От Ильича до Ильича
by sonnet 2006 이글루스 TOP 100 2007 이글루스 TOP 100 2008 이글루스 TOP 100 2009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 100 2011 이글루스 TOP 100
rss

skin by 이글루스
교양 논쟁에 대한 몇 가지 문제
약 2주쯤 전에 이글루스 내에서 교양 개념에 얽힌 논쟁이 있었는데,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참고적으로 당시 토론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1. 교양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이 글에 "XX에 대한 몇 가지 문제"란 노교수들이나 쓰실 법한 제목을 붙인 이유는 그러한 고리타분함이 오늘날 자연도태의 과정을 거쳐 착실히 멸종의 길을 걷고 있는 교양이란 개념의 본성을 잘 살려주기 때문이다. 그에 걸맞게 "XX는 무엇인가" 같은 정의나 개념부터 시작하는 고루한 방법을 택해 보기로 하자.

이녁님께서 이해하고 계신 '교양' 개념은 실제 '교양'이란 개념을 구성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양'은 영어로 'culture'이며 중고등학교 때 한번쯤은 <'교양'의 어근이 '경작'의 어근과 같으며 이것은 '교양'이 기본적으로 '인간 정신과 삶을 가꾸어나가 자기완성의 경지에 이르도록 한다'는 점에서 경작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교양'의 뿌리어인 독일어 Bildung은 지적인 맥락이 좀 더 강조되어 있을 뿐 근본적으로 '자기완성의 과정'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다른 언어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녁님 말씀대로 일상생활에서부터 전문적인 학술서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맥락에서 쓰이는 '교양'이란 언어들 속에서 공통된 관념요소들을 뽑아내어 종합-이것이 '개념'의 개념입니다-해보면 '교양'이란 <대상을 곱씹어 자기맥락화한 뒤 그것을 보편화시켜 자신의 세계관으로서 제시하고 그것에 삶을 일치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개념의 방점은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과정>에 찍혀있으며 '지식과 특정한 지적능력의 축적'은 그것을 위한 첫단계, 극히 일부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이녁님이 이해하고 계신 물화된 '교양' 개념은 한국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교양' 개념과 일치합니다.

샤피로, <교양있는 대학생의 환상>에 대한 반론

여기서는 교양이 독일의 Bildung 개념의 번역어로서 출발하였음을 지적하면서 교양의 본질은 일종의 지행합일을 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딱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며 사실 교양이란 개념에 내포된 어떤 한 측면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용성을 갖는다. 하지만 이는 모든 선언적 정의가 갖는 약점을 그대로 안고 있다. 그 약점은 다음과 같은 예를 떠올려 보면 분명해진다.

어떤 종교에 대해 독실한 믿음과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것으로 정평이 난 저명한 인물이 자기 종교의 경전을 가리켜 『이 세상에 유일한 참 진리를 담은 경건한 책』이라고 규정했다고 하자. 또한 그 종교나 경전에 대해 그만큼 정통한 인물은 없는게 확실하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말이 옳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한다 하자. 그가 제시한 정의에서 출발해서 우리가 그 경전이나 그 종교에 대해 궁금해하던 여러가지 측면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까?

적어도 여기서 샤피로씨가 제시한 정의는 믿음의 선언에 가깝지 스스로가 언급한 것 같이 "다양한 맥락에서 쓰이는 '교양'이란 언어들 속에서 공통된 관념요소들을 뽑아내어 종합"한 것, 즉 귀납적 실체는 아니다.

신앙선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교양의 핵심 특징에는 동질성을 향휴한 특수집단 -교양인 공동체- 의 이유없는 믿음에 의해 뒷받침되는 부분이 제법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이미 교양인이 된 사람에게는 자명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오직 다양한 사례수집을 통해 귀납적으로만 밝힐 수 있을 뿐이다.

샤피로씨가 남긴 한 코멘트를 볼 것 같으면 "교양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정리되어 서술된 책을 추천"하면서 제일 먼저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조금 인용해 교양의 특징을 살펴 보기로 하자.

반 고흐가 화가로서 왜 유명한 고전작가의 대열에 끼는지, 또 프리츠 폰 우데Friz von Uhde의 작품 『감자 까는 여자』가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못지않은 강렬한 표현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전문가들에만 알려져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교양인들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고흐는 알고 우데는 몰라도 된다는 사실은 상식적인 통념의 한 부분이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이제 또 하나의 차원이 열린다.
교양은 신앙의 공동체다.
교양의 신앙고백문은 대충 아래와 같다.
「저는 셰익스피어와 괴테 그리고 클래식 작품들을 믿사오니, 이것들은 하늘과 땅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빈센트 반 고흐가 신의 부름을 받은 초상화가임을 믿습니다. 이 사람은 브레다 근처의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출생했으며 파리와 아를에서 성장했고 고갱과 친하게 지내다가 결별했으며 고통스러운 나머지 광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살을 시도했고 하늘에 올라 신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며 거기로부터 미술 전문가와 어설픈 딜레탕트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저는 문화의 힘을 믿사오며 천재들이 영원히 사는 것과 예술의 거룩한 성전과 교양인들이 교통하는 것과 인문주의의 영속하는 가치들을 믿습니다. 영원의 이름으로 아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앙공동체이므로, 역시 권위 있는 정전(正典, Kanon)들이 있게 마련이다. 정전이라는 단어는 본래 그리스어로 ‘등나무 회초리’라는 뜻이었으며 ‘규칙’을 의미했다(그 당시에 사람들은 자식을 회초리로 때려가며 주입식으로 교육했다). 그 후로 그 단어는 신의 직접적인 계시로 여겼던 기록들을 의미했고 이것들이 수집되어 성서가 생겼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양종교에도 누구나 읽어야 하는 필독 경전들이 있다.
물론 오늘날 정전으로 통하는 것은 교황이나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확정된 것이 아니며 역사가 진행하는 동안 서서히 정착된 것으로 이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람들은 거기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그 흐름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 교양지식은 유구한 역사의 축적 결과이며 세간에 통용되는 상식의 거대한 빙하가 흘러간 뒤에 남은 퇴적물이다. 이 상식과 그 퇴적물인 신앙고백문의 내용을 우리가 의심하지 않을 때만, 정전은 공동체의 형성력을 갖는다.
바로 이 점이 사람들을 교양 클럽의 회원과 비회원으로 나눈다. 그 경계가 분명해야만이 회원의 프로필이 부각될 수 있고, 그래야만 회원들은 자신의 소속감과 이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회원들에게는 회원이 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Schwanitz, Dietrich., Bildung: Alles, was man wissen muß, 1999
(인성기 역,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들녘, 2001, pp.571-572)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책은 교양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사색이나 이론을 담은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일종의 실용서로 교양인 커뮤니티에 들어가고 싶거나 적어도 교양인들처럼 노는 법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 (기성) 교양인들 앞에서 몰상식한 사람으로 망신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기본지식, 화법, 금기사항 들을 정리한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교양인 공동체의 기묘한 행태를 다루는 귀납적 사례수집을 위한 자료집으로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

그럼 이 책은 교양을 어떤 것이라고 설명하는가?

이 규칙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탐구해야 할 것은 “교양이란 과연 무엇인가?”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답변이 있을 수 있다.
그 중에 몇 가지 답변을 제시해보도록 한다.
교양은 자신의 문명화에 대한 아주 폭넓은 지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가 사람이라면, 그 이름은 교양이 될 것이다.
교양은 새로운 인문주의적 교육 개혁안의 이상이었으며, 과거에, 특히 독일의 시민계급이 그것을 대변했다.
물론 앵글로색슨족의 정치적 인문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이 교양 개념은 인간의 내면성을 강조함으로써 나치즘에 대해 속수무책이었고, 그 결과, 특히 60년대에 학생운동권에 의해 배척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양은 우리 문화사의 기본적인 특징들, 예컨대 철학과 학문의 기본 구상,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의 대표작들에 대해서 통달하는 것이다.
교양은 유연하게 훈련된 정신의 상태이며, 모든 것을 한번 알았다가 다시 잊었을 때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어저께 무엇을 먹었는지 잊어버리듯이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를 곧 잊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정신과 내 육체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리히텐베르크)
교양은 문화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어색하게 남의 눈에 튀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교양은 직업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전문가의 양성과는 반대보편적인 인격 형성을 핵심이념으로 한다.
그리고 여기서 독일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의 정의를 보면, “교양이란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인 인간이 세계, 특히 문화의 내용과 접하고 대결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됨의 완전한 실현, 즉 ‘인간성’에 도달하는 모든 정신적인 과정과 성과이다.” 그 뒤를 이어 ‘교양 장애’, ‘교양 격차’, ‘교양 마스터 플랜’, ‘교양 위기’, ‘교양 정책’ 그리고 ‘교양 휴가’라는 표제어 항목들이 설명되고 있다.
1973년에 발행된 라이프치히의 VEB 출판사 백과사전의 동의어 사전은 ‘교양’이라는 표제어 아래 “문화, 많은 독서량 그리고 매너”라는 개념을 언급하고 있다.
교양은 영어로는 ‘리버럴 에듀케이션liberal education’이다. “교양이 있다”는 말은 “교육을 잘 받은, 예절 바른, 문화적인”이라는 뜻이다. 프랑스어에서도 교양은 “다방면으로 교육받은 상태culture generale”를 뜻한다. 교양의 빈틈은 곧바로 ‘무지’ 또는 ‘지적인 공백’을 뜻하게 된다. 라틴어로 교양은 “감성과 정보를 갖춘 오성mentis animique informatio”이다. 그리스어로 교양은 역시 ‘교양paideia’, 러시아어로 교양은 ‘교양obrasowanije’이다.
따라서 교양은 복합적인 대상이다. 그것은 이념, 과정, 지식과 능력의 총합 그리고 정신적 상태다.
이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살펴보자. 이때 우선 확인되는 것은 교양이 이념, 과정, 상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게임이라는 점이다. 이 게임의 목적은 간단하다. 그것은 교육받았다는 인상을 풍기기 위한 것이다. 그 반대가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게임에는 규칙이 있다. 젖먹던 시절부터 교양 게임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나중에 그 규칙을 배우려면 매우 힘들다. 왜 그럴까? 그 규칙을 배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미 그 규칙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양 클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게임에 대해 이미 통달해 있어야 하며, 그 게임 방법은 그 클럽 안에서만 배울 수 있다.

