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컴플렉스
백의사 대북타격작전에서 셀프 트랙백

이런 것은 설명이 필요없다고 생각해 빼버렸었는데, 굳이 원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조금만 언급해 보기로 한다.

이승만과 김구는 신분적으로 왕족과 하층민이라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신분적 차이는 두 사람의 정치적 정향까지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 이승만은 왕족이라는 과도한 우월감으로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는 자신이 왕실의 후손임을 강조함으로써 멸망한 왕조에 대한 민중의 전근대적 연민에 호소했다. 그가 평소 ‘왕손’, ‘나의 백성들’, ‘과인(寡人)이……’ 등의 용어를 즐겨 썼다고 하는 사실은 그의 외형이 어떠했든 간에 그가 유교적 권위주의에 얼마나 깊이 매몰되어 있었던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김구는 자신의 신분적 열등감으로 자신을 낮추고 자제하는 겸손한 정치 정향을 보였다. 1919년에 상해(上海) 임시정부를 방문하여 내무총장 안창호에게 문지기를 자청한 것은 평생 그의 정치 성향을 규정했던 상놈이라는 열등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리고 후에 임정의 의정원 의장 이동녕(李東寧)이 그에게 국무령 취임을 권유했으나, ‘해주 서촌(西村)의 일개 존위(尊位)의 아들인 미천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고 사양했던 것에서도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그는 1927년에 이르러 국무령에 취임했다.

반면에 김구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것이 전부이다. …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정치성향은 이승만에게서 볼 수 있는 자신감과 엘리트 의식은 찾아볼 수 없는 대신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려는 강직한 마음은 언제나 강하게 나타나서 그의 정치 정향을 규정하는 주요 인자가 되었다. 따라서 김구의 신분적·학문적인 열등감은 왕족 출신인 이승만의 우월감이나 엘리트 의식과 비교하여 좋은 대조가 된다. 이러한 대조는 그들의 관계를 무언중에 규정지었는데, 김구는 해방정국에서 이승만과 정국 주도권을 두고 경쟁 관계였으면서도 자신의 노선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그에게 제1인자의 자리를 양보하고 2인자로서 안주하는 듯이 보였다.

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1943~1953』, 한울아카데미, 2003, pp.360-364


[당시에 극히 드물던] 미국 박사 출신에 왕족을 자처하며 자뻑기질이 강한 이승만과, 역신의 후손이며 구식 서당교육을 받은 데 불과한데다 자학기질이 있는 김구의 사이의 이러한 구도는 널리 인정되는 것이다. 사실 이승만과 김구는 대등하려면 대등할 수도 있는 경력이지만 실제로는 대등하지 않았다. 그러한 관계는 전해지는 서한이나 대화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승만은) 또한 2월 말, 김구로부터 “임시정부의 주권을 선포할 시기가 되었다”는 요지의 전보를 받고, 김구가 임계점을 넘었다고 판단하여 아래의 급전(急電)을 띄웠다.

김구에게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시오. 우리가 처음 논의했던 계획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그 동안 우리의 모든 힘을 통일하시오. 이것은 나와 당신이 우리 사람 모두에게 보내는 지시요.
[35]

[35] "G-2 Weekly Summary," no.78(1947.3.13)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pp.149-150


그리고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의 원로들이 그들이 나고 자란 사회적 배경이나 구식 교육의 영향으로 앞서 언급한 것 같은 행동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전근대적인 의식을 뿌리깊게 갖고 있었다는 것을 전하는 이야기도 많다.

중국 관내에서의 좌우충돌에는 세대 간의 사상적 갭도 작용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의 지도층은 19세기 후반 또는 19세기 말경에 유년, 청년시기를 보내고 전통적인 지적 성장을 하여, 일면으로는 위정척사파적인 기질도 갖고 있는 원로들로서, 양반계급 출신이 많았으며, 근대교육을 적게 받은 편이었다. 그런데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고, 독립운동의 선배에 대해 어른 대접을 잘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측의 원로들은 김원봉 등이 나이가 젊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 있고 언행이 너무 편격(偏激)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중요시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노인들한테 싫증을 내면서[62], 그들을 ‘봉건영수’, ‘민족 파시스트’ ‘선비적 국수주의자’로 간주하였고,국수주의를 배격하자고 외쳤다. 한독당의 원로들은 강렬한 충군애국의 관념을 갖고 한국의 고유문화 발양을 크게 중시하였다. 그리고 서양문화에도 반대하였고, 더더욱 공산주의 사회주의에는 반대하였으며, 소련과의 연합도 반대하였고, 반제반전의 일본민중과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친중국적이어서 중국에서 유교 문화의 훈도를 받아온 것을 감사해 하고, 중국의 원조를 더욱 많이 받아, 임시정부가 영향력을 확대하면, 다른 나라를(소련 : 필자) 배경으로 한 독립적인 기구(일종의 임시정부 : 필자)는 생겨나지 못할 것이라고 장개석정부에 언명하였다.

