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라치)에서 트랙백.
는 주장을 내 놓고 있는데, 황당한 이야기인지라 간단히 반박해 두고자 한다.
히틀러에게 폴란드를 침공하면 전쟁임을 선언하고 2차세계대전에 뛰어든 것은 1940년의 처칠이 아니라 1939년의 체임벌린이다. 유화정책으로 이미지를 구긴 체임벌린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은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라는 식의 생각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그럼 왜 영국이 폴란드 때문에 독일과의 세계대전에 뛰어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유화론자라는 체임벌린이 말이다. 영국에게 유럽대륙을 제패한 초강대국이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이 용납가능했다면 나폴레옹 전쟁도 계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대에 영국이 처해 있던 전략적 딜레마에 대해서는 독일의 역사학자 안드레아스 힐그루버가 잘 설명하고 있어서 소개해 보기로 한다.
영국 수상 네빌 쳄버린(Neville Chamberlain)의 ‘유화정책(宥和政策, Appeasement Politik)’으로 인해 독일은 이러한 위험부담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였다. 당시 영국정부의
유화정책은 기세등등한 독재자 히틀러의 위세에 눌린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수립된 것이 아니라, 현실 국제정치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수립되고 추진된 것이었다. 영국은 쇠퇴일로에 접어든 대영제국(영국 본토와 식민지)의 지배권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으니, 지구상의 3개 긴장지역(동아시아, 지중해, 유럽)에서 받는 위협을 극복할 수 있는 적절한 정치·군사적 대책을 독자적으로 강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영국이 당면한 가장 거북스런 문제는 인도와 아랍세계에서 비등하는 독립요구였다. 이러한 곤혹스런 상황에서
새로운 대규모 전쟁이 발발한다면, 1914/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진행된 대영제국의 붕괴는 가속될 것이 명확관화하였다. 대영제국의 국제적 지위는 ‘3대 자본주의 후발국가들’의 ‘수정정책’과 ‘팽창정책’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식민지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격렬하게 확산되고 있던 소련의 세계적화혁명운동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과 잠재력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보다 더욱 심각하게 직접·간접적으로 대영제국의 해체를 촉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1938년 초부터 급성장하는 히틀러-독일의 존재를 감안하여 볼 때, 쳄버린이 이끄는 영국정부는
미국 아니면 독일에게 의지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의존적인 정책을 피하고 독자적인 정책을 구상하고자 하였다. 만일 영국정부가 미국 또는 독일에 의존하는 정책을 추진한다면, 영국은 ‘하위동반자’의 지위를 강요당할 것이 분명하였다. 영국정부의 독자적인 정책은 ‘독일이 무력을 행사하여 동방생활공간을 강점하지 않을 것이고 유럽의 4대 강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협력관계에 바탕을 두고 소련이 배제된 유럽의 질서에 순응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수립되었으며, 그 근본 목적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탄생된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는 독일의 전략의도(오스트리아, 수데덴, 단찌히)에 대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이 동방생활공간을 강점하게 되면 이는 곧 유럽의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을 주도해 온 영국의 지위가 무너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외교정치면에서의 기습행동을 즐겨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가정 하에 구상된 영국전략은 성공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유화정책이 완전히 실패할 경우에는 전쟁을 피할 수 없었으므로, 챔버린은 1936년부터 군비증강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영국은
‘이중전략(Doppelstrategie)’을 구사하였다. 하나의 전략은 유럽 4대 강국의 협력관계를 기조로 하는 협상을 준비하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의 전략은 영국민족과 나아가 세계의 정당한 이익을 군사력을 수단으로 하여 수호하는 것이었다.
1940년 11월 5일 선거에서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세 번째 당선되면서 1940년 6월/7월 이래 동맹국과 다름없는 관계를 유지해 오던 영국과 미국의 양국관계는 한층 더 밀착되었다.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독일과의 전쟁으로 인해 영국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힘으로써,
사실상 영국의 ‘하위동반자(Junior-Partnerschft)’ 역할과 위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격이 되었다. 지난 1938년/39년, 전영국수상 쳄버린은 미국의 이러한 제의를 거부한 바 있었다. 이에 따라 루스벨트는 1940년 12월 29일 미국 여론의 지지를 받는 정칙(定則), 즉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창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표명과 함께 영국에게 대량의 물적 지원을 약속하였다. 미국의회와 여론은 약 일주일 간의 논의 끝에 ‘임대차 법안’을 제정하여 1941년 3월 11일 의회에서 통과시킴으로써, 영국에 대한 물적 자원의 대량지원은 본격화되었다.
