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초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전반적으로 보아 지난번 남북정상회담에 비해 국민의 관심도는 훨씬 낮고, 일각에서는
레임덕이 무슨…이라고까지 비웃지만, 어찌 되었든 정상회담은 정상회담이다.
이와 관련해 김정일과 두 번의 정상회담을 했던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그리고 미북간 최고위급 회담을 했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남북정상회담에서 주의할 점을 살펴 보는 것이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본 측이 납치 피해자에 관한 북한 측의 조사 결과를 통보받은 것은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회담을 앞두고 다나카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 국장과 마철수 북한 외무성 아시아국 국장의 실무 준비 회의가 초대소 별관에서 열렸다. 마철수는 이 자리에서 납피 피해자 가운데 5명이 살아 있고 8명이 숨졌다는 조사 결과를 통보했다. 다나카는 “사인 등을 확실히 조사해 결과를 밝혀 주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마철수는 북한 적십자회가 일본 적십자에 통보하는 형식으로 그 결과를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마철수는 ‘행방불명자’란 용어를 사용했다.
협의가 끝난 뒤 다나카는 초대소 본관까지 발걸음을 서둘렀다. 상당한 거리였다.
“북한은 왜 이렇게 먼 별관에 국장급 회담을 마련한 것일까.
결과를 깊이 분석하고 점검할 틈을 주지 않고 정상회담에 총리를 끌어내려는 게 아닌가.”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마음이 급했다. 본관으로 들어서자 푹신한 융단이 발에 밟혔다. 다나카의 보고에 고이즈미는 할 말을 잃었다.
船橋洋一, 『
ザ·ペニンシュラ·クエスチョン 朝鮮半島第二次核危機』, 朝日新聞社, 2006
(오영환 외 역, 『
김정일 최후의 도박』, 서울: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07, p.19)
그럼 일본은 서툴러서 이런 식으로 휘둘렸던가?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일본의 각오와 준비는 대단했다.
본래는 김정일 위원장 주최의 오찬 모임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방북을 승인할 때부터 당일치기 일정으로 하고 저녁 식사는 물론 점심 식사 초대도 사양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북한 측 입장에서는 귀빈을 초대해 놓고 식사를 대접하지 않는 것은 예의에도 어긋나고 체면도 서지 않는 일이었다. ‘업무 오찬(working lunch)’과 같은 형태로 점심 식사를 함께 하자고 타진했지만 일본 측은 “외교 의전을 배제한 실무 방문으로 하자는 총리의 의지가 강하다”며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다. 그 결과 총리 일행의 방북은 점심 식사 모임도 생략한 당일치기 방문이 됐다.
납치 문제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만큼 성대한 연회나 사교 모임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주먹밥과 녹차, 미네랄 워터까지 일본에서 전용기 편으로 공수했다. 그 같은 일은 고이즈미의 심복인 이지마 총리 비서관이 도맡았다. 이지마는 어디에선가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2001년 가을 평양을 방문했을 때 환영 모임에서 일절 식사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북·일 정상회담 중에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물도 마시지 않기로 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통역의 가방 속에 생수 몇 병을 넣어 가도록 했다.
고이즈미의 직감은 무서울 정도로 적중했다. ‘8명 사망’의 비보 속에 점심 식사 초대를 받아들였더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Ibid. pp.21-22
이 정도로 독하게 마음을 먹고 갔음에도 어느 정도 말리고 말았던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이것은 어웨이 경기의 한계이다. 준비를 잘 하면 타격을 줄일 수는 있겠지만 홈 그라운드의 우위를 완전히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기 때문에 크게 휘둘리는 것 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아베가 말했다. “사실 성명과 함께 사죄를 하지 않는 한 공동선언 서명을 미루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경우 그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갑시다.”