[62]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김성숙은 인터뷰에서 “그 임시정부의 이시영, 이동녕, 박남파, 박정일, 조청사, 이런 사람들 기가 막히거든요. 고루하기가 짝이 없고, 아직도 양반 상놈을 굉장히 가리고”라고 말했다(이정식 채록 김성숙 회고록 「한국현대사, 중도좌파의 비극적 종말」, 『신동아』 1988. 8, 364쪽).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pp.174-175


김성숙은 1898년생이니까 지금 살아있다 치면 111세이다. 이런 노인이 한창 시절에 보기에 기가 막히게 고루하다고 하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나 가는가? 뼛속까지 현대인인 우리가 이런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들에게 오늘날 우리식 사고방식을 투영해선 곤란하다. 그들은 저명한 민족지도자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옛날 사람에 불과한 것이니까.

by sonnet | 2008/07/18 20:29 | 정치 | 트랙백(1) | 덧글(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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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네비아찌의 얼음구덩이 at 2008/07/19 00:41

제목 : 만약에.
김구의 컴플렉스sonnet 대제님의 글을 트랙백 해왔는데,김구 선생을 비롯한 상해 임시정부 간부들이 조선 시대의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고유교 모화 사상을 연장시킨, 과도한 중국(국민당) 편향적 태도를 보였던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이정도일 줄은 몰랐네요.만약에, 어떤 사람들이 꿈꾸는 것처럼, 상해 임시정부가 해방된 우리나라의 정부가 되었다면,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면.....과도한 친 국민당 태도를 견지하다가, 국민당이 대만으로......more

Commented by 홍월영 at 2008/07/18 20:33
이승만의 성향이야 알고는 있었지만 김구는 좀 의외의 일면이네요. 흔히 위인전기 등을 통해 알려진 것은 쓰지다 중위를 때려죽이고 고종에 의해 특사된 정도의 에피소드밖에 나오지 않으니...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8 20:37
저게 언뜻 보면 겸손한 거라고 볼 수도 있는데, 김구는 이승만과 합작을 하면 단 한번도 주도권을 쥐지 못합니다. 이건 겸손 이상의 뭐가 있는 거죠.
Commented by 엘레시엘 at 2008/07/18 20:47
음...문지기 자청 에피소드를 이런 시각에서 조명해볼 수도 있는거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14:01
그런가 봅니다.
Commented by 카구츠치 at 2008/07/18 20:58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됩니다. 독립운동사에서 생각해볼 중요한 잣대라고 여겨지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21:53
이승만-김구 같은 개인간의 관계는 문서로 노골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서 상황이나 전후관계를 면밀히 따져서 결론을 뽑아내야 하는 만큼, 피상적으로 보면 놓치기가 쉽겠죠. 그리고 독립운동이 벌어지던 시기가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던 변화가 극심하던 시대라 저런 세대차나 전통의 문제는 크게 작용했을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키치너 at 2008/07/18 21:00
많은 사람들이 한국, 아니 동아시아 근대사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들춰보면 기본적인 컨센서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21:54
현대 들어서는 학문의 세계와 대중의 이해 사이의 괴리가 미칠듯이 넓어지고 있다는 게 정말 골칫거리인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바닷돌 at 2008/07/18 21:05
열등감이란게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규정짓기도 하는군요. '' 만약 김구가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그가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쥘 수도 있었을까요?(물론 그러면 김구의 겸손함이 죽어버리기도 하겠지만..)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13:22
김구는 정치감각이나 권모술수 면에서도 이승만에게 많이 뒤지기 때문에 그래도 좀 밀리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하지만 해방 후 정국을 보면 이승만이 궁지에 빠지거나 김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시기도 몇 차례 있기 때문에 기회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Commented by 이네스 at 2008/07/18 21:36
결국 그분도 그시대의 사람이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13:15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사실 후대 사람의 과욕이지요. 일반인들에게는 신화화된 김구의 이미지라는 것이 있어서 실제의 김구와는 상당히 다르지 않나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
Commented by 양과알 at 2008/07/18 21:50
시대는 사람을 쉽게 놔주는 법이 없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13:17
그렇죠. 사실 또 시대를 너무 앞서가면 자기 시대의 대중과 함께 호흡해야 할 정치가로서 치명적인 약점 아니겠습니까? 그저 단순한 몽상가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8/07/18 21:59
일종의 콤플렉스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13:35
이승만하고만 붙여 놓으면 휘둘리니까 역사책을 보는 쪽이 다 답답해질 지경이죠...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8/07/18 22:21
저 바둑이란 양반은 김구가 1947년 말 까지도 남한 단정 문제에 대해 오락가락 했던 이유를 뭐라고 생각할지 궁금하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21:56
그런 일이 있었는지나 알지 모르겠습니다. 비로그인이니 다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Commented by reske at 2008/07/18 23:52
흠.. 중국에서 활동했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봉건적인 계급의식의 잔재가 어느정도 남아있었다는 사실은 재미있네요. 김구정도 세대로 들어오면 봉건적 의식은 어느정도 사라졌을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13:52
상해임정의 주축은 당대의 독립운동가 집단 중에서도 제일 나이가 많은 그룹에 속하기 때문에 더 그런 듯 합니다.
Commented by 三天포 at 2008/07/19 00:23
중국에서 활동했던게

