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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협상력
링크한 若羊師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미국측은 영국과 전쟁 수행 방침을 놓고 토론을 벌였는데 준비가 덜 된 미국에 비해 영국이 시종일관 우세를 보였고 그 결과 이탈리아 공격이 결정됐다고 합니다. 미국, 특히 육군은 프랑스 상륙을 통한 제 2전선 조기구축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측 안이 채택된데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회담 결과 웨드마이어는 이렇게 빈정거렸다는군요.

"왔노라, 들었노라, 정복당했노라.(We came, We listened and We were conquered)"


그런데 저는 이와 아주 유사한 이야기를 Kindleberger가 쓴 『대공황의 세계』(The World in Depression 1929-1939)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공황의 충격이 바닥을 찍고 있던 1933년, 세계 각국은 런던에 모여 1)관세전쟁의 휴전, 2)환율의 안정, 3)무역 장벽의 철폐 등에 대해 공조하여 이 난국을 헤쳐나가 보자는 뜻애서 세계경제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을 이끄는 루즈벨트의 민주당 행정부는 세계 경제에 관해 관심도 지식도 거의 없었으며, 세계 경제에 맞설 배짱도 없었다. 특히 영국과 협상만 하면 교활한 영국인에게 말려들어 홀랑 털리고 만다는 恐英症이 극심했다. 당시의 회고록들은 영국과 교섭하는데 망설이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우리가 영국인들과 밀담을 나눌 때면 매번 그들은 그럴 듯한 말만 늘어놓을 뿐이다." (Blum, Morgenthau Diaries),
* "문제는 우리가 영국인과 마주 앉아 한판 벌이면 판돈의 80%를 매번 그가 따 가고 나머지가 우리 차지라는 거요" (같은 책, 루즈벨트의 발언)
* (세계경제회의에 나간 미국 대표단은)"미숙하고 요령부득이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외국인들과 겨루었다." (Moley, The First New Deal)


루즈벨트는 늘 파운드화보다 더 낮은 달러화를 원했다. 달러 화의 대 파운드 환율이 3.75달러이던 4월에 대통령은 3.85 달러를 원하였다. 대 파운드 환율이 3.85달러이던 5월에는 4.00달러라면 만족하겠다고 하였다. 4.00달러를 제시받은 6월 17일에는 4.25달러를 바랬다. 파운드화가 4.50달러이던 8월에는 5.00달러를 원했다. 이 같은 과정은 끝없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이었다. (Warburg, The Long Road Home)

전 세계 금 재고의 1/3를 틀어쥔 나라가 이러니 국제합의를 통해 환율을 안정시킬 방법이 없었다.

루스벨트는 6월 17일과 7월 1일 두 개의 타협안을 거부하고는 다음과 같은 교서를 발표해 관에 못질을 했다.
이 대규모의 국제 회의가 극소수 국가들만의 통화 거래에 영향을 미칠 뿐인 ... 순전히 인위적이고 일시적인 실험용 제안에 맞장구를 쳐 주어야 한다면, 본인은 이를 세계의 비극이라고 할 만한 일대 파국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인은 그 같은 조치를 계속 고집하는 것은 당면한 전세계적 불황의 대부분의 바탕이 되고 있는 기본적인 경제적 실책이 지속되고 있는 데 대한 구실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불쾌할 따름입니다.

일부 강대국들만의 외환을 일시적으로 그리고 거의 인위적으로 안정시킬 뿐인 겉만 번지르르한 이 같은 오류에 의거해서는 세계가 진정되는 것도 잠시일 것입니다.

일국의 건전한 국내 경제 상황이야말로 일국의 통화 가격보다 국민 복지에 더욱 중차대한 요소입니다...

소위 국제적 은행가란 낡은 우상은 일국의 통화에 영속적인 구매력을 부여할 목적의 국가 통화 계획을 세우는 노력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으며 ... 미국은 우리가 가까운 장래에 획득하고자 희망하는 달러 가치만큼의 구매력 및 채무 지불 능력을 향후 한 세대에 걸쳐 유지할 종류의 달러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솔직한 목적은 각국 통화의 안정입니다. ...... 세계의 대다수 국가들이 균형 예산을 유지하고 수입 범위내에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협조적인 정책을 유지할 때, 우리는 세계의 금/은 배분의 개선 방안에 관해 적절하게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경제의 실력자 미국이 이렇게 나오자, 협상은 더 진행될 수가 없었다. 영연방 국가들은 자기들끼리 뭉쳐 파운드 블록의 독자생존을 선언하였다. 금블록도 금블록대로 뭉쳐 방어선을 쳤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혼자 국내경제를 구출하기 위한 경제실험에 돌입했다. 유럽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식이었다.
* "유럽으로서는 미국의 국내 정책에 간섭할 생각이 전혀 없으나 미국이 자국의 성공의 대가로서 유럽에 혼란을 초래하지 않는 어떤 조정 방안을 찾기를 기대하고 있다." (맥도날드, 영국)
* "유럽으로서는 검증되지 않은 이론 때문에 수백 년 동안 축적해 온 경험을 방기할 수는 없으며, 그러한 실험은 그것을 행할 만한 충분한 자원이 있는 나라에게 맡기고자 한다." (중, 이탈리아)

피에르몬트 모펫은 대통령이 7월 3일의 교서가 너무 강한 것은 아니었나 하고 궁금해 하긴 하였으나 후회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그 교서는 회의가 열릴 때마다 우리는 항상 패자가 된다고 하는 나라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인상을 불식시켜 버린 것이다." (Characters in Crisis)

