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관계 확인의 중요성(foog)에서 트랙백
저는 처음에 저 글이 트랙백으로 왔을 때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길잃은어린양)을 소개하는 정도로 충분한 답변이 된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이야길 보니까 좀 더 설명이 필요한 모양이군요. 제가 느끼기엔 북한 측에 대한 평가도 문제이지만 그 대조군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에 대한 평가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1) "결과론적인 비판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자랑한 경이적인 성장은 사실 그 자체가 무상원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깨비였던 셈입니다." 이 표현을 sonnet님이 쓰신 방법으로 남한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
2) 특히 박정희 시대에 들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누가 봐도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의 그것을 노골적으로 베낀 것이었다. (foog)
이상 두 가지 논점에 대해 반론해 두기로 합니다.
1)항에 대한 제 의견은
남한의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은 무상원조를 받아서라기 보다도 무상원조를 끊어나간 데 요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2)항에 대해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제목만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북한이나 사회주의 국가를 베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1. 광복 후 한국전쟁 발발까지미국의 대한원조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이어 미 제24군단이 점령군으로 한반도 남부에 진주하여 군정을 펼치면서 시작됩니다.
이 시기의 미국원조는 GARIOA(Government Appropriations for Relief in Occupied Areas)라고 불리는데 이름 그대로 (통치의 안정을 위해)
점령지에 구호물자를 뿌린다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원조의 기본목표인, (1)
기아와 역병의 방지, (2) 농업생산의 증가, (3)
기본적 소비재의 공급도 그렇거니와, "초기원조물자의 90% 이상은
가공하지 않고도 즉시로 분배할 수 있는 완제품형태의 품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당시 원조의 주요 품목은 식량, 석탄, 유류, 기타 소비재 등이었으며, 유일한 생산재라고 할 수 있는 비료 또한 산업적 고려에서가 아니라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미국 원조계획을 담당했던 E.A.G. Johnston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시도해 볼 수 있었던 경제개발계획이 만족할 만큼 광범위한 것이 못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미의회가 승인한 위임사항에 따르면 미육군의 임무는 영양부족과 역병과 불안의 방지를 주목적으로 하는 단기적 대한원조를 공여하는데 국한되었고 우리들은 그러한 지침을 크게 넘어선 일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끊임없이 받았다."그리하여 1948년 일단 남한 정부가 수립되자 미국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은 급한 불을 끄는 긴급원조 성격 외에 약간의 개발성 원조를 추진합니다. 여기에는 석탄자원 개발과 비료생산 증대가 주요 사업이었습니다. 비료는 당연히 식량난 해결을 위한 것이고, 석탄은 북한으로부터의 전력송전이 끊겼기 때문에 화력발전으로 이를 대체해야할 필요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1950-53)이 발발해 모든 계획은 작살이 납니다. 광범위한 파괴와 엄청난 수의 피난민이 발생하면서 모든 노력이 중단되거나 긴급구호 성격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종전 후에도 수 년 동안은 구호와 복구에 치중하느라 개발에는 손을 대지 못합니다.
2. 1950년대의 무역과 환율 정책이제 해방 후의 무역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광복 이전 식민지 조선의 교역은 일본에 거의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늘 7~80% 이상이 일본과의 교역이었죠.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군정 시대로 넘어가면서 한국의 무역은 전멸합니다.
자료가 근사치나마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민간 및 정부자금에 의한 무역은 [해방 후부터] 1948년까지 전면 중단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추단할 수 있다. … 1947년도에 공식경로를 통한 실질무역량이 1939년도 무역량의 1%에나마 해당되었다고 보아지지 않는다.
… 한국 근대화과정에서 무역과 외원을 고찰하는 마당에서 긴요한 점은 2차대전 종결에서 한국동란에 이르는 기간 중에는 통상적인 상업적 국제무역이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극소규모였다는 사실이다.
Krueger, Anne, 『무역외원과 경제발전』, pp.28-29
이어 1950년부터는 한국전쟁이 발발해 3년이나 끌었으니 이 시기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군을 중심으로 한 UN군이 대거 한국에 투입되어 전투를 벌이게 되면서 이후 1950년대의 한미관계를 좌우하게 될 중요한 문제가 하나 발생하게 됩니다.
이들 UN군은 본국으로부터 병참지원을 받게 되어있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지에서 여러가지를 조달할 필요성은 늘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를 위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한국정부는 UN군 사령부에 많은
한화(韓貨)를 「대여」해 주기 시작합니다. 이 때 이러한 대여금은 추후에
「외환」으로 상환하며 구체적인 상환조건은 추후 협상을 통해 확정짓기로 상호양해가 되었습니다.
