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말이 나왔으니, 6,7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한 박정희의 기여도 같은 종류의 논쟁을 근본적으로 뒷받침해줄 근거나 연구는
대략 어떠한 형태여야 하는지에 대해 내 생각을 좀 적어 보기로 하겠다.
흔히 역사에는 가정이 의미가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학계에는 가끔 기인이 있기 마련이다. 의미가 없다던
what if를 철저하게 추구해 레전드의 반열에 오른 사나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Robert W. Fogel이다. 1960년대 초에 미국 경제발전사에 관해 그가 내놓은 연구는 지금 논쟁이 된 주제, "한국 경제발전에 있어서 박정희의 기여도"를 평가하는 방법론을 개척하는데 있어 귀감이 될 만하다.
Fogel, R. Railroads and American Economic Growth,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64
우선 이 책의 내용에 대한 간단한 요약에서 출발하도록 하자.
1840년부터 1960년까지 신문기자들, 경제인들, 전문역사가들은
철도가 19세기 미국에서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만든 유일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결정요인이라는 데 동의했다. 철도혁명은 서부개척에 이은 농업의 발달, 근대적 기업의 형성과 발달, 산업발전과 정착, 도시화 패턴의 확립, 국가의 주요 지역 사이의 무역구조의 수립 등을 가져왔다. 1891년에 유니온 퍼시픽(Union Pacific) 철도회사의 사장인 시드니 딜론은 미국인의 복지가 국가 철도 시스템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약 철도가 파괴된다면 즉시 전국의 미국인들에게 닥칠 엄청난 고통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3]라고 말했다. 70년 후 경제사학자인 로버트 W. 포겔은 감히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연구를 했다. 그는 19세기의 미국에서 철도를 제거한 후 그 결과를 평가했다. 그는
철도의 부재가 1840년에서 1890년까지의 경제성장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그 이유로 그는 운하와 강에서 운행하는 배가 마차의 도움으로 철도로 운반하던 물건을 운송할 수 있으며, 상품을 판매하는 시장에서 철도는 그다지 필수적이지 않으며, 철도가 기술혁신을 자극하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포겔의 주장을 다시 반복하기 전에, 우리는 그의 주장이 담고 있는 가정과 의도를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한다. 계량경제학의 입장에 선 경제사가인 포겔은
역사가는 과거의 사건뿐만 아니라 그 대체 가능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철도가 없는 19세기 미국 경제의 모델을 만들었으며, 그 기간의 경제적 실체에 대한 반(反)사실적 모델을 비교했다. 철도의 효과를 판단하는 그의 유일한 기준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철도가 경제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는 일반적인 생각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 포겔은 다른 대체 운송수단이 철도 시스템을 대신할 수 있는지 판단했다.
철도혁명의 지지자들이 자주 제기하는 주장 중의 하나는 농산물의 경우 장거리 철도운송에 의해서만 여러 지역으로 농산물을 분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철도가 식료품을 농장에서 도시 중심부로 운반함으로써 산업화에 도움을 주었고 이민자들이 중서부에 정착할 수 있도록 고무시켰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해서,
철도에 의해서 여러 지역 사이의 상호 경제교류가 가능하게 되었고 전국적인 규모의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겔은
서부로의 인구이동이, 적어도 초기 단계에는 철도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840년까지 약 40퍼센트의 미국인이 뉴욕 서부와 펜실베이니아 그리고 남부 해안의 여러 주(州)에 살았지만, 당시까지 철도는 동부에서 이들 새로운 인구밀집 지역으로 확장되지 않은 상태였다. 서부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주로 자연 수로와 운하에 의존했다. 게다가 그들은 비록 동부의 시장으로 그들의 생산품을 운반해주는 철도는 없었지만, 대규모 농사를 시작했다. 1840년, 미시간 주, 오하이오 주, 켄터키 주, 테네시 주, 인디애나 주, 일리노이 주, 미주리 주를 합쳐서 전체 국가 농작물 수확량의 50퍼센트를 생산했으며, 이 시기에 이들 주에는 겨우 228마일의 분산적인 철도만이 운행 중이었다. 곡물은 목화와 마찬가지로 수로를 통해서 아일랜드 주에서 남부로 운반되었다. 1860년에 뉴올리언스로 운송된 목화의 90퍼센트가 거룻배나 일반 선박을 이용해 운반되었다.