“그럴 경우 그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갑시다.” 모두가 그 말에 한동안 침묵했다. 잠시 후 다카노도 아베와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이대로는 서명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오후의 정상회담에서 과거 북한이 일본인을 납치한 사실을 김정일이 인정하고 사죄하지 않는다면 평양 선언에 서명해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정상회담은 큰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원천리하고 달려온 일본 총리에게 끝까지 사과하지 않는다면 회담 전 ‘행방불명자’라면서 사망자 숫자까지 확실히 밝혔으면서도 사과하지 않는다면 왜 그런 나라와 국교 정상화를 해야 하는지 국민의 이해를 구할 길이 없다….
Ibid. pp.16-17
최악의 경우 결렬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북한이 홈 경기를 고집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김정일의 경호 문제는 아니다. 그들은 홈 경기의 이점을 이용해 상대방에게서 이익을 쥐어짜내려는 것이다.
‘임기응변’이란 비판에는 일본
총리가 두 번이나 계속해 평양에 간 것은 외교 의례상으로도, 나라의 체면상으로도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포함돼 있었다. 대북한 외교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하면 이쪽이 먼저 북한을 방문해 상대방 홈 그라운드에서 정상 외교를 하게 된다.
상대는 평양에 올 때까지는 결코 손바닥 안을 보여 주지 않는다.“오면 서운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상투어다.
북한에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상자의 내용물을 알게 되는 ‘상자 외교’이기도 하다. 거기 꼼짝없이 속았다는 비판이었다.
Ibid. p.96
이러한 패턴은 고이즈미보다 먼저 평양을 방문했던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경우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조명록)는 과장된 동작으로 김정일의 서신을 전달하며 대통령에게 평양에 오라고 초청했다. 대통령은 이 제안을 검토해 보겠지만, 어떤 방문이라도 그것이 성사되려면 사전에 조정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조명록은 좀 더 명확한 답변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내게 사전 준비를 위해 먼저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조명록은 대통령과 장관이 함께 온다면,
“우린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조명록의 임무는 클린턴의 방문을 보장받는 것이 전부인 듯했지만,
북한의 상의하달식 의사 결정 스타일은, 대통령에게 위임하기 전에 가능한 많은 부분을 ‘미리 요리’해 두려고 하는 미국의 방식과는 명백히 맞지 않았다.……
우리가 보기에 정상 회담은 원칙적인 부분에서 합의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았고, 좀 더 살을 붙인다면, 그것을 통해 동아시아를 덜 위험한 곳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명록 차수가 준비 방문에 대한 우리 주장을 수용하고
나를 평양에 초청했을 때 바짝 구미가 당겼다.Albright, Madeleine K.,
Madam Secretary: A Memoir, New York:Miramax Books, 2003
(노은정,박미영 역, 『
매들린 올브라이트』, 황금가지, 2003, p.361
(김정일은)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에 오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 “양측이 성실하고 진지하다면, 우리가 못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대북한 외교에서 결과를 얻어 내는 제일 좋은 방법은,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관계를 맺어 나가는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출세주의자들에게는 훌륭한 것이겠지만, 나는 이틀 후면 평양을 떠나고 세 달 후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ibid. p.366
조명록을 보내서도 그렇고, 평양으로 올브라이트를 불러 만났을 때도 그렇고, 김정일의 기본 입장은
서운하게 하지 않을 테니 일단 와서 아무 이야기나 하자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고이즈미의 경우에서도 그랬지만, 국가원수가 외국을 방문했는데 회담이 결렬로 끝나서는 그 자체가 큰 실패이자 참모들의 실책이다. 따라서 일단 가면 어떻게든지 건수를 건져내오려고 하게 될 수 밖에 없고, 김정일은 그러한 약한 입장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는 올브라이트가 자기 퇴임 날자를 의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퇴임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클린턴과 올브라이트가 마지막으로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둬 대미를 장식하기를 원하고 있을 거라고 계산하고 김정일이 떡밥을 던졌던게 아닐까?
