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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1895) 읽기
지난 달에 H.G. 웰즈의 『타임머신』을 다시 읽으며 메모를 정리해 둔 것이 있는데 분량이 좀 되길래 조금 손을 봐서 롤아웃해 둡니다. 초고가 일관성 없이 모은 논점별 메모에서 출발하는지라 이 이야기 저 이야기가 잡다하게 나오며 통일성이 떨어지는데 양해 바랍니다.


일러두기
* 회색 상자로 처리한 인용문은 웰즈의 『타임머신』 본문의 인용이고, 아이보리색 상자는 비평적 문헌의 인용이다.
* 별도의 저자 표시 없이 "몇 장"으로만 표기된 것은 『타임머신』의 각 장을 가리킨다.
* 강조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모두 필자의 것이다.
* 『타임머신』의 번역본으로는 현재 엔북 혹은 문예출판사 판 등이 유통되고 있다. 또한 영문 텍스트는 Wikisource에서, 70년대 간행되었던 아이디어회관 판 한글 텍스트는 SF-직지 프로젝트에서 볼 수 있다.
* 『A Modern Utopia』의 영문 텍스트는 Project Gutenberg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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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가까워진 유토피아와 그 반동

유토피아란 어원 그대로 현재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에, 가능성 이상으로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황금시대에 대한 미화된 기억들이 에덴동산 같은 전설이 되어 유토피아의 과거를 형성해 왔다면, 우울한 현실로부터 탈출해 행복을 되찾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은 진부한 유토피아의 미래조차도 끊임없이 덧칠하게 만든다. 이처럼 좋든 나쁘든 영원한 이상향에 대한 희망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기에,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유토피아적 기획들을 세워 완전무결한 행복을 달성하려는 꿈을 키워 왔다.

유토피아 문학은 어떤 이상에 부합하는 상상 속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묘사하는 장르로 물질적 충족, 개인의 정신적 완성, 그리고 공동체의 미래와 휴머니즘의 완성을 형상화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또 그런 완성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사회정치적 혹은 과학기술적 진보 전반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끝없는 낙관주의적 성향을 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상적 전통이 뿌리를 내리고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진행됨에 따라, 그에 수반되는 위험하고 해로운 결과들 혹은 그 가능성을 우려하는 논의들도 등장한다. 이러한 논의들은 사람들이 그리던 미래의 유토피아가 현실에 존재하게 될 경우 파생될 수 있는 ‘끔찍한’ 현실에 주목한다. 플라톤이나 토마스 모어가 작품을 통해 완전한 제도를 갖춘 행복한 인간의 미래를 당위적으로 다루었다면, 안티유토피아 작가들은 지상천국을 만들려는 시도가 단지 겉모습만 그럴듯할 뿐 생명과 자유를 위협받는 비참한 상황으로 귀결되거나, 인간성을 억압하는 등 그 내면이 황폐할 수 있음을 풍자하고 비판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사회는 제2차 산업혁명의 충격에 직면해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적용이 인간사회 전반에 막대한 변화, 즉 진보를 가져다주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과학기술 발전이 진보의 동력이라는 현실을 수용한 안티유토피아 문학은 H. G. Wells, Evgeny Zamytin, Aldous Huxley, George Orwell 등의 작가의 손에 의해 과학소설(Science Fiction) 장르와 결합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안티유토피아 문학, 즉 유토피아가 실현된 결과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유토피아의 허상이 폭로된 ‘우울한 세계’로서의 미래사회를 들이대는 장르의 융성은 주로 인류가 상상 속의 이상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진보라는 수단을 손에 넣게 된 우리 시대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과연 안티유토피아 문학은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의지에 대한 풍자와 경고가 주목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의 장르」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이는 결국 유토피아에 대항하는 반동의 이념이자 유토피아의 실천과정에 대한 비판적 논평에 불과한 것일까?



2. 미래세계의 겉모습

우선 이 이야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80만년 후의 미래를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시간여행자가 살았던 19세기 빅토리아조 영국을 떠올리게 하는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엘로이들이 자는 곳에서 “옛 페니키아 문양”을 찾아내고(4장), 템스 강을 바로 알아보며(4장), ‘녹색 자기의 궁전’이라고 묘사한 거대한 박물관을 탐험하며 “우리는 명백히 남 켄싱턴의 잔해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묘사(8장)하고 “우리 시대의 친숙한 유리 케이스들을 찾아”(8장)낸다.

하지만 오늘날 발굴되는 대략 수천 년 전의 유물과 근대 문명의 산물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상이점 혹은 몇 백 년 전 지도와 현재의 지도간의 차이를 떠올려 보면, 이러한 유사성을 갖고 80만 년이라는 세월을 정당화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 점은 다른 평론가들도 지적하고 있다. 작가의 관심사는 현재의 세계에 기울어 있다는 것이다.

『타임 머신』에 대해 우선 지적해야 할 점은 그 현재성이다. [...] 미래세계에 남아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증거들과 인류의 운명에 대한 시간여행자의 사상적 태도는 그의 이야기가 802,701년의 사회에 대한 실제적 서술보다는 그의 청중들에 대한 경고로서의 성격이 더 강함을 시사한다. (Partington 57-8)

그러나 건물이나 유적, 지리상의 변화는 어쨌든 간에 80만 년이 흘러야 할 다른 이유가 있음직하다. 그것은 작가가 인간의 종분화(speciation)가 완성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긴 시간을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작중에서 시간여행자는 대조되는 사회계층에 속한 인간들이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해 생물학적 진화를 계속해 나간 결과가 엘로이와 몰록이라는 극히 이질적인 두 종족의 종분화를 낳았을 것이라는 가설을 강력히 옹호하고 있다. 이는 웰스가 다윈의 막역한 동지이자 진화론의 대가 헉슬리(T.H. Huxley) 밑에서 생물학을 배웠으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헉슬리를 “내가 만날 수 있었던 사람 중 가장 위대한 분이며, 지금도 굳게 그렇게 믿고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존경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작가 자신의 진화론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은 어떻게 나왔을까. 시간여행자가 처음 802,701년의 세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이 목가적 공산주의가 달성된 세계에 도착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미래 세계에 대한 경험이 조금씩 쌓이면서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임이 곧 드러난다. Partington이 정리한 것처럼, 시간여행자의 추정은 다음과 같은 네 단계를 밟으며 변화해 간다.

