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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굴기를 보며 하상을 떠올리다.
최근 EBS에서 방영된 중국 관영 중앙텔레비전(CCTV)의 역사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國崛起)는 단번에 20년 전에 같은 방송국에서 만들었던 다큐멘터리 「하상」, 그리고 다시 20년 전에 씌여졌던 연극평론 「역사극 '해서의 파직'을 평하다」을 떠올리게 하였다.

다음은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1988년 6월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하상」에 대한 평가이다. 이 프로그램의 성격이 「대국굴기」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한번 보기 바란다.

「하상」

몇몇 지식인들이 신권위주의론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을 때 또 하나의 논쟁이 「하상」(河殤)이라는 제목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하상」은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을 통해 1988년 6월 전국에 방영되었다. 겉보기에는 관련이 없는 것 같았지만 이 두 논쟁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둘 다 관심의 초점이 중국 근대 인텔리겐치아의 가장 오래된 관심사인, 지식인의 정치적 역할에 모아져 있었다. 또한 둘 다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던 정치적 파벌투쟁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두 논쟁 모두 자본주의의 물질적 승리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덩샤오핑이 ‘사회주의 민주’의 기치를 내걸고 권좌에 오른지 겨우 10년이 지난 지금, 중국지식인의 생활에서 사회주의 관념이 얼마나 현실과 무관한 것이 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상」은 아름다운 영상과 열정적인 내레이션을 통해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전면적이고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5·4시대의 급진적인 반전통주의로부터 영감을 얻은 제작진은 전통적 가치의 악영향이 천년에 걸친 중국의 무기력과 근대적 후진성을 낳은 주요 원인이라고 암시했다. 정태적이고 파괴적인 황허는 「하상」에서 중국역사에 대한 은유였다. 중국은 사회경제 질서가 폭력적 힘에 의해 정기적으로 와해되면, 불변하는 낡은 가치체계와 부합하는 낡은 기초 위에서 질서가 재건되는 그런 역사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2천년에 걸쳐서 중국 봉건 사회가 유지해온 ‘극도의 안정’은 오히려 창조성을 억압하고 경제발전, 특히 자본주의적 발전을 저해하는 중국역사의 저주였다. 중국문화와 중국문명의 요람인 황허는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내향적인 사회 -- 오직 자기 자신과 숨 막히는 전통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는 사회 -- 의 뿌리깊은 보수성과 낙후성을 상징한다.

「하상」에서 황허의 안티테제는 힘차게 약동하는 푸른 바다로서 이는 근대의 과학·공업·민주주의의 역동적인 고향인 자본주의 서양의 외향적인 대양문화(大洋文化)의 상징이다. 1919년 ‘전반적인 서구화’를 주장했던 5·4선조(1권 2장 참조)들과 같이, 「하상」의 제작진도 중국과 중국문화에 결여된 모든 것을 서양 제국(諸國)에서 발견했다. 따라서 중국이 모방해야 할 서양의 이미지는 아주 낭만적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고 싶다 하더라도 이들은 5·4세대와 결코 같을 수 없었다. 5·4인텔리겐치아는 서양의 과학과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동시에 서양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파괴성 역시 잘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서양 여러 나라의 진보성과 반동성을 구별하기 위해 번민하고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 딜레마를 해결해주는 이론으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발견했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70년 뒤 이른바 이들의 후계자들은 근대중국사 속에서 서양이 선생이었을 뿐 아니라 억압자였다는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무시했다. 그 대신 중국에서 자행된 외국 제국주의의 오랜 착취의 역사를 활력 넘치는 ‘푸른’ 문명과 정태적인 ‘황색’ 문명 사이의 ‘문화적 충돌’로 축소시켰다.

「하상」 제작을 추진한 지식인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5·4세대의 인식을 더 이상 공유하지 않았듯이,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도 5·4세대와 달랐다. 5·4지식인들이 선진국가의 물질적·지적 업적을 흠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서양 근대문명 수용은 서양의 과학 및 민주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자본주의 경제체제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사회주의 사회가 근대 서양문화의 가장 선진적인 형태로서 조만간 출현할 것이라는 주장이 5·4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와 달리 1980년대 말의 ‘서양’은 더욱 신성하고 문제가 없는 것처럼 그려졌다. 중국에서 근대과학과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꽃피우기 위해서는 발전된 자본주의 경제의 건설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국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전망을 환영하는 듯이 보였고 덩샤오핑의 시장개혁과 공식 이데올로기(훌륭한 마르크스주의의 외피 아래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찬양하는 것) 역시 그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하상」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터의 촌평은 의미심장하다. “카를 마르크스가 오래전에 예언한 자본주의의 조종(弔鐘)은 아직도 울리지 않고 있다.”