일정의 또 다른 문제는 김정일과 면담 시간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김정일과의 만남이, 이틀간의 방문 일정에서 이틀째 되는 날에 있을 거라고 추측했지만, 북한은 확실하게 말해 주려고 하지 않았고, 시간을 정하려 들지도 않았다. 고도로 체계화된 국제 외교의 세계에서는 그런 불확실성은 드물지만,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북한은 다른 어느 곳과도 달랐다.
ibid. p.363
그리고 그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내가 여흥 프로그램을 다른 것으로 바꿨습니다. 우린 5.1 경기장에 웅장한 행사를 준비해 놓았는데, 그것은 장관께서 북한의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서방 세계에선 우리가 호전적이라고 생각하고, 미국은 우리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직접 아는 게 중요합니다. 장관께선 편안하게 즐기셔도 좋습니다.”
볼거리 자체는 올림픽 개막식을 닮았지만, 나는 곳 그것이 문화적이라기보다는 대단히 정치적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조선 노동당 창당 50주년을 기념하여 준비한 쇼를 다시 보여 주는 것이었으므로, 나로서는 하등 즐거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노동자를 상징하는 망치, 지식인을 상징하는 붓, 농부를 상징하는 낫의 거대한 그림과 함께 시작되었다. … 인간 카드 섹션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수만 개의 판지를 바꿔 가며, 자세하게 표현된 그림과 슬로건을 우레 같은 애국적 구호 소리와 함께 보여 주었다. 그리고 대규모 관현악단이 「지도자께선 항상 우리 곁에 있으리라」와 「우리 붉은 깃발을 높이 들자」와 같은 노래들을 연주했다. 10만 명 이상이 공연에 참가했고, 20만 정도가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 카드 섹션의 한복판에 동아시아의 하늘로 발사된 대포동 미사일이 나타났다. 그것은 북한이 말 많은 1998년의 시험 발사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걸 보여 주었다.
ibid. pp.368-369
올브라이트는 고이즈미만큼 대비가 철저하지 못했던 것이 명백하다. 올브라이트는 일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김정일은 미국의 부실한 준비를 이용해 농간을 부렸으며, 결국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의 체제 선전 및 대포동 미사일 PR 석상에 참석해 자리만 빛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것들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조금만 방심하면 터져나올 수 있는 전형적인 위험요소들이다.
그럼 어떤 식이 바람직할까?
지금까지의 전례로 볼 때 김정일이 평양을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하므로, 내 생각에 이번이든 앞으로든 남북정상회담을 기획할 경우
전제조건 없이 일단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모든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자 같은 제안은 절대로 거부해야 한다. 대신 정상회담 이전에 양 정상이 논의할 의제와 정상회담의 결과, 발표할 합의선언 내용을 완벽히 사전 조율해 놓고, 정상회담은 몇 마디 덕담 후 이를 발표하는 의전상의 자리로 삼아야 한다. 실제로도 국가원수가 외국까지 가서 상대편 국가원수와 만났는데 일이 틀어지면 큰 사고인 만큼 대개의 정상회담은 이런 사전조율을 거친다.
우호적인 정상들간의 회담도 이럴진대 김정일을 상대로는 더 말할것도 없다. 또한 참석하는 행사의 시간이나 내용 같은 것들도 사전 합의된 것이 정확히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이 분명히 지켜지지 않으면
언제든 회담을 깨고 돌아올 수 있음을 사전에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
사실 고이즈미의 경우 평양선언을 완벽히 조율해 갖고 갔었지만, 그래도 납북자 문제를 북한이 끝까지 히든 카드로 쥐고 흔들었기 때문에 결국 상당히 말리고 말았다.
만약 북한이 조건없이 만나 아무 이야기나 하자는 식으로 나오면 북한에게 이 점을 명백히 해야 한다. 당신네 지도자는 통이 크게 광폭정치를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는 밴댕이이므로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정상회담은 사전에 합의된 것을 확인하고 발표하는 자리이다. 만약 정말 광폭정치를 하고 싶다면 서울에 오기 바란다.
오면 서운하게 하지 않겠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