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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기의 생활
Feinstein, Temin, Toniolo가 공저한 『대공황 전후 유럽경제』는 국내 번역된 대공황 연구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경제사에 대한 책이지만 당시 실업문제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데도 몇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여기엔 세 사례가 등장하는데, 특히 주민의 80%가 장기 실업자가 된 오스트리아 마을 마리엔탈 이야기는 대공황이 지역사회와 가족, 그리고 개인을 어떤 식으로 파괴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시간이 많아도 치우지 않아 마을은 황폐해졌다. 실업자들은 책도 안 읽고 신문도 안 보고, 돈이 없으니 당연히 돌아다니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사일을 돕지도 않은 채 빈둥거리거나 잠만 쳐 잤다. 그리고 이웃이 실업급여를 속여서 타먹는다고 서로 고발했다…

오스트리아 공업촌 마리엔탈

일단의 사회학자가 1931-2년 겨울 동안의 오스트리아의 한 공업촌을 조사하여 (Jahoda et al, 1971 edn) 실직자의 촌락 즉 공장이 문을 닫아버린 공장마을의 개인의 삶을 묘사한 연구결과가 1933년에 독일어로 처음 출판되었다.

마리엔탈(Marienthal)은 1931년에 약 500가구가 사는 오스트리아의 촌락이었다. 이 촌락은 비엔나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인근촌락에서 다시 30분 정도 평평한 시골길을 걸어서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면직공장 하나가 약 1세기 전 세워진 이래 그 지역에 주요 고용기회를 제공해 왔었다. 이 공장은 1차대전 이후 면직에서 레이욘업으로 발전하였다. 1920년대 중엽 노사분쟁과 수요감소에도 불구하고 고용은 1929년 초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1930년 2월에 생산을 중단하였다. 공장주들은 사업이 회복되지 않을 것을 예상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공장을 즉각 철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초 마리엔탈의 노동자는 자신들의 예전의 일터에 널브러진 돌더미나 보았을 뿐이다.

실업구제가 1920년의 한 법에 따라 운영되고 있었다. 노동자는 그 전 해 최소 20주 동안 일했었고 현재 다른 소득이 없으면 실업 구제를 받았으나 외국인은 제외되었다. 구호 액수는 노동경력, 임금, 가족상황에 따라 달랐고, 구호기간은 20-30주였다. 노동자가 어떤 일자리라도 있으면 구호 요구권은 취소되었다. 이를테면 나무를 잘라 주고 땔감을 대가로 얻거나, 우유배달을 해주고 그 대가로 우유를 약간 얻거나, 하모니카 연주를 하고 몇 푼 받는 정도의 행위만 해도 노동자는 실업수당 수령기회를 상실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일없이 지내면서 철도에서 석탄을 훔치거나 농부의 감자를 훔치는 것과 같은 사소한 불법행위를 저질러 수입을 보충해 가는 식으로 살았다.

실업수당 수령기한이 지나면 긴급보조가 제공되었다. 그것은 실업수당에 거의 가까운 수준으로 20-50주 정도 더 계속되었다. 그 이후에는 원조도 중단되었다. 따라서 1931-2년 겨울 무렵 가계는 대부분 아직 구제를 다소 받고 있기는 하였으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마리엔탈에서 100가구 미만이 그곳이나 인근촌락, 비엔나 등지에서 일하여 소득을 얻었고 나머지 400가구는 구제를 받아서 생계를 지탱하였다. 9가구는 구제나 원조조차 없었다. 예외적으로 18가구는 철도연금으로 살았다.

가구의 5분의 4가 촌락당국과 공장소유의 공동지에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각 지분은 5구획씩이었다. 한 구획은 크기가 약 12제곱미터 (2X6)였고 계절에 따라 다양한 채소를 재배하였으며, 많은 가구가 즐겁게 살기 위하여 꽃도 키웠다. 약 30가구는 토끼도 길렀다. 집에서 채소를 재배하는데도 식생활은 매우 단조로웠다. 육류는 약 절반 정도의 가구가 일주일에 1번, 일요일에 섭취하였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고기를 먹는 가구는 거의 없었고 그들이 먹은 것은 대개 말고기였다. 그것은 경제학자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소득이 떨어짐에 따라 소비가 증가하는 ‘열등재’였다. 탄수화물이 대부분 식단의 기초였다. 그리고 음식에 쓰이는 가루는 밀이 아니라 보다 값싼 호밀로 만들었다. 설탕 대신 값이 더 싼 사카린이 쓰였다. 거의 모든 가구가 하루에 3끼를 먹기는 했으나 저녁은 빵과 커피 아니면 점심때 먹다 남은 음식을 먹기 일쑤였다.