(1) 맨 처음, 시간여행자는 엘로이 족이 이 목가적 공산주의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류의 후손이라고 믿는다.
(2) 다음에 시간여행자는 엘로이 족이 계급 분화된 지구의 주인이며 지저의 몰록 족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3) 이어 그는 이곳을 몰록 족의 봉기 직전에 처한 계급 분화된 사회라고 본다.
(4) 결국 그는 몰록 족이 지배 계급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엘로이들 밑에 살면서 잡아먹을 때까지는 엘로이들을 돌보아주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시간여행자가 기술한 이러한 계급관계는 그 기원을 빅토리아조 사회에 두고 있다. (Partington 58-9)

하지만 흥미롭게도 변화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모험이 진행되면서 알아낸 것들 때문에 미래 사회에 대한 시간여행자의 관념은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로이-몰록의 계급관계는 서기 802,701년 이전에 벌어진 인류의 발전과정의 앞 단계를 보여준다는 그의 초기 가설은 계속 채택된다. (Partington 59)

웰즈는 시간여행자의 입을 빌려, 책 전체에 걸쳐 이 주장을 지속적으로 전개한다. 사실 이것은 작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어째서 인류가 두 종족으로 갈라지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 우선 우리들 시대의 일에서부터 생각해 보면, 현재는 그저 일시적이고 사회적 차이에 불과하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간격이 점차 넓어지게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명확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이 이 모든 문제의 열쇠였다. (5장)

변화도 없고 변화할 필요도 없는 곳에서는 지성도 존재할 수 없다. [...] ‘그러니까 내가 본 것처럼, 지상세계의 사람들은 허약한 아름다움으로 빠져들고, 지하세계는 그저 기계공업의 장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10장)


그런데 다음과 같은 가설적인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어떤 관찰자가 먼 나라에 일주일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그 나라 말도 모르고 사전 지식도 전혀 없었지만, 일주일 동안 둘러본 것에 눈치코치를 더해 그 나라가 오래 전에 관찰자의 나라 사람들이 건너가 세운 식민지였을 거라는 추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누구나 이러한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느낄 것이다. 그의 관찰은 극히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피상적인 결과물이며, 그가 내놓는 근거 또한 단편적이고 취약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시간여행자는 자신의 결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덧붙인다.

이상은 내가 서기 80만 2천 7백 1년의 세계에 대한 나의 마지막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이 전혀 틀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생각되었기에 자네들에게도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다. (10장)

즉 웰즈도 시간여행자가 내놓은 가설이 갖는 본질적인 설득력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문제를 우회하기 위한 추가적인 방안을 강구한다.



3. 직업으로 불리는 인물들

『타임 머신』의 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주인공은 시간여행자(Time Traveller)이고, 그 집에 모여 이야기를 듣는 친구들 또한 의사(Medical Man), 심리학자(Psychologist), 편집장(Editor), 언론인(Journalist) 등 그가 하는 일로만 불린다. 글 전체를 통해 이러한 기술방법이 일관되게 적용된다. Peter Firchow는 웰즈의 초기 원고들을 근거로 이러한 묘사는 분명히 의도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웰즈는 이 소설의 최종판에서 시간여행자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반면 평이했던 그의 초기 원고들에서는 그를 “Bayliss”나 “Dr. Moses Nebogipfel”같은 묘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Firchow 125)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인가? 그는 그것이 독자를 설득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 처음부터 시간여행자를 이름 대신 그의 기능으로 부름으로써(실제로 “시간 여행자는”이 이 소설의 첫 번째 단어임), 화자는 시간여행자의 이야기의 진실성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묵시적으로 보여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격려한다.
마찬가지로 시간여행자의 손님들 -다들 많든 적든 어느 정도는 회의적- 은 여러 가지 형태로 독자들이 품을만한 의구심을 대리해주는 역할을 맡아, 독자들의 당연한 의문이나 반론을 앞질러 다루어준다. 글 속에서 의사나 심리학자, 그리고 후의 편집장과 기자 같은 이 손님들의 전문직업이 여러 차례 명시되는데, 이러한 직업들이 훈련과 경험 양면에서 시간여행자 쪽의 어떠한 속임수를 간파해 내기 위한 역할을 맡기에 아주 적합하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결국 그러한 속임수는 끝까지 발견되지 않지만 -그리고 여기서 웰즈는 멋들어지게 현실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의구심을 끝까지 간직한다. 그들은 여기서 그런 것처럼 직업적인 의심꾼들이다. 심지어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화자 또한 명예로운 -또한 그럴듯하게 들리는- 린네 협회의 회원임이 드러나면서, 그가 모종의 과학을 연구하는 학자임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듯이, 그 또한 처음에는 의심쩍게 생각했다. 사실 시간여행자의 이야기의 진실성을 이제야 믿게 되었다는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우리 또한 그것을 믿게 도와준다. (Firchow 125-6)

계속해서 그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느긋한 신사들의 클럽 룸’ 의 분위기 [...] 또한 독자들의 자연스러운 불신 경향을 달래기 위해 의도된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장치들은 모두 그의 『Seven Famous Novels』 서문에서 언급된 바 있는 웰즈의 글쓰기 전략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Firchow 126)

2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간여행자의 가설은 관찰과 증거의 부족으로 본질적으로 취약하며 순수하게 과학적 설명력에만 의존해서는 독자들을 설득하기 힘들다. 따라서 작가는 글쓰기 기법을 통해 독자를 간접적으로 설득하려고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4. 계급성분: 시간여행자와 그의 친구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시간여행자의 서재에 모인 인물들은 하나같이 의사, 심리학자, 편집장, 기자, 군수 같은 직업적 기능으로 불리고 있다. 여기에 이름으로 불리는 예외가 하나 있으니 그가 “붉은 머리를 한 논쟁을 즐기는 인물, 필비”이다. 이러한 예외적인 호칭은 필비가 전문직업을 가진 인물이 아님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과 격의 없이 자유로운 대화를 진행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다른 손님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사회적 신분은 갖추고 있는 일종의 호사가(dilettante)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여행자는 집에 식사 시중을 들어줄 하인을 두고 있는 신분이다. (2장)
즉 이렇게 보면 이들은 모두 적어도 빅토리아조 영국 사회의 중상류층 계급 이상이라고 판단할 수 있으며, 이것이 이후 이들이 엘로이 족과 몰록 족, 그리고 미래 사회를 평가하는데 있어 상류층의 후손인 엘로이들에게 유리한 특정한 유형의 편향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5. 폭력성: 몰록은 정말 나빴던가?

