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받은 공개질의(?) (teferi) 에서 트랙백
0. 들어가기 전에국제관계에서도 명분은 중요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2차 세계대전, 냉전, 베트남 전쟁, 유고 분쟁, 이라크전에서 밝혀진 사실이 말을 해 주고 있습니다. (teferi)
말씀해주신 내용을 곰곰히 읽어보았는데,
'명분'이라고 하신 내용은 사실
'선전선동(propaganda)'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말씀하신대로 국제관계에서도 (그리고 물론 국내정치에서도) 선전선동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열거해 주신 사례들은 그 자체로 주장하시는 내용을 반박하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는 결론을 정해놓고 자료들을 마음에 드는 쪽으로만 해석하지 않았다면 이런 이야긴 나오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지요.
1. 첫번째 예시, 2차대전2차 세계대전이 파시즘-군국주의라는 절대악과 반 파시즘이라는 절대선이 대결한 전쟁이 아니었다면 과연 미국과 영국의 국민이 전쟁을 하는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요? 소련이 단지 스탈린의 공포정치 때문에 국민들을 모질게 전쟁에 내몰 수 있었을까요? 2차 세계대전에서는 명분이 확실했기 때문에 연합국의 전 국민은 일치단결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teferi)
우선 영국과 미국은 1차대전 때 파시즘-군국주의를 상대로 하지 않았지만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군이 솜(Somme)전투에서 겪은 무시무시한 학살극은 2차대전 때의 그 어떤 전투도 따라오기 힘든 것입니다.
결국
"과연 미국과 영국의 국민이 전쟁을 하는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요?"란 의문에 대한 답은 그럴 수 있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카이저의 제국이 짜르의 제국보다 더 악랄하다고 하긴 힘들겠죠.
게다가 2차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은 스탈린의 소련과 손을 잡았지요. 단지 히틀러를 공동의 적으로 두고 있다고 해서 스탈린이
절대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즉 이미 말씀하신 '명분'이란 것은
실제로는 필요에 따라 조작되는 전형적인 '선전선동'임이 잘 드러나는 셈입니다. 미어셰이머의 책에는 미국의 경우 이와 같은 선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있기 때문에 조금 소개해 봅니다.
권력적 관점에서 행동하는 것이 자유주의적 원칙과 엇갈리는 경우, 보도담당 보좌관들(spin doctors)이 자유주의적 원칙과 합치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보자. 19세기 말엽 미국의 엘리트들은 독일을 진보주의적 헌정(憲政)국가로서 모방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은 미국과 독일의 관계악화로 말미암아 1차 세계대전 이전 약 10년 전쯤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1917년 4월 미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당시 미국은 독일을 유럽의 다른 적대국들보다 더 독재적이며 군국적인 국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1930년대 많은 미국인들은 스탈린의 살인적인 국내정책과 더불어 1939년 8월 스탈린이 나치독일과 체결한 독소 불가침 조약에 영향을 받아 소련을 악마의 국가라고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1년 말 미국이 독일제국과 전쟁에 빠져들게 되자 미국은 새로운 동맹국이 된 소련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대대적인 선전을 전개했으며 소련을 자유주의의 이상과 양립할 수 있는 나라로 인식될 수 있게 하였다. 소련은 이제 민주주의의 한 전형으로 인식되었으며, 스탈린은 “조 아저씨”(Uncle Joe)가 되었다.
John J. Mearsheimer, The Tragedy of Great Power Politics, W. W. Norton, 2001
(이춘근 역,『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 나남출판, 2004 p.78-79)
2. 두번째 예시, 베트남 전쟁반면에 베트남 전쟁에서는 결과적으로는 미국이 옳았지만, 그 명분을 알리는 것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전쟁을 버텨낼 수가 없었고 전쟁에서 행동도 베트민을 공격하지 못하고 호치민 루트도 직접 봉쇄할 수 없는 제약을 받았습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처럼 전 국민의 합의 하에 전시체제에 들어가고, 베트민과 라오스로 쳐들어갈만한 확실한 명분이 있었으면 베트남전쟁의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teferi)
베트남전은 결과적으로 당시 미국 지도부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오판이었고, 그 실패는 선전선동을 하는데 소홀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베트남전의 설계자로 악명을 떨친, 당시 미국 국방장관 맥나마라는 베트남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우리([케네디-존슨 행정부]의 사람들)는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지정학적 의도와 행동이 [미국]에 초래하는 위험을 과대평가했다... 우리는 [베트남] 정부의 정치적 능력을 전적으로 오판하고 ...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민족주의 운동을 전적으로 과소평가했다... 우리의 오판은 지역민족의 역사, 문화 그리고 정치에 대한 무지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군사적인 행동에 나서기 전에 [베트남]에의 개입에 관한 솔직한 논의에 [미국민]을 끌어들여야만 했다... 그러나 개입 후에도, 거기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무서운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Robert McNamara with Brian VanDeMark, In Retrospect: The Tragedy and Lesson of Vietnam, Random House, New York, 1995, pp. xvi, 321-322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실체를 솔직하게 미국민에게 제대로 알렸다면 빨리 포기하고 빠져나올 수 있었을텐데 끝까지 부인하며 우기다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았다는 것이 맥나마라의 결론입니다.