촌락 가구들은 거의 모든 소득을 이 빈약한 식단을 꾸리는데 지출했다. 아이가 있는 가구는 우유도 샀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구가 난방용 석탄을 샀다. 그러나 의복이나 기타의 소비에 쓸 돈은 남아나지 않았다. 특히 신발이 문제였다. 이들은 대개 새 신을 사서 신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다 떨어진 신발을 깁고 또 기웠다. 어떤 가구는 신발이 닮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이의 행동을 제한하기조차 하였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른 비교가 어렵기는 하나 마리엔탈 실업노동자의 소득은 제 1장에서 언급한 1890년의 이탈리아 노동자와 비슷해 보인다. 두 경우 모두 음식비는-육류소비가 적고 다양하지 못한 식단임에도 불구하고-거의 모든 예산을 소모시켰다. 여가나 자본지출을 위한 돈은 거의 남지 않았다.

소비행위가 음식으로만 주저앉고 음식이란 것이 빵과 커피로만 한정되는 동안 사람들의 행동반경도 촌락내로 줄어들었다. 1920년대에는 극장에 간다든가, 크리스마스 쇼핑을 한다든가, 학교에 다니기 위하여 비엔나로의 여행이 잦았다. 실업이 닥치자 이러한 여행을 감당할 돈이 사라졌다. 기차요금조차 부담스러워져서 사람들은 자전거에 더욱 크게 의존하였다. 제 1차대전 이후 철도와 경제 번영 덕분에 고립에서 벗어나던 농촌촌락들이 대공황기에 다시 고립되었다.

신문구독이 감소하면서 이러한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사회민주당 신문은 뉴스뿐만 아니라 지적인 논의도 담고 있었는데 구독자 수가 1927년부터 1930년까지 60% 가량 떨어졌다. 이것은 반드시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구독료가 실업노동자에게는 저렴했기 때문이다. 오락에 더욱 치중한 다른 신문의 구독률은 30%만 떨어졌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무관심이 극에 달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정치적 조직결성은 비록 열정이 감소하긴 하였으나 지속되었다. 1932년 선거에서 투표는 1930년 선거의 투표와 거의 일치하였다. 그리고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촌락에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정치는 여타의 여가활동처럼 이득을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은 무감각이 증가하면서 각종 레크리에이션 행위를 감소시키는 경향 때문에 상쇄되고도 남았다.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이제 신문을 읽지 않았다. 따라서 신문기사나 칼럼에 관해 친구나 이웃과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일도 줄었다. 대출자의 숫자나 각 대출자가 빌려간 책의 수가 감소하였다. 사람들은 점점 더 카드놀이로 시간을 때우며 살았다.

이러한 무기력한 상황을 눈에 띄게 보여주는 것이 예전에는 촌락의 장원에 속했다가 촌락생활의 초점으로 발전했던 공원의 운명이었다. 번영기에 촌락 사람들은 일요일이면 공원 벤치에 앉아 있거나 거닐곤 하였다. 잔디와 관목 숲도 산뜻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실업자가 증가함에 따라 여가시간이 늘어나는데도 공원은 급속히 황폐해 갔다. 산책길은 잡초가 무성하고, 잔디는 말라 비틀어 가고, 공원은 황량해졌다.

촌락 사람들은 각기 활동을 줄여 가면서 서로를 의심하였다. 구제를 받는 동안 일을 한다든가 하는 불법행위에 대한 고발이 항상 있었다. 고발건수가 1930-31년에 급증하였다. 그러나 조사 결과 사실로 확인된 건수는 그렇게 급증하지 않았다.