한편 이 작품에서 엘로이는 온순하고 명백히 아름다운 생물이며, 몰록은 추하고 기분 나쁜 느낌을 주는 생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러한 묘사는 아름다운 생물은 착하고, 추한 외모를 가진 생물은 악할 것 같다는 사람들이 흔히 갖기 쉬운 선입견을 강화시킨다. 시간여행자는 명백히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Richard Tuerk는 이러한 가정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어 보인다.

시간여행자는 몰록 족은 악하고 엘로이 족은 선하다고 본다. 그러나 엘로이 족과 몰록 족 모두 처음에는 시간여행자를 비슷하게 온화한 방법으로 대하고 있다. 엘로이 족이 처음 그를 만졌을 때, 그의 “등과 어께에 … 부드럽고 작은 촉수를 느꼈다”(4장), 한 몰록 족이 처음 그를 만졌을 때, 그 느낌은 “말미잘이 그 부드러운 촉수로 얼굴을 쓸어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5장). 처음 몇 번 동안 몰록 족과 지상에서 접촉했을 때, 그들은 시간여행자를 해치는 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그가 몰록 족이 사는 지하세계로 들어갔을 때조차도 “부드러운 손길이 내 얼굴을 만졌다”(6장)고 느낀다. 후에 그가 성냥으로 그들을 겁준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를 “점잖게”(gently) 다루며 옷을 잡아당겼다. 그가 폭력적으로 나오고 나서야, 그들도 폭력적으로 응수하기 시작했다. (Tuerk 521)

사실 독자들이 빅토리아조 영국의 교육받은 신사인 시간여행자의 편에 서서 책을 읽기를 중단하고 그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본성을 드러내는 생물은 명백히 시간여행자이다. 어떤 특정 상황에 처하면 그는 자신의 신사적인 가면을 벗어던진다. 그 어떤 몰록도 그처럼 과감하고 잔인한 폭력을 펼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뼈가 내 주먹에 맞고 으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통의 괴성을 지르며 비틀거리며 물러나다가 주저앉았다. [...] 나는 몸을 굴리다가 쇠몽둥이에 손이 닿았다. 그것은 내게 힘을 주었다. 나는 발버둥치며 일어나 인간쥐새끼들을 떨쳐내고, 쇠몽둥이를 고쳐 잡았다. 나는 그놈들의 얼굴이 있음직한 곳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내 일격에 물컹하며 그놈들의 살과 뼈가 터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 힘든 싸움에 종종 따르기 마련인 이상야릇한 희열감이 나를 감쌌다. 나는 나와 위나가 결국은 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몰록 놈들을 하나라도 더 고깃덩이로 만들고 가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 앞을 형해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 두려움에 광분하며 나는 그들을 향해 사납게 몽둥이를 휘둘렀고, 그들이 다가오자 한 놈을 죽이고 여럿을 쓰러트렸다. [...] 몰록 두세 놈이 허둥거리다가 내게 다가오자, 나는 그놈들을 주먹질로 쫓아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9장)

그는 또한 시간여행자가 직간접적으로 “그들[몰록 족] 다수를 살해했으나, 그는 이에 대해 조금도 유감스러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Tuerk 522) 사실 이런 행동에 대한 반감은 몰록 족이 다른 인간 -엘로이 족- 을 잡아먹는 잔인한 종족이라는 설명 때문에 희석된다. 그러나 앞서 시간여행자의 종분화 가설과 마찬가지로 몰록이 엘로이를 잡아먹고 있다는 판단 또한 확고한 증거에 입각해있는 것은 아니다. 즉:

스스로 경험한 것에 대한 시간여행자의 해석은 부정확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것은 실제로 벌어진 일 보다는 그 자신의 선입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Tuerk 523)

Tuerk가 지적하는 선입견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간여행자가 몰록들이 사는 지저 세계에 처음 들어가 본 후 토로한 인상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완전히 새로운 존재인 구역질나는 몰록, 어딘지 모르게 냉혹하고 흉측한 놈들이 등장한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들을 질색하게 되었다. (7장)

엘로이 족이 몰록 족을 크게 두려워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몰록 족의 식인설은 Tuerk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좀 더 근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간접적인 근거에 불과하다. 시간여행자의 반응은 컴컴한 환경, 몰록의 추한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많고 나는 혼자라는 점을 감안할 때, 같은 현대인으로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그가 80만년 후의 세계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가장 거칠고 무자비한 생물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6. 정적인 유토피아 사회와 그 함의

『타임머신』이 발표된 이래, 이 책의 주제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계급분화의 문제였다. 이미 여러 평론가들이 이 점을 지적하였다.

Mark R. Hillegas가 웰즈의 소설에 대해 지적했듯이, “이 소설은 사회비판이자 사회주의자들의 항의가 거세어지고 있던 바로 그 1890년대의 산물이다. 엘로이 족과 몰록 족은 19세기 초에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 간격이 넓어졌던 것처럼 갈라섰다고 선언된다.” 그리고 John Huntington이 말하듯이 “[엘로이와 몰록 간의] 분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시간여행자의 최종적인 해석은 현대 영국에서 벌어지는 노동 분화와 직결되어 있다.” (Tuerk 517)

그러나 이만큼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를 능가하는 중요성을 갖는 논점이 있다. 한때 현대 영국 이상으로 발전했던 인류 문명은 결국 왜 몰락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 끝내 달성된, 균형 잡힌 문명은 벌써 전성기를 지나 이제는 쇠퇴기에 접어든 것이었다. 지상 세계의 인간은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안전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점차 퇴화해서 체격이나 체력, 지적 능력 등이 모두 약해져 버렸다. 나는 이미 그것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5장)

시간여행자는 미래에 머무르는 동안 끊임없이 이 의문에 도전해 나름의 답을 구한다.

