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이공계위기론에 대한 개인적 인상을 조금 소개했었는데, 그 중 무당의 비유가 몇 분의 관심을 끄는 것 같아서 조금 덧붙여 본다. 그것은 적성, 관심, 직업관, 소명의식 같은 것이 조금씩 합쳐져 있는 그런 것이고 내가 나를 돌이켜 볼 때 이외에도 사용된다.
그런 의미를 되새기는 차원에서 어느 유명한 비정규직종에 대한 내 인상을 정리해 보았다. 정치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정치를 <위해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식은 결코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그러나 대부분 실제로도 이 두 가지 방식을 동시에 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 그러나 정치를 <위해서> 산다는 것과 정치에 <의존해서> 산다는 것 사이의 상기한 구분은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문제가 가진 훨씬 더 실질적인 측면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경제적 측면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은 정치를 지속적 소득원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인데 반해, 정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유재산 제도의 지배 하에서 한 개인이 이러한 경제적 의미에서 정치를 <위해서> 살 수 있으려면 몇 가지의, 말하자면 매우 통속적인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는 -일상적 상황에서는- 정치가 그에게 가져다줄 수 있을 소득에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되어야 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는 부유하거나 아니면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개인적 생활여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일상적 상황에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 일상적 경제하에서는 독자적 재산만이 경제적 독립을 보장해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독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치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자는 이에 더하여 경제활동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하여, 그 스스로가 직접 지속적으로 자신의 노동력과 사고력을 전부 또는 상당부분 영리활동에 투여하지 않고도 자신의 수입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활동에 묶여있지 않은 가장 완벽한 경우는 금리 내지 지대 생활자입니다. 그는
완전히 불로소득 생활자입니다. …
한 국가나 정당이 (경제적 의미에서) 정치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치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된다 함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지도층이 <금권정치적>으로 충원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곧 그 역도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하여, 금권정치적으로 즉 자산가들에 의해 국가가 운영된다고 해서 이런 정치적 지배계층이 정치에 <의존해서> 살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들이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사적인 경제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았지요. 사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지배권을 경제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지 않은 지배계층은 지금껏 없었습니다. 따라서 금권정치에 대한 위의 명제가 의미하는 바는 이런 것이 아니라 단지 다음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즉, 금권 정치적 조건하에서의 직업 정치가는 자신의 정치활동에 대해 곧바로 경제적 보상을 추구할 필요가 없는 반면에 재산이 없는 정치가는 이런 보상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산이 없는 정치가는 오로지 또는 주로 정치를 통한 자신의 경제적 생계확보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 <대의>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또는 주된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 따라서 재산이 없는 정치가에 대한 위의 언급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만약 우리가 정치지망생, 지도층 및 그의 추종자들을 비금권 정치적 방식으로 충원하고자 한다면, 그것의 당연한 전제조건은 이
정치지망생들이 정치활동을 통해서 정기적이고 확실한 수입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명예직으로> 수행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정치는, 흔히 말하듯이,
<독립적인> 사람들, 즉 자산가, 특히 금리생활자에 의해 수행됩니다. 아니면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정치적 지도층으로의 길을 열어줄 경우, 이들은 보수를 받아야 합니다.
Weber, Max,
Politik als Beruf, 1919
(전성우 역, 『
직업으로서의 정치』, 나남출판, 2007, pp.38-42)
베버는
먹고 살기 위해 정치에 의존하는 직업정치가(von der Politik leben)와
정치를 위해 사는 직업정치가(fuer die Politik leben)를 구분해서 해설했는데, 이 문제는 가능한 폭넓은 사회 계층의 이익을 적절히 대표해야 한다는 현대민주정치의 원리와 얽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즉 베버에 따르면 정치에는 소명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만(인용되지 않은 부분에 길게 등장), 그렇다고 먹고사니즘을 너무 배제해버리면 가만있어도 먹고사는데 지장없는 실력자들만 정치를 하는 금권정치가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잡아야 할까?
일찌기 공자는 이런 문제에 대한 윤리기준을 제시하기를 「나도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고 하였다. 나는 사람이란 무의식적으로라도 팔이 안으로 굽기 마련이기 때문에, 남들의 행동은 내가 스스로 원하는 것 보다 한 두 단계 정도는 관대하게 보아 넘겨야 겨우 균형이 맞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본다.
즉 내가 평소 이 오래된 비정규직 종사자들에게 기대하는 것만큼은 나도 사회생활에서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개인적 기준이란 거다. 다만 그 기준은 피드백된다. 즉 내가 그들을 평가할 때 쓸 뿐 아니라 그들이 하는 걸 보고 내 처신도 거기 준해 조정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