마리엔탈을 연구한 사회학자들은 대부분의 가구를 자신들의 처지에 체념하고 사는 부류로서 분류하였다. 가구들은 보잘 것 없는 예산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 삶을 꾸리고 가족을 유지하고 보존하며 인내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그럭저럭 모면해 가는 것에 바쳐졌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어떤 가족은 전처럼 계획을 세웠으나, 다른 가족은 정신적 육체적 방치와 갈등으로 철저하게 망가졌다. 촌락에서 4가구 중 거의 3가구 정도는 체념한 사람들로 분류되었다.

실직 남성은 할 일없이 빈둥거렸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조사원의 질문을 받은 날 내내 무엇을 했는지 거의 기억도 못했다. 집주변에 앉아 있거나 어슬렁거리거나 혹은 노동자클럽(Workmen’s Club)에서 카드놀이를 하거나 장기를 두거나 하였다. 작업시간표를 작성해 보면 성인남자 시간의 반 이상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거나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나머지 4분의 1은 장보기나 물 길어 오는 것 같은 자질구레한 가사 일이었다. 4분의 1 이하의 시간만이 자녀를 돌보거나 수공일 같은 주요가사노동에 소요되었다.

여성은 활동량이 훨씬 많았다. 비록 이제 일터에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가사를 운영, 유지하고 자녀를 보살펴야 했다. 요리하고, 옷을 될 수 있는 한 오래 입기 위하여 수선하고, 살림살이를 꾸리다 보면 시간이 다 갔다. 남자들은 가사운영에 전보다 덜 기여하였다. 때로는 끼니 때 시간 맞춰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성이 모든 책임을 떠맡았다. 여성들은 종종 일터에서 일하랴, 가사 일을 마치랴, 두 가지 다 하려면 힘들고 시간이 많이 들지라도 한결같이 일터에서 다시 일하려 했을 것이다.

실업노동자에게 시간이 의미하는 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들의 취침시간이었다. 일하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대개 11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들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와 먹고, 어린아이를 재우고, 정치적 모임에 가거나, 기타 활동을 하거나, 갖가지 얘기를 나누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1930년대 초 여성들은 가사 일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여전히 저녁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9시 전에 자러 갔다. 깨어 있을 필요가 없었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더 많이 잤다.


영국 런던, 그리니치구

이보다 몇 달 앞선 시기인 1931년 여름과 가을, 런던의 한 구(區)인 그리니치 (Greenwich)의 실직노동자의 경험이 조사되었다(Bakke 1934). 연구자는 혼자서 노동자들과 함께 살면서 관찰과 담화내용을 기록하였다. …

그리니치 연구보고서에 나오는 기계공겸 트럭운전자의 28세 때 경험을 살펴보자. 이 기계공은 일자리를 잃고 3일이 지날 때까지 다른 일을 찾는데 매우 낙관적이었다. 예전에 1주일 이상 실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3주가 지나자 이제는 그렇게 확신하지 않았다. 그는 신문의 모든 구인광고마다 답신을 보냈으나 점점 더 낙심하였다.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나봐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라고 그는 말했다.

8주 후 그는 집세를 아끼기 위해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고 일자리를 찾으러 다닐 때는 버스요금을 아끼려고 걸어서 다녀야 했다. 그리고 장기실업자로 취급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갖지 못했었는가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11주 후에도 여전히 일자리를 열심히 찾아 다녔으나 이제는 무작위 적으로 하는 것만 찾았다. 광고를 보고 응하는 일은 더 이상 전망 이 있을 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가 한 말은, ‘내가 쓸모가 없거나 이 일대 경기에 뭔가 문제가 있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17주째 무렵, 그 기계공은 완전히 낙담하였다. 그는 ‘음울하고 풀이 죽은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근처에 일자리가 있음직도 한 증거 때문에 비록 마리엔탈의 노동자들만큼 침체되고 할 일 없이 빈둥대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 영국노동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을 똑같이 절망적인 것으로 보았다. ‘여기저기를 그렇게 많이 터벅터벅 쏘다니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물론 충분히 나쁘기는 하지만요. 일자리가 거기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야말로 절망적인 것이지요.’(Bakke 1934 : 64-7)