덩샤오핑 시대 말기의 지식인, 적어도 「하상」에 표현된 관점을 공유한 사람들과 5·4인텔리겐치아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문화적인 반(反)전통주의이다. 두 경우 모두 당장의 사회적·정치적 폐단을 전통적 가치의 악영향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들의 문화적 반(反)전통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달랐다. 5·4운동 당시에는 전통이 사회적 보수주의와 관련되어 있었고, 반동적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애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혁명 이후 시대에는 중국을 짓눌렀던 짐이 전통이 아니라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이 가져온 스탈린주의 관료기구였다. 중국의 병을 ‘봉건적’ 문화의 악영향 탓으로 돌리려는 것은, 혁명 이후의 체제에 중국사회를 괴롭혀온 문제에 대한 면죄부를 주려는 일종의 사상적 술책이었다. 따라서 5·4 시대에 사회적으로 급진적이었던 문화적 반전통주의가 70년 뒤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산당 정권의 보수적인 방어수단으로 부활했다. 오늘날 중국이 안고 있는 병폐의 원천을 전통문화에서 찾는 가운데 「하상」의 제작진(이들의 후원자는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이었다)은 덩샤오핑주의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의 주요 논지 가운데 하나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즉 현재 공산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는 공산주의 혁명이 낳은 새로운 사회정치적 질서에서가 아니라 잔존하는 중국의 봉건성에서 주로 기인한다는 주장이다. 자오쯔양과 달리 공산당 정권의 고위관료들은(그들 중 상당수는 문화적으로 보수적이었다) 문화적 반전통주의의 정치적 유용성을 인식할 만큼 통찰력이 예리하지 못했다.

「하상」은 1919년을 눈에 띄게 부각시킨 반면 1949년을 무시했다. 사실 서양에 중국을 ‘개방’하려는 저우언라이·덩샤오핑·자오쯔양의 노력을 찬양한 것 말고는 중국 공산주의 혁명이나 인민공화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암암리에 마오주의 혁명은 중국의 정체적인 역사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것으로, 기껏해야 그 ‘봉건적’ 후진성을 반영하고 영속화했을 뿐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공산주의 혁명과 마찬가지로 그 혁명을 만든 사람들 역시 대부분 무시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농민은 시대에 뒤떨어진 전통과 ‘봉건적’ 사상의 사회적 전달자라고 비난받았다. 한 유명한 외국 학자는 「하상」을 이렇게 평했다. “농촌사회는 절망의 모습이 역력했다. 유일하게 인터뷰에 응한 한 농부는 슬하에 자녀를 몇이나 두었냐는 질문에 중국을 인구과잉으로 만들었다며 자책했다.”

근대 중국의 비참한 상태와 근대중국이 짊어지고 있는 역사와 전통의 모든 짐에도 불구하고 「하상」은 중국이 마침내 천년간의 ‘극도의 안정’을 깨고 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며 끝을 맺는다. 우선 이제는 분명하고 보편적인 모방의 대상인 서양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라는 유토피아가 존재했다. 이는 마지막 회에 ‘푸른색’이라는 제목 아래 상당히 매력적으로 묘사되었다. 게다가 중국에는 덩샤오핑주의 정책인 자본주의 시장개혁을 통해 이 모델을 추구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암묵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하게 추켜세웠던 것은 자오쯔양과 그의 연해 발전전략이다.