한편 전쟁으로 사회가 쑥대밭이 된 만큼 남한 사회에 재화와 용역의 공급이 크게 감소했을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반면 전쟁 중에 불환화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화의 공급은 오히려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강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발생하고 한화의 가치는 계속 떨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앞서 UN군에게 대여해준 한화를 외환으로 돌려받는 과정이
엄청 수지맞는 장사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무역이 거의 없어서 외화획득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원화를 주고 외환을 돌려받는 것처럼 땅짚고 헤엄치기는 없었던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이 꿀단지에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돌려받는 외환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식 환율을 비정상적으로 높은 지점에서 유지시킵니다. 즉 원화가 과대평가된 것이지요. 앞서 말한 것처럼 인플레이션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공식환율과 (암)시장 환율의 격차는 커져만 갑니다. 공식환율과 암시장환율의 격차는 200~500%를 넘나들었고, 종종 평가절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간격을 좁히는데 실패합니다. 심지어 1953년 12월에는 한 방에 300% 평가절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언 발에 오줌누기 이상은 되지 못했습니다.
보통 이렇게 하면 과대평가된 환율 때문에 수출이 타격을 받게 되기 마련입니다만, 한국정부는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수출은 없었으니까요. 아무도 불만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한 추산(Frank, Kim & Westphal)에 따르면 1953년
수출은 GNP의 2%, 수입은 12.9%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 원조물자는 수입과 또 별도입니다. 이 엄청난 격차를 뭘로 메울 수 있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1950년대에 "
원조는 으뜸가는 외환원이었으며 주한외국군대에 대한 한화매도는 두 번째로 큰 외환원"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Krueger 67)
이처럼 1950년대 내내 일관되게 추진된 한국의 무역외환정책의 기본방향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원조수입 극대화전략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과대평가된 환율을 유지하는 한편, 이렇게 들어온 외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강력한 수입규제를 펴고 수입대체산업지향적 국내경제활동에 역점을 둡니다. 아무리 아껴쓰려고 노력해도 필수적으로 수입해야 될 것들은 있기 마련이므로 외환을 아낄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는 미국정부 측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무역,국제수지정책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이 점은 한미 간의 으뜸가는 쟁점 사안이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측 시각으로 보자면 빈대치는 한국 측이 환율을 갖고 장난을 쳐 가며 원조를 주는 미국을
벗겨먹으려고 드는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3. 미국의 원조정책 전환한국전쟁이 종료된 1953년부터 1957년 사이의 5년간 원조는 계속 늘어납니다. 이 시기에 원조빨에 힘입어 기본적인 전후복구가 이루어지고 경제성장도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 같은 이유로 미국의 불만은 쌓여만 갑니다.
전쟁 중에는 비상상황이었거니와 어쨌든 일단 공산세력의 세계적화야욕을 저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럭저럭 넘어갔었습니다만, 한국 정부가
상황이 허락하는 한 끝없이 이 짓을 계속해 나갈 심산임이 분명하다고 느껴지자, 드디어 미국도 칼을 뽑아듭니다.
1957년부터 미국 관리들은 앞으로 원조가 줄어들 것임을 천명하기 시작하고, 한국정부에게 강도높은 자구책을 요구합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나서자 1958~60년 사이에는 성장이 크게 정체됩니다.
이 시기 미 국무부의 외교사료집인 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한국편을 보면 수록된 전체 전문의 2/3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원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분위기를 엿보기 위해 그 중 두어 가지만 뽑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Telegram From the Embassy in Korea to the Department of State
Seoul, September 15, 1959, 5 p.m.On the other hand if ROKs become convinced that alternatives are between austere maintenance of present force - with possibility of gradual deterioration - and modernization of somewhat smaller force,
their reluctant choice will almost certainly be latter alternative.(주한미대사) Dowling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8-1960 Vol. XVIII Japan; Korea, U.S. GPO, p.583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국군은 10만 규모에서 100만 대군으로 뻥튀기됩니다. 당연히 이런 군대를 먹여살릴 돈은 전혀 없었고 전적으로 미국의 군사원조에 힘입어 지탱을 하게 됩니다. 이 전문은 (한국이 버티고 있지만 미국이 원조를 줄여서 목을 조르면)
결국 못견디고 군대 규모를 줄이게 될 것이라는 미국 대사의 전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Memorandom of Conference With President Eisenhower
Washington, Semtember 14, 1960 9 a.m.
The President said that Korea get a disproportionate share now of available U.S. foreign aid. In answer to the President's question, the Ambasador said that $165million in military support funds are planned for Korea during this fiscal year.