주어진 이러한 "명백한" 사실에 근거할 때, 나는 우리가 디엠 대통령의 암살로 들썩이던 1963년 말이나, 남베트남에서 정치적 군사적 취약성의 증대에 직면했던 1964년 말에서 1965년 초 사이에 철수할 수 있었고 철수해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왼쪽 표에 정리해 놓았듯이 철군이 정당화될 수 있는 최소한 세 번의 기회가 더 있었던 것이다.
McNamara, Ibid, pp. 320
미국이 베트남의 주변국까지 전장을 무제한으로 넓혔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 거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 이야기는 지금 이라크의 게릴라전을 조장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는 이란과 시리아에까지 쳐들어가면 이라크전에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주장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은 50만이 넘는 병력을 배치하고도 고질적인 병력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전장을 그보다 훨씬 넓혔다면 병력부족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게다가 미국은 그러한 확전이 냉전 당시 최대의 기피대상이던 강대국간의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능성은 단순한 추측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상대측으로부터 공개적인 위협이 여러 차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미국이 중국과 대전을 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미국 대통령과 미 국방부의 결정에 달렸다. 우리는 미제국주의에 그 어떤 환상도 갖지 않는다. 미제국주의가 한사코 우리에게 전쟁을 강요하려 한다면 일찍 쳐들어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들이 내일이라도 쳐들어오면 환영하겠다. 모든 반동파들이 그들과 함께 오라고 하라! 최종 승전할 자는 우리다. 우리는 미제국주의가 쳐들어오기를 16년동안 기다리느라 머리가 다 희었다. 미제국주의가 중국 대륙으로 쳐들어온다면 우리는 모든 필요한 수단을 취하여 그들과 싸워 이길 것이며 그때 전쟁에 그 무슨 한계가 있을 것인가?"
(1965년 9월 29일 중국 외교부장 천이의 내외신기자회견 중에서)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외교적 위협을 무시하고 38선을 넘었다가 대대적인 중공군의 개입으로 대패를 당한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었지요. 따라서 베트남전에서는 신중한 타협으로 나왔고 바르샤바 미-중 대사급 회담 등 다각적인 외교접촉을 통해 양국이 개전으로 확대되지 않는 베트남전 지원 수준에 대한 양해사항을 상호확인하는 절차를 가졌습니다. 이것이 주효해 베트남전이 미-중 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중국이 감히 미국에 맞서 정말로 전쟁, 특히 핵전쟁을 벌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핵전쟁의 가능성이 5%도 안된다고 생각되던 쿠바 사태 당시에도 정면 충돌은 옵션이 아니었던 것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수십 년간의 내전 끝에 피폐해진 중국을 간신히 통일한 직후, 핵무장도 못한 상태에서 미국과 전쟁에 나섰던 지도자 마오쩌둥이었던 것입니다.
