니 이 시기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군을 중심으로 한 UN군이 대거 한국에 투입되어 전투를 벌이게 되면서 이후 1950년대의 한미관계를 좌우하게 될 중요한 문제가 하나 발생하게 됩니다.
이들 UN군은 본국으로부터 병참지원을 받게 되어있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지에서 여러가지를 조달할 필요성은 늘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를 위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한국정부는 UN군 사령부에 많은 한화(韓貨)를 「대여」해 주기 시작합니다. 이 때 이러한 대여금은 추후에 「외환」으로 상환하며 구체적인 상환조건은 추후 협상을 통해 확정짓기로 상호양해가 되었습니다.

한편 전쟁으로 사회가 쑥대밭이 된 만큼 남한 사회에 재화와 용역의 공급이 크게 감소했을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반면 전쟁 중에 불환화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화의 공급은 오히려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강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발생하고 한화의 가치는 계속 떨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앞서 UN군에게 대여해준 한화를 외환으로 돌려받는 과정이 엄청 수지맞는 장사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무역이 거의 없어서 외화획득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원화를 주고 외환을 돌려받는 것처럼 땅짚고 헤엄치기는 없었던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이 꿀단지에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돌려받는 외환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식 환율을 비정상적으로 높은 지점에서 유지시킵니다. 즉 원화가 과대평가된 것이지요. 앞서 말한 것처럼 인플레이션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공식환율과 (암)시장 환율의 격차는 커져만 갑니다. 공식환율과 암시장환율의 격차는 200~500%를 넘나들었고, 종종 평가절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간격을 좁히는데 실패합니다. 심지어 1953년 12월에는 한 방에 300% 평가절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언 발에 오줌누기 이상은 되지 못했습니다.

보통 이렇게 하면 과대평가된 환율 때문에 수출이 타격을 받게 되기 마련입니다만, 한국정부는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수출은 없었으니까요. 아무도 불만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한 추산(Frank, Kim & Westphal)에 따르면 1953년 수출은 GNP의 2%, 수입은 12.9%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 원조물자는 수입과 또 별도입니다. 이 엄청난 격차를 뭘로 메울 수 있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1950년대에 "원조는 으뜸가는 외환원이었으며 주한외국군대에 대한 한화매도는 두 번째로 큰 외환원"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Krueger 67)

이처럼 1950년대 내내 일관되게 추진된 한국의 무역외환정책의 기본방향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원조수입 극대화전략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과대평가된 환율을 유지하는 한편, 이렇게 들어온 외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강력한 수입규제를 펴고 수입대체산업지향적 국내경제활동에 역점을 둡니다. 아무리 아껴쓰려고 노력해도 필수적으로 수입해야 될 것들은 있기 마련이므로 외환을 아낄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는 미국정부 측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무역,국제수지정책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이 점은 한미 간의 으뜸가는 쟁점 사안이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측 시각으로 보자면 빈대치는 한국 측이 환율을 갖고 장난을 쳐 가며 원조를 주는 미국을 벗겨먹으려고 드는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3. 미국의 원조정책 전환

한국전쟁이 종료된 1953년부터 1957년 사이의 5년간 원조는 계속 늘어납니다. 이 시기에 원조빨에 힘입어 기본적인 전후복구가 이루어지고 경제성장도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 같은 이유로 미국의 불만은 쌓여만 갑니다.

전쟁 중에는 비상상황이었거니와 어쨌든 일단 공산세력의 세계적화야욕을 저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럭저럭 넘어갔었습니다만, 한국 정부가 상황이 허락하는 한 끝없이 이 짓을 계속해 나갈 심산임이 분명하다고 느껴지자, 드디어 미국도 칼을 뽑아듭니다.

1957년부터 미국 관리들은 앞으로 원조가 줄어들 것임을 천명하기 시작하고, 한국정부에게 강도높은 자구책을 요구합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나서자 1958~60년 사이에는 성장이 크게 정체됩니다.

이 시기 미 국무부의 외교사료집인 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한국편을 보면 수록된 전체 전문의 2/3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원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분위기를 엿보기 위해 그 중 두어 가지만 뽑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Telegram From the Embassy in Korea to the Department of State
Seoul, September 15, 1959, 5 p.m.


On the other hand if ROKs become convinced that alternatives are between austere maintenance of present force - with possibility of gradual deterioration - and modernization of somewhat smaller force, their reluctant choice will almost certainly be latter alternative.

