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mahlerian씨에 대한 답변을 위해 자체트랙백
1.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이란 무엇인가우선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의 실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한 대책이 될 수 있을까? 앞으로 몇 세기 안에 하나의 국제어가 등장하고 다른 민족어들은 모두 소멸하리라는 전망, 실질적으로 국제어가 된 영어가 지금 누리는 거대한 망 경제, 영어를 잘 쓰지 못해서 우리 시민과 사회가 보는 엄청난 손해, 사람의 뇌에서 첫 언어를 배우는 부분과 차후 언어를 배우는 부분이 다르므로 국제어를 모국어로 갖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국제어를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쓸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한 사람의 모국어는 그가 태어날 때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결정된다는 사정 따위를 고려하면,
우리가 고를 수 있는 단 하나의 대책은 우리의 모국어인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를 우리말로 삼는 것이다. 다른 조치들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충분한 대책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인 결론이다. 아무리 영어가 중요하더라도 모국어를 버리다니!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사실들과 엄격한 논리는 한국어를 쓰는 한 우리는 국제어를 제대로 쓸 수 없고, 그래서 큰 핸디캡을 안고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국제어인 영어를 우리말로 삼는 일은 큰 투자와 긴 시간이 소요되는 사업이다. 언어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서 우리 삶을 규정한다. 따라서 그것을 바꾸는 것은 우리 삶을 뿌리부터 바꾸는 혁명이 될 것이고, 자연히 큰 비용과 혼란이 따를 것이다. 그리고 당장 영어를 우리말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시민은 모두 한국어를 모국어로 가졌으므로, 실제로 영어를 모국어로 가진 우리 후손들이 나타나는 데에는 적어도 세 세대는 걸릴 것이다. 게다가 영어를 우리말로 삼는 것에 거세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따라서 영어의 채택은 힘들고 더딘 사업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가장 현실적 방안은 영어를 우리말과 함께 공용어로 삼는 것이다. 이 방안은
국제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는 일의 첫단계이면서도, 한국어 습득에 큰 투자를 했고 한국어에 큰 애착을 지닌
우리 시민의 심리적 저항을 크게 받지 않을 것이다.
지금 ‘영어 공용화’라는 이름 아래 논의되는 방안은 바로 이것을 뜻한다.
복거일,
“소위 민족주의자들이여! 당신네 자식이 선택하게 하라”, 신동아, 2000년 3월
복거일은 "우리의 모국어인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를 우리말로 삼는 것"이 "우리가 고를 수 있는 단 하나의 대책"인데, "우리 시민의 심리적 저항을 크게 받지 않"기 위해 그 "첫단계"로서 우선 "영어를 우리말과 함께 공용어로 삼"자고 주장한다.
즉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은 전적으로
한국어 폐지, 영어전용화를 위한 전술적 행보에 불과한 셈이다.
이 분야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모리 아리노리나 복거일 같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궁극적으로 현재의 자국어 폐지를 목표로 한 캠페인을 추진한 사례가 적지 않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복거일을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거나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국어 폐지를 소리내어 주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금물이다. 그들은 내심을 숨기고 기만행위를 통해 반대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공작을 추진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2. 바바 타츠이와 복거일복거일의 영어공용화 논지는 제가 알기로는 바바의 논지와는 반대입니다. 엘리트와 대중 간의 괴리를 막기 위해서라도 영어교육을 더 강화하고 나아가 영어공용화까지 나아가자는 것이지요. (mahlerian)
mahlerian씨의 주장과는 달리, 사실 복거일에게는
영어전용화가 궁극적 목표이며 영어공용화는 전술적인 눈속임 내지는 영어전용화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함은 앞서 밝힌 바와 같다. 즉 영어전용화로 갈 수만 있다면, 복거일에게 있어 영어공용화 기간은 짧은 편이 오히려 좋은 것이다.
그런데 바바 타츠이와 복거일의 논지는 반대라고 할 수가 없다. 이 둘은 단순히 강조점이 달라서 결론이 달라진 것이다.
역사상, 어떤 민족이 타민족의 말을 쓰게 된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복민족이 강제로 쓰게 한 것이지 결코 타민족의 언어를 자진해서 채용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어떤 민족이 정복자의 강력한 힘에 못 견뎌 타민족의 말을 어쩔 수 없이 쓰게 되었다 해도 그 민족이 몇 백 년 소중하게 써 왔던 민족언어를 버린 경우는 결코 없었다」. 따라서 한 민족의 언어를 바꾸려는 모리의 시도는 실행불가능하다고 바바는 생각했다.
