От Ильича до Ильич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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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결의 형성
민주정에서 다수결 원칙의 중요성은 엄청난 것인데 비해, 다수가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란 점은 거의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 듯한 듯한 느낌이 든다.

중등교육과정에서는 보통 솔직한 토론을 통해 설득과 합의를 거쳐 다수가 형성될 수 있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 같은데, 실제로 그런지 생각해보면 별로 그럴 것 같지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토론에서는 설득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드잡이질을 피하며 서로의 입장 차이나 명백해지면 상당한 성공으로 간주되는 게 현실이다. 설득으로 다수가 형성되기 힘들다면 실제로는 어떻게 다수가 형성될 수 있을까?

어차피 유죄인걸

네 건의 사형관련 판결이 내려졌지만 아직도 제5의 사건(Moore v. Illinois)은 미결로 남아 있다. 리만 무어 -일명 “잔나비”-는 총기살인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몸이지만 그가 제기한 상고는 “잔인하고도 비정상적인 형벌”의 문제 이외의 사형법규의 또 다른 이슈들을 미제로 남겨두고 있었다. 사형이 위헌판결을 받은 지금, 법원은 이 이슈들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무어는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무어의 주장은 자신의 유죄판결이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였노라고 “잔나비”가 자랑삼아 떠벌리던 것을 들은 3인의 증언 모두가 문제의 “잔나비”는 무어와 동일인이 아니라고 말한 사실을 정부 측이 피고인 측에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판을 담당한 판사가, 범행에 사용된 총기가 아니라고 검찰 스스로 사실심에서 인정했던 개머리판 없는 소총을 배심원 앞에서 흔들어 보이도록 허락했다는 것이다.
대법관회의 결과 7 대 2로 무어의 유죄 쪽으로 기울어졌다. 더글라스와 마샬이 반대했을 뿐이다. 무어에게 새로운 심리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다른 네 건의 판결 덕분에 사형은 면하게 되었다.
원장은 블랙먼을 집필자로 선정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블랙먼은 초안의 회람을 미루고 있었다. 더글라스는 대법관회의 석상에서 노골적으로 지연에 대해 불평을 했다. 언젠가는 스튜어트도 비아냥거렸다. “블랙먼의 초안을 밥는 것은 마치 낙도(落島)의 투표 결과를 받는 것과 같애. 한마디로 지연 그 자체야.”
마침내 완성된 초안은 “은폐된 문제의 정보는 무어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고, 단지 사람을 죽였노라고 떠벌리던 인물이 무어와 동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라고 쓰고 있었다. 또한 배심원 앞에서 소총을 흔들어 보이는 행위는 재심을 얻어야 할 정도로 중대한 오류는 아니라고 블랙먼은 결론을 내렸다.
마샬은 격노했다. 형사변호사로 일하던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날조 내지는 변조된 사실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는 것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 블랙먼의 결론을 반박하기 위해 연구원으로 하여금 채증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하도록 지시했다.
현장을 목격한 증인의 증언이 범인의 신원확정과 유죄판결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랙먼은 이 증언의 신빙성을 감소시키고 있는 많은 증거를 무시한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부정의이다. 마샬의 증거분석이 반대의견으로 회람되었다. 이에 대해 블랙먼은 자신이 재구성한 사건의 전모를 각주에 담았다.
파우엘과 스튜어트가 재빨리 입장을 바꾸었다. 이제 한 표만 더 얻으면 마샬은 블랙먼의 다수의견을 탈취할 수 있게 된다. 믿음직한 동료 브레넌이 제5의 표를 던져줄 것이다. 브레넌이야말로 정부 측은 혐의사실의 내용을 다루는 일체의 증거는 피고인 측에 넘겨주어야 한다는 1963년의 획기적인 판결문(Brady v. Maryland)의 저자가 아닌가?
브레넌의 연구원 한 사람은 만약 브레넌이 마샬처럼 면밀하게 사실관계를 분석했더라면 달리 표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기대에 차서 보스의 방을 두드렸지만 30분 후에 기죽은 꼴로 나오고 말았다. 보스도 마샬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표결은 바꿀 수 없노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블랙먼에게는 이 사건이 그저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야. 엄청난 시간을 들여가며 심리기록을 읽고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작품인데 이제 와서 내가 입장을 바꾸면 몹시도 자존심에 타격을 입을 것 아닌가 말일세.” 최근에 들어와서 점점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버거로부터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는 블랙먼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브레넌 자신이 그의 비위를 건드리면 낙태사건이나 음란물사건에서 그에게 접근하기 힘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계산이다.
“물론 ‘잔나비’에게 재심을 허락하는 것이 타당하지. 하지만 재심을 받는다고 해서 그가 무죄방면될 가능성은 희박해. 재차 유죄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봐야겠지. 전과도 많은 데다 결코 선량한 인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거든. 게다가 따지고 보면 어차피 대법원이 세상의 부정의를 모두 시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애당초 이러한 성격의 사건은 심리를 허용하지 말았어야 했어. 좀더 앞을 내다보면서 문제를 보아야 돼!” 브레넌은 다짐했다.
“이 사건에 관한 한 우리 영감은 해리를 버리지 않겠대.” 브레넌의 연구원이 마샬의 연구원에게 전한 말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한 사람을 감옥에 잡아둘 수 있다니. 연구원들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사형이 위헌으로 선언되지 않았더라면 브레넌이 같은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애써 위안거리를 찾았다.
마샬의 연구원들은 보스더러 직접 브레넌을 접촉할 것을 요구했다. 마샬은 거절했다.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다. 원장으로부터 성가심을 당하고 있는 판인데 그의 업무 스타일을 모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마샬의 연구원들은 브레넌의 연구원들을 통해 최후의 간청을 보냈다. 그러나 브레넌의 우선순위는 명백했다. 이번 사건에서는 해리 블랙먼이 최우선이다. “잔나비” 무어에게는 재심의 기회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Woodward, Bob., Armstrong, Scott., The Brethren: Inside the Supreme Court, New York:Simon & Schuster, 1979
(안경환 역, 『판사가 나라를 잡는다』, 철학과현실사, 1995, pp.359-361)