(주한미대사) Dowling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8-1960 Vol. XVIII Japan; Korea, U.S. GPO, p.583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국군은 10만 규모에서 100만 대군으로 뻥튀기됩니다. 당연히 이런 군대를 먹여살릴 돈은 전혀 없었고 전적으로 미국의 군사원조에 힘입어 지탱을 하게 됩니다. 이 전문은 (한국이 버티고 있지만 미국이 원조를 줄여서 목을 조르면) 결국 못견디고 군대 규모를 줄이게 될 것이라는 미국 대사의 전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Memorandom of Conference With President Eisenhower
Washington, Semtember 14, 1960 9 a.m.


The President said that Korea get a disproportionate share now of available U.S. foreign aid. In answer to the President's question, the Ambasador said that $165million in military support funds are planned for Korea during this fiscal year.
(중략)

In answer to the President's question, Ambassador McConaughy said that the army pay scale is comparable to that in the rest of the country. Their top-ranking generals are paid the equivalent of $70-80 per month. This fact produces a temptation to corruption - the selling of tires and gasoline and the like. The situation is better, thanks to the work of General Magruder who is a logistics expert. The Ambassador said he feels that with it all the Koreans must keep a strong military position. The President agreed. The Ambassador said the new government would like to cut military strength by 100,000 men. General Magruder considers this too high a figure under his present instructions and would prefer the cut restricted to 50,000.

FRUS 1958-1960 Vol. XVIII Japan; Korea, pp.692-693

이 당시 한국은 워낙 별볼일없는 국가여서 대개의 처리가 국무부 극동차관보와 주한미대사 정도 선에서 이루어지고, 이렇게 FRUS 중에 미국 대통령이 등장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 대외 원조에서 비정상적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새 정부(장면 정부)가 10만명의 감군을 추진하고 있다는 언급입니다. 이 당시 한국군은 급조된 군대이고 매우 젊고 경력이 일천한 장군들과 속성으로 양성된 엄청난 수의 장교들로 인해 극심한 인사적체를 겪고 있었습니다. 장군들이 젊다보니 정년퇴직을 기다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소장파 장교들은 큰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후에 5.16 쿠데타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됩니다.



4.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

우리나라의 경제개발계획은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년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가 설립되면서 시작됩니다. 한국측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장기원조를 미국에서 구하고자 했고, 이런 요구에 대해 미국은 요구하는 3~5년 베이스의 원조를 덜컥 줄 수는 없지만, 일단 계획작성을 후원하겠다고 대응합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산업개발위원회 운영비를 대충자금에서 지원하고, 계획작성을 도울 고문들을 파견합니다.

여기서 대충자금(對充資金)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것은 미국이 현물로 준 원조물자를 한국정부가 국내시장에서 판매해 현금화한 자금입니다. 이것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1950년대에 대한민국 중앙정부지출의 매우 큰 몫이 대충자금에 의해서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1957년에는 대충자금이 정부세입의 53%이었던 반면, 통상적 재원(주로 조세)은 정부세입의 34%에 불과했습니다. 미국정부는 대충자금을 어디 쓸 것인지에 대해 발언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 정부의 대부분의 사업에 개입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남의 돈 거저 먹기가 쉬운 건 아니었던 것이죠. 즉 위 사건에서 미국이 반대했으면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는 생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장기원조 요청은 허공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미국의 원조축소 계획에 대응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미국으로부터 생활비를 계속 대 줄 수 없다는 통고가 오자, 한국측은 그럼 자립하긴 할테니 출발자금을 대 달라고 요구한 것이고, 다시 미국은 우선 계획부터 세워 현실성을 따져보자고 대응한 셈입니다.

결국 이승만 정부에서는 3개년 계획을 준비하지만, 이것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한 채 끝납니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장면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면서 미국에 접근합니다. 이에 따라 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10월 4일 경제개발계획 의지를 표현한 「한국의 경제개혁방책에 관한 각서」라는 외교문서를 미국무장관 허터에게 보냅니다.