그러나 「하상」의 작가들에 따르면, 중국의 미래에 관한 가장 큰 희망은 지식인의 지혜이다. 지식인은 민주주의와 과학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중국공산당이 실행하고 있는 시장개혁계획을 올바르게 안내해줄 수 있는, 근대화를 이룩해낼 진정한 사회적 주체였다. 지식인은 역사가 중국인민에게 준 ‘유일무이한 집단’이라고 TV 내레이터는 열정적으로 말한다. “주지와 미신을 타파할 무기를 손에 쥔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들이었으며, 그들이야말로 ‘항해’문명과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과학과 민주주의라는 ‘푸른’ 단물을 우리의 황색 대지에 끌어올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상」은 지적이고 예술적인 노력의 순수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이 다큐멘터리 제작은 1987년 10월 제13차 당대회 이후 공산당의 파벌투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 지도자 자오쯔양은 「하상」의 작가들과 제작진의 중요한 정치적 후원자였다. 따라서 자오쯔양과 그의 경제정책이 이 다큐멘터리에서 칭송되고 있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자오쯔양은 「하상」의 전국방영을 보장해주기까지 했다. 1988년 6월 중순 첫 방송이 나가자 ‘원로방’과 다른 보수적 당 지도자들은 이 다큐멘터리가 ‘문화적 허무주의’를 조장한다고 비난했으며, 7월에는 당 선전부장 후치리가 더 이상 방영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자오쯔양이 직접 개입함으로써 번복되었다. 그리하여 8월 중순에 두 번째로 전국방영이 다시 허용되었고, 9월에야 당 중앙위원회는 다큐멘터리를 금지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이때에는 「하상」의 비디오테이프와 대본을 복제해서 만든 책이 이미 널리 유통되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자오쯔양이 비디오테이프 복사본을 ‘신권위주의’ 이론의 화신인 싱가포르의 독재자 리콴유(李光耀)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하상」의 방영은 학생·지식인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고취하고 나아가 1989년 민주화운동을 촉발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 덩샤오핑 정권의 지도자들이나 그 비판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이었다. 예컨대 류빈옌은 1988년의 그 다큐멘터리는(이전의 텔레비전 연속극 「신성」[新星]과 더불어) “중국사회 전체에 반향을 일으키면서 지식인이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썼다. 그리고 1989년 6월 4일의 비극 이후 공산당 지도자들은 ‘반혁명 모반’을 자극했다고 「하상」을 계속해서 비난했으며, 「하상」의 프로듀서 쑤샤오캉(蘇曉康)을 체포하려 했다. 결국 쑤샤오캉은 외국으로 망명했다.

정치의 민주적 변화를 촉진하는 것이 「하상」의 작가들의 의도였다. 한편으로 그들은 자오쯔양이 제안하는 경제적·정치적 개혁 -- 정치개혁이 아무리 제한적인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 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공산당 관료들을 우회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이를 드러내려고 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관료들은 보통 문화적으로도 보수적이었다. 따라서 근대중국의 정치생활에 스며 있는 독재적 성격을 전통 중국문화의 권위주의적 요소와 결부시킴으로써 「하상」은 대다수 공산당 지도자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그것은 ‘부르주아 자유화’라는 정치적 이단의 발로일 뿐 아니라 국가의 문화유산을 모독하는 반애국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상」이 전하는 민주주의적 메시지는 모호했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민주주의적 자질은 총서기 자오쯔양의 후원으로 인해 처음부터 손상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결국 자오쯔양은 레닌주의 정당의 지도자였으며, 덩샤오핑의 4개 주요 원칙 -- 그 중에서 공산당의 지도력이 제일 중요함 -- 을 일관되게 지지했고, 신권위주의론을 장려했다. 아울러 영화 자체도 민주주의의 미덕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서양의 부강함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상」이 가장 강력하게 전달했던 것은 지식인 이기주의적인 메시지였다. 중국의 지식인은 당연히 중국사회의 지도자이며 선진적인 서양 여러 나라의 ‘푸른 문명’을 모범으로 삼아 중국을 자본주의적으로 재건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지적·정치적 엘리트주의를 키웠던 많은 전통적 그리고 근대적 역량을 다시 강화하는 메시지였으며 대중민주주의보다는 레닌주의 및 신권위주의와 잘 어울리는 메시지였다. 서양에 대한 낭만적 환상과 중국지식인의 엘리트주의는 1989년의 위대한 민주화운동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약점이었다.

Meisner, Maurice J., Mao's China and After: A History of the People's Republic, Third Edition, Free Press
(김수영 역,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서울, 이산, 2004, pp.685-691)

이 프로그램의 진정 중요한 점은 중국 관영언론에서 이러한 다큐멘터리가 나올 때는 국가의 기존 노선을 바꾸고자 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그 뒤에 깔려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중국을 그처럼 떠들썩하게 만든 이유는 그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식적인 역사의 해석은 정치권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는 예전에 비림비공운동을 설명하면서 지적했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국굴기는 이름부터가 후진타오 노선을 상징하는 화평굴기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이 대국굴기를 미는 정치세력이 꼭 승리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상을 밀었던 자오쯔양처럼 얼마 버티지 못할 수도, 해서파관 논쟁으로 시작해 한 시대의 권력을 쥐고 흔들었지만 허무하게 끝난 4인방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by sonnet | 2007/02/23 10:02 | 정치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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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백선호 at 2007/02/23 10:38
영국 The Economist가 1월에 언급한 TV 프로그램 The Rise of Great Nations이 바로 이 대국굴기군요.

Chinese state-run television aired (twice, in November and December) an unusual documentary series called “The Rise of Great Nations”. It described, with a remarkable lack of the usual anti-Western tone, how Japan and various Western countries including America and Britain became strong. Naval power was a vital ingredient, the programmes suggested.