그러나 바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무리 민족어가 존속한다 할지라도 2언어병용체제는 반드시 비극적인 종말을 초래한다고 강조했다. 거기에는 언어장벽에 의한 사회 계급의 분열이 생기게 마련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국민 중의 유복한 계급은 빈곤한 계급이 끊임없이 얽매여야 할 노동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전자는 후자에 비해 언어학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만약, 국정을 비롯해 사회교류 전반에 영어가 사용된다면 하층 계급은 국민 전체에 관계되는 중요한 문제를 알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마치 고대 로마의 귀족이 jus sacrum(神法), Comita(民法) 등에서 평민을 배제했던 것과 같다. 그 결과 상층계급과 하층계급이 완전히 분리되어 양 계급 사이에 공감대가 없어지고 만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함께 행동할 수 없게 되고 통일된 행동에서 생길 이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것은 가공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바바는 이 같은 상황이 실제로 식민지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자기 자신의 언어로 보편적인 국민교육을 하지 않는 한, 이같은 폐해는 필연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연숙, 『「國語」以前의 日本語: 森有禮와 馬場辰猪論』, 일본학보 Vol24, No.0, 한국일본학회, 1990, pp.93-94
즉 바바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1) 한 민족의 언어를 통채로 바꾸려는 사회공학적 시도는 실행 불가능하다.
2) 2언어병용체제는 언어장벽에 의한 사회 계급의 분열이 생기게 마련이기에 비극적인 종말을 초래한다.
3) 그러니 자기 자신의 언어로 보편적인 국민교육을 하는 것 이외에 대안이 없다.
반면 복거일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영어가 현재의 국제어로서 지배적인 지위를 갖고 있기에 배워두면 매우 유리하다.
2) 한 사람이 두 번째 배우는 언어를 모국어처럼 잘 습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 그러니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전국민이 영어를 모국어로 갈아타야 한다.
심지어 복거일은
"언어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서 우리 삶을 규정한다. 따라서 그것을 바꾸는 것은 우리 삶을 뿌리부터 바꾸는 혁명이 될 것이고, 자연히 큰 비용과 혼란이 따를 것"이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복거일이나 바바 모두 모국어-영어 병용체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바는 그것이 현실적 장애가 많아 사회문제만 만들고 실패해 버릴 것이라고 보는 반면, 복거일은 그것이 영어를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없는 반쪽짜리 대안이기에 빨리 지나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바바가 현실론이라면 복거일은 당위론이지만 모두 최종적 결과물로서
영어공용화는 반대한 것이다.
3. 진보에 대한 신념: 변화를 설파하는 선지자들우리는 무슨 실시간 번역이라는 수단을 취하려고 해도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수요층이 넓지 못해서 번역이라는 또다른 비용까지 들이면 양서들이 잘 출판이 안됩니다(일본은 언어든 뭐든 독자표준 기술을 만들어도 될 정도 한국은 언제나 일본이건 영미건 유럽이건 따라가야 함). 더구나 시대가 바뀐 것까지 고려해야지요. 지식경제시대, 프로슈머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지는 마당에 영어가 정말 일부 위정자만 알면 충분한 시대인지 생각해볼 일. (mahlerian)
이 주장의 핵심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우리도 그에 맞춰 과거와는 다르게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이것이
근대화라는 구호로 상징되었고, 이제는
세계화라는 구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모리 아리노리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모리아리노리는 「일본은 상업민족이다(Japan is a commercial nation)」는 것, 「우리가 급속히 확대하고 있는 세계 전체와의 교류」를 생각하며, 일본어가 「일본열도 밖에서 결코 통하지 않는 빈약한 언어」이고, 「커뮤니케이션으로서도 취약하고 불확실한 매체」임이 일본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조건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영어하는 종족의 상업력(the commercial power of the English speaking race)」를 스스로 획득하는 것만이 「상업민족」인 「일본의 독립유지의 필수조건」이라고 모리는 거듭 강조했다.
이연숙, 같은 글, p.86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지 않은가?
돌이켜 보건대 근대화는 아주 중요하고 우리가 반드시 이뤄내야만 했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목표를 위한 열정이 지나치면 변화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내지는 신앙으로 변질되기도 쉬운 법이다.
예를 들어 복거일이 주장하듯이 한국사회가
한국어폐지 영어전용을 강행하는 것이 세계화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선택인지는 입증하기 매우 힘든, 논쟁적인 주제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지금의 세계화보다도 더 절박한, 먹느냐 먹히느냐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도 (비서구권) 근대화의 모범사례였던
일본이 이를 포기하였음을 살펴본 바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빠른 변화를 선전하고 촉구하는 선지자들은 근본적으로
진보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가 발전/진보하지 않고 퇴보할 것이라고 예측한다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변화, 그것도 빠르고 급격한 변화를 촉구할 수 있겠는가?
4. 세계화와 영어교육: 진보는 어디에?1988년 처음 PC통신을 시작했을 때, 필자는 1200bps 모뎀을 이용하여야 했다. 20년이 지난 현재는 100Mbps 이더넷 접속을 이용하고 있으니 통신용량은 10만 배가 된 셈이다. 램은 3천2백 배(640KB→2GB), HDD는 7만5천 배(20MB→1.5TB)로 증가하였고 컴퓨터의 속도 또한 엄격하게 측정하긴 어려우나 이에 준하는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다. 인텔의 창업자 고든 무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 경험법칙은 전자업계에서 집적회로의 트랜지스터 수가 2년마다 대략 2배로 증가하는 경향을 예측하였다. 이에 따르면 30년 동안 IC의 집적도는 약 3만2천 배 정도 증가한 셈이 된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힘이야말로 세계화의 주요한 추동력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세계는 날로 좁아지고 있다. 메이플라워호가 대서양을 건너는 데는 3개월, 1924년 찰스 린드버그가 비행기로 횡단하는 데는 24시간이 걸렸다. 그 거리조차 지금의 콩코드로는 3시간, 탄도미사일은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1990년의 대서양 횡단비용은 1950년의 3분의 1에 불과하며, 뉴욕과 런던 간의 통화비용은 20세기 중반 같은 거리의 통화비용과 비교하면 6%대로 떨어졌다. 전지구적 인터넷 통신은 거의 동시적이고, 그 전송비용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아시아에 있는 환경운동가 또는 아프리카에 있는 인권운동가는 지금, 한때 정부나 초국가적 기업들 같은 거대한 조직만이 누릴 수 있었던 커뮤니케이션의 귄력을 가진다.