"본 각서는 오늘날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긴박한 경제사정과 한국정부가 과감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개괄적 개혁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의 경제적 애로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몇가지 대책과 아울러 이러한 광범한 개혁을 신정부가 강력히 수행해 나가는 데 소요될 재정적 부담도 동시에 밝히고 있습니다. … 따라서 우리는 귀국의 증여 원조가 현수준에서 유지되어야 할 것은 물론 이에 더하여 새로운 경제개발사업을 추진하는데 소요되는 특별경제원조와 경제안정기금을 마련하여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장면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이승만 정부의 「3개년 계획」과 상당히 다른 반면, 후에 박정희 정부에서 실제로 실시된 「5개년 계획」과는 매우 흡사합니다. 3개년 계획과 5개년 계획의 제일 큰 차이는 모든 부문을 골고루 발전시킬 것이냐, 특정 부분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돌파구를 여는 불균형전략을 취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계획은 초안 수립 후 미국인 고문 찰스 울프 박사의 검토를 받습니다. 1961년 3월에 울프는 Singer, Hirschman 등의 경제성장이론에 비추어 불균형성장전략이 타당하며, 미국 원조 의존도를 낮추고 내자동원의 비율을 높일 것을 요구하는 검토의견을 제시합니다. 이 계획이 완성되자 한국측 대표는 1961년 5월 9일 미국 워싱턴의 국제원조처(USAID)를 방문해 경제개발계획안을 제출합니다. 이것은 한국 국무회의에 보고된 5월 12일보다도 빠른 것입니다. USAID는 울프의 견해가 미국의 정책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즉 이 계획은 계획수립도 미국이 댄 돈으로 하고 있었고, 미국인 고문으로부터 미국 정부의 시각을 대변하는 컨설팅을 받았으며, 완성되자마자 미국에 보고도 했습니다. 한국 경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돈을 안대주면 제대로 굴러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무슨 계획이건 전주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누가 봐도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의 그것을 노골적으로 베낀 것"이란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음이 잘 드러납니다. 5개년계획의 원조가 소련인 것만큼은 사실이지만, 공통점은 거기서 끝나니까요.

박정희 본인이나 그 수하들 중에 소련의 경제정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산권으로부터의 컨설팅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전적으로 미국의 입김 하에 장면 정부 하에서 완성된 것이고, 군사정권은 이를 소폭 수정하였을 뿐입니다. 이 미국의 컨설팅을 받은 계획에 이미 요즘 혹자가 말하는 사회주의적(?) 요소는 다 들어 있습니다.

한국경제체제는 자유기업제도와 정부에 의한 경제정책의 병존이며 이는 곧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인 것이며 혼합경제체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혼합경제의 방도는 기업의 자발적인 계산과 그에 따르는 결의를 고도로 존중하며 이에 모순없이 계획의 주체인 정부가 간접적인 통제방법을 채용한다. ...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계획 성격의 중대한 역점은 다부문 균형적인 성장지향 방도를 포기하고 후진 국가의 특색인 전략적인 애로부문을 우선 타개하는 요소공격식 접근방식을 시도하기 위하여 정부투자계획을 중점적으로 배정하기로 하였다. ... 여기에 따라 국가가 직접 그 실현수단을 보유하는 정부 공공부문에 대하여는 가급적으로 주체적이며 실행가능성이 있는 계획을 작성하고 기본적으로 그 활동을 기업의 창의와 연구에 기대할 민간 부문에 대하여는 예측적인 것으로 입안하여 그 방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유도하게 한다.

건설부,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시안) 상』, 1961. 5., 4-5쪽.

오히려 박정희는 그 경력상 만주국의 중공업 군사기지화 정책이었던 「만주 산업개발 5개년계획」에 대한 지식이나 인상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후대의 5개년 계획들에서 제철, 기계, 조선과 같은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진행해 자주국방 노선으로 연결시킨다는 구상과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5. 원조경제에서 수출경제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립이 장면 정부의 유일한 결과물이었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1년도 안 되는 짧은 통치기간 동안 장면 정부는 1공화국의 원조경제에서 3공화국의 수출주도경제로 넘어가는데 결정적인 조치를 하나 취합니다. 이 점은 그들이 계획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적절한 정책을 집행할 의지와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장면 정부는 1961년 1월에 원화를 1$=65원에서 100원으로 평가절하, 다시 2월에는 1$=100원에서 130원으로 평가절하를 단행합니다. 결과적으로 100%평가절하를 한 것이지요. 이 조치는 박정희 정부 하에서 이루어진 1964년 5월의 평가절하(1$=130원에서 257원으로)와 함께 원조극대화전략에서 수출전략으로의 전환에 결정적인 장면들 중 하나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승만 정부 하에서 수출이 비정상적으로 낮았던 근본원인은 수출이 불가능한 환율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환율 문제가 해결이 되자 수출은 빠르게 늘어납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원래 수출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평균적인 수준으로 회복되는 과정 자체가 빠른 수출증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수출은 수출액 기준으로 61년 21%, 62년 42%, 63년 58%, 64년 37%, 65년 47%의 증가세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평가절하와 함께 이중환율제를 해소하고 환율일원화로 전환하는 조치들도 진행됩니다.

5.16으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수출진흥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갖고 수출지원책을 펴 나갑니다. 이 점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군사정부는 재정안정화 정책을 포기하고 팽창적인 정책을 편 결과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고 이에 따른 수입수요가 급증해 1963년에는 결국 견디지 못한 채 그간의 자유화 정책을 포기하고 외환쿼터와 수입물량 제한으로 돌아섭니다. 결국 1964년의 평가절하는 시행착오 끝에 장면 정부의 1961년 평가절하와 비슷한 일을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입니다.