단순히 이익이 되서 뿐만 아니라 중국이 좋아서 라는 이유도 있었군요.. 흠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22:02
그 분들은 기본적으로 세계관이 좁지 않았나 합니다. 오늘날처럼 정보통신이나 대중언론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고, 미국이나 유럽이 있다는 건 알지만 어딘지 모르게 먼 나라 이야기 같고 그랬겠지요.
한중일 정도만 좀 아는데, 일본은 적이니까 제외하면 남는건 중국 아니겠습니까. 중국이야 전통 서당교육 받고 그런 경험이 있다면 중국문명을 숭상하기 쉬운 것은 필연일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nishi at 2008/07/19 00:29
여러가지 의미로 한계가 분명한 사람이었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13:27
신복룡 교수 같은 경우는 해방 전후해서 민족지도자들(의 자질)이 전반적으로 과대평가되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도 우익의 김구나 좌익의 여운형 같은 사람에게 분명히 그런 점이 있는 듯 싶습니다.
Commented by 네비아찌 at 2008/07/19 00:36
예전에 박갑동씨가 모 신문에 쓰던 회고록의 한 구절이 기억에 남는데,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박갑동씨가 김구 선생을 취재하러 갔더니,
김구의 언동이 박갑동이 보기에 상당히 시대착오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박갑동이 나오면서 "저 사람이 조선 대통령이 되면 큰일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구절이 기억에 남네요.

트랙백 해갑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22:09
구체적인 내용을 몰라 뭐라고 하기 힘들지만, 귀국 후 김구의 행적은 국민들이 그에게 걸었던 기대를 생각해 볼 때, 너무나 정치적으로 무능했던 것 같습니다. 김구는 어려운 상황에서 버티고 견디는 건 잘 하지만, 복잡한 상황에 타개책을 제시하는 그런 유형의 지도자는 아닌 듯 합니다.
Commented by 번동아제 at 2008/07/19 02:44
1980년대에 아무개가 결혼 준비가 들어갔을 때 모 집안 할아버지가 선대를 따지다가 상대방 집안이 아전(중인) 집안인걸 확인하자 바로 파혼하는 만행을...모모 집안 할머니는 1990년대까지 "상것들이 드나드는 노인정에 가서 그들과 합석할수 없다"는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더군요.

하물며 80~90년대에도 저러한 노인들이 계셨으니 그보다 40~50년 이전이라면...다만 김구가 컴플렉스를 가진 것은 사실이나 전체적인 면에서 김구와 그 주변 임정그룹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동일시하기 힘든 측면은 있을듯...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13:13
으흐흐, 요즘 세상에도 보학을 구사하시는 분이 계셨군요. 역시 교양의 수명은 질긴 것 같습니다.

세번째 인용문이 김구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낸다기 보다는 정황증거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은 정확합니다. 제가 의도한 것도 그 동네 분위기가 대충 어떤지를 보여주고 싶은 정도입니다.
Commented by 윤민혁 at 2008/07/19 12:28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신분제가 확실히 파괴됐다고 할 수 있는 시기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라는 걸 생각하면 백범이 저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별로 없겠죠. 사실 백범은 지도자보다는 행동대장 역이 더 잘 어울리는 어른이기도 했고...

