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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 변화는 왜 우월한 진보전략인가
앞선 글에서는 정치적 태도에 대한 스펙트럼을 급진-진보-온건-보수-반동의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전형적인 기법을 요약한 다음, 말미에 한 가지 논쟁적인 언급을 하였다.

그렇다면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선택은 순전히 취향의 문제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재 인류가 처한 상황에서 보수주의가 더 우월한 선택임을 보여주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번 글에서는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그 몇 가지 근거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들어가기 전에

그 전에 우선 이번 글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앞선 글의 요점을 3가지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1.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데올로기적 기원의 뿌리가 (근대화가 한창이던) 18세기 영국 자유주의에 있기 때문에 진보에 대해 호의적이며, 진보주의자들 뿐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조차도 그렇다.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쟁점은 진보를 하느냐 마느냐라기 보다는 변화를 어떤 깊이와 어떤 속도로 일으키느냐에 있다.

2. 진보주의는 계몽 운동의 지적 부산물 중의 하나이고, 과학적 방법의 지적 부산물 중의 하나이며, 궁극적으로는 산업혁명의 지적 부산물들 중의 하나이다. 이들은 만일 기술적 문제들이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도 똑같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결론짓는다.

3. 보수주의자는 사회가 강력한 정책 발의(initiative)를 통해 개선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스러워하고 부적절한 참견이 실로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에, 그 결과 매우 느리고 피상적인 변경만을 지지한다.


1.1. 전형적인 진보관

그러한 의미에서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은 전형적인 진보관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서양이 새로움 자체를 하나로 싸잡아 비난한 적은 없지만, 새로움을 의식적으로 추구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역사학자들은 서양이 새로움을 추구한 기원을 르네상스 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발전에서 찾고 있다. … 새로움의 추구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 바로 서구 세계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상, 즉 진보의 사상이다. 그 주장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순환적이거나 쇠퇴하는 과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앞으로, 위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전진한다고 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이상향으로 여기는 황금기는 과거의 잃어버린 낙원이 아니라 미래에 도달하게 되는 어떤 세상인 것이다. 고대에서 지혜를 구하려는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의 사람들이 진정한 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 인과 로마 인들은 서구문화의 유아기에 살았던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진보라는 사상은 과학지식의 누적적 특성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17세기 과학의 업적에서 힘을 얻었다. 이 이론의 주창자들은 현대 과학이 과학적 사실과 이론을 축적하고, 자연의 비밀을 벗기고, 자원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함에 따라 인류는 진보의 사다리를 타고 끝없이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인류의 모든 행동이 끊임없이 발전하는 과학의 추진력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술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가장 명확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기술은 진보를 주장한 이들에게는 아주 좋은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그리스 인들과 로마 인들이 화약과 나침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현대인들이 만들어낸 이러한 최신의 발명품은 현시대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징표였으며, 훨씬 더 강력하고 놀라운 기술의 도래를 시사하는 징후로 받아들여졌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온 사색적인 철학의 빈약함을 수세기에 걸쳐 발전을 거듭한 기계기술과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학자들이 하찮은 철학적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반면, 실질적인 사람들은 기계를 움직이고, 전쟁을 하며, 책을 만들고, 배로 항해하고, 건물을 짓는 등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냈다. 이러한 기술적 변화야말로 틀림없는 진보의 증거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발명은 새로운 것을 위한 새로움이 아니라 인류의 개선에 이바지하는 또 하나의 공적이었다. 발명은 인류가 더 나은 사회, 완벽한 사회로 나아가는 도상에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였다. 미래에 대한 이처럼 낙관적이고 경이로운 시각은 19세기 철학자들의 비판적인 주장, 공장과 산업도시가 보여주는 유토피아와는 동떨어진 현실, 그리고 좀더 최근에 일어난 전세계적 규모의 전쟁에서 한껏 고조된 기계화된 전쟁의 공포 등에 의해서 심각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핵 에너지나 태양 에너지, 우주 식민지, 컴퓨터, 로봇, 생물공학 등이 비할 데 없이 행복한 시대를 가져오리라고 확신하는 이들의 희망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Basalla, George., The Evolution of Techn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김동광 역, 『기술의 진화』, 까치, 1996, pp.199-202)


1.2. 혁명적 변화 또는 도약설

또한 이러한 진보관은 진보를 추동하는 주요한 동력인 과학과 기술의 변화에 있어서 과거와 큰 차이를 보이는 불연속적인 변화가 존재함을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을 잠정적으로 혁명적 변화론 내지는 도약설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최근까지 역사, 과학 그리고 철학과 같은 학문 연구는 과학적인 변화의 불연속적인 성격에 호의를 나타내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러한 관점은 16세기와 17세기에 등장한 근대 과학에 대한 연구에서 단적으로 유래했다. 프랑스 혁명 이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 그리고 뉴턴의 업적은 혁명(revolution)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왔다. 혁명이란 용어는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 그리고 전혀 새로운 질서의 수립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다.
정치적 비유는 자연을 연구하는 새로운 방법의 출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과학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근본적인 변화에도 적용되었다. 따라서 그 용어는 과거의 천문학적, 화학적, 생물학적 혁명에도 적용되었고, 하비, 베이컨, 다윈, 멘델,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시작된 혁명, 그리고 20세기의 양자물리학, 천체물리학, 분자생물학의 혁명에까지 두루 적용된다.
기술이 과학에 대해서 종속적인 지위에 처해 있던 시기에는 과학혁명이 기술변화의 연구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가졌었다. … 그 이유는 만약 기술이 응용과학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과학이 혁명적인 방식으로 변화한다면, 기술의 변화 역시 불연속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Basalla, 같은 책, pp.47-48



2. 진화생물학으로부터의 함의

리처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에서 크고 작은 돌연변이가 생물의 진화에 각각 어떻게 다른 영향을 끼치게 될지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개의 비유를 소개하였다. 이 두 비유는 우리가 이번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인간 사회의 진보에 커다란 함의를 갖는다.

2.1. 현미경 초점의 비유

이러한 도약론자의 진화 이론을 모두 폐기시킬 수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 두 가지 이유 중 첫 번째는 앞 장에서 다른 주제로 등장했던 위대한 통계학자이자 생물학자인 R. A. 피셔가 지적한 것이다. 피셔는 도약설이 오늘날보다도 훨씬 유행하고 있던 시대에 모든 형태의 도약설에 대해 강한 신념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사용했다. 초점은 거의 맞지만 완전하지는 않은 현미경이 있다고 가정하자. 더군다나 현미경은 초점 조절 이외의 방법으로는 정확한 상(像)을 얻을 수 없다. 만약 이 현미경의 상태를 터무니없게 변화시켰을 때(이것은 돌연변이에 해당한다.) 초점이 맞아 올바른 상의 질이 전반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피셔는 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어떤 식으로든 큰 폭의 조정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상(像)의 질이 향상될 가능성이 극히 작지만, 현미경 제작자나 사용자가 의도한 최소의 조정 폭보다 미세한 조정이 이루어질 경우 개선될 확률은 거의 정확하게 2분의 1임은 거의 확실하다.

피셔가 “쉽게 알 수 있다.”라고 생각한 것이 일반 과학자로서는 획득하기 어려운 지력을 요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피셔가 “거의 확실하다.”라고 말한 데에도 마찬가지 사실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가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도 만족스럽게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조정을 가하기 전의 현미경이 초점이 거의 맞추어져 있는 상태라는 가정에 대해 잘 생각해 보자. 렌즈가 완전히 초점이 맞는 위치보다 조금 낮은 위치, 가령 10분의 1센티미터 정도 슬라이드 글라스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하자. 그런데 아주 미세하게, 가령 100분의 1센티미터 정도 임의적으로 렌즈를 움직인다면 초점이 앞의 경우보다 나아졌을 것이다. 렌즈를 움직이는 방향은 임의적이므로 이러한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한쪽이 일어날 확률은 2분의 1이다. 조정을 위한 렌즈의 움직임이 최초의 오차에 비해 작으면 작을수록 초점이 향상될 확률은 2분의 1에 가까워질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피셔의 명제의 후반부는 완전히 입증된다.

그러나 현미경의 경통을 대돌연변이에 비견될 만큼 큰 폭으로, 더욱이 임의의 방향으로 움직여 보자. 가령 1센티미터를 움직였다고 하자. 그러면 상하 어느 쪽 방향으로 움직이든 관계없이 초점은 이전보다 훨씬 더 어긋나게 될 것이다. 가령 경통을 아래쪽으로 움직였다면, 이상적인 위치에서 1.1센티미터 떨어지게 될 것이다.(이렇게 되면 실제로는 렌즈가 슬라이드 글라스에 부딪쳐 부서지고 말 것이다.) 위쪽으로 움직인 경우에는 이상적인 위치에서 0.9센티미터 떨어져 있을 것이다. 경통을 움직이기 전에는 기껏해야 정확한 초점에서 0.1센티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어느 쪽으로든 ‘대돌연변이’적 큰 움직임이 일어나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극히 큰 움직임(대돌연변이)과 극히 작은 움직임(미소돌연변이)을 계산해보았다. 물론 중간적인 크기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같은 계산을 적용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제 움직임이 작으면 작을수록 향상이 이루어질 확률이 2분의 1이 되는 한편의 극단에 가까워지고, 움직임이 크면 클수록 향상이 이루어질 확률이 0이 되는 또 한편의 극단적인 경우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을 것이다.

독자들은 지금까지의 논의가 현미경에 임의의 조정을 가하기 이전에 이미 초점이 거의 정확하게 맞추어져 있었다는 최초의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만약 현미경의 초점이 2센티미터 벗어나 있었다면 비록 1센티미터를 임의로 변화시켜도, 100분의 1센티미터를 임의로 변화시켰을 때와 마찬가지로 향상될 확률은 50퍼센트이다. 이 경우에 ‘대돌연변이’는 훨씬 빨리 현미경의 초점을 맞출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물론 피셔의 논의는 임의의 방향으로 6센티미터 움직인 ‘거대돌연변이’에 적용될 것이다.