1964~5년 정도를 전환점으로 삼아 이 이후는 완연한 수출주도경제가 자리를 잡습니다. 이 이전은 시행착오도 많았고, 이승만-장면 정부의 유산이 이어졌다고 볼 여지도 있지만, 이 이후의 결과는 공과가 모두 확실히 박정희 정부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64년 이후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질 때까지 10년 정도는 박정희 정부의 전성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 과정에서 무상원조는 크게 축소되어 나가다 1972년을 끝으로 종료되고 이 기간 동안 대신 한국정부는 차관의 비중을 늘려나갑니다.


다음 글에서는 제가 볼 때 북한의 경제정책이 실패하게 된 주요 요소 한가지에 대해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by sonnet | 2008/07/23 18:57 | 정치 | 트랙백(3) | 핑백(3) | 덧글(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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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길 잃은 어린양의 놀이터 at 2008/07/23 23:56

제목 : 남한과 북한의 5개년 계획에 대한 몇 가지 잡상
지난 해에 북한 경제 관련 논문을 조금 읽다가 생각난 것들을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이 라는 제목으로 끄적인 적이 있었는데 최근 sonnet님 등 여러 대인들께서 이 썰렁한 잡글을 인용해 주셔서 조회수가 대폭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인용된......more

Tracked from Crete의나라사랑_2.. at 2008/07/24 09:08

제목 : 50년대 미국의 극동 정책 변화와 이승만 정부의 수..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sonnet)에서 트랙백 ( http://sonnet.egloos.com/3836641 )1. 한국전 이전의 수출진흥정책sonnet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경제개발5개년 계획 같은 계획 경제안이 장면 정부에서 비롯해서 박정희 정부에서 꽃 피운 정책으로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승만 정부 당시의 경제 관료들의 노력을 한번......more

Tracked from foog.com at 2008/07/24 10:27

제목 : 풀리지 않는 의문
1) "결과론적인 비판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자랑한 경이적인 성장은 사실 그 자체가 무상원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깨비였던 셈입니다." 이 표현을 sonnet님이 쓰신 방법으로 남한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2) 특히 박정희 시대에 들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누가 봐도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의 그것을 노골적으로 베낀 것이었다.(원문보기) 지난번 sonnet님이 추천해주신 ‘길잃은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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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nnet</a>)란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상원조가 줄어듦과 동시에 "원조경제에서 수출경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경제성장은 주로 성공적인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의 결과물이라는데 폭넓은 합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승만 정권기의 원조의존적 수입대체 산업화가 왜 수출주도 산업화로 바뀌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왜? 그림 1. 이승만 정권기에는 내수지 ... 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09/09/27 11:37

... 뭐 좀 있어보이는 묘사. 하지만 실제로는 저렇게 뭐 있어보인다고 주장할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위 덧글이 달린 글이나 그와 연관된 일련의 포스팅(예를 들면 이 글이나 이 글)에서 충분히 다룬 것 같다. 적어도 "57년부터 경제가 살아나…"라고 말할 상황은 아니다. 여기서는 1956년에 부흥 5개년계획이 어떻게 작성 ... more

Linked at 북한은 정말 잘 살았었나? .. at 2015/02/09 05:22

... http://sonnet.egloos.com/3836641</a>] 셋째, 쿠바사태를 본 북한은 소련 중공 등에 의존하느니 자력갱생하겠다며 소위 주체사상을 통해 사상/경제/정치/국방을 홀로 세우는 길을 택했다. 이로 인해 수출대전 및 차관을 갚을 길이 묘연해져서 나중에는 돌리던 공장들의 중요부품을 수입하지 못해 수시로 중단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북한이 자립경제를 선택한 것과는 정반 ... more

Commented by Alias at 2008/07/23 19:07
장면정권 당시의 환율절하와 5개년 계획의 대강은 들어본 거 같지만 이승만 정권당시 원화로 빌려주고 외화로 갚는 계약은 첨 듣는 거네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25 08:46
네, 그건 제2의 외환입수채널이라는 위상으로도 그렇고, 당대 한미관계의 주요쟁점이라는 점도 그렇고 무척 큰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개멍 at 2008/07/23 19:19
아흑 사랑해요 검역소장님!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25 07:45
하하.
Commented by maxi at 2008/07/23 19:29
오일쇼크때 막장이었던것은 원자재 수출한 부칸이나 아직 경공업 중심이었던 정권 말기의 박정희 정권이나 거의 비슷했지만 경제적인 타격은 훨씬 북한이 더 컸는데,(박정희 정권 말기의 좀 참담한 경제지표는 박정희 싫어하는 사람들이 '오오 경제를 발전시킨 박정희' 라는 논지를 까는데 주로 사용되더군요.그런데 그떄 북한의 상황은 더 막장..)