19세기 초에는 항해가 가능한 수로와 짐마차가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날랐으나, 그 후 교통량이 증가하자 그런 수단으로는 더 이상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인구는 계속 증가했고, 그에 따라 더 먼 곳의 농토까지 경작해야 했다. 따라서 철도와 같은 운송수단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포겔은
당시에 사용될 수 있었던 수로를 찾아내기 위해서 모든 농장의 지형적 구조를 세심하게 조사했다. 그는 대부분의 토지가 강이나 운하에서 직선거리로 평균 40마일 이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만약 일리노이 주, 아이오와 주, 캔자스 주에
추가로 5,000마일 길이의 운하가 건설된다면 철도를 이용하는 농지의 93퍼센트가 운하나 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다가
기존의 공공도로를 개량한다면, 운하나 강을 이용할 수 있는 면적은 더 늘어날 것이다. 포겔이 주장한 운하 확장과 도로 개발 계획은 19세기 미국의 기술적, 경제적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포겔의 분석이 옳다고 해도, 그가 제안한 대체 기술방법을 실행에 옮겼을 경우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포겔은 철도와 수로의 운송비용을 비교 계산하고 겨울에 북부지방의 운하가 얼어붙는다는 사실과 운하용 선박을 이용한 운반이 더 느리고 운하 수송시에는 물건을 자주 다른 배에 옮겨실어야 하는 불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 농작물의 지역간 운반에 운하보다는 철도가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그 차이 - 1890년 국민총생산의 1퍼센트 이하(0.6퍼센트) - 는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의 철도가 혁명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이론을 지지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미국의 농장은 모든 주(州)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고, 그 대부분은 마차의 도움을 받아 수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반면 철광석과 석탄은 비교적 좁은 지역에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철도는 이런 광물의 채굴지역에서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요 채굴지역을 대상으로 한 포겔의 조사 결과, 주요 광산들이 수로 가까이에 위치했기 때문에 석탄과 광석을 실어나르는 데에 철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간략히 언급한 포겔의 연구는 그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정교함과 정확함,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수집한 방대한 양의 자료 등을 감안한다면 지나치게 짧은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소개하지 않았다. 비록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포겔은 철도의 발명이 필연적이며 19세기의 진보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강력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운하야말로 최초의 값싸고 효율적인 운송수단이라고 강조한다. 운하에서 이용된 거룻배는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된 마차에 의한 운반율을 90퍼센트 감소시켰고, 철도보다 조금 낮은 대체율을 보였다. 비록 운하가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서 철도와 경쟁상대가 될 수는 없었겠지만, 19세기의 농작물과 천연자원을 운반하는 대체 운송수단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Basalla, George.,
The Evolution of Techn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김동광 역, 『
기술의 진화』, 까치, 1996, pp.290-293)
로버트 포겔의 이 도발적인 연구는 1960년대에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다. 말할 것도 없이 당대의 상식에 정면도전했기 때문이다. 포겔 이전에 모든 사람들은 19세기 미국의 경제발전에 있어 철도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믿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대중들 뿐 아니라 조셉 슘페터나 발터 로스토우 같은 학계의 절정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찌되었든 그의 연구에 대한 동료 학자의 논평을 좀 더 들어보기로 하자.
바로 이러한 점은 19세기 미국의 경제성장에서 철도가 공헌한 바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의 핵심이었다.
이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수송비용의 절감이 담당했던 근본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했으나, 수송에서 하나의 특이한 혁신이었던 철도가 수행했던 역할에 대한 의견은 날카롭게 갈라졌다. 이전에는 19세기 미국의 경제성장에서 철도는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즉 철도는 수송서비스를 제공하는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외에는 효과적인 대안이 존재 하지도 않았고 생산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로버트 포겔은 이러한 견해를
<필수불가결성의 공리 the axiom of indispensability>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필수불가결성의 공리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철도가 수행했던 것뿐만 아니라 철도의 대체물이 수행할 수 있었던 역할을 검토해야 한다. 철도는, 19세기 동안 미국 경제가 산출한 많은 부분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다른 최상의 대안을 능가하여 공헌했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는 한에서만, 필수불가결성이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 공리를 지지하는 데 사용되어 온 역사적 증거는 거의 전적으로 철도가 수행했던 것에 대한 서술로만 한정되어 있다. 철도가 한 것과 같은 동일한 효과를 가진 다른 경쟁적인 수송기술의 능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 결과 대안적인 가능성이 공급할 수 있는 범위와 잠재력은 실제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철도에 대한 대체물의 발전 가능성이 매우 적었다는 결론은 알려진 사실보다는 일련의 의심스러운 가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Fogel, 1964 : 10)
포겔의 필수불가결성의 공리에 대한 공격은, 철도의 광범위한 채택에 대한 증거에서 암묵적으로 이끌어낸 추론인, 본질적으로 철도가 운하보다 크게 뛰어나지 않았다는 명제를 이끌어냈다. 그는 많은 노력과 통찰력을 기울여서 철도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1890년경 미국의 경제가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하는 문제를 고찰하였다. 포겔의 계산에 따르면, 철도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그 해에 실제로 성취되었던 수준을 밑돌기는 하지만, 그 하락 정도는 5% 미만이었다. 그러므로 포겔은 19세기의 급속한 경제발전이 수송비용의 절감에 크게 의존하였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경제 발전이 철도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도출될 수 있는 기본적인 결론은,
하나의 혁신이 가진 경제적 효과는 그 혁신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비용절감의 크기에 의해서 검토되어야 하며, 그러한 비용절감의 크기는 대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른 기술의 비용구조와 비교함으로써만 정확하게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혁신이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관찰만으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충분한 답을 도출할 수 없다.