영국, 맨체스터 인근 소도시 위건

(조지) 오웰은 레프트북 클럽 (Left Book Club)의 위촉을 받고 1930년대 중반 북부잉글랜드 노동자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하여 맨체스터 근처 소도시 위건(Wigan)으로 갔다(Orwell 1937). … 오웰은 실직한 독신남성이 처한 무시무시한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가구가 갖추어진 음울한 방에서 살았지만 그 안에서 종일 머무를 수 없었다. 겨울에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바깥에서 온기를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영화관, 도서관, 심지어 강연조차도 추위에서 벗어날 도피처를 제공하였다. 오웰은 ‘내가 들은 가운데 전무후무하게 어리석고 최악으로 전달되는 강연’에 참석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빠져나가기라도 했지만, 그 집회장은 실직자들로 여전히 가득 차 있었다.

실직자 가족의 식단은 흰 빵과 마아가린, 소금에 절인 쇠고기, 설탕을 탄 차, 감자 등이었다. 오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37: 95), ‘더욱더 나쁜 것은 가진 돈이 적을수록, 그 돈을 영양 섭취에 필요한 식품구입에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 사람을 유혹하여 값싸게 즐길 일은 항상 있다 … 실업은 끝없는 불행이다. 그것을 특히 영국인들의 아편인 차 같은 것으로서 지속적으로 덜 느끼게 하고 있을 뿐이다.’

Feinstein, Charles H., Temin, Peter., Toniolo, Gianni., The European Economy Between the Wars,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양동휴 박복영 김영완 역, 『대공황 전후 유럽경제』, 동서문화사, 2001, pp.168-176)


by sonnet | 2008/07/05 23:12 | 정치 | 트랙백(1) | 핑백(2) | 덧글(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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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wizmusa's me.. at 2008/07/07 12:46

제목 : wizmusa의 알림
a quarantine station : 대공황기의 생활 - 민주주의의 무서운 점은 저렇게 된 것도 내 탓이라는 무서운 진실이다....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08/07/25 08:14

... 5,60년대는 이런 입장이 서방 주류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수정자본주의니 혼합경제니 하는 말들이 미국이나 서유럽 경제를 가리키는데 널리 사용되었다. 이 시기는 대공황 때 죽도록 고생해본 세대들로 꽉 차 있던 시절이라 지금처럼 시장의 무결성을 목청높여 외치긴 매우 힘든 분위기이기도 했고 말이다. 폴 크루그먼은 왼쪽으로부터는 오른쪽이라고, 오른쪽으로 ... 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08/08/03 09:48

... 일전의 포스팅 대공황기의 생활</a>에 다음과 같은 <a title="" href="http://sonnet.egloos.com/3813474#11655298">코멘트가 붙은 적이 있다. 당시엔 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대충 넘어갔었는데, 이 악명높은 인물은 당시 ... more

Commented by 로리 at 2008/07/05 23:20
섬찟합니다... T.T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11:20
으시시한 세상이죠.
Commented by paro1923 at 2008/07/05 23:23
옛 성현들의 말씀대로입니다. '무항산 무항심'...;;;
(IMF 전후로, 저런 팍팍한 심성을 주변에서 전보다 훨씬 더 많이 만나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11:21
동감입니다.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이 놀랄 정도로 줄어든 것을 느낍니다. 그 빈자리는 어딘지 정체모를 무관심 내지는 음침함 같은 것이 대신한다고나 할까요.
Commented by 自重自愛 at 2008/07/05 23:23
영국 구직자 이야기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공감간다고 말하는 것도 건방져 보이네효. ㅠoㅠ;;;;)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11:23
저도 처음 봤을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Commented by 키치너 at 2008/07/05 23:26
역시 사람은 일을 하지 않으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생존하기 힘든 동물이죠. 그런 점에서 뉴딜과 같은 대규모 공공사업이 실제로 대공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많은 실직자들을 '보통생활'의 궤도로 돌려놓는 데는 확실히 큰 영향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20:11
적어도 뭔가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 심리적으로나 사회안정 측면에서 분명히 필요한 것 같습니다. 모든 걸 포기한 사람만큼 감당이 안되는 게 또 있곘습니까.
Commented by 444★ at 2008/07/05 23:31
기계공의 푸념을 남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다는게 슬프군요.(먼산)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20:08
Tomorrow Is Another Day
Commented by 三天포 at 2008/07/05 23:46
엄청날정도로 음울하네요....
왠지 음울한 구름끼고 잿빛도시같은 이미지 영상같은게 휙휙 지나가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20:09
우리가 봐도 이러니 당사자들은 어땠겠습니까.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겠지요.
Commented by 그람 at 2008/07/06 00:17
오스트리아에서 수입이 생기면 바로 지원은 끊는건 좀 심했군요.