그러면 피셔는 왜 현미경의 초점이 처음부터 거의 맞추어져 있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했을까? 이 가정은 현미경이 비유에서 맡은 역할에서 비롯된다. 임의의 조정을 거친 후의 현미경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동물을 나타낸다. 또한 임의의 조정을 거치기 전의 현미경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동물의 돌연변이를 일으키지 않은 정상적인 부모를 나타낸다. 부모의 경우에는 분명 번식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았을 테고 따라서 분명 훌륭한 조정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임의적인 상하 움직임을 거친 앞의 현미경의 초점이 전혀 맞지 않는 경우란 상상할 수 없고 비유로 표현되고 있는 동물이 완전히 생존할 수 없는 경우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비유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혀 맞지 않은’ 크기가 1센티미터든 10분의 1센티미터든 또는 100분의 1센티미터든, 우리의 논의에서는 하등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점차 그 정도가 커지는 돌연변이를 생각하고 있다면 돌연변이가 커짐에 따라 점점 이익이 적어지는 점에 도달하며, 반대로 계속 그 크기가 감소하는 돌연변이를 생각하고 있다면 점차 돌연변이가 유리해질 수 있는 확률이 50퍼센트가 되는 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를 들면 촉각지와 같은 대돌연변이가 유리할 것인지(최소한 유해한 결과는 피할 수 있는지), 즉 그것들이 진화적 변화의 토대가 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돌연변이가 ‘어느 정도’ ‘큰’가에 대한 논의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돌연변이가 ‘크면’ 클수록 유해하고 그에 따라 어느 종의 진화에 결합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실제로 유전학 연구실에서 연구되는 거의 모든 돌연변이는(그 돌연변이가 크지 않으면 유전학자가 알아차릴 수 없으므로) 상당히 크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돌연변이를 일으킨 동물의 입장에서는 유해하다.(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사실을 다윈주의에 대한 ‘반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따라서 피셔의 현미경 이야기는 최소한 극단적인 형태의 ‘도약’ 진화설에 대해 회의를 품게 만드는 한 가지 근거를 제공해 준다.

Dawkins, Richard, The Blind Watchmaker: Why the Evidence of Evolution Reveals a Universe Without Design, W. W. Norton, 1986
(이용철 역, 『눈먼 시계공』, 사이언스 북스, 2004, p.376-380)

피셔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현미경처럼 우리의 주제인 현재의 인간 사회는 "초점이 거의 맞춰져" 있다. 우리 사회에 그 어떠한 변화가 없다고 하더라도, 바로 인간사회가 붕괴하고 인류가 멸종되어 버릴 정도로 치명적 문제를 노출시키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구 상에서 수만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인간 사회는 주어진 환경에 상당히 잘 적응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충족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도킨스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고쳐쓸 수 있다.

어떤 변화가 유리한지(최소한 유해한 결과는 피할 수 있는지), 즉 그것들이 사회 진보의 토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변화가 ‘어느 정도’ ‘큰’가에 대한 논의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변화가 ‘크면’ 클수록 유해하고 그에 따라 인간 사회의 진보에 결합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또한 많은 관찰자들이 인과관계를 명백히 깨달을 수 있을 정도의 사회변화는(그 변화가 크지 않으면 사회과학자들이 알아차리기 힘드므로) 상당히 크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변화를 겪는 사회의 입장에서는 대부분 유해하다. 예를 들어 환율이나 유가(물가), 이자율, 인구, 실업률의 급등락 등은 대부분 사회에 부정적인 충격을 주게 된다. 심지어는 경기가 좋아지는 것 조차도 너무 빠르면 유해하다고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생각해볼만한 차이가 하나 있다. 도킨스가 설명한 현상은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돌연’변이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가 주장하는 것은 ‘만일 기술적 문제들이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도 똑같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성의 개입에 의한 해결은 무작위적 변화가 아니라 작위적 변화인 만큼 이러한 모델을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진보주의자는 전능한 어떤 지적 존재가 생물의 탄생에 개입했다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 인간도 이성을 갖고 우리 사회 정치적 문제들에 개입해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일종의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럼 진화론의 논의를 끌어왔던 것은 여기서 그 가치를 다하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지적설계론은 전능한 존재를 가정하는 반면, 인간은 이성을 갖고 있지만 전능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숭이가 다트를 던져 선정한 주식에 투자한 결과가 전업 펀드매니저들의 성과를 눌렀다는 결과가 있을 정도이고 보면, 인간의 의도적인 개입이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의 누적보다 낫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진보주의적 지적설계론의 성패는 어디까지나 진보적 변화의 입안자가 현미경의 초점을 맞추기 위한 방향과 이동거리, 즉 필요한 변화의 방향과 크기를 상당한 정확도로 맞출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변화의 입안자가 이성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무작위적 선택을 가정한 우리의 모델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 이제 도킨스의 두 번째 비유를 살펴보기로 하자.


2.2. DC8개량형 여객기의 비유

진정한 도약을 믿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일반적인 이유도 통계적인 것이다. 또한 그 설득력 역시 우리가 가정하고 있는 대돌연변이가 양적으로 얼마나 큰가에 달려 있다. 이 경우 그것은 진화적 변화가 가져올 복잡성과 연관된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진화적 변화와, 설사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는 설계의 복잡성에서 나타나는 진보이다. 앞 장에서 논의했던 눈에 관한 극단적인 예는 그 점을 분명히 한다. 우리처럼 눈을 가지는 동물은 전혀 눈을 갖지 않았던 선조에서부터 진화했다. 극단적인 도약론자라면 이러한 진화가 한 단계의 돌연변이를 통해 나타났다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모는 전혀 눈을 갖지 않았거나, 또는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피부만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초점을 바꿔 주는 수정체, ‘조리개를 죄어 주는’ 역할을 하는 홍체, 수백만이나 되는 시세포(세 가지 색에 반응한다.)로 이루어진 망막,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정확하게 뇌에 연결해 주고 양쪽 눈을 이용한 시각으로 입체적인 총천연색 시각을 제공하는 신경, 이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구비한 충분히 발달한 눈을 가지는 기형아가 갑작스럽게 그 부모로부터 내어난 셈이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바이오모프의 모델에서는 이러한 다차원 개선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를 가정했다. 그러면 왜 그 가정이 합리적인 가정이었는지 다시 한번 간략히 살펴보자.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눈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 한 차례의 개선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개선이 필요하다. 그러한 개선 중 하나가 그 자체로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적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되는 개선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러한 개선이 동시에 일어날 가능성은 줄어든다. 바이오모프의 예에서 살펴보자면, 그것들이 동시에 일어날 우연의 일치는 바이오모프의 나라를 멀리 뛰어넘어 미리 지정된 특정한 한 점에 우연히 착륙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충분히 많은 개선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고려한다면 그런 개선들이 함께 일어나는 경우는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큼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미 충분할 만큼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두 종류의 가상적인 대돌연변이의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이해해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복잡성 논의에 비추어 보면 두 가지 경우 모두 배제될 것같이 생각되지만 실은 그중에서 한쪽만이 배제된다. 나는 두 가지 경우에 보잉 747형의 대돌연변이와 DC8 개량형 대돌연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앞으로 차츰 밝혀질 것이다.

보잉 747형 대돌연변이라는 이름이 붙은 쪽은 방금 다루었던 복잡성의 논의에 따라 실제로 배제되고 있다. 이 이름은 천문학자인 프레드 호일 경의 자연선택에 대한 기념비적인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자연선택의 불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연선택을 고물 야적장에 불어 닥친 허리케인이 우연히 보잉 747기를 조립하는데 비유했다. 이미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비유를 자연선택에 적용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이지만 어떤 종류의 대돌연변이가 진화적인 변화의 토대가 된다는 사고방식에 대한 비유로는 아주 훌륭한 것이다. 호일이 범한 가장 근본적인 잘못은 자연선택이 대돌연변이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생각했다는 점이었다. 오직 하나의 돌연변이를 통해 원래는 피부밖에 없던 곳에 앞에서 열거했던 것과 같은 성질을 가진 충분한 기능을 가진 눈이 발생한다는 생각은 허리케인이 보잉 747기를 조립할 수 없듯이 거의 불가능한 가정이다. 내가 이런 종류의 대돌연변이를 보잉 747형의 대돌연변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DC8 개량형의 대돌연변이라 부르는 것은 그 효과의 정도가 아무리 커도 실제 복잡성의 측면에서는 그다지 크지 않은 유형의 돌연변이이다. DC8 개량형은 그보다 구식인 DC8 여객기를 개량한 여객기이다. 개량형은 DC8과 비슷하지만 기체가 길게 늘어나 있다. 최소한 어느 한 관점에서 보면 이 역시 개선이다. 개량형이 원래의 DC8보다 많은 승객을 수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늘어난 기체는 길이의 대폭적인 증대이고, 그런 의미에서 대돌연변이와 유사하다. 더욱 흥미 있는 사실은 길이의 증대는 일견 복잡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여객기의 기체를 길게 늘이려면 객실의 동체부에 여분의 길이를 더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와 함께 무수한 덕트와 케이블, 통기관이나 전선도 함께 늘이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많은 숫자의 좌석, 재떨이, 독서등, 12채널의 음악 선곡 장치,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는 노즐 등 여러 가지 시설을 추가해야 한다.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DC8 개량형이 보통의 DC8에 비해 훨씬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럴까? 늘어난 비행기에 있어서 ‘새로움’이란 의미가 단지 ‘같은 물건이 더 많이’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 답은 ‘아니다’이다. 3장의 바이오모프는 DC8개량형의 여러 가지 대돌연변이를 무수히 보여 준다.

이것이 현실에서 나타나는 동물의 돌연변이와 어떤 관계를 가질까? 실제로 발생하는 돌연변이 중 일부는 확실히 DC8에서 DC8 개량형에로의 변화와 유사한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고, 더군다나 그중 일부는 어떤 의미에서 ‘큰’ 돌연변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진화 과정에 결합되었다는 것이 그 답이다. 예를 들어 모든 뱀은 그 조상보다 훨씬 많은 척추뼈를 가지고 있다. 비록 우리가 아무런 화석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뱀이 현재까지 살아남은 근연 동물들보다 훨씬 많은 척추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뱀은 종류에 따라 척추뼈의 숫자가 달라서, 척추뼈 숫자가 공통의 선조로부터의 진화하는 과정에서 변화했고, 나아가 상당히 빈번하게 변화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런데 어떤 동물의 척추뼈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는 여분의 뼈를 하나 집어넣는 것 이상의 변화가 요구된다. 하나하나의 척추뼈에는 거기에 부수되는 일련의 신경, 혈관, 근육 등이 필요하다. 이것은 여객기 좌석에 쿠션, 등받이, 헤드폰 소켓, 독서등, 부속 케이블 등이 뒤따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뱀의 몸 중앙부는 여객기의 기체 중앙부와 마찬가지로 몇 개의 ‘마디’로 이루어져 있고, 비록 각각의 구조는 모두 복잡할지 모르지만 그 대부분은 서로 아주 비슷하다. 따라서 새로운 마디를 덧붙이기 위해 필요한 작업은 한마디로 단순한 복제 과정이다. 어쩌면 뱀의 마디를 추가하기 위한 유전적인 기구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그것은 지극히 복잡한 유전적 기구이고, 한걸음씩 단계를 밟아 점진적 진화를 통해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새롭게 동일한 마디를 첨가하는 일이 한 단계의 돌연변이를 통해 쉽게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전자를 ‘발생 중인 배아에 대한 명령’으로 생각한다면, 추가 마디를 삽입하기 위한 유전자에는 단지 ‘여기에 같은 것을 하나 더 만들 것’이라는 내용만 쓰여 있을 것이다. 나는 최초로 DC8 개량형을 만들 때의 명령도 분명 그와 비슷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뱀의 진화의 경우 척추는 유리수가 아닌 정수로 변화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26.3개의 척추를 가진 뱀은 상상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뱀의 등뼈 숫자는 26개나 27개이고 뱀의 새끼가 부모보다 최소한 1개가 많은 등뼈를 가진 경우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새끼 뱀이 신경과 혈관, 근육 등을 모두 한 조씩 더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 뱀은 어떤 의미에서는 ‘대’ 돌연변이 개체이지만, ‘DC8 개량형’이라는 약한 의미에서의 대돌연변이에 불과하다. 부모보다 6개 정도 척추가 많은 뱀의 개체가 한 단계의 돌연변이로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도약 진화에 대한 반론으로서 ‘복잡성 논의’가 DC8 개량형의 대돌연변이에 적용될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관계되는 변화의 성질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전혀 대돌연변이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순진하게도 최종 산물인 성체만을 관찰하는 경우에만 대돌연변이로 보일 뿐이다. 배 발생의 ‘과정’을 살펴보면 배에 대한 명령에서 나타나는 아주 작은 변화가 성체가 되었을 때 외견상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미소돌연변이에 불과하다. 초파리의 촉각지를 비롯해서 그 밖의 여러 가지 이른바 ‘호메오틱(homeotic) 돌연변이’의 경우에도 같은 사실이 적용된다.