나는 인간의 지성이 그려 놓은 꿈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던가를 생각하며 슬픔에 잠겼다. 인간은 스스로를 죽여 버린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안락하고 편리함을 향해 나아가고, 안전과 영원함을 갖춘 균형 잡힌 사회를 모토로 삼아 온 결과, 끝내는 그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 때는 인류의 생명과 재산이 거의 완전하게 지켜진 때가 정녕 있었을 것이다. 부자는 그 재물과 안락한 생활이 지켜지고, 노동자는 생활과 일이 보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완벽한 세계에서는 실업 문제도 없을 것이고, 해결되지 않고 남은 사회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단히 평온한 시대가 한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인류의 지적 다재다능함은 변화와 위험, 문젯거리에 대한 보상이었다는 게 자연의 법칙이지만 우리는 이를 간과한다. [...] 변화도 없고 변화할 필요도 없는 곳에서는 지성도 존재할 수 없다. 수많은 요구와 위험에 직면한 동물만이 지성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10장)

즉 완벽한 유토피아의 추구와 그 달성은 유토피아의 속성상 정적인(static) 것이기 쉽고, 역동성(dynamics)을 잃어버린 사회는 결과적으로 퇴보와 몰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10년 후에 나온 웰즈의 책 『A Modern Utopia』(1905)와 일치되는 것으로 작가 자신의 견해임이 확실하다. 이 책에서 웰즈는 자신이 그리는 유토피아는 근본적으로 그 이전의 어떤 유토피아와도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근대적 유토피아는 멈춰진(static)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kinetic) 것이며 항구적인 상태가 아니라 장기적인 오르막길로 가는 희망찬 한 단계여야만 한다. (A Modern Utopia, 1장 1절)

즉 웰즈의 유토피아는 결국 변화와 적응능력이 체제유지를 위한 핵심역량인 세계인 셈이다.



7. 적응력(1): 몰록과 영국 신사

그런데 Partinton은 이와 관련해 몰록 족이 보이는 적응능력은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웰즈의 유토피아 모델과 관련해 몰록 족의 적응능력은 『타임 머신』의 핵심 테마이다. 『타임 머신』에서 웰즈는 동적인 사회의 장점 보다는 정적인 사회의 악덕을 보여주기를 희망하며, 따라서 그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artinton 62)

그는 몰록 족은 “호기심 많고, 적극적이며, 상상력이 있다”(Partinton 62)고 지적한다. 확실히 몰록 족은 처음부터 시간여행자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해 여러 가지 탐색 활동을 벌이고, 마지막에는 타임머신을 미끼로 삼아 시간여행자를 함정에 빠트리려 시도하는 등 상당한 머리를 쓴다. 이는 “게으르고 쉽게 지치며, 어떤 일에도 큰 흥미가 없는”(4장) 엘로이 족과 크게 대비되는 점이다.

웰즈는 시간여행자의 입을 빌려 몰록 족의 이러한 속성이 생겨난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다.

지하의 인간들은 기계를 맡고 있었다. 이 기계는 완전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습관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고 얼마간의 지혜를 필요로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인간적인 성질로서는 어느 지상인 보다도 뒤떨어졌을지라도 독창력에 있어서는 지상인 보다 우월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다른 고기가 손에 들어오지 않게 되자, 옛날부터 습관적으로 금해져 오던 것을 먹기 시작했다. (10장)

그런 만큼 주인공의 견해처럼 그들이 “다른 고기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지금까지 금지되었던 것[인육]에 손을 뻗었다”고 해서 놀라울 것은 없어 보인다.

적응력이 이 작품의 핵심 테마라고 가정한다면, 몰록 족과 대비되는 다른 종족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시간여행자의 적응력은 어떤가?

어찌 되었든 엘로이 족과 몰록 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쇠퇴해가는 종족들이다.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의 근대 영국인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아직 진보 중인 종족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생명의 위기를 느끼는 상황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멀끔한 영국 신사가 보여주는 보여주는 표변성과 무자비함은 몰록 족을 월등히 능가한다. 이게 바로 Partinton이 말하는 적응능력이 표출되는 장면이 아니겠는가.



8. 적응력(2): 터부 혹은 침묵의 규칙을 깰 때

한편 없어진 타임머신을 찾는데 필요한 단서를 얻기 위해, 시간여행자가 몰록에 대해 위나에게 묻자 위나는 이를 터부를 건드린 것처럼 반응한다.

처음에 그녀는 나의 질문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체 했다. 이내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위나는 그런 화제는 말을 하기조차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내가 조금 무섭게 다그치자 그만 울어버리는 것이었다. [...] 위나의 눈물을 보고, 나는 그 이상 몰록에 대해 묻는 것을 그만 두고 어떻게든 위나의 눈에서 현재 인간의 잔재인 눈물을 그치게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엄숙하게 성냥을 그어 보이자, 위나는 곧 생글생글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즐거운 듯 손뼉을 치는 것이었다. (5장)

이 구절 때문인지, 현대 유럽의 교양인 사회에 대해 논평한 한 영국인은 자신을 “현대의 유럽 엘로이”라고 칭하면서, “유럽의 정치적 지적 엘로이들이 그런[사회적으로 껄끄러운] 모든 불편한 주제를 회피한다면 시간여행자가 몰록 족에 대해 물었을 때 작은 위나가 보인 행동보다 나은 게 뭐가 있겠는가?”라고 의문을 던진 바 있다. (Dalrymple 21)

이러한 유럽 엘로이의 행태는 정치학에서 침묵의 규칙(gag rule)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학자 Stephen Holmes에 따르면 정치적 갈등이 지나치게 치열할 경우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 토의와 행위를 저해하고 갈등 유발을 증폭시키는 이슈들은 정치적 토론안건에서 배제하기 위해 침묵의 규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Jörgen Hermansson 같은 다른 학자들은 이 규칙이 단기적으로는 민주주의 보존에 도움이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갈등 표출을 제약해 체제 경직성을 유발하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에 해롭다고 반론한다.