여기서는 캐스팅보트를 쥔 대법관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다음 번 판결들에서 다수 의견을 획득하기 위해 어떤 사건의 다수를 의도적으로 포기하는 것을 팻감으로 삼아 거래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낙태사건의 승리를 위해 사형수의 인생을 분쇄한다는 이야길 보통 사람들이 들으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느 나라나 이런 식의 대법관들 사이의 내부논의는 일체 비밀에 붙여지는데, 사실 이 과정이 낱낱이 공개되면 국민들 사이에서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가 유지될 수 있을지 심히 의문이다. 소시지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
by sonnet | 2007/08/14 11:50 | 정치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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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기린아 at 2007/08/14 12:44
솔직히 이건 ㄷㄷㄷ.... 인데요.

판사가 나라를 잡는다는게 이해가 됩니다;;;
Commented by Madian at 2007/08/14 13:03
영업비밀은 소중하지요.
어느덧 저도 a few good men들이 꺼려지는 지경에 다달았습니다.
Commented by 하이버니안 at 2007/08/14 14:09
그나마 돈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변방국과는 다르군요.(정말?)
전관예우 이 X~
Commented by shaind at 2007/08/14 14:12
[ 일면 "잔나비" ] 오타이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일명 "잔나비"] 가 맞을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들러갑니다 at 2007/08/14 14:32
(마피아 두목의)자파 사람들 배심원으로 심기, 배심원으로 공시된 인물들에 대한 협박 및 살인, 출소 후 관련자들에 대한 보복 범죄까지 벌어지는 동네라는 걸 감안하면 미 대법관의 발언은 오히려 양심적이라고 보이는군요. 어떤 범죄에도 '미리혹은 알아서 '폴리바게닝이 적용되어져 나오는 어떤 나라하고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랄까요...
Commented by 屍君 at 2007/08/14 20:33
정확하십니다. 정말 저렇게 가르칩니다:)
그나저나 정말 후덜덜..이네요 orz
Commented by 행인1 at 2007/08/15 01:00
저 불운한 죄수에게 신의 가호를....
Commented by 라피에사쥬 at 2007/08/15 09:22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서 그 영향력이 좀 약해진 이후에 저런 사례를 공개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법체계가 '완벽한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는 것은 티토가 '소련군이 폴란드 등지에서 만행을 저지르고는 있지만 유고에서도 그러진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것 만큼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7/08/16 11:02
기린아/ 사실 저런 걸 알면 당사자 '잔나비'는 피를 토할 듯.

Madian/ 과연 어엿한 조국의 관료주의자로 자라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

하이버니안/ 전관예우도 사실 공식적인 대우가 그다지 좋지 못한 상황에서 현직 시절의 부패를 억제하기 위한 후진국의 제도적 장치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좀더 formal한 보상으로 바뀌어져야겠지만요. 결국 관건은 얼마나 부작용이 없이 현행 제도를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느냐인 것 같습니다.

shaind/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들러갑니다/ 사실 우리도 사회인으로서 '내부자의 논의'를 할 때는 누구나 다 저정도 냉소적인 측면은 있다고 봅니다. 그건 그렇고 미국의 사례를 차용함으로서 어떤 국내 정치적 편을 들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다는 점도 편리하다면 편리하네요.

屍君/ 배운지 꽤 됐지만 중등교육은 여전하군요. 후덜덜덜~

행인1/ 지금쯤은 죽지 않았을까요.. 70년대 중반 이야기이므로.

라피에사쥬/ 사실 저런 발언이 새어나오면 해당 법관을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소재가 될 수 있는 게 제일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관점도 국회의원보다 대법관을 상대적으로 더 잘 보호해줘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묻는다면 이론적으로 확고하게 답하기는 힘들 듯 싶으네요.

ohnemich/ 그저 그런 잡문을 좋게 보아 주시고 칭찬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가끔 잘못된 것이 눈에 띄면 꼬집어 주시기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런 문제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매번 구체적인 사례에 대해서까지 아는 것은 역효과도 있지만, 다수결이라는 제도의 배후에 저런 일들이 있다는 정도는 민주정 하에서 살아가는 시민들로서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요즘 "나의 민주주의는 그렇지 않아"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의 민주주의는 실제의 민주정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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