로마인이야기에서 시오노 아줌마가 직업은 생계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말과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이걸보니까 일본에서 히키코모리가 문제되니까 그 대안으로 오타쿠가 나온다는게 이해됩니다.(오타쿠는 그래도 열정을 가지고 활동을 하기에 괜찮다기에 웃었는데 이걸 보니까 주장하는 학자들이 이해가 갑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20:12
한국도 뭔가 수입이 있으면 실업급여를 받는데 제한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부정수급 문제가 늘 있기 때문에 통제를 하긴 해야 하지요.
Commented by 홍월영 at 2008/07/06 01:47
어릴 적에 어머니나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대한민국의 풍경이 오버랩되는군요. 그 시절에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퍼질러앉아 있었다.... 라는 얘기.
Commented by Hopfrog at 2008/07/06 13:48
...더러운 옷차림과 누우런 얼굴로 나는 항상 골방 안에서 뒹굴었다.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수없이 많은 시간의 대열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비웃으며 흘러 가고 있었고, 내가 잠들어 있을 때는 긴 긴 악몽들이 거꾸러져 있는 나에게 혹독한 채찍질을 하였었다...
<김승옥, 무진기행>

ㄴ딱 이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21:05
네에.. 뭔가 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대한 부조리에 직면한 느낌이었을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오토군 at 2008/07/06 15:29
저도 군대 전역하고 1년 정도 직장이나 알바를 전전하며 자리를 잡지 못했었는데 참 사람 마음이 좋지는 않았었죠. 그런데 이건 뭐… 저는 행복했던 거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21:15
그래도 다른 어떤 것도 본인의 불행과 비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Commented by 행인1 at 2008/07/06 15:37
무시무시하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21:05
글로만 봐도 저러니 당사자들은 오죽했겠습니까.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8/07/06 15:40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경고로 보일 정도군요. 매우 덜덜덜 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21:19
공황이란 건 여러가지 이유로 오지만 얻어맞는 서민들의 느낌은은 대개 비슷한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아텐보로 at 2008/07/06 16:06
우리나라에도 멀지 않은것 같습니다 ㅜ^ㅜ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21:19
사실 그러진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Commented by 구들장군 at 2008/07/06 19:54
언젠가 저 시절 사진을 몇 장 본 적 있습니다.
그걸 보고 느꼈죠. 전쟁이 터지는게 당연했구나!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21:16
저도 줄서서 양철통을 들고 자선수프를 받아가는 아저씨들 사진을 보고 있으면 참 기분이 묘해지더군요.
Commented by 이네스 at 2008/07/06 20:25
허참.. 우리도 멀지 않은듯해서 더욱 섬찟하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21:20
사실 그러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Commented by monsa at 2008/07/07 00:33
고대가 망했을때, 괜히 기본권을 포기하고 장원에 노예로 기어들어갔던 게 아니었습죠.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11:24
사실 이런 이야긴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나옵니다. 양인이 노비로 들어가서 사회문제화된 결과 조정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는 식으로요.
Commented by 하늘이 at 2008/07/07 14:18
사실 교육업계에서도 남의 일이 아닌 것이...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마리엔탈 분위기의 학교와 영국 실업자 분위기의 학생들 역시 늘어나고 있습니다.