하지만 위나가 터부 혹은 침묵의 규칙을 수동적으로 준수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는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한 것 같다. 실제로 위나는 시간여행자와 함께하기 위해 사람들과 떨어져 잔다거나(5장), 밤에 돌아다니고(7장), 몰록이 출몰하는 숲 속에서 노숙을 하는 등(9장) 보통의 엘로이 족이 결코 하지 않을 것 같은 행동을 몇 번이고 거듭하는 용기를 보여주었고, 결국 그 때문에 목숨을 잃는 데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위나가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자는 곳에서 떨어져서 자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위나는 매우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대한 애정이 승리를 거두어, 우리가 알게 된 후로는 다섯 밤을, 마지막의 하룻밤까지도 내 팔을 베고 잤던 것이었다. (5장)

이는 즉 엘로이 족에게도 변화를 수용하는 그 나름의 적응능력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엘로이 또한 그저 살찌워지는 소는 아닌 셈이다. 식인에 나선 몰록 족의 적응능력이 식량부족에 대응한 생존전략의 일환이라면, 위나에게서 보이는 엘로이의 적응능력은 친절함이나 사랑 같은 인간적인 측면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9. 간주곡: 과학기술의 발전과 유토피아의 쇠퇴

프롤로그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토피아 소설과 디스토피아 소설은 서로 상반되면서도 상호 연관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소설군을 다룰 때 묘한 점은, 현대에 접어들면서 갈수록 디스토피아 작품은 늘어나는 반면 진정한 유토피아 문학은 오히려 보기 드물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New Atlantis』(1626)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작품의 이상향 벤살렘 왕국은 솔로몬 학술원이라고 불리는 고등연구기관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모든 풍요와 잉여를 책임진다. 많은 산출을 얻을 수 있는 개량된 작물, 음식물을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하는 특별한 기술, 병을 낫게 하는 약들, … 이런 것들이 벤살렘 왕국이 유토피아가 될 수 있게 뒷받침한다.
베이컨이 꿈꾼 이러한 「생산력 향상 기반 유토피아」 모델은 많은 후계자를 낳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에게까지 이어진다. 그가 서방 세계를 향해 “당신들이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가 너희를 묻어버리겠다”고 일갈했을 때, 그는 장기적으로 보면 자신이 속한 체제가 생산력 향상 측면에서 월등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예언자 마르크스와 레닌도 그렇게 약속했지 않았던가.

사실 베이컨이 상상한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 이르러 거의 달성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오히려 과학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고, 많은 나라가 벤살렘 왕국의 솔로몬 학술원 같은 고도의 조직적 연구체제를 갖추어 과학기술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되자, 오히려 과학기술의 발전에 유토피아의 희망을 거는 사람은 줄어들고 말았다.
거꾸로 20세기 들어서는 쟈마찐의 『우리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오웰의 『1984년』처럼 실은 과학기술이 인간성의 목을 조르는 도구로 변해버린 사회를 경고하는 디스토피아 소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편 현대에 들어 유토피아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과학기술에 대한 신념이 퇴색하고 있음은 디스토피아 뿐 아니라 유토피아 쪽에서도 관찰된다.

Arthur C. Clarke의 『유년기의 끝』(Childhood's End)의 경우, 저자가 치밀한 과학기술적 묘사를 중시하는 소위 「하드 SF」 진영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의 달성을 위해 과학기술의 진보에 의존하지 않는다. 중반부에 외계종족이 제공한 우월한 과학기술에 힘입어 베이컨적인 이상사회를 한 번 만들어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대신 인류 자신이 ‘유년기’를 졸업하고 신에 가까운 초월적인 종족으로 변신함으로서 진정한 유토피아로 가는 돌파구가 열리게 된다.
또 다른 현대의 유토피아 소설인 『Herland』(1915)에서 작가 Charlotte P. Gilman은 현대사회의 많은 약점들을 극복해 낸 이상사회를 그려내는데, 그 추동력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페미니즘이다. 즉 현대사회의 약점이란 실은 남성중심사회의 약점일 뿐이며 이 점을 바꿈으로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반응에 대해 Scholes와 Rabki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0세기의 작가들은 대부분 테크놀로지에의 예속을 극복할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어두운 미래를 예견하는 디스토피아(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같은)의 출현을 보게 된다. 그러나 어떤 작가들은 이러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 정신적인 성장과 비약적 진화를 가정했다. 물론 이러한 수법은 인간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들은 테크놀로지를 극복하는 길을 찾은 것보다는 오히려 테크놀로지를 회피한 것이다. (Scholes & Rabkin, 228)

과학기술의 발전이 현실로 다가오자, 사람들은 그 장점뿐 아니라 단점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경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과학기술이 만악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양날의 칼 정도는 된다는 사실, 즉 성배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로 인해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유토피아로 인도해 줄 것이라는 혁명적 낙관정신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면 수단의 비현실성은 유토피아 문학의 주요한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유토피아의 수단이란 기대감을 던져주면서도 약점을 가릴 수 있는 충분한 거리의 산물, 100m 미인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10. 역사의 끝으로!

미래 세계의 모험 막간에 시간여행자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우주적 시간을 느낀다.

별을 보고 있는 중에, 나 자신의 근심은 물론 지상의 모든 문제들이 갑자기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그 별과의 헤아릴 수 없는 먼 거리와, 미지의 과거에서 미지의 미래로 유유히 움직여 가는 그 운동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지구의 극이 그리는 거대한 세차 운동에 대한 것도 생각해 봤다. 내가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이 조촐한 회전 운동은 단 40회 밖에 하지 않았다. 그 몇 번의 회전 운동 사이에 모든 인간의 활동이, 전통이, 복잡한 조직이, 국가가, 문학이, 포부가, 아니 옛날 사람들의 기억까지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7장)

그리고 엘로이와 몰록의 세계를 떠나게 되자 시간여행자는 현재로 귀환하는 대신 우선 3천만 년 후의 미래로 간다. 지구의 운명을 직접 눈으로 확인코자 하는 것이다.

낮과 밤의 속도는 점점 느려져서 … 나중엔 낮과 밤이 한 번 바뀌는데 몇 세기나 걸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태양은 지지 않게 되어 다만 서쪽 하늘에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할뿐이었다. 그리고 전보다 크고 붉은 색이 짙어져 갔다. 달이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별들이 도는 속도도 점점 느려져서 이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빛의 점처럼 되어 버렸다. 드디어 그 새빨간, 엄청나게 큰 태양도 내가 타임머신을 정지시킬 직전에는 수평선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게 됐다. 그건 둔한 열을 가진 거대한 돔 같이 되어, 가끔 약간 꺼져 가는 것처럼 껌벅거렸다. 어쩌다 한 번 태양은 다시 환히 밝아지더니 곧 다시 둔한 붉은 색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 지구는 이미 태양에게 한쪽 면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1,000년가량씩 타임머신을 정지시켜 가며, 지구의 불가사의한 운명에 이끌려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서쪽 하늘에서 태양이 점점 커지고 점점 흐릿해져 가는 것과, 오래된 지구의 생물들이 차차 사라져 가는 것을 넋을 잃고 관찰하고 있었다.
드디어 3천만 년 이상 앞의 세계까지 가자 커다란 태양은 어두운 하늘의 10분의 1 가까이 뒤덮고 있었다. 거기서는 우글우글 하는 게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붉은 빛깔의 바닷가에는 탁한 녹색의 돌 거죽에 난 식물 외에는 살아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 듯 했다. 여기저기에 허연 것들이 보였다. (11장)

