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우리 평화적으로 맞짱 한번 떠보자. (고금아) 에서 트랙백
이 글은 이오공감에서 꽤 인기를 끌었던 것인데, 국민투표 이야기도 나온 김에 한번 논평해 보기로 한다.
이 글의 요지는
헌법 제72조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를 근거로
"정부의 추가협상안에 만족하십니까?"란 국민 투표 한번 합시다란 것이다.
1. 그 헌법 조항으로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일단 "정부의 쇠고기 수입협상 결과"가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우선 이 조항이 개정된 역사적 과정을 보자.
현행헌법과 같은 형태의 국민투표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1972년 이른바 유신헌법 제49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국민투표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면 그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지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는 해석론을 가능케 했다. 그리하여 1980년 헌법 제47조에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현행헌법 제72조와 동일)고 하여 중요정책을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것으로 규정한 것은 국민투표의 대상범위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선택, "재신임국민투표와 책임정치")
이 해석을 따를 경우 "쇠고기수입협상에 만족하냐"에 대한 설문조사 국민투표는 위헌이라고 봐야 하거니와, 만에 하나 실시할 경우 앞으로 그 어떠한 종류의 정책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국가안위에 대한" 정책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선례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외교․국방․통일"이 단순한 예시에 불과해서 대통령은 아무거나 다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란 해석을 취한다고 해 보자. 그럼 그것이 앞으로 우리 정치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2. 대통령의 정치적 무기로서의 국민투표"
따라서 [...] 특정의 국가정책에 대하여 다수의 국민들이 국민투표를 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이러한 희망과는 달리 국민투표에 회부하지 아니한다고 하여도 이를 헌법에 위반한다고 할 수 없고, 국민에게 특정의 국가정책에 관하여 국민투표에 회부할 것을 요청할 권리가 인정된다고 할 수도 없다" (2005.11.24. 2005헌마579,763(병합)).
즉 헌법재판소는 오직 대통령이 유리하다고 생각할 때만 국민투표에 회부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밑질 게 없는 것이다. 그 결과,
대통령이 부의하는 제72조의 국민투표는 정권 차원에서 특정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수단이 된다. 이 때 대통령은 자신의 견해가 국민적 지지에 입각하고 있음을 전체 국민에게 보여주며 [...] 국민투표부의권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은 자기에게 유리한 시기에 유리한 방법으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국민투표는 대통령의 의사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실시되는 것이 속성이다. 바로 이 때문에 국민투표는 실질적으로 대통령의 의사를 국민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관철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요컨대 국민투표 부의권은 국민의 견해를 바탕으로 대통령 자신의 정책적 판단을 관철하고자 하는 수단으로서, 국회에 대하여 정책적 판단의 우위를 확보하는 헌법적 근거로서 작동한다. (음선필, "한국헌법과 국민투표")
우리 역사에는 이 수법을 아주 악질적으로 사용한 선례가 있다.
박정희는 "만일 우리 국민이 유신체제의 역사적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고 현행헌법의 철폐를 원한다면, 나는 그것을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즉각 물러날 것이다."라고 유도심문을 던져 1975년 2월 12일의 국민투표에서
73.1%의 득표로 유신체제를 정당화한 바 있다. 즉 국민의 권리를 뺏는 개헌조차도 국민투표로는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국의 경우를 보아도 독재로 쓴 맛을 본 경험이 있는 나라들, 독일,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일수록 국민투표를 기피하는 것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
그 때는 옛날이고 지금의 대중은 다르다고 주장해볼 수도 있겠으나, 사실 불안한 이야기이다. 유신 때도 개헌을 해 놓고
반대여론이 들끓어서 어쩔 수 없이 국민투표를 한번 더 했던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 치하에서도 헌법개정 문제와 자신의 신임문제를 교묘하게 엮어 국민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방법으로 승리를 거둔 적이 여러 번 있다. 앞으로 나올 모든 대통령이 아주 믿을만하다고 간주하지 않는 이상 이런
위험한 선례를 남기는 모험을 먼저 요구해서 무덤을 파는 짓은 안 하는 게 좋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