Dawkins, 같은 책, pp.380-384)

여기서 도킨스는 동시에 너무 많은 개선이 일어나야만 하는 변화는 허리케인이 보잉 747 여객기를 조립하는 것처럼 비현실적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뱀의 척추나 초파리의 촉각지 등의 사례를 들어 원인에 있어서는 연속성이 있는 작은 돌연변이가 결과적으로 큰 돌연변이처럼 보일 수 있음을 설득력있게 주장한다. 현실에 보이는 대돌연변이란 대개 이러한 DC8 여객기 개량형 유형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인 인간사회의 진보에서도 ‘DC8 개량형’ 돌연변이, 즉 약한 의미의 대돌연변이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다음 사례를 보자.


3. 근대의 기술 발전

3.1.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증기기관 역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발명품으로 인식되었다. 1842년 영국 산업계의 평론가인 W.쿠크-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증기기관은 과거에 그와 유사한 어떤 장치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유피테르의 머릿속에서 미네르바가 태어나듯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증기기관도 제임스 와트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것일까?
일반적인 설명에 따르면, 젊은 제임스 와트는 차주전자에서 솟는 증기를 보고 영감을 얻어 증기기관을 발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환상적인 전설은 와트가 끓는 주전자에서 솟아나는 증기를 관찰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바로 그 시기에 영국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뉴커먼 기관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의해서 신빙성을 잃는다. 토마스 뉴커먼의 작동하는 대기압 증기기관이 출현한 1712년과 완벽한 실제 증기기관이 와트에 의해서 제작된 1775년 사이에는 약 60년이라는 틈이 있다. 더구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와트의 증기기관이 수리를 의뢰받았던 소형 뉴커먼 기관 모델에 대해서 그가 느꼈던 불만족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
1763년 겨울, 와트가 뉴커먼 기관 모델의 수리와 연구를 시작했을 때, 그보다 큰 뉴커먼 대기압기관은 이미 세계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에서 동력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광범위한 사용에도 불구하고 뉴커먼 기관의 일부 특성이 와트에게 불만족스러웠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는 뉴커먼 기관을 능가하는 새로운 장치를 제작해 현대적인 증기기관의 탄생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와트는 뉴커먼 기관의 실린더가 매 행정(行程)마다 냉각과 가열을 반복하게 하는 대신 일정한 상태를 유지시키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실린더를 분리시켜 증기를 별도의 용기 속에서 응축시키는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 용기는 항상 차가운 상태를 유지했으며, 증기를 응축시키는 용도에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와트는 더 이상 대기압을 이용하지 않고 증기를 피스톤의 한 쪽으로 넣었다가 다시 반대편으로도 넣는 방법으로 피스톤을 상하운동하게 만들었다. 와트의 증기기관에서는 증기의 팽창이 피스톤을 밀어 올렸다. 그리고 분리된 응축기의 채택으로 피스톤을 상하운동시키는 증기기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1784년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50년 동안 증기기관 설계를 지배했다.
……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초에 일어난 산업적 변화는 그것이 영국인들의 삶과 운명에 미친 영향의 측면에서는 실제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변화에 동력을 공급해준 기계, 즉 증기기관은 기술 분야에서 진화적 변화의 소산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식으로도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이 없었다. 다른 한편, 이런 발전의 경제적, 사회적 결과는 엄청난 파급력으로 사회질서 전체를 변화시켰다.
사회적 경제적 영역에서 일어난 급격한 변화는 너무 자주 기술분야에서의 혁명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어 왔다. 영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산업사회의 수립은 너무도 큰 변화여서 그 변화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기술적 연속성을 압도하고, 기술의 발전이 하나의 위대한 발명에서 다른 위대한 발명으로 도약한다는 식의 생각을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기술과 그 결과에 대한 혼동은 영웅적 발명가의 신화, 물질적 진보의 사상, 민족주의, 특허제도 그리고 기술변화에 대한 불연속적인 설명을 낳았다.

Basalla, 같은 책, pp.62-66, 99

제임스 와트는 뉴커먼기관을 좀 더 쓸만하게 만들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설계개량을 거듭해 증기기관을 발명하였다. 이는 분명히 지적설계의 소산이다. 그러나 와트가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증기기관을 만들어낸 적은 없다. 개량된 엔진을 만들겠다는 와트의 노력은 미시적 차원에서만 의도적인 것이고, 인간사회의 진보를 분석하는 거시적 입장에서 보면 증기기관의 발명은 또 하나의 ‘돌연’변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점은 인간사회의 진보를 지적설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산업혁명으로부터 도출하였던 진보주의에겐 뼈아픈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증기력의 중요성을 상상하는 제임스 와트(1850년경 작). 그림은 와트가 끓고 있는 차주전자에서 솟는 수증기에서 영감을 얻어 증기기관을 발명했을 뿐 아니라 산업문명의 창조에서 맡을 중요한 역할까지 상상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 그림은 위대한 발명이 영웅적인 인물들의 영감과 직관에 의한 도약의 결과라는 당시 일반적이었던 견해를 잘 보여준다.


이 뿐만 아니다. 위대한 발명가조차도 진보를 충분히 지적설계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3.2. 에디슨과 축음기

발명품의 직접적인 사용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사용 가능성 또한 자명하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새로운 고안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토머스 에디슨이 1877년 축음기를 발명한 후에도 바로 이런 문제에 직면했다. 이듬해에 그는 자신의 발명이 대중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10가지 용도를 나열한 논문을 발표했다. 10가지 용도란 다음과 같다. 축음기는 속기사 없이 사람의 말을 받아쓰는 데에 사용될 수 있으며; 맹인에게 “말하는 책”의 역할을 하고; 대중 연설을 가르치고; 음악을 재생하며; 가족 내의 중요한 말과, 추억담, 유언 등을 보존하며; 자동 연주 음악기와 연주하는 장난감에서 사용될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시간을 알려주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계를 만들 수 있고; 정확한 외국어 발음을 저장시킬 수 있고; 철자법이나 그 밖의 기계적 기억을 가르쳐주며; 그리고 전화가 온 것을 기록해 둔다. 위의 내용이 열거된 순서는 에디슨이 자신이 발명한 말하는 기계의 유용성의 우선순위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중요하다. 음악재생은 에디슨이 생각하기로는 유용성이 비교적 덜했기 때문에 네 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10년 후 이 발명가가 축음기 사업을 시작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축음기를 음악 도구로 판매하려고 생각하지 않았고, 받아쓰기 기계로 판매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에디슨의 발명품의 오락적 가능성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동전을 넣으면 대중음악을 자동적으로 선택해 연주하도록 축음기를 변형시켰다. 동전으로 조작하는 이 음악 기계는 공공장소에 전시되자마자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1891년 에디슨은 초기의 주크박스(jukebox)를 마지못해 인정했다. 왜냐하면 그는 사무실 내에서 사용되어야 할 축음기의 용도를 그들이 왜곡시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후 축음기가 성공적으로 상품화되어 널리 사용된 것은 음악재생기구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후의 일이었다. 1890년대 중반에 이르자 에디슨도 그의 말하는 기계의 일차적인 용도가 오락분야에 있음에 동의했다. 이로써 세계의 많은 청중들에게 기록된 음악과 재생장치를 제공하는 유익한 축음기 레코드 사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
어떤 발명품의 가장 잘 알려진 용도가 항상 최초로 개발된 용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최초의 증기기관은 광산에서 물을 퍼 올리는 데에 사용되었고, 무선의 최초의 상업적 이용은 해상의 선박 사이에서, 그리고 선박과 해안 사이에서 부호화된 무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최초의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는 미군이 대표를 위한 사격표를 계산하기 위한 용도로 설계되었다.
발명에 대한 두 번째 관찰은 어떤 발명품의 사용방법에 대해서 일반적인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예상대로 사용되리라고는 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처음 생산된 발명품은 새로운 개념을 구체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매우 조악한 모델이 되기 쉬우며 이후 상당한 세련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의사결정자들이 판단을 내려야 하는 대상은 완전히 개발된 전기 기관차나 트랜지스터가 아니라 간신히 작동이 가능한 그 원형(原型)인 것이다.

Basalla, 같은 책, pp.211-214

이처럼 발명왕 에디슨은 축음기를 만들어놓고도 그 용도에 대해서는 10년 이상 헛다리를 짚고야 말았다. 이런 것은 발명과 기술발전의 역사에서는 아주 일상적인 현상이다.


3.3. 집합적 지성이란 비유의 오류

혹자는 에디슨 같은 개별적인 발명가들이 헛다리를 짚는다 할지라도 인류 전체의 집합적 지성은 확고한 진보를 추동하는 요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집합적 지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비유적 개념에 불과하다. 즉 집합적 지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곤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비유를 넘어서 밀어붙이면 큰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면 해와 달이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천동설이 옳단 말인가?

사회진화에서 집합적 지성의 존재를 진지하게 상정하는 것은 생물탄생이 초월적 지성의 개입과 설계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의 등가물에 지나지 않는다.


3.4. 과학이 가져온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천동설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이야기를 잠깐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우리는 아주 급격한 변화를 비유적으로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라고 부르곤 한다. 이는 과학에 있어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이 그만큼 급진적인 방향전환이었다는 세간의 평가를 담고 있다.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 과학이 이러한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는 인식, 그리고 그러한 과학이 기술발전을 선도한다는 인식이 합쳐지면서, 앞서 1.2.절에서 잠깐 지적했던 것처럼 진보를 추동하는 주요한 동력인 과학과 기술의 변화에 있어서 과거와 큰 차이를 보이는 불연속적인 변화가 일상적이라는 생각을 낳았다.