그런데 요즘 세상에도 아전 집안과는 혼인 않고 상것들 드나드는 노인정은 안 간다는 발언을 하는 노인장들이 계시군요. 의외는 아니지만 상당히 묘하네요. 내심 생각이야 어떻든 세상이 이꼴이니 그냥 내가 참고 말지 운운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ㅅ-;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22:14
예. 결국 저 컴플렉스설을 부정하려는 사람은 해방 후 정국에서 왜 김구가 이승만에게 자꾸 휘둘리고 이용당하는지에 대해 다른 설명을 제시해야 할 텐데, 그럼 남는 답이 캐무능해서밖에 없기 때문에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Commented by 구들장군 at 2008/07/19 13:08
이영희전교수 글 보면, 또래 지인들과 등산하다 초면인 등산객 걸음걸이를 보고는 당파(현대사의 정당이 아니라, 사색당쟁의 그!)를 가려내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백범선생 시절이라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13:31
어이쿠, "벽파의 걸음걸이하고는!" 이런 겁니까?
Commented by shaind at 2008/07/19 14:06
저희 이모부 중 한분께서는 절 하는 모습만 봐도 남인인지 노론인지 소론인지 (아니면 상놈인지) 구분하실 수 있는 것 같더군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08/07/21 23:28
shaind 님// 헉...

...언제, 그 이모부님의 노하우를 정리해서 소개해 주실 의향은 없으신지...
(이거, 은근히 논문도 나올법한 소재 같은데...)
Commented by 행인1 at 2008/07/19 13:28
사람은 역시 나고자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 모양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13:31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Commented by 아텐보로 at 2008/07/19 14:14
신복룡교수라......
비숍여사의 기행문 번역을 맡아놓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과제물로 안겨놓고서 나중에 책의 서문에서 그것을 당당하게 밝힌분이시군요.
나중에 번역료는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20:13
별로 좋은 건 아니지만 한국에 흔한(적어도 흔했던) 관습이니까요. 대개 공역자들에게 얼마나 대접을 해 주느냐는 그들의 계급(학부생, 대학원생, 박사과정, 제자출신 교수) 등에 따라 그대로 달라지는 것 같더군요.
Commented by 행인1 at 2008/07/19 21:16
그게 아마 비숍여사 기행문 뿐만 아니라 동시기의 기행문이며 회고록 수십권을 번역하면서 동시에 했던 걸로 압니다. 덕분에 번역은 그야말로....;;;

그리고 장담하건데 학생들에게 번역료는 주지 않았을 겁니다.
Commented by reske at 2008/07/19 23:44
저희어머니가 대학원 학생시절 교수가 외국 책 번역을 시켜서 했더랍니다. 얼마후 교수가 고기와 술을 사줬다는데,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얼마후 교수 연구실 책장을 보니 동기들과 어머니께서 번역한 책이 교수이름을 달고 꽂혀있더라는 훈훈한 이야기가...;;;
Commented by 루스 at 2008/07/21 14:22
대학원생들에게 챕터별로 쪼개서 번역을 시키면서 용어 통일이라도 시켜주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챕터별로 같은 용어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글을 쓰는 방식이 달라지며 퀄리티가 들쭉날쭉한 책의 프루프리딩을 맡았다가 피를 보았던 생각이 나는군요. 결론은 재번역.
Commented by 그람 at 2008/07/19 22:14
그런데 김구는 박은식이 자기에게 덤비자 그걸로 보복하려고 했지만 차마 박은식은 못하고 그 아들을 손봐줬다는 일화가 있다고 들어서 의외로 성깔이 꽤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9 22:16
김구는 대개의 사람에게는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승만만 만나면 정신을 못차리니까 이런 식의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Commented by 히알포스 at 2008/07/20 00:22
학교 서랍장에 앚고 온 백범일지가 생각나면서 한 번 더 읽고 싶어지네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08/07/20 16:16
하긴, 김구도 사람인데 자신이 나고 자란 배경에 물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네요.
기본적으로 강단은 있지만, 기존 사회의 '틀'에 얽매인 탓에 일어난 언밸런스일까요...
('왕족'과 '상놈'이라... 김구 선생도 결국은 '피'에 주눅들은 양반이라는 게 어째 씁쓸...)

* 위의 예법 댓글(?)에서 뿜었습니다. 다른 당파 간에는 상종도 안 하고,
어쩌다 부득이 얘기할 때도 사이에 병풍치고 얘기한다는 얘긴 들어봤지만,
'무형의 벽'으로 인해 예법까지 격리되어 제각기 발달했다는 것이었군요. 맙소사...;;;
Commented by umberto at 2008/07/22 04:10
조선후기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몇마디 거들자면,

걸음걸이로 당파를 구분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옷차림이랄까 패션이랄까 하는 부분이나 제사를 비롯한 예법 같은 부분은 좀 차이가 있었습니다. '샘이깊은물'에서 나온 자서전 중에 서울 노론가문의 종부 할머니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노론 가문은 옷고름을 어떻게 매고, 소론은 어떻게 매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법에 있어서도 각각 자기 파벌의 지도자들이 정리한 내용을 준수하다 보니(예를 들면 노론은 김장생이 정리한 내용을 따른다든지 하는) 약간의 차이는 있었습니다. 물론 족보상 결국 주희의 <주자가례>의 아류라서 큰 차이는 아니지만. 그 외에도 모 학파에서는 학동들이 총각머리 모양-중국 영화에 보면 나오는 요즘의 양머리 비슷한 머리 모양-을 했다든지 하는 예가 있습니다.

