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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진시황
若羊師댁 현문에 걸린 강철의 대원수 일화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돌아온 생불진시황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사자성어?五二零工程紀要을 위한 해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

여느 대회와 달리 불과 닷새 만에 제10차 당대회가 폐막된 후, 죽은 린뱌오를 정치적으로 또 한번 매장하는 일은 문화대혁명 때 류사오치를 제거했던 일보다 더 어려운 문제임이 곧 드러났다 류사오치는 동란의 주요 공격목표였지만, 린뱌오는 바로 그 동란의 주요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정부당국이 린뱌오에게 붙인 긴 죄목에 그가 공자의 제자였다는 허황된 주장을 더하기로 결정하자, 그의 몰락을 둘러싼 신뢰할만한 설명을 제시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고대사 시대구분논쟁, 구체적으로 말하면 B.C. 1000년경 중국이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이행하는 시기와 성격을 둘러싸고 전개된, 외견상의 학문적 논쟁이 1972년 마오주의 역사가이자 사상가인 궈모뤄(郭沫若)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역사논쟁은 얼마 가지 않아 역사적 전환기에 공자가 했던 역할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전반적으로 일치된 견해에 따르면 유교는 근대세계에서만 반동철학인 것이 아니라 공자 자신도 그의 시대에서 반동분자였으며 ‘노예사회’에서 ‘봉건사회’로의 역사 진보적 이행을 방해하는 이론의 창시자였다. 1973년 여름, 공자와 유교를 공격하는 논문이 대중적인 신문과 잡지에 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8월에 열린 제10차 당대회 이후 2천여 년 전에 죽은 공자에 대한 비판은 겨우 2년 전에 죽은 린뱌오를 비판하는 운동과 결합되었다.

‘비림비공’(批林批孔; 린뱌오를 비판하라, 공자를 비판하라) 운동은 1년이 넘도록 관영언론과 대중생활을 지배했다. 이 이상한 운동에 관여한 사람들이 쓴 대부분의 글은 우둔한 역사적 암시와 복잡한 문학적 은유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주된 특징은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秦)의 역사적 진보성을 찬양하고 시황제와 권위적인 법가(法家) 이론을 칭송하면서도,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가(儒家)에 대해서는 죽어가는 노예 소유주 귀족의 이익을 대표하고 중국 고대의 정치적·영토적 분열을 고수하는 역사적 반동이라고 비난했다. 분서갱유를 자행한 시황제는 전통적으로 중국역사상 가장 악독한 폭군으로 간주되어왔지만, 이제는 중국의 위대한 통합자로 묘사되었다. 아무리 그의 방법이 잔인했다 하더라도 그는 역사발전의 진보적 조류에 맞추어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현대정치에 던져주는 메시지는 명백했다. 마오쩌둥은 현대의 진시황제로서(*) 객관적인 역사변화의 힘을 인식하고 이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국가의 단결, 정치적 중앙집권화, 근대적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린뱌오는 역사의 진보와는 정반대 편에 서서 정치적 파벌주의, 영토분리주의, 시대착오적인 사상과 낡은 사회관계를 조장했던 과거 유학자들의 현대적 화신(특히 친 유가적이었던 대신 여불위의 화신)이었다. 이렇게 린뱌오는 2,500년 동안 이어져온 반동적인 전통사상의 후계자로 묘사되었다. 역사적 사건을 봉인이라도 하려는 듯, 신문은 린뱌오의 집에 공자의 격언이 적힌 오래된 족자가 걸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엄숙하게 보도했다.

‘비림비공’ 운동은 사실상 린뱌오나 공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문화대혁명에 대한 일치하지 않는 평가, 그리고 문화대혁명 이후의 중국을 누가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운동은 역사서술에 모호하게 공헌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의의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마오주의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정치투쟁이 절정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축포 같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대부분 원로 혁명가, 즉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공격과 비난의 대상이었으며 지금은 저우언라이의 지도와 인도에 의존하는 노련한 관료와 간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선의 반대편에는 문화대혁명 동안 정치적 명성을 얻었고 자신들이 “갓 태어난 사회주의 산물”이라 부른 동란의 과실을 수호하려 했던 간부들이 있었다. ...... 그러나 비림비공운동의 기원과 원래 목적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 운동은 곧바로 정치적 충돌을 격화시키는 매개물이 되었다. 비록 투쟁은 역사에 대한 학문적 연구라는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두 집단은 모두 경쟁자들의 정책을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계속되는 외견상의 역사논쟁 안에서 저우언라이 개인과 그의 정책은 특히 더 크게 부각되었다. 단, 총리는 대개 B.C. 3세기의 재상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저우언라이의 지지자들은 저우언라이와 유사한 역사인물로 이사(李斯)를 꼽았다. 그들은 시황제의 충성스런 재상이었던 이사를 경제발전을 추진하고, 기술혁신을 부르짖었으며, 군사할거상태를 정리하고 법제에 따라 운영되는 중앙집권적 국가를 건설한 인물로 묘사했다. 반면에 저우언라이의 비판자들은 선동적인 유가에 반대하는 이사의 비타협적인 자세를(그는 분서갱유에 열중했다) 강조함으로써 문화대혁명 기간에 타도되었던 관료들을 복귀시키는 저우언라이의 정책을 은근히 비꼬았다. 그리고 간부들의 전면적인 복귀는 국가기관을 잠재적인 반동분자들로 채우는 짓이라고 이들은 주장했다. 역사논쟁에 포함되었던 또 다른 현실문제, 즉 교육개혁, 여성의 사회적 지위, 외국기술의 도입 같은 문제들도 비슷하게 암시적인(그러나 종종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역사적 유비 속에서 다루어졌다. 이런 논쟁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또 그들을 위해 전개되었다. 반쯤은 잊혀진 유교를 비난하기 위해 열리는 의례화된 비판회에 참가하는 것이 전부였던 대다수 중국인민은 아마도 이 논쟁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1974년 겨울, 공자를 비판하는 문헌은 점점 더 모호하게 변해갔고 운동 전체는 망각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운동의 추진자와 참가자들은 지금까지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가 상당히 괴로웠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역사논쟁을 전개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1975년 1월 전국인민대표대회와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드러나듯이 저우언라이와 원로 간부들이 확실히 정치적으로 더 우세했다.