결국 부칸은 그럼에도 정권을 지키고 세습에 성공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심해지는 민주화 시위(이게 실업률이나 물가상승률의 압박과는 영 상관없다고 보지만, 이 상관관계에 있어서 제대로된 연구자료가 있는지는 의문)+거기에 삘받은 김재규에 의해서 암살당했죠.

그런면에서 볼때 확실히 정권 지키는 기술은 박통보다 지도자 동지-_-) 인지 똥지-_- 인지가 훨씬 수완이 좋고 우리 박대통령은 독재자의 권력을 쓰는데에 너무 미숙하지 않았던가 싶은 부분이 여러가지 있습니다.(그양반이 벌려놓은 사업으로 인한 칭송은 사실상 후임 대통령이 물려받았다던가...)

쓸데없는 이야기는 각설하고,
제가보기에는 "북한의 경제개발 계획을 따라했다" 는것은 분명한 오류로 보입니다.
하지만 좀 국지적인 부분으로 가면 공산권의 벤치마킹을 한 부분은있습니다. 학자들이
제일 많이 드는 것이 "천리마운동" 과 "새마을 운동" 의 유사성이고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박정희가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 에 대한 인상이 있었는지도 사실 좀 의문이고(만주군 복무 당시 박정희가 그정도의 정치/경제에 대한 관심이 있엇다고 보기에는;;) 그보다는 자기가 직접 창시(...) 한게 확실시하고 경제개발 계획보다 단순하고 지엽적인 부분을 벤치마킹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봅니다.
Commented by 홍월영 at 2008/07/23 21:31
최규하부터 시작해서 상당수의 관료가 만주건국대학이나 혹은 1945, 1944년 양년간에 - 일본의 인적자원 부족(....) 으로 인한 - 공채된 한국(조선)인 신진관료들 출신임을 감안한다면...?
Commented by maxi at 2008/07/24 00:12
그렇게 되면 여기서는 "위대한 지도자 동지들이 경제를 얼마나 구원하고 말아먹었는냐" 기때문에 오히려 그걸 논지로 들면 지도자 동지의 활약상이 줄어들기때문에 전 반대합니다!

ㅋㅋㅋ
Commented by ohnemich at 2008/07/24 00:24
의외로, 요즘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 완벽했다는 주장이 많던데, 초기 북한의 경제성장에 대해서도 브루스 커밍스같은 인물들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더군요. 근데 북한의 통계가 공산국가의 특성상 '뻥튀기'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신뢰성에 대해 꽤나 의문이 듭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단위당 식량생산량에서 북한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북한의 식량요구에 대해 국제기구 관계자들이 꽤나 놀랐더라..는 요지의 말도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경제개발계획이라는 단어의 효시가 대인배들의 원산지인 USSR이긴 한데, 그걸 모방했다고 생각하긴 힘들더군요. 물론 박정희씨가 남로당에도 발을 담근 경력이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만주국과의 관련성이라.... 만주국과 박정희 정부간의 정책적 연관성이 자주 발견되는 모습을 보면 경험에 따라 무의식적이나마 하나의 모델로 작용한 듯 싶더군요^^
Commented by ohnemich at 2008/07/24 00:26
아 죄송합니다^^

코멘트 다시는 동안에,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이유를 설명해 주셨군요

(본의 아니게 깐데 또 까게 되어버린 시츄에이션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Commented by 나츠메 at 2008/07/23 19:40
sonnet님/
오오 이런 걸 원했습니다. 혹 국내판 참고 자료도 있으면 좀 제시해 주시와요.
Commented by Ya펭귄 at 2008/07/23 21:08
64년 환율평가절하의 이유로는 달러화 대비 1인당 임금문제(대만 등...)도 작용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1인...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25 07:50
사실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은데요. 환율로 가격조정을 한 거니까요.
Commented by 키치너 at 2008/07/23 21:11
대충자금이 정부 지출에서 저만큼 비중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장면 정부의 5주년 계획에 미국의 입김이 저렇게 작동했군요. 다음글도 기대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25 07:52
대충자금은 남의 돈 먹는거니까 받는 건 좋은데, 이게 대신 정치적으로 종속되는 거라서 나쁜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요. 대충자금의 비중은 박정희 정권 초까지도 여전히 높았던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안모군 at 2008/07/23 21:47
만주국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해서는 소련의 영향을 많이 언급하는 편입니다. 실제 만주국의 경제정책들이 대개 본토에서 떨려난 지식인들에 의해서 많이 만들어진데다, 이들 중에는 소련 물이 든 사람도 좀 있다고 하니까, 어느정도 연결고리는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사실, 박통이 중공업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박통과 끈이 닿을만한 만군/만주국계 인사들에 의한게 좀 후기의 경제개발계획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세지마 류조라던가.