Schwanitz, Dietrich., 같은 책, pp.566-568

요약하면 이렇다.
보편적 인격 형성을 위한 기본 학문, 즉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의 대표작들에 대해서 통달하여, 문화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할 때 어색하게 남의 눈에 튀는 일 없이, 잘 교육받았다는 인상을 풍기는 사회적 게임을 노련하게 운영하되, 그렇다고 해서 먹고사는데 써먹는 [예를 들어 이공계나 재테크 지식 같은] 전문가적 지식을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전형적인 엘리트-유한계급의 자기정체성 확립을 위한 고급사교술이다. 우리의 전통사회에 견주자면 선비들끼리 모여서는 학문과 시에 대해서 논해야지, 농사일이나 노름에 대해서 말해서는 체통이 서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미묘한 숨은 규칙들이 많아 젖먹던 시절부터 교양 게임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뒤늦게 그 규칙을 배우려면 엄청나게 힘들다는 진입장벽까지 있다. (My Fair Lady에서 여주인공이 겪는 특훈 과정을 생각해 보라. 그나마 기연을 만나 고수의 무공을 전수받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더라면 여주인공은 그 장벽을 자력으로는 결코 넘지 못했을 것이다.)

교양에는 분명히 훌륭한 인격 형성을 향해 나아가는 지행합일이라는 목표이자 대의명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강조하면 전체상을 크게 왜곡하게 된다. 명분은 명분이고 실제는 실제니까 말이다.

이런 측면을 잘 지적한 것이 다음 질문이라 하겠다.

누군가에게 '왜 이렇게 교양이 없니?'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상대방을 노골적으로, 인격적으로 비난하고 질이 낮은 사람으로 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교양이라는 것이 정의상(?) 대졸자(고학력자)와 부르주아를 기준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교양없음을 탓하는 행위'는 기실 부르주아가 하위계급에게, 또는 좋은 교육을 받은 뼈대있는 가문의 부르주아가 졸부들에게 행할 수 있는 특권적 행위이다.
……
교양이 잡학적 지식이거나 약간 양보해 최소한의 지식이 바탕된 채 유기적이고 삶과 일치된 세계관을 갖는 것이라고 해보자.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화용론적인 딜레마를 느끼게 한다. 이마트 파업 노동자들은 과연 교양이 있을까? 없을까? 아마 정치적으로 좌파이거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수록 쉽게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동네 청소노동자 아저씨는? 학교의 경비노동자 아저씨는? 냉정한 사람이라면 '그들은 교양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겠지만 노동자들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일 수록 그런 식의 발언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알기 떄문에 함부로 내 뱉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세상, 이마트 파업 노동자들은 교양이 있을까? 없을까? - 의식화와 교양


그러나 이런 행동은 사실 교양계층이 별로 할 것 같지 않은 행동이다.

일상의 사교적인 모임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상대방에게 자신이 교양이 있다고 꾸며 보인다. 그리고 상대방은 그것이 꾸민 것이라고 가정한다. …… 사람들은 보편적인 품격을 항상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예컨대 저녁의 한 사교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면 아주 어색할 것이다.
“세브레히트 박사님, 말씀 좀 해보십시오. 당신은 강도짓을 한 적이 없습니까? 정말 없습니까? 강간도 안 해 보셨습니까?”
이처럼 교양인 클럽에서는 화제로 올려서는 안 되는 금기가 있다.

Schwanitz, Dietrich., 같은 책, p.568

즉 누군가를 적시해 "교양이 없다"고 정면으로 밟는 특권을 행사하는 것은 그 자체가 동료들 앞에서 자신이 교양인이 아니라고 폭로하는 셈이 된다. 그들은 서로 눈빛만 교환하고 대충 알 만 하다는 표정 정도를 짓고 넘어갈 테고, 심해지면 은근한 풍자의 소재가 되거나 시쳇말로 '은따'시킬 수도 있겠지만 정면으로 적시하고 나서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마트 파업 노동자들은 교양이 있을까? 없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교양인은 당연히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대답을 "함부로 내 뱉을 수 없을 것"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정치적으로 좌파이거나 마음이 따뜻한" 또는 "그런 식의 발언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알기 때문"같이 남을 배려함에서 나온 동기일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을 가져야 마땅하다.


이 다음에 생각해 볼 문제는 무엇은 교양에 속하고 무엇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다음 주장은 거의 모든 지식은 교양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엄마친구 아들'이 아니고서는 다 수비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요즘 대학생들은 교양이 부족한가? 무슨 교양? 교양이라는 말만큼 어정쩡한 말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대학생들이 한문을 잘 못 읽는다고 한탄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역사를 모른다고 한탄하고, 어떤 사람들은 기초적인 과학개념이 없다고 한탄한다. 그뿐이랴, 대학생이라면 베토벤의 클래식 정도는 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고흐의 해바라기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슬프게도 문과바보인 나는 과학이나 기술 등에 대해서 무지하다. 고백하건데 컴퓨터도 잘 못 다루고, 음악이나 미술에도 별로 조예가 깊지 못하다. 반면 전형적인 공대생인 내 친구 K군은 역사나 철학, 문학 등에 대해서 무지하다. 한문도 더 잘 못 읽는다. 하지만 나보다 과학이나 기술에 대해서는 훨씬 박식하며, 피아노에 취미가 있어서 고전 음악에 있어서 나보다 조예가 깊다. 과연 나와 K군중 누가 더 교양이 부족하며 무지한 대학생일까?

한마디로 '교양있는 대학생' 은 환상이다. 사람들의 평가를 모아보면 현재의 '교양있는 대학생' 은 대략 이렇다. 한달의 5권 정도의 책, 그것도 전공도서나 자기계발서가 아닌 책들을 읽어줘야 하고, 영어나 한문은 기본적으로 술술 읽으며 역사와 철학 문학에 박식하고, 현대 과학에 대해서도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컴퓨터도 다룰 줄 안다. 거기에 예술에도 조예가 깊다. - 이건 완전 '엄마친구 아들' 수준이다. 장담컨데 이런 대학생은 이 세상이 없다.

이녁, 교양있는 대학생의 환상


앞서 교양은 "신앙공동체이므로로, 역시 권위 있는 정전(正典, Kanon)이 있다"고 하였다. 만약 대부분의 지식이 교양에 속할 수 있다면 정전과 정전이 아닌 것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것이 교양적인 대화에서 수많은 약어(略語)들이 쓰이는 이유다. 이는 모든 패거리 집단이 언어를 개발해서 사용하는 인지 시그널이며, 그 코드를 모르는 외부인은 그 뜻을 알 수 없게 됨으로 내부와 외부 사람을 구분하는 목적에 이용된다. 교양언어에서는 이 목적을 위해 인용문(引用文)들이 쓰인다.
과거 독일에는 이 목적을 위해 고전에서 발췌한 가보(家寶) 문구들이 있었다. 가부장적인 순박한 가정에서 잔치가 열리면 집안의 어른은 “집안일은 정숙한 마나님께서 다스리신다”라고 실러의 『종(鍾)의 노래Lide von der Glocke』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는 했다. 오늘날 그런 말을 하면, 그 사람은 ‘맛이 간’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교양정전이 사멸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새로운 인용문구들이 생겨났다. “그릇된 삶 속에는 올바른 삶이 없다.” 아도르노의 이 말은 68년 학생운동 세대의 생활감정을 표현했으며,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독일의 나치 시절에 대한 고상한 대화를 할 때, “이 품은 아직 수태할 수 있는데……”라는 브레히트의 말, 그리고 “죽음은 독일산 스승이다”라는 첼란Celan의 말을 모르면 대화가 안 된다.
물론 과거의 모든 인용구들이 영원히 바다 속에 수장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말들은 전혀 손상을 받지 않고 남아 있다. 그리고 서구의 이웃 나라들은 당연히 자기들만의 정전을 보존하고 있다. 특히 영어권에서는 은폐된 인용을 좋아한다. 여기에 자료를 제공하는 사람은 대부분 셰익스피어다. 이해하기 쉽다는 이유에서 사람들은 고전작가의 작품들에서 발췌해서 책 제목을 정하기를 좋아한다. 헉슬리Huxley의 유명한 반(反) 유토피아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Tempest』(“오, 기특하고 새로운 세상이여, 이와 같은 사람들을 너는 갖고 있구나”)에서 인용한 것이다. 워런Robert Penn Warren의 소설 『왕의 모든 신하All the King's Men』은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의 거울속 여행』(“모든 왕의 말들과 모든 왕의 사람들은 험프티 덤프티를 다시 한군데로 모을 수 없었다”)에서, 그리고 스페인의 시민전쟁 시기를 다룬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존 던John Donne의 헌시(獻詩) 제목(“그런 고로 이 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알려는 전령을 절대로 보내지 마라. 바로 너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에서 따온 것이다.
……
문학은 사회적 과정과 개인들의 구체적인 인생살이 사이의 복잡한 관련성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것이 무척 많아서 인용하기에 아주 좋다. 문학의 인물들, 예컨대 햄릿, 돈 후안, 파우스트, 샤일록, 로빈슨 크루소, 돈 키호테, 오이디푸스, 레이디 멕베스, 안나 카레리나, 로미오와 줄리엣,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프랑켄슈타인 등은 인간 삶의 전형적인 운명들의 문학적인 구체화이며, 보통은 꿰뚫어보기 힘든 인생살이에 하나의 선명한 얼굴과 주소를 배정해주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구체화된 등장인물들은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다같이 속해 있는 사교 동아리의 멤버들이 된다. 따라서 문학평론은 구성원들이 서로 잘 아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 등장인물들에 대한 잡담인 셈이며, 이 잡담의 참여자들은 이 잡담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있게 된다.
……
반면에 이른바 제2차 문화의 영역은 중립적이다. 그 개념은 영국의 스노C.P. Snow가 40년 전에 촉발시킨 교육정책 관련 논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노는 물리학자이자 소설가였다. 영국에서 통합형 고등학교의 도입에 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는 ‘두 문화’란 제목의 강연으로 유명해졌다. 두 문화 개념으로 그는 1차 문화로 고전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문학적·인문학적 문화와 2차 문화로 이공계의 문화를 이해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영국은 신사문화와 아마추어 문화의 전통 때문에 항상 문학적·인문학적 교양을 자연과학에 비해 우대하고 있으며 이로써 영국을 미국과 일본 따위의 기술 열광국에 뒤처지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그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이학 및 공학 지식을 강조하는 교과과정과 수업 개념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연설은 양 교양영역 간의 관계에 대해 폭넓은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두 문화론은 독일에서도 일반화되었다. 그럼에도 스노의 호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즉 자연과학적 지식은 초등학교에서 교육되고 있으며 자연의 이해에 기여하지만 문화의 이해에는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렘브란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비교양인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열역학 제2법칙(일정 부피의 고립계에서의 변화는 언제나 엔트로피가 증대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진행한다 - 옮긴이)내에서 무엇이 문제되며 전자기장과 중력 사이의 약하고 강한 상호 작용의 관계가 어떠한지, 그리고 쿼크(핵물리학에서 특정한 속성들을 나타내는 가설적 미립자 - 옮긴이)가 무엇인지 모르더라도(물론 이 단어는 조이스의 소설 『피네건의 경야Finnegans Wake』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교양 없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감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을지 몰라도 자연과학 지식은 숨길 필요는 없어도 교양에 속하지는 않는다.