철도의 역할에 관한 포겔의 하향평가에 의해 촉발된 일련의 논쟁과 관련하여 발생한
한 가지 역설적인 현상은, 그의 핵심적 생각, 즉 어떤 단일한 기술혁신도 경제성장에 필수적이지 않다는 것이 별로 논쟁의 소지가 없다는 점이다.
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함의는 어떤 단일한 기술혁신도 19세기 동안의 경제성장에 필수적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만약에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어떤 단일한 혁신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확실히 철도일 것이다. 그러나 철도가 50여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급속하고 대규모로 성장해 왔고, 내륙 수송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모든 지역에 확산될 수 있었으며, 자본을 엄청나게 잡아먹었고, 상업적(때때로는 정치적) 경쟁의 성과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철도는 미국 경제의 생산 잠재력에 압도적으로 공헌하지는 못했다. (Fogel, 1964: 10)
여기서는 포겔이 제안하고 있는 논점에 약간의 변화를 가하여 기술진보에 대한 역사 서술적 고찰을 결론짓는 것이 아마도 적절할 것이다. 급속한 기술진보를 창출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어느 하나의 혁신도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유는, 개별적 혁신이 어떤 절대적인 의미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는 대체 혁신substitute innovation을 쉽게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특정한 혁신의 효과를 소진시킬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혁신들을 많이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다.
Rosenberg, Nathan,
Inside the Black Box : Technology and Economic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이근 외 역, 『
인사이드 더 블랙박스: 기술혁신과 경제적 분석』, 아카넷, 2001, pp.51-53)
그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여전히 다양하다. 하지만 그의 연구를 직접 평가하기 힘든 비전문가라면 그가 이 연구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1993년, Douglass North와 공동)했다는 점을 참고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자 이제 위의 논점들을 우리의 주제에 맞춰 옮겨 써 보도록 하자.
이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20세기 후반 한국이 고도성장을 달성했다는데 대해서는 모두 동의했으나, 그 과정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 박정희가 수행했던 역할에 대한 의견은 날카롭게 갈라졌다. 박정희는 과연 이 경제성장에
그 이외에는 효과적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인가 아닌가?
포겔 식의 답변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박정희는 1960~70년대 동안 한국 경제가 산출한 많은 부분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다른 최상의 대안을 능가하여 공헌했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는 한에서만, 필수불가결성이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 공리를 지지하는 데 사용되어 온 역사적 증거는 거의 전적으로 박정희가 수행했던 것에 대한 서술로만 한정되어 있다. 박정희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경쟁적인 인물의 능력을 체계적으로 평가하여 제시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러니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국가지도자나 국민이 경제성장에 어느 정도씩의 역할을 분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못해 진부한 이야기이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한 백가쟁명의 설득력은 "어느정도 기여"가 과연 어느 정도냐, 즉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느냐, 그리고 그 평가방법론이 얼마나 그럴듯하느냐에 달려 있다. (sonnet)
즉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를 닦았다든가 중공업 육성정책을 폈다든가 하는 서술적인 이야기는 대조군이 없기 때문에 별 도움이 안된다. 우리가 진정한 평가를 위해 따져봐야 하는 것은 예를 들어 박정희의 첫 9개월은 장면의 9개월 대비 몇 %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박정희의 마지막 7년은 전두환의 7년과 대비해 어떠한가? 박정희가 1년 더 살거나 1년 일찍 죽었으면 경제는 더 좋아졌겠는가 나빠졌겠는가? 박정희가 임기 중에 사망해 예를 들어 김종필이 그 자리를 승계했다면?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인 것이다.
이 중 몇 가지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세워 비교해 볼 수 있는 것도 있고, 어디까지나 추측 이상을 적용하기 힘든 것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박정희의 필수불가결성을 주장하는 쪽이건 부정하는 쪽이건 그렇게 해 보고 나서 조사결과에 입각한 결론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란 거다.
포겔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적당한 이론이 없는게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적당한 데이터가 없는 거지요."인물과 그의 정책에 대한 정량적 평가는 철도 같은 기술에 대한 평가보단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 개발된 정량적 측정방법을 갖춘 경제성장이라는 주제에 한정된 것이라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누가 누구보다 낫네 아니네 주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여담이지만 포겔의 연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흔히 듣게 되는 박정희의 기여도에 대한 평가는 어떤 정교한 모델이 있다기 보다 사람들 개개인의 감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점을 일단 받아들이기로 하고 생각해 보자. 통속적인 지식에 따르면 19세기 미국 경제발전에서 철도의 위상은 거의 절대적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모델을 세워 평가해 보니 그 차이란 것은 생각보다 훨씬 작게 측정되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렇다면 통속적인 지식이나 감으로 볼 때
한국 경제에서 박정희의 위상은 19세기 미국에서 철도보다도 큰가? 다른 말로 한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1960년에 박정희를 암살해 버린다면, 마법을 부려 19세기 미국 경제에서 철도를 지워버린 것보다도 더 큰 타격을 한국 경제에 주게 될 것인가?
큰 부담 없이 한번 감으로 찍어들 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