3. 세번째 예시, 냉전냉전과 유고 분쟁은 그에 반해 확실한 명분이 있었기에 승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련은 악의 제국이 맞았고, 그렇기에 전 국민과 미국의 동맹국이 일치된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teferi)
...... 그런 식이라면 이 세상 모든 걸 전부 다 명분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군요.(한숨)
레이건이 냉전 말기에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비난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신냉전의 회귀는 데탕트에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서유럽 동맹국들과 미국 사이에 상당한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80년대 서유럽은 중성자탄의 서유럽 배치에 격렬히 반대해서 이를 관철시켰고, 중거리 핵무기 분야에 있어 NATO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지상발사 토마호크(GLCM)와 퍼싱2 미사일 배치에 대해서도, 소련과의 군축협상을 병행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미국과 서유럽 동맹국들의 관계를 본다면 80년대 전반의 신냉전이 동맹의 일치단결을 일궈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아, 하긴 레이건의 행동이 어떤 동맹국 지도자들에게는 가뭄 끝의 단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지 얼마 안 되어 미국의 공개적인 승인표시를 갈망하던 전두환 장군 같은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주한미군의 철수 결정으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던 한미관계가 레이건의 전두환 정부에 대한 강력한 지지와 함께 호전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의 특수한 사정이었을 뿐이고,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전반적 관계나 세계적 냉전의 흐름에서도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미국과 소련이 힘을 겨룬 냉전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가장 대결이 격렬했던 것은 194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이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가 아닙니다. 80년대에는 정상회담을 위시한 외교도 활발했고 무역도 계속 증가했으며 군축협상도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냉전의 위대한 승리자로서 떠받들어진 레이건 신화는 사실 수상쩍은 구석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4. 네번째 예시, 유고 내전유고 분쟁도 폭격으로 희생된 사람들로 인해서 비판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것은 세르비아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인종청소를 당해서 죽었을 것이라는 확실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인 것 입니다. (teferi)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던 인종청소 분쟁들, 예를 들면 르완다 학살이라든가 다르푸르 사태 등에도 그런 설명이 적용될 수 있을까요? 무정부상태에 빠진 민중들을 돕는다는 좋은 명분을 갖고 있었지만 꼬리짜르고 도망가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소말리아 개입은 또 어떻습니까?
유고 내전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유고연방이 유럽이 아니라 사하라 사막 남쪽에 있었더라면 아무도 본격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명분보다 지정학이 훨씬 결정적이었던 전쟁이었습니다.
5. 다섯번째 예시, 이라크 전쟁이라크전쟁에서 미국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도 명분과 관련된 것입니다.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 대량살상무기를 찾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이 전쟁에 협조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이유로도 이라크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나, 그 이유 자체가 미국 국민들과 다른 나라의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기 때문에 언급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teferi)
이라크 전쟁의 문제는 명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사담 후사인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지만 걸프전은 성공한 전쟁으로 추앙받고, 이라크전은 수렁에서 허우적대면서 비난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걸프전 때 제거하지 못했던 잔인한 독재자를 성공적으로 제거한 것이 바로 이라크 전쟁 아니었던가요?
그것은 전쟁을 제때 끝낼 수 있는가 하는 점과 깊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원래 전쟁이란 것은 시작하기는 쉽지만 끝내기는 쉽지 않은 법이지요.
걸프전은 전쟁의 목적을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낸다"라는 것으로 좁고 명확하게 정의해서 짧은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었지만, 이라크전은 민주화된 이라크를 만들겠다는 추상적이고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 목표를 설정했기 때문에 끝내기 힘든 것입니다.
군대는 적군을 살상하고 파괴하는 것이 본업이지 말도 잘 안통하는 이방인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쳐 나라를 세우는 것이 본업은 아닙니다. 미군은 확실히 전문적으로 훈련된 우수한 군대이지만 전적으로 부적절한 과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저렇게 곤혹스러운 상태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베트남전과 이라크전이 왜 미국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부시행정부의 국무부 정책실장이었던 리처드 하스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 민주주의는 결코 제국의 역할을 맡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미국국민들은 2차 세계대전과 같은 '불가피한 전쟁'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더라도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또한 지나치게 값비싼 비용을 요구하지 않는 한, 보스니아와 코소보 개입과 같은 '선택에 의한 전쟁' 역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불확실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끝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값비싼 '선택에 의한 전쟁'은 결코 지지받을 수 없다. 베트남 전쟁이 그랬고, 현재 이라크 전쟁 역시 그럴 조짐이 보이고 있다.
Haass, Richard N., The Opportunity: America's Moment to Alter History's Course, Public Affairs, 2005
(장성민 역, 『미국 외교정책의 대반격』, 서울, 김영사, 2005 p.33)
teferi씨는 '명분'을 선전선동해야 하는 이유를 들면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처럼 전 국민의 합의 하에 전시체제에 들어가고, 베트민과 라오스로 쳐들어갈만한 확실한 명분이 있었으면 베트남전쟁의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2차대전은 세계의 운명을 건 강대국들의 결전이라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명백했던 반면, 미국인들이 실제로 경험했듯이 베트남전은 때려치고 나온다 하더라도 본토의 미국인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끼치게 될
불가피한 전쟁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알량한 명분을 아무리 선전해 봐야 장기적으로는 먹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6. 중간정리: 그럼 우리는 선전선동 대신 무엇을 배워야 하나?자 이렇게 확실한 명분=선전선동이 승리의 첩경이라며 teferi씨가 제시했던 예들을 하나 하나 검토해 본 결과, 우리는 그 어느 것 하나 신빙성있는 근거가 되지 못함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근거로 제시된 베트남전 등은
요란한 선전으로 주입되는 소위 '명분'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우리는 남 베트남의 민중과 지도자들을 우리 자신의 경험을 잣대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들 속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그 나라의 정치세력을 완전히 오판하고 말았다.