Schwanitz, Dietrich., 같은 책 pp.577-578, 579, 685-686)

슈바니츠는 좋든 싫든 간에 세상 사람들은 이공계 지식을 교양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여기 옮겨적지는 않았지만 스포츠, 텔리비전, 연예계 소식 같은 것도 교양이 아니거나 교양인들 사이에서 언급하면 좋지 않은 테마들로 분류한다. 즉 '교양=인문 교양'인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프리츠 폰 우데에 대해서는 모르더라도 반 고흐를 모르면 안된다는 식의 보다 미묘한 규칙들이 있다. 이는 어떤 장르가 인문 교양의 범주에 속한다고 해서 그에 관련된 지식들이 자동적으로 교양이 되는 것은 아님을 뜻한다.

이런 특징들은 교양이 순환적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기성 교양인 공동체가 교양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현 시대의 교양이고, 그렇게 규정된 교양을 일정 수준 이상 몸에 익힌 사람만이 새로 교양인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 교양인 공동체의 구성원이 바뀌면서 교양의 범주가 변하기도 하지만 그 변화는 묵시적이고 느리다.


2. Bildung 개념의 수입, 일본의 사례

그럼 이제 근대화 시기에 독일의 Kultur-Bildung을 수입 번역해 교양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던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은 유학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문화주의란 이름을 내걸고 1910년대 말부터 약 10여년에 걸쳐 이 개념을 수입, 보급하는데 노력했는데, 이들의 사례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일본과 비슷한 경로로 서구의 근대 문명을 수입했던 한국에도 큰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소다 키이치로와 문화주의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에 걸쳐, ‘문화주의’라는 말이 하나의 표어처럼 내세워지는 상황이 생겨났다. 1919년(대정 8), 제1회 여명회 강연회에서, 소다 키이치로(左右田喜一郞)가 ‘문화주의의 논리’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고, 또 쿠와키 겐요쿠도 같은 해에 ‘문화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제창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 다음해에 걸쳐 ‘문화주의’를 둘러싸고 갖가지 논의가 이루어졌다.
‘문화주의’라는 말은 소다와 쿠와키 두 사람이 각각 독자적으로 고안한 말이었다. 그러나 ‘문화’라는 그 말은 분명 독일어 Kultur(문화)의 역어이며, 제3장에서 보았듯이, 독일 지식인의 가치 이념이었던 ‘문화’의 내실을 그대로 의미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다 키이치로는 1904년(명치 37) 도쿄고상(東京高商)을 졸업하고 곧바로 독일에 유학하여, 신칸트 학파의 리케르트 등에게 배우고 1913년(대정 2)에 귀국하기까지 약 10년의 세월을 유럽에서 보냈다. 이 사이에 그가 당대 독일 지식인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던, ‘문화의 위기’에 대한 사상적·정치적 대응에 깊이 영향받았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 당시 독일 아카데미의 공통된 특징은, 학문 분야의 여하를 불문하고, 관념론(이상주의)적 전통에 서서, 정신(Geist)이 만들어내는 ‘문화(Kultur)’와 그 문화를 창조하고 향수할 수 있는 내적 통일을 지닌 ‘인격’의 형성(교양, Bildung)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실리적 산업 문명과 대중화에 대항해서 지키고 유지해야 할 가치였다. 이것은 그 비판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의 독일에서 10년을 보낸 소다에게 있어서 ‘문화 가치’는 단순히 학문상의 귀결이 아니라, 하나의 ‘인생관’이었다. 그는 『경제학 인식론의 몇 가지 문제』(대정 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인류의 역사 생활이 역사의 대상으로서 자연과학과 떨어져, 일개의 인식 목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미 말한 historischer Idealismus(역사적 관념주의)에게는 내재적이어야 할 그리고 선천적인 일개의 logisches Sollen(논리적 당위)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논리적 Sollen이 역사에 관해서는 그 역사적 생활의 중심사상인 Kultur(문화)에 의해 그 내용이 제약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에 있어서, 일개의 문화 가치(Kurtur Wert)이지 않으면 아니 됨은 물론이다.

그리고 소다는 이 ‘문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노력’을 ‘문화주의’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독일에 있어서 문화의 옹호가 그랬듯이,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소다는 요코하마(橫浜)에서 가업인 소다 은행 행장을 지내는 동시에 ‘요코하마 사회 문제 연구소’와 ‘요코하마 사회관’을 주재하여, ‘사회사업’을 행했다. 그것은 “일개의 사회 조직으로서의 무산계급은 사회정책의 실행을 그 사회에 요구할 권리를 갖고, 그 사회는 이를 실행할 의무를 진다”고 하는 입장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즉 그것은 단순한 자선주의에 의한 것이 아닌, ‘사회정책’의 실행을 제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플라톤, 괴테, 칸트, 뉴턴, 렘브란트, 베토벤, 바쇼(芭蕉),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를 포함하지 않는 제4계급의 사회민주주의에 의해, 결국 빵의 문제를 위해, 이들 일체의 문화가 그 발아래에 유린됨을 보는 것은 도저히 우리의 참을 바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보다 높은 입장의 ‘문화’에 기초하는 ‘문화주의’에 의해서만, 단순한 보수주의, 단순한 진보주의 양자를 초월한 ‘인격 있는 사람으로서의 모든 능력을 자유롭게 발당시키는 것’이 가능한 참된 ‘문화 국가’가 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쿠와키 겐요쿠의 ‘문화주의’도 그 근저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의 정치성을 지닌 것이었다.
이와 같이, ‘문화주의’는 당대 독일 지식인의 가치 이념을 이입한 것인 동시에, 명치 40년대 이후 전개된 ‘인격 본위의 실천주의’가 도달한 한 결론이며, 그것은 일본 지식인의 자율에 대한 이념이기도 했다. ‘교양’ 계층으로서의 문화인, 즉 지식인이 만드는 ‘문화’를 기초로 하는 문화 국가라고 하는 이미지는, 명치 국가를 대신하는 새로운 시대의 이념(Idee)이었다.……

교양주의
그런데 앞에서 본 ‘문화주의’의 제창은 커다란 반향을 부른 반면에, 곧장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오야마 이쿠오(大山郁夫)와 하세가와 뇨제칸, 혹은 사카이 토시히코 등이 ‘민중’의 대두를 배경으로, ‘문화주의’의 고답성·관념론적 기반·선량(選良)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담당자, 즉 지식인에 의한 문화적 사회의 실현이라고 하는 이념은 성립과 동시에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문화’의 정신적 가치와 그 창조와 향수를 담당하는 자의 자격으로 간주된 ‘교양’의 관념은 ‘문화주의’ 비판에 의해 상실되는 일 없이, 오히려 더한층 일반화되어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모든 문화적 영위의 근원에 ‘철학’이 있으며, ‘철학’은 일체의 학의 기본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정착된다. 1920년대는 철학이 ‘교양’과 결부되어 ‘철학 연구’의 황금시대가 된 ‘교양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교양주의’는 이미 보았듯이 독일 이상주의에 뿌리박은 ‘문화주의’ ‘인격주의’와 불가분의 것이었다. 독일에 있어서 ‘교양(Bildung)’은 문화적 환경의 수단에 의해 영혼을 형성하는 것이며, 개성의 도야를 문화 가치의 체득을 통해 보편성에까지 드높이는 것으로 생각해, 그 개인성과 보편성의 내적 통일을 지닌 전체성으로의 ‘인격’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독일 고전철학과 낭만주의의 시대에, 즉 헤르더(J. G. von Herder, 1744~1803), 야코비(F. H. Jacobi, 1743~1819), 피히테, 헤겔, 프리스(J. F. Fries, 1773~1843), 실러, 괴테, 훔볼트(K. W. von Humboldt, 1767~1835) 등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개념이었다. 따라서 ‘교양’은 무엇보다도 문예와 철학에 있어서 추구되었다. 일본에 있어서 이러한 이념의 추구는, 제3장에서 본 ‘인격 본위의 실천주의’가 요구한 것에 응답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생의 번민’에 해결을 부여하려는 노력 속에서 큰 사조가 되엇다. 그 사조를 대표하는 철학자는, 헤겔에게 깊이 영향받고, 또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문을 나온 사람들인데, 특히 아베 지로, 그리고 와츠지 테츠로가 그 대표적 존재였다.

宮川 透, 荒川幾男, 『日本近代哲學史』, 1976
이수정 역, 『일본근대철학사』, 생각의 나무, 2001, pp.383-385

교양이란 "관념론(이상주의)적 전통에 서서, 정신(Geist)이 만들어내는 ‘문화(Kultur)’와 그 문화를 창조하고 향수할 수 있는 내적 통일을 지닌 ‘인격’의 형성"이란 생각은 앞서 살펴본 "대상을 곱씹어 자기맥락화한 뒤 그것을 보편화시켜 자신의 세계관으로서 제시하고 그것에 삶을 일치시키는 과정"(샤피로)이란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의명분과 결부된 실제는 어떠하였는가?
교양이란 "‘문화’의 정신적 가치와 그 창조와 향수를 담당하는 자의 자격"이며, " ‘교양’ 계층으로서의 문화인, 즉 지식인이 만드는 ‘문화’를 기초""문화 국가"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근대 국가 건설에 있어서 지식인의 역할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험삼아 "무산계급은 사회정책의 실행을 그 사회에 요구할 권리를 갖고, 그 사회는 이를 실행할 의무를 진다"는 개념을 앞서 다루었던 "이마트 파업 노동자들은 과연 교양이 있을까? 없을까?"란 질문에 적용해 보자.

답은 자명하다. 이마트 파업 노동자는 교양지식인계급보다는 무산계급에 가깝고, 따라서 이들에겐 교양이 없지만 교양계층에게 사회정책을 만들어 내놓으라는 요구를 할 권리는 있다. 그러한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것은 교양인의 의무(Noblesse oblige)이다란 것이 된다.