즉 恐英症에 시달리던 미국 정부는 세계경제회의를 수수방관하다가 결국 영국에게 또 놀아나느니 판을 깨버리는 장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리 하여 세계 각국의 정부가 협력해 대공황을 벗어나 보자던 세계경제회의는 끝내 침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두 이야기는 1차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 경제나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지만, 그에 걸맞는 리더십이나 협상력을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by sonnet | 2007/01/09 15:22 | 정치 | 트랙백 | 덧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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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gforce at 2007/01/09 15:24
흐, 역시 괴수집단 영국=ㅅ=
Commented by 미친고양이 at 2007/01/09 15:52
오오 끌려다니기보다는 판을 깨는군요.(응?)
Commented by uriel at 2007/01/09 16:06
역시 오래된 나라들은 괜히 시간만 먹은게 아니군요.
Commented by 기린아 at 2007/01/09 16:12
그런데 이걸 보면 영국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제안을 한것 같지는 않습니다. 환율에 관해서 영국은 지속적으로 양보를 해가고 있거든요. 영국의 협상력이 어디서 드러나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미국이 협상이라는걸 할 줄 모르는 국가라는건 너무 잘 드러나지만;;;
Commented by sonnet at 2007/01/09 16:20
gforce/ 이름만 갖고도 3대를 우려 먹는...

미친고양이/ "공화국이 없는 지구는 필요가 없으니 깨버려야 합니다!"

uriel/ 영국이야 한 시대의 국제금융계를 책임졌던 나라니까요. 이때의 미국은 그렇게 놀아본 경험이 전혀 없었죠.

기린아/ 이건 그냥 당시의 어설픈 강대국 미국이 "자라보고 놀란 놈 솥뚜껑보고도 놀란다" 한겁니다.
Commented by 길 잃은 어린양 at 2007/01/09 16:23
사슬에 묶인 코끼리같군요.
Commented by marlowe at 2007/01/09 17:18
안녕하세요? 링크타고 들어왔습니다.
위 글을 보니, 이언 플레밍의 소설 [From Russia with love]에서 KGB 수뇌들이
미국을 돈만 많은 졸부로 비웃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미국이 영국의 교활함을 갖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할까요?
Commented by 윤민혁 at 2007/01/09 17:30
미국이 영국만큼 교활했다면, 세계는 조금 더 평화로웠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_-;;; (대신 다들 뜯어먹히는 줄도 모르고 살 베이고 있겠죠.) 대신 한 방 터질 땐 훨씬 심하게 터졌으려나요.
Commented by 라피에사쥬 at 2007/01/09 18:26
marlowe님// KGB 관련 건이라면 영국도 베를린에서 삽질만 하고 있던 미국 정보관을 비웃고만 있진 못했습니다. 옥스퍼드 5인 스파이 사건 당시 경고를 발령했던 몰은 여전히 그 신분이 드러나지 않고 있고 WW2 당시 울트라 프로젝트의 성과를 공개하게 된 것이 '영국 정보기관은 소련인들에게 농락만 당하는 무능한 집단인거 아니냐?'라는 여론에 등떠밀린 셈이었으니[..]
Commented by 444← at 2007/01/09 18:45
트라우마도 저 정도면 수준급이군요.....OTL 루스벨트도 루스벨트지만 유럽쪽 반응도 너무 웃깁니다(아놔 이탈리아 멋져....OTL). 뭐, 영국이야 수세기간 애들 사이에 끼어서 등쳐먹는 걸로 먹고살아온 전국구니 미국이 저랬던게 이해가 안가는건 아니지만 말이죠. 아이고 죽겠네(뒹굴뒹굴).
Commented by 措大 at 2007/01/09 19:30
그러고보면 우드로 윌슨 때에도 미국이 그다지 덕본 것은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새삼 드는군요 -_-
Commented by 리카군 at 2007/01/09 20:53
영국이 포카쳐서 '해지지 않는 나라' 타이틀을 딴게 아니라는걸 확실히 보여주는군요[저시절 미 정부가 세계 경제에 대해서는 깡통이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_-;;] 이제는 미국도 저 정도 협상력 보여줄만도 하고, 실제로도 보여준 적도 있건만 어째 카우보이 기질 탓인지 뻣대기만 하는지 원.
Commented by 행인1 at 2007/01/09 23:50
그나저나 설마 이번에도 판을 엎으려 들면...
Commented by sonnet at 2007/01/10 09:51
길 잃은 어린양/ 맞는 말씀입니다.

marlowe/ 저건 이미 70여년 전 이야기니까요. 미국도 세계를 호령한지가 오래되어 저정도는 아닙니다.

윤민혁/ 장단점이 있죠.

444←/ 어떤 의미에서는 좀 애처로울 정도죠. 그런데 한국도 미국이나 중국에게 외교무대에서 농락당하는 걸 보면 남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판을 깰 수도 없고.

措大/ 예 거의 없죠.

리카군/ 솔직히 금상폐하는 좀 예외로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행인1/ 판돈은 다 날렸는데, 지갑에서 택시비를 꺼내 다시 걸고 있지요.
Commented by 444← at 2007/01/11 19:14
그건 그렇지요....OTL 판을 깰 능력이 없다면 적절히 비위를 맞추거나 상대방의 구워삶을 줄이라도 알아야 할텐데 말입니다(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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