그러나 이번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기술발전에 대한 도약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과학보다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점 이외에도 기술은 과학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정교한 구조물들과 장치들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고대의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나 대성당 그리고 중세의 기계기술(풍차, 수차, 시계) 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한 고대 중국의 과학기술이 낳은 무수한 탁월한 업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현대 과학의 출현으로 과거에 기술 개발에 쏟아부어졌던 노력이 종말을 맞게 된 것은 아니다. 그 후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론적인 지식에 토대를 두지 않은 기술 개발에서 개가를 올려왔다. 영국의 산업혁명 기간 동안 발명된 무수한 기계류는 당대의 과학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18세기의 경제성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직물공업은 과학이론의 적용으로 얻어진 산물이 아니었다. 직물제조를 증대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존 케이, 리처드 아크라이트, 제임스 하그리브스 그리고 사무엘 크롬프턴의 발명은 과학보다는 이전 시대 장인(匠人)들의 경험에 더 큰 빚을 지고 있다.
과학이 산업분야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이후의 일이었다. 유기화학의 발전은 대규모의 종합 염료제조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전기와 자기의 성질에 대한 연구는 전기 조명, 전기 동력 그리고 수송산업이 탄생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20세기는 과학에 토대를 둔 기술의 진전된 팽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새로운 과학이론과 데이터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기술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발견의 일상적인 적용 이상의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현대 산업에서 과학과 기술은 양자가 함께 연관된 사업의 성공에 대해서 저마다 고유한 몫의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공학자들이 현대의 과학이론에 도전하는 기술적 해결책을 고안하거나 공학적 연구가 과학 연구의 새로운 길을 여는 경우는 결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Basalla, 같은 책, pp.47-50



4. 기술발전의 주요 원인

기술의 대중적 이미지 형성을 주도했던 것은 증기기관, 철도, 자동차, 백열전구, 페니실린, 라디오 등 소수의 두드러진 발명들을 전기나 과학교양서적을 통해 극적으로 그린 대중작가들이었다. 그러한 이야기 속에서는 결정적 결과를 얻어내기까지 한 개인이 거쳐 온 일련의 특정 사건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즉 이것은 온갖 역경을 헤치고 끝내 보물을 찾아낸 탁월한 발명가, 기술자, 과학자의 이야기, 즉 영웅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의 전문적인 관찰은 이런 대중의 상식을 뒤집어 놓는다.


4.1. 기술진보는 주로 작은 개선과 수정에 의해 달성

(이 절은 Rosenberg의 「미국 경제의 기술적 상호의존성」을 재구성한 것이다)

기술진보가 수많은 소규모의 개선과 수정이 꾸준히 축적되면서 이루어지며 주요한 혁신은 아주 드물게 나타날 뿐이라는 관점은 길필란 S. C. Gilfillan의 『선박의 발명 Inventing the Ship』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기술진보의 점진적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는 귀중한 관점을 제공한다. 즉 기술진보의 과정은 경험에 바탕을 둔 조그만 개선 작업에 크게 의존하며, 연속적인 개량이 이루어진 부품들이나 다른 산업에서 개발된 소재들을 점진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일어남을 보여주었다. 그의 책 2장에는 보일러의 용량 및 증기생산능력의 증대, 철강재의 가격 저하에 따른 철강부품에의 의존도 증가, 석유 윤활제의 채택 등 여러 요소들을 통합하면서 완만히 진행된 선박엔진의 진화 과정이 잘 분석되어 있다.

배의 원동장치를 보면 다음과 같은 개선들이 더 추가되었다. 중요한 차단장치와 이를 위한 밸브 기어, (냉각기를 사용한) 급수형가열기, (1960년대에 연료의 10%를 절감했던) 슈퍼가열기, 증기덮개, 개선된 공기펌프, 증발기, 냉각기의 구리튜브를 도금하는 기술 등이 그것이다. 놋쇠 제작법을 학습한 후 냉각기의 구리 튜브는 놋쇠로 대체되어 발작적인 작동으로부터 튜브를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강제 송풍 기술이 등장했으며, 연료받이 살대가 개선되고 석탄과 공기를 공급하는 데 철제기구를 대신하는 방법(이는 무게를 줄이는 거대한 개선), 그 밖에도 너무 소소해서 여기서 다 언급할 수 없는 숱한 개선이 일어났다.(p.131)

중요한 기술혁신이었던 스크루 추진의 도입(3장)은 단순히 여기저기서 일어났던 금속공업의 개선이 가져온 새로운 구조의 가능성을 이용했을 뿐 아니라 경험과 실험을 통해 프로펠러의 최적 디자인을 널리 확립한 것이었다.

점차적으로 학습된 수학적 원칙을 몇 가지만 고려해도 특히 선박속도, 엔진속도 그리고 배출되는 물의 속도에 맞게 프로펠러 날개의 각도를 조정하기만 해도 효율성에는 큰 지장을 초래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형태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프로펠러의 진정한 발명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러한 원칙들을 학습하는 과정이었다.(p.137)


루이스 헌터Louis Hunter 또한 비슷한 관점을 제시한다.
미국 증기선 발달사를 연구한 『서부 하천의 증기선Steamboats on the Western Rivers』에서 그는 기술적 구성요소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무명의 장인, 직장(織匠), 기계공들이 수행한 수많은 소규모의 개선 및 적응 작업을 강조한다.

증기선의 역사는 주물공장 및 기계공장의 역사, 금속가공 기법과 공작기계의 역사, 그리고 증기 엔지니어링의 실제적 기술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 역사의 대부분은 창조적 천재의 놀라운 발명과 혁명적 아이디어가 낳은 위대한 업적이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공식적 의미의 발명보다는 수많은 작은 개선, 수정, 개조들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점진적 진보의 역사이다. 역사의 영웅들은 와트Watt, 나스미스Nasmyth, 모즐리Maudslay, 풀턴Fulton, 에반스 슈레브Evans Shreve와 같은 사람들(비록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긴 했지만)이 아니라 작업현장에서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좀더 개선시키면서 하루하루의 작업에만 온통 손을 놀리는 무명의 평범한 장인, 공장의 십장, 전문 기계공들이다. 증기선 진화의 역사는 결국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사건들 예를 들면, 축을 16분의 1인치가 아니라 100분의 1인치로 만들었다든지, 유효압력을 몇 파운드 올려주는 실린더 패킹을 고안했다든지, 6시간이 아니라 3시간 만에 청소가 가능하도록 그리고 항해할 때마다 매번 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씩 걸러서 청소하면 되도록 보일러의 설계를 개조했다든지 하는 사건들로 귀착된다. 이렇게 사소한 사건들은 종종 역사 기록에서는 누락되기도 하지만, 실로 기계의 진보를 가능케 하는 것이며, 우리가 잘 모른다고 해서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p.121-122)


앨버트 피쉴로Albert Fishlow는 『철도분야에서 생산성과 기술변화: 1840-1910』에서 미국 철도에서 생산성 증가와 비용 절감에 영향을 미쳤던 여러 요인들의 역할을 계량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시기에 생산성 향상은 극히 높았으며, 에어 브레이크, 자동연결기와 신호장치, 그리고 선철 레일을 강철 레일로 대체한 것 등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발명들이 있었다. 그러나 피쉴로에 의하면, 비용 절감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비록 쉽게 눈에 띄거나 기억될 만한 발명은 아니지만 기관차와 화차 설계에서 수행된 일련의 연속적인 개량이었다.

철도시스템 기술진보과정이 누적적인 성격을 띠며 획기적인 혁신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1870년에서 1910년까지 약 40년의 기간 동안 화차의 용량은 3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매우 적은 비용으로 이루어진 괄목할 만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용량에 비해 하중은 매우 완만하게 증가하여 그 비율이 1대1에서 2대1로 변화하였다. 또한 같은 기간 동안에 기관차의 추진력은 2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p.635)


새뮤얼 홀랜더 Samuel Hollander는 듀퐁 레이온 공장의 효율성 증대의 원인을 연구했는데, 비용절감에 있어서 소규모기술변화의 누적적 효과가 주요한 기술변화의 효과를 능가했다고 결론지었다(Hollander, 『증대된 효율성의 원천: 듀퐁 레이온 공장의 연구』1965).


존 에노스John Enos는 네 가지 주요한 기술 공정 -열분해, 중합, 촉매분해, 촉매교정- 이 도입된 20세기의 정유사업을 연구하였다. (「정유산업의 기술진보속도의 측정A Measure of the Rate of Technological Progress in the Petroleum Refining Industry」) 에노스 또한 주요 혁신 이후 후속 개량에 의해 이루어진 비용 절감이 주요 혁신이 최초로 도입되어 이루어진 비용 절감보다 훨씬 더 컸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정유사업에서의 증거는 공정의 개선이 그 공정의 최초 개발보다 기술진보에 더욱 크게 기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p.180)고 단언한다.

이와 같이 광범위한 산업 분야에 걸쳐 많은 학자들에 의해 비슷한 연구결과들이 보고되어 왔다.
즉 눈에 띄는 발명이나 기념비적인 신기술이 기술혁신을 주도한다는 일반인들의 믿음과는 정 반대로, 학계의 연구결과는 산업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작고 잘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개량들이 진정한 기술발전의 원동력임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이 때, 이들이 과소평가되거나 무시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개별적인 개선의 크기가 작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의미가 있는 것 보다는 기술적으로 획기적인 것에 시선을 빼앗기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결론은 진보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이성이 미래에 완성될 진화의 방향과 전체상을 마음 속에 그린 채 지적설계를 통해 신속하고 커다란 변화, 즉 대(돌연)변이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이론에게는 치명적이다. 잡다한 개선에 기여했던 미약한 참가자들은 전체상을 그릴 능력이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사실 에디슨같은 거물도 자기 발명품의 전체상을 그릴 능력이 부족했을 정도인데 오죽하겠는가?

반면 미소 돌연변이의 반복이 진화에 유리하다는 진화론적 결론이 기술진보에서도 성립할 것이라는 가설을 견고히 뒷받침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도킨스가 생물의 진화에 대한 설명을 위한 비유로 공업생산품인 DC8 여객기의 개량 사례를 들었던 것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업제품의 발전 과정은 중앙집중적인 조율 없이 벌어지는 작은 개량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점진적 과정이란 점에서 생물의 진화과정과 흡사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4.2. 왜 기술은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기술사학자는 아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이미 도킨스가 충분한 통찰을 제시한 바 있다.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되는 개선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러한 개선이 동시에 일어날 가능성은 줄어든다. … [이러한] 생각은 허리케인이 보잉 747기를 조립할 수 없듯이 거의 불가능한 가정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가 보여주는 답은 동시가 아니면 된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의 한 가지 중요한 본질은 성공적인 기술이전의 가능성과도 상당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즉 야금술이나 동력생산 그리고 수송기관 등 독립적인 개별 혁신들이 아주 의미 있는 방법으로 상호관련을 맺으면서 서로를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종종 하나의 혁신은 다른 종류의 혁신이 없으면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거나 아니면 새로운 혁신을 도입하면 다른 종류의 혁신이 보다 효율적으로 기능을 하게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서 효율이 높은 증기엔진을 만들기 위해 보다 개량된 야금술이 반드시 필요했다. 역으로, 풍로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는 데 증기엔진이 활용됐다.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으면 보다 효율적인 연소가 가능하므로 연료소모량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서 철의 가격도 하락했다. 그러므로 저렴한 금속가격은 저렴한 동력을 낳고 저렴한 동력은 더욱 저렴한 금속을 낳았다. 마찬가지로, 저렴한 철이야말로 철도건설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런데, 철도가 일단 건설되자 석탄과 철광석의 수송비용이 상당히 절감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철도는 철의 생산비용을 인하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렴한 철이 저렴한 철도를 가능하게 하고, 이는 수송비용을 더욱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것이 다시 철의 생산비용을 낮추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새로운 산업기술과 관련된 엄청난 생산성 증대는 바로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혁신들이 종종 상호관련을 맺으면서 서로를 강화해 주었다는 데 그 비밀의 일단(一端)이 있다.