당대에도 이러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들이 교양주의는 결국 높고 잘나신 분들이 무지렁이들에게 베푼다는 선량(選良)주의에 불과하다고 격렬히 비판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3. (일본과 한국 같은) 변방문화가 서구근대문화를 수입하면서 겪게 되는 일

이와 같이 일본은 근대화 과정의 일부로 서구, 특히 독일로부터 교양 개념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듯이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이 수입한 서구 학문이나 문화는 달라진 토양 위에서 원산지에서는 없던 문제를 겪게 된다. (물론 한국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것을 파편화 현상이라고 규정하는데 그것을 다음과 같은 두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변방문화’로서의 일본문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의 철학계는 그들의 업적을 계승하는 방향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업적으로부터 단절된 지점에서 출발했다. 단지 그들의 업적만이 계승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무릇 일본의 철학계뿐만 아니라, 일본의 지적 풍토 자체에는, 과거의 문화유산의 축적에 입각해서 그것을 정당하게 계승하고 발전시킨다고 하는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 일찍이 우리는 일본 근대 사상의 주요한 논쟁을 정리하는 작업(미야카와 토루 외 편, 『근대 일본 사상 논쟁』靑木書店, 소화 38)을 행한 적이 있다. 거기서도 통감한 것은, 선행의 사상 논쟁상의 쟁점을 하나의 성과로서 기초를 삼고, 그것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방향에서 더 논쟁을 전개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기를 두고 예전의 쟁점을 동일한 수준에서 비연속적으로 되풀이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문화 축적의 관점에서는 불모라고 할 수 있는 사태였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일본 지식인의 외국 지향, 명치 이후는 유럽 지향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사견이지만, 지식인에 있어서의 이러한 지향은, 세계 문명사상 하나의 ‘변방 문화(marginal culture)’로서 형성된 일본 문화의 근본 성격에 뿌리박고 있는 듯이 생각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는 일본의 문화를, 세계 문명사에 있어, ‘극동’이면서 동시에 ‘극서’에 있는 것으로서 정의했다. 일본 문화사를 통람해 보면 분명하듯이, 일본의 문화는 문화 발전의 자극을 끊임없이 바깥의 우월적인 이질 문화의 수용에서 받아들여온, 하나의 ‘변방 문화’ 바로 그것이었다. 바깥의 우월적인 이질 문화를 소개, 도입하는 역할은 외국어에 능통한 지식인에게 돌려져왔다. 그래서 일본의 지식인은 자국보다도 외국의 문화 사정에 정통하다고 하는 기묘한 생태를 종종 드러냈다. 외국에 유학한 일본의 지식인이, 현지에서 일본의 문화에 대해 질문을 받고, 스스로의 무지를 드러냈다고 하는 사례는 결코 드물지 않다. 명치 이후 백여 년을 경과한 오늘에 있어서도, 일본 지식인의 이러한 생태에는 기본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전술한 사상 논쟁에 관해 말하자면, 쟁점이 발전적으로 계승되는 일 없이 상실되어버린 것은, 사상 논쟁이 일본의 지적 현실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상 논쟁과 그 쟁점 자체가 외국에서 직수입되었다고 하는 사정에 기초하고 있다. 이처럼 논쟁 그 자체에 필연성이 없는 이상, 쟁점이 발전적으로 계승되는 일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의 지식인에 있어서 서구 선진 문화는, 그 파상 운동의 국면에서, 혹은 맹목적인 숭배·심취의 대상이 되고, 혹은 맹목적인 증오·반발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일본 근대 문화의 발전의 방식을 도식화해서 말하자면, 비연속의 연속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일본 근대 문화의 연속면을 파헤쳐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서구 근대 문화의 발전의 궤적을 더듬어보면 된다.

宮川 透, 荒川幾男, 같은 책, pp.383-385

우리가 종종 들어왔던 이야기 중에 젊을 때 유학을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교수까지 되어 외국에서 왕성한 연구를 하다가 귀국해서는 후진양성에 힘쓴다는 패턴이 있다. 이는 국내가 물리적으로나 경제적 연구 환경을 받쳐주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귀국함으로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주류 학계의 흐름에서 단절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문제는 지금도 상존하는 것이지만 교통과 통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훨씬 더 큰 문제였음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단 한번 유학생을 보내어 서구 학문을 몽땅 수입해 올 수 없는 이상 유학생을 계속 보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골치아픈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1920년대의 문화주의가 그 후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계승, 발전되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문제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

‘부챗살 유형’과 ‘문어항아리 유형’

그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하여, 조금 얘기를 바꿔서 일본의 사회나 문화의 유형이라는 것을 아주 도식화해서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우선 사회와 문화의 유형을 둘로 나누어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는 묘한 말입니다만 부챗살 유형(ササラ型)이라 하고, 그것에 대응되는 또 하나의 형태를 문어항아리 유형(タコツボ型)이라 잠정적으로 불러두겠습니다. 부챗살이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대나무의 끝을 가늘게 여러 개로 쪼갠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말하면 이런 식으로 밑부분이 공통되고. 거기서부터 손가락이 뻗어나가고 있는, 그런 유형의 문화가 부챗살 유형이라는 것입니다. 문어항아리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각각 고립된 문어항아리가 늘어서 있는 유형입니다. 근대 일본의 학문이라든가 문화라든가, 아니면 다양한 사회의 조직형태라는 것이 부챗살 유형이 아니라 문어항아리 유형이라는 것이, 앞에서 말씀드린 이미지의 거대한 역할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학문으로 말씀드린다면, 이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제가 여기서 새삼 자세하게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본에 유럽의 근대과학이 한꺼번에 유입된 19세기 후반이라는 것은, 때마침 유럽에서는 사회조직에서도, 혹은 문화형태에서도 전문화 현상, 즉 분업과 스페셜리제이션(specialization)이 급속도로 진행된 시대입니다. 가령 사회과학을 예로 든다면, 19세기 전반의 학문 형태와 후반의 학문 형태는 그 모습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19세기 전반을 보게 되면, 예를 들어 헤겔이라든가, 슈타인이라든가, 마르크스라든가, 혹은 벤담, 콩트와 같은 학자들을 들면 알 수 있듯이 법률학이라든가, 경제학이라든가, 사회학과 같은 개별 과학의 분류에서 본다면 어디에 넣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런 아주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학문체계가 잇달아 배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세기의 후반에 접어들면 급격히 바뀌게 됩니다. the social science가 붕괴되고 갖가지 social sciences로 바뀌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겨우 스펜서의 사회학이 종합적이라는 형용사를 스스로 붙이고 있을 정도인데, 그것은 스펜서의 사회학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밀이나 스펜서 같은 사람은 그 분수령에 서 있는 학자입니다. 그런 변화를 매우 상징적으로 학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19세기 말 형식사회학(形式社會學)의 성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개별 과학이 매우 발달하여 법률, 정치, 경제, 심리와 같은 학문 각 분야의 전문화, 독립화가 진행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사회학’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의 사회의 학문으로서 대단히 종합적인 사회의 운동법칙이나 발전법칙과 같은 것의 구명(究明)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만, 개별 과학이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사회학의 독자적인 대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무래도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다른 법률학이나 경제학과 같은 개별 과학은 사회의 내용을 각각 문제삼는데 반해서, 사회학은 인간관계를 형식에서 파악한다는 데 특질이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 형식사회학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관계가 경쟁이라는 관계로 맺어질 때와 투쟁이라는 관계로 맺어질 때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그런 형식을 문제삼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는 경쟁의 실체가 무엇인가, 예를 들어 경제적인 시장의 자유경쟁인가, 아니면 사회적 승진을 위한 경쟁인가 하는 그런 것은 모두 사상(捨象)되고 순수하게 경쟁이라는 인간관계의 형식의 특색을 문제삼으며, 그런 데에 사회학의 임무와 독자성이 있다는 그런 생각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입장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그런 생각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 자체는 학문이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급격히 개별화되고, 또 전문화했다는 것의 반영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흔히 저는 농담으로, 일본의 메이지(明治) 이후의 내무성이라는 것의 운명을 근대 사회학의 운명에 비유하곤 합니다. 즉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내무장관이 되었을 무렵의 내무(內務)라는 의미는 국내의 거의 모든 분야의 일을 포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후 일본의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국가기능이 복잡해짐에 따라, 예를 들어 철도라든가, 체신이라든가, 상공이라든가, 농림이라든가 하는 그런 각 부분이 전문화해서 각각 독립된 성(省)이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내무성이라고 할 때의 ‘내(內)’라는 것의 내용이 점점 축소되고 빈약해집니다. 마지막까지 내무의 관할에 속하고 이른바 그 본연의 내무업무였던 것은 경찰입니다. 내무의 주된 역할로서 끝까지 남은 것이 경찰 -- 즉 사회의 교통정리였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비유이긴 합니다만, 19세기 사회학의 운명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근대 일본이 학문을 받아들인 방식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일본이 유럽의 학문을 받아들였을 때는 마침 바로 학문의 전문화, 개별화가 아주 분명한 형태를 취하게 된 그런 단계였습니다. 따라서 대학제도 등에서는 그처럼 학문이 세분되고 전문화한 형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그런 개별 과학의 뿌리는 모두 공통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중세-르네상스라는 오랜 공통된 문화적 전통이 뿌리에 있고 그 말단이 많이 분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앞에서 말씀드린 부챗살 유형입니다. 그것이 공통된 뿌리를 잘라버리고 부챗살 끝쪽의 개별화된 형태가 일본에 이식되고 그것이 대학 등의 학부나 학과의 분류가 되었습니다.
아주 유형화해서 말씀드린다면, 그런 기술화되고 전문화된 학과라는 것이 처음부터 아카데믹한 학문의 존재형태로 간주되었던 셈입니다. 그것은 때마침 개국의 시기가 19세기 후반이었다는 것 외에, 일본의 정신과 서양의 재주, 혹은 동양의 도덕과 서양의 기술 같은 이분법을 이데올로기 적으로 받아들인 메이지의 국가체계에는 그런 학문형태 쪽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만, 그것은 어쨌든 그런 식으로 되어, 처음부터 몹시 개별화되고 전문화된 형태로 근대의 학문이 들어왔기 때문에, 학자라는 존재는 그런 의미의 전문가이며 개별화된 학문의 연구자라는 것이 적어도 학계에서는 당연한 전제가 되었습니다. 즉 유럽 학문의 밑바닥에 있으면서 학문을 지탱해주고 있는 사상 혹은 문화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분화하고 기술화된 학문의 틀 속에 처음부터 학자가 쏙 틀어박혀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대학교수도 포함하여 학문 연구자가 서로 공통된 컬쳐나 인텔리전스를 가지고 맺어져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학문을 파내려가 보면 공통된 뿌리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각 학과가 모두 문어항아리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아카데믹한 학문의 본연의 자세라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임무를 띠고 있다는 연대의식이라는 것이 매우 결핍되어 있습니다. 아니, 대학이나 학계의 철학과 사회과학이라는 것 사이에도 내면적인 교류가 거의 없습니다. 철학이라는 것은 본래 제 과학을 관련시켜주고 기초지어주는 것을 임무로 합니다. 그런데 근대일본에서는 철학 자신이 - 적어도 아카데미의 세계에서는 전문화되고 문어항아리처럼 되었습니다. 철학 자신이 전문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순입니다만,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철학자는 사회과학에 무지하고, 사회과학자는 철학자가 하고 있는 일은 자신의 일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헤겔철학이라는 것은 법률학에도 역사학에도 사회학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화과학의 그룬트(Grund)가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 가장 독창적인 철학이라 일컬어지는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太郞, 1870-1945)의 철학이 사회과학의 각 분야를 기초지어주는 원리로서 어느 정도 유효성을 갖겠습니까. 각 사회과학 상호간, 예를 들어 법률학, 정치학, 경제학과 같은 본래 밀접한 관련을 가진 학문분야 사이에서조차 커뮤니케이션이 그다지 없는 상태입니다. 하물며 문학 부문과 사회과학 부문 사이에서는 그 소원함이 훨씬 더 심각합니다. 문학자와 사회과학자가 공통된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현재에도 매우 어려운 일이며, 사회과학자라든가 문학자라든가 하는 간판을 내리고 한 잔 같이 마신다거나 하지 않으면 좀처럼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각각 사회과학자로서, 혹은 문학자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서로 이야기하려고 하면, 서로에게 공통된 언어가 너무나도 부족한 것입니다.

