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문답 (poppy)에서 트랙백
원래는 문답을 할까 했었는데 내용이 너무 길어져 버려서 그 중 한 문항만 따로 뽑아서 포스팅.
7. 종이는 저질이고 인쇄상태는 그저 그렇지만 싼 책과 좋은 종이에 훌륭한 인쇄상태의 비싼 책 중 내용이 같다면 어떤 책을 사시겠어요?이 질문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 내용의 책을 약 1년 내외의 시간차를 두고 하드커버와 페이퍼백의 두 가지 형태로 출간하는 관행이 정착된 나라들 - 예를 들면 미국 - 의 책을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국의 경우 같은 책이 두 가지 형태로 출간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니까.
그런데 이 질문에는 뭔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내용이 같다면"이란 구절이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ceteris paribus 이란 전제는, 실제로 책을 살 때 함부로 그럴 것이라고 넘겨짚어서는 안된다는 쓴 맛을 여러 본 사람에게는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인 게다.
미국의 대형 인터넷 서점인 amazon.com을 이용해
The Price of Loyalty(Ron Suskind)를 구입할 경우를 상정해 이 문제를 한번 살펴보자.
아마존 검색으로 찾은 그 책
일단 하드커버는 절판이지만 오픈마켓(marketplace)에 입점한 다른 서점들에는 꽤 싼 가격에 새책/헌책 물량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재인쇄(reprint)된 페이퍼백을 새 책으로 구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본적으로 하드커버는 페이퍼백보다 몇십 퍼센트 정도 비싸기 마련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잘 고르면 하드커버를 페이퍼백보다 더 싸게 살 수도 있다.
우리가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질문처럼 "하드커버가 좋지만 비싸서..."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이 시점에서 하드커버를 고를 수도 있을 것이다.
reprint는 예전의 페이지 구성, 즉 조판(typeset)을 그대로 두고 인쇄만 새로 한 것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보면 내용은 같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페이퍼백 판 관련 페이지를 새 창에서 연 후 두 책을 비교해 보자.
하드커버 판 정보
페이퍼백 판 정보
책의 분량이 64페이지(+17%)나 늘어났다! 어떻게 이런 식일 수 있는가?
가설 1. 페이퍼백은 실은 reprint가 아니라 2판이다
가설 2. 작은 판형으로 옮기기 위해 조판을 새로 했다
가설 3. 뭔가 페이퍼백에는 추가/삭제된 내용이 있다
위의 책 정보를 참고해서 추측을 한번 해보자.
1) 페이퍼백은 하드커버가 나온 후 8개월 후에 나왔다. 이는 본격적인 2판을 준비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하지만 출간 후 발견된 중대한 오류 등이 있어 이것만 고친 (소폭) 개정판일 수는 있어 보인다. 그러나 내용이 64p나 추가되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2) 면적이 훨씬 작은 포켓판 등을 만들다 보면 조판을 새로 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9.5 x 6.1(하드커버)를 8.3 x 5.5(페이퍼백)로 줄인 정도로 꼭 조판을 새로 해야 할까? 조판을 새로 하면 권말 색인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독자 입장에서는 책에서 따온 인용문의 페이지 번호가 바뀌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가 된다)
3) 뭔가 추가되거나 빠진 내용이 있다면 그게 뭘까? 64p는 결코 작은 양이 아니다.
책의 내용을 볼 수 없다는 온라인 서점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 서점은 스캔받은 앞뒤 표지와 책 일부를 볼 수 있는
Search Inside!™이란 메뉴를 제공한다. 이 기능을 이용해 보자.
표지 그림을 클릭하면 책 내용을 일부 볼 수 있다
Search Inside!로 찾은 하드커버 판 목차
Search Inside!로 찾은 페이퍼백 판 목차(푸른 상자 안이 추가된 것)
목차를 비교해 보면 각 장의 시작 페이지 수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내용을 갱신하거나 책의 조판을 새로 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음에 제목에 붙어 있던
reprint ed.란 말은 사실인 셈이다. 다만 페이퍼백 판에는 예상치 못했던 60페이지 분량의 후기와 참고자료가 추가되어 있을 뿐.
지금까지 설명한 이야기는 번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일단은 판(edition)이 다른지 보고, 같다면 하드커버와 페이퍼백의 페이지수만 비교하면 된다. 판이 같은데도 10 페이지 이상 차이가 난다면 뭔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처음 질문에 대한 답으로 돌아와 보면, 내 경우 크게 개의치는 않아도 가격이 비슷하다면 하드커버를 선호한다. 책을 복사해야 할 때 장점이 있고 문고본(mass-market paperback)처럼 남들이 인용한 페이지 번호가 틀린다거나 하는 경우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뜩이나 책이 많은데) 부피가 작아서 덜 짐이 된다는 이유에서 페이퍼백을 선호하는 장서가도 여러 번 만나본 적이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당장 필요한 자료가 아닌 한 1년 정도 기다려서 페이퍼백이 등장해 두 판을 비교해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다. 페이퍼백은 나중에 나오기 때문에, 이 글에서 예시한 것처럼 초판(하드커버)의 문제가 수정되거나 내용이 증보/삭제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내용이 더 들어가거나 빠진다면 단순히 제본의 차이로 책을 선택할 수는 없어진다.
물론 책이 대중적이지 않아 한 가지 판본만 나오고 만다든가, 이미 다른 것들은 절판된지 오래여서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판이 정해져 있다든가 하는 경우엔 선택의 여지가 없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