Rosenberg, Nathan, Inside the Black Box : Technology and Economic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이근 외 역, 『인사이드 더 블랙박스: 기술혁신과 경제적 분석』, 아카넷, 2001, pp.366-367)

기술의 발전 원인은 복잡 다양하며,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갖고도 왜 지금 설명한 것 같은 과정이 자연스러운지는 분명한 것이다.


5. 끝맺으면서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근대 진보주의의 가정은 가차없이 틀렸다고 말해줄 수 있다.

근대 진보주의가 출발점으로 삼았던 "만일 기술적 문제들이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도 똑같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가정과 유추는 산업혁명과 기술혁신에 대한 피상적이고 통속적인 오해에 기인한 것이다.

(1) 산업혁명기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영웅적 발명가에 의한 진정한 대도약은 없었다. 대부분의 중요한 기술발전은 점진적인 개선의 축적과 시행착오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2) 또한 배경 원리에 해당하는 자연과학의 이해가 먼저 이루어진 후 기술발전을 주도한 경우도 드물었다. 많은 경우에 과학은 장인들이 만들어낸 기술발전을 사후적으로 설명하는 데 머물렀다.
(3) 과학이 산업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매우 늦은 시기(19세기 후반 내지는 20세기)에야 시작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혁명적인 도약보다는 점진적 기술개량에 의한 발전이 여전히 계속되었다.

또한 인간 사회의 사회-정치-경제적 구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좋게 봐 주어도 산업혁명 초기의 자연과학 수준이지, 20세기 후반 이후의 자연과학과 비교할 수 없다(보론 참조). 따라서 근대 진보주의가 기대하는 인간 사회에 대한 지적설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리이거나 최소한 현재로서는 시기상조이다.

언젠가 우리의 사회과학이 고도로 발전하여 인간 사회-정치-경제적 구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면, 오늘날 자연과학이 기술발전에 기여하듯이 실용적인 사회진보를 가끔 선도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정도의 기대는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 아닌 저 미래의 언젠가에.




보론. 한 경제학자의 결론을 빌려

앞선 글의 본문에서는 주로 근대화와 기술발전을 중심으로 진보의 과정을 분석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렇게 반론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진보를 이루고자 하는 분야는 인간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이지 기술과 과학은 아니다"라고.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기술과 (자연)과학이 달성한 진보의 양이나 속도에 비해 사회과학의 그것은 한참 쳐진다. 근대에 발생한 인간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의 진보 대부분이 사회과학의 발전 결과를 수용해서 이루어지는 대신 기술과 (자연)과학이 달성한 진보의 파급효과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이 점은 사회과학자들도 대개 동의하는 것이다.

한 인도 태생의 경제학자가 대학원 강의 시간에 자기 나름의 윤회설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적이 있다. “여러분이 만일 좋은 경제학도, 선량한 경제학도라면 물리학자로 다시 태어날 것이네만, 만일 나쁜 경제학도, 사악한 경제학도라면 사회학자로 다시 태어날 것이네.”
사회학자가 이 인용문을 본다면, 경제학자들의 그릇된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즉 경제학자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자연과학(hard science)과 같은 수학적 확실성을 갖춘 학문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훌륭한 경제학자는 말하는 이가 전적으로 뭔가 다른 것, 즉 주제의 더없는 난점을 토로하고 있음을 안다. 경제학은 물리학보다 더 어렵지만(harder), 다행히 사회학만큼 어렵지는 않다.

Krugman, Paul., Peddling Prosperity: Economic Sense and Nonsense in an Age of Diminished Expectations, W. W. Norton, 1994
(김이수, 오승훈 역, 『경제학의 향연』, 부키, 1997, pp.11-12)

보통 사회과학 제 분야에서는 경제학이 제일 앞서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는 예를 들어 경제학을 정치학(political science)와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경제학에서는 재화, 용역, 효용 등을 따지지만 대개 이를 화폐단위로 측정, 조작하는데 상당한 진전을 이루어 놓았다. 미국과 중국의 GDP를 비교한다든가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반면 정치학의 경우 힘/권력(power)이 그에 해당하는 핵심 개념이고 이 문제를 끊임없이 다뤄 왔음에도 불구하고, 파워를 측정하는 기준 자체가 매우 모호하고 합의도 없다. 정치학자를 잔뜩 모아 놓고, 미국과 중국의 파워를 비교해 보라든가, 정치인 이명박, 박근혜, 정동영의 파워를 비교해 보라는 식의 과제를 주면 백인백색의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나쁜 경제학자가 정치학자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여도 놀랍지 않다. 진지한 사회과학자라면 대개 자기 분야의 성취는 무척 제한적이어서 지금 당장 사람들이 원하는 문제의 해답을 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지식이 이런 낮은 수준일 경우, 보통 "맞는 답이 뭔진 몰라도 틀린 보기가 뭔지 하나쯤은 안다"는 식의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된다. 이 점은 객관식 시험문제를 풀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와 같은 사정은 경제학이란 학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경제학이 원시 과학임은 물론이다. 비슷한 사례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의학을 생각해 보자. 당시 의학 교수들은 인간의 신체 기관과 작용에 관하여 수많은 정보를 축적해 왔으며, 이를 토대로 질병 예방법에 대해 극히 유용한 충고를 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병에 걸리면 대개는 치료할 줄 몰랐다. 실제로 의사이자 수필가인 루이스 토마스(Lewis Thomas: 1913~. 미국의 의사이자 작가. 1974년 전미도서상 수상. 역주)가 당시까지의 의학 연구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꼽은 것은 방혈(放血, bleeding)과 같은, 오히려 환자를 다치게 하는 전통적인 “치료법”을 그만 두고 병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이라고 한다.
경제학은 이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그리 다르지도 않다. 경제학자들은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대단히 많이 알고 있어서,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의 예방법(이에 대해서는 확실하게)과 경기 침체의 예방법(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에 대해 유용한 충고를 들려줄 수 있다. 우리가 기꺼이 듣고자만 한다면, 그들은 수입 쿼터제나 가격 통제 같은, 경제 불황에 대한 민간요법이 의학적 방혈 정도밖에는 유용하지 않다는 점을 입증해 보여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치료할 수 없는 것은 많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가난한 나라를 부유한 나라로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제 성장의 마법이 사라져 보인 듯이 보일 때 그것을 회복하는 법을 모른다. 이와 같은 한계는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싶어 안달하는 정치가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Krugman, 같은 책, pp.24-25

크루그먼은 이 글에서 자신들의 능력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진지한 경제학자들이 정치가,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싶어 안달하는 정치가들에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정치가란 말을 이렇게 바꾸어보면 어떨까? 진보주의자라고.

우리가 사회에서 충돌하게 되는 진보주의자란 "꼭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사회가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진보하기는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진보에 대한 작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온건한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현재 답을 알고 있건 모르건 간에 "지금 당장 사회가 이러저러한 진보를 이뤄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달려가야 한다"라고 믿어 의심치않는 사람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크루그먼은 같은 책의 말미에서 경제학자들이 겪고 있는 이같은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을 내놓고 있는데, 내가 개인적으로 내렸던 결론과 비슷하다.

경험 많은, 그래서 냉소적인 한 관변 경제학자가 언젠가 나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이렇게 전망한 적이 있다. “내 일은 해로운 생각을 제거하는 일이오. 바퀴벌레를 변기에 잡아 넣어 쓸어버리는 것과 같지. 그런데 조만간 그 놈들은 다시 나타날 거란 말야.” 정책을 놓고 고심하는 경제학자들의 역할은 쉽게 기가 꺾일 수 있다. 경제학자는 때로는 복잡다기한 이론을 안출하면서, 때로는 사실을 통해 이론을 주의 깊게 검증하면서 몇 년씩 보낼 수도 있다. 그러다가 정치가들이 이미 10년 전에 또는 1백년 전에 오류로 판명난 생각을 계속해서 끄집어내거나, 아니면 사실에 정면으로 모순되는 말을 벌려 놓는 꼴을 본다.
이 같은 상황이 포기 -상아탑으로 철수하든가 정책 기획가로 나서든가- 를 종용한다. 무엇보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매번 이기는데, 정책에 대한 복잡다기한 생각이나 또 사실에 대한 주의 깊은 검토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 가지 답변은 포기하는 것도 잘못이란 사실이다. 훌륭한 생각을 지닌 이들이 그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결과에 불평할 권리도 없다.