영국의 쇠퇴현상은 이미 1939년 전쟁을 결심한 시점부터 확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1815년부터 1960년까지의 기간, 그리고 이어서 내부개혁과정을 거쳐 ‘고전적’ 제국주의 시대로 분류되는 19세기 종반까지의 기간 동안 범세계적 권력지위(machtstellung)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영국의 막강한 지위도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면 국제관계에서 영국의 역할이 퇴조된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요인이 중대하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이 항상 같은 결과를 가져왔듯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하는 경우나 소련의 지원을 받아(아니면 소련이 독자적인 결심 하에 전쟁에 개입하여) 영국이 승리하는 경우 중
어떤 상황이 도래되었다고 할지라도, 영국이 동중부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스스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지난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영국이 영향력을 되찾을 수 있었던 까닭과 그 후 약 20여 년 간 유럽대륙에서 ‘세력균형’의 ‘후기 르네상스’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소련이 전쟁과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해 쇠약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영국은 ‘세력균형’ 원칙을 세계정치를 적극적으로 펼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영국 세계정치의 ‘세력균형’ 원칙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이미 그 적용이 곤란한 시대적 환경에 처하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대륙의 세력균형이 영국의 간접주도하에 성립되지 못한 것은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30년대에 영국은 ‘유화정책(Appeasement-Politik)’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이
유화정책은 영국이 당시 국제정치상황 속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전략으로 평가된다. 당시 영국은 대외적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쓸모없게 된 수단과 방법으로 대영제국을 보존하는 데 급급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도전적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데 절치부심하지 않음 수 없었던 것이다. 1815년부터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은 영국의 ‘힘에 의한 정치(Machtpolitik)’는 도덕적 요구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영국이 1930년대에 추진한 ‘유화정책’은 유럽과 세계의 평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다음은 두 번째 변화요인이다. 1914년/18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이미 영국은 유럽대륙에서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백인 자치령과 식민지 피지배민족들에 대한(제한된 범위이긴 하지만 저항에 직면하였음) 영국의 세계지배체제를 이완 또는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 피지배 민족의 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이미 예고되었던 바대로,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세계지배적 지위를 거듭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42년 위기국면에서 적어도 인도 국민의 봉기는 물론 인도가 ‘삼국동맹’ 진영으로 돌아서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영국 정부는 전후 인도의 독립을 인도국민에게 약속해야만 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영국은 전쟁수행을 위하여 영국연방(Common wealth)과 식민지의 잠재력을 포기해야 했으며, 그 결과로 영국연방의 해체로 치닫게 되는 원심(遠心)적인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즉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국가운영을 독자적으로 해나가기 시작하였고, 이 국가들은 일본의 정복 위협이 가중되던 1942년과 같이 외부위협이 있을 경우에는 영국이 아닌 미국에 의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국의 세계지배체제의 해체가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처칠을 정점으로 한 영국의 보수세력은 안간힘을 다하기도 하였다.
영국의 변화에 세 번째 영향을 준 결정적인 전기가 있었다. 1940년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성공이 절정에 달하였을 때, 영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되었던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영국은 세계 초강대국을 지향하는 독일의 ‘하위동반자(Juniorpartner)’가 되느냐, 아니면 미국의 주도권에 영국을 의탁하느냐를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후자의 경우도 전자와는 다른 형태이지만, 역시 ‘하위동반자’ 관계임은 분명하였다. 결국 영국은 역사·전통적 배경과 원칙적인 이유로 인해 전자의 해법을 선택할 수 없었다. 챔버린 정부는 히틀러 독일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오랜 심사숙고 끝에 독일을 상대로 한 전쟁수행을 결정하였다(폴란드를 구하기 위한 전쟁 결정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1940년 여름 미국에 의지하는 전략을 선택하였으며, 이러한 전략기조는 챔버린에서 처칠까지 계속 이어졌다. 영국 수상 챔버린은 1939년 여름까지 수행한
‘유화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미국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고 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영국은 1938년 11월 체결된 미국과 영국의 통상협약에도 불구하고 ‘유화정책’이 독자적으로 추진되는 기간만큼은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영국은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광대한 대서양지역 안전보장 역할을 단독으로 수행할 정도로 세계차원의 전략수행 면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영국은 가중되는 전쟁수행 부담을 이기지 못하게 되어 결국 영국의 전략은 미국의 세계정치 전략과 그 목표에 종속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미국과의 종속관계를 원치 않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1945년 7월 선거에서 옛 대영제국 전통의 수호자로서 선봉적 역할을 담당했던 처칠이 패한 것은 예상을 뒤엎는 결과였다.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퇴진해야만 했고, 정권을 인수한 영국 노동당(Labour Party)이 대내적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하고, 대외적으로는 중용을 지키는 외교정치(여전히 제국주의적 개념은 남아있었음)를 펼쳐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결과는
영국 국민의 대다수가 영국이 제2선의 강대국 대열로 전락한 것을 현실로 인정함과 동시에, 영국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내부개혁을 통해 새로운 시대상황에의 적응을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Hillgruber, Andreas,
Der Zweite Weltkrieg, 1939-1945: Kriegsziele und Strategie der großen Mächte, COBU, 1982
(류제승 역, 『
국제정치와 전쟁전략』, 한울 아카데미, 1996, pp.20-22, 72-73, 194-196)
당시 영국이 처한 전략적 입장에 대한 힐그루버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즉 이 당시 영국이 취한 정책은 결국 국익추구를 위해 실현가능한 보기 중에서 최선의 길을 택해 나간 과정이지, 한 지도자의 우파 이념적 열정의 결과물은 아니란 것이다. 그런 이념이 주도했으면 스탈린과 손 잡을 건 또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