Nye, Joseph S.,
Understanding International Conflicts: An Introduction to Theory and History, 3rd Ed., Longman, 2000
(양준희 역, 『
국제분쟁의 이해: 이론과 역사』, 서울:한울 아카데미, 2001, p.15)
이와 같은 급속한 발전은 근대의 시작 이래 각 산업부문에서 차례차례 일어났다. 섬유와 직물산업, 석탄/석유와 같은 에너지, 철강생산량, 철도와 선박의 수송량, 가정에 대한 전기와 전화, 자동차의 보급 등등 그러한 변화들의 사례는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생산력의 폭증이 발생한 현상을 우리는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진보에 대한 신념은 이러한 산업혁명 이후의 빠르고 지속적인 기술과 생산력 발전을 경험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몇만 년에 달하는 인류 역사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야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다. 근대 이전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 사회는 지속적이고 확실히 발전하게 된다는 진보사관은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진보사관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리스 신화의 황금시대나 중국의 요순시대처럼 과거가 더 좋았다거나 미래 어느 순간에는 심판의 날이 온다는 식, 또는 정치체제가 돌고 돌것이라는 순환사관, 혹은 인간세상은 별다른 변화가 없이 계속된다는 것 같은 사고방식이 판을 쳤던 것이다.
자 그건 그렇고, 세계화 시대이기 때문에, 정보통신이나 항공운송 등의 비약적 발전을 통해 외국과의 접촉이 빈번해졌기에 사회구성원의 전반적인 영어구사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 보자.
좋다. 그러한
수요가 늘어났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다. 그럼
공급측면은 어떠한가?우리는 1988년에도 중고등학교 과정 6년 동안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2008년 현재 우리 교육과정은 연간 같은 수업시간을 이수하고 평균적으로 동등한 학력을 가진 졸업생을 중학 3년에 배출할 수 있게 되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20년에 2배 발전한 것으로 간주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이러한 진보는 지속가능한가? 예를 들어 2028년엔 18개월만에 그런 학력을 갖추게 할 수 있는가? 그럼 2048년엔 9개월?
1세대가 약 25~30년인 인간이 유전적 진화를 통해 2년에 2배씩 발전하는 전자/정보통신기술을 따라잡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학습법이나 교수법의 발전 또한 발전이 미미하거나 느려서 큰 기대를 걸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사실 우리가 객관적으로 교육환경의 개선과 발전이라고 생각해 온 것들은 실제로는 교육기술의 퇴보나 적어도 정체를 의미하고 있는 것일 공산이 크다.
대표적인 것이 학급 당 인원수의 축소이다. 콩나물 교실의 해소는 모든 사람이 바람직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더 많은 교사를 동원해 더 적은 학생을 가르치게 된 것이 기술의 발전인가? 그럼 더 많은 직공을 동원해 더 적은 수의 자동차를 조립하면 그것도 기술의 발전이란 말인가?
학급 당 인원수의 지속적인 감축은 교육기술의 발전이 미미하기 짝이 없는 상태에서 교육의 질을 개선하라는 압력을 강하게 받다 보니, 노동 투입을 늘려 해결한다는 식의 고육지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1)학습하는 인간의 능력, 2)인간에게 어떤 내용을 가르치는 교육기술 양 측면에서 우리는 거의 전혀 진보를 이루고 있지 못하다. 공급능력이 사실상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진보는 무조건 가능하고 또 달성해야만 한다는 선지자적 신념을 품은 채 영어(혹은 다른 어떤 과목이라도)의 필요성(수요)이 늘었으니 거기 맞추어 영어교육의 질과 양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내야만 한다라고 막무가내로 주장하면 무척 난감하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영어학습강화나 영어공용화를 원하는 사람이
먼저 찾아내야 하는 것은
현재보다 월등히 학습효율이 높은 초학습법 내지는 잘 때 끼고 자면
몇 주 만에 영어를 술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수면학습기 같은 SF적인 발명품이다. 그런 초기술을 값싸게 대량생산할 수 있다면 부자든 가난뱅이든 평등하게 순식간에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을 테니 바바 타츠이가 걱정한 것 같은 사회계급의 분열같은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게 된다. 따라서 그 기술이 가져올 사회적 파급력 만큼 진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자, 다들 뭐하나? 어서 성배를 찾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