Krugman, 같은 책, p.345

by sonnet | 2008/02/29 14:19 | 과학기술 | 트랙백(4) | 핑백(5) | 덧글(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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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보수적 변화는 왜 우월한 진보전략인가"라는 엄청난 오바글을 반박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는데, 그런 류의 오해에 대해서는 이곳 저곳에서 에둘러 비판한 것으로 생각되어 글을 접었었다.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대결을 도킨스와 굴드의 도약 대 점진의 구도로 파악한 것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럴때 참으로 난감한데, 진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점진과 도약의 대결을 사회학적 화두에 그대로 꿰어맞추는 나이브함을 어떻게 응......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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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nnet님의 훌륭한 글, 보수적 변화는 왜 우월한 진보전략인가에서 진보주의자가 사상적으로 많이 의존하는 과학 기술의 방법론, 발전에 대한 약점을 기술하였습니다. 저 글 자체에 앞서,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은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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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블로그에 들리는 분들은 내가 평소 기술론(내지는 기술발전론)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짐작하시리라고 생각한다. 내 평소 생각은 예를 들어 보수적 변화는 왜 우월한 진보전략인가, 사례연구1. 빠른 기술진보는 기술도입을 늦춘다? 등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다음 책은 출간 직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인데 마침 이글루스 렛츠리뷰 ... more

Linked at Case BY Case : 진.. at 2009/01/26 05:26

... 아메리칸 스탠다드로써의 자본주의) 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나는 당연히 보수다! 라고 외치는게 그리 자랑스러운지에 대해서는 좀 다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일전에 한번sonnet님이 언급하셨던 바와 같이 보수주의 역시 변화를 어떤식으로 일으키냐의 얘기지, 변화를 하지 않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서 말이지, 세상을 고쳐나가겠다는 생각은 공통 ... more

Linked at 잊혀진 상처의 낮은 읊조림(구.. at 2009/06/14 13:55

... 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블로그입니다. 그 중에서 제가 흥미있게 읽었던 포스트는 아래 것입니다. '보수적 변화는 왜 우월한 진보전략인가?' http://sonnet.egloos.com/3637043 여기서 특히 생각이 많이 들었던 부분은 '변화의 두 가지 방법론'입니다. 변화를 추동하기 위해서는 1. 기존의 문제점을 점진적으로 개선 ... more

Linked at 보수주의자 소넷씨의 잡학다식에.. at 2014/05/28 13:30

... &#8220;보수적 변화는 왜 우월한 진보전략인가&#8221;</a>라는 엄청난 오바글을 반박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는데, 그런 류의 오해에 대해서는 이곳 저곳에서 에둘러 비판한 것으로 생각되어 글을 접었었다. 그러다 소넷씨의 여러 글들을 읽고 다시 두들기기 시작했다.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대결을 도킨스와 굴드의 점진 대 도약의 구도로 파악한 것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럴때 참으로 난감한데, 진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점 ... more

Commented by 채승병 at 2008/02/29 14:57
홍 대인의 전반적인 인식에 깊이 공감을 표합니다. 아울러 이런 흥미로운 주제에 복잡성과학에서 전개된 논의가 곁들여지면 금상첨화일 것 같습니다. 저는 언급하신 기술과 사회, 경제의 진화 과정, 그 견지에서 본 진보-보수진영의 문제점에 대해 에릭 바인하커의 『부의 기원(The Origin of Wealth)』이 큰 insight를 주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도 시간이 나면 이쪽 관점에서 보충 논의를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Commented by 라슈펠 at 2008/02/29 15:26
인류 종족 전체의 생존에 관해서는 글에 공감합니다만, 개개인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나 죽은 후에 좋은 세상 와봐야 무엇에 쓰랴?'입니다. 좀 더 늘려서 봐도, 내 자식대에도 좋은 세상이 올 것 같지 않으면 혁명사업에 뛰어드는게 훨씬 나은 전략이겠죠.

이 이야기는 원글 논지와도 다르지 않죠. 혁명에 올인을 해도 삶이 더 나빠질 확률은 별로 없으니까요. 그래서, 보수주의가 득세하려면 일단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사회에 좋은 평가를 내려야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현 사회가 지킬 가치가 있다는 공감대가 있어야 보수가 의미가 있는거죠.
Commented by 라슈펠 at 2008/02/29 15:30
(그리고 오랜 인류 역사에서 소위 지배계층은 물질을 챙기고 피지배계층에게 '현실은 충분히 좋다'고 이데올로기/종교/콜로세움 등등으로 비물질적인 보상(-_-)을 해왔죠.)
Commented at 2008/02/29 16:2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들러갑니다 at 2008/02/29 16:40
공산주의 특유의 과학적(?) 정치의 모범을 실천하신 위대한 '진보'주의자 스탈린 동지가 계시지 않았더라면 엽관제와 금권정치가 판치던 서구제국이 어떠한 길을 걸었을지 참으로 암담하기만 합니다. 역시 부시는 키치에 불과했습니다.
Commented by 지나가던이 at 2008/02/29 16:49
- 예전에 경제학은 19C말이나 20C초반의 의학과 같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군요. "어떤 증상이나 결과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줄 수는 있지만 치료법이나 예방법은 잘 모른다"고...

- 물리학이야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나타나지만 화학은 그렇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양자론도 수학으로 표현되지만 딱 떨어지는 값은 아닌 걸로 알고요. 경제학보다야 더 말끔한 모델이겠지만 물리학도 투명할 정도로 확실한 건 아닌 듯 합니다.

- 솔직히, 사회과학은 인간의 뇌 작용방식에 대한 이해가 확실히 되야 더 나은 해법이 나온다고 보기에 지금 수준에 만족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 실상 기술이나 과학의 진보가 이성에 의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건 아니었지만 갈릴레이 같은 사람은 모진 고문까지 받았으니 그런 마음가짐이라도 없으면 제대로 이뤄진게 없었을거란 생각도 듭니다.
Commented by 루시앨 at 2008/02/29 18:17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1. 진보주의의 강령은 분명 산업혁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면이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정상적 변화의 인정"으로 인해서 생기게 된 제도 중 하나인 이데올로기의 영역이라 생각됩니다.

2. 확실히 물리학이 사회과학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는 생각입니다.

3. sonnet님께서 보수주의가 왜 우월 전략인지에 대해 밝혀주셨으니, 저는 (적어도 리플을 단 지금 순간에서는) 세계체제론자 내지는 역사적 사회과학 지지자 내지는 낭만주의자로서 제 입장을 오늘 중으로 기술해볼 생각입니다. ^^; (sonnet님 뿐 아니라 다른분 들의) Comment를 환영합니다 ^-^(...무서워 ㅠㅠ)
Commented by kanie at 2008/02/29 21:48
재미있게 읽고 트랙백 보내 봅니다.
근데 카테고리가 flame! 이네요 :)
Commented by 하늘선물 at 2008/02/29 23:15
술먹고 조금씩 읽다가 술 깬후 다시 각잡고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보다 논의해보고 싶은 이야기꺼리가 꽤 있네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08/02/29 23:36
반 농담으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거개의 위인전들은 어떤 의미로 '불온 서적'이 되는군요.
이전에는 '영웅사관'적인 전개 등을 주로 문제삼아 불만을 품었는데,
실제로는 근대 진보주의에의 프로파간다까지 암암리에 실행하고 있는 셈이니...;;;;

(...실은, '와트와 주전자' 얘기에서
"위인전에 낚였다!" 생각을 함과 동시에, 뒤늦은 깨달음에 머리를 쳤거든요...;;;)
Commented by rgc83 at 2008/03/01 04:05
(1) 글 잘 읽었습니다. 이른바 근대 진보주의에는 저러한 약점이 있었군요. 그렇다면 이른바 진보주의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출발부터가 아주 잘못된 것이고 그러하므로 사멸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존재 그 자체가 부정되어 마땅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려나요?

그렇다면 각종 사회 이슈에 관련된 사회주의적 성향이나 자유주의적 성향의 주장이나 정책들은 (양 쪽 모두 근대 진보주의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으니만큼) 근원적으로 볼 때 심각한 오류를 내포한 잘못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당히 비약적인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고 보이는데 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sonnet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른바 진보좌파나 리버럴리스트 중에는 근대 진보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나 진보주의적인 성향을 전혀 갖지 않은 이가 드물 것 같은데(당장 저 자신만 해도 성적소수자 관련 문제나 페미니즘 관련 문제 등등에 있어서는 진보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요), 그들은 전부 다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련지요? 물론 제 경우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죠.

(2) 위에서의 리플에 덧붙여 궁금한 것을 몇 가지 더 묻고자 합니다.

흔히 '진보좌파'라는 표현이 통용되고 있고 더군다나 아예 '진보진영'이라고 까지 불리고 있는 만큼, 좌파 진영은 필연적으로 근대 진보주의와의 강한 연관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보지향적이라는 건 결국 진보주의와의 연관성을 어떤 형태로든 가진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근대 진보주의가 그 출발부터 문제가 있다는 점이 문제인데, 그렇다면 앞으로의 좌파 진영은 근대 진보주의와의 연관성을 끊어야 된다는 얘기가 되는가요? 으흠, 진보주의와의 연관성을 끊고 보수주의를 적극 받아들인 '보수좌파'라... 왠지 잘 상상이 안 가는군요--;;; 그 이전에 진보지향적이지 않은 좌파가 과연 좌파일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편견이라면 편견이겠습니다만, 근대 진보주의를 부정하게 되면 흔히 말하는 진보진영, 즉 좌파에 대한 부정도 뒤따르게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또한, 진성 좌파만큼은 아니지만 소위 말하는 리버럴 진영 역시 근대 진보주의와 상당한 연관성을 가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근대 진보주의가 그 출발부터 문제가 있다는 점이 문제인데, 그렇다면 앞으로의 리버럴 진영은 근대 진보주의와의 연관성을 끊어야 된다는 얘기가 되는가요? 이 역시 아무래도 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3) 으흠, 본문의 내용대로라면 '근현대에 있어서의 급속한 기술혁신'이라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일까요?

본문의 논지에서는 상당히 이탈되는 얘기이긴 하지만, 저는 드물게 있었던 혁명적 도약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꾸준하게 수행되어온 점진적 개량에 의해서도 근현대의 기술의 발전속도는 과거에 비해 분명 빨라져왔지 않은가 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근현대에 있어서의 급속한 기술혁신'이라는 것이 단순한 환상에 그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sonnet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궁금하군요.

(4) 여담입니다만 이미 몇 차례 밝힌 바 있는 고민-보수주의 사상으로 '개종'하여 완전한 보수주의자로 전향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사안에 대해서 동일한 관점을 적용하는게 아니라 개별 사안에 따라서 적용될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재의 사고방식을 유지할 것인가-에 있어서, 저는 최종적으로 후자를 선택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 가지 사상에만 몰입하여 자신과 다른 사상을 가진 이들을 적으로 돌린다거나 하는 선택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후자를 선택함으로서 지금 겪고 있는 고민에 대한 해답을 내리고자 합니다.

다만, 지금의 저의 선택이 과연 정상적인 행동일지에 대해 타인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미련은 아직 떨쳐버릴 수 없군요. 그래서 이제 sonnet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께 그 점에 대한 의견을 듣는 것으로 저는 최근 토론에 참가하면서 겪게 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자 합니다.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8/03/01 09:3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정치에 대한 냉소와 혐오가 광범위하게 확산된 이유가 급격한 진보에 대한 환상이 충족되지 않은데 있다고 보는 편 입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설 때 불안감을 느꼈던 이유도 노무현의 지지층이 진보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의 경험으로 환상이 충족되지 못한다면 환멸로 바뀐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이명박 정부도 노무현 정부와 비슷하게 '진보(경제적 측면에서)'에 대한 환상을 불어넣으려 용을 쓰고 있는데 이건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해 막연한 우려만 하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자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는데 sonnet님의 글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도킨스의 DC-8 에서 이런 정치적 함의를 이끌어 낸 점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아아. 역시 대인의 공력은 헤아릴 길이 없나이다.
Commented by uriel at 2008/03/01 10:58
요즘 과학 기술의 발달을 설명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작은 변화가 쌓이는게 물론 주요하긴 하지만, 그것 외에도 급격한 변화와 함께 하는 "패러다임" 시프트(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지 않나요? 저 책을 본 지 10여년이 넘고 책 자체도 지금 근처에 없어서 잘은 기억 못하겠습니다만..