사실 『타임머신』을 읽은 지 좀 지난 독자들은 대개 이 대목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만큼 이 부분이 현재↔엘로이와 몰록의 세계를 오가는 이 소설의 기본 플롯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작가가 이 작품을 여러 번 개정했음에도 이런 곁가지 이야기처럼 보이는 부분이 남아있다는 것은 이 부분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임을 짐작케 한다. “힘이 다해 드디어 스러져가는 세계의 최후의 이미지 속에서 몰록 족과 엘로이 족의 차이는 먼 옛날의 하찮은 일로 보인다. 웰즈가 우리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사회적 드라마 때문이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큰 전망을 지니고 있다.”(Scholes & Rabkin, 268)



11. 에필로그: 디스토피아 문학으로서의 『타임머신』

H. G. 웰즈의 『타임머신』(1895)은 보통 디스토피아 소설로 간주된다. 이 작품에는 계급분화가 가져올 파국, 유토피아의 완성이 필연적으로 가져올 정체, 정체에 따르는 적응력의 상실, 그리고 이어지는 끝없는 퇴보와 쇠락 등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임머신』에는 다른 대표적인 현대 디스토피아 소설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들』, 『멋진 신세계』, 『1984년』은 모두 주인공이 사는 세상 자체가 이미 디스토피아인 반면, 『타임머신』의 경우 80만 년 후라는 먼 미래에는 디스토피아가 있을지 몰라도 우리들의 세계는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없다. 적어도 중상류층인 시간여행자와 그 친구들이 그런 실감을 갖고 있다고 볼만한 장면은 전혀 없다. 또한 이 두 세계 사이에는 거대한 폐허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장기간에 걸쳐 문명의 극치를 달린 유토피아의 세계가 놓여 있다. 즉 이들은 아직 유토피아로 가는 길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시간여행자는 계급분화라는 현재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정적인 유토피아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유토피아로 가는 길에서 탈선할 수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이 점에서 시간여행자는 예언자이며, 위대한 예언자가 종종 그렇듯이 미래를 직접 보고 온 예언자이다. 아울러 정적인 유토피아, 즉 거짓유토피아로 가는 넓은 길을 고발하는 예언자이기도 하다.
예언자가 우리에게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는 이유는 현재의 우리에게 인간의 지혜와 적응능력을 담보해주는 진화적 경쟁을 계속해 나가는 참된 유토피아로 가는 길을 에둘러 제시해주기 위해서다. 이는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작품들이 이미 디스토피아인 세계에서 거기 속한 개인의 인간성 추구에 매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타임머신』이 은폐된 형태의 유토피아 소설임을 말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인 『멋진 신세계』나 『1984년』보다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1843)을 닮았다. 크리스마스의 유령이 스크루지 영감에게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줬던 것은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꾸라고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시간여행자는 암담하기 짝이 없는 「역사의 끝」을 보면서 광대한 시간 속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님을 실감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준비를 갖추어 다시 한 번 미래로 찾아간다. 그는 80만 년 후의 세계조차 포기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타임머신』에서 웰즈 유토피아의 기본구도


참조문헌

Bacon, Francis, The New Atlantis, 1626
(김종갑 역, 『새로운 아틀란티스』, 에코리브르, 2002)

Dalrymple, Theodore. "Out of the time machine," New Criterion 24No.10 (June 2006): pp.17-21

Firchow, Peter. "H. G. Wells's Time Machine: In Search of Time Future - and Time Past", Midwest Quarterly, 45,2 (2004): pp.123-136

Hermansson, Jörgen. "Taming the People? On the use of constitutional devices in a majoritarian democracy," The Workshop 12 on 'National Traditions of democratic thought', ECPR Joint Sessions of Workshop, Uppsala, April 12-18, 2004

Holmes, Stephen. "Gag Rules, or the Politics of Omission," In Jon Elster and Rune Slagstad (eds) Constitutionalism and Democrac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pp 19-58.

Partinton, John S. "The Time Machine and A Modern Utopia: The Static and Kinetic Utopias of the Early H.G. Wells," Utopian Studies, 13.1 (2002): pp.57-68

Scholes, Robert. and Rabkin, Eric S., Science Fiction: History-Science-Vis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77 (김정수, 박오복 역, 『SF의 이해』, 평민사, 1993)

Tuerk, Richard. "Upper-Middle-Class Madness: H. G. Wells' Time Traveller Journeys to Wonderland," Extrapolation, Winter 2005; 46, 4; pp.517-526

Wells, Herbert G. Time Machine, 1895

Wells, Herbert G. A Modern Utopia, 1905
by sonnet | 2008/07/01 00:04 | | 트랙백 | 핑백(2) | 덧글(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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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08/07/10 20:49

... 던 이야긴 이게 아니고, 좀 둘러보려고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들어갔더니, 이상하게 적립금이 많더군요 … 뭔가 환불처리된 거라도 있나 하고 보니까, 며칠 전에 올렸던 『타임머신』(1895) 읽기가 '이 주의 TTB리뷰'란 것에 선정된 상금인 모양입니다. 뭔가 그 쪽에 서평을 올려주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한 것은 아닌데, 포스팅에 책에 대한 링크를 걸 ... more

Commented by 키치너 at 2008/07/01 00:24
정말 sonnet님의 학문적 스펙트럼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H.G 웰즈의 타임머신을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코멘트를 달기는 어렵습니다만, 사실 과거보다 오늘날에 와서 유토피아적 문학보다 디스토피아적 문학이 주류를 이루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진보를 상징하는 과학 자체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 된 것과 근현대에 들어서 가장 거대한 '사회진보'의 실험인 공산주의(의 탈을 쓴) 체제의 허구성과 붕괴에 크게 기반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1 19:26
하하, 그냥 블로그용 잡설이죠 뭐.

