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리 아리노리 대 이토 히로부미1887년 6월, 일본은 메이지 천황의 참석 하에 추밀원에서 제국헌법초안(帝國憲法草案) 심의를 갖고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게 되는데, 이 때
모리 아리노리(森 有禮, 1847~89)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 기묘한 논전이 벌어진다.
[헌법] 제2장의 「신민의 권리의무」 항목의 심의에 들어갔을 때, 모리 아리노리는 갑자기 원안(原案)에 대해 중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귄리의무라는 말을 헌법에 기재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신민이라는 것은 ‘서브젝트’(subject)이며, 따라서 신민은 천황에 대해서는 ‘분한’(分限)과 ‘책임’을 가질 뿐이며 권리는 아니다. 때문에 그것을 모두 ‘신민의 분수(分際)’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토는 즉시 모리를 반박하여 이렇게 말했다.
“모리 씨의 주장은 헌법학 및 국법학에 퇴거(退去)를 명한 학설이라 해야 할 것이다.
무릇 헌법을 창설하는 정신은 첫째로 군주의 권리를 제한하고, 둘째로 신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있다. 때문에 만약 헌법에서 신민의 권리(權理)를 열거해 놓지 않고 그저 책임만을 기재하게 되면, 헌법을 마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민에게는 무한한 책임만 있고 군주에게는 무한한 권리만 있는 나라, 이를 가리켜 군주전제국이라 한다. ……모름지기 헌법에서 권리의무를 제외하게 될 때, 헌법은 인민의 보호자일 수 없게 된다.”
丸山眞男, 『
日本の思想』, 岩波書店, 1961
(김석근 역, 『
일본의 사상』, 한길사, 1998, p.97)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무려 헌법을 만들면서 모리 아리노리와 같이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다 있을까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헌법은 영국의 마그나카르타처럼 의회가 국왕을 굴복시킨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자유민권운동을 탄압하면서 전제군주인 천황과 주요 대신들이 모여앉아 어전회의를 펼쳐놓고 뚝딱뚝딱해서 만든 것인 만큼 그 내용이 왕권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 되기 쉬움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천황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무엇을 믿고 "군주의 권리를 제한하고 신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헌법이라며 당당한 ‘진보주의자’처럼 굴었는지가 더 관심을 끈다. 도대체 이토는 왜 그랬을까?
이 의문의 답은 이날의 헌법초안 심의 벽두에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피력한 헌법 제정의 근본정신에 대한 소신에서 찾을 수 있다.
헌법정치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일찍이 역사에 증거 삼을만한 것이 없어서, 그것을 우리 일본에 시행하는 것은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실시한 후 그 결과가 국가를 위해서 유익한 것이 될지, 아니면 반대가 될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20년 전에 이미 봉건정치를 폐하고 각국과 외교관계를 연 이상은, 그 결과로서 국가의 진보를 도모하는 데 이를 버리고는 달리 헤쳐나갈 좋은 길이 없음을 어찌하겠습니까. …… 유럽에서는 금세기에 들어 헌법정치를 시행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곧 역사상의 연혁에 따라 성립된 것이며, 그 싹은 멀리 오랜 옛날에 트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와는 달리 우리 일본의 사정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속합니다. 때문에 이번에 헌법이 제정됨에 이르러서는 먼저 일본의 기축(基軸)을 찾아서, 일본의 기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축 없이 정치를 인민의 함부로 하는 논의에 맡겨둘 때 정치는 그 통기(統紀)를 잃어버리게 되고, 국가 역시 폐망(廢亡)하게 됩니다.
丸山眞男, 같은 책, pp,83-84
즉
헌법이 좋은지 나쁜지는 모른다. 하지만 유럽 국가는 다들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도 반드시 헌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헌법제정의 이유이다.그리고 서양의 헌법이란 것은 "첫째 군주의 권리를 제한하고, 둘째로 신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라고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독을 먹을바에야 접시까지」(毒を食らわば皿まで)란 자세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철저함이야말로 일본이 비서구권으로는 유일하게 근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동 시기의 중국이 중국의 전통적 유교도덕을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기술과 그 성과를 선별적으로 덧붙이겠다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에 입각한 근대화를 추진하였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중국에서도 입헌운동이 여러 차례 전개되었지만, 결국 청조는 멸망할 때까지도 입헌군주제로 이행하지 못하였다. 즉 "무력이 강한 것이야 어차피 오랑캐니까"라는 정도의 안이한 생각으로는 왕권을 제약하는 헌법이라는 쓰디쓴 독약을 삼킬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의 그런 약간 엉뚱한 접근법이 서구와 완전히 동등한 결과물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일본에서 기축으로 삼아야 할 것은 오로지 황실(皇室)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헌법초안에서는 오로지 뜻을 그 점에 모아 군주의 권한을 존중하여 가능한 한 그것을 속박하지 않는데 힘썼습니다. …… 다시 말해서 이 초안에서는 군주의 권한을 기축으로 하고, 한결같이 그것을 훼손시키지 않을 것을 기약했으며, 감히 저 유럽의 주권분할의 정신에 의거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유럽 몇 나라의 제도에서 군주의 권한과 백성들의 권한을 같이 존중하는 것과는 그 취지를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丸山眞男, 같은 책, pp,85-86
2. 모리 아리노리 대 바바 다쓰이그러나 헌법을 만들어 천황의 대권에 스스로 올가미를 거는 모험도 서슴지 않았던 일본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이번 사건에서도 앞서 헌법 제정 논쟁에서 보았던 일본 근대 교육의 아버지 모리 아리노리가 총대를 메고 등장한다.