앞에서 증기 기관 자체가 "혁명적"이라는 것은 와트의 증기기관이 아니라 뉴커먼의 증기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혁명적인 변화가 언제나 혁명적인 사회/산업적 변화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고, 이 혁명적 변화를 뒷바침하기 위해 점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Commented by 하늘선물 at 2008/03/01 11:05
그러고 보니 토마스 쿤을 집어넣으면 이야기가 꽤 재미있게 생성될수 잇겠군요. 거기다가 만약 후기구조주의 사상마저 집어넣어버린다면.......ㅡㅡa

아. 머리만 아파지는군요.
Commented by 새매 at 2008/03/01 11:40
평소에 이공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과학기술 발전에 대해서 갖고 있던 생각인데 이렇게 명확하게 정리해주시니 개안을 한 느낌이군요. 평소 '영웅적 과학자' 에 대해 많은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있지도 않은걸 원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어떤 영웅적 업적에 의해 이루어지고 역사가 특정 위인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일반인에게 매우 impressive 하게 들리고 사태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는 방법이겠지만 실제로 진보를 이끌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자나깨나 진보를 외치는 진보주의자들의 현실인식이란 사실은 18세기 계몽주의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지 않았나 싶군요. 그리고 도킨스의 비유를 인용해서 사회발전에 대한 생각으로 발전시키신 것은 굉장히 좋은 시도로 보입니다. 본문에 쓰신 대로 진보주의자들의 관점이 과학기술의 발전사를 그 모델로 삼고 있다면 그 기원을 깨면 자연적으로 환상은 깨지는 것이겠지요.
Commented by Ya펭귄 at 2008/03/01 13:51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
Commented by maxi at 2008/03/01 16:26
엄청 재미있는 글인데 문제는

저는 이 논리 전개과정을 인류 발전 -_- 말고

개인의 가치판단 (혹은 선택지) 에 대한 기준에도 적용할수 있을지 흥미롭습니다 ㅋㅋㅋ
Commented at 2008/03/01 16:2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rumic71 at 2008/03/01 17:40
증기기관의 원리 자체는 '헤론의 장난감' 즉 고대그리스까지 소급되기 때문에 뉴커먼도 아주 혁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Commented by 나츠메 at 2008/03/01 19:06
길 잃은 어린양님/
저 역시 어린양님의 의견과 동일한데요. 현 대통령께서 심어 논 환상(경제 살리기)은 깨질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면 <보수주의자>가 욕을 먹음과 동시에 멸시받을 것이 자명하다고 생각됩니다.

부디 각하 때문에 보수주의자가 다 같이 까이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p.s: 그.래.서 저는 대선 때 그 분 안 찍고 12번 찍었다능.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8/03/01 19:07
진보주의는 지적설계론과 같은 건가요. 그럼 '사파'의 딱지를 붙일 수 있겠군요.
현대 진화론과 기술 혁신이 보수주의의 기반이 될 수 있군요.
저도 새매님과 비슷한 입장인데, 문제 해결은 작은 개선이 쌓여야 되는 일이지 급격한 변화가 먹히는 일은 아닌 듯 합니다. 급변이 일어나면 힘없는 사람들만 죽어나죠.
Commented by young026 at 2008/03/01 19:07
질문 하나.
앞선 글의 인용 글에서 스펙트럼을 일직선으로 표시해 놓았지만, 실제 사회의 변화 방향은 전혀 일직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보'의 화살표 방향은 실제로는 한 방향은 커녕 반원 안에나 있으면 다행이겠죠.
그렇게 볼 때 그 구분 방식으로는 진보와 보수는 쉽게 구분할 수 있겠지만 진보와 반동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반동을 '완벽하게 과거로 되돌려 놓는 것'이라고 한다면 의미는 명확하겠지만 그건 실제로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일 테고요.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8/03/01 19:55
나츠메님 // 12번은 확실히 현재의 대통령 보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8/03/01 19:58
나츠메님 // 12번은 현재 대통령 보다 백 배는 훌륭한 선택이죠.
연세 때문에 다음에 또 나오실 수 있을 지는 모르겠군요.
Commented by 어부 at 2008/03/01 22:59
G.Basalla의 책도 번역이 됐군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읽은 다른 책은 이 책의 관점을 너무 많이 인용한 성 싶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3/02 00:06
채승병/ 채마왕께서 보충을 해주신다니 무척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소개해주신 책은 감사히 잘 읽어보겠습니다.

라슈펠/ 사실 사회를 바꾸는 것은 큰 노력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사회 전반을 바꾼 후 그 후에나 혜택을 내가 누리겠다는 것은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노력과 시간, 위험은 큰 반면 기대이익은 작은 열등한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공개/ 사실 조직생활을 해보면 배우는게 많지 않습니까?

들러갑니다/ 헐. 릐센코라든가..

지나가던이/ 저도 전반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사회과학의 경우 미시기초를 갖고 거시이론을 정립한다는 식의 접근(즉 생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사회과학을 재구성하자든가)은 제가 생각할 때 피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드워드 윌슨은 제가 아주 위험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루시앨/ 포스팅을 다 보고 논평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기대하겠습니다.

kanie/ 잘 읽었습니다. 카테고리가 flame!인 이유는 음... 사실 아직까지는 아니지만, 논란이 어느 정도 예상되어서 입니다. 이 글은 일련의 답변에서 시작된 것이어서 특별히 flame war를 하겠다는 의도는 없습니다.

하늘선물/ 사실 복잡한 주제를 여기저기 건드려서 이야길 시작하면 끝이 없죠.

paro1923/ 사실 무슨 노동영웅 선전하는 거와 비슷한 거죠. 영웅적인 발명가가 많으면 사실 모두에게 나쁠 거야 뭐 있겠습니까.
Commented by 三天포 at 2008/03/02 00:15
[오늘 처음 댓글달아봅니다]
하긴 인터넷도 처음엔 군사용이였죠;
Commented by 三天포 at 2008/03/02 00:43
그럼 아담스미스의 자유주의가 후에 경제 공황때 케인즈의 개입주의 처럼 사상이 급격히 변한경우같이 사상을 뒤집어서 본결과(급격한변화)를 이룬건 어떻게 설명될수 있을까요?

[이건 인문학의 얘기니까 위의 내용과 어긋나려나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3/02 01:04
rgc83/ 1. 사실 그 어떤 의견도 극단적으로 몰고 가면 다 이상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사멸이라는 걸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실 건데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다른 좋은 판단근거가 없을 때) 보수적인 접근이 아마 진보적인 접근보다 확률적으로 유리할 것이라는 것은 특정한 개별 사안에 있어 보수적인 접근이 유리하다는 보장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런 건 그 사안에 대해 가용한 정보를 따져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죠.
2. 보론에 인용한 크루그먼이 미국의 대표적인 리버럴 중 하나입니다. 그는 경제학계의 보수주의자들과 의견을 달리하지만, "경제학에 관한 훌륭한 생각은 누적된다. 앞으로 한 세대 후, 공급 중시론자들은 그저 역사 상의 흥밋거리일 뿐이겠지만, 진지한 보수주의자(예를 들면 마틴 펠스타인)들의 타당한 통찰력은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저도 이런 것과 비슷한 생각입니다.
문제는 진보, 보수 이전에 어느 정도 봐줄만한 구석이 있는 이야길 해야 된다는 것이겠지요.
3.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도약설은 신빙성이 없다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대도약이 없어도 기술이 빠르게 발전한 사례는 이미 본문에 소개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4. 마음 가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보수나 진보의 선택 등은 완전히 이성적인 판단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라든가 성격 측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변화가 체질적으로 좋다거나 싫다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자신과 입장이 다르다고 꼭 다 적으로 돌릴 필요도 없는 것 같은데 너무 극단적인 방향으로만 생각을 몰고 가시는 듯 합니다. 누군가가 내 앞에 와서 영 틀린 것 같은 주장을 펴면서 계속 우기면 신경질나서라도 물리쳐야 할 때도 있겠죠. 그렇다 해도 그게 늘 있는 일은 아니잖습니까?
Commented by rgc83 at 2008/03/02 07:34
sonnet님//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요 근래에 이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상태여서 지나치게 극단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몰고 가고 있었던 것 같군요. 그 점을 지적해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최근의 토론에 있어서 제가 무례한 언사로 sonnet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적은 없었는지 솔직히 걱정되고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사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Commented by vvin85 at 2008/03/02 13:53
기술발전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동감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요즘들어 천재가 만명을 먹여살린다느니, 영재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바보들에게 들려주고 싶군요. 기술의 예로 사회 현상을 설명한 부분도 탁월하고요.
허나 단순히 포괄적인 개념의 '보수'나 '진보'가 아닌 각론의 영역에서 이런 비유가 성립될지는 의문입니다. '진보'라는 개념은 국제관계에서 '미국의 의지' 만큼이나 사람마다 제각각으로 해석하가능하고 실체를 찾기 어려운 개념이라고 생각하는지라서요. 보수주의자라든지 좌파등의 딱지로 한 사람의 사상을 설명하려는 일만큼 무의미한 일이 있을까요. 정말 중요한 것은 각론에 대한 견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같이 진보주의자로 묶이는 사람들간에 각론에서 정반대라고 싶을 정도로 의견차이를 보이는 일도 흔하니 말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3/03 00:01
길 잃은 어린양/ 저도 과도한 기대 후 스스로의 환상에 속아 환멸을 느끼는 그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 같다는 데 동감합니다. 과연 우리는 적절한 기대수준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인지...

uriel/ 과학과 기술은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사실 본문에서 인용한 Basalla나 Rosenberg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은 과학과 기술을 비슷하다고 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쿤의 패러다임은 인식의 전환인데, 그게 눈에 보이는 결과로 나타나서 측정할 수 있느냐와는 또 전혀 다른 문제인 듯 합니다.

하늘선물/ 사실 좀 생각해보면 아시겠지만, 쿤을 이 문제에 어떻게 적절히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과학혁명=도약적 변화, 정상과학=점진적 변화라고 일단 놓아볼 수는 있지만, 어느 쪽이 과학발전에서 얼마만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지 어떻게 측정해 비교할 것입니까? 쿤이 만든 개념은 기본적으로 비교에 쓰려고 만든 것이 아니어서 바로 사고의 막다른 골목에 직면하게 됩니다.

새매/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영웅적 발명가의 주도적 역할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합니다.

Ya펭귄/ 사실 필요하다고 다 발명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발명이 없던 수요를 만들어내는 측면도 있어서 이 점은 분명히 같이 언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maxi/ 사실 사회를 바꾸는 것은 큰 노력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사회 전반을 바꾼 후 그 후에나 혜택을 내가 누리겠다는 것은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노력과 시간, 위험은 큰 반면 기대이익은 작은 열등한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선택은 대개 이럴 때 편승전략이 유리하지 않나 싶은데요.

rumic71/ 헤론이라든가 남미의 바퀴 장난감 같은 것이 고립된 발명의 예로 괜찮은 것 같습니다.

나츠메, 누렁별, 길 잃은 어린양/ 개인만 놓고 보면 그렇겠습니다만, 기호꼴번도 사실 워낙 급조된 당을 들고 나와서 참 안습이긴 하더군요.