『우리들』(1921), 『멋진 신세계』(1932), 『1984년』(1949) 등이 만들어진 시기를 볼 때, 이것을 20세기 말에 벌어진 공산주의의 "붕괴"랑 연결시키기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도 소련이 국내적으로 억압통치를 하긴 했지만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이미지도 좋던 시절이니까요.
현실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소련의 "등장" 때문에 공산통치의 실체가 생겨났다는 건 부분적으로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 작품과 『타임머신』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세계대전 이후냐 이전이냐 이런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대전 이후엔 워낙 충격받은 사람이 많아서 유럽사회가 전반적으로 우울한 분위기로 갔으니까 말입니다.
Commented by 키치너 at 2008/07/01 23:12
하^^: 확실히 공산주의권 붕괴와 20세기 전반기에 탄생한 디스토피아적 소설을 연관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그렇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소비에트 국가가 출현한 것은 반동적인 사상의 도래를 불러오지 않았을 까 싶기도 하고(물론, H.G 웰즈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 게다가 맑스가 예언한 것과는 달리 러시아에서 최초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출현한 것 역시 유토피아적 믿음에 어느정도 균열을 가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만, 특히 '꿈꾸는' 작가들에게는 현실에 나타난 '유토피아'는 더 이상 유토피아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리고 전전/전후의 성격이 다른 것이 전쟁의 충격이라는 것은 확실히 옳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유럽인 자신들에게 문명 붕괴의 공포를 가져온 1차 대전이 '타자'에 대한 폭력성에 대해 몸서리를 치게 했던 2차 대전보다 더 직접적인 영향을 가져왔을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4 01:19
네. 본문에서도 그런 비유를 쓴 적이 있지만, "최초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출현"한 것은 '100m 미인'에게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 아닐까 합니다.
Commented by >_< at 2017/02/09 18:31
10년전 덧글에 덧덧글을 다는 것도 참 이상한 짓이긴 한데. 어쨌건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유토피아를 지향하던 쥘 베른류의 소설이 물러나고 헉슬리나 오웰. 골딩등의 디스토피아 소설이 큰 관심을 받게 된 계기를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에서 찾는 건 좀 너무 나가신걸로 보이네요. 위에 소넷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의 걸작들이 탄생했던 20세기 초중반은 오히려 소련이 여러 의미에서 맹위를 떨치던 시기니까요. 그나마 45년 이후 작품인 1984를 보면 소련식 통치체제가 디스토피아의 전형으로 제시되긴 합니다만.

이 점에서는 1~2차 세계대전의 충격이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무너트림으로써 디스토피아 소설이 주류로 뛰어오르는 계기를 제공했고, 소련과 현실사회주의의 붕괴가 문학에 끼친 영향은 소위 거대서사가 유행하던 시기를 끝낸 것이다, 즉 소련과 현실사회주의의 거대한 실험이 실패한 이후 사람들은 (마치 반세기전에 이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던 것처럼) 거대한 역사적 드라마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개인의 사소한 욕망들에 집중하게 되었다... 정도가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면에서,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출현이 100m 미인에게 불리한 조건이 되었다, 즉 소련의 탄생이 오히려 유토피아적 믿음에 균열을 가했다는 접근은 좀 이해하기 힘드네요. 제가 보기에는 20세기 중반 정도를 기준으로 하면 오히려 소련 자체가 100m 미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말하자면, 현실에 존재하는 소련이 유토피아라고 믿지는 않았을지언정, '공산주의적 이상과 노동자 국가를 표방하는 국가가 실존한다' 자체가 일종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의 증거로 받아들여졌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Commented by 야채 at 2017/02/09 21:17
>_</ "최초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출현한 것은 '100m 미인'에게는 매우 불리한 조건" 이라는 말씀에서의 '100m 미인'은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를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유토피아적 믿음'이 아니고요. 과학기술의 발전이 현실로 이루어짐에 따라 과학기술이 성배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듯이, 공산주의 국가가 현실에 나타남에 따라 공산주의 또한 성배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다는 의미입니다.
Commented by Executrix at 2008/07/01 01:21
계속적인 진보에 대한 신념, 다른 유토피아를 향한 좁은 길이라... 타임머신은 초딩 후반인가 읽었는데(전 앞부분은 몽땅 까먹고, 오히려 3천만년 후의 미래 부분이 가장 선명하더군요) 그때는 왜 주인공이 허무한 미래를 보고도 다시 미래로 가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1 19:16
주인공이 미래로 가는 건 당.연.히.
귀여운 애인을 구하러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난전의 수라장 속에서 죽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타임머신이 있으면 어떻게든 구해낼 가능성은 있겠죠.
Commented by Executrix at 2008/07/01 19:28
쿨럭(각혈)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1 19:50
사실 이 작품을 읽어보면 여주인공 위나가 시간여행자를 좋아하는 수준은 헌신적인데 반해, 시간여행자는 일단 나 살아서 현대로 돌아갈 궁리를 하는 게 우선이고, 그 다음 남는 시간에 위나랑 놀아준다는 정도의 느낌이 있습니다. 중간중간에 위나를 울게 버려두고라도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위나를 잃어버린 뒤에 위나에 대한 그의 감정이 더 높은 수준으로 고양되었는지 아니면 원래대로인지 이런 건 작품만 읽어서는 알기 어렵더군요.
Commented by hkmade at 2008/07/01 08:26
흠 독후감은 이렇게 써야하는 군요.. (아니 이건 논문이자나.. ..)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1 19:46
네, 사실 모양새만 그렇지, 그냥 개인적인 독후감입니다.
Commented by 네비아찌 at 2008/07/01 09:03
정말 이건 논문이잖습니까.....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1 19:46
하하, 형식은 일응...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익숙해 지면 형식을 지켜 쓰는 게 더 편리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나중에 이 단락이 "내가 쓴" 건지, "어디서 줏어온" 건지 구별도 되고요.
Commented by Ya펭귄 at 2008/07/01 10:06
비슷한 이야기가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나오더군요....