가토: 그런데 메이지 시기의
일본에서는 왜 번역주의를 택했던 걸까요?
마루야마: 잘 아시다시피 자유민권운동의 투사인 바바 다쓰이(馬場辰猪, 1850~1888)는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는 영문으로 된 『기초 일본어 문법』(Elementary Grammar of the Japanese Language, with Easy Progressive Exercises)이라는 책을 펴냅니다. ……
가토: 1873년(메이지 6)이지요.
……
마루야마: 예, 1888년(메이지 21)에는 증보판도 나오는데, 이 판에서는 서문이 약간 바뀌어 있습니다. 원래의 서문은, 지금 가토 씨가 말한 ‘왜 번역주의인가’에 대해서 답하고 있지요. 사실 이 글은 모리 아리노리(森 有禮)에 대한 반박입니다.
모리는 모리대로 『일본의 교육』(Education in Japan)이라는 유명한 책을 출간했습니다. Series of Letters, 곧 그의 서간문 시리즈인데, 뉴욕 애플턴(D. Appleton) 출판사에서 1873년 1월에 나왔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모리는 ‘영어를 국어로 삼자’고 하는 유명한 주장을 폈지요. 야마토 말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야마토 말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차라리 영어를 국어로 채용하자는 주장이지요. 거기에 대한 반박이 이 바바의 서문인 겁니다. 이 글은 무척 재미있습니다.
만일 일본에서 영어를 채용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다라는 의견을 바바는 개진합니다.
가토: 그거 대단하군요. 지금도 인도가 안고 있는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계급간의 깊은 골이지요. 그 첫 번째 요인은 경제적 격차이고, 두 번째 요인이 언어입니다.
마루야마: 굉장하지요. 바바는 인도의 예를 적확하게 증거로 삼아서 상층이든 하층이든 국민은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가토: 인도에서는 어떤 지역에도 통하고 어떤 계급에도 통하는 언어가 없었죠. 정치가가 전국 유세를 할 때 영어로 말하면 지역 차를 넘어서 어디든지 통하지만, 그것은 상층계급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특정지역의 언어로 말하면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계급을 초월해서 누구든 알아듣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였지요. 조건이 다른 일본에서 굳이 영어를 도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는 거지요.
마루야마: 모리처럼 영어를 국어로 삼자고 하는 주장도, 지금 가토씨가 말한 것과 같은 시대였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습니다. 바바는
언어가 달라져버리면 하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을뿐더러, 하층계급의 대다수가 국사(國事)라는 중대문제로부터 배제당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지요.
결국 영어를 제것으로 만들기란 어려운 일이니까요. 일반대중과 엘리트의 언어 두 개가 생겨나고, 중요한 일을 모두 영어로 처리하게 되면 영어를 쓰는 엘리트만이 국사를 담당하게 되고 만다, 결국 대중은 국사로부터 소외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내용의 긴 서문을 쓴 거지요.
가토: 사회를 상하의 계급적 구조로 보는 것, 그 계급을 각자의 문화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 - 그건 당시에 그 누구도 명료하게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통찰입니다.
마루야마: 그런데
영어채용론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론 문제 밖이기 때문에 1888년판 서문에서는 그 구절을 삭제해 버립니다. 결국 모리에 대한 반박이었으니까 말이죠. 메이지 6년 단계에서는 아직 어찌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혼돈상태에 있을 때니까요. 그렇지만
메이지 21년이 되면 이제 영어를 국어로 하자는 식의 주장은 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삭제해 버렸던 거죠.
丸山眞男, 加藤周一, 『
翻訳と日本の近代』, 岩波書店, 1998
(임성모 역, 『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pp.49-52)
여기서
야마토 말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차라리 영어를 국어로 채용하자는 모리의 주장은 이토가 말했던 헌법이 필요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즉 이들을 몰아붙인 주요한 동기는 근대화에 대한 절박함이었던 것이다.
바바 다쓰이는 이에 대해 이런 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엘리트와 대중의 언어가 괴리되면서
대중이 교육, 정치, 사회 전반에서 배제, 소외되고 말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와 엘리트층, 혹은 조선에서 한문과 양반사대부들의 관계와 흡사한 것이며,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시사점을 갖는다.
어찌 되었든, 이번만큼은 그 지독하다던 일본도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영어공용화는 도저히 일본의 능력으로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바바의 지적도 통렬한 것이었지만, 이 제안은 그것이 아니더라도 현실의 높은 장벽 앞에서 빠르게 사그라져 갔다.
일본이 영어공용화 대신 (이라기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한 길은 바로 번역이었다. 그 후 130여 년에 걸쳐 일본은 성공적인 근대화를 거쳐 비서구권에서 서구 강대국들과 어께를 나란히 하는 유일한 비서구권 선진국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