丸山眞男, 『日本の思想』, 岩波書店, 1961
(김석근 역, 『일본의 사상』, 한길사, 1998, pp.209-214)

부채살과 문어항아리 유형을 그림으로 나타내 보면 대충 이런 식이 된다.
클릭하면 확대

어떻게 보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도 있다. 학문을 가능한 빨리 수입해 가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수면 밑에 존재하는 거대한 뿌리까지 통째로 옮기는 것 보다는 잘개 쪼개진 개별 학문을 하나씩 배워가는 것이 훨씬 편리할테니 말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두 패턴을 종합해 보자.
같은 시대의 분과학문들이 잘개 쪼개져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 현상과, 지난 시대에 수입한 학문이 낳은 씨앗이 이번 시대에 꽃을 피우는 대신 매 시대마다 새 유학생들을 보내어 학문의 새 조류를 직수입해오는 현상을 합치면, 문명의 변방지역의 학문은 세로축(시대별)으로도 단절되고, 가로축(학제간)으로도 토막이 나 연결이 안된다는 결론이 된다. 그 결과 각각의 분과학문의 시대별 사조가 바둑판 모양으로 촘촘히 쪼개진 단절의 벽 안에 문어항아리를 짓고 틀어박혀 교류 없이 자기 할 일만 하는 현상이 정착된 것이다.

이것이 교양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교양의 내용이 되는 지식들은 무엇이 교양의 정전(正典)에 속하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서 미묘한 기준이 적용되기는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공통의 지식(common knowledge)에 기반을 두어야만 한다. 그런데 문화/학문의 직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변방에서는 파편화된 각각의 문어항아리 사이에 공통의 지식이나 대화의 소재가 별로 없다. 그러니 공통의 지식에 의존하는 응집력있는 교양 개념의 정립이 매우 힘들어지고, 당연히 그 개념을 공유하는 교양인 공동체도 존립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앞선 슈바니츠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자.
교양은 직업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전문가의 양성과는 반대보편적인 인격 형성을 핵심이념으로 하는 (19세기의) 새로운 인문주의적 교육 개혁안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교양Bildung’ 개념은 원래 1968년 이전까지는 대학 전공으로서의 독어독문학과 중·고등학교의 실제 수업간의 괴리를 이른바 ‘정전(正典, Kanon: 독일 문학에서는 괴테, 실러의 고전적 작품들이 여기에 속했음 - 옮긴이)’들로 메운다는 계획으로 독일에서 생긴 것이었다. 대학에서의 독어독문학 연구와 중·고등학교에서의 언어영역 수업간의 괴리를 메우기 위한 필독서로 목록화된 이 고전적인 정전들이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연결시켰다.

Schwanitz, Dietrich., 같은 책, p.41

이런 교육이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인가? 우리의 대학은 기본적으로 직업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충분히 세분화된 전문가의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교육기관이지 않은가?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이상을 표방하는 기관이 있기는 한가?

우리의 대학은 마루야마가 묘사하는 일본의 대학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도쿄에도 교토에도 그 외의 대도시에는 종합대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문과계, 이과계의 다양한 학부를 가지고 있는 대학을 종합대학이라 부릅니다만 종합이라는 말은 실로 아이러니이며, 그 실질은 전혀 종합이 아닙니다. 법과라든가 경제라든가 다양한 학부가 있어서 그것이 지리적으로 하나의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각 학과의 교실이나 연구실이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것을 종합대학이라 부르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서 종합적인 교양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각 학부의 공동연구가 항상 조직화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의 경영체로서 대학행정이라는 면에서 조직화되어 있을 뿐입니다. 유니버시티(university)라는 본래의 의미로부터는 아주 먼 것이 실상입니다.

丸山眞男, 같은 책, p.219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대학에서 교양 문제를 거론할 때 반드시 따져봐야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대학에 교양인의 양성을 요구하고 있는가, 그것은 정말 필요하며 또한 우리가 현재 보유한 기반문화 위에서 달성가능한 것인가라는 점이다. 19세기에 정립된 교양인이란 개념은 오늘날의 사회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개념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4. 서브컬처에 지나지 않는 교양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로마 문명, 기독교 문화, 셰익스피어나 괴테 등의 고전문예 등을 주축으로 한 서구의 교양 개념은 점차 쇠퇴하고 있지만 응집력있는 일군의 공유된 지식과 그 지식의 보유를 스테이터스 심벌로 삼는 사회적 엘리트 집단의 결합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이와 유사한 것을 찾는다면 성리학 중심의 전통 학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한문으로 된 고전문예를 익숙히 읽고쓸 수 있는 능력에서 출발해 철학, 윤리, 문학을 통합한 학문체계를 거쳐 문학적 자질을 시험쳐서 뽑는 관료제도와 사농공상의 신분제까지가 하나의 패키지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후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성리학 체제를 버리고 서구학문체제를 수입했는데, 마침 이 시기가 학문체제가 다수의 분과학문으로 분화된 이후여서 새로 수입한 서양학문체제를 갖고는 과거 성리학의 지위를 대체할만한 응집력있는 중심을 확보할 수가 없었고 성리학으로 이론 무장한 사회적 엘리트 집단도 해체되어 버렸다. 그리고 학문의 분화와 고도화가 더욱 더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현재 조만간 학문의 대통합이 이루어질 전망은 매우 낮다.


우리 사회에도 많지는 않더라도 서양에서 사용되는 교양인의 기준에 부합할 만한 문예 지식과 에티켓을 겸비한 인물들이 있을 게다. 그들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 한 가지 문제기는 하나 더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이녁님, 장담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에는, 당장 제 주위만 해도 이녁님이 생각하시는 '엄마친구아들' 수준의 '교양있는 대학생'들이 많다고 할 수는 없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는 있습니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제가 속한 공간에서는 교양이 후배에게 되물림되면서 '교양있는 대학생'들이 재생산되고 있구요. 당장 제가 아는 사람들만 따져봐도 이녁님이 재학 중이신 학교에도 이녁님이 말씀하신 '교양있는 대학생'이 있군요. 이녁님이 그런 대학생들을 못 보셨다고 해서 그런 학생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라는 가장 초보적인 오류를 범하고 계시군요.

Commented by 샤피로 at 2007/10/20 03:44 #

진정한 문제는 이들이 가진 지식은 서구의 기준으로든 우리의 기준으로든 하이컬쳐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들의 지식이 하이컬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브컬쳐처럼 대우를 받는다는 데 있다.
앞서 언급된 적이 있는 가보 문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적재 적소에 염상섭이나 황석영의 소설의 경구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다른 사회적 엘리트 계층의 존경을 받으며 그들의 공동체에 진입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건담이나 에반게리온의 명대사를 멋지게 패러디하는 아니메 오타쿠나 밀리터리 매니아, 철도 프리크 등과 동급의 서브컬쳐그룹에 들어가기 위한 재능일 뿐인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교양이란 자연도태의 과정을 거쳐 착실히 멸종의 길을 걷고 있다고 언급했었는데, 그것은 학문의 발전 경향으로 보나, 현 한국 사회의 엘리트 집단이 문예적 동질성으로 무장할 가능성 어느 쪽에서 보아도 전망이 전혀 밝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열심당원들이 교양의 복원을 위해 기를 쓴 결과 하이컬쳐의 지식과 매너로 무장한 怪서브컬쳐 집단이 하나 생길 가능성 정도는 배제하지 않겠다.
by sonnet | 2007/11/05 22:54 | 문화 | 트랙백(1) | 핑백(13) | 덧글(53)
트랙백 주소 : http://sonnet.egloos.com/tb/3449835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이런저런 이야기 at 2009/05/02 17:27

제목 : 부르디외와&nbsp;교양
부르디외와 이공계라는 글을 보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주목했다. 부르디외는 한 사람이 갖게 되는 -갖고 태어날 수도 있고 노력해서 얻을 수도 있는- 자본을, 돈 빼고,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문화자본, 학력자본, 그리고 사회(관계)자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자본은 주로 &#8216;취향&#8217;의 형태로 드러나고, 계급간 &#8216;구별짓기&#8217;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 - 도구일 수도, 지표일 수도-을 한다. 말하자면 돈이 ......more

Linked at nova님의 글 - [2007.. at 2007/11/06 08:58

... 0 metoo 교양 논쟁에 대한 몇 가지 문제- 88만원세대를 '언급'한 글로 시작하는 글타래가 '교양 논쟁'이란 이름으로 묶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참 흥미롭다. 오전 8시 58분 ... more

Linked at 3rdtype님의 글 - [2.. at 2007/11/06 09:20

... 0 metoo 교양 논쟁에 대한 몇 가지 문제 오전 9시 20분 이글루스 대학생에게 있어 교양이란 ... more

Linked at 발끈! 버럭! 털썩! : 절망.. at 2007/11/06 18:15

... 인용: http://sonnet.egloos.com/3449835순식간에 교양없는 인간이 되었다..-_-;;.. 쉣.; ... more

Linked at 누구의 것도 아닌 집—푸른 문.. at 2007/11/14 23:46

... 표준형이 힘을 잃고 스러지거나. 역사는 전자를 폭압이라 하고, 후자를 흐름이라 한다.   “'희망' 타령하는 기성세대는 답해 보라”   교양 논쟁에 대한 몇 가지 문제   대형마트, 제조원가 밑도는 납품가 강요해 30% 폭리: 대형할인마트가 지역 경제와 소규모 생산자들에 해악을 끼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는 ... more