학생들 스스로 학습은 물론이고 일상생활 면에서 침체되는 경우를 보고 있으면 더더욱 오싹해지죠. 문제는 탈출구나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는 것... -_-;;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11:25
으으, 정말 안 좋은 소식이군요. ;;;
Commented by 나츠메 at 2008/07/07 14:49
이젠 소넷님이 한여름 밤의 공포특선 포스팅을 올려주시는 군요...... -_-...... 제가 대학 졸업할 때까진 경기가 좀 좋아져야 할 텐데 말입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데 말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0 21:21
아무리 어려워도 살 사람은 살아야죠. 그리고 젊은 사람일수록 유리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게임은.
Commented by 천마 at 2008/07/07 17:13
노숙자들이 노숙에서 벗아나고자 하지만 그러지못하는 이유가 일할 의욕을 잃고 의지를 잃어 결국에는 스스로 절망에빠져 주저앉기때문이라는데 그런 현상은 이미 대공황기부터 나타났군요. 이 정도면 개인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셈인데 대공황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았습니다. 현재의 유럽이야 그동안의 경험으로 복지제도를 잘 구성해서 국민이 저런 상태로 빠지는 것을 막는 것으로 압니다만 우리는 어떨지....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6 20:41
과거에도 한국 경제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과는 몇 가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일단 2차대전 후의 장기호황이 있었고, 그런 배경 하에서 한국 경제가 일시적으로 위기에 빠지더라도(종종 그랬음), 절대규모가 작기 때문에 큰 나라들이 한국같은 소국의 위기탈출용 밀어내기 수출을 받아 주어도 세계경제에 별 영향이 없었습니다. 또한 안보문제 등 다른 동기으로 원조나 약간의 양보를 해 줄 경우, 그정도로도 수혜국은 큰 성과를 이룰 수 있기도 하고요.
이제는 경제규모가 커져서 더이상 그런 작은 나라일 때 통하던 전술이 계속 통용되기 어려운데 박정희-전두환 경제성장을 신봉하는 그룹은 과거 신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반대로 김대중-노무현 기를 지지하는 세력은 경제규모가 커진 것이 반드시 유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도 많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해서 이 문제가 간과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공황이 돌아올 때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단순한 불황을 이겨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곰늑대 at 2008/07/07 18:11
대공황시절의 뉴딜정책과 같은 공공사업으로 경제 재건책을 구성하는데 성공한건 사실입니디만, 그 방향에 따라 문제가 있겠죠. 네. 예를 들면 대운하라던가.

우리나라에서 적용될만한 공공사업이 뭐가 있을까요?
Commented by 파파라치 at 2008/07/10 13:49
피라밋을 쌓으면 어떨까요?

농담이 아니라(물론 반은 농담이지만) 2MB의 대운하 구상을 보면서 차라리 피라밋이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_-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6 20:23
정말로 대공황 같은 것이 오면 (결국 전쟁도 하게 되었는데) 대운하도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지금은 붕괴를 막기 위해 그런 극단적인 수단을 써야 할 시점이 아니란 것이겠지요.
위기시에 적당한 처방을 미리 낭비해 버리면 정작 필요할 때는 없어서 못 쓸 수도 있습니다.
Commented by 행인1 at 2008/07/09 01:15
좀 벗어나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대공황기에도 호위호식하며 우리나라 아엠에프때처럼 '이대로~'를 외친 부자들도 있었들 것 같다는 쓸데없는 추측을 해봅니다...뭐 부자들이야 공황이든 호황이든 잘먹고 잘 살았겠지요. 빈부의 차이는 인류역사에서 어쩔수 없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6 20:24
기억에 의존하는 거라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미국에 자사주 공매도로 오너의 회사를 집어삼킨 전문경영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시간 나면 다시 한번 찾아보든가 해야 할 듯.
Commented by 에로거북이 at 2008/07/20 10:25


가난도 큰 고통이지만 일자리 없는 고통도 참 크더이다.

멀쩡하게 일해야 될 나이와 자격과 실력을 갖고도 난데없이 6개월간 실직하고 살았더니 인생 황폐해지더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8/02 18:11
그 기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Commented by TNSH at 2011/11/16 10:14
전 이제 겨우 학부생일 뿐인데 왜 침체 되어 있을까요...조지 케넌의 '오늘의 한마디'가 실현되어 버린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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