"첫번째 매트릭스는 유토피아를 만들어줬지.... 그랬더니 망하더군... 그래서 뺑이질을 해야만 하는 지금의 매트릭스를 만든걸세..."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1 19:38
확실히 그와 통하는 데가 있겠네요.
Commented by 행인1 at 2008/07/01 10:58
그럼 시간여행자는 자원해서 포기하지 않는 크리스마스의 유령이 된 셈이군요. 이런 뜻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1 19:43
이 작품은 지금 봐도 재미있지만,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주인공의 해설이 너무 많은 느낌이 있긴 합니다. 역시 이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해주는 메신저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의 예언자 역할은 캐릭터의 내적 일관성이나 자율성 보다는 작가의 도구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다스베이더 at 2008/07/01 15:35
대단하십니다. 이건 논문[..]
옛날에 소설을 읽으면서 시간여행자의 폭력성에 어이없어하면서, 마지막에 아무것도 없는 미래로 간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적인 유토피아보다는, 불완전하지만 동적인 디스토피아가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1 19:34
몰록이 물렁한 엘로이들만 갖고 노느라 방심하다 독한 놈 만나서 된통 당했다고나 할까요.

사실 시간여행자가 싸우는 장면은 아놀드 슈워제네거나 스티븐 시걸의 영화를 생각나게 하더군요. 게다가 시간여행자는 장난이 아닌게 도끼나 칼을 갖고 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칼을 버려두고, "몰록의 두개골 정도는 간단히 부숴버릴 수 있음직한 "철도신호기의 지렛대 같은 것"을 "꺾어" 쇠몽둥이로 만들어 들고 출전을 합니다. 한마디로 "날 달린 무기는 잔인하므로" 메이스를 휘둘러 오크들의 두개골을 박살내는 자비심을 보여준다는 RPG게임의 cleric을 보는 느낌이더군요.
Commented at 2008/07/01 17:2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1 19:36
푸하. 고딩 숙제 삘이 나는 거야, 그런거야? *blush*
Commented by 라피에사쥬 at 2008/07/01 22:05
The New Atlantis는 보면 볼수록 깨더군요;;

헐리웃 영화에서도 종종 앨로이와 몰록을 언급하는 이야기가 나온걸 보면 역시 인기 있는 소재인듯;;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4 01:21
뉴 아틀란티스는 누군가의 책에 요약으로 "이렇대더라"까지는 봐줄만 하지만, 이걸 진짜 읽으면 완전 깨지요. 벤살렘 왕국의 도덕윤리성은 "곳간에서 인심난다"하나로 올 클리어이니깐요 ;;;
Commented by 양과알 at 2008/07/01 22:27
...타임머신은 읽지 않았지만 동적 유토피아는 눈마새에서 나온 변화하는 완성이 떠오르는 군요. 역시 생물은 움직여야 하는 법인가 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4 01:22
웰즈는 진화생물학의 굉장한 신봉자였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물론 사회의 발전도 적응진화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느낌이 무척 강하지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08/07/02 01:07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면서도, 결국은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은 간직한 소설이었군요.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경구를 길게 풀어 쓰면 이렇게 되는 걸까요... (퍽!)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4 01:26
하하. 좋은 요약이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三天포 at 2008/07/02 02:58
유토피아하니까
옛말에 세계는 평화로웠던적은 단한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것이다라고
누가 했던말이 기억나네요

근데 정작 누가 말한지는 까먹었어요 Orz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4 01:30
유토피아가 원래 어원상으로도 "없는" + "곳" 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Commented by marlowe at 2008/07/02 16:35
MBC에서 방영했던 영화 [타임머신]이 떠오르네요.
로드 테일러와 이베트 미미유가 주인공이였죠.
영화야 그저 그렇지만, 미미유의 매력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4 01:30
저는 그 영화는 안 봤는데, 어떻습니까?
Commented by 천마 at 2008/07/03 10:48
타임머신은 어릴때 영화로 접하고 나서 나중에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영화와 내용이 많이 다르다 싶으면서도 이것도 꽤 재밌다는 생각에 끝까지 읽었었죠.

그때가 워낙 반공주의 교육이 철저하던 시절이다보니 계급이 어쩌고 평등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꽤 많이 들었던 탓인지 소설에서 말하는 계급분화가 결국 진화의 길을 아예 갈라놓았다는 말이 소설 설정으론 그럴듯 하다고 생각되더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4 01:40
저는 이번에 다시 보기 전에는, 이 소설을 10살도 되기 전에 봤기 때문에 문자그대로 scientific romance에 가깝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미래세계에 간 남자가 여자친구를 얻어 모험을 벌인 이야기 이런 식으로요.
몇십 년 만에 다시 보니 인상이 상당히 달라져서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Commented by 땅콩샌드 at 2008/07/04 17:55
타임머신은 아무리 봐도 사회주의자를 위한 풍자희극이죠. 누구를, 무엇을 위해 풍자하고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말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4 18:11
네에.
Commented by 땅콩샌드 at 2008/07/04 17:58
마지막에 태양이 폭발하는 장면은 아마 sf 팬이라면 잊을 수 없는 장면일 겁니다. 제 경우에는 다른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세계가 종말로 치달아가는 부분만은 뚜렷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08 07:58
태양이 더이상 지지 않고 크고 붉게 변하지만 폭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참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지요.
Commented by StarLArk at 2008/07/10 22:08
전공이?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6 17:54
독후감 쓰는데 전공까지나...
영문학이나 기타 이쪽 관련 전공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Commented by 꽃분이 at 2008/07/15 15:05
타임머신은 이런 어려운 이야기 아니에요. 위나와 타임트레블러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연애소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6 18:08
하하, 위나는 시쳇말로 하자면 모에한 캐릭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연애소설로 보면, 위나가 시간여행자를 좋아하고 그것을 마음껏 표현한 건 맞는데, 시간여행자는 가끔 위나를 내버려두고 자기 할일을 우선하는 걸로 봐서 위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좀 불확실한 구석도 있더군요. 저는 그가 결국 위나를 구하러 돌아간 걸로 봐서 표현방법만 다를 뿐 서로 좋아햇다는 쪽에 한 표 걸고 싶습니다.

하여간 이 글이 매우 길고 formal한 형태를 취하게 된 제일 큰 이유는 맨 처음에 페이퍼리서치를 한번 했기 때문입니다. 실탄을 마련했으니 쏘지 않으면 아깝잖습니까.
Commented by 꽃분이 at 2008/07/18 06:47
사랑했던 것은 맞는 것 같은데 타임트레블러 쪽은 상당히 이기적인 사랑이었던듯. 소중한 것은 잘 지키지 않으면 깨져버리니까 조심해야 한다구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7/18 20:34
확실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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