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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의 입장
어떤 정책을 지지할지는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달려 있다
where you stand depends on where you sit

- 워싱턴 속담 -


1978년 3월 나는 백악관 서쪽 빌딩의 지하에 있는, 글자 그대로 쪽방에 정착했다. 상원에서 일했던 경험이 행정부의 경험을 더 풍부하게 했다. 하지만 일하는 곳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렇게 금방 전에 일했던 곳의 관점에 대해 짜증이 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첫날부터 “당신이 앉아 있는 곳이 당신이 대변하는 곳이다.”라는 말에 딱 맞는 순간을 겪었다.

(메인 주 상원의원) 에드 머스키는 대양(大洋)에 대한 국제조약을 개정하는 해양법 협약을 위한 상원 협상 자문 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국제 조약을 존중했지만 또한 긴 해안선을 지니고 있고 경제적으로 어업이 매우 중요한 주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의 수석 입법 보좌관으로서 내 마지막 행동 중 하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우리가 그 조약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지지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러한 조약이 우리 선거구민에게 닥칠 문제에 대해 행정부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상원의원의 자동서명장치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직원 중 한명이었으므로 금요일에 서명을 해서 발송했다.

그 다음 월요일에 나는 새로운 임무를 받을 준비를 하고 백악관의 내 자리에 도착했다. 나의 임무 중 하나는 상원에서 온 우편물에 답신을 하는 것이었다. 내 책상에는 내가 쓴 편지가 놓여 있었다. 나는 답신의 초안을 작성했다. 상원의원의 선거구민에 대한 우려를 이해하지만 해양법 협약의 전반적인 영향이 미국의 관심사에 더 중요하다는 설명이었다. 그 편지는 대통령 전용의 연한 녹색 종이에 타이핑이 되었고 적절한 사람들이 자동서명장치를 이용해서 서명을 한 후 발송했다. 정말 대단한 워싱턴에서의 순간이었다.

Albright, Madeleine K., Madam Secretary: A Memoir, New York:Miramax Books, 2003
(노은정,박미영 역, 『매들린 올브라이트 1』, 황금가지, 2003, pp.147-148)

보통 사람도 자리가 바뀌면 입장이 자연히 바뀌기 마련이지만 이분처럼 출근 첫날부터 어제까지의 입장이 짜증이 날 정도로 감정의 자이로가 완벽히 조정되는 분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정말 천자국의 장관 한번 하실만 한 기재가 아닐까.


그건 그렇고 이 이야기는 관료사회의 병폐를 가리키는 일화로 받아들여지기 쉽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그렇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고 본다. 바로 이런 특징이 민주사회를 지키는 초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직과 권한을 적절히 나누어 놓을 경우 이들이 결국에는 서로 헐뜯고 싸우며 견제할 것임을 알기에 어느 정도 안심하고 권력을 맡길 수 있다. 대통령과 장관, 국회의원, 고위 법관들은 모두 이 사회의 엘리트들일진데, 이들이 서로 싸우는 대신 정부의 상층부를 점령한 기득권 엘리트로서의 공동의 이익을 찾고 외부에 대항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철저히 합심협력한다면 그 결과는 사뭇 볼만하지 않겠는가?

즉 인간이란 동물은 조직에 소속될 경우 원래의 출신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이 속한 조직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따라 끊임없이 다른 조직을 견제하고 맞서 싸우는 좋지 못한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3권분립 같은 시스템이 동작할 수 있는 셈이다.

사실 미국에서 3권분립 제도를 만들 때 이 제도는 선진국 제도의 짝퉁으로 출발했다. 선진국의 모델인 영국은 국왕-귀족(상원)-평민(하원)의 계급구조를 기반으로 한 권력분립 제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는 국왕이나 귀족이 없는 관계로 이 모델을 수입하는 데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제헌의회 당시의 기록에는 인위적으로 왕과 귀족을 만들자는 의견이 다 등장할 정도였다.

“영국식 모델은 주제에 관한 한 유일하게 좋은 모델입니다. …… 입법부의 한 원은 종신제로 하거나 적어도 행위상의 결함이 없는 동안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합시다. 행정부 역시 종신제로 합시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연설, 1787년 6월 18일

즉 종신제 행정관(대통령)=왕, 종신제 상원의원=귀족인 셈이다. 왕과 귀족을 만들자는 의견은 워낙 인기가 없어서 곧 거부되고 말았지만 이들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어쨌든 새롭게 고안한 입법-행정-사법이라는 조직의 성격에 따른 3권분립 제도는 계급구조에 따른 권력분립 제도만큼 잘 돌아간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해본 결과 꽤 잘 돌아가는 것으로 입증되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 내부의 동작 원리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다.

이런 점은 사회 제도나 현상을 평가할 때 개인 윤리를 그대로 연장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고 본다.
by sonnet | 2007/08/09 11:39 | 정치 | 트랙백(1) | 핑백(2)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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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2008년글 at 2008/07/16 12:51

제목 : 이동관과 올브라이트, 경험의 활용에 대해서
작년 7월에 sonnet님께서 자신의 블로그에 공직자의 입장 "어떤 정책을 지지할지는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달려있다" http://sonnet.egloos.com/3285559 라는 재미있는 글을 올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북한에 가서 김정일과 만찬을 하며 당시 북핵문제 해결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기 위해 안간......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08/06/19 23:00

... 대결과 갈등을 심화시키고,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여 국정의 안정성을 약화시킵니다. 노 대통령 대국민담화, 2007년 1월 9일 워싱턴에는 "어떤 정책을 지지할지는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달려 있다"란 유명한 속담이 있는데, 이 개헌 제안도 여기에 잘 들어맞는 사례라고 하겠다. 당시 노무현 자신은 이 개헌은 성사되어도 자신이 퇴임한 후부터 ... more