누렁별/ 진보주의=지적설계론 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별 생각없이 진보주의자가 자기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쓰는 논리에는 암묵적으로 지적설계론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고 느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그런지는 사안별로 밝혀 낼 문제이지만요.
저는 정책을 주사위굴려 정하는 게 아닌 이상 지적설계를 또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주의든 진보주의든 제한된 지식 하에서의 판단, 즉 상당히 제한적인 지식만 갖고 지적설계를 하라고 요구받았을 때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최선인지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나름대로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young026/ 그 모델에 의도된 단순화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경우 그러한 단순화가 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통찰력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지지합니다. 반동의 현실사례는 (각종) 왕당파, 공작기계를 파괴한 러다이트 운동이라든가, 종교적 원리주의 운동 같은 것을 들면 충분할 듯 합니다.

어부/ 예. 바살라의 참조문헌에 (제가 인용한 다른 저자인) 로젠버그가 등장하는 것도 흥미로운 점입니다. 상세히 찾아본 건 아니지만 반대로 로젠버그의 책에서 바살라를 본 적은 없는 듯 합니다.
Commented by 야채 at 2008/03/03 17:38
기본적으로 sonnet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만,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가정이 항상 성립하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거대한 돌연변이를 '강요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인류 사회 전체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특정 부분(분야건 지역이건 간에)이 항상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이 산업혁명의 '혁명적 변화'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차이가 생기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업혁명의 주요한 원동력 중 하나인 증기기관의 발전과정은 점진적 발전의 총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점진적 발전의 총합'이 한 분야에서 쌓아올려지고 나면, 다른 산업들은 높은 효율의 증기기관이라는, '거대한 변화'에 갑작스럽게 직면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변화가 올바른 방향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어쨌든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경쟁자들이 이 엄청난 가능성을 낚아채는 사이에 어물어물하다가는 순식간에 폐기처분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혁명이 '혁명'으로 불리는 것 역시 증기기관이 나타난 과정 자체가 '혁명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점진적인 변화 끝에 완성되어 나온 증기기관 등이 산업 전체에 준 충격과 그에 따른 급격한 변화 때문일 것이며, 그러한 급격한 변화들은 그 변화를 선도한 몇몇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강요된'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물론 '강요'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꼭 그 변화를 싫어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좋건 싫건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일 뿐입니다.)

비슷한 성격의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이라면, 아편전쟁 이후의 동아시아가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체제가 오랜 세월 동안 잘 작동해 왔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면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잘 작동할 것이라고 가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요. 서양을 얼마나, 어떻게 모방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는 모르는 상태였지만, 그게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이성에 대한 낙관적 견해보다는 현재에 대한 문제의식 쪽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현재의 상황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는 없는" 상황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이들을 급진주의자라고 분류하는 것도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우리나라가 또다시 외환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을 참을 수 없을 것이고 대개 "어떻게든 해야지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 심한 불만을 품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불만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더구나 극단적인 대안이나 폭력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는 정치보다는 IT 업계 쪽에 잘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방향도 잘 모르지만" "일단 달려야 하는" 상황은 IT 업계에서는 그다지 드문 것이 아니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8/03/04 22:31
三天포/ 환경이 아주 급격히 변할 때나 커다란 위기가 있을 때는 보통 변화의 폭이 커지지 않습니까? 그건 생물학에서 대규모 멸종이 뒤따르는 환경변화가 있을 때에도 보이고, 인간 역사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공황 이후 자유방임경제학의 포기로 연결되는 과정은 원자폭탄의 발명과 비슷한 과정으로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여러 차례 인용한 바살라는 원자폭탄의 발명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근대 산업국가라 하더라도 2차대전 같은 총력전 상황에 내던져지지 않았다면 그렇게 불확실한 과학적 새 발견에 입각해서 20억 달러나 들여 원자폭탄 같은 초병기를 만들겠다는 의사결정을 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vvin85/ 이 글에서 각론을 변화의 크기와 속도라는 기준을 갖고 어느 정도 묶는 이유는 그러한 기준이 서로 다른 분야의 각론, 특히 미래에 벌어질 불확실한 일을 다룰 때, 상당한 통찰력을 준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통찰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묶을 필요가 없어지겠지요.
저는 그들이 생각하는 각론의 차이는 변화라는 공통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 만큼 크지 않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3/04 23:22
야채/ 이건 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별도 포스팅으로 다루도록 하지요.
Commented by 야채 at 2008/03/05 13:05
감사합니다. 기대하겠습니다.
Commented by 섭동 at 2009/12/15 03:44
이 문제를 최적화라고 생각한다면


1. 보수적 변화는 Local Optimum에 빠져서 Global Optimum을 놓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유전자 알고리즘에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은 몇 세대마다 대규모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그 돌연변이에게도 기회를 주는 겁니다.

Genetic algorithm
http://en.wikipedia.org/wiki/Genetic_algorithm


2. 최적화 기준에 따라서 기존의 상태가 최적에 가깝거나 전혀 최적에 가깝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대차 액센트는 나름대로의 최적화 기준에 따라서 최적화가 잘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최적에 가깝거나) 하지만, 이런 최적화 기반을 에쿠스 개발에 쓸 수는 없습니다. 최적화 기준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9/12/15 16:34
http://sonnet.egloos.com/3994143 에 여기서 다룬 이야기의 뒷 이야기를 좀 적었습니다.

말씀하신 대규모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접근법은 결과를 얻는다는 목적에서는 쓸모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이 실패했을 때 피실험체가 문제가 됩니다.
예 를 들어 인류의 궁극적인 발전을 가속화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국가사회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실험해보자고 했을 때, 그 실험이 실패하게 되면 하나 이상의 사회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을 겁니다. 그럼 그 사회구성원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류의 '궁극적' 발전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니 니가 희생해라?
이런 생각을 정당화하려면 전체주의적이고 결과론적인 윤리관이 필요한데, 사실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은 관념이라는 건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 래서 소위 'long jump'를 실험한다는 접근법이 유효하려면, 전체 사회를 위험에 빠트리는 일 없이 작은 규모의 실험이 가능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사상의 자유라든가 기업 활동의 자유 등을 허용해 내부적으로 다원성을 포용한 사회의 장점은 그런 데서 찾을 수 있겠지요.
Commented by 섭동 at 2009/12/16 01:29
작은 실험을 자유롤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실패 비용이 낮아야지요. 말씀하신대로지요.
Commented by 응헑 at 2010/07/24 14:11
보수-진보 구도보다는 점진-급진 구도로 보는게 타당할것 같은데요?
제2인터내셔널 수정주의자들처럼 일거에 혁명으로 해결하는 대신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사회구성체를 교체하는 방식을 선호한 경우도 있으니...
혁명주의라고 해도 기계론자인 경우에는 환경이 무르익기를 기다렸다가 혁명의 적기를 포착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후에도 한번에 기존 사회구성체를 탈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니 '도약'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물론 이 경우 굳이 혁명이 필요하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볼셰비키의 경우도 내전과 20년대 중반 경제위기를 틈타 급진적인 조치를 단행한 것이지, 단순히 모험주의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지... 코민테른이 세계혁명에 목메고 있던 이유도 러시아의 객관적인 후진성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요?
객관적인 상황을 무시한 사례는 문화혁명 정도가 아닐런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7/24 14:23
글 서두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여기 사용된 보수의 개념은 바라다트의 설명(http://sonnet.egloos.com/3634097 )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는 보수가 왜 점진적인 진보의 강력한 옹호자인지를 간명하게 잘 보여줍니다. 역사적 사례로 따진다면 디즈레일리가 선거권 확대를 결정한 Reform Bill을 지지하여 통과시켰다든가 하는 것이 그 좋은 예가 되겠지요.
Commented by 응헑 at 2010/07/24 15:07
그렇군요. 잘 읽었습니다.
바라다트의 구분법에 따른다고 가정했을때...

여러 주제들에 대해서 어떤 부분에서는 진보이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보수일수도 있으므로 전적으로 진보이거나 또는 전적으로 보수인 경우만 있지 않다는 점,

보수가 점진적 진보를 옹호한다고 하는데, 현 시점에서 어느 방향이 진보인지, 현재로서는 진보를 옹호해야하는지 아직 현상을 고수해야 하는지 하는 판단의 문제에서 오류를 범할 경우 본의아니게 반동이 될 수도 있다는 점,

보수를 표방함으로서 발생하는 진보에 대한 기회비용과 진보를 표방했을 경우의 리스크 사이의 경중은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점

등이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로 남을 수 있겠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10/07/25 15:29
지적하신 것은 모두 일리있는, 생각해볼만한 논점입니다.

1) "여러 주제들에 대해서 어떤 부분에서는 진보이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보수일수도 있으므로 전적으로 진보이거나 또는 전적으로 보수인 경우만 있지 않다는 점"

바라다트도 그런 측면을 지적하고 저도 동의하는 점인데, 보수나 중도(온건) 진보 등은 불확실성이 상당한 미래를 앞에 두고 표출되는 어느 정도 '성향'의 문제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해 보수 혹은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무조건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같은 입장을 취할 확률이 단지 50%밖에 안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 "보수가 점진적 진보를 옹호한다고 하는데, 현 시점에서 어느 방향이 진보인지, 현재로서는 진보를 옹호해야하는지 아직 현상을 고수해야 하는지 하는 판단의 문제에서 오류를 범할 경우 본의아니게 반동이 될 수도 있다는 점"

이런 문제에 대한 보수의 주요한 대응전략은 "wait & see"지요. 에버렛 로저스의 혁신확산주기론(http://en.wikipedia.org/wiki/Everett_Rogers )이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그림에서 Early Adopter가 진보라면 Early Majority는 온건, Late Majority는 보수쯤 될 것입니다. 보수는 "wait & see"를 통해서 전기다수가 동참해 대세가 형성되는 것을 보고 나서 대세추종을 통해 천천히 진보에 동참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로저스의 혁신확산주기를 개선한 것으로 무어의 캐즘론(http://en.wikipedia.org/wiki/Crossing_the_Chasm )은 좀 더 흥미롭습니다. 무어에 따르면 Early Adopter에서 Early Majority로 넘어가기 전에 확산이 좌초되기 쉬운 위험구간인 chasm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보면 Early Majority나 Late Majority는 모두 이 chasm을 넘을 수 있는지를 일단 보고나서 그 후에나 결정을 하려는 태도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보수를 표방함으로서 발생하는 진보에 대한 기회비용과 진보를 표방했을 경우의 리스크 사이의 경중은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점"

이것은 변화에 대한 성향에 관계없이 평가가능한 만큼은 평가를 해야겠지요. 미래가 갖는 본질적인 불확실성과 우리가 가진 지식의 한계가 문제이긴 합니다만.
Commented by 응헑 at 2010/07/25 18:58
오, 바쁘실텐데도 링크까지 걸어서 성의있게 답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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