Linked at Kind of Blue, an.. at 2008/03/01 00:25

... 사실 "교양인"도 결국은 덕후 ... 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08/04/13 19:02

... 이 없는 곳에서는 자연히 그런 사태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주): 이 글에 등장하는 ‘부챗살 유형’과 ‘문어항아리 유형’이란 개념은, 예전에 소개한 적이 있으므로 그 쪽을 참조. 丸山眞男, 『日本の思想』, 岩波書店, 1961 (김석근 역, 『일본의 사상』, 한길사, 1998, pp.223-226) 정치인 ... 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08/06/28 11:24

... will go into exile to Kir," says the LORD. (아모스서 1장 3~5절, 판본은 개역한글/NIV) 고전에서 적절한 인용구를 찾아내는 능력이 교양의 기본이라고 하던데, 과연 저런 걸 잘도 찾아내는군. ... more

Linked at ㈜ Luthien's 망상공방.. at 2008/07/10 08:38

... 여전히 적합치 않은 비유에 해당한다. 정말 이런 심정이었다면 역사 공부는 가까스로 합격점을 줄 수 있을 지언정 국어나 논술에서는 낙제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모처에서는 적절한 인용이 교양의 기본이라고 하던데... ... more

Linked at 부르디외와 교양 &laquo;.. at 2009/05/02 17:26

... 을 (뒤늦게) 갖추게 된 사람들은 문화자본과 사회관계자본을 확보하여 (출신보다)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 서고자 하는 욕구를 갖게 된다. 문화자본에 대한 설명을 보다가 예전에 보았던 교양 논쟁을 떠올렸다. 거기서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8220;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8221;을 언급하고 있었다. 즉 교양은 신앙의 공동체다. &#8230; 여기에서 중 ... 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10/03/16 10:54

... 데,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듯. "전통적 인문학은 근본적으로 일종의 보편주의에 근거"하지만 "이런 보편주의는 급속히 퇴색"하고 있다는 건 나도 동감 (이 글 참조) 이 책은 원래 추천을 받아 '위악'의 용례를 따져보려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와 관련된 이 글의 독후감은 다음 글에서... ... more

Linked at 漁夫의 'Questo e qu.. at 2011/06/11 13:40

... %가 넘는 대학 입학 비율이 바람직하다고 볼 이유는 별로 없다. 첨부] '교양' * 교양 논쟁에 대한 몇 가지 문제 http://sonnet.egloos.com/3449835 (sonnet 님) E.O.Wilson의 '통섭'이란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전통 ... 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11/09/01 12:31

... 마지막 구라고 한다. 제목은 무려 '공자님 말씀'(Sprüche des Konfuzius). 아, 이것이 독일어권에서 교양 있는 사람들 간에 통용된다는 가보 문구 구사 스킬인 모양이다. 듣는 쪽도 교양이 후달린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싶다면 그 구절이 무엇인지 정도는 바로 알아들어줘야 한다는. Sprüche ... more

Linked at Adagio ma non ta.. at 2013/04/13 20:37

... 곤은 그 말을 알아듣는다. 문학적 교양이라고 하는 공통점을 통해 맺어진 정신적인 유대감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여담이지만 sonnet 님은 교양이란 이제 오덕질 같은 것이 되었음을 논한 적이 있는데, 사실 이런 종류의 유대감이 제일 잘 드러나는 것도 오타쿠들의 관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에게도 맞은 적이 ... more

Commented by 누렁별 at 2007/11/05 23:50
'교양' 따위는 없는 것이 정상이군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07/11/06 00:11
장문이었습니다만, '교양'이란 것의 정의를 분석하신 구절 구절들이 참 와닿습니다.
하필이면 독일 - 일본 - 한국...의 전개였다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허상'이었군요.

그럼, 샤피로 님의 재반론이 혹시 이어질지 어떨지를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지나가던이 at 2007/11/06 00:14
어느정도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게 잘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확실히 한국사회에서 배워워야 대접받을 좋을 공통의 지식 이나 분위기가 정립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군요. 무언가가 이런저런 이유로 폭넓게 인정받아야 하는데 그럴리는 없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진행속도가 과거에 비해 무척 빨라진 사회이다 보니..
Commented by GARAHAD at 2007/11/06 00:37
- 교양이라... 그냥 리버럴 아츠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

- 학제적 연구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교양'이 얼마나 중요한지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 확장성 있는 쓸만한 결과물을 뽑아내려면, 결국 테마 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러러면 넓고도 깊은(-_-;) 교양이 필요한 거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순수학문의 경우에는 마찬가지 아닐까?

- 서구의 경우에도 위에서 언급한 문화적 전통(교양?)을 탄탄히 갖추고 있는 사람은 1, 2차 대전 이전에 태어난 몇몇 지식인들 뿐이라고 아우에르바하가 말했던 것 같은데... 지금 그런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살아있을런지.... ^^;

- 약어의 백미는 역시 와카(和歌) 아닐까... 가제(歌題) 하나 던져주면 수십 명이 앉은 자리에서 닮은 듯 하면서도 각기 다른 짧은 시구를 주르륵 뽑아내는 게... 그냥 가능한게 아니지.

- 그래도 서브 컬처는 표현이 좀 심하지 않소~ 요즘 들어선 분명 메인 컬처는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긴 하지만, 그래도 하이 컬처를 어찌 서브 컬처라... ㅋㅋ
Commented by lee at 2007/11/06 00:41
역시 교양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르군요.

저는 교양을 문학적 재능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지요...
Commented by 하얀까마귀 at 2007/11/06 00:48
늘 생각해오던 것이지만 작금 우리 사회의 교양은 더이상 고전의 어구를 솜씨있게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디어를 텍스트가 아닌 비주얼적으로 구현하는 능력과 무엇보다도 "짤방"을 잘 선택하는 능력인 것 샅습니다.

서양의 텍스트를 읽다 보면 심지어 기술적인 문서들에서도 아직 고전의 인용이 지천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우리나라 텍스트는 뭐 비단 블로그스피어가 아니더라도 짤방 센스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깐요. (예를 들어서 황구라 논문이라든가...)
Commented by wchoule at 2007/11/06 00:50
제가 뭘 등록해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 글이 뜨는군요. 먼가 의미있는 이야기인듯 해서 들어와봤습니다.

공대생이라 문학에 가까운 해석은 하지 못하겠고,

제 생각은 "교양" 이란... 그 문화의 테두리안에서 보편적으로 허용되는 행위나 말따위를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잘 사용하는 것을 말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유럽의 교양이 아시아에서는 교양이 될수도 아닐수도 있으니.....
Commented by 고어핀드 at 2007/11/06 00:51
간만에 장문의 개념글 잘 읽었습니다. 세 줄 정도로 요약하자면 1. '교양' 이란 기본적으로 "공통의 지식" 의 개념에 가깝다. 2. 하지만 일본과 한국의 경우, 이러한 공통의 지식이 성립하기 쉽지 않은 역사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3. 우리나라에서 유럽식 "교양" 을 들고 온대봐야 건프라, 게임 등에 열광하는 서브컬쳐 집단의 지식에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정도가 되겠군요. (제 지식수준이 일천한지라 오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파편화라는 것은 평소 저 역시 자주 느끼던 것인 바, 이번 포스트에서 가장 와닿는 말이었습니다. 어떠한 개념이 있으면 그 개념이 생겨난 배경이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러한 배경 따위는 전부 날려먹고 경향이 어린 제 눈에도 자주 눈에 띄더군요. 어떻게 보면, 이러한 현상의 배경이야말로 근대의 충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쿨짹 at 2007/11/06 09:26
허걱.. 소넷씨... 길어서 체크포스트하고 갑니다. (나중에 읽어야지 ㅡㅡaaa)
Commented at 2007/11/06 11:0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monsa at 2007/11/06 12:12
교양의 파편화는 카논의 파편화와 동등한 이야기이겠지요.
왜 카논이 파편화 되었는지는 좀 더 복잡한 원인이 있을법합니다.
흔히 짱개들이 한국애들 놀릴때는 도교는 빼고 유교만 가져가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조선시대 카논의 자연주의적 성격의 부족을 이유로 삼는건데, 저같은 문외한에게는
어느정도 일리가 있어 보이더군요.
Commented by Luthien at 2007/11/06 12:29
(조용히 쓰던 글을 지운다) 흑.
Commented by band at 2007/11/06 13:14
중3때 영어sam이 교양에 관해서 왈...악기, 노래, 운동, 문학작품에 관해 1가지씩 특기를 갖을수 있도록 노력하는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겸손한 마음으로 지위고하 상관없이 30간 부담없이 예기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뒷받침되어 줘야 하고요...
뭐 핵심은 4가지 있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기본전재로 깔려있어야 한다...였습니다.
Commented by nishi at 2007/11/06 15:16
읽는데 한시간 반 걸렸습니다..=_=;..

역시 근대화과정에서 생긴 문제는 뿌리깊은 건가 보군요.


그리고 일상적인 용어라도 그 뿌리/의미를 제대로 따져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새삼스래 알게 되었습니다..;
Commented by umberto at 2007/11/06 16:12
교양은 아무래도 일본을 거쳐 변형된 독일 수입품이죠.70년대까지도 좀 왜곡된 형태로 통용된 측면이 있습니다. 80년대 들어와서는 의식화 물결 때문에 사회과학, 민중사관, 민족문학으로 대체되었다가 90년대 들어서 영화, 일본문학, 프랑스 철학이 아주 잠깐 자리를 차지하다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교양이란 것이 좀 왜곡된 형태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지금처럼 무식하고 교양없는 2000년대의 천박함 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한때는 시골 3류대학 앞에도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들 재테크 책 외에는 안보더군요. 차라리 왜곡된 형태나마 옛날의 교양이 그리울 지경 입니다.