이 프로그램에 강한 해군력이 필수적이라고 딱 드러내서 얘기한 부분이 있나요? 저는 EBS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한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가서리...--;;;
Commented by 玄武 at 2007/02/23 10:44
백선호 // 1편과 2편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각 나라들을 소개하면서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Commented by Cato at 2007/02/23 12:43
저도 [大國崛起]를 보면서 [河傷]을 떠올렸었는데...좋은 글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海瑞罷官]에 대한 논란이 각각의 정치세력들이 팽덕회의 실각을 비판하고, 유소기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도 그렇고, [批林批孔]운동이 실은 주은래를 겨냥한 것도 그렇고 중국인들은 너무 역사를 현실정치의 입맛에 맞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좀 입맛이 쓰더군요.

뭐 鷄肋 얘기를 한 걸 두고 감히 닭갈비에 비유하다니 하고 발끈하신 어느 나라 분들보다는 지적 수준이 높은 것은 틀림 없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백선호님/

제 블로그에 감상평을 몇 개 올려 두었는데 참고가 되실지도 모르겠네요.

http://cato2006.egloos.com/870723

http://cato2006.egloos.com/875299

http://cato2006.egloos.com/882244

http://cato2006.egloos.com/886055

http://cato2006.egloos.com/890604
Commented by 리카군 at 2007/02/23 22:53
역시 어떤 세력이 자신의 사상을 밀고나가려면 역사에 베이스를 두는게 최고지요;

ps. EBS에서 대국굴기 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서 피눈물 흘렸는데...어디 자막본 돌아다니는거나 있나 보아야겠군요 orz
Commented by 라피에사쥬 at 2007/02/24 15:20
역사에 대한 인식면에서 동북아 전체가 유사한 환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드라마질로 소일하는 모국보단 저런 방향이 좀더 유익(?)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요. -_-;;
Commented by 腦香怪年 at 2007/02/25 13:12
저 하상을 뒤에서 뒷받침 배후 중의 하나가 자오즈양의 브레인이었던 옌지아치였죠.
그런 의미에서 저 대국굴기 역시 거기서 다루어지는 주제나 이를 보는 시각 등을 볼 때 고위층 의 후우너이나 특히 이데올로그나 브레인이 배후에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누군지는 모르겟지만 후 계열의 인물이 아닐 까 합니다)
참고로 요즘은 한 술 더 떠 해서파관 스토리까지 드라마로 나왔다고 하더군요. 대명왕조=-1566, 가정과 해서 라는 제목입니다(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47&article_id=0000093329&section_id=104&menu_id=104). 잼있는 건 이 드라마를 제작한 곳이 무려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산하 기업인 데 반부패와 빈부 격차 등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대략 후진타오의 균형발전론 노선이라든지 상하이 방의 대립을 생각해 볼 때 뭔가가
들어맞는 느낌이긴 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07/02/26 07:23
백선호/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이 다뤄지는 과정이 옛날 하상에서와 비슷하게 해양세력에 대한 깊은 동경을 보여주는 느낌이었습니다. 당연히 굴기에는 군사력도 필수겠지요.

Cato/ 그것은 2세계의 유서깊은 풍습이니 우리같은 3세계인이 뭐라 평할 거리는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중국이 성립하기 전의 전통 사회에서도 교양있는 글쓰기란 고전을 능란히 인용해 현재의 사건과 대비시키는 것이 필수였고, 그런 역사적 맥락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요?

리카군/ 그래도 대국굴기는 비림비공에 비하면 수준이 많이 높아져서 다행입니다. 죽은 임원수도 자신이 공자의 반열에 오른 것을 보면 감동먹지 않을까 싶은...

라피에사쥬/ 그나마 역사공부라도 좀 되니까... 썡구라 드라마보다는.

腦香怪年/ 나도 후 계열이라고 생각합니다. 화평굴기를 위한 케이스 스터디로 대국굴기...라는 느낌이고, "~~~~를 배우자!" 분위기로 대국굴기를 학습하는 장면이 자꾸 떠오릅니다. (역시 20세기의 인간은 이래서 안된다니까...)
리빈의 낙마를 언론보다 빨리 알렸던 대청국의 흠차순무께서는 좀 더 농밀한 이야기를 흘려주실 줄 알았는데 어려운지... 아쉽습니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


Commented by 하얀까마귀 at 2007/02/27 01:32
海東 六龍이 나라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하시니
Commented by sonnet at 2007/02/27 10:02
하얀까마귀/ 弓弓乙乙!
Commented by nishi at 2010/01/12 20:44
인용문의 다섯번째 문단에서 '곤산주의'라고 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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