(*) 「'571공정'기요」에는 마오에 대항하는 린뱌오의 음모가 적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문서에서 마오는 '현대판 진시황'으로 비난받고 있다. 그러나 마오 주석은 이런 역사적 유비를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였다.
(**) 이 족자에 쓰여져 있다고 알려진 글귀가 바로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 이들 포스터에 반복적으로 극기복례가 등장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인용자 주)

Meisner, Maurice J., Mao's China and After: A History of the People's Republic, Third Edition, Free Press
(김수영 역,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서울, 이산, 2004, p.557-560)

문화대혁명의 횃불을 올린 연극평론(?) 「역사극 '해서의 파직'을 논하다」도 그랬지만, 중공에서는 당이 누군가를 역사상의 어떤 인물에 비유하느냐가 그의 정치적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역사를 기술할 힘을 가진 자가 칼자루를 쥔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 역사적 인물과 비교된다는 것은 특히 위험한 징조다. 딸랑이들이 당신을 띄워주고자 한 희귀한 경우라면 그들은 혹시라도 당신의 역린을 건드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사전에 모종의 교감을 가지려고 했을 것이다. 즉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역사적 인물과 비교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역사적 인물이 누구이든 관계없이 이미 과녁으로 찍혔다는 말과 비슷하다.

江의 퇴임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상하이방에 떨어지는 유탄을 보면서 옛 우한과 펑전의 고사를 떠올리고 있는 사람은 나 뿐만은 아닐 것 같다.
by sonnet | 2006/10/08 18:26 | 정치 | 트랙백(1)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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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a quarantine.. at 2007/02/23 10:04

제목 : 대국굴기를 보며 하상을 떠올리다.
최근 EBS에서 방영된 중국 관영 중앙텔레비전(CCTV)의 역사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國崛起)는 단번에 20년 전에 같은 방송국에서 만들었던 다큐멘터리 「하상」, 그리고 다시 20년 전에 씌여졌던 연극평론 「역사극 '해서의 파직'을 평하다」을 떠올리게 하였다. 다음은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1988년 6월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하상」에 대한 평가이다. 이 프로그램의 성격이 「대국굴기」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한번 보기 바란다.......more

Linked at a quarantine sta.. at 2007/11/23 15:04

... 실하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중국을 그처럼 떠들썩하게 만든 이유는 그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식적인 역사의 해석은 정치권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는 예전에 비림비공운동을 설명하면서 지적했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국굴기는 이름부터가 후진타오 노선을 상징하는 화평굴기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이 대국 ... more

Commented by 계란소년 at 2006/10/08 18:47
찍힌다라...확실히 그렇군요.
Commented by 愚公 at 2006/10/08 18:48
마오가 젊어서는 수호지의 송강이라고 자칭했는데 대약진 운동시기쯤부터는 진시황을 자칭했죠. 장칭은 무려 측천무후;;
Commented by 길잃은 어린양 at 2006/10/08 21:26
국내에서도 가끔 비슷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죠. 좀 유치찬란해서 낮뜨겁긴 하지만...
Commented by 기불이 at 2006/10/08 23:32
1984 의 세계가 실존했었군요. 국가주의는 정말 무섭습니다.
Commented by 라피에사쥬 at 2006/10/09 21:58
세월이 지나면 그 자신이 타인의 역사적 인물이 될 수 있을까요..
Commented by sonnet at 2006/10/09 22:53
계란소년/ 그 다음은 고깔모자를 쓰고 소귀신 뱀귀신 놀이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愚公/ 사실 수호지 캐릭터 논쟁도 있습니다...

길잃은 어린양/ 짝퉁과 진퉁의 차이.

기불이/ 마오란 인물은 또 어떤 면에서는 반 국가/반 관료주의의 화신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세운 나라의 관료조직을 대중을 동원해 공격한다는 기괴한 행동을 하니 모순 투성이지요.

라피에사쥬/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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