Commented by 들러갑니다 at 2007/11/06 20:28
인문학적 지식 이외에도 일종의 '난' 계층인 시민을 규정하는 규범적 문화'의 구실을 하고 있었던 교양이란 것이 말씀하셨다시피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나 현재 사멸해버렸다는 것이 문제겠네요. 이미 흘러가버린 프랑스 경향의 조류를 신주모시듯이 하는 사이에 밥상머리 교육조차 상실되었으니까요...
Commented by 어부 at 2007/11/06 22:33
어차피 비교양인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저 같은 사람하고 크게 관계없어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7/11/06 22:51
저는 교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장식용으로 집에 꽂아두는 전집류가 생각나더군요.
Commented by categoriae at 2007/11/06 23:23
들락거리기는 많이 했습니다만 댓글은 처음 써봅니다. 교양이 "엘리트 집단 내부에서 집단적 정체성을 나눌수 있는 지식이자 서로의 인격이 공통적으로 기반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그 무엇"이라고 정리될 수 있다면 오늘날의 한국에서의 교양에 가장 가까운 것은 '재테크 정보'가 아닐까 생각되는 군요.
Commented by categoriae at 2007/11/06 23:27
그런데 저는 슈바니츠의 저 책을 읽으며 정말로 독일적인 '교양' 개념을 참 재미있게도 까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독일 '지식층'에게는 참 싸가지없게도 들리겠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러면서 이 책의 말투가 최근 독일 좌파의 잡담하는 방식인가... 라는 흘러가는 생각을 했더랬지요.
Commented by categoriae at 2007/11/06 23:39
하나 더, 저는 직업상 영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을 근처에 많이 두고 있는데, 이들은 세미나실 밖에서는 (영문학은 고사하고) 어떤 인문학적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업계]의 유구한 도제 형성 제도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페이퍼를 써 내면서 CV를 축적해 가곤 하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교양이 물화되었다는 현실이, 하나의 직업으로서의 교양인을 유지하게끔 하는 조건인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카린트세이 at 2007/11/07 02:19
웬지 20년대 일본의 하이카라송이 생각납니다.

황금색 안경의 하이카라는~ ....한손에는 바이런에 괴테의 시~ 입으로는 부르짖는 자연주의 와세다의 벼이삭이 사락사락...... 하는....

아무래도 일본은 처음 명치유신 이래부터의 서구문물의 수용을 보면 확실히 뭔가 잘못된게 크다라는 면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지금의 일본에서는 "그나마" 나아진듯 보이는게 전후 세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과거와 서구의 참모습(?)을 보려고 하는 노력이 조금씩이나마 일고 있는듯 하더군요.. 이들이 자리를 잡고 후진이 어느정도 양성이 되면 적어도 일본 내에서의 학문의 분절성이나 왜곡된 서구관은 많이 줄어들듯 합니다. 수십년간 (백수십년일지도)의 뻘짓은 좀 아프겠지만....

규모가 작아 그렇지 오히려 좀 심각한건 우리랄까요.. 아무래도 일본이 "2차가공" 한(그것도 졸라 캐허접의) 상태의 서구문물을 수용한데다, 일본과 달리 서구에 대한 편향된 시각만을 계속 키워온듯한 성향이 강하고 거기다가 한국에서의 과거 재인식은 일본과는 달리 기존 학계가 가진 헤게모니를 뺏는 용도로 오히려 특화된 감이 없지않아 있으니 말입니다.. 거기에 학제에 대한 전통과 학제간 교류를 중시하는 서구와는 달리, 우리는 이제서야 '그런게 있었나?' 모드이지이요.. 옛 조선의 과거제를 생각해보면 '교양? 그게 뭔가염? 먹는건가염?' 하는 우리네 부르조아/전문가 계층을 보면 저는 조금 흠좀무입니다.

어찌보면 우리같은 일반 프로레타리아들과는 별 관계가 없는 소리일지도 모르겠군요.. 대학이 단순한 기술학교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한국의 대학을 보면 대학생이라고 딱히 교양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다만 부르조아/전문가 계층에서의 어떤 '공용어' 가 없다는것은 조금 타격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하이컬쳐의 지식과 매너로 무장한 怪서브컬쳐 집단이라... 서구오타쿠? 아니면 철학 오타쿠?? (도망간다)
Commented by deokbusin at 2007/11/07 14:00
1.1970년대 중반부터 독일의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성균관대 양재혁 교수님 말씀에 의하면, 유학갔던 독일의 대학에서는 철학수업 첫날에 학생들을 라틴어 능력자와 비능력자로 분류하는 걸 먼저 실시한 후에 수업을 나갔다고 합니다.--;

2. 요즘도 중국의 글들을 읽다보면 역사적 지식기반이 없으면 이해가 안되는 표현이 꽤 나옵니다. 이런 경향은 군사방면의 글에서도 흔한 편이고 말입니다.
Commented by 屍君 at 2007/11/07 21:57
교양이란 것에 대해 살짝 비꼬려고 했는데, 이건 정말로 방대 그 자체군요.. orz(조용히 쓰던 글을 지운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7/11/08 00:14
누렁별/ 하하,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는 관점은 교양이 현대 한국 사회에 제대로 뿌리를 내린 적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니까요.

paro1923/ 근대에 들어온 개념들은 거의 그런 코스지요.

지나가던이/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일종의 官學 이데올로기 같은 걸 열심히 드라이브하지않는 이상...

GARAHAD/ 서구는 적어도 교양인 커뮤니티가 공중분해되지 않은 채 왔으니까, 관성에 의지해 어느 정도는 굴러가고 있지 않나 추측하는데, 실상은 어떤지...

아, 그래도 서브컬쳐는 좀 심한가? 하이컬쳐가 곧 메인컬쳐인 일종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채 중앙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고 동심원을 그리며 바깥쪽에 서브컬쳐들이 붙어 있는게 아니라, 하이컬쳐가 서브컬쳐와 비슷한 선상에서 올망졸망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정도.

lee/ 대개의 정의라는 게 대상의 어떤 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법이니까요.
문학적 재능은 좀 창작능력이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남의 작품을 이해하는 소양 정도로 생각하면 그건 전형적 교양의 기술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얀까마귀/ 과연.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그런 것입니까.

wchoule/ 흠, 그건 예절에 더 가까운게 아닐런지요.

고어핀드/ '교양 개념과 교양인 공동체를 따로 떼어서 볼 수 없다' 정도가 더 들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파편화는... 음 사실 현대 학문 전반에 아주 고질적인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서구가 우리보다 좀 나을지는 몰라도 그들도 그 문제점을 겪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쿨짹/ 흐. 좀 길었죠 ;;;

monsa/ 파편화된 카논이 계속 카논일 수 있느냐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파편화 자체는 제가 위에 언급한 것들 외에도 다른 요소가 충분히 더 있음직하다는데는 저도 동의합니다.

Luthien/ 아니 왜. 한 말씀 하셈.

band/ 교양을 갖고자 하는 개인의 입장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주로 문제 삼은 것은 개인적 측면보다도 교양이란게 사회에서 어떤 위치나 역할을 하게 되는가라는 측면이니까요.

nishi/ 음, 참고해 온 책들을 굳이 보지 않아도 되게 하려다보니 인용문을 너무 길게 따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학교에선 이렇게 하면 혼나는데 말이죠(쓴웃음).

umberto/ 인문-문학-예술-에티켓 정도가 장르를 넘나들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 같은데, 요즘은 그런 걸 기대하기란 도저히...

들러갑니다/ 예. 아무래도 교양이 무슨 동물 박제도 아니고 교양을 몸에 배게 만들 정도로 숙달한 사회계층 없이 존재할 수가 없으니까요.

어부/ 하하, 저도 이공계 출신으로 남 이야기가 아닌걸요.

길 잃은 어린양/ 백과전서파 하면 뭔가 양손에 강철 백과를 들고 휘두르는 무림고수의 풍도가...

categoriae/ 1. 반갑습니다. 아니, 서로의 인격의 공통기반이 돈놀이 노하우란 걸 밝히는 건 벨트 아래 가격이 아닙니까(웃음).
2. 교양을 신주단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기분나쁠 수 있겠다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오히려 좀 이상한 것은 교양을 '개인적 완성'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샤피로씨가 이 책을 왜 추천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읽어보기로는 이 책은 그런 관점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책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슈바니츠가 좌파인가요? 책 서두에서 독일 교육제도에 대해서 사민당을 강력히 비난하길래, 막연히 우파가 아닐까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3. 그건 그냥 회사원이 퇴근하고 나서는 소위 '공장' 이야길 꺼리는 것과 유사한 현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문 교양'에 속하는 범주의 학문의 직업적 연구자가 교양인이어야 하느냐는 좀 생각해 볼 문제일 것 같습니다(꼭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제 생각엔 그래도 교양인이어야 유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카린트세이/ 일본이 모방할 선례도 별로 없으면서 그래도 제국주의 시대에 유일하게 근대 제국레벨까지 올라가 본 나라인 만큼 만만히 보는 것은 금물. 잘못된 것 물론 찾아보면 많겠지만, 전체적인 구도 하에서 얼마만큼 잘 하고 얼마만큼 못했는지를 따져보는게 좋을 듯.

... 7보시 오덕으로 개조해줄까보다.

deokbusin/ 뭐 동양철학이라고 생각해보면 한문독해 능력을 먼저 따져봐야 한다고 하는 게 아닐까요?

屍君/ 제 글이 늘 그렇듯이 이 이야기 좀 했다, 저 이야기 좀 했다 양은 꽤 되는데 응집력이 부족하죠. 쓰시던 글 있으면 보여주세요 ;-)
Commented by 444★ at 2007/11/08 01:48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저 관련으로 꼰 글을 몇번 써서 재미를 본 터라, 더욱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네요(으하하).
Commented by 라피에사쥬 at 2007/11/08 08:41
잘 읽었습니다. 저와 5m 정도 거리를 두고 차분히 소설책을 읽는 햏이 플랙탄 입고 괴이한 원서를 읽고 있는 저에게 보내는 혐오적 눈빛은 실은 동족혐오의 일종이었군요[..]

Commented by poppy at 2007/11/08 11:27
난 교양없음. 깔깔
Commented by 행인1 at 2007/11/08 12:42
오오, 그 많던 '교양'주의자들이 실은 철저한 서브컬쳐 집단이었다니!!!
Commented by 루시앨 at 2007/11/08 16:35
대략 변방 혹은 속령의 학문 발전에 있어서 몇가지 생각나는 점이 있습니다만, 곧 트랙백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shaind at 2007/11/08 17:51
"새로운세상"님의 말씀을 실제로 실천하실 분이 바로 sonnet님이셨던 모양입니다.
교양을 멋지게 해체해버리셨군요. 이른바 "교양의 계보학"이라고 칭할만합니다.