Linked at 될대로 되라지 : 진영논리에 .. at 2014/10/25 22:16

... 우호적인 부서와 그렇지 않은 부서가 존재할 뿐이죠. 어느 당이 정권을 잡던 여성부는 여성부일것이고 미래부는 미래부일것이고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일 것입니다. 소넷님이 쓴 이 글을 보면 어느정도 느낌이 올 것입니다. 결국 표, 부서, 이익단체등을 생각해야지 간단히 좌우대립으로 생각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거죠. 나중에 싄의진의원이 ... more

Commented by F.E.M.C at 2007/08/09 12:21
'내 책상에는 내가 쓴 편지가 있었다. 나는 답신의 초안을 작성했다' ....압권이군요;;;

하기야 윗분들이 철의 삼각동맹을 맺고 제트 스트림 어택(..)을 가해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없지요. 네거티브니 어쩌니 해도 저렇게 물고 뜯고 싸우는 것이 역시 민주주의의 본질일까요?(...)
Commented by ssn688 at 2007/08/09 12:36
음, 본햏이 아는 교사(J)의 경험담입니다.
후배 교사 : (냉소적으로) 교총이나 전교조나 다 이익집단밖에 안되잖습니까.
교사 J : 이익집단이라서 나쁘다고 생각하나? 사회를 바라보는 상식부터 정립하라구. 민주사회는 이익집단간의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굴러가는 거야.
Commented by 히피 at 2007/08/09 12:52
재밌게 읽었습니다. 자주 들르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at 2007/08/09 13:08
올브라이트 아줌마 역시 겉보기와 같이(?) 대인배시군요.
잼나게 읽었습니다. :)
Commented by Madian at 2007/08/09 13:18
인사이동을 몇 번 하다보니 비슷한 경우가… 어이하여튼 민주사회를 지키는 바탕이 인간 위주보다는 시스템 기반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보다 제 경우에 치명적인 건 상위제대에서 근무시 반려했던 공문을 쓴 이의 집에 오늘날 빌붙어 살고 있다는 상큼하지 못한 사실이군요.
Commented by 지나가던이 at 2007/08/09 20:49
정말 대단한 사례로군요. 울브라이트가 자리에 오를 때 한국언론에서는 여자가 국무장관돼서 카리스마가 약하지 않느냐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걸로 기억하는데 역시 아무 쓸 데 없는 소리였군요.

ssn688/멋진 교사십니다. ^^;;
Commented by BigTrain at 2007/08/09 21:01
저게 좀 더 정교해진 게 그레이엄 엘리슨의 제3모델인 거군요...

외교정책론 수업을 들을 때도 합리적 행위자 모델만 자세히 다루고 그 뒤로는 겉할기로만 접해서 참 아쉬웠는데 최소한 주장하는 논지는 설득력이 있더군요.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7/08/09 21:05
저런 멋진 행동방식은 남조선 같은 제3세계에서도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듯 싶군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07/08/09 21:07
지나가던이 //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상국의 재상에게 들이대는 것부터가
'무엄한' 개그이긴 하지요. (...)

(ssn688 님... 좋은 교사님을 알고 계시는군요.)
Commented by 라피에사쥬 at 2007/08/09 21:51
에드 머스키가 밴스의 사직이후 잠시 국무부를 맡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저 자문자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모양이군요. 카터가 재선에 성공했다면 그도 계속 국무부를 맡아 대인배의 길을 갔으려나요[..]
Commented by 행인1 at 2007/08/10 10:52
위대한 령도자의 재림을 바라는 남조선 인민들의 열망이 드높아져 가는 이 시점에 새겨볼만한 글 입니다.


그건 그렇고 자기가 자기 편지에 답장을 하다니... 그나저나 자동서명기계라는게 정말 있군요. CSI에 등장하는걸 보고 그런게 있나 보다 하긴 했는데.
Commented by sonnet at 2007/08/10 21:26
F.E.M.C/ 경험적으로 확립된 현재의 민주정은 저런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충분히 고려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민주정은 최선를 추구한다기보다 최악을 피하는데 더 초점이 맞추어진 정치체제가 아닐까 합니다.

ssn688/ "굴러간다"는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

히피/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자주 들려 주시면 저야 감사하지요.

펄/ 올브라이트 아줌마도 젊을 때 사진은 준수하던데 말입니다. 관리좀 해 주시지;;;;;

Madian/ 아니 그런 난감한 현실이... 저도 시스템 위주가 아니면 오래 버티기 힘들다고 봅니다.

지나가던이/ 내부적으로 올브라이트가 NSC에게 좀 밀렸다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건 로저스나 밴스 등에게서도 보이는 종종 발생하는 현상이구요. 어쨌든 올브라이트는 발칸분쟁에 대해 상당한 강경파여서 무르다는 소릴 들을 인물은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BigTrain/ Essence of Decision을 교재로 쓰셨나 보지요? 사실 그 제3모델은 이론이 다른 것보다 정교하지 않습니다. Neustadt의 Presidental Power에 그 3모델의 기초가 된 이야기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관심이 있으시면 한번 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길 잃은 어린양/ 예. 제3세계라고 무어 다르겠습니까.

라피에사쥬/ 재선됐으면 한동안 더 일하지 않았을까요.

행인1/ 하하. 저도 자동서명기계 이야길 처음 들었을 때, "이런 재미있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ohnemich/ 과분한 평을 들으니 부끄럽습니다. 자주 평을 남겨주시면 저야 감사하지요.

조직은 구체적이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조직에 들어가 적응한다는 것은 조직이 제공하는 안경을 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조직이 현미경을 주면 미세한 것을 보게 되고, 망원경을 주면 멀리 있는 것을 보게 된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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