그나저나 이승만 시절의 경제정책은 정말로 제3세계스럽군요. 그 뒤의 박통도 만만찮은 3세계성이 있지만, 50년대는 정말 아프리카의 어느 빈국 이야기라고 해도 믿지 않을까 싶어지는군요. 그래서 그 시절 기업하던 양반들이 좋은 소리를 안하는 거겠지만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25 08:11
1. 저는 지금 thinkpad 노트북을 쓰고 있지만, 이 컴퓨터가 Apple II를 베꼈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족보를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영향을 받은 뭔가가 나오겠지만요.
박정희의 5개년계획은 사실 W.W. Rostow의 학설과 통하는데가 많습니다. 실제로도 딱 그 시점의 워싱턴 실력자이기도 했구요. 그런데 Rostow의 The Stages of Economic Growth: A Non-Communist Manifesto가 고스쁠란을 베낀거냐? 그건 아니죠.

2. 만주국 시절의 인사들이 전후에 통산산업성으로 연결된다는 주장을 MITI & japanese miracle에서 본 것 같습니다.

3. 사실 실제로도 미개발국이니까, 제3세계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지도요.
Commented by theadadv at 2008/07/23 22:02
그래도 그 시절에도 윗대가리들은 어떻게든 굴러가도록 노력은 했었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25 09:48
그렇죠. 종종 매우 거친 방법으로...
Commented by 훗훗훗 at 2008/07/23 22:30
다른것보다 역사가놈들은 사료발굴좀.....

어째 박정희 관련 소모적 논쟁은 많은데 제대로된 사료는 이리도 없는지.. 기껏해야 연설문집뿐이니.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25 09:51
제가 그 시대 연구 현황을 잘 몰라서 뭐라고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Commented by 행인1 at 2008/07/23 22:50
대충자금이 큰줄은 알았지만 원화를 미군에 팔아 수입을 챙겼을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만 목을 매다는 모습은 영 보기가...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25 09:40
대충자금은 사실 내정간섭의 길을 열어주는 거라서 안 쓸 수 있으면 안 쓰는 게 좋겠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보니...
Commented by sprinter at 2008/07/23 23:00
저는 5.16 군사정권이 대외적인 수출정책에 관심이 있었다는 개념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두가지 이유에 의해서인데, 하나는 아래의 기사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 때문이고(정확하게는 64년까지는 군사정권애들이 수출에 관심이 없었던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구요.)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7/02/12/200702120500036/200702120500036_1.html

두번째는 일반적인 군사정권들의 경향상, 내수대체와 자력갱생을 목표로 삼기 마련이며 이점에 있어서는 박정희도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수출 드라이브라는 일련의 정책들을 설명할수 있는 최상의 모델은 현재로서는 '달러 중상주의'이며, 이 정책은 개념상 1800년대에 이미 부정된 것이기도 하지요.
Commented by reske at 2008/07/23 23:06
미국에게 늘 치이고 간섭만 당하고 살았던 우리나라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은근히 미국을 벗겨먹고 등쳐먹고 살았군요...;;
Commented by sprinter at 2008/07/23 23:08
지금도 제 3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세계은행을 등처먹고 삽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30 13:05
우리처럼 미국 원조를 제대로 받아 본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대는 좀 다르지만 남베트남이나 이스라엘 정도만이 우리의 경쟁자가 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8/07/24 00:00
크. 역시 sonnet님 다운 재미있는 글 이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25 10:03
네, 저도 대인의 글을 잘 읽고 있나이다.
Commented by ohnemich at 2008/07/24 00:04
"국부" 이승만의 행동을 단순히 노망났다고 생각했었는데, 원조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니 '용돈'달라고 떼 쓰는 모습이었군요...OTL

해방직후부터 이승만정부 막바지까지 천자국에서 '원조' 명목으로 털어간 돈이 수십억달러에 달했으니 박사님도 의외로 그런 면(!)에서 능력은 상당한 듯 싶습니다.

(미국을 상당히 털어드셨는데, sonnet님이 적어주신 50년대 말 원조감소로 인한 경기악화가 4.19 혁명의 주요 원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알궂습니다. 원조로 흥한자 원조로 망한달까요?)