(중략)
In answer to the President's question, Ambassador McConaughy said that the army pay scale is comparable to that in the rest of the country. Their top-ranking generals are paid the equivalent of $70-80 per month. This fact produces a temptation to corruption - the selling of tires and gasoline and the like. The situation is better, thanks to the work of General Magruder who is a logistics expert. The Ambassador said he feels that with it all the Koreans must keep a strong military position. The President agreed. The Ambassador said the new government would like to cut military strength by 100,000 men. General Magruder considers this too high a figure under his present instructions and would prefer the cut restricted to 50,000.
FRUS 1958-1960 Vol. XVIII Japan; Korea, pp.692-693
이 당시 한국은 워낙 별볼일없는 국가여서 대개의 처리가 국무부 극동차관보와 주한미대사 정도 선에서 이루어지고, 이렇게 FRUS 중에 미국 대통령이 등장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 대외 원조에서 비정상적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새 정부(장면 정부)가 10만명의 감군을 추진하고 있다는 언급입니다. 이 당시 한국군은 급조된 군대이고 매우 젊고 경력이 일천한 장군들과 속성으로 양성된 엄청난 수의 장교들로 인해 극심한 인사적체를 겪고 있었습니다. 장군들이 젊다보니 정년퇴직을 기다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소장파 장교들은 큰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후에 5.16 쿠데타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됩니다.
4.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우리나라의 경제개발계획은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년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가 설립되면서 시작됩니다. 한국측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장기원조를 미국에서 구하고자 했고, 이런 요구에 대해 미국은 요구하는 3~5년 베이스의 원조를 덜컥 줄 수는 없지만, 일단 계획작성을 후원하겠다고 대응합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산업개발위원회 운영비를 대충자금에서 지원하고, 계획작성을 도울 고문들을 파견합니다.
여기서 대충자금(對充資金)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것은 미국이 현물로 준 원조물자를 한국정부가 국내시장에서 판매해 현금화한 자금입니다. 이것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1950년대에 대한민국 중앙정부지출의 매우 큰 몫이 대충자금에 의해서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1957년에는
대충자금이 정부세입의 53%이었던 반면,
통상적 재원(주로 조세)은 정부세입의 34%에 불과했습니다. 미국정부는 대충자금을 어디 쓸 것인지에 대해 발언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 정부의 대부분의 사업에 개입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남의 돈 거저 먹기가 쉬운 건 아니었던 것이죠. 즉 위 사건에서 미국이 반대했으면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는 생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장기원조 요청은 허공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미국의 원조축소 계획에 대응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미국으로부터 생활비를 계속 대 줄 수 없다는 통고가 오자, 한국측은 그럼 자립하긴 할테니 출발자금을 대 달라고 요구한 것이고, 다시 미국은 우선 계획부터 세워 현실성을 따져보자고 대응한 셈입니다.
결국 이승만 정부에서는 3개년 계획을 준비하지만, 이것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한 채 끝납니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장면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면서 미국에 접근합니다. 이에 따라 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10월 4일 경제개발계획 의지를 표현한 「한국의 경제개혁방책에 관한 각서」라는 외교문서를 미국무장관 허터에게 보냅니다.
"본 각서는 오늘날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긴박한 경제사정과 한국정부가 과감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개괄적 개혁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의 경제적 애로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몇가지 대책과 아울러 이러한 광범한 개혁을 신정부가 강력히 수행해 나가는 데 소요될 재정적 부담도 동시에 밝히고 있습니다. … 따라서 우리는 귀국의 증여 원조가 현수준에서 유지되어야 할 것은 물론 이에 더하여 새로운 경제개발사업을 추진하는데 소요되는 특별경제원조와 경제안정기금을 마련하여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는 바입니다."장면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이승만 정부의 「3개년 계획」과 상당히 다른 반면, 후에 박정희 정부에서 실제로 실시된 「5개년 계획」과는 매우 흡사합니다. 3개년 계획과 5개년 계획의 제일 큰 차이는 모든 부문을 골고루 발전시킬 것이냐, 특정 부분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돌파구를 여는 불균형전략을 취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계획은 초안 수립 후 미국인 고문 찰스 울프 박사의 검토를 받습니다. 1961년 3월에 울프는 Singer, Hirschman 등의 경제성장이론에 비추어 불균형성장전략이 타당하며, 미국 원조 의존도를 낮추고 내자동원의 비율을 높일 것을 요구하는 검토의견을 제시합니다. 이 계획이 완성되자 한국측 대표는 1961년 5월 9일 미국 워싱턴의 국제원조처(USAID)를 방문해 경제개발계획안을 제출합니다. 이것은 한국 국무회의에 보고된 5월 12일보다도 빠른 것입니다. USAID는 울프의 견해가 미국의 정책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즉 이 계획은 계획수립도 미국이 댄 돈으로 하고 있었고, 미국인 고문으로부터 미국 정부의 시각을 대변하는 컨설팅을 받았으며, 완성되자마자 미국에 보고도 했습니다. 한국 경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돈을 안대주면 제대로 굴러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무슨 계획이건
전주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누가 봐도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의 그것을 노골적으로 베낀 것"이란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음이 잘 드러납니다. 5개년계획의 원조가 소련인 것만큼은 사실이지만, 공통점은 거기서 끝나니까요.