여기 댓글다신 분들을 보니 자칭 유명하다는 명문대가의 후손들은 없는 것 같다는.... 크흐. 농담 입니다. 많은 분들이 조선시대를 멀게만 생각하시는데 어떤 분들에게 있어서는 현대사처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른바 뼈대있는 양반 가문이란 곳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연속성이 유지되고 있지요. 대학원 시절 다른 과 모선배가 안동김씨 가문의 후예 였다는....... 그 분이 답사차 다른 분들과 경상도 모 가문댁에 방문하여 종손으로 부터 대접을 받는데, 어쩌다 당쟁 이야기가 나왔답니다. 그 종손 왈, "우리 몇대조 할아버님이 그 노론놈들땜에 사약을....."(부르르~) 그 선배 자신의 신분이 밝혀질까봐 전전긍긍~ 다른 학우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는.

그 외에도 골때리는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하나만 더 소개해드리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은 워낙 유명하니 다들 아시죠? 송시열 직계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화양동서원도 이때 없었졌죠. 이것도 일종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를 담고 있던 사건인데 여하튼 노론이라고 해도 세도정권은 서울노론이었고, 송시열 직계는 충청도 노론이었습니다. 호락논쟁이란게 사실상 서울노론과 충청도 노론의 내부 권력다툼이라는 설도 강합니다. 송시열이야 당시에는 방귀 좀 끼었고 서울노론이 다 그 눈치를 봤지만 이후에는 송시열 직계들-권상하, 한원진 같은 부류는 완전히 권력에서 밀려 버립니다. 물론 그 최종 승리자가 바로 서울노론=세도정권이구요. 대원군 서원철폐령은 말하자면 중앙권력에서 밀려나 그나마 서원으로 지방에 마련한 거점까지 싸그리 밀어버린 사건이었죠. 그러니 반발이 얼마나 거셌겠습니까?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2000년, 2002년 만동묘 답사를 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 '송자사상선양회'인가 뭔가하는 단체의 이름으로 비석을 세워놨더군요. 그 내용에 보면 "송시열의 훌륭한 뜻을 이어 받아 이 지역 유림들이 만동묘와 화양동서원을 세웠는데 구한말에 패려한 자(대원군)가 나타나 이것을 없애 버렸고 결과적으로 인륜이 땅에 떨어져 조선은 망했다."는 식의 대충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실과는 많이 다르죠? 그 비석을 보고 다들 혀를 끌끌 찼다는;;;;;;

우리는 역사책에서나 배우는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를 여전히 현대사처럼 생각하고 은원(恩怨)을 갖고 계신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 분들에겐 송시열도 윤증도 이현일도 정인홍도 다 박정희, 김대중 정도의 현대사 인물들인 겝니다. --;;;



Commented by Mr술탄-샤™ at 2008/07/24 01:49
흥미깊네요. 이슬람세계도 선구 개혁가들이 대부분 비슷한 길을 걸었는데, 그 사람들의 "이슬람세계가 서구의 압력을 이겨내고 근대화할수 있는 길이란" 결국 이슬람 초기의 정통 칼리프제를 복원시켜 이슬람세계를 한명의 이슬람 칼리프의 통치하에 통일시켜야만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전통 교육을 받고 이슬람 전통 정서에서 살던 사람들인지라 결국 사고의 한계는 벗어날 수 없었던 셈이죠.

압드 알 나세르의 패권주의 정책도 이런 정서에서 배경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Commented by 백범 at 2008/12/27 16:07
김구선생은 양반가문 맞습니다. 고려시대의 장군 김방경과 조선시대의 개국공신 김사형의 후손이네요. 그리고 찾아보시면 알겠지만 세조때의 정승 김질의 방계 후손이고요.

http://andongkim.net/kimgu.htm
Commented by paro1923 at 2008/12/27 20:54
'족보'가 그러하되, 집안이 빈한하긴 했지요. (그러고 보니 '방계'이니 더더욱...)
여기서 말하는 건 '혈통'이 아니라 '가세'(家勢)의 차이라고 봄이 더 맞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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