PS 1 : 이러한 경제분야를 제외하고 전전 '북진통일' 이나, 전후 '4대강국론' 같은 주장을 들어보면 노망이 드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면에서 전쟁 중 반공포로석방을 진지하게 '원조' 수령을 계산하고 한 짓인지, 개념을 안드로메다에 보내신 결과인지 전혀 모르곘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25 10:02
미국 원조는 절대규모로도 많지만 한국 경제의 규모에 빗대어 보면 더 큰 것 같습니다.
북진통일 관련해서는 앤 크루거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이승만 시대에 전력수요예측을 내는데 북한의 발전용량이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북한의 발전용량을 계산에서 빼버린다는 것은 통일에의 의지가 부족...

Commented by paro1923 at 2008/07/24 00:26
배고프다며 젖 달라고 떼를 쓰다, 젖꼭지 물고 나선 피 빨고 살까지 뜯어먹으려 드니
미국이 그제야 회초리를 든 격이었군요. 이승만의 '떼'가 단순한 노망이라기보단
나름대로 계산한(어디까지나 '나름대로'...) 몽니라는 얘길 들어보긴 했지만,
이런 내막이...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30 13:01
한국의 경제정책에 있어 중요한 전환이 1960년대 전반에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50년대 후반을 정점으로 한 무상원조의 축소와 결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Commented by 三天포 at 2008/07/24 00:57
논란의 대상이 많은 물건은 이런 느낌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제 두가지 이상향중에 하나네요[웃음]
잘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30 13:03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는 특정 지도자에게 credit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기술한다고 한 것인데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Crete at 2008/07/24 09:07
sonnet님께/ 반론입니다.


50년대 미국의 극동 정책 변화와 이승만 정부의 수출진흥 정책
http://crete.pe.kr/2301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30 13:04
잘 보았습니다. 이 관련 토론은 트랙백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으니 그쪽에서 다루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들쮜 at 2008/07/24 12:39
잘 읽었습니다. "특히 박정희 시대에 들어 ~ 노골적으로 베낀 것이었다." 하신 분께는, 그럼 오리지날 정품 경제계획을 가진 북한은 현재 왜 이모양 이꼴이냐고 묻고 싶네요. 윈도우95 출시 당시 논쟁의 일부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윈도우 기술의 대부분은 새로울 게 없는 것들이다! 와 같은..) 경제학엔 문외한인데... 감사히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sprinter at 2008/07/24 13:35
그 베낀것과는 독립적인 다른 이유로 얼마든지 잘 될수 있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30 12:54
그게 실은 (별로인) "오리지널 정품"을 써서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
Commented by 그람 at 2008/07/24 13:59
경제개발에 대한 논쟁은 있고 연구가 없고 이렇게 잘 정리된 글은 정말로 가뭄에 콩나듯 한다는게 경제학과 역사학의 공동연구가 필요하다는게 느껴집니다.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8/07/24 14:28
경제개발에 대한 연구는 아주 많습니다.
Commented by sprinter at 2008/07/24 15:22
너무나도 많은데 쓸만하다고, 또는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하다고 결론난게 많지가 않습니다. 뭘 하면 안되는지는 대략 아는데, 뭘 해야 하는지를 아는게 없다고 할까요;;;
Commented by 그람 at 2008/07/24 19:09
그런가요? 그런데 양측이 싸울 때보면 자료는 없고 그냥 하던 말만 되풀이 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역시 공부가 중요하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25 07:33
어린양 대인께서 잘 지적해주신 것처럼 연구는 아주 많습니다. 다만 소위 인터넷 논객들 중에 그런 연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가뭄에 콩나듯 하다는 것 뿐인 듯 싶습니다.
Commented by 에로거북이 at 2008/07/24 17:25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30 12:42
네, 재미있게 보셨다니 제가 감사하지요.
Commented by 이네스 at 2008/07/24 18:30
역시나 건국후 초창기에는 전주와 알거지간의 벗기는가 벗기지 못하는가의 승부이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야 이제 전주가 돈없음. 배쨀것임! 하니 슬슬 돈벌어볼까? 하는상황이군요...