Commented at 2007/11/09 01:2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NOCTUM at 2007/11/09 14:35
'교양'은 제가 군시절에 꼭 읽고 싶어서 빚까지 져가며 산 책이었습니다. 몇번 읽지 않은거 같은데 표지가 너덜너덜해지고 속지도 피해를 봤지요(ㅜㅜ)

8co 2p (8중대 2소대) 라는 글씨가 써진책을 볼때마다 베시시 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양. 의 출시 이후에 비슷한 레이아웃과 표지 방식으로 여러가지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지요. 꼭 읽어야 할 책. 인간. 이라던가 말이죠.
저는 그때 저런식으로 책이 나오는 것을 뭔가 연계되지 못한 따로노는 느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파편화' 일지도 모르겠네요^^


PS>sonnet님의 블로그를 제가 아는 사이트에 시사 문제에 있어
탁월한 감각을 키울 수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습니다.
後보고 식이지만 불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7/11/09 17:07
444★/ 하하하. 좀 짧게 썼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라피에사쥬/ 하이컬쳐가 서브컬쳐로 주저앉았으니 그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poppy/ 깔깔, 저도 그 줄 뒤에 설래요.

행인1/ 근데 많기는 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자를 못 읽는 사람이 많다거나 하는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몰두하는 사람은 좀 봤지만.

루시앨/ 기대하겠습니다 :)

shaind/ 과찬이십니다. 서양에서 메인컬쳐로서의 교양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다룬 자료가 좀 있었으면 했는데, 제가 읽어본 게 없어서 그 부분을 다루지 못한 게 좀 아쉽긴 합니다.

비밀글/ 어서오십시오. 반갑습니다.

NOCTUM/ 문화 전반에 대해 공통된 대화를 할 수 있는 틀이 부서져 버렸다는 것을 사람들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시도가 나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교양이란 게 전혀 없다면, 일반인은 아무도 감상하지 않는 시, 전통예술, 순문학 같은 것들이 하이컬쳐란 이름 하에 대학의 골방 어딘가에서 동료집단 내부에서만 생산되어 소비되는 그런 소모적인 현상이 생겨버릴 테니까요.
소개야 뭐, 제 개인 신상 정보를 올린다든가 하는 그런 것만 아니면 환영입니다.
Commented by 네모세모 at 2007/11/11 01:31
뒤늦게 트랙백 신고합니다.
Commented by 제절초 at 2007/11/14 09:22
글 잘 읽었습니다. 교양이 사교술의 일종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Commented at 2007/11/16 06:3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7/11/16 06:44
네모세모/ 네 잘 봤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고 그쪽에 코멘트를 남기겠습니다.

제절초/ 예. 백보 양보하더라도 사교술의 성격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비밀글/ 그대가 다 읽어 주지 않으면 내 잡문을 누가 또 있어 읽어주리 (빙긋) 독일 애들의 관점으로는 문화를 정의하는게 바로 교양을 정의하는 것 같더라구.
뭐 구질구질한 논쟁은 그렇다 치고 추운 나라에서 돌아오면 김치전골 같은 거라도 먹으러 가자구. (메뉴가 입에 맞을까 모르겠다만) 내가 한턱 쏘리다.
Commented by joyce at 2008/04/13 20:35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놓쳤다가 오늘에야 보았네요. (계속 구독을 하고 있었는데도.)
우리에게 서구적 교양이라는 것이 현실적인 의의가 없는, 일종의 망명정부와 같은 역할을 할 따름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인의 글을 읽고 보니 정리가 확 되는 느낌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8/04/14 01:03
joyce/ 교양교육이라는 것이 이제는 학부생들에게 나중에 학제간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몸을 풀어주는 스트레칭 체조를 가르치는 것이 되어버린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솔직히 보편적 인격형성과는 연결이 영 안되는 것 같습니다.

포스팅이 누락된 것은 예전에 한 번 언급한 대로, 오래 전에 저장한 글을 날자를 바꾸어 올리다 보니 이글루스 밸리에 나타나지 않아 그렇게 된 듯 합니다. 이제 원인을 밝혀냈으니 더이상 이럴 일은 없을 듯.

Commented by 섭동 at 2010/05/17 20:08
이것이 교양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교양의 내용이 되는 지식들은 무엇이 교양의 정전(正典)에 속하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서 미묘한 기준이 적용되기는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공통의 지식(common knowledge)에 기반을 두어야만 한다. 그런데 문화/학문의 직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변방에서는 파편화된 각각의 문어항아리 사이에 공통의 지식이나 대화의 소재가 별로 없다. 그러니 공통의 지식에 의존하는 응집력있는 교양 개념의 정립이 매우 힘들어지고, 당연히 그 개념을 공유하는 교양인 공동체도 존립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

일본인 유학생도 서구 학생과 같은 교육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특별히 서구 학생이라고 공통 지식에 대해 더 잘 알게 될거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5/18 23:03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외국에 가서 석박사 과정 정도를 하는 많은 유학생은 현지에서 전문지식을 습득하는데 몰두하지, 자신이 유학간 사회의 교양을 배우는데는 별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들은 교양을 배우기에는 너무 늦게 유학을 가는 경우입니다.
Commented by 섭동 at 2010/05/19 12:32
흠, 그런 면이 있겠군요.
그렇다면, 일본인 학부 유학생은 어떨까요? 일본 개항 초기에는 일본에 제대로 된 대학이 없었으니, 유학은 학부부터 시작해야했을 겁니다. 일본에 제대로 된 대학이 생긴 다음에도, 여전히 학부 유학생은 있겠고요. 물론, 일본에 세계적인 대학이 많은 지금도 학부 유학생은 있습니다.
Commented by 섭동 at 2010/05/17 20:16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로마 문명, 기독교 문화, 셰익스피어나 괴테 등의 고전문예 등을 주축으로 한 서구의 교양 개념은 점차 쇠퇴하고 있지만 응집력있는 일군의 공유된 지식과 그 지식의 보유를 스테이터스 심벌로 삼는 사회적 엘리트 집단의 결합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

요즘은 이러한 현상이 학문 분과 안에서 보이는 듯 합니다. 제대로 된 대학 이공계 학과들을 보면 이런 학과 안 공통 지식이 잘 보입니다. 같은 학과라면, 대부분 나라 대부분 대학에서 거의 같은 내용을 가르칩니다.
얼마 전부터는 공학인증에서 꼭 가르칠 내용을 지정해서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5/18 22:57
이 글은 기본적으로 '이공계 지식은 교양이 아니다'라는 전제 하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Commented by 섭동 at 2010/05/19 12:37
진정한 문제는 이들이 가진 지식은 서구의 기준으로든 우리의 기준으로든 하이컬쳐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들의 지식이 하이컬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브컬쳐처럼 대우를 받는다는 데 있다.
앞서 언급된 적이 있는 가보 문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적재 적소에 염상섭이나 황석영의 소설의 경구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다른 사회적 엘리트 계층의 존경을 받으며 그들의 공동체에 진입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건담이나 에반게리온의 명대사를 멋지게 패러디하는 아니메 오타쿠나 밀리터리 매니아, 철도 프리크 등과 동급의 서브컬쳐그룹에 들어가기 위한 재능일 뿐인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교양이란 자연도태의 과정을 거쳐 착실히 멸종의 길을 걷고 있다고 언급했었는데, 그것은 학문의 발전 경향으로 보나, 현 한국 사회의 엘리트 집단이 문예적 동질성으로 무장할 가능성 어느 쪽에서 보아도 전망이 전혀 밝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열심당원들이 교양의 복원을 위해 기를 쓴 결과 하이컬쳐의 지식과 매너로 무장한 怪서브컬쳐 집단이 하나 생길 가능성 정도는 배제하지 않겠다.
//

서브컬처 집단 안에는 각각 공통 지식이 있습니다. 비슷하게, 전공 분야마다 공통 지식이 있습니다. 공통 지식을 모르면 학점이 안 나오고, 졸업이 어렵고, 취직이 힘듭니다. 교양인이나 덕후 사이에서 필수 지식을 모르면 인정 못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고전적인 교양이 서브컬처의 한 가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점에서 교양이 전공 지식과 비슷한 위치가 되어가는 것 아닐까요?
Commented by 섭동 at 2010/05/17 22:43
지금까지 설명한 두 패턴을 종합해 보자.
같은 시대의 분과학문들이 잘개 쪼개져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 현상과, 지난 시대에 수입한 학문이 낳은 씨앗이 이번 시대에 꽃을 피우는 대신 매 시대마다 새 유학생들을 보내어 학문의 새 조류를 직수입해오는 현상을 합치면, 문명의 변방지역의 학문은 세로축(시대별)으로도 단절되고, 가로축(학제간)으로도 토막이 나 연결이 안된다는 결론이 된다. 그 결과 각각의 분과학문의 시대별 사조가 바둑판 모양으로 촘촘히 쪼개진 단절의 벽 안에 문어항아리를 짓고 틀어박혀 교류 없이 자기 할 일만 하는 현상이 정착된 것이다.
//

일본 학계에서 최소한 과학분야는 세대간 단절 문제가 크지 않는 듯 합니다. 노벨 과학상 받은 일본인들은 많은 수가 일본에서 일본인에게 배운 사람들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10/05/18 22:58
이 글은 기본적으로 '이공계 지식은 교양이 아니다'라는 전제 하에서 쓰여진 것입니다.(2)
본문 중의 Snow의 '두 문화' 이야기 참조.
Commented by 섭동 at 2010/05/19 12:43
예. 말씀하신 단절은 이공계를 뺀 분야로군요.
그러면, 왜 이공계에 없는 세대간 단절 문제가 인문계에는 있을까요? 왜 인문계에 있는 세대간 단절 문제가 이공계에는 없을까요?
Commented by 지나가다 at 2010/05/19 12:52
본문 내용을 보면 "그리스-로마 문명, 기독교 문화, 셰익스피어나 괴테 등의 고전문예 등을 주축으로 한 서구의 교양 개념은 " 이라고 문학적 소양이 교양이라는 개념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계속 좀 딴소리를 하시는 기분이 드네요...난데없는 단절 이야기는 왜 하시는지...
Commented by ttttt at 2011/09/01 16:02
불연속성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요즘은 좀 덜한 것 같지만.
섭동님, 이공계에 세대간 단절이 없다고요? 만약 없다면 그건 아마, 이공계의 경우 세계에 열려 있고, 인문사회계의 경우는 국내외간 장벽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공계 논문은 무조건 SCI로 검증됩니다. 그리고 영어로 써야 하고, 영어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국내외 학자들의 관심사는 공통입니다.
그런데, 인문사회쪽은 그런 게 아닌 것 같던데요. 국내의 관심사는 국내의 것이고, 언어적 장벽도 크고.
Commented by ttttt at 2011/09/01 16:04
수학을 못해도 영어하면 과학고에 가도 된다는 세상에서 뭐..
Commented by j at 2011/09/13 23:39
좋은 내용 잘 보고 갑니다.
링크된 글들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깝네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