박정희 본인이나 그 수하들 중에 소련의 경제정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산권으로부터의 컨설팅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전적으로 미국의 입김 하에 장면 정부 하에서 완성된 것이고, 군사정권은 이를 소폭 수정하였을 뿐입니다. 이 미국의 컨설팅을 받은 계획에 이미 요즘 혹자가 말하는 사회주의적(?) 요소는 다 들어 있습니다.
한국경제체제는 자유기업제도와 정부에 의한 경제정책의 병존이며 이는 곧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인 것이며 혼합경제체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혼합경제의 방도는 기업의 자발적인 계산과 그에 따르는 결의를 고도로 존중하며 이에 모순없이 계획의 주체인 정부가 간접적인 통제방법을 채용한다. ...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계획 성격의 중대한 역점은 다부문 균형적인 성장지향 방도를 포기하고 후진 국가의 특색인 전략적인 애로부문을 우선 타개하는 요소공격식 접근방식을 시도하기 위하여 정부투자계획을 중점적으로 배정하기로 하였다. ... 여기에 따라 국가가 직접 그 실현수단을 보유하는 정부 공공부문에 대하여는 가급적으로 주체적이며 실행가능성이 있는 계획을 작성하고 기본적으로 그 활동을 기업의 창의와 연구에 기대할 민간 부문에 대하여는 예측적인 것으로 입안하여 그 방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유도하게 한다.
건설부, 『제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시안) 상』, 1961. 5., 4-5쪽.
오히려 박정희는 그 경력상 만주국의 중공업 군사기지화 정책이었던 「만주 산업개발 5개년계획」에 대한 지식이나 인상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후대의 5개년 계획들에서 제철, 기계, 조선과 같은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진행해 자주국방 노선으로 연결시킨다는 구상과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5. 원조경제에서 수출경제로「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립이 장면 정부의 유일한 결과물이었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1년도 안 되는 짧은 통치기간 동안 장면 정부는 1공화국의 원조경제에서 3공화국의 수출주도경제로 넘어가는데 결정적인 조치를 하나 취합니다. 이 점은 그들이 계획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적절한 정책을 집행할 의지와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장면 정부는 1961년 1월에 원화를 1$=65원에서 100원으로 평가절하, 다시 2월에는 1$=100원에서 130원으로 평가절하를 단행합니다. 결과적으로 100%평가절하를 한 것이지요. 이 조치는 박정희 정부 하에서 이루어진 1964년 5월의 평가절하(1$=130원에서 257원으로)와 함께 원조극대화전략에서 수출전략으로의 전환에 결정적인 장면들 중 하나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승만 정부 하에서 수출이 비정상적으로 낮았던 근본원인은 수출이 불가능한 환율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환율 문제가 해결이 되자 수출은 빠르게 늘어납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원래 수출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평균적인 수준으로 회복되는 과정 자체가 빠른 수출증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수출은 수출액 기준으로 61년 21%, 62년 42%, 63년 58%, 64년 37%, 65년 47%의 증가세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평가절하와 함께 이중환율제를 해소하고 환율일원화로 전환하는 조치들도 진행됩니다.
5.16으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수출진흥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갖고 수출지원책을 펴 나갑니다. 이 점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군사정부는 재정안정화 정책을 포기하고 팽창적인 정책을 편 결과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고 이에 따른 수입수요가 급증해 1963년에는 결국 견디지 못한 채 그간의 자유화 정책을 포기하고 외환쿼터와 수입물량 제한으로 돌아섭니다. 결국 1964년의 평가절하는 시행착오 끝에 장면 정부의 1961년 평가절하와 비슷한 일을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입니다.
1964~5년 정도를 전환점으로 삼아 이 이후는 완연한 수출주도경제가 자리를 잡습니다. 이 이전은 시행착오도 많았고, 이승만-장면 정부의 유산이 이어졌다고 볼 여지도 있지만, 이 이후의 결과는 공과가 모두 확실히 박정희 정부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64년 이후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질 때까지 10년 정도는 박정희 정부의 전성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 과정에서 무상원조는 크게 축소되어 나가다 1972년을 끝으로 종료되고 이 기간 동안 대신 한국정부는 차관의 비중을 늘려나갑니다.
다음 글에서는 제가 볼 때 북한의 경제정책이 실패하게 된 주요 요소 한가지에 대해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