근데 어째 여러곳에 통용되는듯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30 12:53
제가 보는 이 시대가 그런 구도입니다.
Commented by 지나가던이 at 2008/07/24 19:55
아주 잘 읽었습니다. 여러 주제들을 확실한 근거자료로 설명해주시는군요. 이승만 때의 방법에 대해선 처음 봤는데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30 12:44
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8/07/24 20:29
미국 납세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이승만! -_-;
Commented by 푸하 at 2008/07/25 06:04
그 피는 남한 인민들도 이승만 할배랑 같이 빨아먹었어요. ^^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30 12:51
흡혈귀 앞에 "우리의" 가 붙어야 하는 게 포인트 ㅋ
Commented by Crete at 2008/07/24 21:48
일단 올라온 댓글들을 봐도 sonnet님의 이 글이 미치는 파장을 그대로 체감할 수 있군요. sonnet님의 이번 글은 전적으로 미국쪽 자료와 시각에 의존한 절름발이 글이랍니다. 당시 환율논쟁을 미국쪽에서야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논쟁을 일방적으로 한쪽의 주장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라는 걸 다들 아실 겁니다. 반론을 써서 트랙백으로 올렸으니 sonnet님의 반응이 조만간 나오겠죠. 아무튼 이번 글은 foog님 글에 대한 반론으로는 함량 미달의 곁가지치기였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론링크는 아래 첨부하겠습니다.
http://crete.pe.kr/2301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8/07/25 00:18
그 글에서 궁금한 점이 좀 있군요.

1. 이승만 정부의 각종 수출 장려 정책들로 인해 얼마나 수출이 늘었습니까? 그게 효과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숫자로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겁니다.

2. 1950년대 후반 이전의 미국의 방침이 "일본 산업 부흥을 위해 한국이 일본 공산품의 판매 시장이 되기를 희망했고 따라서 한국의 공업화는 억제하자"라고 하셨는데, 그 방침이 잘못 되었다고 보십니까? 광복 이전에는 조선에서 쌀이나 콩 등의 농산물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일본의 공산품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체제였는데, 산업 인력 구조가 크게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그런 방침을 세운다고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을텐데요. 그리고, 미국이 그런 방침을 세웠다고 미국의 의도대로 되었을 거라고 보십니까?
Commented by Crete at 2008/07/25 02:53
누렁별님께/ 이승만 정권 당시의 수출 통계에 대한 정보를 질문하신거 같습니다. 당시 수출통계 중에 의미있는 수출통계는 1958년 3월부터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그 이전에는 실제거래가격으로 통계가 잡혀 있었던 때문이죠. 1958년 3월 이후부터 수출통계는 FOB로 수입통계는 CIF로 잡힙니다. 따라서 이후부터 의미있는 비교 분석이 가능합니다.

그럼 1958년이후 이승만 정부 말년인 1960년까지의 수출통계를 제시하겠습니다.
1958년 1650만 달러
1959년 1920만 달러
1960년 3180만 달러

이상입니다. 이미 제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1958년 이후 이승만 정부하에서도 수출의 급격한 증가를 목격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즉 59년에 16.4% 그리고 60년에는 65.6%의 급격한 성장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실제 거래 가격에 의한 수출통계만 입수 가능한 이전 통계를 보여 드리자면...
이승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수출을 장려하던 시기, 즉 1952, 53년의 수출 통계치를 제시합니다.
1951년 1560만 달러
1952년 2660만 달러
1953년 3960만 달러
주의하실 부분은 1958년과 단순 비교를 하시면 안됩니다. 아무튼 이 기간 동안 매년 수출 증가율은 70.5%, 48.9% 입니다. 참고로 박정희 대통령 임기중의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38%입니다. 엄청난 기록이죠.

추가 질문이 있으시면 또 알려주세요. 그리고 한미간의 갈등 부분은 나중에 별도의 글로 따로 작성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Commented by Crete at 2008/07/25 06:56
참고로 위에 언급한 수출 통계는 한국은행 자료입니다. WTO 통계와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WTO 통계에 따르면
1958년 1400만 달러 수출
1959년 2000만 달러 수출
1960년 3200만 달러 수출로 나옵니다.
이 기간의 수출 증가율과 박정희 정부의 60년대 수출 증가율을 비교하는 도표는 위에 링크를 달아 놓은 제 블로그글에 업데이트 해 놓았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25 07:31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문제를 제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순차적 방법으로 다룰 것입니다. 제가 말씀하시는 논점을 일부러 피해 가려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Commented by Crete at 2008/07/25 07:56
sonnet님께/ 저 역시 sonnet님께 우려를 갖지는 않습니다. 다만 sonnet님의 이번 글이 가지는 균형잡히지 않은 시각을 염려할 뿐이죠. 실제로 많은 분들이 미국쪽의 일방적인 시각으로 쓰여진 이번 포스팅에 낚이신 걸 보며.. 사실 지난 저의 글쓰기에 대한 반성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저 역시 조만간 당시 한미간의 환율논쟁을 별도의 포스팅으로 준비할 예정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30 12:50
예를 들어 양 쪽의 주장을 기계적으로 반반씩 반영한다고 해서 균형잡힌 시각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사실 저는 그것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보지만 말입니다.) 이런 것은 관찰자가 사리를 얼마나 잘 따져 옳은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니까, 어느 쪽이 균형잡힌 시각인지는 따져 보면 분명히 가려질거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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