McNamara, Ibid, pp. 320
결국
자신들이 선전했던 '명분'을 어느 새부터 진실이라고 믿어버렸던 것이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횡액을 가져다주었던 셈입니다.
또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다음은 레바논 내전에 말려들어 수백 명의 해병대원이 폭사하고 치욕적인 철수를 단행하기에 이른 사태에 대한 콜린 파월 장군의 회고입니다.
국무부 사람들이 말한 소위 '중재 병력'으로서 해병대가 베이루트 공항 근처에 배치되었다. 해석하자면 해병대는 레바논 군대와 이에 맞서 샤우프 산맥에서 시리아를 업고 싸우고 있는 시아파 군대라는 두 화약통 사이에 끼여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와인버거는 처음부터 해병대를 몰아넣는데 반대했지만 백악관의 정책 논쟁에서 맥팔레인과 슐츠 국무장관에게 지고 말았다.
나는 군대가 피를 흘리는 결과를 낳게 마련인 외국에 대한 간섭을 국무부 관료들이 '주둔', '상징', '신호', '선택의 여지 제시', '신뢰 회복' 따위의 말들로 말끔하게 표현하는 것에 강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속에 확고한 임무가 숨어 있다면 이렇게 표현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마치 진흙을 깨끗하게 보이도록 하겠다는 식으로 사용된 적이 너무 많았다.
(중략)
국방부 내 자리에서 볼 때 미국은 그저 우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말벌들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해서 천년 묵은 말벌의 소굴에 손을 집어넣은 것이다. ... 적어도 부모나 부인, 혹은 자손들이 왜 자기 가족이 죽어야 했느냐고 물을 때 그들을 쳐다보고 분명한 대답을 줄 수 있을 때까지는 인명을 담보로 삼아서는 안된다.
Colin L. Powell, My American Journey, 1995
(류진 역, 『콜린 파월 자서전』, 샘터, 2001, p.468)
진흙을 깨끗하게 보이도록 만들겠다는 말처럼 선전선동에 이용되는 대의명분을 잘 묘사하는 말도 찾기 드물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대신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성공적으로 끝난 대규모 군사작전의 사례인 걸프전을 봅시다. 걸프전 성공의 배경에는 처음엔 와인버거의 원칙(파월은 와인버거의 군사보좌관이었음), 그리고 나중에는 파월 독트린으로 더 유명해진 보수적인 즉 신중한 군사력 운용의 원칙이 있었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레이건이 재당선된 후 와인버거는 11월 28일,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했다. 나는 '언제 미국 전투 병력을 해외에서 활용할지를 고려할지'에 관해 그가 제안한 기준들을 직접 듣기 위해 동행했다.
(1) 우리[미국]나 우리[미국]의 동맹국의 중대한 이해가 위태로울 때 투입한다.
(2) 투입하게 될 경우 이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3) 뚜렷한 정치적, 군사적 목표가 있을 때에만 투입한다
(4) 전쟁이란 가만히 있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목표가 바뀌면 병력 투입에도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한다.
(5) 미국 국민과 의회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경우에만 투입한다.
(6) 최후의 방편으로서만 미국 병력을 투입한다.
간단히 말해, 국가의 이해가 위태로운 지경인가 물어서 대답이 예라면 들어가서 이기고, 그렇지 않으면 바깥에 머문다는 것이다.
Colin L. Powell, ibid, pp.412-413
한번만 살펴보면, 와인버거/파월 독트린은 결국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대의명분이나 선동성 구호, 국익에 치명타를 가할 수 없는 작은 문제들에게 휘말려들어 수렁에 빠지는 사태를 극력 피하기 위해 설계된 원칙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앞서 보았던 레바논 내전에 대한 파월의 경험, 그리고 스스로 참전했었던 베트남전에 대한 반성이 깊게 반영되어 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럴 듯한 혹은 설득력있는 명분을 내세운 선전선동술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으로 꼭 필요할 때만 쓴다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전선동술은 그보다 훨씬 많은 경우 지옥행 편도티켓으로 작용하곤 했습니다.
저는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우리가 먼저 익혀야 하는 것은 명분을 선전하는 것 보다는 누군가가 시도하는 명분을 내세운 선전선동에 쉽게 속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신중함과 건전한 회의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7. 끝으로쓰다보니 꽤 길어진 감이 있는데 나머지 이야기는 대망의 제2부
충격! sonnet 사상검증(?)편에서 하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